알랜 부루크는 2차대전때 영국 합참의장겸 전(全)영국군 사령관으로서 윈스턴 처칠 수상의 전시내각 수석 군사자문역을 맡았다. 그는 2차대전 기간 미국 및 소련연합국들과 연합전선을 매끄럽게 이끌어 오면서 다국적 연합군의 단결을 촉진하고 전투목표와 목적들을 수립할때 능동적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2차대전 초기 부루크는 많은 전공을 세워 추축국 군대의 전진을 저지하고 전쟁 종반전 독일군을 패배시킬 때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인도 포병부대를 지휘했던 알랜 부르크
알랜부루크란 애칭으로 불린 그는 1883년 7월 23일 프랑스 바니에르-드-비고르에서 아일랜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부루크는 울위치 영국왕립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전 프랑스와 아일랜드에서 초중등학교 교육을 받았다.
그는 1902년 육군사관학교 졸업과 동시 포병장교로 임관되었다. 부루크는 1차대전때인 1914년 프랑스에 주두하기전 아일랜드와 인도에서 근무했다. 그는 1차대전때 카나다와 인도 포병부대를 지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도는 영국식민지였고 카나다는 영연방내 자치령이었기 때문에 영국장교가 부대 지휘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부루크는 전투중 용맹성에 대해 여러차례 무공훈장을 받았고 영국의 공격부대를 후방에서 단계적으로 지원하는 포병지원 사격술을 창안, 격찬을 받기도 했다. 1차대전 종전후 그는 참모와 지휘보직을 번갈아 순회하면서 포병학교 교장과 전쟁성의 군사훈련 총책을 담당했다.
던커크 전투에서의 활약
1, 2차대전동안 그는 참모역할에서 뛰어난 업적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가 군사훈련 책임을 맡았던 때는 1936년-37년사이였다. 부루크는 2차대전때인 1939년 프랑스에서 제 2군 사령관으로서 일선부대 지휘를 했다. 그는 <던커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압도돼 전세가 불리해지자 1940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영국원정군의 대규모 철수작전을 성공시켰다. 이때 그는 훌륭한 전략전술을 발휘해 상부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던커크는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로서 지금은 인구 7만의 전자및 조선과 각종제조업도시로 발전했다. 독일군은 기갑부대를 한군데로 총 집중하면서 전격전을 한데 반해 프랑스와 영국군은 기갑사단들을 광범한 전선에 전개함으로써 던커크전투에서 대패했다. 영국은 모든 수단방법을 총동원, 30만명의 연합군을 철수시켰다. 쌍방의 희생은 컸고 얼마후 프랑스는 독일군의 나치점령하에 들어갔다.
이때 영국군은 방위선을 고수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싸웠다. 영국은 사용가능한 모든 선박들을 전투장병들의 집단 철수작전에 총동원했다. 6월 4일 22만명의 영국군과 11만 명의 프랑스군이 영국으로 철수했다. 4일 아침 독일군이 던커크를 점령한후 4만명의 연합군을 포로로 잡았다. 영국군은 예상보다 더 많은 장병들을 철수시켰으나 거의 모든 중장비들을 독일군에게 빼았겼으며 대부분 장병들은 영국에 무기없이 빈손으로 귀환했다.
던커크 전투때 독일공군은 연합군 함대에 대해서 엄청난 손실을 끼쳤다. 상선 80척과 상당수의 전함들이 격침당했다. 독일군 역시 연합군 보다 더 많은 항공기를 잃었다. 독일군은 여세를 몰아 솜강(江) 전선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프랑스군은 흩어진 군부대를 재편성, 방어했으나 힘은 미치지 못했다.
6월 7일 아미앙과 해안선 사이 전선이 무너지고 그로부터 8일후 빠리는 독일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쉘부르, 셍말로, 브레스트, 셍나제르, 낭트등이 차례로 독일군에게 넘어갔다. 6월 22일 프랑스 헌팅징어 장군이 독일군과 휴전협정을 조인하고 그날부터 프랑스는 5년간 나치치하에서 사실상의 ‘점령통치’를 받았다.
부루크는 독일군에게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자 후퇴를 지연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일부러 일선부대장들을 일일이 직접 방문함으로써 부대장들에게 영불해협을 통해 연합2군 장병들을 대부분 철수시킬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연합군에게는 던커크 철수작전이 대재앙이었다.
성공적 던커크 철수작전때 부루크 예하 사단장 두사람은 바로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과 하롤드 루퍼트 알렉산더 장군이었다. 두사람은 나머지 2차대전 기간동안 높은 명성을 얻었다. 부루크는 이 두사람 부하들 보다 명성면에서 뒤떨어지지만 성공적 던커크 철수 작전 계획과 집행을 총지휘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가 훨씬 더 큰 영 향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처칠 수상은 1941년 7월 부루크가 영국으로 귀환하자 그를 본토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데 이어 그해 12월 육군 참모총장에 기용, 승진시켰다. 그는 1946년까지 이 직책에 머물렀다. 부루크는 그후 합참의장으로서 고위 장성들의 견해를 처칠 수상과 미국 합참 의장에게 충실하게 전달해 연합군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전략전술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부루크는 영명한 군지휘관으로서 광범한 명성을 얻었지만 연합군의 유럽공격작전 지휘관을 포함해서 해외의 대규모 전투지휘를 맡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했다. 이런점이 무인인 그에게 하나의 좌절로 기록됨으로써 옥에 티로 남게 되었다.
