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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3/30
 

중국 역사 -4-

 중국의 국익은 영국을 선두로 하는 유럽 여러 나라에 의해서 침식 당하였다. 아편전쟁의 결과인 난징조약〔南京條約;1842〕과 그 이후의 여러 조약에 의해 중국은 특혜로 허가하고 있던 외국무역을, 반대로 의무로서 부과받게 되었다.

  그 세율은 수출입 모두 종가(從價) 5%의 저율로 억제되었기 때문에 보호관세에 의하여 자국의 산업을 육성할 수가 없었으며, 태평천국의 난을 계기로 관세자주권을 잃어버렸고, 외국인 세관원에 의하여 징수된 관세는 우선 외채 지불에 충당되었다.

영국에게는 홍콩을, 러시아에게는 만주 북방을 할양했을 뿐만 아니라 안남(安南) 등 조공국(朝貢國)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였고, 국내에는 청왕조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외국의 조계(租界)가 여러 군데 생겨났다.

  또한 청· 일전쟁으로 일본에 타이완을 할양하였고, 조계에서 외국인 기업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더욱이 외국에 의한 세력 범위의 설정으로 중국은 반(半)식민지 상태로 머물렀다.

청· 일전쟁 직후 캉유웨이〔康有爲〕 등이 주창한 점진개혁론인 이른바 무술변법(戊戌變法)은 보수파의 반격과 세력기반의 취약으로 곧 실패하였고, 외국 배척을 목적으로 일어난 의화단사건은 청나라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

 러· 일전쟁 후에는 일변하여 쑨원〔孫文〕 등이 주창하는 혁명운동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중화민국〉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 선통제(宣統帝)를 폐위시키고 1912년 공화제인 중화민국을 건설한 것은 표면상으로는 혁명당의 성공처럼 보이나, 실은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위시한 군벌에게 성과를 빼앗긴 것이었다. 이후 근 20년 동안 중국은 군벌의 압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 중국의 근대화 및 혁명 달성의 조건은 성숙되어 가고 있었다. 외국 조계의 존재는 새로운 사상을 육성, 보급하고 신문· 잡지에 의한 정보활동을 활발하게 하여 노동자에게 신기술을 습득시킨 측면도 있었다. 그리고 제1차세계대전은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상대적으로 향상시켰다.

  쑨원은 광둥을 근거지로 하여 중국을 무력 통일할 것을 꿈꾸며, 중국공산당과 제휴하여(제1차국공합작, 1924~27) 소련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가 죽은 뒤 후계자 장제스〔蔣介石〕는 무력통일 방침을 이어받아 북벌의 길에 올라 양쯔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이때 난징사건이 일어났고, 장제스의 4·12쿠데타로 제1차국공합작은 분열되었다. 장제스는 소련과 국교를 단절하고 영국과 미국의 후원을 얻어 불벌을 속행했으며, 일본의 지지를 받던 군벌 장쭤린〔張作霖〕이 베이징을 탈출, 근거지인 만주로 돌아가다가 일본인에게 폭사당하자 일본에 불만을 품은 그의 아들 장궤량〔張學良〕이 국민정부에 귀순함으로써 1928년 난징의 국민정부는 중국 영토를 거의 통일하여 중국의 정통 정부가 되었다.

  일본은 〈만주국〉 정권을 수립하고 그 특수권익을 옹호하려고 했으나 중국인의 반항이 심하여, 〈만주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화베이에 출병하였고 다시 화중(華中)·화난〔華南〕을 공격, 전선을 확대하여 마침내 중·일전면전쟁으로 돌입하였다.

일본은 난징을 점령하자 일본에 협력적인 왕자오밍〔汪兆銘〕 정권을 수립하고, 외국 조계 등의 권익을 왕정권에 되돌려 주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에 이어 일본이 항복하자 충칭〔重慶〕의 국민정부는 난징으로 되돌아갔으며, 외몽골을 제외한 중국의 거의 전지역을 평정했을 뿐만 아니라 45년 타이완도 일본으로부터 되돌려 받았다.

  장제는 앞서 소련과 국교를 단절했을 때 중국공산당도 탄압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지하로 숨거나 때로는 지방에 이른바 해방구를 세우고 버텼으며, 소련은 중국공산당의 장래를 기대하고 음으로 양으로 원조하였다.

일본군의 공경이 급박해지자 장제스는 또다시 공산당과 화해(제2차국공합작, 1937~46), 협력함으로써 일본과 맞싸우게 되었으나, 이동안에 공산당은 세력을 증대시켜 나갔다. 공동의 적이었던 일본이 패망하자 국민정부와 공산당은 또다시 적대관계를 되풀이해야만 했다.

