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의 능선 전투에서 최초 공세를 담당한 제5 보병사단 "열쇠부대"의 부대 창설 60주년 기념 광고 한국전쟁 초반의 혼란기 동안 잠시 해체되기도 했지만 곧 재창설되어 피의 능선 혈전을 통해 그 명성을 드높이게 되었다. 좌측 사진은 제5 보병사단 "열쇠부대" 36 보병연대와 미 제2 보병사단 "인디언 헤드" 예하 9 보병연대, 그리고 북한군 제6, 12, 27 보병사단이 혼전을 거듭한 끝에 고지 전체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하여 기자단이 "피의 능선"이라 이름붙인 제983 고지의 전경 중국 인민해방군( 중국은 인민지원군이라 우기고 있지만 )의 개입으로 통한의 1.4 후퇴를 개시한 이후 다시금 북으로 반격에 돌입한 한국군과 UN군은 1951년 07월, 너무나도 격한 전투에 지친 UN과 중국, 북한의 휴전회담이 개최되기가 무섭게 양측의 의견충돌로 중단되자 전개된 1951년의 가장 대표적인 고지 쟁탈전이나 혈전( 血戰 )이었다. 워낙 치열한 격전으로 인해 "피의 능선"이라는 명칭이 부여된 수리봉 983 고지를 중심으로 940, 773 고지를 아우르는 본 고지대는 현재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에 위치하고 있다. 평범하기 그지없던 이 해발 983m의 고지가 북한군과 한국군, 미군 간의 치열한 혈전의 무대로 변한 것은 바로 휴전회담 기간을 이용해 진지를 강화하고 보급 물자를 반입하는 통로였던 양구 북방의 문등리 계곡과 사태리 계곡 일대를 이 곳에서 감제할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더욱이 이 지역에 배치된 최충국 소장의 북한군 제12 보병사단과 조관 소장의 27 보병사단은 이 곳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아군의 후방 지역인 강원도 인제 일대까지 훤히 관측하면서 주저항선과 주보급로는 물론 화력지원과 병력 이동 상황 등 모든 군사 행동을 포격으로 방해했다. ◀ 1951년 휴전회담 기간 중 북한군과 중국 인민해방군은 주요 고지대를 요새화했고 이는 한국군과 미군에게 있어 크나큰 난제였다. 이 때문에 자연 이 고지대가 반드시 함락시켜야할 요충지로 부각되었고 민기식 준장의 한국군 제5 보병사단 "열쇠부대"가 그 선봉에 서게 되었다. 제5 보병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사단 예하 3개 연대 중 황엽 대령의 제36 보병연대에게 고지 공략의 중책을 맡겼다. 당시 제36 보병연대는 손개동 소령의 제1 대대, 조시형 중령의 제2 대대, 이규승 소령의 제3 대대로 1개 대대 미만의 전력이었지만 사기는 충천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사기가 충천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이 983, 940, 773 고지대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북한군은 휴전 회담 기간을 이용해 상당한 병력을 진지공사에 투입해 요새화시켰고 이는 983 고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 완전히 민둥산이 되어버린 피의 능선 전투에 투입된 미 제2 보병사단 9 보병연대 병사들 피의 능선 전투는 북한군 3개 사단과 한국군 제5 보병사단 36 보병연대, 미 제2 보병사단 9 보병연대가 맞붙은 1951년 최대의 혈전이었다. 특히 전략적 요충지인 940 고지와 773 고지에는 특별 대우를 해줬는데 무려 5,000발에 달하는 지뢰를 매설함은 물론 고지 후사면까지 교통호와 지하 통로, 토치카 등을 구축해 어느 방향에서 공격을 하더라도 쉽게 뚫리지 않도록 했다. 주요 토치카들 역시 통나무와 바위, 큼직한 자연석을 이용해 견고한 구조를 이뤘고 상부에는 흙을 두툼히 성토함은 물론 나뭇가지와 수풀 등을 덧씌워 항공 공격에 대비한 대공 위장까지 완벽하게 실시되었다. 이런 요새지대에 정면 공격을 감행하는 것은 1905년 뤼순 전투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아군의 목에 들이댄 비수와도 같은 983, 940, 773 고지대는 제5 보병사단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함락시켜야했다. 제36 보병연대장 황엽 대령은 사지나 마찬가지인 고지대로 부하들을 보내야 하는 입장이라 그야말로 가슴이 찢어질 지경이었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상태였다. 마침내 1951년 08월 18일, 오전 06시! 황엽 대령은 조시형 중령의 제2 대대를 좌익에, 이규승 소령의 제3 대대를 우익에 배치하고 손개동 소령의 제1 대대를 연대 예비부대로 돌린 상태에서 고지대에 대한 공세에 돌입했다. 