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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7/01/03
 

불조공안(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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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則 德山托鉢(덕산탁발)
2007/04/20 오전 3:23 | 불조공안(화두)

第八則 德山托鉢(덕산탁발)

德山, 一日飯遲 自托鉢. 至法堂雙 雪峰 見問 : 這老漢 鐘未鳴 鼓未響托鉢向什마處去. 師便廻 峰擧似岩頭. 頭云, 大小德山未會末後句. 師聞擧 令侍者 喚岩頭至方丈問, 汝不肯老僧那? 頭遂密啓其意. 師至明日 上堂 與尋常不同. 頭到僧堂前 撫掌大笑云, 且喜得老漢 會末後句. 他後天下人不奈何. 雖然 如此 只得三年.

德山이 하루는 供養이 늦어지자 스스로 바루를 들고 本堂에 이르거늘
雪峰이 보고 묻기를 '鐘도 치지 않고 북도 울지 않았는데 바루를 들고 어디로 가십니까?' 하자
德山이 문득 돌아가거늘
雪峰이 巖頭에게 이 이야기를 하였더니
頭가 이르기를 '점잖은 德山스님이 아직 末後句를 모르는구나!' 하였다.
德山이 이를 전해 듣고는 시자로 하여금 方丈실로 암두를 불러오게 해서 묻기를 '네가 이 늙은 이를 인정치 않는단 말이냐?' 라고 따지자
頭가 그 뜻을 무어라 귓속말로 일렀다.
다음 날이 되어 德山이 上堂하여 법문을 하는데 예전과는 달랐다. 이에
頭가 僧堂 앞에 이르러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고 이르기를, '즐거운 일이다. 저 노장님이 드디어 末後句를 얻었구나! 이후로는 세상 사람들이 다시는 그를 어쩌지 못하리라! 허나 비록 그러하더라도 3년을 넘기지 못하리라.'하였다.

托鉢話에 대한 이야기 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에서 하루는 혜공(惠公)스님이 탁발화(托鉢話)를 혜암스님께 여쭈어 왔다. 師께서는 그 당시 말하되 '나는 그런 것을 말할 생각도 아예 못 낸다.' 고 하였더니, 혜공 스님은 '무엇이 그렇게 어려울 것이 있습니까? 巖頭(암두)스님의 연극으로만 보십시오.' 하였다. 師께서는 '영산회상(靈山會上)에 行이 없는 부처가 없고, 소림문하(少林門下)에 거짓말을 하는 조사(祖師)가 없다[靈山會上 豈有無行佛, 少林門下 豈有妄語祖]는 것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이니, 그 뜻[意]을 따라 나도 한 번 해 보리라.' 하고 생각하시었다. 그리하여, 삼동(三冬) 결제 동안에 남 모르게 정진을 계속하다가 갑자기 탁발화의 골자(骨子)가 부러져 나오게 되었다. 그 후에 선학원(禪學圓)에서 향곡(香谷)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때 향곡 스님이 이 탁발화 법문을 말하시므로 師께서는 그 스님에게 '어떤 것이 암두의 말후구(末後句)인가?' 라고 되물었다. 師께서 이 때 '알면 안다 하고 모르면 모른다 할 것이지, 누가 덕산.암두의 옳고 그른 것을 물었던가?' 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었다. 師自對云 이 탁발화에 대해서는 그 말후구(末後句)를 가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나에게 말후구에 대하여 묻는다면, '눈은 스스로를 보지 못하고[眼不自見], 귀는 스스로를 듣지 못한다[耳不自聞].' 라고 하겠다.

이 탁발화에 대해서는 그 말후구(末後句)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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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則 語默動靜(어묵동정)
2007/04/20 오전 3:20 | 불조공안(화두)

第七則 語默動靜(어묵동정)

옛날 용성(龍城), 만공(滿空) 두 和尙이 禪學院에서 法問答을 하시게 되었다. 용성 선사께서 만공 선사에게 여쭙기를,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여의고 한번 일러보시오.'

