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수산장에서 8월 15일 열린 < 빛 사람 수양회 모임 > 에서 새 세 상 여 성 모임 관련하여 자허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요약해서 올립니다.
이제 우리 사회가 큰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왔고 여성들이 큰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과거 큰 사회적 변혁기에는 남성들이 앞장 서서 큰 역할을 도맡아 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여성들의 미덕인 참된 여성성과 참된 모성성이 큰 우주를 열어가게 됩니다. 결국 여성들이 큰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군림해 왔던 남성들은 여성들 밑에서 살아가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편, 남녀불평등을 그다지 겪지 않고 살아온 20대 여성들이나 30 대 여성들과 달리 50 대 여성들의 경우는 여성 차별의 현실을 직접 겪어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로 감정이 폭발하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뜻하는 여성성은 우주 만물을 포용하는 우주적 여성성입니다. 이는 모든 만물을 내 자녀처럼 드높이고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 두는, 우주적 여성성을 뜻합니다. 새 시대는 <주역>으로 말하자면 “지천태,” 즉 하늘이 밑에 있고 땅이 위에 있는 괘를 뜻하는 세상을 향해 변하고 있으며 이는 “하늘이 땅에 임한 세계, 하늘 사랑이 땅에 넘치는, 바로 무한평화의 시대”를 의미합니다. 바로 여성이 큰 역할을 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진정한 수행법은 자기 개인의 영적 성장이나 가족의 행복을 추구하는 수행이 아닙니다. 이 수행법은 자신과 가족, 우주 모든 생명이 하나가 되어 빛나는 삶을 꿈꾸는 것을 가장 중시하고 있으며 내 자녀보다 다른 집 자녀들이 하늘 축복을 먼저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그 핵심입니다. 바로 이 수행법 자체가 새로운 시대의 원리에 맞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새로운 여성운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변화해서 세상 변화에 기여하겠다는, 구체적 행동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 아래 모일 분들은 정의를 세우려는 분들, 정의로운 일을 하려는 분들, 그리고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헌신적으로 기여했던 분들입니다. 이 세상이 보다 좋은 세상이 되기를 갈망했던 분들이 함께 하게 되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현자처럼, 깨달은 성자처럼 아름답게 살고, 그로 인해 모든 존재들이 평화로워 지고 행복해 지게 된다면, 자매님들이 함께 모여 하는 일들이, 그리고 자매님들의 삶이 훨씬 가치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세상을 과연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는 회의나 의구심이 있으면 새 세상은 쉽게 오지 않습니다. 새 세상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을 때, 그리고 우리 자녀들이 무시당하지 않고, 천대받지 않는 세상이 온다는 강한 확신이 있을 때에야 그런 새 세상은 옵니다. 이것은 가장 현실적인 노후대책이기도 합니다.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이, 영적인 수행의 진보에 별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런 미래를 상상하면서 긍정적으로 일하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영적 수행의 진보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예수와 부처께서 새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 또는 “이상향이 된다는 믿음을 가져라” 라는 말씀을 두 분께서 많이 하셨지요. 아름다운 이상향을 바라는 마음, 빛나는 삶이 가능하다는 생각, 그리고 이상향이 이뤄진다는 믿음을 가진 만큼 사람들의 삶은 아름답고 윤택해집니다. 경쟁에 이긴 자들이 모든 것을 누리고 군림하는 세상, 경쟁의 패자들이 외롭고 쓸쓸하게 고통 받는 현실을 당연시 하는 영혼은 약육강식하는 동물의 영혼에서 진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영혼 안에는 빛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는 마음이 영적 수행의 진보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상향을 바라는 마음이 우선 중요하며, 그 이상향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 그 이상향을 만들어 기여하는 삶을 산다면 수행은 진정한 진보를 이루게 되며 그 영혼은 진정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로서 이 세상을 하늘나라처럼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수행입니다.
