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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3/30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장·KAIST 겸임교수




인간의 수명이 갈수록 늘어나면서 100살 넘게 사는 사람들이 급증하는 추세이다. 백세인(centenarian)이라 불리는 이들은 전 세계적으로 45만명에 이른다. 백세인은 미국과 일본에 가장 많다. 2008년 11월 현재 미국에는 9만6000명 이상, 일본에는 3만6000명 이상이 살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5년 11월 현재 961명으로 대부분 여자다. 남자 104명(10.8%), 여자 857명(89.2%)이다. 이는 인구 10만 명에 2.03명인 셈이다. 10만명 기준으로 백세인이 가장 많은 지역은 오키나와로 58명이다.

영국 주간지 '뉴 사이언티스트' 9월 5일자에 따르면 2위 프랑스 32명, 3위 일본 28명이다. 하와이 20명, 영국·호주·캐나다 각각 15명, 미국과 이탈리아 각각 10명이며 중국은 1.5명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상승하면서 백세인의 증가 속도도 빨라져 2030년이면 전 세계적으로 100만명이 될 전망이다. 100살 넘은 노인이 많아지면 사회적·윤리적·경제적 딜레마에 봉착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우선 장수 인구가 늘어나면 이를 보살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을뿐더러 백세인 당사자들은 각종 만성병에 시달리거나 무력한 노후 생활을 보낼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정관념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연구결과가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1998년 덴마크의 카르 크리스텐슨은 1905년에 태어난 3600명을 모두 접촉해서 꾸준히 그들의 건강을 점검하고 3분의 1가량이 독자적으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2005년에는 166명만이 살아있었지만 100세가 된 이들의 3분의 1은 완전히 자급자족할 정도였다.

2008년 '미국립과학원회보(PNAS)' 9월 9월자에 발표한 논문에서 크리스텐슨은 백세인처럼 장수하는 노인들이 모두 무기력하게 노후를 보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백세인은 건강이 완전하지 않더라도 독립적인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 대부분의 백세인이 한두 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백세인의 70% 이상은 치매를 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세인의 상당수가 건강한 여생을 보내는 것은 노인학의 핵심 연구 주제이다.

노인학에서는 장수 비결로 네 가지 요인, 곧 식사, 운동, 정신건강, 사회활동을 꼽는다. 요컨대 100세 이상 살고 싶은 사람은 생활방식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장수 원인의 70%까지 유전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세계에서 백세인의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오키나와의 연구를 통해 유전이 환경 못지않게 수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오키나와는 비교적 고립된 섬이므로 가까운 친족 사이에 짝을 짓는 경우가 많아서 서로 유전자를 공유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유전적 유사성으로 인해 오키나와 사람들이 장수할 운명을 타고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노인학 전문가들은 나이가 들면서 경제 능력과 같은 환경 요인은 영향력이 약해지지만 유전자의 힘은 커진다고 주장한다. 백세인의 게놈(유전체)에서 '장수 유전자'를 찾아낼 수 있다면 누구나 오래 살 수 있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

조호진 기자


산소를 아주 잘게 쪼개면 물에 많이, 오래 머무르며 저수지 등 정화기능 향상
모공속 노폐물 제거 효과도

공기 중에 흔한 산소라도 얼마나 작게 만드느냐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진다. 나노미터(㎚, 10억분의 1m) 크기로 줄인 산소 방울은 일반 공기방울보다 물에 오래 머무를 수 있어서 물에 녹는 양이 는다. 물에 산소가 많아지면 하천의 정화 기능이 촉진된다.

또 나노 산소 방울을 제작하는 원리로 나노 오존을 만들면 외과 수술용 장비의 살균 세척에도 쓸 수 있다. 나노 산소 방울로 목욕이나 세수를 하면 피부의 모공에 숨어 있는 노폐물도 제거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산소가 나노 과학의 힘으로 진화하고 있다.

마이크로 산소 방울이 분산되는 모습.
물속에 오래 머무르는 나노 산소방울

하천은 유입된 오염 물질을 스스로 정화하는 기능이 있다. 쓰레기를 치우지 않아도 하천 속의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이 오염 물질을 분해한다. 산소가 많을수록 박테리아의 오염 물질 분해는 촉진된다. 그렇다면 산소를 하천에 투입하면 오염 물질이 빨리 없어질 것 같지만 실제로 쉽지는 않다. 산소를 불어넣으면 공기 방울이 생기는데 부력 때문에 금방 수면 위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물놀이 튜브를 물에 집어넣으면 곧 물 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다.