하니, 만공 선사는 들은 체 만 체 하였다. 그러니 용성 선사가 만공 선사에게 '양구(良久)란 말이오?'라고 물으시니, 만공 선사가 '아니오'라고 하셨다. 그러나, 사실은 양구가 분명한데 그 두 스님은 이것을 끝내 해결짓지 아니한 것이다. 그 후 이 법 去來의 내용을 전하여 들은 전강(田岡)스님은 만공 선사를 뵙고 '두 큰스님께서 서로 멱살을 쥐고 흙탕물 속에 들어간 격입니다.'라고 하니, 만공 선사께서는 '그러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 하셨다. 그때에 전강 스님이 대답하기를, '어묵동정을 여의고[離]무엇을 이르란 말입니까?' 라고 하니, 만공 선사는 '옳다[善哉], 옳다[善哉]!' 하시었다.

垂示
그러나, 위 老善知識들의 법문을 살펴볼 때, '여의고[離]라는 말이 있는데 어찌 이를 말이 없겠는가?'하는 의문이 앞선다. 이 어묵동정을 해결짓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말하지도 말고 잠자코 있지도 말며 움직이지도 말고 가만히 있지도 말라 하였으니, 사실은 몸이란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어찌 가만히 있지도 않을 수가 있겠는가? 가만히 있지도 않는 소식(消息)을 알고자 할진댄 태중(胎中)에 들어가기 전 소식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師自對云 태중에 들어가기 이전의 소식이란 무엇인가?
나보고 그 道理를 이르라 할 것 같으면 '파기 상종(破器相從)이라' 하겠다.
즉 가만히 있지도 않는 도리가 바로 파기상종임을 알아야 理로나 事로나 어묵동정을 여의는 도리를 분명하게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 도리를 이르더라도 그 근본자체(根本自體)에는 감히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또한 알아야 하는 것이다. 파기상종(破器相從)이란 깨어진 그릇은 맞추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어 게송으로 말씀하시었다.
語默動靜句
箇中誰敢着
問我動靜離卽
破器相從
어묵동정 한 마디 글귀를
이 낱 가운데 누가 감히 부딪칠 것이냐?
나에게 동정을 여의고 이르는 말을 묻는다면
곧 깨진 그릇은 서로 맞추지 못한다고 하리라.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여의고 한번 일러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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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則 琢磨明眼( 때묻은 佛字)
2007/04/20 오전 3:16 | 불조공안(화두)

第六則 琢磨明眼( 때묻은 佛字)

지금으로부터 六十여년 전 1924(2468) 갑자(甲子)년에 혜암 스님께서는 통도사(通度寺) 보광선원(普光禪院)에서 박성월(朴性月) 스님을 조실 스님으로 모시고 결제(結制)중이시었다. 어느 날 조실에 들어가시었더니 10여 명의 대중이 거기 묵묵히 앉아 있었다. 혜암스님께서는 조실 스님께 '오늘 무슨 법문이 있습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성월 스님은 '옛날 百丈(백장)스님은 영가(靈駕)를 천도(薦度)하는 의식(儀式)때에 늘 다음 게송을 일러 주라 하셨다. 즉

靈光獨耀 신령스런 광명이 홀로 빛나매
逈脫根塵 근진을 멀리 벗어났고
體露眞常 본체가 그 진상을 드러내니
不拘文字 문자에 아무 걸림이 없다.
眞性無染 참된 성품은 물들음이 없어
本自圓成 본래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졌거니,
但離妄緣 다만 망령된 인연만 여의면
卽如如佛 곧 여여한 부처니라.' 하시고,

조실 스님은 그 자리에서 '이 불(佛)자에 때가 묻었다.'
누가 불(佛) 字보다 더 뛰어난 글자를 바꾸어 놓을 수 있겠느냐?

