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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3/30
 

 이순원 소설가
어린 시절 크고 우뚝하게 보였던 사람은 나중에 어른이 된 다음에도 여전히 크고 우뚝하게 추억된다. 나에겐 초등학교 시절 은사님이 그렇고, 또 할아버지가 보여주었던 삶이 늘 커다란 산처럼 여겨진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 할아버지를 어려워하면서 존경했다.

바로 이맘때쯤이다. 들과 산 모든 나무의 잎들이 떨어지고 깊은 겨울잠에 들어가는 지금쯤 노새가 끄는 작은 수레가 우리집으로 온다. 빈 수레를 끌고 온 사람은 나이 쉰쯤 되어 보이는 조우공장(창호지를 만드는 공장) 아저씨다. 우리는 그 아저씨를 ‘조우아저씨’라고 불렀다. 조우아저씨가 오면 할아버지가 없는 반찬이라도 한상 잘 차려 대접하게 한다. 식사를 하고 난 다음 조우아저씨는 우리집 닥나무숲으로 가 닥나무를 베어 수레에 싣는다.

조우아저씨는 닥나무를 베어간 다음 한달반쯤 지나 이제 우리가 그 일을 잊을 만하면 어느 날 다시 우리집으로 온다. 그게 대략 음력 설날을 보름쯤 앞두었을 때이다. 이때엔 조우아저씨가 두루마리로 둘둘 만 창호지 뭉치를 어깨에 메고 온다. 우리집의 닥나무를 베어간 다음 그걸 원료로 종이를 만들어 그 중 일부를 우리집에 보내주는 것이다.

어린 시절엔 집 앞의 닥나무숲이 저절로 생긴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냥 생긴 숲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이 산 저 산에 퍼져 있는 닥나무를 한곳으로 파 옮겨 닥나무숲을 만들었던 것이다. 집에서 종이를 직접 만들 수 없으니 그 원료가 되는 닥나무를 심어 그걸로 자급자족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조우아저씨가 창호지 뭉치를 가져오면 할아버지가 이웃의 대소가들을 한 집 한 집 떠올리며, 또 그 집에 문이 대략 몇 개인지 어림계산을 하며 창호지 뭉치를 나누신다.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다가오는데 새로 문을 바르라는 뜻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가까운 이웃과 대소가에 종이를 나누었다. 그 심부름을 우리가 신문배달소년처럼 옆구리에 창호지를 끼고 다니며 했다.

그러면 며칠 후 종이를 보낸 것에 대한 답례품이 왔다. 단지 문종이를 나눔에서만이 아니라, 할아버지는 동네 사람들과 또 대소가 사람들에게 늘 커다란 나무 같은 분이셨다. 마을에 쌀이 떨어져 연기를 올리지 못하는 집이 있으면 그걸 자신의 불찰로 여겨 부끄럽게 여기던 분이셨다.

꼭 종이를 보낸 것에 대한 답례품이라기보다 한 동네에 살며 지난 한 해 동안 이런저런 보살핌을 받은 것에 대해 잘 다듬어 손질한 오죽 담뱃대를 보내오기도 하고, 지난가을에 잡은 토끼의 털로 만든 토시를 만들어 보내기도 하고, 잘 곤 수수엿을 보내오기도 하고, 형편이 어려운 집 같으면 표면에 살얼음이 살짝 낀 연시를 보내오기도 했다.

한 해를 정리하는 이 계절만 되면 나는 늘 그때 그 시절의 일이 떠오르곤 한다. 누구나 마음 안에 고마운 분들이 있다. 어떤 해엔 인생에서 아주 큰 도움을 받은 분이 있기도 하고, 두고두고 잊지 못할 도움을 받은 분이 있기도 하다. 나 역시 해마다 새로 그런 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한 해를 보내며 내 마음의 정성을 담은 작은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예전 어느 한때는 고마움의 표시로 주고받는 선물이 그 선물을 준비하는 나에게도 부담이 되고, 또 받는 분에게도 부담이 되게 과하게 했던 적도 있다.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선물들은 그야말로 작으면서도 깊은 정성이 담긴 것들이었다.

이렇게 정작 어린 시절엔 어떤 것이 마음으로 주고받는 선물인지 그것을 바르게 보고 자랐으면서도, 어른이 되어서는 선물의 가격이 곧 선물의 정성을 대신하는 부담스러운 일을 겪기도 하고 행하기도 한다. 백화점 선물코너에 가득 쌓여 있는 이런저런 상품들을 보며 문득 어린 시절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우리 마음속에서도 한 해의 존경과 감사가 닥나무숲에서 종이가 오고가는 것처럼 아름답게 오고갔으면 좋겠다.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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