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보사노바가 좋아요. 내 취향에 딱 맞는 거 같아! L형은 어떻게 생각해?
- 들어도 듣는 것 같지 않고, 다른 일할 때 방해도 안되고, 살랑 살랑거리는 음악이지.
연천의 재인폭포를 향해 달리며 우리는 앤 샐리가 노래하는 보사노바 곡을 듣고 있었다. 사실 L형이 표현한 보사노바의 느낌이 보사노바에 대한 세인들의 일반적인 평가인지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 ‘들어도 듣는 것 같지 않고, 다른 일할 때 방해 안되고, 살랑살랑 거린다’는 표현은 내가 보사노바란 음악장르에 보이는 호의와 정확히 일치했다. 보사노바의 ‘살랑살랑’에서 느껴지는 ‘가벼움’은 흔히 10대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벼운 유행가들에 대해서 대중음악평론가들이 지적하는 그 ‘가벼움’과도 사뭇 다른 것인데, 보사노바는 말하자면 바로 오늘처럼 차창을 활짝 열고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봄날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길,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어쩌면 최근 와서 유난히 보사노바를 들었던 건 오락가락하는 꽃샘추위 탓에 청각으로나마 봄을 먼저 느끼고 싶었던 조바심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경칩도 지났는데 귀 속의 달팽이, 너도 이제 일어날 때가 되지 않았니? (귀 속에 있는 건 달팽이관이지, 달팽이가 살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은 박민규의 『갑을고시원 체류기』를 읽어보길 바람)
이어 동두천을 지나며 L형과 나는 사람들이 보사노바처럼, 소리 내어 웃게 하지는 않더라도 들으면 미소 짓게 하는 노래를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사실 미니홈피라든가, 블로그라든가 하는 열려 있는 집들을 가끔 기웃거려보면 일년 내내 침울하고 애조 띤 곡들을 틀어 놓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된다. 가사의 의미는 깊고, 곡에서 흐르는 정조는 쓸쓸하다. 그들은 겨울엔 겨울이고, 봄이 와도 겨울이고, 여름이 와도 겨울이고, 겨울이 오면 다시 겨울이다. 더러 ‘가을파’도 있다. 그들은 슬픈 노래를 듣고, 슬퍼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성찰해보면 그들이 ‘우울한 자아’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그들이 일년 내내 겨울을 즐기고, 일년 내내 가을을 즐기는 것은 그들의 취향이니 뭐라고 얘기할 바는 아니지만 너무 오래 그곳에 머무르면 일조량이 부족한 식물처럼 어둡게 시들고 말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나는 이 땅의 사계가 좋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말 나온 김에 나의 음악 듣기에 관해 몇 걸음 더 샛길로 빠져보자면, 나는 음반을 사도 그것이 한국가요든 아메리칸 팝송이든 가사지를 보지 않고 음악을 듣는 편이다. 그 이유는 가사를 모르면 그때그때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다른 부분의 가사가 들리고, 그러면 언제나 새로운 곡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가사지를 버려두고 음악을 듣는 버릇은 사실 학창시절에 조덕배의 <꿈에>를 무척 좋아했는데, 단체여행에서 노래를 부를 일이 생겨 미리 가사를 외워 부른 뒤로는 그 노래를 잘 흥얼거리지 않게 된 이후였다. 싫증내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는 방법이 가사지 없이 노래 듣기. 그래, 나는 싫증을 잘 내는 편이다. 아니 이런 걸 싫증을 잘 낸다, 안 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난 한번 꽂히면 만사 제쳐두고 (심지어 똥오줌을 참기도 한다) 몰입하는데, 어느 순간 딱 싫증이 나면 다시는 몰입했던 대상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스개 삼아 과거 사례를 하나 들자면, 어느 날 ‘돼지바’를 먹었는데 너무 맛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을 때마다 돼지바만 먹었다, 무려 3년 동안. 그러다 어느 여름날 단 한입을 베어 먹는 순간, 싫증이 났다. 그리곤 다시는 내 돈으로 돼지바를 사먹지 않았다. 안 웃겼으면 말고. 이런! ‘후천성 샛길 증후군 환자’를 위한 내복약을 복용할 시간이다. 꼴딱.
