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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3/30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장


지구의 자기조절능력 믿는 '가이아 가설' 정면 반박
생물의 자기파괴 성향 주목

지구는 가이아보다는 메데이아에 가깝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모든 생명을 돌보는 어머니로 그려진다. 한편 그리스 영웅 이아손이 황금양털을 찾게끔 도와준 왕녀 메데이아는 그의 아내가 되었으나 버림을 받게 되자 둘 사이에 낳은 자식들을 죽인 비정의 어머니다. 지구가 항상 생명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 가이아 이론을 반박하는 메데이아 이론이 발표된 것이다.

1970년대에 영국 대기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창안한 가이아 이론에서는 지구를 하나의 유기체로 본다. 따라서 지구는 자신의 상태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는 자기조절 기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가이아에서 이런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생물이다. 요컨대 생물체는 능동적으로 주위 환경을 조절하면서 지구를 살기 좋은 상태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가이아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제시되는 두 가지 단서는 대기권의 화학적 조성과 지구의 기후이다. 먼저 지구 대기권의 경우, 그 화학적 조성이 매우 미묘하고 무질서함에도 불구하고 생물계에 유리한 조건이 유지되고 있는 까닭은 생물이 대기 조성을 능동적으로 조절하고 유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범지구적 규모의 자기 조절체계, 곧 가이아가 존재했기 때문에 불안정하기 이를 데 없는 대기권의 조성이 오랫동안 일정하게 유지됐다는 뜻이다.

가이아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두 번째 방증은 지구 기온의 역사이다. 생물의 탄생 이후 35억년 동안 지구의 평균기온이 생물의 생존에 적합하도록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생물이 일정한 기여를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가령 생물에 의해 합성되는 각종 기체가 지구의 기온 유지에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가이아 이론은 옳을 수도 있고 옳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제가 환경문제와 직결되어 있어 그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그런데 미국 워싱턴대 생물학자 피터 워드는 지구를 가이아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지난 4월 중순 출간된 '메데이아 가설(The Medea Hypothesis)'에서 워드는 "지구상의 생명체가 자식을 살해한 메데이아처럼 지구에 되풀이해서 재앙을 안겨주었으며 미래에도 그럴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했다.

워드는 생물 자체에 의해 지구상 생물의 생존이 위협받은 현상을 '메데이아 사건'이라고 명명하고 가장 최악의 사례로 두 차례의 '눈 덩어리 지구(Snowball Earth)'를 꼽았다. 22억년 전 지구는 1억년간 지속된 빙하기를 겪었으며, 7억년 전 또다시 엄청난 규모의 빙하기가 찾아왔다.

빙하기에 태양의 복사량이 오늘날보다 6% 적은데다가 이산화탄소 등 온실효과 기체의 양이 모자라서 지구는 꽁꽁 얼어붙었다. 지구 전체가 두께 1㎞의 얼음으로 뒤덮이고, 기온은 섭씨 영하 50도로 떨어졌다. 그야말로 눈 덩어리가 된 것이다. 빙하기가 출현한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이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워드는 눈 덩어리 지구의 원인을 생물 자체에서 찾은 것이다. 광합성 박테리아가 대기 중에서 지구를 온실로 만드는 이산화탄소를 너무 많이 흡수해서 지구가 얼어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구의 생물다양성을 파괴하고 있는 현대인이야말로 메데이아의 후손은 아닐는지.

정민의 세설신어 - 한양대교수·고전문학


퇴계 선생이 주자(朱子)의 편지를 간추려 '회암서절요(晦菴書節要)'란 책을 엮었다. 책에 실린, 주자가 여백공(呂伯恭)에게 답장한 편지는 서두가 이랬다. "수일 이래로 매미 소리가 더욱 맑습니다.

매번 들을 때마다 그대의 높은 풍도를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남언경(南彦經)과 이담(李湛) 등이 퇴계에게 따져 물었다. 요점을 간추린다고 해놓고 공부에 요긴하지도 않은 이런 표현은 왜 남겨 두었느냐고.

퇴계가 대답했다. "생각하기 따라 다르다. 이런 표현을 통해 두 사람의 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단지 의리의 무거움만 취하고 나머지는 다 빼면 사우(師友) 간의 도리가 이처럼 중요한 것인 줄 어찌 알겠는가. 나는 여름날 나무 그늘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주자와 여백공 두 분 선생의 풍모를 그리워하곤 한다."