수행단체 안에서 많은 분들과 함께 아름다운 뜻을 전하고 나누는 것은 필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수행 모임은 마치 종교활동처럼 오해받기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음이니 수행이니 하는 어휘에 어색해 하는 분들, 종교 활동처럼 떨떠름하게 받아들이는 분들도 많습니다. 수행에 관심 있는 분들이 1 퍼센트나 2 퍼센트라면, 세상이 좋아지기를 바라고 아름다워졌으면 하고 바라는 이들, 그리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3 퍼센트 내지 5 퍼센트에 이릅니다. 그들은 도닦기나 마음 수행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좋은 세상이 되기를 적극적으로 바라며 세상이 더 평화로워 지기를 간절한 관심을 갖고 바라는 분들입니다. 그 외 약 10 퍼센트의 사람들은 “세상이 좋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모든 이들이 가치있게 존중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 외 20 내지 30 퍼센트의 사람들은 “세상이 좋아지면 좋겠다”는, 약간 소극적인 분들입니다. 나머지 50 퍼센트의 사람들은 “세상은 그저 다 그런 거야. 그래도 좋은 세상이 오면 좋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지요. 위에 말한 3 퍼센트 내지 5 퍼센트의 사람들이 바로 <새세상여성모임>과 인연이 닿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구휼단체, 정치운동,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운동, 환경운동 단체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 분들은 수십개 수백개의 사회운동 단체가 이미 존재하며 온갖 활동을 하고 있는 데 굳이 새로운 이름의 단체를 만들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미 숱하게 많은 시민사회운동 단체들이 절대로 못하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며 어쩌면 유일한 길인데 바로 그 것을 안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운동단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 나라, 불국토가 만들어 지려면 마음이 하늘의 천사같고 보살같은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그런 마음의 변화, 영혼의 혁명적 변화가 있어야만 천국과 불국토는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지난 1년간의 수행은 “나도 천사이며 너도 천사이고 우리 모두 천사이니 천사로 살아버리자”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한 번도 이런 생각을 못해본 이들에겐 바로 이것이 획기적인 마음의 변화입니다. 이런 마음 변화가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결국, 맨 먼저 이런 마음의 혁명적 변화가 있고 난 다음에 새 시대 이상향에 맞게 사람들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운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 이런 운동을 하는 단체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나도 천사이며 너도 천사이고 우리 모두 천사이니 천사로 살아버리자”는 생각을 실천하고 널리 펼치는 단체야 말로 만사형통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3 퍼센트, 좋은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적극적으로 바라는 분들이 이런 운동에 동참하면 세상은 달라집니다. 그 다음 10 퍼센트가 동참하게 되고 그 다음 30 퍼센트, 즉 세상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분들이 합류하게 됩니다.
잘못된 세계관, 잘못된 가치관에 젖어 사는 분들도 큰 자아혁명을 통해서 커다란 역할을 하시게 됩니다. 중국혁명사를 보면 장개석이 이끌던 국민당군 사천성사령관이었던 주덕 장군은 부정부패의 화신같은 인물로 마약에 절어 주지육림에 빠져 살았지만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삶에 회의를 품게 되었습니다. 국민당군을 떠난 그는 모택동이 이끌던 공산당 군대에 합류해 나중에 홍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부패하고 무능했던 장개석 국민당군을 몰아내고 새 세상을 연 인물로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사회주의 이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시대입니다. 부처와 예수의 세상으로 되어야 세상은 진정 아름다운 세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새 세상은 큰 관용과 큰 평화의 힘으로 이뤄지게 됩니다. 나보다 다른 이들을 먼저 드높이고 존중하는 방식의 새세상 운동이어야만 사회주의 혁명의 오류를 벙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북한정권에 대해 가장 이해하려 애쓰는 남한의 정치가들에 대하며 저는 질문을 던집니다. “김정일이 어찌 세끼 밥을 편안하게 먹을 수 있습니까? 변방의 어린이들이 굶주림을 참다 못해, 그리고 굶주리는 어린 동생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가서 구걸을 하고 얻은 돈을 가지고 국경을 넘어 다시 북한으로 돌아오다 국경 근처에서 돈을 빼앗기고 심지어는 죽음을 당하기도 하는 현실 속에서 어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고위관리들이 편안히 앉아 밥을 먹을 수 있습니까? 고위관리들이 먼저 한끼만 먹고, 어린이들을 구했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운동에 동참하는 이들은 먼저 자신을 비우고 다른 이들을 드높이기 때문에 성공하고 인류가 꿈꿔온 이상향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향을 바라는 마음을 먼저 갖고, 이상향을 적극적으로 바라는 마음을 갖고, 이상향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하고, 이상향을 만들기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먼저 이상향을 바라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그 이상향을 적극적으로 바라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이것은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이상향을 적극적으로 바라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을 갖게, 확신을 갖게 해줘야 합니다. 아까 말한 3퍼센트의 사람들 중에도 우리 살아 생전에 이상향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이들은 10 퍼센트도 안됩니다.