재인폭포란 이름의 폭포가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컬쳐뉴스>의 안효원 기자를 통해서였다. 지난 설 연휴 포천을 향해 귀성길에 오르는 그에게 설 인사를 겸해서 숙제(?)를 하나 냈는데, 포천근교에서 가 볼만한 곳 베스트 5를 설 연휴 숙제로 해오시오!
나의 학창시절 방학 과제물마냥, 그는 5개 중 3개만 먼저(먼저라고 해두는 것은 늦게라도 반드시 5개를 채워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제출했는데, 베스트 오브 베스트는 앞 뒤로 산(山), 가까이 저수지(水)에, 조용한 초등학교(校)가 있는 경기도 포천군 관인면 삼율리. 다름 아닌 자신의 고향집이었고, 두 번 째는 민통선 인근의 길들, 그리고 세 번 째가 아직 자신이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장정일의 ‘강정’마냥 다들 좋다 한다는 재인폭포였다. 씨암탉에 눈이 어두운 나는 언제 시간 나면 그를 나의 로시난테에 태우고 고향마을을 찾기로 하고 (자동차 수명이 Made in Korea에선 개의 수명처럼 통상 7배를 곱한 나이와 비슷한데, 나의 로시난테는 사람으로 치자면 77살로 동키호테의 로시난테만큼이나 늙었다. 물론 동키호테에게 로시난테가 그러했듯이 나에겐 세상에 둘도 없이 늠름한 명마지), 민통선 인근 길은 지지난해 왕다방을 가는 길에 많이 느꼈으니 뒤로 넘기고, 과제물의 끝에 매달려 있는 재인(才人)이란, 마치 <왕의 남자>의 광대들을 떠올리게 하는 폭포 이름에 탁 꽂혀 버렸던 것이다. 더더구나 정부와 시민단체․환경단체가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한탄강댐이 수자원공사의 계획대로 지어지기라도 하면 폭삭 수장(水葬)될 폭포라니! 지구가 천년, 만년, 어떤 경우에는 수억 년에 걸쳐 만들어 낸 경이로운 모습을, 45억년이란 지구 역사를 하루로 환산하자면 밤 11시 59분, 그것도 45초 즈음에 등장한 인류가 0.000001초만에 수장시켜버리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어이, 앞으로 물이 많이 부족할 거라는데? 그럼, 쟤 수장시켜버려!
아직 재인폭포의 실체와 맞닥뜨리지 않았으니 일단 이쯤에서 얘기를 접고, L형과 나는 최근 각자의 일로 부산하느라고 못 만난 사이. 보고, 듣고, 겪은 일들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최근 1970년대 활동하다 사라진 밴드 [RFD: Rural Free Delivery] 리더의 애칭을 알아낸 뒤, 인터넷의 바다를 샅샅이 뒤져 그야말로 심해에서 바늘을 찾아내는 작업에 성공한 L형은 이제 어엿한 대학교수가 되어 있는 ‘프레드’와 라이센스 계약을 치르고, 그 자신도 한 장 밖에 없다는 <Lead Me Home>LP를 국제우편으로 받아 복각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똥오줌을 참을 정도는 아니지만, 최근 몇 개월간 개봉한 영화도 한 편 보지 못한 채.
한탄강을 건너 사거리의 빨간 불 앞에서 잠시 멈추자, 야릇한 이정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구석기사거리. 국사 시간에 익히 들었던 지명, 연천 전곡리.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고, 박물관이 세워지고, 구석기 축제가 열리는 마을의 거리 이름은 구석기사거리. 이정표를 골똘히 바라보자니 돌도끼, 돌칼을 들고 네거리에 빽빽하게 서 있는 구석기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이런 글귀가 나부끼고 있다. [한탄강댐 건설 중단하라].
며칠 전 9시 뉴스에서 한탄강댐 수몰 예정지에서 선사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본의 구석기유물 사기극이 떠올랐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일본에는 전기구석기 문화가 없었다. 그러던 중 일본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의 전기구석기 유물 발굴로 인해 불과 몇 년 사이 일본의 역사시대는 3만여 년에서 70만년 전까지 연대가 올라갔다. 그러나 2000년 11월 그가 발견한 유물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전 세계 사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 ‘없는 유물’도 만들어 내고 할리우드의 <내셔널 트레져>에서 보듯이 수백 년도 안 된 유물을 들고서 호들갑을 떠는 판에, 수십만 년 묵은 ‘있는 유물’도 제대로 발굴하지 않은 채 수장시켜 버린다면, 먼 훗날 우리들의 후세들은 우리들의 선택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해줄까?