나무의 높은 가지에서 우는 매미 소리를 들으면서, 주자는 여백공의 높은 인격을 그렸다. 퇴계는 그 소리를 듣고 두 사람 사이에 오간 그 마음을 떠올렸다. 남언경과 이담은 공부하는 사람의 엄정함을 들어 편지 서두의 의례적 인사말을 왜 삭제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같은 표현에서 읽은 것이 달랐다. 퇴계에게 매미 소리는 높은 인격을 사모하는 촉매였지만, 두 사람에게는 시끄러운 소음이었을 뿐이다.

의리의 무거움만 알아 깊은 정을 배제하는 데서 독선(獨善)이 싹튼다. 뼈대가 중요하지만 살이 없으면 죽은 해골이다. 살을 다 발라 뼈만 남겨놓고 이것만 중요하다고 하면 인간의 체취가 사라진다. 명분만 붙들고 사람 사이의 살가운 마음이 없어지고 보니 세상은 제 주장만 앞세우는 살벌한 싸움터로 변한다.

퇴계 선생의 이 말씀이 더욱 고마운 까닭이다. 윤증(尹拯)도 이 뜻을 새겨, 그의 '청선(聽蟬)'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며칠 새 매미 소리 귀에 가득 해맑아, 고개 돌려 높은 풍도 그리워하게 하네.(數日蟬聲淸滿耳, 令人回首溯高風)"

매미 울음소리가 도처에 낭자하다. 새벽 아파트 베란다 창에 한 마리가 붙어 울면 온 식구 잠이 다 깬다. 학교 숲길은 종일 아이들 합창대회 연습장 같다. 이언진(李彦眞)의 "저녁 볕 들창에 환하고, 매미 소리 나무에 가득타.(斜陽明窓 蟬聲滿樹)"란 구절을 써 붙인다. 무더위에 찌들었던 마음이 환하게 펴진다.

김홍진 논설위원


2003년 대구에 사는 권모씨는 알고 지내던 김모씨가 200만원을 빌려달라고 하자 당좌수표를 끊어줬다. 김씨는 권씨 인감을 위조해 1700만원짜리 수표로 만들어 써버렸다. 권씨는 김씨를 고소했지만 경찰은 오히려 권씨를 무고죄로 구속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수표에 찍힌 인감이 진짜라고 감정한 것이다. 권씨는 6개월 뒤 풀려나 재감정 끝에 겨우 위조를 밝혀냈다. 국과수도 속을 만큼 위조가 감쪽같아 생긴 일이다. 지난 3년 국과수가 의뢰받은 인감 감정이 2000건이 넘었다.

▶2004년 서울 구로의 동사무소 직원이 가짜 신분증에 속아 김모씨의 인감증명서를 발급해줬다. 사기꾼은 이 증명서로 3억원을 대출받아 달아났고 은행은 구청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하급심은 동사무소 직원의 책임이 없다고 봤다. 한 해 100건씩 인감이 부정 발급되고 공무원들이 책임을 지게 되자 2003년 정부가 공무원의 확인 의무를 덜어주도록 법을 바꿨던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작년 7월 "여전히 관청에 책임이 있다"며 원심을 깼다. 법적 안정성을 중시한 판결이다.

▶인감은 도장 인(印)과 거울 감(鑑)을 합친 말이다. 1871년 일본은 미리 관청 장부에 거래에 쓸 도장을 찍어두고 나중에 진짜인지 비교하도록 했다. 일제에 의해 대만은 1906년부터, 우리는 1914년부터 인감을 쓴다. 국민의 66.5%, 3289만명의 인감이 등록돼 있고 작년에만 4846만통의 인감증명이 발급됐다. 반면 미국과 유럽에선 공증(公證)제도가 발달했다.

▶정부가 인감증명을 요구하는 사무를 올해 안에 60% 줄이고 5년 안에 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내년부터 전자위임장 제도를 도입하고 인감증명을 대신할 '본인 서명 사실확인서'를 발급하는 등 다양한 대체수단을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서명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인감증명 제도는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컸다. 국민들은 인감증명을 발급받느라 관청에 찾아가야 했고 발급 수수료도 내야 했다. 그 비용이 한 해 2500억원에 이른다. 전국의 3850개 읍·면·동 사무소의 발급 시스템 유지와 인건비에 연간 2000억원이 든다고 한다. 일본도 벌써 전자인증제도로 전환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100년 전 제도에 머물러 있다. 2006년에도 인감 폐지가 논의되다 국민들이 불안해한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거래의 안전성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이제 이 제도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김태익 논설위원


경북 팔공산 선본사 주지 향적 스님이 며칠 전 출간한 '프랑스 수도원의 고행'(금시조)에 프랑스 수도원이 다른 종교에 얼마나 개방적인지 체험했다는 대목이 있다. 묵언과 엄한 계율로 유명한 베네딕트교단의 수도원이 동양의 승려를 조건 없이 1년간 머물도록 했다는 게 그에겐 우선 놀라웠다. 첫날 어느 신부의 방에 인사 갔더니 벽에 관세음보살 벽화 사진이 걸려 있었다. 도서관 서가에는 '한글대장경'과 '고려대장경'이 꽂혀 있었다.