서구의 사회주의와 달리 동양식 사회주의 운동도 있었습니다. 천국같은 세상을 만들려 했던 동학과 태평천국이 바로 그것입니다. 동학운동은 좌절되었고 태평천국은 홍수전이 스스로 왕을 자처하기 시작하면서 변질되었습니다. 수운 최 제우 선생 한 사람으로 시작했던 동학에 팔도의 백성들이 모여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새 시대가 열리고 모든 사람들이 하늘처럼 서로 섬기고 사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동학도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후천개벽, 천상의 하늘나라처럼 사는 시대에 대한 신념,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훨씬 더 잘, 동학의 가르침 그대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학 포교 30 년 동안, 교통, 통신이 지금처럼 원활하지 않았던 시대에 당시 인구 천 만명 중 200 만 이상이 동학도였습니다. 동학의 교세가 4, 5년 사이에 10배로 확대되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바로 해월 최 시형 선생께서 충북 옥천 청산면을 근거지로 삼아 포덕하시던 시기였지요. “개벽이 온다”는 말이 퍼지면서 동학은 급격히 확산되어 그 후 역사적으로 유명한 보은집회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충북 보은군 마로면 뒷산은 옥녀산발형의 명당으로 하늘 선녀가 머리를 감고 풀어헤친 형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여성들이 모여 집회를 했다면 크게 성공했을 명당이지요.
나이드신 현자들 말씀 중에 “동학혁명이 두 갑자 후에 이상향이 만들어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두 갑자는 120년이니 1894년 동학혁명 후 120년 뒤, 즉 2014년이 됩니다. 동서양의 현자들 말씀 중에도 “마음이 혁명을 일으켜 현자가 되고 천사가 되는 사람들이 출현해 그들이 또 현자들과 천사같은 사람들을 양성해서 세상이 변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옛 호피 인디언들도 동양 사람들, 빛의 사람들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했고, “그들은 세상의 모든 생명을 드높이고 위대하게 만들며, 스스로는 세상에서 가장 겸허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바로 지구가 기다리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라고 했다 합니다. 그리스정교회 소속의 세르비아 예언자 한 분은 “동방에서 현자들이 와서 그 아름다운 삶의 지혜를 가르쳐 준다. 처음에 그들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중에 받아들여지게 된다. 바다에 둘러싸인 나라에서 그런 현자들이 온다” 라고 말했다 합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구체적 실천에 대해 말할 차례입니다. 우리 자신이 변화하고 많은 분들이 그런 변화의 축복을 받게끔 다양한 기회를 만들면 됩니다. 공동체도 있습니다. 하늘나라, 불국토 같은 삶이 이뤄지는 마을을 만들어 내고 학교, 수양관을 열면 많은 이들이 보고 배우게 됩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을 보고 배우면서 공동체 연찬을 통해 나누게 됩니다. 주먹 휘두르며 시위하지 말고 욕하지 말고 좋은 것만 하고 보여주면 됩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잘못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넘치는 잘못된 에너지, 세상 에너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니, 이걸 알게 되면 아무도 미워할 수 없습니다.
독일 잉게솔 남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사처럼 착한 남매가 히틀러 암살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사형당한 이야기지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책이 바로 이들 남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암살 대상인 히틀러조차 잘못된 세상 기운의 피해자라는 생각으로 포용했던 그들 남매처럼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만물을 포용해야 합니다. 그런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하려면, 적극적으로 그 희망을 품는 이들이 많아지게 하려면, 새 세상에 대한 확신을 가진 이들이 많아지게 하려면 바로 그런 생각을 갖는 학교, 공동체들이 많아지면 됩니다. 어느 한 곳에 먼저 만들어지면 1년도 안돼 10개나 20개가 만들어 지고, 2, 3년 안에 백개, 500 개, 천개가 만들어 질 것입니다. 10년도 안돼 천개 되면 이 세상이 확 달라질 것이구요. 그 과정에 이 세상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되고 형제자매님들이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크게 도와주게 됩니다. 도움을 받은 이들의 생각이 바뀌게 되면 세상은 크게 달라지는 거구요.