공세의 선봉에 선 제2 대대와 3 대대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미 제1 군단은 야포 200문을 지원해 약 4km 정면에 대해 거센 공격 준비 포격을 가했고 이 때까지만 해도 시작은 좋았다. 그러나, 앞서 뤼순 203 고지 전투 포스트를 열람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원래 요새화된 고지대에 대한 포격은 그렇게 심대한 타격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북한군도 바보가 아닌 이상 화력에서 우월한 미군의 공세에 대비해 주요 기관총과 박격포 진지들을 토치카 및 반지하화시킨 상태였고 고지 후사면으로 지하 통로로 연결된 대피호까지 굴착해 미군의 포격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병력을 이 곳으로 대피시킨 후 포격이 종료되기가 무섭게 복귀시킨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고지대를 지키는 북한군 제12 보병사단과 제27 보병사단의 피해는 사실상 경미했고 돌격을 감행한 제2 대대와 3 대대는 북한군의 거센 포화를 뒤집어 써야 했다. 제2 대대장 조시형 중령은 최병길 중위의 제5 중대에게 773 고지를, 김인덕 중위의 제6 중대에게 940 고지를 공략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최병길 중위의 제5중대는 773 고지 방면에서 쏟아지는 북한군 제27 보병사단의 치열한 탄막을 극복하며 587 고지 동측 경사면을 따라 비득재 쪽으로 우회 기동한 다음 동남쪽으로 뻗어있는 능선을 따라 진격했다. ◀ 요새화의 극치를 보여준 한국전쟁의 고지 쟁탈전은 설사 용맹하기로 정평이 난 구르카병이 투입되었다 할지라도 쉽게 풀리지 않은 전투였다. 이 과정에서 제5 중대는 5부 능선에 구축된 북한군의 전초진지를 공략해 적 2개 소대 규모의 수비대를 격퇴시킨 후 과감한 돌격을 감행해 7부 능선에 육박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북한군은 방어전면이 종심으로 좁혀들수록 보다 견고해지는 소련군의 종심 방어전술을 그대로 응용했고 고지대에서 중대한 지점이나 마찬가지인 7부 능선에는 손님 맞을 준비를 단단히 해둔 것이다. 그 결과 제5 중대는 북한군이 치밀하게 매설해 놓은 지뢰지대에 봉착해 사실상 이 능선에서 고착되고 말았다. 몇몇 기지있는 병사들이 돌파를 시도했지만 일정한 규정이나 매설 순서도 없이 여기저기 마구 매설한 지뢰들로 인해 곧바로 여기저기서 지뢰들이 폭발을 일으켜 사상자가 속출하고 말았다. 최병길 중위는 순식간에 눈앞에서 많은 부하들이 지뢰로 피해를 입는 것을 목격한 후 대책을 세우려 했지만 북한군 제27 보병사단은 그런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지뢰의 폭발음으로 인해 제5 중대의 위치가 노출되면서 곧 61·82mm 박격포를 비롯한 북한군 제27 보병사단의 모든 가용화력이 집중된 것이다. 순식간에 엄청난 포화를 뒤집어쓰게 되자 최병길 중위는 무전을 통해 포병 엄호 사격을 요청하는 한편 예비 부대로 남겨둔 제2 소대를 우측방으로 침투시켜 돌격하도록 했다. 제2 소대의 과감한 우회 돌격으로 인해 정면에 전개시킨 북한군 제27 보병사단의 화력 집중이 잠시 제2 소대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최병길 중위는 제2 소대가 벌어준 시간을 이용해 제1 소대와 3 소대를 신속하게 지뢰지대에서 퇴각시켜 완벽하게 교두보를 다져둔 5부 능선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재편성에 돌입했다. 그렇지만 고지전에서는 항상 낮은 곳에 위치한 부대가 불리한 법이었다. 무엇보다 제2 소대의 무모한 반복 돌격이 큰 문제였는데 후속 지원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제2 소대장은 18일 자정까지 3차례에 걸쳐 돌격을 감행했다가 북한군 제27 보병사단의 거센 저항을 부딪혀 돈좌되고 말았다. 940 고지를 공략한 김인덕 중위의 제6 중대 역시 7부 능선의 지뢰지대에서 진격이 중지되었고 곧 북한군 제27 보병사단의 치열한 탄막을 뒤집어 쓰고 퇴각해야 했다. 결국 공세 첫 날 제2 대대 5중대와 6중대는 고지 정상 800m 전방에서 북한군 제27 보병사단의 역습에 대비해 방어태세로 전환해야 했다. ◀ 한국전쟁 당시 고지 쟁탈전의 전훈을 반영해 특전사를 비롯한 주요 한국군의 각개전투는 주로 고지대에서 실시하는 경우가 많으며 침투와 특공조 등의 임무는 더욱 막중해졌다. 