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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성삼문은 죽기 직전 다음의 시를 남겼다.
‘북소리 둥둥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네.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도 지려 하는구나,
황천에는 주막 한 곳 없다 하니,
오늘 밤은 어느 집에 묵고 간담?’
2008년 서울대는 이 시를 제시문으로 하여 “이 시에 나타난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기술하시오”라는 논술문제를 냈다. 서울대가 발표한 출제의도는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자유로운 사고력 측정에 있었다.
하지만 많은 수험생들은 오직 한 임금만을 섬기고자 했던 성삼문의 충절에 초점을 맞춰 이 시를 이해함으로써 죽음을 여행으로 보는 방식으로 삶과 죽음을 하나의 연속으로 파악하는 그의 사생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노무현 전 대통령 유서의 일부분을 제시문으로 해서 똑같은 문제를 낸다면 학생들은 어떤 답안을 쓸까? 노 전 대통령의 유서는 그가 투신자살이라는 매체로 전달한 마지막 메시지다.
“매체가 메시지다”라는 마샬 맥루한의 말처럼, 투신이라는 매체의 강렬함이 메시지의 의미를 극대화한다. 자살은 내 스스로가 타자와의 소통을 단절시키는 행위지만, 역설적으로 자기 생명을 대가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자살만큼 강력한 소통수단도 없다. 심각한 소통장애를 겪고 있는 우리사회에서 빈민, 노동자, 기업가, 연예인, 사회운동가와 대통령 등 거의 모든 계층이 자살로 자신의 의사표시를 한다.
이 같은 자살은 개인적 죽음에 앞서 사회적 죽음이다. 한국현대사에서 사회적 죽음의 가장 유명한 예가 전태일의 분신이다. 전태일과 노무현 둘 다는 죽음을 대가로 한 인간매체라는 공통점을 갖지만,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완전히 다르다.
전태일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였다. 그의 메시지의 수신자는 노동자들이다. 둘 다 사회적 죽음을 결단했지만, 목적이 다르다.
전태일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목적으로 분신한 반면, 노무현은 탈정치의 메시지를 남겼다. 그래서 전자는 전태일 열사로 불리는 반면, 후자에게는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노 전 대통령은 죽기 직전 측근에게 “정치는 하지마라”는 충고를 했다. 그리고 그는 죽음으로 이 메시지를 다시 한번 강렬하게 전했다. 그렇다면 그의 메시지의 수신자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비정치적인 그의 죽음의 메시지를 다시 정치화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딜레마다. 필자가 염려하는 것은 우리사회에서 정치는 과잉돼 있지만 성찰은 빈곤한 막장사회라는 점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이는 사회에서 소통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막장사회의 축소판이 막장드라마다. 우리사회에서 텔레비전 연속극 뿐 아니라 정치판 자체가 막장드라마다.
인터넷 악플은 연예인 최진실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살아있는 권력이 죽은 권력을 향해 휘두른 ‘망나니 칼’은 전직 대통령을 투신자살로 내몰았다.
우리는 이러한 죽음들을 통해 우리의 피폐한 영혼을 반성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죽음들을 우리의 일그러진 집단적 자아를 비추는 거울로 삼고 있는가?
죽음을 선고한 아테네 시민에게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이 재판이 끝나면 나는 죽음의 길로 가고, 너희들은 삶의 길로 간다. 하지만 누구의 길이 더 좋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죽음은 소통 불가능한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자리이기에 초월성의 영역이다.
여러 형태의 ‘죽음의 춤’이 난무하는 우리사회가 삶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죽음의 초월성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다시 열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죽어야 할 존재며, 죽음은 살아서 성취한 모든 것을 절대무로 만든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 세상에 소통이 안 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제 49재도 지났으니 부엉이바위에서 일어났던 일을 성찰하는 미네르바 부엉이의 작업을 시작할 때다.
<김기봉 | 경기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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