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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3/30
 

유홍준 명지대 교수·미술사

안동(安東)은 조선시대 목조건축의 보고(寶庫)다. 한옥(韓屋)의 참 멋을 안동만큼 풍부하게 보여주는 곳은 없다. 경상북도의 새 도청 유치를 위해 경주시와 안동시가 치열하게 경쟁할 때 경주시가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문화재가 많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안동시는 우리도 적지 않다며 누가 많은지 국가 및 지방 지정문화재를 세어 보자고 했다. 그 결과 안동이 석 점 더 많았다. 현재도 경주는 320점, 안동은 323점이다.

안동에 이처럼 문화재가 많은 것은 전통 있는 가문마다 한 마을에 종택(宗宅)·정자(亭子)·재실(齋室)·서원(書院) 등을 경쟁적으로 갖추었고, 그 후손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이 목조건축들을 보존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벼슬하던 선비가 낙향하여 한 마을의 입향조(入鄕祖)가 되면 그 후손들이 재실과 서원을 세우면서 가문을 일으키는 과정은 길안면(吉安面)의 묵계서원( 溪書院)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안동시내에서 길안천을 따라 영천으로 내려가는 35번 국도는 요즘 세상에선 보기 드문 호젓한 옛길이다. 더 먼 옛날에는 내륙 속의 오지여서 묵계리에 있던 역(驛)이름이 거무역(居無驛), 즉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궁벽한 산골의 입향조는 안동 김씨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21)이다.

보백당은 나이 50세에 등제(登第)하여 삼사(三司)의 청직(淸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과 교분이 깊었던 탓에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심한 고초를 겪었고, 나이 70세 때 또 구금됐다가 5개월 만에 풀려나자 이곳 묵계리로 내려와 우거(寓居)해 버렸다. 이 집이 묵계종택이다.

보백당은 앞산 깊은 계곡에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를 걸쳐놓고 만휴정(晩休亭)이라는 환상적인 정자를 짓고는 이름 그대로 만년의 휴식처로 삼아 나이 87세까지 여기서 지냈다.

"우리 집엔 보물이 없다. 있다면 청렴[淸白]이 있을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는 유훈(遺訓)을 남긴 보백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훗날 묵계서원이 세워졌다.

이 모두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도 살지 않던 묵계리가 오늘날에는 비경(秘境)의 문화유적지로 남은 것인데 안동에는 이런 마을이 수십 곳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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