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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외부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할 때였다. 조금 일러서인지 다른 손님은 없었다. 음식을 차려놓은 후 종업원들은 카운터 근처에 모여 가게주인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제는 TV에서 쉴새없이 쏟아져 나오는 노무현 전 대통령 이야기였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언론이 좀 오버하는 거 아냐?”
물론 언론이 오버하는 부분도 적지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관한 한, 지난 ‘촛불 파동’과 중첩되면서 필자로 하여금 언론의 생리보다는 대중 심리와 대중 정치란 과연 무엇인지를 고민케 했다는 점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
촛불로 밤을 지새우던 당시, 우리는 이야말로 진리요 정의라고 외쳐대는 거짓 선지자를 수없이 목격했다. 그들과 함께, 모든 보편적 과학에 재갈을 물려버리는 억압적 대중 심리는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비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자살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누구나 도덕정치를 앞세우던 정치인의 부패와 위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일부 노사모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달 23일의 자살 사건 이후 모든 것은 일변했다.
범죄 혐의는 노 전 대통령 스스로도 인정하던 부분이다. 사과까지 했다. 그런데도 이런 사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리고 대신 그의 위대함만이 모든 것을 뒤덮어 버렸다. 이순신과 같은 성웅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노무현 탓’이라던 험악한 민심은 어느덧 600만달러(약 70억원)가 뭐 그리 대단한 돈이냐는 황당한 자비로움과 자리를 맞바꿔 버렸다. 그럼 벌금 100만원 이상이면 무조건 공직선거법 위반에 걸려 국회의원직을 상실하는 다른 정치인들은 뭔가.
아무리 ‘찰나생(生), 찰나멸(滅)’의 대중 심리라 해도 폭류가 또다른 폭류로 뒤집히는 마당에 공과의 객관적 평가는 처음부터 발 붙일 곳을 잃고 만다.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 지배하는 한국사회라지만 이쯤되면 오히려 시민사회의 위험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감성은 대중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검찰도 하등 다를 바가 없다. 피의자가 사망하자 수사는 종결됐다면서 범법 혐의의 실종마저 묵인하는 태도다. 그러자 구속중이던 전 대통령의 주변 인물들까지 이번 소용돌이를 틈타 자신의 범법 행위를 희석시키려 든다. 어느덧 참회의 몸짓은 사라지고 당당한 표정만 고개를 든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일본에서 아라이 쇼케이(新井將敬)라는 촉망받는 정치인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증권회사가 그의 투자금을 조금씩 불려주던, 그렇고 그런 부패 사례가 적발됐기 때문이다. 그 증권거래법 위반 사건 수사 뒤에는 도쿄 지방검찰의 구마자키 가쓰히코(熊崎勝彦) 특수부장이 버티고 있었다.
구마자키는 개혁 검사였다. 그는 “이제 성역은 없다. 더 이상의 금기도 없다”고 선언하면서 많은 일본 사회 엘리트를 죽음과 감옥으로 내몰았다. 그렇다고 세월이 지나면서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여전히 개혁 검사다. 우리네 검찰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검찰이 왜 여론에 일희일비하는가. 검찰에게는 전 대통령도 없고 현 대통령도 없다. 단지 법만 있을 뿐이다. 검찰이 대중 심리에 영합하다 법을 잃으면 자신의 존립 근거 또한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필자는 노 전 대통령이 대중영합주의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대통령 스스로 법치(法治)를 희롱하면서 이를 마치 선정(善政)의 필수 덕목쯤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 사회는 당분간 그 해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필자에게는 그것이 노 대통령의 죽음보다 더 큰 비극으로 비친다.
플루타르크는 말했다. “정치가는 항상 위험이 따른다. 민중의 뜻만 추종하면 그들과 함께 망하고, 민중의 뜻을 거스르면 그들 손에 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회고에 따르면 총구 앞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도 이와 똑같은 고민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전·현직을 막론하고 요즘 대통령들은 과연 이런 딜레마에 대해 고민이나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신우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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