남자들이 거창한 뜻을 세워도 안사람이 반대하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산속 공동체를 가자고 해도 아내가 반대하면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여성들이 먼저 시작해야 남자들이 따라오고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지금까지의 운동과 거꾸로만 하면 됩니다. 거창하게 떠벌리며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길만 열어주면 스스로 동참하게 됩니다. 새 운동에 대해서 한 번만 말씀하세요. 다만 많은 분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넌지시, 지나가는 말로 한 번만 말씀하십시오. 단 한번 지나치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오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숫자를 늘리려 하지 마십시오. 힘에 부치는 일, 부담되는 일은 하지 마세요. 중국혁명이 1919년인지 1920년인지 첫 대회를 열었을 때 23명이 참가했다고 들었습니다. 위임장을 보낸 두 명을 포함해서요. 그러나 그 후 30년 만에 8억 인구의 중국을 변화시켰습니다. 목표를 작게, 낮게 세우면 성과는 넘치게 됩니다. 함께 뜻을 같이 할 분의 숫자를 절대로 억지로 늘리려 하지 마십시오. 마인드힐링에 다섯 명만 와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면 됩니다. 50명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 보다 적은 숫자에 실망합니다. 하지만 다섯명을 목표로 한다면 일곱명이 왔을 때 기분이 좋아집니다. 목표는 가장 작게, 가장 쉬운 일로 시작하십시오. 소풍갈 때 콧노래 부르듯 하십시오. 그러면 계속 발전하게 됩니다.
때로 나중에 동참한 일부 자매님들이 이 세상을 완전히 바꾸려면 이 세상을 때려부수자, 이렇게 자그맣게 해서 어느 세월에 세상을 바꾸겠느냐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존의 방식입니다. 그 방식으로는 절대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냥 비난만 하고, 싸우기만 하고, 거창한 구호를 앞세우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혹시 이 모임에 뒤늦게 합류해서 그들의 운동원리로 이 모임을 접수하려는 분들이 있으면 미련없이 버리고 떠나세요. 자매님들이 기둥이니 기둥이 떠나면 그 모임은 무너집니다. 자매님들이 계셔야 이 일은 성공합니다. 절대로 기존 사회운동을 답습하시면 안됩니다. 모든 것을 기존 사회운동과 반대로 하세요.
보낸 시간: 2009년 10월 16일 (금), 5:27:39 AM
제목: [알림]유쾌한섹슈얼리티인권센터
"십대 섹슈얼리티 전문강사 워크샵 : 십대의 섹슈얼리티를 배우다"
다음은 회원요청에 따른 알림 메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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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유쾌한섹슈얼리티인권센터에서도 즐겁게 일하고 있는 변혜정입니다.
유쾌한섹슈얼리티인권센터(이하, 유섹인)라는 단체가 많이 낯설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섹인은 사람들의 존재 양식과 타인들과의 관계 맺는 방식인 섹슈얼리티의 쾌락과 위험 등을 가시화하여
각각의 위치에서의 자신의 언어로 타인과 소통하고자 만든 단체입니다.
이런 목적에 따라 다양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고요.
그 계획 중 하나로서, 이번 가을 "십대 섹슈얼리티 전문강사 워크샵: 십대의 섹슈얼리티를 배우다"란 제목으로 '2009 가을 유섹인 강좌'를 열고자 합니다.
십대란 주제어, 섹슈얼리티란 주제어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매우 뜨거운 이슈입니다.
하지만 뜨거움에 비해 논의의 방향은 항상 익숙한 방식으로, 예전에 했던 말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흐르고 있어, '현실'을 설명할 수 없는 갑갑증을 느끼게 합니다.
유섹인 강좌는 이런 갑갑함을 나누고, 다른 상상력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기획하였습니다.