08월 19일, 동틀 무렵 제5 중대와 6중대는 지원 포격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금 773 고지와 940 고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지만 7부 능선의 지뢰지대에 봉착하기가 무섭게 북한군 제27 보병사단의 거센 탄막을 뒤집어써야 했고 그 결과 단 2일 간의 전투에서 제5 중대와 6중대는 전체 병력의 태반을 잃고 사실상 궤멸직전의 상황에 놓였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제5 중대장 최병길 중위는 북한군의 방어 전술을 간파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무모하기 그지없는 돌격의 반복으로 엄청난 사상자를 낸 후에야 간신히 작전을 전환한 뤼순 전투와 같은 경우라 안타까운 일이지만 많은 부하들을 잃은 후에야 최병길 중위는 북한군의 진지를 공략하는 전술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그는 북한군이 지원 포격을 할 경우 대피호로 피신해 전력을 보존한 후 포격 종료와 동시에 진지로 복귀한다는 것을 간파한 후 즉시 조시형 중령에게 보고해 특공침투를 요청하게 된다. 조시형 중령 역시 막대한 피해를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었으므로 이를 허가했다. 마침내 5중대장 최병길 중위는 화기소대장 조성환 소위를 지휘관으로한 12명의 특공조를 편성, 08월 20일 00시를 기해 일제히 제1 대대에서 증원되어 동측방에 배치된 김원준 중위의 2중대 진지를 경유해 비득재를 넘어 773 고지 후방으로 침투하는데 성공했다. 773 고지의 제27 보병사단 방어진지 배후 약30m 전방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한 조성환 소위의 특공조는 마침내 수류탄을 투척하며 과감한 돌격을 감행했고 그와 동시에 제5 중대와 2 중대도 돌격함으로써 순식간에 773 고지의 북한군 제27 보병사단 수비대는 3면에서 기습 공격을 얻어맞게 되었다. 절대 사수를 외치는 지휘관들의 고함소리에 일부 북한군 병사들이 M1891/30 소총과 DP "데그챠레프" 기관총을 난사하며 저항을 시도했지만 이미 예기가 꺾여버린 상태였기에 간신히 살아남은 병력들만 퇴각하는데 성공했다. 3일 동안 막대한 피해를 내면서도 공략하지 못했던 773 고지가 마침내 08월 20일, 20 : 00시를 기해 제5 보병사단 36 보병연대 2대대에 의해 함락되었다. 너무나도 많은 전우를 잃은 끝에 얻은 값진 승리였지만 아직 인접한 940 고지가 북한군 제27 보병사단의 수중에 있었음으로 제5 중대와 2 중대는 신속히 북한군의 교통호와 대피호, 지하 통로를 폭파하는 한편 방어편성을 실시했다. 773 고지가 함락되자 북한군 제12 보병사단이 장악하고 있는 983 고지와 제27 보병사단이 장악한 940 고지에 대한 공략도 이어졌다. 하지만 북한군 2개 보병사단의 저항은 완강했고 제36 보병연대의 3개 대대는 피해가 누적되었지만 여기서 다시금 제3 대대 11 중대장 정창호 중위의 기지가 발휘되었다. 앞서 제5 중대장 최병길 중위의 전례를 보다 응용한 정창호 중위는 부하들에게 돌격 시 함성만 내지르고 사격만 할 것을 지시했고 그 결과 북한군 제6 보병사단의 기관총 사격으로 토치카의 위치가 노출된 것이다. 정창호 중위는 즉시 특공조를 편성해 노출된 토치카들을 차례로 격파하는데 성공, 마침내 08월 22일 11시 30분을 기해 제5 보병사단 36 보병연대는 983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점령한 983 고지였기에 제5 보병사단 36 보병연대의 장병들은 기쁨에 젖었고 곧 미 제10 군단의 참모들이 제36 보병연대장 황엽 대령을 방문해 승리를 축하했다. 하지만 이것은 앞으로 이어질 혈전의 일부에 불과했다. 축하를 받는 와중에도 제36 보병연대장 황엽 대령은 막대한 희생으로 전력이 급격하게 감소된 제36 보병연대만으로는 고지대를 사수할 수 없기 때문에 방어선의 일부를 클라크. L. 루프너 소장의 미 제2 보병사단 "인디언 헤드"가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어찌보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요청이었다. 중요한 요충지인 983 고지를 함락당한 북한군이 이 곳을 탈환하려는 역습을 감행할 것은 자명한 일!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미 제8군 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은 "제5 보병사단 36 보병연대가 점령한 영광을 다른 이들에게 넘겨주려 하는가?"라며 이를 기각했다. 밴플리트 대장의 오판은 곧 현실화되어 제36 보병연대가 983 고지를 점령한 08월 22일 야간을 기해 북한군 제12 보병사단은 일제히 983 고지 탈환을 위해 과감한 역습을 감행했으나 사전에 대비하고 있던 제36 보병연대의 방어선에 막혀 격퇴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고지를 선점하고 있던 북한군 제12 보병사단 입장에서는 지형에 훤히 익숙해져 있었던 반면 제5 보병사단 36 보병연대는 그렇지 못했다. 