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의 초상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출생 당시부터 서인(노론)의 격렬한 반감을 사다가 36세에 급서해 독살당했다는 설이 무성했다. 초상화에 먹물이 스며든 것은 독살설을 암시한다. 경종의 초상은 전해지는 게 없어 이복동생인 영조의 초상화와 장희빈의 외모에 관한 각종 기록을 참조해 그린 것이다. 우승우(한국화가)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⑥ 세 가지 의혹
‘목호룡 고변 사건’ 수사 과정에서 독약으로 독살하려는 소급수(小急手)가 실제 시도되었다는 자백이 나와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김창집의 친족 김성절(金盛節)이 세 차례의 형문(刑問:고문하며 묻는 것) 끝에, “장씨(張姓) 역관(譯官)이 (중국에서) 독약을 사가지고 왔는데, 김씨 성의 궁인(宮人)이 성궁(聖躬:임금)에게 시험해 썼습니다…(『경종실록』 2년 8월 26일)”라고 자백한 것이다.
이때도 역시 환관 장세상이 등장한다. 김성절은 “장세상이 수라간(水刺間)의 차지(次知: 담당자) 김 상궁(金尙宮)과 동모(同謀)했는데, 김 상궁이 많은 은화를 요구하고는 한 차례 성궁(聖躬)에게 시험해 썼으나 곧바로 토해 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성절은 “이기지(이이명의 아들)의 무리가 ‘약(藥)이 맹독이 아니니, 마땅히 다시 은화를 모아 다른 약을 사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경종실록』 2년 8월 26일)”라고 덧붙였다. 중국에서 독약을 사다가 시험해 보았으나 경종이 죽지 않자 더 강한 약을 사오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경종이 독약을 마셨다는 날짜를 『약방일기(藥房日記)』에서 찾아 보니 경종 즉위년(1720) 12월 15일 ‘어제 거의 한 되나 되는 황수(黃水)를 토했다’는 구절이 있었다. 영의정 조태구와 함께 입시한 약방제조(提調) 한배하(韓配夏)가 “그날 수라를 진어(進御)하신 뒤에 즉시 구토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경종은 “그렇다”라고 답했다. 그날의 구토가 독약이 든 음식이 든 결과였음이 확인된 셈이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을 독살하려 한 노론의 정치행위는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당시 노론 당인(黨人)들은 국왕보다 노론이 위에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은 우홍채(禹洪采)에게 “노론은 천지와 더불어 무궁한 길이 있다(老論有與天地無窮之道)”라고 말했는데 국왕은 유한해도 노론은 영원하다는 이런 자신감이 비정상적 거사를 실행에 옮기게 한 원동력인지도 몰랐다.
이상한 것은 경종의 태도였다. 당초 국청(鞫廳)에서 독약을 올렸다는 김성(金姓:김씨 성) 나인의 조사를 요청하자 당연히 허용했다가 돌연 “김성 궁인을 조사했으나 그런 인물이 없었다”면서 수사를 중지시킨 것이다.
국청에서 계속 사사를 요청하자 “나인을 조사해 밝히는 것(査出)은 원래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노론(老論)을 타도하는 계책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더욱 근거가 없으니 앞으로 이런 문자는 써서 들이지 말라(『경종실록』 2년 8월 18일)”고 거부했다. 독살 기도 사건이 노론 타도 계책으로 확대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경종실록』의 사관은 “인정(人情)이 독약을 쓴 궁녀를 찾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겼는데, 뜻밖의 비답이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의혹해 했으나 그 단서를 알지 못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숙종 43년(정유년) 북경에 갔다 온 역관 중에 장씨 성의 역관이 없자 국청에서 김성절을 다시 추궁했는데 그는 진짜 범인(元犯人)은 ‘역관 홍순택(洪舜澤)’이라고 지목했다. 지난해 이이명의 집에 갔을 때 이희지와 역관 홍순택이 뒷방에서 나누는 밀어(密語)를 들었다는 것이다.
“홍순택이 이희지에게 ‘약값이 부족해서 내가 자비(自費)로 많이 보탰다고 말하자, 이희지가 ‘일이 성사되면 그대가 자비로 낸 돈을 어찌 보상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했습니다. 제가 창문을 열고 들어가 앉으니 이희지는 즉시 말을 중지했는데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습니다.(『경종실록』 2년 8월 26일)”
김창집의 서종형제(庶從兄弟) 김창도(金昌道)의 사돈 이정식(李正植)도 “김창도가 약을 쓸 곳을 말했는데 곧 상궁(上躬:임금)을 가리켰습니다”라고 자백했고, 김창도는 “홍성(洪姓) 역관에게 약을 사서 장세상에게 들여보냈다”고 시인했다. 또한 왕세제의 처사촌 서덕수가 모두 이 흉모에 동참했다고 자백했다.