한국기계연구원 신재생청정시스템 홍원석 박사팀은 공기 방울의 상승 속도를 둔화시키기 위해 나노 산소 방울을 고안했다. 공기 방울의 지름은 ㎜ 단위다. 이를 수㎛(마이크로미터·1㎛는 100만분의 1m),수백㎚(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크기로 줄이면 부피가 줄어 부력이 감소한다. 지름이 1㎜인 산소 방울 1개를 지름 1㎛인 산소 방울로 만들면 10억개로 수가 느는 효과도 있다.

홍 박사팀은 나노 산소 방울을 만들기 위해 압력을 이용했다. 압력을 높이면 물에 녹는 산소량이 많아진다. 연구진은 대형 수조에 일반 대기압의 4배가량 압력을 가해 산소를 녹였다. 이후에 갑자기 수조의 압력을 원래 대기압으로 낮추면 물에 녹아 있는 산소가 다시 기체로 환원되면서 산소 방울을 만든다. 이 산소 방울의 크기가 ㎛, 수백㎚ 수준이다. 미세한 크기의 산소 방울을 모은 다음에 필요한 하천에 투입하면 된다.

실험 결과, 나노 산소 방울은 물속에서 1분에 고작 1.2㎝ 상승하는 데 그쳤다. 마이크로, 나노 산소 방울을 물속에 집어넣으면 일반 공기 방울보다 7~10배 정도 많이 녹아 산소량이 증가한다. 홍 박사는 "댐, 저수지, 호수 같은 물이 고여 있는 지역의 정화 작업에 나노 공기 방울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며 "미국에서는 나노 공기방울을 활용해 죽은 호수를 되살렸다는 보고도 있었다"고 말했다.

의료장비 살균도 가능

물에 녹은 나노 산소로 목욕이나 세수를 하면 피부 모공 속의 노폐물 제거에도 효과적이다. 나노 산소 분자들의 크기가 매우 작아 피부의 모공까지 침투할 수 있어서 모공의 노폐물을 제거한다.

또 나노 산소 방울을 만드는 원리로 마이크로 오존 방울을 생산하면 외과 수술에도 사용할 수 있다. 오존은 산소 원자 3개가 결합한 것으로, 살균 능력이 뛰어난 물질이다. 각종 외과 수술용 메스, 내시경 등의 장비에 수백㎚ 크기의 오존 방울들이 부딪치면 세균을 없앨 수 있다. 홍 박사는 "나노 오존 방울로 수술용 장비를 세척했을 때 1분 만에 99.9%의 세균이 죽는 멸균 기능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홍 박사팀은 관련 내용을 지난 7월 특허출원했다. 홍 박사팀 외에도 서울대, 한국식품연구원과 일본 도쿄대에서 나노 산소 방울을 연구 중이며, 미국 AII사에서는 상용화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윤관의 아들 윤언이는 왜 김부식 눈 밖에 났나


아버지의 굴욕을 아들이 앙갚음
누명 쓰고 권력에서 밀려나
초막에서 좌선한 채로 쓸쓸한 죽음

고려 때 여진을 정벌한 명장 윤관(尹瓘·?~1111)이 재상으로 있을 때 예종의 명을 받아 1101년 세상을 떠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의 비문(碑文)을 짓게 됐다. 그러나 문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문재(文才)가 약했던지 비문 쓰는 일이 여의치 않았다. 이 사실을 윤관의 수하에게 전해들은 예종은 김부식(金富軾·1075년~1151)에게 비문 짓는 일을 맡겼다.

문제는 김부식이 예의상 재상이 맡았던 일을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사양하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데 있다. 글에 관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젊은 김부식은 한 번도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비문을 지은 데서 갈등이 시작된다.

윤관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윤언이(?~1149)의 학식이 출중했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해 탁월한 식견으로 인종의 총애를 받게 되는 윤언이는 자기 아버지에 대한 김부식의 무례(無禮)를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

1133년(인종 11) 어느 날 인종이 국자감(國子監)에 거둥해 김부식에게 '주역(周易)'을 강의토록 하고 윤언이에게는 질문을 맡겼다. 아버지의 굴욕을 잊지 않고 있던 윤언이는 '주역'에 능통한 터였다. '고려사'는 이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윤언이가 이모저모로 따지니 김부식이 대답하기 곤란하여 이마에 진땀을 흘렸다.'