어디 혜암 수좌가 佛字 대신 한 자를 놓아 보아라.' 하시기에 '여(如)자입니다'하였다. '아니다. 다시 놓아 보아라.' 그때 마침 공양 목탁을 치므로 미쳐 답을 못하고 물러났었다. 하루는 공양을 마치고 바루를 씻는데 갑자기 비치는 한 줄기 광명 속에서 한 글자가 떠올랐다. 혜암 스님께서는 곧 조실 스님을 찾아 뵈옵고 '그것은 [ ]자입니다.'(파설 못하여 기록 아니함) 라고 말씀드리니, 조실 스님께서 '어째 그러냐?' 하시기에 스님은 그 연유를 말씀드렸다. 그러자 조실 스님께서는 곧 인가(印可)를 내리셨다. 그 뒤 해제(解制) 법문 때에 조실 스님은 '이번 철에는 통도사(通度寺) 3백 50명이 먹은 식량의 시은(施恩)을 저 한 글자 바로 놓은 혜암 수좌가 다 갚았다'하셨다. 당시 통도사 내원(內院)에 계시던 혜월(慧月)스님은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우정 건너 오셔서 '혜암 수좌가 드디어 성취하였구나. 이런 글자는 둘이 아닌 법[不二法]을 아는 사람이라야 놓을 수 있는 것이다.'하셨다. 그때는 화두(話頭) 하나만 투득(透得)하여도 대중에게 크게 통과시키고 인가(印可)하였으며, 또 대중 스님네도 거기에 큰 관심을 일으켜 용맹 정진하기에 여념(餘念)이 없었던 것이다. 얼마 후에 혜암 스님께서는 밀양 표충사(密陽 表忠寺)에 계시던 허운성(許雲星) 스님을 만났다. 스님께서 먼저 말을 내어 '자네는 무슨 자를 놓겠는가?'하였더니, 그는 '여(如)자이다'하였다. '아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성종(性種)이 있다.' 고 師께서 말씀하시자, 그는 얼른 '[ ]'자이다. 하고,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하였다. 그리고 운성스님은 '나에게도 그러한 법문이 있다'하므로 '무슨 법문(法門)이냐?'고 혜암스님께서 물으시니, 그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자장 율사(慈藏律師)에게 보낸 게송이다.' 고 하며 다음 게송을 외웠다. 了知一切法自性無所有如是解法性卽見盧舍那 일체의 법을 분명히 요달해 알더라도 자성은 所有하는 것이 없다. 이와같은 법성을 해득하여 알면 바로 노사나를 보리라. 그리고 나서 그는 스님께 물었다. '이 게송에서 가장 중심되는 자가 어떤 자인가?' '[ ]자이다.' '어째 그런가?' '[이러이러]하기 때문이다.'하고 스님께서 소리쳤더니, 그는 '그렇다. 이렇게 힘차게 소리치는 사람이 없었다.'하였다. 師께서 말씀하시었다. '이러한 것을 보면 공부란 서로 탁마하는 데서 느는 것이다. 이 사람이 모르면 저 사람이 알고, 저 사람이 모르면 이 사람이 아는 것이니, 후래(後來) 학자들은 서로서로 탁마해 가면서 공부해야 하는 것이라'하셨다.

불(佛) 字보다 더 뛰어난 글자로 바꾸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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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則 四句偈(금강경사구게법문)
2007/04/20 오전 3:12 | 불조공안(화두)

第五則 四句偈
凡所有相皆是虛妄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
무릇 있는 相은
모두 虛妄한 것이라
만일 모든 相이 相 아닌 줄만 보게 되면
바로 如來를 볼 것이다.