역관 홍순택은 부인했으나 그가 북경에 갈 때 데려갔던 종 업봉(業奉)은 ‘북경에서 계란만 한 황흑색(黃黑色)의 환약(丸藥) 두 덩이를 구입했다’고 자백했다. 이처럼 구체적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경종은 김성(金姓) 나인에 대한 수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삼사(三司)에서 해를 거듭 넘기면서까지 계속 요구했으나 경종은 거부했다.
그러던 경종 4년(1724) 4월 인원왕후 김씨가 이 사건을 거론하고 나섰다. 숙명공주(淑明公主)의 아들 심정보(沈廷輔)의 아내 이씨에게, “김성 궁인이 진실로 의심스럽다면 주상께서 어찌 불허하겠는가? 나 역시 어찌 분명히 조사하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궁중에 실지로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찾지 못하는 것이다(『경종실록』 4년 4월 24일)”라고 말했다.
이는 경종의 수사 중지 지시가 대비의 압력 때문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삼사는 계속 수사를 요청하고 경종은 거부하는 사이 경종은 약방(藥房:내의원)의 입진(入診)을 받게 되었다. 경종 4년 8월 초부터 한열(寒熱)에 시달렸고, 설사 기운이 동반되었다. 한열 때문에 수라를 거의 들지 못하는 가운데 시령탕(柴<82D3>湯), 육군자탕(六君子湯) 등 여러 처방이 올려졌으나 환후가 허하고 피로가 중첩되었다.
그러던 8월 20일 문제의 사건이 발생한다. 그날 밤 경종은 가슴과 배가 조이는 듯 아파서 의관을 불러 입진했다. 그런데 그날 밤의 흉통(胸痛)과 복통(腹痛)이 그날 낮에 있었던 의문의 사건 때문임이 드러났다.
“여러 의원들이 어제 게장(蟹醬)을 진어하고 곧이어 생감(生<67FF>)을 진어한 것은 의가(醫家)에서 매우 꺼리는 것이라 하여 두시탕(豆<8C49>湯) 및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진어하도록 청했다.(『경종실록』 4년 8월 21일)”
의가에서 금기로 치는 게장과 생감을 와병 중인 임금에게 진어했다는 것이다. 훗날 영조 31년(1755)의 나주벽서 사건 때 신치운(申致雲)이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경종 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따지자 영조가 분통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게장과 생감을 보낸 인물이 대비 인원왕후이고 이를 진어한 인물이 세제(영조)라는 주장이었다. 경종이 게장 덕분에 평소보다 많은 식사를 했는데 다시 생감을 올리려고 하자 어의들이 서로 상극이라며 반대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올렸다는 것이다. 바로 그날 밤부터 경종의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어의들은 게장과 생감이 원인이라며 두시탕(豆<8C49>湯)과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처방했으나 복통과 설사는 더욱 심해졌고 22일에는 황금탕(黃芩湯)을 올렸으나 역시 효과가 없었다. 24일에도 세제는 처방을 두고 어의 이공윤(李公胤)과 다투었다.
『경종실록』은 이공윤에 대해 “그의 의술은 대체로 준리(峻利:강한 처방)를 위주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다. 8월 24일 세제가 “인삼(人蔘)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라”고 명하자 이공윤이 “내가 진어한 약을 복용하신 후 삼다(蔘茶)를 진어하면 기를 운행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라고 반대했다. ‘기를 운행하지 못한다’는 말은 죽는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세제가 이공윤을 꾸짖었다.
“사람이 본래 자기 견해를 세울 곳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이 어떤 때인데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려고 삼제(參劑)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인가.(『경종실록』 4년 8월 24일)”
어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제는 인삼과 부자를 올렸고 경종은 눈동자가 조금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지는 등 증상이 개선되는 듯하다가 다시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그날 새벽 3시쯤 창경궁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하고 말았다. 재위 4년2개월, 만 36세의 한창 나이였다.
