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동 장군과 명재고택
'살롱'을 쓰면서 많은 공부를 하고 있다. 전국 수백만 독자들이 틀린 부분을 지적해 주기도 하고, 몰랐던 내용을 알려주기도 하고, 좀 더 심층적인 정보를 주기도 한다. 덕분에 고3 수험생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있다. '
조용헌살롱' 693회(누에를 치지 마라)에서 6·25 때 논산의 유서 깊은 문화재인 명재고택을 폭격으로부터 구한 사람이 '미군부대에 근무하던 박씨'라고 썼던 적이 있다. 칼럼이 나간 뒤에 후손의 제보를 받고 보니 이분은 일반인이 아니고 공군 준장으로 예편한 박희동(朴熙東·1923~1989) 장군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이다.
박희동은 논산에서 태어나 형님을 따라 6세 무렵에 일본 나고야로 갔다. 여기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내고 비행기 조종사를 양성하는 비행학교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10대 후반의 소년들을 선발하여 속성으로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하는 소년비행병 과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훈련과정을 마친 박희동은 동남아시아의 격렬한 전투 현장이었던 버마전투(일본에서는 '비루마' 전투라 부름)에 투입됐다. 타고난 운동신경과 뛰어난 조종술의 소유자였던 박희동은 공중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일본의 적기였던 미군기를 17대나 격추하는 실력을 보였던 것이다. 미군 조종사들은 박희동의 비행기를 보면 겁이 나서 도망갔다고 한다. '탑 건'이었던 것이다.
해방이 되고 고향인 논산에 돌아온 박희동은 논에서 벼를 심는 농사꾼 노릇을 하였다. 그러다가 6·25가 발발하자 전국에서 10명의 전투기 조종사를 급히 선발하였는데, 김구 선생의 아들로서 중국공군사관학교 출신인 김신(金信), 이근석, 김영환 등과 함께 박희동도 그 10명에 포함되었다. 이 10명이 일본에 가서 미군의 첨단전투기인 무스탕을 인수해서 6·25에 곧바로 투입되었다.
미군으로부터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던 조종사가 김영환 대령인데, 이때 그 휘하에 박희동도 같이 출격했었다. 김영환과 같이 박희동도 자신의 고향마을이자 명재고택이 있는 논산 노성리에 폭격을 하라는 명령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논산 사람들 사이에서 이 일화가 회자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