  이때 국민정부는 일본점령지를 접수하면서 수단적 과오를 범하는 등 민심을 잃고 군대마저 전의를 잃어 공산당과의 싸움에서 연전연패하여 타이완으로 쫓겨갔다. 승리를 거둔 공산당은 베이징을 수도로 정하고 혁명정권을 수립, 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였다. (김연수 자료에서 발취)

중국 운남성(雲南省)의 원모(元謀)지역과 섬서성(陝西省)의 남전(藍田)지역에서 각기 원모인(元謀人)과 남전인(藍田人)으로 불리는 화석이 발견되었다. 또한 북경에서는 50만년전에 살았던 직립형의 북경원인(北京猿人)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중국에서 지금으로부터 100만년도 훨씬 지난 이전부터 인류가 살아왔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기원전 4-5천년경에는 앙소문화(仰韶文化)가, 기원전 3천년경에는 용산문화(龍山文化)가 확 산되었다. 이것이 세계 4대문명 중 하나인 황하문명을 이루고 있다. 이상은 고고학에 따른 것이고 순수 역사적 의미에서 문헌상에 나와 있는 기록에 의하면 중국의 역사는 삼황오제(三皇五帝)부터 시작된다.

 『서경(書經)』에 의하면, 옛날 중국에는 수 인씨(燧人氏),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라 불리는 삼황이 존재했는데,
수인씨는 화식 (火食)하는 방법을 창안했고,
복희씨는 사냥의 기술을,
신농씨는 농경술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뒤이어 황제(皇帝), 전욱, 제곡, 요(堯), 순(舜) 임금 등이 중국을 통치하였고, 이들을 오제라 칭한다.

이 삼황오제의 시기에 이미 팔괘, 결혼, 수렵, 목축, 의복, 궁실, 월력, 농업, 양잠 등이 개발되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문헌상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는 전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설시대를 마감하고 기원전 21세기 경에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하(夏), 상(商), 주(周)의 삼대가 이어진다. 하왕조는 우(禹)임금이 전설상의 순 임금으로부터 왕위를 이어 받아 시작되었다고 하여 하왕조의 실재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도 한다.

  그러나 상나라는 당시 유물과 갑골문자의 발굴로 그 실체가 확인되었으며, 중간에 은(殷)으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은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은을 멸망시킨 왕조가 주나라인데, 800여 년을 지속하는 동안 전반기는 서쪽의 호경(鎬頸 : 지금의 西安)에 도읍하여 서주(西周), 후반기에는 동쪽의 낙읍 (洛邑 : 지금의 洛陽)에 도읍하여 동주(東州)라 한다.

동주도 두 개의 시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춘추시대(春秋時代)라 하고 후기는 전국시대(戰國時代)라 한다. 춘추시대는 주왕조의 약화로 전국 각지에서 140여 개의 제후국이 일어났었고 전국지대에는 전국7웅인 제(齊), 초(楚), 연(燕), 한(韓), 조(趙), 위(魏), 진(秦) 등만 남게 되었다.

  이 춘추전국시대는 구질서가 파괴되면서 신질서가 정착되는 과도기의 혼란한 상황이었지만, 각 제후들이 실력 확장을 위해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기 때문에 중국 역사상 가장 풍성한 사상가와 사상이 출현한 시기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시기는 오늘날 중국 사상의 기초를 완성한 시기로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또한 이때까지 정권교체 과정에서 하·상·주 삼대의 부족이 대규모로 융합하였으며, 이것이 한족의 뿌리가 되었다. 이러한 대혼란의 시기를 마감시킨 나라는 진(秦)나라였다(B.C 221).

  진시황(秦始皇)은 중국에서 중앙집권형의 통일국가를 최초로 수립하면서 새 질서를 구축했다. 전국적으로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통치체제를 일원화하였고 통일된 문자와 도로건설, 화폐와 도량형을 실시하였다.

북방 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이 때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유지하기 위해 진은 법가의 가혹한 수단으로 독재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에 꽃 피웠던 사상과 언론을 탄압하여 그 때까지의 문화유산을 송두리째 불태우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자행하기도 하였다.

진 이후에 한(漢)나라가 들어섰는데, 장안(長安)에 도읍하고 있는 때를 서한(西漢) 또는 전한(前漢), 낙양에 도읍하고 있던 때를 동한(東漢) 또는 후한(後漢)이라고 하며 합하여 양한(兩漢)이라고도 한다. 한왕조는 400여 년을 지속하면서 번영을 구가하여, 중국을 대표하는 왕조로 성장했다.

  따라서 후대에 사람들은 중국인을 한인(漢人)이라 부르기도 하며, 중국어를 한어(漢語)로 표현하기도 한다.

양한의 임금중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긴 임금은 무제(武帝)인데, 학술을 장려하여 오경(五經: 周易, 書經, 詩經, 春秋, 禮記)박사를 설치하고, 그것을 연구 한 박사와 제자를 관리에 등용하였다.

이때부터 사실상 유가가 중국의 통치 원리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국세를 떨쳐 북으로는 흉노를 격퇴하고 서쪽으로는 지금의 신강성(新疆省)과 중앙아시아 일대에까지 통제력을 발휘했다.

