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6월 촛불집회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출현을 알리고 있다. 거리의 시민들은 한 달 넘게 촛불물결로 역사의 대하(大河)를 만들고 있다. 촛불집회 이전의 기성 체제와 그 작동 방식은 순식간에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시민 민주주의의 출현, 21세기 디지털 민주주의의 등장…. 학자들은 격변의 상황을 어떻게 이론화할지 분주해졌다. 시민들은 이제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개성적이고 주체적인 시민 권력으로 다시 태어났다. 다양하게 소통하되 연대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민주적이다. 이른바 ‘2008 세대’의 출현이다. ‘거리의 정치’의 의미와 특징을 정리해본다.
(도움말 주신 분:강내희 중앙대·김민웅 성공회대·김호기 연세대·안병진 경희 사이버대·이진경 서울산업대·조현연 성공회대·최갑수 서울대 교수, 이명원 문학평론가)
1. 권위 부정 …정치권·제도권 인정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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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여성연대 등 76개 여성단체 소속 회원들이 4일 서울 미근동 경찰청 앞에서 “어청수 경찰청장 즉각 사퇴”를 촉구하며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김세구기자 |
촛불시위에서는 어떤 정당의 주도나 대변이 허락되지 않고 있다. 쇠고기 협상을 좌시한 정치권 전반에 대한 분노와 불신 탓이다. 지난달 31일 제1야당인 통합민주당 김상희 최고위원은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를 방문해 당 차원에서 촛불집회에 참가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개인 자격으로 동참하든지 아니면 말라”고 거절당했다. 가두시위에 참여했던 몇몇 민주당 의원들은 “장관 고시도 못 막고 왜 왔느냐”는 핀잔을 듣고 쫓겨나다시피 자리를 떠났다. 대학생 채나영씨(25)는 “10년을 집권해온 민주당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며 “이제 와서 시민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려 한다”고 비판했다.
정부가 관보 게재를 연기하며 ‘한나라당의 요구’를 받아들인 형식을 취한 데 대해서도 시민들은 “순전히 우리들의 힘으로 이뤄낸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쇠고기 ‘괴담·배후설’을 지핀 보수언론의 정체는 촛불시위에서 벗겨지고 있다. 시민·사회단체의 권위나 지휘도 인정하지 않는다. 한 달째 시위가 이어지는 광장과 거리에서는 시민 모두가 지도부다. 시위 초반 ‘다함께’라는 운동조직이 앞장서보려 했지만 온·오프라인에서 이어지는 시민들의 규탄에 확성기를 내려야 했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역시 함부로 나서지 못한다. 대책회의는 장대비가 내린 지난 3일 저녁 “비 때문에 약식 진행이 좋을 것 같다”면서도 “가두행진을 할지는 일단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지도부가 없는 빈 자리엔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가 시위의 총사령부 역할을 하고 있다. 모두가 들어와 자유롭게 제안하고 댓글로 토론이 이뤄진다. 21세기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이다.
<김다슬기자>
2. 튀는 개성…투쟁과 축제의 묘한 동거
시민들은 촛불집회에서 주체성과 개성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군중심리로 인한 움직임은 거의 없다. 누가 시키거나 만들어 준 것이 아닌데도 시민들 스스로 최선의 답을 찾아내고 있다. 파란불이 켜질 때 왔다갔다 하는 ‘횡단보도 시위’는 나를 표현하는 직접민주주의 현장에서 만들어진 번뜩이는 아이디어다.
각자 집에서 만들어 들고 나오는 ‘사제 피켓’은 과거에 볼 수 없던 새로운 현상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1만명의 양초는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하는지 보고하라”고 일갈한 이후 한 10대 청소년은 ‘내돈으로 양초를 샀다. 배후는 양초공장’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나왔다. 중학생들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나라 걱정에 잠 못잔다’는 피켓을 선보였다.
시위대의 자발적이고 기발한 행보는 20세기 ‘집단 해체’ 방식에 젖은 공권력의 대응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산책을 가장한 합법적인 청와대 앞 1인시위도 나왔다. 산책이라고 주장하는데 불법시위라고 우길 수 없다는 것이다.
지도부가 없는 거리의 시민들은 ‘투쟁’과 ‘축제’를 섞어가며 역사를 지휘하고 있다. 경찰이 물대포를 쏘면 “온수” “세탁비”를 외친다. 전경들에게 꽃을 꽂아주는 것은 평화롭게 하자고 손을 내미는 것이다.
도로변에 주차된 전경 버스의 창문에 ‘불법주차’라고 쓰여진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여놓는가 하면 시위대를 연행하려는 경찰 앞에서 112에 전화를 걸어 신고한다.
3일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는 시위대 한쪽에서 아코디언과 바이올린을 들고온 악단이 ‘젊은 그대’를 연주했다.
시민 권력은 살아 있는 유기체다. 다양한 표현과 주장, 무정형의 행동방식은 과거의 고정관념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예전 같으면 주최 측이 했을 시위 안팎의 모든 잡일들은 스스로 해결하고 있다. 필요한 돈은 모금해서 조달한다. 보수언론에 광고를 내는 광고주들에게는 항의전화와 불매운동으로 압박하고, 하고 싶은 말은 직접 ‘의견 광고’를 만들어 싣는다.