십대의 통제와 보호, 성폭력, 티켓다방, 십대이반, 조기모성, 미혼모, 영화와 인터넷, 핸폰 등에서의 십대의 일상과 저항 등을
주제로 11월 9일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십대 섹슈얼리티에 관심 있는 분들, 십대들과 직접 상담을 하면서 여러 고민을 하고 계시는 분들, 초중고등학교에서 성교육을 하고 계시면서 소통이 힘들었던 경험이 있던 분들 모두를 초대합니다.
더 자세한 문의나 참가신청은 sexuality@sexuality.or.kr 로 메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참가신청하실 때,
이름:
입금자명:
소속:
전화연락처:
이메일주소:
는 꼭 적어 주시기 바랍니다.
제1차 유섹인 섹슈얼리티 강좌
제목 : 십대 섹슈얼리티 전문강사 워크샵 : 십대의 섹슈얼리티를 배우다
기획 : 유쾌한섹슈얼리티인권센터 Pleasure, Danger and Empowering Center
후원 : 도서출판 동녁, 안세M치과
대상 : 십대 교육 관련자, 쉼터 관리자. 교사, 성교육강사 등
일시 : 11월 9일 - 12월 7일 매주 월요일 7시~10시
장소 : 서강대학교 (추후공지)
수강료 : 12만원(유섹인 회원과 서강대 관련자 10%할인)
*임금계좌: 우리은행 1005-001-549121 예금주: 유쾌한섹슈얼리티인권센터
* 본 강의는 도서출판 동녘에서 "유쾌한섹슈얼리티 강의 - 십대의 도전과 힘기르기(가제)"로 다담어 집니다. (최종 원고는 추가/변경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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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11월 9일 십대의 섹슈얼리티 통제와 보호 : 예스, 노우, 그리고 탈주?!(변혜정)
2강 십대의 성폭력피해의미와 성문화(변혜정)
3강 16일 모바일 테크놀로지, 그리고 진동하는 십대(김예란))
4강 미디어에서의 십대 섹슈얼리티 재현(손희정)
18세기 산업혁명은 화석 에너지가 곧 권력의 상징이 될 것을 예고했다. 에너지 독과점을 기반으로 급팽창한 권력은 전쟁의 씨앗이 되어 고대로부터 이어온 원시신앙을 축소시켰고, 과학과 의학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훗날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는 기술의 진보와 인간의 호기심 영역을 지구 내부 깊숙한 곳과 지구 밖 외부 세계로 구체화하는데 일조한다. 보다 다양해진 우리 인류의 호기심 영역은 기술의 도움을 받아 미디어 산업을 부흥시킨다. 미디어의 발전으로 권력은 축소 하는듯 했으나 새로운 영역으로 진화한다. 미디어는 괴벨스 같은 선동자의 시대를 지나 차츰 권력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미디어의 역활은 자본의 논리 앞에 무릎 꿇고 만다.
어느덧 우리는 에너지와 환경의 급변기로 전환의 시대에 들어왔다. 이에 권력은 자본의 형태로 로드맵을 따라 종행하고 있다. 권력가의 정책을 조사하다보면 국제 시장에서 자본이 횡행하는 이유가 보다 명확해진다. 최근 국내 미디어 사업의 재편에서 국가 권력자의 암행히 여실히 드러난다. 독과점의 형태를 띤 자본 앞에 미디어가 양 팔을 드는 순간 프로파간다propaganda는 본격화 할 것이다. 대중언론 매체는 존 카펜터 감독의 화성인 지구 정복 (They Live, 1988)에서 마냥 선그라스 넘어 숨은 진실처럼 권력 앞에 개인이 스스로 복종하는 암시와 세뇌에 하루종일 시달릴 것이다. 현재도 수많은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의 시야는 다양한 장벽 앞에 가로막혀 본질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소리없이 미디어 독과점이 완성되는 순간 대중은 실체없는 진실을 두고 치열한 다툼으로 해소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방향이 결정된 변혁의 흐름은 어떤식으로든 되돌릴 수 없다. 따라서 본질과 인간에 집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경제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자본을 쥔 금력과 권력이 포괄적 범주내에서 암약중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민주주주 세대로써 헌법에서 보장하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복잡한 장벽 앞에서 제대로 된 통찰력을 가지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가 지켜내야 할 우리의 권리는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누군가의 경제적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매우 간단한 원리지만 누구를 위해, 왜 지켜야 할지 각자 한번씩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길 바란다.