더욱이 아직 폭파되지 않은 지하통로가 곳곳에 산재해 역습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북한군 제12 보병사단의 1차 역습을 보고 받은 미 제2 보병사단장 클라크. L. 루프너 소장은 밴플리트 대장과 달리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아 막대한 손실을 입은 제36 보병연대를 제35 보병연대와 교대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예하의 제9 보병연대와 38 보병연대를 증원하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08월 26일, 북한군은 전력을 더욱 보강해 제2차 역습을 감행했고 이에 제36 보병연대는 간신히 983 고지를 사수하는데 성공했지만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였다. 마침내 루프너 소장이 투입한 제9 보병연대와 38 보병연대가 합류함으로써 983 고지를 중심으로 한 고지대의 방어선은 보강되었지만 북한군도 제12, 27 보병사단의 전력을 보다 증강시켜 08월 27일 야간을 기해 총공세를 감행했다. 이 공격은 너무나도 매섭게 몰아치는 통에 983 고지를 사수하던 제36 보병연대와 미 제2 보병사단 9 보병연대 2대대 병력으로는 중과부적이었고 결국 983, 940, 773 고지대를 전부 상실하고 말았다. 막대한 희생 끝에 점령한 고지대를 북한군에게 다시 피탈당하자 제5 보병사단 사령부와 미 제2 보병사단 사령부는 고지를 재탈환하기로 결심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제36 보병연대는 후방에서 재정비시키는 한편 제35 보병연대를 선두에 세워 08월 28일, 773 고지를 공략해 13시 30분 재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28일 야음을 틈타 다시금 역습을 감행했고 35 보병연대는 중과부적으로 퇴각할 수빆에 없었다. 하지만 제36 보병연대가 막대한 출혈을 강요당하며 애써 점령한 고지를 북한군에게 다시 내줄 수는 없었기에 08월 29일 오전 10시 40분, 재차 공세를 감행해 773 고지를 재탈환한 후 미 제2 보병사단 9 보병연대 3대대에게 인계했다. 이에 제9 보병연대 3대대는 인접한 940 고지를 공략했다가 도리어 북한군의 역습을 받아 대대 지휘소가 기습을 당하고 773 고지까지 다시 피탈당했으니 이 무렵 북한군은 제2 군단 예하 제6 보병사단을 문등리 계곡에, 제5 군단 예하 13 보병사단을 사태리 계곡에 전개시킨 후 6 보병사단 예하의 13 보병연대를 증원시켜 이 일대의 전력을 2개 사단에서 3개 사단으로 증강시키고 있었으니 이런 식의 소모전으로는 전투의 끝이 보이지 않을 기세였다. 이 때문에 미 제2 보병사단 사령부는 작전을 처음부터 다시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군이 전력을 증강하고 있었으므로 미 제2 보병사단과 한국군 제5 보병사단만으로는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공산이 컸기에 결국에는 제72 중전차대대 B중대와 미 제1 해병사단, USAF 제5 공군으로도 모자라 한국군 제7 보병사단 "칠성부대"( 사단장 : 김용배 준장 ) 예하 8 보병연대와 제8 보병사단 "오뚜기 부대"( 사단장 : 최영희 준장 ) 예하 27 보병연대까지 끌어와야 했다( 오늘날 한국군의 대표 메이커 부대 3개가 참가한 혈전이었다 )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제2 보병사단장 루프너 소장은 마침내 09월을 기해 제7 보병사단 "칠성부대" 8 보병연대를 773 고지 좌측방에 전개시켜 북한군을 견제하도록 하는 한편 제9 보병연대에게 773 고지를 탈환할 것을 지시했다. ◀ 고지를 향해 90mm 주포를 사격하는 M46 패튼 전차 당시 미 제2 보병사단은 미 제5 공군에 지원요청을 하는 한편 예하 72 중전차대대 B중대의 패튼 전차들을 투입하는 등 철저한 화력지원과 공세를 통해 마침내 피의 능선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동시에 제38 보병연대는 고지대를 우회해 배후를 차단함으로써 고지에 전개된 북한군 제6 보병사단 13 보병연대, 제12 보병사단, 제27 보병사단의 퇴로를 봉쇄하도록 했다. 요새에 포진한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최소 3배 이상의 전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전장의 불문율이 완성되자 983, 940, 773 고지에 포진한 북한군 3개 사단은 독안에 든 쥐 꼴이 되고 말았다. 