대비가 옹호한 김성 궁인의 독약 사건, 대비전에서 올렸다는 게장과 생감, 어의와 다투어가며 올린 인삼과 부자, 이 세 사건은 모두 경종의 죽음과 일련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대비와 연잉군이 경종을 살리기 위해 게장·생감·인삼·부자를 올렸는지, 아니면 죽이려고 올렸는지는 그들만이 알겠지만 어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어한 것은 의혹을 살 수밖에 없었다.
경종이 사망한 후 약방도제조 이광좌는 “신이 어리석고 혼미하며 증세와 환후에 어두워서 약물을 쓰는 데 합당함을 잃은 것이 많았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울며 자책했다.
그러나 세제의 태도는 달랐다. “병환을 시중드는데 무상(無狀)하여 이 지경에 달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기도는 비록 때가 지났으나 속히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국왕이 위독하면 산천에 기도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때까지 기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위독한 상태가 아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갑자기 증세가 악화되어 산천에 기도할 틈도 없이 사망한 것이었다. 이렇게 경종의 시대가 끝나고 영조의 시대가 열렸지만 경종 시대의 유산이 계속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미래에 성공할지를 미리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별자리 운세를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헤매지 말라. 대신 손가락을 유심히 봐라. 그리고 그 길이를 다른 손가락과 비교해 보아라. 그러면 거기에서 성공여부를 알 수 있다. 과학적 연구결과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서로의 손가락을 비교해 보는 것이 유행이다. 이는 최근에 언론 매체들을 통해 알려진 손가락에 관한 생물학적 연구 발표 때문이다. 비밀은 바로 2번째 손가락 검지(檢指)와 4번째 손가락 약지(藥指)에 있다.
검지와 약지에서 미래를 점친다?
역사기록으로 볼 때 손가락에 링을 끼워 결혼의 상징으로 여기게 된 것은 기원전 2800년 고대 이집트의 한 왕조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 와 같은 결혼반지의 문화가 있다.
결혼 반지는 대체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다. 반만년을 내려온 우연일까? 최근 이 네 번째 손가락이 남녀 모두에 성 호르몬 수치의 정도를 보여 준다는 연구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방법은 간단 하다. 오른 손을 펴고 검지와 약지를 비교 해 본다. 문제는 바로 이 두 손가락의 길이에 있다. 남자의 경우 약지가 검지보다 길면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풍부하여 성적인 매력과 능력이 좋다고 한다.
또한 평균적으로 약지가 긴 남자가 건강하고 많은 정자를 가지고 있어 좋은 아빠가 될 육체적 유전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약지에 결혼반지를 끼는 이유
여자의 경우는 그 반대이다. 약지가 검지 보다 짧은 여자가 에스트로겐, 프로락틴등의 여성 호르몬 수치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것은 앞서 설명했던 미국 리버풀 대학 생물학 연구팀에서 그 지역의 2살부터 25세 까지 남녀 각각 400명씩 800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다. 대부분의 남자는 약지가 검지보다 길었고. 대부분의 여자는 약지가 검지 보다 짧았다.
이 조사를 통해 연구팀은 네 번째 손가락의 길이와 남성과 여성의 다양한 성 호르몬 수치가 관계가 있음을 알아 냈다. 이 관계성의 열쇠는 DNA의 기능에 있었다.
1984년 생물학자들은 초파리에서 호메오박스 homeobox(초파리의 호미오틱 유전자 사이에 존재 하는 염기 배열. 사람에게도 같은 배열이 확인 되었음) 유전자를 찾아 냈다. 생물학자들은 초파리 연구에서 이 호메오박스가 하나의 세포에서 초파리의 머리와 몸통, 다리, 날개로 변해 가는 것을 관장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호메오박스 유전자의 한쪽 DNA는 초파리의 머리부터 몸통의 윗부분까지 만들어지는 것을 관장하고 또 다른 한쪽의 DNA는 몸통 아래 부분부터 몸통 끝부분을 관장 한다. 즉 이 유전자의 배열은 초파리의 몸의 배열과 똑 같이 짜여있다.
아직도 이 유전자에 대한 연구는 계속 되는 중이지만, 초파리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모든 기관이 만들어 지는 것에 이 호메오박스가 관계 한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과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이 유전자는 인간의 몸 안에서도 똑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메오박스의 한 부분은 우리의 손과 생식기관이 만들어지는 것을 관장 한다. 특히 손가락과 성기 부분 형성에 관여한다.