지금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다 사라진 먼 훗날, 2008년과 2009년은 매우 의미 있는 세계사적 변화들이 이루어진 시기로 기억될 겁니다. 경제위기로 인해 소위 자유 시장경제와 세계화(Globalism)에 대한 반성이 일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선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고. 일본에선 54년 만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으니까요. 그야말로 혁명의 시대라고 할 만 합니다. 혁명은커녕 뒷걸음질을 친 나라들도 있지만 역사는 그런 나라엔 관심이 없습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하토야마 유키오 차기 일본 총리는 매우 다른 개인사에도 불구하고 보수정권을 패배시키며 집권을 했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그 이유로 하토야마가 자신을 ‘일본의 오바마’라고 표현했을 겁니다. 다양한 인종과 가계가 혼합되어 ‘작은 유엔’이라 불리는 오바마의 가족과 달리, 하토야마는 4대째 일본의 정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가문의 일원입니다. ‘일본의 케네디家’로 불리는 하토야마 가문은 바로 자민당을 창당한 가문이기도 합니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서 벗어난 동아시아 공동체를 주창하는 하토야마의 등장이 오바마 정부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인구와 비슷한 수의 무보험자를 위한 의료보험 개선에 착수해 기득권층의 반발과 싸우고 있는 오바마에게, 자신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하토야마의 집권은 우군의 등장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바마는 목요일 새벽 하토야마에게 전화를 걸어 12분간 통화했으며, 두 사람은 미일관계의 강화와 국제평화를 위해 협력하고 양국의 안보동맹을 유지하자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합니다. 하토야마는 미국과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이루고 싶다고 했다는데, 미국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중요하다고 한 동아시아 국가들과도 그런 관계를 갖도록 노력하길 기대합니다.
오바마가 추구하는 정책의 핵심은 한마디로 ‘희망(Hope)’입니다. 모든 사람들, 특히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람조차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그 희망을 식량삼아 당당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토야마의 기치는 ‘우애(Fraternity)’입니다. 지난 주 하토야마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일본의 새 항로(A New Path for Japan)’에 보면 ‘우애’의 뜻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냉전 후 일본은 계속해서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에 시달려왔다. 자본주의의 근본주의적 추구는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취급한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존엄성을 잃게 된다. 어떻게 하면 윤리와 절제를 모르는 시장 근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를 종식시키고 우리 시민들의 가계 (finances)와 생계 (livelihoods)를 보호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자유 속에 내재된 위험을 완화하기 위해 우애로 돌아가야 한다. 우애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과도한 부절제를 바로잡고 우리의 전통에서 자라난 지역적 경제생활을 수용하려 하는 원칙을 뜻한다.
“우리는 우애의 원칙 아래, 인간의 생명과 안전에 관계되는 분야, 즉 농업, 환경, 의약 분야의 정책을 실시할 때에 세계화의 요구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우리의 책임은 세계화의 과정에서 버려진 비경제적 가치들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한데 묶고, 자연과 환경을 소중히 하고, 복지와 의료제도를 재건하고, 보다 나은 교육과 양육을 지원하며, 부(富)의 격차를 해소하는 정책들을 펴나가야 한다.”