윤언이의 이 같은 처사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격이 됐다. 2년 후인 1135년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윤언이는 토벌 책임을 맡은 김부식의 막료로 참여해 공을 세웠다. 난이 진압되자 김부식은 묘청의 난 주동자였던 정지상(鄭知常·?~1135)과 윤언이가 깊은 연계를 맺고 있다며 몰아세웠다. 윤언이는 한직으로 밀려나야 했다.

윤언이와 정지상이 신참 관리 시절부터 가까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란을 함께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런 '혐의'를 받아야 했던 이유는 윤언이나 정지상 모두 칭제건원(稱帝建元), 즉 고려 국왕을 황제로 격상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쓰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윤언이는 여기까지였고 정지상처럼 서경(西京·평양)을 천자의 땅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김부식은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 친분과 칭제건원을 근거로 삼아 윤언이가 정지상과 연계됐다고 주장해 좌천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국자감에서 윤언이에게 수모를 당한 김부식의 앙갚음이었다.

양주방어사를 거쳐 광주목사로 좌천되자 윤언이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관직에서 물러난 지 6년째 되던 해에 인종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자신의 칭제건원론은 묘청이나 정지상의 그것과 달리 국왕을 높이려는 순수한 마음에서 나왔다는 것이었다.

"우리 왕조에서도 태조, 광종 때 그러한 사실이 있었고 과거의 문건을 보면 신라와 발해도 그랬으나 대국이 일찍이 무력을 가하지 않았고 소국들도 감히 비난한 바 없었습니다." 칭제건원을 하다가 금나라 같은 강국으로부터 침공을 당할 빌미를 줄 수 있다는 현실론자들에 대한 반박이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의 권세는 막강했다. 윤언이는 훗날 정당문학이라는 고위직으로 복직됐지만 김부식에게 밀려날 때부터 벼슬살이의 의욕은 사라졌다. '주역'에 관해 저서를 남길 만큼 주역에 뛰어났지만 정작 그 책으로 망신을 준 김부식으로부터 철저한 견제의 대상이 돼야 했다. '주역'으로도 자기 삶을 꿰뚫어 볼 수 없었던 것일까?

벼슬을 버린 윤언이는 고향인 파평으로 물러나 호를 금강거사(金剛居士)라고 자칭하였다. 불교의 세계로 숨어버린 것이다. 이때 관승(貫乘)이라는 스님과 어울려 지내며 함께 불교를 공부했다. 두 사람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초막을 지은 다음 먼저 죽는 사람이 그곳에서 좌선(坐禪)하여 죽자고 약속하였다.

그후 어느날 윤언이는 소를 타고 관승을 찾아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초막에 들어가 앉아 좌선에 들어갔다. 그때 관승이 사람을 보냈다. 간접적인 작별 인사였다. 그 사람을 본 윤언이는 크게 웃으며 "스님이 약속을 어기지는 않았구나"라고 말했다. 아마도 윤언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듯하다. 관승이 사람을 보낸 것도 윤언이는 충분히 좌선을 통한 죽음을 실천한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기행 때문인지 유교적 시각의 '고려사'는 윤언이의 죽음에 대해 가혹한 평을 내리고 있다. "일국의 재상의 몸으로 국가의 교화에는 관심이 없이 허황하고 이상한 행동을 감행함으로써 우매한 속인들을 현혹시켰다." 김부식과의 잘못된 만남이 윤언이의 삶에 초래한 질곡은 그만큼 컸다.

쌍산재(雙山齋)의 철학

밖으로 나가지 않고 고향 산천에 남아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학(家學)을 연마하며 사는 삶이 그립다. 궁핍하지 않을 정도의 항산(恒産)이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가학'과 '항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는 모두 고향과 가학을 버리고 밖으로 나가면 대단한 무엇이 있는 줄 알았다. 지리산 자락의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沙圖里)에 있는 해주오씨들의 고택 쌍산재(雙山齋).

쌍산재의 오씨들은 개화가 되고, 산업화가 되었어도 밖에 나가지 않고 가학과 고택을 지키며 살았다. '밖에 나가서 취직하지 말아라'는 게 자식들에 대한 어른들의 당부였다. 집에서 글공부 하며 농사일 돌보고, 한가하게 주변 산천을 노니는 것이 선비의 삶이라는 가치관을 가져 왔기 때문이다.