약지의 길이는 남성 호르몬의 상징
5천년 전 네 번째 손가락에 링을 끼워 결혼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이 결코 우연이거나 터무니 없는 일이 아니었다. 800명을 조사한 연구를 통해 생물학자들은 이러한 관계성은 2세 이전에 이미 확정이 되며 임신 몇 달 후 세포들이 만들어 지는 과정에서 이미 결정 되었을 것으로 과학자들은 판단하고 있다.
약지와 검지에 대한 연구는 비단 리버풀 대학에서만 진행된 것이 아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팀도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스포츠 감각능력에서 학업능력, 섹스의 성향에서부터 질병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비밀이 반지를 끼는 약지(ring finger)와 집게 손가락인 검지의 길이 차이에서 나온다”고 전했다.
우선 약지가 긴 것은 좋은 징조다. 성공적인 미래를 기약한다. 연구팀은 우선 잘 나가는 비즈니스맨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약지가 긴 사람이 비교적 짧은 사람보다 무려 6배나 돈을 잘 버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약지가 길면 돈 많이 벌어”
이 연구팀은 사람마다 약지의 길이를 20개 등급으로 나누어 비교해 성공여부를 조사했다. 따라서 수상학적(palmistry) 차원에서 볼 때 약지가 길면 재물운(財物運)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발표가 나오자 이 연구팀은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 한 블로그에서는 “과학자들은 대체로 돈을 잘 버는데 그 가운데는 약지가 원래 짧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과학자들은 손가락을 잡아당겨 길게 뽑아낸 사람들인가?”라며 엉터리라고 조롱했다.
케임브리지 연구팀이 중점적으로 조사한 연구대상은 검지와 약지의 길이 비율이다. 이 비율은 산모의 자궁에서 태아에 노출되는 강력한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의 분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게 연구팀의 주장이다.
물론 약지가 아무리 길어도 중지보다 긴 경우는 거의 없다. 약지가 중지보다 긴 경우가 있다. 일명 ‘카사노바 패턴(Casanova pattern)’이라고 부른다. 남성 호르몬이 철철 넘치고 정력이 왕성해 희대의 플레이보이가 된다는 이야기다.
약지가 중지보다 길면 ‘카사노바 손가락’
<핑거 북(The Finger Book)>의 작가인 존 매닝 교수는 “검지와 약지의 비율이야말로 여성의 임신초기에 자궁에서 테스토스테론의 노출 정도와 앞으로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살아 있는 화석(living fossil)’이나 다름 없다”고 말한다.
약지가 검지보다 긴 경우: 대부분 여성보다 남성의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사람은 스포츠 능력이 뛰어나 달리기와 축구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바스 대학(University of Bath)의 과학자들은 약지가 긴 어린이들이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수(number)와 관련된 과목을 잘 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물론 이 과목은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강한 분야다.
케임브리지 연구팀은 이번 연구에서 어린이의 자폐증(autism) 또한 자궁 내에서 테스토스테론의 노출과 연관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자폐증은 여자보다 남자아이에서 4배나 넘게 나온다. 그래서 자폐증을 ‘극단적인 남성의 뇌(extreme male brain)’라고 부른다.
검지가 약지보다 긴 경우: 여성에게 주로 나타난다. 검지가 길면 주로 학업능력(academic strength)이 뛰어나다. 또한 말솜씨가 뛰어나며 문장력이 특출하다.
그러나 약지가 긴 여성이 있다.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에 많이 노출된 경우로 성적으로 동성애자인 레즈비언이 많다. 매닝 교수에 따르면 남성이 이와 반대로 검지가 더 길면 또한 동성애자인 게이가 많다는 결과가 나왔다. 테스토스테론에 노출이 작았기 때문이다.
약지가 긴 사람은 지배욕이 강하고 공간적인 사고를 주로 하는데 반해 검지가 긴 사람은 성격이 온유하고 뛰어난 언어감각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손가락의 길이와 성격이 상관관계를 보이는 이유는 손가락의 길이가 우리 몸 안의 성호르몬의 양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 안에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많으면 약지가 검지보다 길고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많으면 검지가 약지보다 길다.
성호르몬은 사람의 성별과 무관하게 특유의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성격을 유발한다. 그로 인해 약지가 긴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남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고 검지가 긴 남자들은 여성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약지가 긴 사람은 주차 능력도 뛰어나도 지도도 잘 읽는다. 그리고 도전적이며 바람기가 있는 경우도 많다. 역시 남녀를 막론하고 검지가 긴 사람은 차분하고 바람을 피울 확률이 낮다.
