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아주 작았던 안자(晏子)에게는 훤칠한 체격의 차몰이꾼이 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운전기사다. 지혜의 대명사로 존경을 받고 있는 제(齊)나라 재상 안자의 수레를 몬다는 이유로 이 남자는 꽤 폼을 잡았는가 보다. 늘 신이 나 있었고, 자랑스레 우쭐거리는 모습을 보였으니 말이다.
하루는 그 아내가 남편의 모습을 문틈 새로 바라봤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그에게 아내는 “헤어지자”고 요구했다. 이유를 묻는 남편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재상은 차분히 앉아 있는데 높은 데 걸터앉아 의기양양하게 수레를 모는 당신 모습을 보고 천박하다는 인상을 감출 수 없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일화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남편은 아내의 말을 듣고서 제 모습이 호랑이가 없는 틈을 타서 우쭐댔던 여우, 즉 호가호위(狐假虎威)의 경우에 닿아 있음을 알아차린다. 이어 그는 자신의 잘못을 다스린다. 자세가 달라진 차부(車夫)를 보고서 그 이유를 알게 된 안자가 그 점을 높이 평가해 벼슬 자리를 줬다는 게 후문이다.
정승 집에서 키우는 개가 죽으면 그날의 그 집은 문전성시다. 정승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나라의 온 벼슬아치들이 조문을 오기 때문이다. 정승이 죽으면 상황은 그 반대다. 권력자인 정승이 죽고 없으니 찾아오는 이는 거꾸로 드문 법이다.
‘정승 집 개’의 처지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그래서 많다. 안자의 차부가 독립적인 인격을 이루지 못하고 늘 재상의 권력에 기대 잘난 척을 일삼았던 경우나, ‘정승 집 개’의 권력논리를 체득한 사람들이 당대의 권력자에게 빌붙어 몸종 노릇을 하는 것은 다 마찬가지다. 허우대는 멀쩡하지만 속은 텅 빈 강정이다.
친박근혜 계열의 한나라당 이계진 의원이 화제다. ‘보스’의 뜻과는 반대로 세종시에 관한 논의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서다. 호가호위의 단물에 빠져 독자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차부와 실력자의 애완동물 처지를 벗어던졌다.
어딘가에 치우쳐 무리를 짓는 편당(偏黨)의 모습은 한국 정치의 일상적 풍경이다. 그럼에도 수도 기능을 이전한다는 중차대한 세종시 문제를 두고 파벌 수장의 견해에 파묻혀 열린 논의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친박계 의원들의 모습이 안쓰럽고 딱하다. 그들의 가슴에 달린 금배지가 아깝다. 요즘 금값도 치솟는다는데.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일본 외상 오히라와 만나 소위 ‘청구권 자금’의 규모에 대해 합의하고 양국 수뇌부에 건의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내용으로 하는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작성되었다.
이른 시일 내에 한·일협정을 마무리 짓기 위해 가장 중요한 논쟁점이었던 청구권 자금의 액수를 밀실에서 합의했던 것이다.
김종필 부장은 회담 직후 “합의한 사실은 없고 쟁점에 대해 토의를 한 사실만 있다”고 밝혔다.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이 무상 3억 달러, 유상차관 2억5000만 달러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보도했지만, 한국 정부는 최종 결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합의를 극비에 부치며 한·일회담 수석대표에게도 알리지 않는다는 내용의 훈령을 12월 1일 내려보냈다.
64년 초 야당과 학생들이 국민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밀실에서 졸속으로 처리한다는 비판을 제기하자, 정부는 동년 3월 31일 중앙청 회의실에서 11개 대학의 학생대표들에게 김종필과 오히라가 합의한 내용을 공개했다.
그러나 당시 공개된 것도 합의 내용은 없고 한국 측과 일본 측이 제시한 액수만을 담고 있었다. 미국대사관에서 박정희 정부가 한·일협정 반대운동으로 인해 붕괴할 가능성도 있다고 평가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메모 내용이 공개되었지만, 모든 내용이 공개되지 않음으로 인해 의혹이 더 커졌고, 이는 결국 6·3 사태를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2005년 1월 한국 정부는 베일에 싸여 있었던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전격 공개했다. 무상 3억 달러, 유상차관 2억 달러로 합의하고 수뇌부에 건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64년 정부가 공개할 때는 없던 것이었다.