연천군청에 못 미처, 오른쪽으로 난 길로 재인폭포 가는 길이 나왔다. 78번 국지도. 완연한 시골길이고, 완연한 시골길의 구멍가게다. 구멍가게의 냉장고엔 캔맥주 종류도 달랑 한 가지. 나는 캔맥주 두 개와 스낵 한 봉지를 샀다. 시원한 캔맥주를 한 모금 털어 넣자, 금새 개나리 피고, 벚꽃이 날리고, 가로수마다 연둣빛 잎눈들이 파릇파릇 아지랑이 사이로 눈을 땡그랗게 뜨는 봄날인 것만 같다. 그래, 다시 ‘음주 중 운전’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드문드문 위병소를 드나드는 장교들의 승용차를 제외하면 차 한대 지나가지 않는 한적한 길 위로 키 큰 미류나무들이 제 가지들을 마치 드레드락을 한 아프로 아메리칸처럼 중력의 반대방향으로 꼬아 올리고, 산세를 따라 암석들이 가파르게 내려다보고, 내 입에서는 정말 오래간만에 길 위의 추임새가 튀어 나온다. 햐아, 좋다, 좋아!
그러나 광대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재인폭포의 실체를 만가기도 전에 좋다, 좋아! 라는 나의 추임새는 끝이 나버렸다. 길의 앞으로 철조망이 쳐진 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재인폭포 개방 - 2006년 4월 ~ 9월’, 철 지난 플랜카드가 팔락거리고. 개구멍을 통해 쇠문을 통과해서 걸어가면 되지 않을까? 문 앞에서 이리 저리 서성거리자,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허름한 건물 채에서 두 명의 군인이 문을 열고 다가온다. 출입금지입니다.
- 재인폭포 가는 길인데, 어떻게 된 겁니까?
- 지금 안에서 군사훈련 중이라 주말에만 개방합니다.
- 여기서 가까운가요?
- 네, 50미터쯤 가서 협곡으로 내려가면 됩니다.
- 그럼 여기서 몇 분 걸리지도 않는데……. 재인폭포 보려고 정말 먼 길 왔어요. 사진만 찍고 가면 안될까요?
- 안됩니다.
계급장을 보자, 일병. 일병을 단지도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젠장, 상병 말호봉이나 병장만 되어도 다른 부대원들 눈치 같은 건 안 볼 테고, 적당히 구슬리면 들어갈 수도 있을 거리인데. 죄송하다며 깍듯이 인사를 하며 일병들은 등을 돌리고, 나는 철조망 너머 사진으로만 보았던 재인폭포를 떠올린다. 한껏 기대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뭐람. 만약 한탄강댐이 만약 들어서기라도 하면, 그리고 한탄강 일대의 자연, 역사, 문화적 유산들이 벌써 수장되었는지도 모르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한탄강댐 공원 관리공단 관계자랑 이런 대화를 주고 받겠지.
- OO 가는 길인데, 어떻게 된 겁니까?
- 한탄강댐 지으면서 수장되었어요.
- 몇 미터 아래에 있나요?
- 수면에서 20미터쯤 아래에 있는데, 물 속에 들어가 보지 않는 바에야 볼 수가 없죠.
그는 아마도 지금의 내가 출입금지 ‘철조망’을 바라보듯, 자신과 그곳을 나누는 경계인 ‘수면’을 안타깝게 쳐다볼 수밖에 없을 테지, 이미 엎질러진 물을.

*노동효는 1970년대 산 길 위의 사내. 보조석엔 L, K, J, S, P, H, R……. 뒷좌석엔 존레넌, 링고스타, 조지해리슨, 폴매카트니를 태우고 여행 중. 목적지는 가르강튀아 은하계, 팡타그뤼엘 행성, 바벨타워 36th 지점 무위당(無爲堂). [길 위에서]는 현재 마가라테아 행성의 건축가 슬라티바패스트에게 3차원으로 시공해달라고 발주를 해 둔 상태이니 완공이 될 때까지는 일단 텍스트 버전으로 산책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