안 그래도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되던 북한군 3개 사단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린 것은 바로 미 제1 해병사단과 한국군 제1 해병연대가 공략 중이던 펀치볼에 구축된 북한군 제1 보병사단의 방어선을 공략해 서서히 붕괴시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51년 09월 20일, 함락 ) 만약 펀치볼이 함락된다면 다음 차례는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북한군 3개 사단은 09월 03일, 773 고지가 미 제2 보병사단 9 보병연대에게 함락되자 940 고지와 983 고지를 포기하고 북방의 894, 941, 851 고지대( 단장의 능선 )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런 적정의 상황을 모르고 있던 미 제2 보병사단의 9 보병연대와 23 보병연대는 09월 04일 940 고지를 무혈점령했고 09월 05일에는 수리봉 983 고지를 점령함으로써 마침내 이 고지대를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한국군 3개 사단 병력과 미 공군, 해병사단이라는 대군을 동원해 그야말로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이뤄낸 쾌거였다. ◀ 피의 능선을 완전히 장악한 미 제2 보병사단 "인디언 헤드" 현재 전력이 많이 감축되었지만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전투력을 유지한채 대북 억제전력으로서 한반도의 평화를 수호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그 와중에 적잖은 사고들이 발생했지만 이들이 존재함으로써 우리 군은 1개 기계화 보병사단 및 2개 기갑여단을 창설할 비용을 신무기 개발 및 개량에 투자할 수 있으니 국익에 도움이 된다 하겠다. 이 전투에 참가한 한국군 제5 보병사단은 현재 경기도 연천으로 이동했고 피의 능선 전투 전적비는 제21 보병사단 "백두산 부대"에 의해 건립되었지만 이 전투에서 산화한 제5 보병사단 36 보병연대의 호국영령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당시 워낙 많은 포탄들로 고지대를 도배해버리는 통에 훤한 민둥산이 되어버린 능선이 온통 피로 붉게 물들어보인다 하여 현장을 취재한 미군 성조지의 종군 기자들에 의해 "피의 능선"으로 명명된 983 고지대 전투는 한국군 제5 보병사단의 투지와 용맹성을 널리 떨친 전투이자, 현재의 주한 미군 제2 보병사단 "인디언 헤드"에게 있어 자랑스러운 승전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전투 결과 북한군 제6 보병사단 13 보병연대, 제12 보병사단, 제27 보병사단은 1,250명이 사살되는 등 총 15,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해 전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한국군 제5 보병사단 36 보병연대와 미 제2 보병사단 역시 전사 326명, 부상 2,032명에 실종 414명이라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피의 능선 전투 결과 한국군과 미군은 바로 북방의 단장의 능선을 공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중요한 감제고지를 확보해 역으로 북한 지역을 감제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피의 능선은 제21 보병사단 "백두산 부대"가 철통같이 수비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피의 능선 전투와 같은 혈전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견고한 적 진지에 대한 우회 및 특공침투와 허장성세 등 창의적인 전술의 유연함이 필요하다. 또한 전차와 기계화 보병이 상호 엄호하며 진격하듯 산악전에서 돌격제대를 엄호할 경량 지원화기의 개발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미국(미군)은 6.25 한국전장을 겨울은 알라스카의 동토같고, 여름은 오키나와의 몬순같다고, 그 아픈 추억같지않은 살인의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씁니다. 한국민들이여! 그때 참전한 연합군 - 특히 미군 - 들에게 억겹의 정으로도 갑지 못할 한국민의 은인임을 기역하고 이 시대의 벗들에게 설파합시다.