메모의 내용이 62년 10월 17일과 11월 4, 8일에 박정희 의장이 지시한 것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관련 문서는 공개됐지만 논란이 되었던 것들은 해결되지 않았다.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근거한 한·일협정은 45년 이전 한·일 간의 협약, 개인에 대한 피해 보상, 독도 문제 등 기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지금까지도 한·일관계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더 중요한 교훈은 국가적인 대사를 투명하게 처리하지 않음으로 인해 광범위한 대중적 저항이라는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한·일협정 이후에도 남북 정상회담 과정에서의 문제로 인한 대북송금 특검, 한·미 간 쇠고기 협상 문제로 인한 2008년 촛불 시위 등은 투명성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조선 순조 24년(1824년) 6월이었다. 함경도 안변 관아에서 군관으로 일하는 김광재의 집에 사나운 호랑이가 들어왔다. 호랑이가 김광재를 물고 나가려 하자 예순이 넘은 그의 아내 조(趙)씨가 남편의 몸을 붙잡고는 놓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 대신 나를 물고 가라’며 스스로 호랑이 주둥이 앞에 몸을 던졌다. 호랑이는 남편 대신 아내를 물고 가버렸다. 함경감사가 이 같은 사실을 조정에 알렸고 예조에서는 조씨를 위해 열녀문을 세웠다.
영조 때는 호랑이 피해가 더 심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영조 10년(1734년) 여름·가을 호랑이로 인해 14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듬해 봄에도 강원 영동지방에서 40여 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영조 28년(1752년)에는 호랑이가 서울 도성 안은 물론 경복궁 뒤뜰에까지 들어왔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한국호랑이도 일제 강점기 때 대대적인 사냥이 벌어지면서 사라졌다. 1922년 경북 대덕산에서 사살된 것이 남한의 마지막 호랑이였다. 북한에서는 북부 고산지대에 남아있다고 하지만 10마리가 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호랑이는 세계적으로도 위기에 처해 있다. 호랑이의 8개 아종(亞種) 중 카스피호랑이·발리호랑이·자바호랑이는 20세기에 멸종됐다. 남중국호랑이도 83년 이후 관찰되지 않고 있다. 인도호랑이(벵골호랑이)와 인도차이나호랑이가 약 1500마리씩, 수마트라호랑이가 400~500마리 정도 남아 있을 뿐이다.
시베리아호랑이(아무르호랑이)라고 불리는 한국호랑이는 러시아의 야생에서 약 500마리, 동물원에서 400여 마리가 남아 있다고 한다. 중국의 동물원에는 900여 마리가 있지만 야생에는 20마리 정도에 불과하다.
환경부는 지난달 말 한·러 환경협력회의 때 러시아에 한국호랑이 세 마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과천 서울동물원을 비롯해 국내 동물원에도 미국·중국 등에서 들여와서 번식한 한국호랑이가 20마리 이상 있지만 대부분 사촌, 육촌 관계다. 근친교배가 거듭되면서 백내장·시력저하 같은 유전병을 가진 호랑이도 흔하다.
한때 황우석 교수가 한국호랑이 복제를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성공했다 해도 호랑이들이 똑같은 유전자만 갖고 있다면 ‘살아있는 박제’에 불과하다. 건강한 한국호랑이를 유지하려면 끊어진 생태계를 잇는 게 먼저다. 그게 힘들면 유전자를 교환할 수 있는 국제협력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1944년 8월 9일, 독일의 디트리히 폰 콜티츠(Von Choltitz) 중장은 파리 점령군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2개월 전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이 시시각각 파리로 진격하고 있는 상황. 히틀러는 그에게 거듭 “절대 파리를 온전한 채로 내줘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폰 콜티츠는 이 명령을 묵살한 끝에 8월 25일 1만7000명의 휘하 장병과 함께 연합군에 항복했다. 히틀러는 폰 콜티츠의 항복 소식에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Brennt Paris)?”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연합군의 파리 수복 과정을 영화화한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6년 작 영화 제목으로도 유명하다.
폰 콜티츠는 회고록에서 “후세에 ‘파리를 파괴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전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감지한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온전한 파리를 보게 된 것은 폰 콜티츠의 덕분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어떤 군대도 상명하복을 철칙으로 삼지 않은 적은 없다. 대한민국 군 형법 44조도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반항하거나 복종하지 아니한 자’에게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이라는 엄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몇몇 사람들은 양심에 따른 명령 불복종으로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 14일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는 6·25 당시 유엔군의 폭격 명령을 거부, 국보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김영환 장군의 추모제가 열렸다. 그는 항명을 추궁하는 상부에 해인사의 가치를 조목조목 설명해 ‘귀하와 같은 장교를 둔 건 대한민국의 행운’이라는 찬사를 얻어내기도 했다.
그 외에도 비슷한 시기 “태우는 건 하루면 족하지만 다시 세우려면 천 년도 부족하다”며 구례 화엄사를 소각령으로부터 지킨 차일혁 총경, 오대산 상원사를 태우려는 국군 장교에게 “그럼 나도 함께 태우라”고 맞선 방한암 선사의 이야기도 감동을 전한다. 물론 그 뜻을 받아들여 법당 문짝만 뜯어 태우고 떠난 이름 모를 국군 장교를 빠뜨릴 수 없다.
위화도 회군 이후 수많은 장군이 사리 사욕에 의한 하극상으로 역사를 더럽히기도 했지만, 이렇듯 숭고한 불복종의 기록은 인간이 명령대로 단순 복종하는 기계와 어떻게 다른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