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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대각국사 의천은 화폐경제 도입의 주역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출가
형 몰래 배타고 송나라 유학
형 숙종에게 "鐵錢 주조" 상소
고려의 찬란한 전성기를 이룩한 국왕으로 평가받는 11대 문종(文宗·1019~1083)은 문무(文武)와 유불(儒佛)을 함께 진흥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게다가 아들 복도 많아 정비(正妃)인 인예태후 이씨와의 사이에만 10명의 아들을 두었다.
문종은 어느날 아들들을 불러 "누가 능히 중이 되어 부처를 공양하고 공덕을 닦겠느냐"고 물었다. 아들 간의 권력투쟁을 우려한 문종이 고심 끝에 완충 역할을 해줄 아들 하나를 원했던 것인지 모른다. 이때 열한 살 된 넷째 아들 왕후(王煦)가 나섰다.
"제가 출가(出家)의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부왕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왕자에서 승려로 신분이 바뀐 왕후는 먼 훗날 위대한 승려가 된다. 우리에게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으로 알려진 그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던 의천은 영통사로 출가해 난원왕사(爛圓王師)를 스승으로 모시고 불경뿐만 아니라 유학도 깊이 공부했다. 자연 의천은 불교의 깊은 공부를 위해 송(宋)나라 유학(留學)을 꿈꾸었다. 그러나 당시 바닷길은 오늘날 우주여행보다 더 위험했기에 아버지 문종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송나라 유학의 의지가 강렬했던 의천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宣宗)이 즉위를 하자 유학을 강행한다. 1085년(선종 2) 4월의 일이다. 형이라고 찬성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의천은 비밀리에 딱 두 사람만 데리고 송나라 상선에 올랐다. 이 소식을 뒤늦게 접한 선종은 크게 놀라 군사들을 보내 뒤를 쫓도록 했으나 이미 의천은 멀리 가버린 후였다.
송나라 수도 변경(�N京)에 들어간 의천은 행복했다. 송나라 황제 철종(哲宗)은 의천을 극진하게 예우했다. 의천의 경우 후(煦)라는 이름이 철종과 같아 자(字) 의천을 이름 대신으로 사용했다. 이를 피휘(避諱)라 했다.
의천은 철종에게 송나라의 명승(名僧) 대덕(大德)을 두루 만나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고 철종은 당대 최고의 명승들이 의천과 만나 불교를 논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아마도 이듬해 어머니 인예태후가 강권하지 않았더라면 의천의 송나라 체류는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정도로 의천의 불법(佛法)탐구여행은 활발했고 뜻깊었다. 그가 훗날 천태종(天台宗)을 일으킨 것도 이때의 여행에서 얻은 깨달음 덕분이었다.
1086년 6월 '강제'귀국조치로 고려에 돌아온 의천은 먼저 형이자 임금인 선종에게 걸죄표(乞罪表)부터 올린다. 국왕의 명을 어기고 비밀리에 송나라행을 결행한 데 대한 사과문이다.
선종은 의천을 당시 대표사찰이던 흥왕사(興王寺) 주지로 삼아 선진불법을 전파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의천은 불법만 도입한 것이 아니다. 14개월 송 체류 때 보았던 중국의 화폐경제를 고려에 도입한 것이다.
고려는 성종 15년에 처음으로 철전(鐵錢)을 주조했다. 철전 주조는 실패했다. 숙종 2년(1097) 12월 마침내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있던 숙종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장차 민간의 큰 이익을 일으키고자 하노니 주전관(鑄錢官)을 세워 백성으로 하여금 통용케 하라!"
숙종이 이런 결단을 내린 것은 아우 의천의 상소에 따른 것이었다. 의천은 화폐 대용물인 쌀이나 베(布)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용전(用錢)의 이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운반하기 편리하다. 둘째 쌀이나 포와 달리 아전들이 협잡을 부릴 수 없다. 셋째 국가 관리의 봉급을 절반은 돈으로 지급하며 녹미(祿米·봉급으로 받는 쌀)독촉으로 해를 입는 불쌍한 백성을 구제하는 결과가 된다. 넷째 미곡을 비축할 수 있게 돼 흉년의 대비책도 된다. 국사(國師)로서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바로 의천의 주전(鑄錢) 상소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의천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숙종 7년(1102) 12월 '해동통보(海東通寶)'라고 새긴 동전 1만5000관을 만들어 문무 관리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우리나라도 화폐경제의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의천은 종교 지도자임과 동시에 우리 경제사에서도 반드시 기억돼야 하는 주전론자(鑄錢論者)다. 조선에서 화폐경제를 되살린 김육(金堉·1580~1658)과 같은 반열이라는 뜻이다. 묘하게도 고려 때나 조선 때나 주전론을 관철시킨 인물은 둘 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녔던 동명이인 숙종(肅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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