하토야마는 동아시아공동체 창설 또한 우애의 개념에서 나온 것이라며, 동아시아에 위치한 일본은 이 지역의 경제협력과 안보를 위한 틀을 짜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중국 경제 규모가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을 능가하리라 예견하고, 세계의 지배력을 유지하려는 미국과 지배력을 차지하려는 중국 사이에서 정치경제적 독립을 유지하고 국익을 보호하는 건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 중소 국가들의 관심사라고 했습니다. 그는 ‘지나친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규칙(rule)에 의거한 경제협력과 안보’를 추구해야 국제협력의 틀을 짤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하토야마가 품고 있는 우애의 이상이 실제적 결과를 거둘 수 있을까를 두고 벌써부터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54년만의 선거혁명을 도운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대표대행을 따르는 파벌을 비롯한 다양한 이념의 그룹들과 한 팀으로서 해묵은 관료주의를 개혁하고 양극화 해소 등, 무수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일본의 유력지 아사히신문이 월요일과 화요일에 실시한 전화설문조사에서 하토야마의 민주당이 정부를 개혁할 수 있을 거라고 대답한 응답자는 겨우 32퍼센트였고, 46퍼센트는 개혁하지 못할 거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즉 많은 유권자들이 민주당에 대한 신뢰보다는 자민당에 진저리가 나서 민주당을 선택했다는 겁니다. 조사에 응한 사람이 1,104명밖에 안 되어 1억2,800만 인구의 표본이 될 수 있는가는 차치하더라도, 하토야마에겐 나쁠 게 없는 결과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인데 기대가 이렇게 낮으니까요.
하토야마가 오바마처럼 내 사람 남의 사람을 가리지 않고 탕탕평평한 인사를 하고, 일본 국민이 참을성과 희망을 갖고 기다려주면 꼭 성공하리라 생각합니다. 54년 동안 한 정당의 독주 또는 독재를 견뎌낸 일본인들, 230여년 만에 첫 흑인 대통령을 선출한 미국인들, 오래 기다려 이룬 혁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이 시대를 성공한 혁명의 시대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우리 정부의 탕평 불능 인사를 반면교사로 삼아도 좋으니 말입니다.
*김대중(金大中)이란 이름이 참 좋아 보인다.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쉽다. 그 뜻 또한 좋다. 아무리 평가절하한다 해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해도 김 전 대통령은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그리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그 이름에 걸맞는 업적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생을 통해 그다운 길을 곧추 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걸어간 길이 이 나라의 이념 지형에서 볼 때 중도의 길이었는지,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흐름이 좀 있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투쟁과 고난으로 점철된 인동초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놓고 삼김(三金)시대의 종언이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거니와 가히 틀리지 않은 말이고 생각된다. 그의 시대는 끝났다. 아니, 마땅히 끝나야 한다.
*중도의 길은 가장 합당하면서도 가장 소외되기 쉬운 외로운 길이다.
*인간은 당파적(黨派的) 존재다. 이는 인간이 존재의 구속성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사회 조직 속에서 당성(黨性, 黨派性)의 강도야말로 도덕성, 선명성, 나아가 성공의 시금석인 것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서글픈 현상이지만.
*그래서 세상에서는 선명성을 부르짖으며 강성 노선을 지향하는 지도자가 표를 많이 얻게 된다. 정권도 마찬가지고. 그러다보니 온건 중도론, 중도정책은 회색주의로 분류되어 이쪽 저쪽에서 박수를 받지 못한다. 사쿠라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살벌하고 삭막한 폐해는 어떠했나, 이제 투쟁 구호에 신물이 난 국민들도 그간의 학습 효과를 통해 진정한 복지 평화의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않았을까. 그런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듯도 보인다. 지구적 차원에서도 인간의 평화지향적 감성의 지수가 높아지고 있으니까(그렇게 믿고 싶으니까(?). 인간의 각성과 영혼의 진보와 사회의 발전이 더 이상 반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비례한다고 믿고 싶은 관점에서 희망을 가져보고 싶다.
*역사의 진보를 정반합(正反合)의 투쟁논리로 파악한 칼 막스의 철학은 오류로 판정 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설령 과정에서 그림자처럼 투쟁이 필연적이라 해도 결국 합(合)이르게 하는 것은 양보와 타협과 주고 받음(授受)의 조정(약자의 선택?아니다, 결코)이라고 할 수 있다. 남녀의 결혼과 싸움과 이혼과 재결합의 과정을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수수법적(授受法的) 정분합(正分合)의 사고방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잘 주고 잘 받으면 상하, 전후, 좌우로 입체적인 원구형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동서간에, 남북간에 더불어 사는 상생이 벌어진다. 이것이 원효의 화쟁(和諍)사상이고 원융회통(圓融會通)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행복한 어린 아이의 그림에는 둥근 태양이 지붕 위 하늘에 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태양이 없는 아이는 상식적으로 정서적인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 그림치료사의 견해다. 창칼 같은 직선적 사고방식은 이성(理性)적이긴 하나 사랑의 감성과는 거리가 있다.