<유희진 기자>
3. 자율 연대…“나를 따르라”式 구심점 없어
촛불시위에 일사불란한 명령은 없다. 시작과 끝을 강제하지도 않는다. 서로를 존중하고 의지하며 공동체의 힘과 책임을 함께 키워갈 뿐이다.
지난 1일 친구들과 함께 촛불집회에 참석한 윤모씨(28)는 가두행진이 시작된 후 시위대를 빠져나왔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다. 이탈이 목적이 아니라 대열에 다시 돌아오기 위한 이탈이다. 윤씨는 “누가 나오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니고, 깃발을 따라 온 것도 아니니 강제성은 없다”며 “빠졌다가 언제든 다시 합류하면 된다”고 말했다.
촛불집회에서는 “흩어지면 죽는다”는 식의 1980년대 스크럼은 찾아볼 수 없다. 행진 대열 어디서나 드나듦이 자유롭다. 시민들은 걷다가 피곤하면 길가에 앉아 쉬고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 다시 무리로 들어온다.
매일 나와야 한다는 부담도 없다. 이동균씨(25)는 “밤샘 집회에 참여한 다음날은 인터넷에서 집회 생중계를 본다”며 “꼭 매일 시청 앞에 가지 않아도 문제의식을 공유한 다른 시민들이 나와주고 그 다음엔 내가 다시 채워주면 된다”고 말했다. 오프라인과 온라인, 집단과 개인을 넘나드는 새로운 연대의 모습이다. 한 달을 넘긴 밤샘시위에도 촛불이 사그라지거나 지치지 않는 이유다.
촛불은 명분없는 권위는 부정하되 공동체적 가치는 존중한다. 3일 광화문에서는 한 참가자가 전경 버스 위로 오르자 시민들은 일제히 “위험해” “내려와”를 연호했다. 경찰을 자극하는 행동이 나오면 어김없이 “비폭력” 구호가 터져나온다. 집회가 끝나면 시민들은 직접 쓰레기를 주워 담는다. 의료봉사대·약자 보호·법률 상담·거리 청소까지 스스로 전문 인력들이 결합해 자급자족하는 형태다.
광장의 네트워크는 느슨하지만 견고한 연대다. 촛불집회에선 서로에게 무엇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시민들이 집단으로 움직이는 정형화·조직화된 인간이 아니라 자의식이 강한 개인들이 하나의 망으로 묶여 각자의 자아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정인기자
<유정인기자>
4. 소통 활발…휴대폰·온라인 통해 이슈화
촛불시위에는 새로운 소통과 합의 방식이 등장하고 있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저마다 의견을 내놓고 그 가운데 현장에 가장 적합하다고 하는 제안이 합의로 채택된다. 답도 없다. 사통팔달의 디지털 소통이 이뤄지고 상황에 따라 새로운 요구와 대응이 신속하게 결정된다. 지휘부 없는 시위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세대의 출현이다.
다음 아고라와 같은 인터넷 토론방엔 ‘엄지족’들이 보낸 문자 메시지와 시위 현장을 찍은 영상들이 분·초를 다투며 올라온다. 클릭 수와 댓글이 많이 달릴수록 주목받는 구조다. 기존 언론매체가 따라갈 수 없는 정보의 양과 속도다.
인터넷방송 사이트 ‘아프리카’는 최근 1주일간 누적 시청자수가 400만명을 넘어섰다. 전국에서 10만명의 시위대가 거리를 행진한 지난달 31일엔 하루 시청자만 100만명을 넘었다. 인터넷에 ‘촛불’이라는 단어를 치면 최대 200명까지 접속할 수 있는 생방송 채널만 수백개가 검색된다. 한 손에 노트북, 다른 손에 캠코더를 든 ‘디지털 저널리스트’들의 활약상이 그대로 안방으로 옮겨지는 시대다.
경찰의 강경진압이 시작된 지난달 24일 인터넷 생중계를 보던 한 간호사가 “의료지원봉사를 나가자”고 제안한 게 ‘촛불 의료봉사대’의 단초가 됐다.
촛불시위에 참가한 외국인의 인터뷰나 영화를 패러디한 촛불집회 UCC도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3일 밤 서울의 우중(雨中) 시위에서는 메가폰을 든 경찰이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도록 협조해달라”고 말하자 인도에 있던 40대 남자가 “내가 시민”이라고 대꾸해 경찰을 머쓱케 한 장면도 포착됐다. 창의적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중계하는 1인 미디어의 힘이다.
네티즌 수사대의 활약도 돋보인다. 서울대 음대생의 군홧발 동영상이 공개된 후 네티즌들은 폭행한 전경의 소속 부대와 지휘관 얼굴을 찾아냈다. 삽시간에 퍼진 과잉진압 동영상이 경찰을 다시 압박하는 상황이다.
<오동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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