  그 이후에도 한나라는 세력을 확장하여 페르시아는 물론 로마제국과도 간접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는데, 이른바 실크로드는 이때부터 생긴 것이다.

이렇게 강성했던 한나라도 국운이 다하게 되어 삼국으로 분열되었는데,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소설 삼국지의 시대적 배경이 바로 이 때였다. 이른바 삼국은 조조의 위(魏)와 손권의 오9吳), 그리고 유비의 촉(蜀)을 지칭하며 이 시대를 삼국시대로 불렀다.

이들은 진(晋)에 의해 통일되었지만, 그동안 한에 의해 억압되어 있던 북방의 흉노, 선비, 갈, 저, 강 등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 다섯 이민족들이 열 여섯 나라를 번갈아 가며 세웠는데 이를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라고 부른다. 이때 진나라는 남쪽으로 쫓겨가게 되었는데, 처음에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있던 때를 서진(西晋)이라고 하며, 후에 동남쪽으로 쫓겨가 남경에 도읍을 정하고 있던 때를 동진(東晋)이라고 한다.

  그리고 북쪽에는 이민족에 의한 여러 왕조가 대치하고 있었고, 남쪽에서도 한족에 의한 단명 정권들이 약 160여 년간 대치하였는데, 이때를 남북조(南北朝)라고 하며 오호십육국 시대까지 소급하여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는 수(隋)에 의해서 통일되기까기 중국에서 300여 년간 혼란과 분열의 암흑기였다. 이 암흑기는 중국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세가지 변화를 초래했다.

첫째는 한족의 대거 남하로 경제문화의 중심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이전하게 된 것이고,
둘째는 북방의 이민족이 혼란의 과정속에서 한족에게 동화되어 새로운 한족이 형성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혼란기를 통해 외래사상인 불교사상과 도가사상이 일반민중에게 전파, 확산되었다.

  수나라는 비교적 단명한 왕조였는데, 기억할 만한 것은 남북을 관통하는 대운하가 이때 건설되었다는 사실이다. 북의 황하로부터 회하(淮河)및 양자강을 거쳐 절강성의 항주(杭州)에 이르는 대운하는 만리장성과 맞먹는 대건설이었지만 아쉽게도 흔적만 남아있다.

수 이후 등 장한 당(唐)은 한에 이은 또 하나의 강성한 왕조였다.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던 왕조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듯이 당 시기도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발전하였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후 중국에서 1,300년간이나 지속된 과거제도의 시행이다. 그리고 문예 분야에서도 중국 역사상 2대 시인이라 불리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배출하였다.

당나라가 망한 뒤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는 분단시대를 거쳐 송나라가 성립되었는데, 북방의 거란족(遼), 여진족(金), 몽골족(元)에 의한 침략 때문에 남쪽으로 피신함으로써 송은 북송과 남송으로 구분된다.

  결국 송은 몽골족이 세운 원에 의해 멸망되었고, 원은 중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지배하는 대판도를 형성했다. 이때 중국의 화약, 나침반, 인쇄술 등 중국이 자랑하는 4대 발명이 유럽으로 전파되기도 하였다.

원나라에 이어 한족에 의한 명나라가 세워졌는데, 한때 해상 강국으로서 동남아와 인도양, 아랍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강성한 국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민족인 만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다.

  당시 일부 명나라의 세력이 대만으로 건너가 항거하기도 하였지만 곧 청(淸)에 의해 점령당했다. 이것이 대만이 최초로 중국령이 된 사건이었다. 청대에는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말엽까지 즉 성조(康熙帝), 세종(雍正帝), 고종(乾隆帝)의 3대 시기에 걸펴 전성기를 구가하였는데, 몽골족 잔존세력과 산강, 티베트, 청해 등을 평정하여 현대 중국의 판도를 형성했다.

그리고 서구에서 지리상의 발견으로 명말 청초부터 중서문화의 교류가 있어왔고 청정부도 초기에는 호의적이었으나, 후에는 폐쇄정책을 고수함으로써 서구에 크게 뒤쳐지게 되었다.

결국 1840년 청조는 영국과 아편전쟁을 통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하고 통상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청조는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해 중화민국이 성립될 때까지 쇄퇴일로를 치닫게 되었다.

아편전쟁은 중국 근대사의 시발점으로서 이후 중국은 변방의 이민족이 아닌 서구의 침략과 그 대응의 역사로 점철하게 된다

dlsrb8875 2009.11.04  20:56  [123.254.131.142]

너무긴데여 저 사회 조사 숙제가잇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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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진 2009.11.06  12:04  [125.240.96.2]

글은 긴데 내용이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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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fkdldk 2009.11.06  12:06  [125.240.96.2]

글은 너무긴데 내용이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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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fkdldk 2009.11.06  12:06  [125.240.96.2]

글은 너무긴데 내용이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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