누구나 이 사구게 글귀에 믿음을 낸다는 ㅡ 자체는 그저 형식에 그치는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
이 글귀엣서 오직 한 글자를 가려낼 수 있는 학인이라야 비로소 믿음을 낸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무량한 부처님 처소에서 善根을 지어 왔다'든가 '대승의 마음을 지닌 이를 위한 說法이라'든가 '最上乘의 發心을 한 이를 위한 說法이라'든가 하는 경의 말씀이 모두 이 한 글자를 가려낼 수 있는 학인을 두고 하신 것이다.
이 글자를 가리는 法은 어떠한 것인가? 이 글귀에 대한 뜻은, 한 생각이 일어나기 前을 觀하여야 가릴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입으로만 경문을 읽어 내려가는 것은 아마도 좋은 인연을 짓게 될지는 모르나 四句 가운데서 한 글자를 가려낼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이 한 글자를 가려낸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별개의 문제이리라. 이 四句偈 안에 오로지 한 글자가 있어서 四句偈를 代行하고 전체 금강경을 代身하는 것이다. 세간의 有爲의 善에 의해서도 삼도(三途)의 고통을 면하고 天上과 人間에 뛰어난 과보(果報)를 얻어 가지가지 즐거움을 누린다고 하였거늘, 하물며 最上乘의 가장 깊은 法門에 의해서라면 더 이상 말할 것이 있겠는가? 잠깐동안 이에 信心을 내더라도 이로써 이루는 功德은 어떠한 비유로도 그 小分을 이를 수 없나니라. 經에, '어떤 사람이 三千大千세계의 일곱가지 보배로 그 세계 중생들에게 보시(布施)하여 모두 만족시키고, 또 그 세계의 일체 중생들을 교화시켜 함께 四果를 얻게 하였다면 그 功德은 무량.무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도 잠깐이나마 이 법문을 듣고 바로 생각하여 얻는 그러한 功德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이 법문은 가장 존귀한 것이어서 어떤 종류의 功德도 비교조차 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經에 이르시되, 一念淨心是道場勝造恒沙七寶塔寶塔畢竟碎爲塵一念淨心成正覺 한 생각 조촐한 마음이 도량이라 恒沙 만큼의 七寶塔을 세우는 것보다 수승하도다. 보탑이야 필경에는 부서져 티끌이 되지만 한 생각 조촐한 마음은 正覺을 이룬다. 하셨으니 원컨대 수도하는 사람은 이 말씀을 굳게 信하여 잘 吟味하고, 늘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이 몸을 今生에 건지지 못하면 다시 어느 生을 기다려 건질 것인가? 만일 지금 닦지 않으면 만 劫에 도리어 어긋나겠거니와, 직금 굳세게 닦으면 닦기 어려운 行이라도 차츰차츰 어렵지 않게 되어 그 功行이 스스로 이루어지리라. 비록 맛있는 음식을 코 앞에 두고도 사람들이 굶주리며 그를 먹을 줄 몰라하고, 병들어 비록 의사를 곁에 두고도 고칠 줄을 모르나니, 그야말로 이를 '어찌할꼬, 어찌할고?' 이런 이에 대해서는 나도 또한 어찌할꼬? 더 나아가, 세간의 有爲의 일은 그 形相을 볼 수 있고 그 功을 證驗할 수 있기 때문에 한가지만 얻어도 稀有한 일이라 하여 찬탄해마지 않지마는, 우리 佛心宗의 사람들은 그 形相을 볼 수 없는 일 가운데 실로 헤아릴 수 없는 功德을 짓고 있는 것이로다.

금강경 사구게에서 가장 핵심이되는 한글자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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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則 劍山話(칼산법문)
2007/04/20 오전 3:08 | 불조공안(화두)