쌍산재는 5000평이다. 본채 뒤의 대숲과 돌계단을 지나서 100m쯤 가면 서당(書堂)이 별도로 있다. 같은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아주 격리된 공간이다. 이 집안 사람들은 유년 시절부터 이 서당에 기거하는 조부 밑에서 글공부를 하는 게 관례였다.

한학자이면서도 벼슬은 하지 않았던 이 집안 조부는 1948년의 참혹한 살생이 이루어졌던 여순반란사건과 6·25 그리고 지리산의 빨치산을 겪으면서도 집안을 지킬 수 있었다.

빨치산이든 경찰이든 쫓겨서 이 집에 들어오면 집주인의 카리스마 때문에 추적자가 더 이상 추적을 못하고 되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평소의 적선(積善)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800석 정도의 전답이 있었던 쌍산재에는 일하는 머슴들이 많았다. 평소 수십명분의 밥을 짓는 무쇠솥에서 밥을 풀 때도 순서가 있었다. 제일 먼저 집안 어른인 조부님 밥그릇에 담을 밥을 푼다.

그 다음에는 머슴들 밥그릇을 담았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는 솥안의 밥을 모조리 섞어서 집식구들 밥을 펐다. 밥을 할 때 쌀을 위에 놓고 밑에는 보리를 놓으므로 일찍 풀수록 쌀이 많이 섞인다.

일꾼들 밥그릇에 집 식구들 밥보다 더 쌀밥이 들어가도록 배려한 것이다. 일꾼들 1년 연봉인 '새경'을 줄 때도 후하게 줬다. 관례보다 항상 10%를 더 주었다.

보릿고개에는 이자를 받지 않고 양곡을 이웃들에게 빌려주었다. '당몰 쌍산재'의 덕망은 난리가 났을 때에 그 빛을 발하였다.



상담의 법칙 중 하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거기 있어주기’(Being there and saying nothing)다. 듣기만 하는 것이 무슨 상담이 될까 싶었지만 실제로 경험해 보니 그 힘이 놀라웠다.

보스턴대 재활상담 석사과정은 학교 수업 외에도 상담기관에서 일주일에 24시간은 ‘인턴’을 해야 했다. 미국 문화도 언어도 낯선 상태에서 학생이 아닌 사회인으로 생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07년 가을학기. 나는 상사와 문제가 생겨 담당 교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상사가 다그치는 바람에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변명만 늘어놓은 꼴이 되어 마음이 잔뜩 상해 있는 터인지라 발걸음이 무거웠다.

산타클로스의 수염과 넉넉한 풍채를 가진 오르토 교수는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부담스러울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시종일관 내게 시선을 맞추었다. 조용히 온몸으로 ‘지금 내가 너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며 짧지만 강한 긍정의 대답도 돌아왔다. 마음이 편해진 나는 영어가 술술 나왔고 상사 앞에서는 못했던 말까지 다 쏟아냈다. 교수님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그저 진정한 ‘공감’이 느껴졌을 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교수님이 무언가 해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생겨서가 아니라 그저 내 마음을, 내 감정을 다 쏟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이해받았다는 기분은 내가 다시 도전해 볼 용기를 갖게 했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상대방의 어려운 마음과 형편을 듣고 있자면 왠지 몇 마디라도 해주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생긴다. 어디선가 들은 말로 위로를 해 주어야 할 의무감이 들기도 한다. “나도 그런 적이 있다”는 말이 상대방의 짐을 덜어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화상을 많이 입은 나지만 화상환자들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같은 화상을 입었어도 화상 입은 부위가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고, 치료 방법이 다르다. 어느 정도 공통점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네 인생은 각자 다르고 독특하고 유일하다. 그래서 ‘나도 겪어봐서 안다’는 말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상담을 받는 사람이 가장 필요한 것은 ‘네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귀와 ‘지금 나는 네 편이야’ 하는 마음이다.

한 수 가르쳐주고 싶은 욕심. 그보다 더 깊은 마음에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지’ 하는 얄팍한 교만함을 버리고 잠시라도 누군가에게 아무 말 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 보자. 있는 그대로 상대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장애인들에게 상처보다 용기를 주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미국 뉴욕에서, 푸르메재단 홍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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