많은 후일담을 담고 있는 부루크의 '전쟁일기'
2차 대전후 그의 전쟁일기 발췌문 내용이 아이젠하워 장군을 인신공격했다고 해서 한때 말썽을 빚기도 했다. 그가 전쟁일기에서 아이젠하워 장군의 군지휘관으로서의 능력과 미국의 전략을 호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부루크는 자기의 전쟁일기에서 그의 임무는 처칠수상의 정치적 영감을 군사감각으로 전환,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썼다. 실제로 그는 극동에서 연합군의 전군사력을 항일전투에 투입하기전 유럽에서 먼저 독일을 격파해야 한다는 ‘유럽 제일주의’스로건을 최초로 만들어 실천했다.
부루크는 또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이탈리아를 먼저 해방해야 한다는 전략을 짰다. 그는 전쟁을 계속하려는 독일군의 전의를 꺾기 위해 독일에 대해서 이런 목표아래 집중폭격을 계속했다. 그의 부하들이 최초로 노르망디 상륙작전계획을 창안했다.
그가 이 상륙작전 개념을 처칠 수상에게 상신했더니 처칠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를 이 상륙작전의 최고사령관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미군의 참전병력이 영국군에 비해 압도적이었기때문에 부루크 최고사령관 아이디어는 실현되지 못했다.
부루크는 군인으로서 그 자리를 원했지만 미국에 양보하고 말았다. 이때 미국측은 참전군병력이 연합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기 아이디어는 부루크 부하들이 내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최고사령관 자리는 미국쪽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처칠과 명콤비를 이뤘던 부루크
부루크는 처칠 수상을 "내가 만난 사람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전쟁일기 가운데서 자기 보스(처칠)는 "내가 만난 사람가운데서 함께 일하기에 가장 까다로운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런 성격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정치지도자로서, 부루크는 군사 지휘관으로서, 두사람은 전쟁을 계획하고 진행하는데 있어서 절묘한 명 콤비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부루크는 스탈린을 포함해서 소련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미국측 군사지휘관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미국측 군사상대역인 조지 마셜 장군은 부루크를 가리켜 그는 자기직책에서 결심이 공고하지만 협상에서는 늘 부드럽고, 판단에서는 관용적이며 우정에서 는 항상 기쁨을 가져다 주는 호감어린 인물이라고 평했다.
부루크 전쟁일기속에는 말못할 속마음을 드러냈지만 아이젠하워와 그는 직업군인으로서 서로 존경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전후 출간한 자기 회고록에서 "부루크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날이 선듯 의견차를 서슴없이 드러내지만 이런 태도가 개인적인 우정을 손상하거나 그의 지지를 흐트러지게 하지 않은 탁월한 능력의 장군이었다"고 썼다.
처칠 수상도 부루크의 탁월한 능력에 대해서 동의하고 1944년 그를 육군원수 계급으로 승진시켰다. 2차대전때 전세계 연합국들은 하나같이 부루크의 전쟁승리에 끼친 그의 공헌을 인정했다. 폴란드와 벨지엄, 프랑스, 덴마크,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폴투갈, 에티오피아, 소련, 스웨덴등 연합국들은 부루크의 2차대전중 공헌에 대해서 존경의 뜻을 잊지않았다.
가려진 명성...
부루크는 전후 1946년 현역에서 은퇴한후 자작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그는 1963년 6월 17일 79세를 일기로 영국 위트니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루크는 그의 전략적 외교적 능력외 영국 육군 원수로서 모든 것을 조국에 다 바쳤다.
그는 후리후리하고 체육선수같은 모습에다 말쑥하게 다듬은 콧수염을 뽑내면서도 항상 군인으로서의 엄격한 자세를 흐트려 뜨리지 않았다. 부루크는 접근하기 어렵고 강철같은 의지의 소유자이면서도 근무중 늘 부하들에게는 인내와 포용력으로 대했다. 그는 근무중이 아닐때는 개방적이고 친철하며 모든 계급의 장병들에게도 접근이 쉬운 상사였다.
그의 전쟁일기 내용들은 2차대전중 중요하거나 사소한 모든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전쟁중 부루크의 예하 일선사령관들인 몽고메리와 알렉산더가 더 많은 인기와 명성을 누렸지만 전쟁정책 수립과 연합군의 단결을 이룩한 사람은 바로 부루크이기 때문에 그가 2차대전중 영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군인라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전쟁 초기 부루크는 다른 어떤 군인들 보다 전략전술 수립과 작전수행면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국의 참전병력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미국이 군사적으로 강력해지고 영국의 힘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조지 마셜과 아이젠하워 장군의 명성이 부루크의 역할을 그늘 지게 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글쓴이 : 여영무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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