第三則 劍山話

先師께서 충청남도 광덕사(廣德寺)에 주석(住錫)하고 계시었는데 하루는 남루한 형색의누더기를 걸친 한 客이 저녁 늦게 祖室스님 방으로 들어오더니 三拜 드리어 禮하고는 곧 사뢰기를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일러 보라.'
'法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내일 아침에 다시 오도록하라.' 다음 날 아침 그 객승은 조실스님 방으로 와 예배를 올리고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으므로 사(師)께서 '어제 이야기를 계속하여 보라.' 하 시니, 그가 일어나서 사(師) 앞으로 바싹 다가와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앉으며 정면(正面)으로 마주 쳐다보니 이 때에 師께서도 또한 그 객승의 안면(顔面)을 한참 마주 보시고 계시는지라, 일촉즉발(一觸卽發)의 긴박(緊迫)하고 엄숙(嚴肅)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그 객승이 '스님께서 저를 보십니까?' 하고 큰소리로 여쭈었다. 師께서 그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南山燒炭(남산 소탄)이라.' 고 하시니, 그 객승은 재차 '제가 스님 부르는 소리를 들으시었습니까?' '지나갔느니라.' '저같으면 스님과 같이 그렇게 이르지 아니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를 터이냐?' ''아무것아!' 하고 부르겠습니다.' '그러면 '지나갔다'는 것과 '아무것아!' 하고 부르는 것이 같으냐 다르냐?' 하시니, 그 객승이 답하기를, '......'(이 答은 公案의 破說이 되므로 여기에 記錄 아니함)라고 분명히 活句를 일렀으므로, 선사께서는 이 객승의 견처(見處)를 더욱 점검(點檢)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고인의 劒山話 공안을 계속 문답(問答)하시게 되었다.

劒山話

投子因 疎山이 到하여 問호대 近離甚處오?
山云 : 延平이니다.
師云 : 還將得劒來마?
山云 : 將得來니다.
師 云 : 呈似老僧看하라.
山乃指面前地한대 師 便休러니 山이 便出去한대
師 至晩하야 令侍者로 請山 喫茶러 니
侍者云 : 當時去也니다.
師云 : 三十年弄馬騎今日被驢子撲 옛적에

疎山(소산)스님이 投子大同(투자대동)선사를 찾아와 예(禮)를 올리니 선사(禪師)께서 물으시기를
선사 : 어디서 왔느냐?
소산 : 연평(延平)에서 왔습니다.
선사 : 그렇다면 네가 칼[劒]은 가지고 왔는가?
소산 : 가지고 왔습니다.
선사 : 이 노승(老僧)에게 내놓아 보이라. 라고 말씀하시자 소산스님이 곧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눈 앞의 땅을 가리키었다.
이를 본 投子는 문득 쉬어 들어갔다.
그날 저녁 禪師께서는 疎山을 불러 차라도 한 잔 마시려고 시자를 보내시었다.
그러나 시자가 돌아와 여쭙는 말이 '스님, 아까 그 일이 있은 후로 그 스님은 곧장 떠났습니다.'
投子가 이에 송을 하였다.
'三十년 동안 말타기를 즐기더니,
오늘 당나귀 새끼에 채여 넘어졌도다.'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그 객승에게 물으시되 '위 고인의 공안에서 投子 禪師(투자 선사)께서 물으신데 대하여 그 학인이 아무 말 없이 다만 손가락으로 눈 앞의 땅을 가리켜 보인 道理를 일러 보아라.' 하시었다. 그 객승이 '그것은 상하(上下)를 다 가리킨 말입니다.' '그렇지가 아니하다.' '어찌하여 그렇지 않습니까?' 하니, 혜암 선사께서는 그 객승에게 '그대는 돌아가면 이 공안(公案)을 잘 의심(疑心)하여 투득(透得)하여 보도록 하라. 그대는 공부에 힘이 있어 곧 이 공안을 투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시고, 객승과의 문답을 끝내셨다. 얼마 후 그 객승은 위의 칼법문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답하는 書信을 보내왔다. 師自對云 이 객승이 일러 온 바른 답은 破說이 되니 말할 수 없으나 여기 格外(격외)로 한마디 일러 두겠노라. '喪身失命(상신실명)이라' 즉 몸을 喪하고 목숨도 잃었느니라.

投子 禪師(투자 선사)께서 물으신데 대하여 소산은 아무 말 없이 다만 손가락으로 눈 앞의 땅을 가리켜 보인 道理를 일러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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