boyager5 골수좌퐈분자 같으니라고 ㅉㅉ 미국이란 말만 나오면 발끈하는 사람중에 6.25 격어본사람 있수? 아주 기본적으로 중동군 막아준 국가가 어딜까요?
그거 못막았음 자리안자서 인터넷을 할수나있었을까요? 동맹국가인 미국한테 간,쓸개 다빼주는 행동은 참 머같고 머같지만 어쩔수 없잔습니까 자주국가로써 국방력을 미국을 능가할만큼 올리기전엔 택도 없는 소리죠... 마지막으로 연합군이 우리나라에와서 멀 어떻게 도와줬는지를 자세이 알려면 인터넷에서 나불대지마시고 삼각지에있는 전쟁기념관을 한번 가보세요 제 생각으론 님은 한번도 가본적없는거 같군요 꼭 시간내서 다녀와보시길 바래요..
옛날에 백마고지란 영화였나? 제목모르겠네.. 초딩때도 아니고 유딩때 봤나.. ㅋㅋ 그 전쟁영화가 갑자기 생각나네.. 뺏고 뺏기는 고지전투.. 그 어린마음에 어찌나 맘이 아프던지.. 이렇게 목숨바쳐 나라 지켜놓았더니만 지금 빨갱이들이 북한에 돈 갖다바치고 눈치나 보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러게요....통일은 우리의 염원 이지만.... 남과 북의 통일 방식이 다르니 문제이지요....반드시 평화 통일이 돼야는데.....우리가 초등학교때 배우기를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부강해지면 북한은 그때...자발적으로 굽히고 들어 올거니까 우리는 열심히 경제 발전에 힘써야 된다고 배웠는데...지금 와선 그게 아니니 속 터집니다. 굽히기는 커녕...핵까지 만들어서 위협을 하고...그동안 먹고살기 힘든척 쌩쑈를 해서 국제적으로 도움을 받아 살면서...엄청난 무기나 만들고......그러나..평 화통일은 이뤄질 것입니다. 선열들이 흘린피가 헛되진 않을겁니다.
무더기로 사람 죽이는걸 목표로 할려면 총이필요없다. 그냥 중성자 한방으로 해결해라 .인간이 해선 안되는 살상을 밥먹듯 해야 된다고 하니 가릴거 없는거 맞쟈나.그리고 비굴함이 철철 흐른다. 지능적으로 노는 일본애들에게 힘으로 안되니까 고개 똑받로 드는 놈이 없고 싸움붙이는데도 군소리 없이 잘도 에'예 하고 움직인다는ㄴ거다.돈 앞에 정신을 팔아 먹어 정의가 필요 없는게 현실이다.
역쉬 5사단 입니다. 전 27연대 2대대 있었습니다. GOP 상승때 백마고지 까지 우리 관할 이었지요 우리
사단가에 피의능선 가칠봉이란 가사 있습니다. 그래서 선배님들의 노고를 백마고지 기념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간들 되시면 철원 대마리에 있는 백마고지 기념관 가보세요 전방 GP및 GOP 보입니다.
피의 능선의 승리자들은 얼마나 많은 적군을 죽였을까요??? 죽어간 적군도 부모에게는 소중한 자식이었을 텐데......사실 승리자도 패배자도 모두 피해자입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평생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전쟁으로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는 김일성 때문에 너무나 많은 소중한 인명이 희생됐습니다. 지도자의 책임.....정말 중요합니다.