“그러나 손가락 길이는 70% 이상이 유전”
손가락 길이를 보면 성격뿐 아니라 어떤 병을 앓게 될 확률이 높은지도 알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심장마비환자들은 유난히 짧은 약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테스토스테론을 심장펌프 호르몬이라고 한다.
그러나 검지와 약지의 길이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회의적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손가락의 길이는 70% 이상이 부모에 의해 유전된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손가락을 갖고 미래의 운명을 이야기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그래서 약지가 길다고 해서 폼 잴 필요도 없고, 그런 남자를 꼭 찾아 결혼하겠다는 것도 금물이다. 또 그렇다고 자신의 손가락을 보면서 “나는 혹시 동성애자가 아닌가?”라며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정확한 이론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진행한 한 연구의 일부분이다.
결론으로 돌아가자. 결국 과학자들이 네안데르탈인이 바람만 피우고 배우자와 자식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현생인류와 번식경쟁에서 져 멸종했다는 주장이 바로 이러한 연구에서 해석한 것이다.
'살롱'을 쓰면서 많은 공부를 하고 있다. 전국 수백만 독자들이 틀린 부분을 지적해 주기도 하고, 몰랐던 내용을 알려주기도 하고, 좀 더 심층적인 정보를 주기도 한다. 덕분에 고3 수험생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있다. '
조용헌살롱' 693회(누에를 치지 마라)에서 6·25 때 논산의 유서 깊은 문화재인 명재고택을 폭격으로부터 구한 사람이 '미군부대에 근무하던 박씨'라고 썼던 적이 있다. 칼럼이 나간 뒤에 후손의 제보를 받고 보니 이분은 일반인이 아니고 공군 준장으로 예편한 박희동(朴熙東·1923~1989) 장군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이다.
박희동은 논산에서 태어나 형님을 따라 6세 무렵에 일본 나고야로 갔다. 여기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내고 비행기 조종사를 양성하는 비행학교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10대 후반의 소년들을 선발하여 속성으로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하는 소년비행병 과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훈련과정을 마친 박희동은 동남아시아의 격렬한 전투 현장이었던 버마전투(일본에서는 '비루마' 전투라 부름)에 투입됐다. 타고난 운동신경과 뛰어난 조종술의 소유자였던 박희동은 공중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일본의 적기였던 미군기를 17대나 격추하는 실력을 보였던 것이다. 미군 조종사들은 박희동의 비행기를 보면 겁이 나서 도망갔다고 한다. '탑 건'이었던 것이다.
해방이 되고 고향인 논산에 돌아온 박희동은 논에서 벼를 심는 농사꾼 노릇을 하였다. 그러다가 6·25가 발발하자 전국에서 10명의 전투기 조종사를 급히 선발하였는데, 김구 선생의 아들로서 중국공군사관학교 출신인 김신(金信), 이근석, 김영환 등과 함께 박희동도 그 10명에 포함되었다. 이 10명이 일본에 가서 미군의 첨단전투기인 무스탕을 인수해서 6·25에 곧바로 투입되었다.
미군으로부터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던 조종사가 김영환 대령인데, 이때 그 휘하에 박희동도 같이 출격했었다. 김영환과 같이 박희동도 자신의 고향마을이자 명재고택이 있는 논산 노성리에 폭격을 하라는 명령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논산 사람들 사이에서 이 일화가 회자된다.
이 잘난 선생은 꼬박꼬박 받은 월급으로 밥걱정 없었고,소질도 없는 글을 긁적였는데, 전업작가인 너는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영혼의 글을 썼구나
나는 지금 40대 남자 제자가 준 그의 자전적 장편소설을 밑줄 그어가며 읽고 있다. 그러니까 보름 전이었다.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대학 후배이면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던 옛 직장 동료 국어과 여교사를 만났다. 그녀는 반색을 하면서 나에게 물었다.
"그 유명한 《연탄길》의 작가 이철환이를 아세요?"
"몰라, 우리나라 소설가가 어디 한두 사람이야?"
"선생님 제자라는데도 모르세요?"
"뭐?"
사연인즉 며칠 전에 그녀가 몸담고 있는 동대부중에서 그 학교 출신인 그 소설가를 모시고 문학 강연회가 있었단다. 그때 한 학부모가 질문하기를, "어떻게 해서 문학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까?"