▶매주 월요일 저녁 아시아 종교를 연구하는 모임에서는 '법화경'을 공부했다. 회원들은 특히 관세음보살의 중생구제 사상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관세음보살과 성모 마리아는 다 같은 자비와 사랑의 화신인데 동·서양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했다. 향적 스님은 "대자연과 소통하고 대중을 위무한다는 점에서 종교의 본질은 같다는 걸 확인했다"고 썼다.

▶요즘 들어선 우리나라에서도 종교 간 벽 허물기와 화해의 몸짓이 그리 낯설지 않다. 각 종교 지도자가 상대 종교의 행사에 참석하기도 하고, 젊은 성직자들은 화합을 다지는 축구대회를 열기도 한다. 얼마 전 있었던 북한 지원 관련 4대 종단 합동 행사에선 원불교 인사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하는 기독교 성가가 울려 퍼졌다.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삼천사(三千寺)가 노인복지시설 인덕원을 300여 병상 규모로 확대해 새로 문 열면서 '붓다의 마을'과 함께 '예수마을' '마리아의 집'이라 이름 붙은 방들을 만들었다. 불교 사찰이 설립했지만 개신교도나 천주교도 등 누구든 와 몸을 의탁하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개방하겠다는 뜻이다. 자원봉사자 역시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든 봉사하며 자기가 믿는 종교를 전교(傳敎)할 수 있게 했다.

▶세계적으로 드문 다(多)종교사회 한국에서 종교 간 평화로운 공존은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와 포용을 확대하는 길밖엔 없다. 문제는 얼마나 진정 어린 것이냐다. 삼천사 주지 성운 스님은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적인) 기독교가 없었다면 불교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중생들과 고락을 함께 하지 못했을 테니까 기독교는 한국 불교를 깨워준 은인"이라고 했다. 그의 방에 걸린 '松茂柏悅(송무백열)'이란 김구 선생의 글씨가 스님의 그런 마음을 넌지시 일러주는 듯하다.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이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미술사

안동(安東)은 조선시대 목조건축의 보고(寶庫)다. 한옥(韓屋)의 참 멋을 안동만큼 풍부하게 보여주는 곳은 없다. 경상북도의 새 도청 유치를 위해 경주시와 안동시가 치열하게 경쟁할 때 경주시가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문화재가 많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안동시는 우리도 적지 않다며 누가 많은지 국가 및 지방 지정문화재를 세어 보자고 했다. 그 결과 안동이 석 점 더 많았다. 현재도 경주는 320점, 안동은 323점이다.

안동에 이처럼 문화재가 많은 것은 전통 있는 가문마다 한 마을에 종택(宗宅)·정자(亭子)·재실(齋室)·서원(書院) 등을 경쟁적으로 갖추었고, 그 후손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이 목조건축들을 보존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벼슬하던 선비가 낙향하여 한 마을의 입향조(入鄕祖)가 되면 그 후손들이 재실과 서원을 세우면서 가문을 일으키는 과정은 길안면(吉安面)의 묵계서원( 溪書院)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안동시내에서 길안천을 따라 영천으로 내려가는 35번 국도는 요즘 세상에선 보기 드문 호젓한 옛길이다. 더 먼 옛날에는 내륙 속의 오지여서 묵계리에 있던 역(驛)이름이 거무역(居無驛), 즉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궁벽한 산골의 입향조는 안동 김씨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21)이다.

보백당은 나이 50세에 등제(登第)하여 삼사(三司)의 청직(淸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과 교분이 깊었던 탓에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심한 고초를 겪었고, 나이 70세 때 또 구금됐다가 5개월 만에 풀려나자 이곳 묵계리로 내려와 우거(寓居)해 버렸다. 이 집이 묵계종택이다.

보백당은 앞산 깊은 계곡에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를 걸쳐놓고 만휴정(晩休亭)이라는 환상적인 정자를 짓고는 이름 그대로 만년의 휴식처로 삼아 나이 87세까지 여기서 지냈다.

"우리 집엔 보물이 없다. 있다면 청렴[淸白]이 있을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는 유훈(遺訓)을 남긴 보백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훗날 묵계서원이 세워졌다.

이 모두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도 살지 않던 묵계리가 오늘날에는 비경(秘境)의 문화유적지로 남은 것인데 안동에는 이런 마을이 수십 곳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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