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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3/30
 


출근하는 아빠를 향해 딸이 고사리손을 흔든다. “아빠. 다녀오세요.” 아빠도 돌아보며 손을 흔든다. 아내와 딸의 얼굴이 햇살처럼 환하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면? 아빠는 체포되어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가정은 풍비박산났다면? 소설 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서 이런 장면을 그린 작가 이병주에겐 딱히 소설만도 아니다.

중편소설 <예낭 풍물지>의 이 대목을 옮겨본다.

“5월이었다. 신록의 내음과 창포의 향기가 삽상한 아침 공기에 서려 있는 집을 나는 나왔다.
그때 유치원에 가는 영희의 차비를 채려주고 있으면서 경숙은 ‘오늘도 빨리 돌아오세요’ 했다.
영희는 그 고사리 같은 손을 귀엽게 흔들어 보이면서 ‘아빠 잘 다녀와요’라고 했다.
나는 의젓한 가장의 품위와 아빠로서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회사로 향했다.
평화의 상징으로 화재(畵材)가 될 만한 하늘이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단란한 장면 뒤엔 바로 지옥도가 이어진다.

그날 소설의 주인공은 체포되어 영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여섯살 난 딸은 폐렴으로 죽고 가정은 깨진다. 옥에 갇힌 아빠는 이렇게 자책한다.

“직접 사인은 급성폐렴이지만 영희는 내가 체포된 그 찰나에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다. 하늘보다도 높게 생각하던 아버지가 죄인으로 묶였을 때 그 딸은 그때 죽어야 하는 법이다.”

소설에는 작가의 삶이 녹아들어 간다. 이런 기막힌 장면에는 이병주의 투옥체험이 배어있다. 1961년 5·16 쿠데타 때 언론인이었던 그는 필화를 입어 10년형을 선고받고 2년7개월을 복역했다.

‘조국은 없다. 산하(山河)가 있을 뿐이다’라는 논설이 빌미였는데, 군사정권은 거두절미하고 그를 묶어 혁명재판에 넘겼다. 반공을 국시로 하고 감옥에는 ‘불순분자’들이 넘쳐나던 시절의 일이다.

“7월이었다. 비에 씻긴 햇살은 맑고 풀냄새를 머금은 아침 공기는 삽상했다. 아빠는 평소처럼 고교생 딸을 등교시켜 주고 돌아왔다. 슬리퍼를 신은 맨발에 운동복 차림이었다.

그때 경찰이 들이닥쳤다. 아내와 초등생 딸이 보는 앞에서 경찰은 아빠의 양팔을 꺾고 강제로 수갑을 채웠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다는 요구는 묵살됐다.”

미디어법 반대 투쟁을 벌인 최상재 언론노조위원장의 긴급체포 장면이다. 소설 같은, 아니 소설보다 더 기막힌 2009년의 현실이다.


<김태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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