2대대 몇중대에서 근무하셨지요? 난 5중대에서 근무를 했는데요 신망리에 있을때 근무했습니다. 다방과 가게 전부 추억속에 있는것 같습니다 이제 28년이 자나간것 같네요. 우리 5사단에 이러한 역사가 있었는줄 몰랐네요. 27,35,36 중 27연대, 2대대 ,5중대 1소대원으로 근무했습니다. 당시 전우들의 행복한 50대를 바랍니다.
이창용님과 같은 분의 댓글을 읽다보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전장에서는 동족이니, 가족이니 하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저 내가 죽이지 않으면 저 녀석이 나를 죽인다는 생존본능과 임무완수의 사명감만이 존재합니다.
일단 명령이 내려지면 복종하는 것이 군인의 기본 자세인데 이창용님의 댓글을 읽어보면 님이 군복무도 안하신 것인가 의심됩니다
엄청난 전장의 사투에 대한 기록 잘 보았습니다. 일단 전투에 나서면 이겨야되지요.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나를 지키기 위해서도 당연한 일이지요. 근데 전투는 쉽게 말하면 싸움인데.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한 민족간의 싸움,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한 형제간의 싸움. 지역사랑에서 비롯되는 지역갈등 등등 . 너죽고 나살자식의 해법으로는 그 피해가 엄청나 엉뚱한 나라나 사람에게 어부지리상납하기 십상이고.상대를 인정하고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현자의 선택일 것입니다.
983 고지에서 2개월씩 2번 올라갔었습니다. 당시의 치열한 포격으로 인하여 988고지가 983고지로 바뀌었다고 하죠.... 그런 사연을 품어서인지 피의 능선 983고지의 가을 아침은 너무나 싸하게 아름다운 느낌이었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정상에서 바라보는 운해는 여전하겠지요. 언제나 다시 가볼 수 있을 지 아련한 추억입니다.
1990년 2월 20일 입대하여 대광리에 있는 5사단 훈련소에 줄을 서서 들어가던 기억이 새록 새록....... 7895부대(보병 제 36연대) 연대본부 참모부 인사과에 근무했었는데.....옛 기억에 잠기게 합니다. 선배님들의 피의 댓가로 오늘 편안함을 누리며 7895부대원이었다는 긍지를 갖습니다.
DJ와 노무현 정권이전엔 6월달만되면 625와 호국영령들에대한 추모와 북괴군과 김일성일파들에 대한 국민의 각성을 새롭게 했는데 ....
조국을 구하겠다고 빨갱이들을 막다 장렬하게 목숨을 버리고 대한민국 산하 곳곳에 백골이 되어 누워있을 전몰장병들이 현재의 좌익 빨갱이들이 주인행세하듯 설치는 대한민국을 본다면 백골이 되었써도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분통함을 씹어삼키고 있을 것이다.
피와 땀이 어려있는 이고지 저능선을....이란 노래가사가 실제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군요..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조상님들, 그리고 그당시 용맹하게 싸워주신 할아버지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당신들의 헌신이 현재의 나를 있게 합니다. 우리 어르신들께 더욱 열심히 충성과 효도를 다하겠습니다. 돌아가신 조상님들의 영화로운 명복을 빕니다.
이 기사를 보고 피가 끊는것 같습니다.예전 제가 이곳 983고지(피의능선) 그리고 단장의 능선상 백석 대대op에서 포병 op장을 했었는데 (87~88년도) 그때는 저의 아침 산책로 길이었지요..... 감회가 새롭습니다.바로앞 153Gp로 북한군 대위 신중철이 귀순해 온 지역이기도 한데(참 이때에 포병관측반에 레이저 거리측정기가 보급 됐었는데 우리 병사들이 심심하면 레이저 거리 측정기로 북한군 병사들의 머리,사타구니에 조준해서 레이저를 발사하면서 낄낄대는걸 보고 같이 웃었는데 그때그시절이 그립습니다.(보병 21사단 포병 183대대에서 근무 했었음)문등리, 사태리 축선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들입니다.문등리 계곡을 따라 조금 물길이 깊은데는 열목어가 많이 살았었는데.... 그 귀한 열목어를 낚시로 잡아 회를떠 소주도 몇잔 한 기억이 아련합니다.
군장교들이 이 블로그를 보고 정책결정을 하지는 않겠지만.
이제는 국민들도 무엇이 시급하고 어떻게 군대도 바뀌어야한다는것을 잘알고있다는걸 군장성들도 블로그를 통해 깨달았으면해요.