그 작가의 대답이 이러했단다. 중학교 2학년 때 '김경남'이라는 국어 선생님이 하루는 자기를 불러서 일기를 잘 썼다고 칭찬하시면서 학교 신문에 실어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셨고, 그 글이 신문에 실렸으며, 또 교내 백일장 때 쓴 글이 '가작'으로 뽑혀 상도 탄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글 솜씨를 인정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훗날 작가가 되기로 결심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사연을 듣고 나서 미안했다. 그 제자는 지금도 나를 들먹이는데 나는 그의 이름도, 얼굴도, 그런 내용을 기억하지 못해서이다. 글을 잘 쓰는 학생은 따로 불러다가 칭찬을 해 주거나 잘 쓴 글은 낭독해 주었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교사의 한마디 말이 제자의 인생길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가슴이 뿌듯해져 왔다.
한 번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작가 이철환의 삶과 문학을 조금이라도 알고 가야 예의인 것 같아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다.
'이철환', 그의 이름은 굵은 고딕체로 방방 뜨고 있었다. 인물에도, 카페글에도, 블로그, 이미지, 웹문서, 이미지, 동영상, 뉴스, 지식, 게시판에도….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연탄길》. '이 세상에 자전거길도 있고, 자동차길도 있고, 아스팔트길, 빙판길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왜 연탄길이람?' 하면서도 읽지도, 보지도 못한 책의 제목에서 고된 삶과 서민의 애환이 묻어져 나옴을 느꼈다. 1·2·3·4편이 나오도록 도대체 어떤 내용으로 360만명의 심금을 울렸을까?
그의 가난은 글을 낳았고, 그의 아픔은 감동적인 글을 낳았던 것 같았다. 그의 글은 얼음 같은 인심, 쇠붙이 같은 세상, 레이저 광선 같은 세태와 내가 창이 되면 네가 방패가 되고 네가 창이 되면 내가 방패가 되어야 하는 이 생존경쟁의 시대에서, 얼음과 쇠붙이와 레이저 광선을 녹이고, 창과 방패를 버리게 하는 역할을 한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자랑스러워졌다. 어려서는 교사 한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키더니, 어른이 되어서 수백만 인간의 영혼을 감동시켰으니 그가 얻은 명성은 필연이며 유명 작가라는 세간의 인증은 어찌 당연한 찬사가 아니었겠는가?
가을이 스러져 가는 11월 초순, 드디어 만났다. 34년 만에, 28살의 처녀 선생과 15살의 앳된 남학생이 61살의 노교사와 48살의 장년의 나이로 대면한 것이다. 내 근무처를 찾아온 철환이를 태우고 분당의 한 음식점에서 따뜻한 밥을 함께 먹었다. 고된 삶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맑은 눈동자와 선량하고 겸손한 표정에서 그가 인생을 얼마나 청결하게 살아왔고, 그의 영혼이 얼마나 순결한가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율동공원을 거닐며 과거와 현실과 문학과 삶을 이야기했었다. 헤어질 때 철환이는 최근에 펴낸 《눈물은 힘이 세다》라는 소설을 한 권 주었고, 나는 작년 이순 나이에 펴낸 첫 수필집 《종이속 영혼》을 건네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오늘, 나는 내가 그의 제자라도 된 것처럼 그의 책을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였다. "겨울은 눈 내리는 밤으로 깊어지고 생(生)은 눈물의 힘으로 깊어진다."
'진실이라. 그래, 이 잘난 선생은 꼬박꼬박 받은 월급으로 밥걱정 없이 살면서, 소질도 없으면서 50대에 등단한 주제에 수필을 쓰네, 평론을 하네 하면서 되지도 않은 글을 긁적이고 있을 때, 전업 작가인 너는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아니 눈물 젖은 빵을 얻기 위해서 영혼의 글을 썼었지.'
제자는 유명작가, 스승은 무명작가, 그래도 스승이랍시고 목에 힘을 주고 내가 제자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옛날처럼 글을 잘 썼다, 못 썼다 할 수도 없고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정치에 이용당하지 말고, 이념에 휩쓸리지 말고, 진정한 문학 냄새가 나는 좋은 글을 써라. 가슴으로 글을 쓰고, 그 영혼의 향기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게 하는 지침서 같은 글을 계속 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