*지금은 바야흐로 직선의 시대가 아닌 곡선의 시대요, 남성의 시대를 넘어 여성의 시대요, 차디찬 이성의 시대를 넘어 따스한 감성의 시대다. 빙하시대가 아니라 지구 온난화의 시대이기조차 하다.
*존재의 구속성이란 몸(육신)의 욕망과 맘(정신)의 욕망을 총칭함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니 이로부터 해탈하여 자유로움을 얻는다는 것은 곧 철저한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며, 자신을 산 제물로 죽여 바쳐야 얻어지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바로 이러한 경지를 말하는 것이며, 인간 삶의 목적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살아서 죽음의 길을 가는데 있다.
*존재의 구속성이란 에고(Ego)의 다른 말이다. 나를 부정하고 죽여,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산 제사, 산 죽음을 체험하고 깨열지 못한 사이비 도사들이 세상엔 너무 많다. 심지어 노동계와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에까지. 이들이 끼치는 해악은 얼마나 무지막지한 것인가.
*일찌기 존재의 구속성으로부터 해탈하여 자유인의 길, 참나(眞我)의 삶을 산 분들이 바로 석가모니요 예수요 노자였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름 석자 드러내지 않고도 그러한 길을 걸어간 이들이 적잖다. 이들은 세인의 이목을 끌지 않은 채 한 그루 나무처럼, 한송이 풀꽃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언어와 문자가 없던 원시시대의 인간들보다 질적으로 얼마나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언어와 문자를 당장 철폐한다면 우리의 삶은 흑암이 될 것인가.
불교나 기독교 서점에 가보면 헤아릴 수 없는 책이 우리의 어깨를 압도한다. 이 역시 참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깨달음, 진리, 자유, 해탈, 평화, 죽음 등의 키워드를 설명하는데 그처럼 말과 문자가 동원돼야 하는지….
*그래서 시인들도 몸부림을 쳤다. 기독교 시인의 원초적 한계를 깨달았음인가. 김춘수 시인이 무의미 시를 추구했던 것 또한 언어와 문자를 쓰면서도 그에 대한 회의와 번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그러니 잡지를 만드는 이 작업도 하나의 업(業)을 쌓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업도 업 나름이련만…, 부디 남에게 스트레스 주지 않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선업(善業)되기를 바랄뿐이다.
*태극의 음양이 서로 꼬리를 물고 돌고 돌듯이 이 세상사, 인간사 역시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상호간에 지극히 평등한 것이며 모두 약점도 장점도 고루 가지고 있는 야누스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괜찮은 존재들인 것이다. 모든 존재는 역사상 하나밖에 없는 유일 절대적 존재, 즉 하나님이니까. 나 같이 생긴 존재, 그대 같이 생긴 존재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더는 없으니까.
*어떠한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가 인간이란 이름으로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우리는 저마다 내면에 간직하고 있다고 본다.
*사람은 사랑에 의해 태어나, 사랑을 먹고 살며, 사랑을 위해 살다가, 죽어서 사랑의 세계로 입적하는 존재다. 우리에게 생명을 준 조물주의 본질도 사랑이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의 본질도 사랑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이 지상에서 해야 할 최선의 경쟁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경쟁이요, 자비의 경쟁이요, 인(仁)의 경쟁이 아닐까.
*사랑은 결코 추상적인 관념어가 아니다. 아주 실천적이고 물심(物心)을 아우른 유일론(唯一論)적 복합어다.
*그런데 사람과 사랑 사이에는 틈이 있다. ㅁ과 ㅇ사이의 틈! ㅁ이 ㅇ이 되려면 네 귀퉁이를 갈고 닦아야 한다. 하나의 조각품, 하나의 칼자루가 만들어지기 위해 무수한 정질과 담금질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하여야 비로소 사람은 곧 사랑이고 사랑은 곧 사람이 된다.
*중도의 길은 사람이 걸어가야 할 사랑의 길에 다름 아니란 생각이 간절하다. 나도 그대도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부디 실기(失機)하지 말기를 기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