과거 6.25시절전쟁사가지고 반세기가지나서 사실상 쓸모없이바뀌어버린상황을 호도하고서 자신들의 밥벌이직장을 위해서 삽질병사를 대거보유하면서 국민세금
갉아먹는 작태는 이제사라져야한다고생각합니다.
단~~~~~결!!!!!!
퍼싱님이 언제 5사단이야기 올려주시나 내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혹시 나오면 뭘까하고 추측도 해봒는데 역쉬 피에능선이군요!!!
글 잘 읽었구요
위에 댓글 다신 선배님들도 많이 보이시는데,반갑습니다.
힘들었던 시절도 지나고보면 다 추억으로, 남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아련한 추억속에 내무반사람들 많이 생각나시겠습니다.
선배님들 즐거운 토요일저녁보내시고 항상 건강하시고 발전하시길.......
단!~~~~~~~~~~~~~~~~결~!!!!
/taketake
2차 대전땐 공군이나 해군에선 인종피부에 따라서 보직을 따로 주었습니다
흑인공군편대,흑인취사병 뭐 이런식으로요... 해군에선 아예 물위에 떠다니는 배들에는 전투요원으론 흑인들을 쓰지 않았고
잠수함에서도 힘든 보직을 주었다고 합니다 육군은 총알받이니 만큼 인종차별(?)은 없었습니다 머 장교들 대부분이 백인이었긴 합니다만...
3군중에 육군은 이미 2차대전때부터 혼성부대가 있었고 공군,해군 순으로 인종차별을 없애긴합니다
특히나 해병대같은 경우에는 흑인을 쓰지 않았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군요
6.25때와선 대규모 전투가 아니다 보니 대부분 모병제나 직업군인들로 채워졌는데 모병제를 쓴다고 하면 아무래도 비주류층이던 흑인들의 지원이 많았고
흑인들도 2차대전때 열심히 싸웠고 하다보니 울며겨자먹기로 해군,공군에서도 혼성부대를 운용하기 시작합니다
지금도 흑인들은 알게모르게 차별을 받고 있죠... 물론 황인종도 무시당하고 차별받긴합니다만...
저는 21사단 63년대 4대대14중대 복무함. 80년 가을부터 81년 봄까지 문등리 계곡을 터 삼아 단장의 능선, 피의능선,스탈린고지를 앞에 두고 근무했었습니다. 983고지는 79년 여름에 방첵선 공사도 하고 지난 전쟁의 참혹상을 그대로 볼 수 있었던 곳이죠. 아군 군화,철모,수류탄.M1실탄등 수없이 나왔고 같은 호에서 중공군들의 야전삽. 유골들이 뒤엉켜 나오기도 한 곳이죠. 80년도에 사계청소하면서 유명을 달리한 전우들도 생각 나는군요! 영동의 정진용 하사, 김옥선 통신병 잘들 살고계시겠죠?
나도 21사단 63년대7중대 5중대 복무헀음다. 84년부터86년 까지요 . 983고지는 수시로 갔지요. 동계훈련, 도로작업,제설작업,화목작업등 그리고 983고지 근무까지
군 생활 시절이 생각이 많이 나네요. GOP 근무도 많이 생각납니다. 함께한 전우들 보고싶습니다. 모두들 잘지내고들 있겠죠?
83~85 백두산부대(6중대)에서 근무 했을 때 983 고지에서도 파견 생활을 했었지요. 그 때의 전우들이 그립네요.
매년 6월이면 6.25 때 이 전투에서 대부분의 부하직원을 잃은 노병께서 이 고지에 방문하여 전쟁 때 산화한 전우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분께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매우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지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저희 가족들이지요....
이분들께 항상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 전쟁이 다시는 없어야 하며, 내 자식을 전쟁터로 내몰지 않도록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5사단 35연대2대대8중대화기소대에서근무한 사람입니다 본기사를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저의근무기간은 51년5월13일 재주도훈련소 에입대해 훈련을마치고 8월초에 5사단에 배속되어 기사에 나온 피의능선에서 전투했읍니다 그리고 가칠봉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명예재대후 지금껏 살고있읍니다 마침 기회가 되서 작년 10월에 백마고지 관광차 갔는대 5사단장병을만나 5사단역사를 이야기 하다 5사단가에 피의능선가칠봉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너무가슴이 뭉클했읍니다 5사단이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