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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조선을 꿈꾼 청춘들의 만남과 도전. 박제가와 이덕무, 홍대용…. 그리고 국왕 정조. 이들의 아름다운 사귐과 이상을 향한 공감, 도전과 좌절의 기록. 조선 후기의 인물 박제가의 일대기를 전체적으로 조감한 평전 형식의 역사서로, 박제가의 일대기를 통해 조선 후기 실학 사조의 발흥과 전개, 몰락의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박제가와 젊은 그들 박성순 지음 고즈윈 / 2006년 4월 / 248쪽 / 12,000원
▣ 저자 박성순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문학박사)하고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단국대학교 역사학과 겸임교수를 지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연구교수로 있다. 조선시대 사상사를 전공하였으며, 조선시대에 대한 기존의 도식적 이해에서 벗어나 참신하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역사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조선후기 화서 이항로의 위정척사사상』,『선비의 배반』,『조선유학과 서양과학의 만남』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18세기 대표적인 북학론자 박제가. 그 이름이 제목에 등장하는 논문만 해도 50여 편에 이르고, 대표 저서인 『북학의(北學議)』의 번역서는 10여 권에 육박한다. 박제가에 대해 언급한 서적과 논문도 100여 편에 이르고 있으니, 그 위상이 어떠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박제가의 일생을 조망해 볼 때, 그 한 몸에는 조선 후기 실학사조의 발흥과 전개, 몰락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이처럼 의미심장한 인물, 조선의 ‘기남자(奇男子, 재주나 슬기가 아주 뛰어난 사나이)’ 박제가의 일대기를 전체적으로 조감한 최초의 책이다.
이 책은 박제가와 그의 벗들이 일생을 바쳐 주장한 북학론이 어떠한 배경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그 내용은 무엇인지, 현실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고찰하고 그것이 정조의 개혁정치와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결과를 맺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기술함으로써 박제가라는 인물이 함축하고 있는 여러 역사적 의미를 한 권으로 정리해 보여주고 있다.
박제가의 실학적 태도는 비록 당대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오늘날에도 절실하게 요청되는 학문적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21세기, 새로운 실학의 발흥을 기대하며 지금보다 더 나아질 우리 사회의 미래를 그려 본다.
▣ 차례 1부. 백탑에 핀 꽃 어린 수재 박제가 고독을 벗 삼아 백아와 종자기 같은 만남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 사람을 사귀는 도리 협객 백동수 즐거운 시절 박지원 선생을 만나다 젊은 그들 국제적인 학자 홍대용 중국에 대한 재인식 현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 사림파 정권의 위선 박제가, 청나라에 가다 『북학의』의 탄생 학문의 목적
2부. 알아주는 이 있으니 무에 두려우랴 규장각의 건립 서얼의 등용 바뀌지 않는 인습 규장각 관원에 준 특혜 초계문신제와 인재 양성 규장각 검서관 문(文)과 무(武)를 고루 갖추라 『무예도보통지』의 간행 「병오소회」와 닫힌 사회 가슴 아픈 날들 농업 경세서를 올리다 문체반정 오회연교와 정조의 서거 꿈
박제가와 젊은 그들 박성순 지음 고즈윈 / 2006년 4월 / 248쪽 / 12,000원
1부. 백탑에 핀 꽃
어린 수재 박제가 조선이 개국한 지 358년, 1750년 11월 승지 박평(朴?)의 서자로 제가(齊家)가 태어났다. 비록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서얼이었지만, 어린 수재 박제가는 부친의 자상한 배려 덕분으로 비교적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열한 살 되던 해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이때부터 박제가는 주거지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방랑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모두 부친이 떠나고 난 후에 닥친 가난 때문이었다. 박제가는 어머니가 “혼자되신 후로는 드실 음식이 없었고, 해진 솜옷이나마 몸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신 채 새벽닭이 울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하셨다.”고 애달파했다. 하지만 박제가의 어머니는 아들이 사귀는 이가 종종 어른과 손윗사람 등 이름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아들의 체면을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 뒷바라지를 했다. 소년 박제가는 어린 시절부터 시?서?화에 뛰어난 소질을 발휘하여 널리 이름을 떨쳤다. 성장한 이후 동료들 사이에서 그림보다는 시와 글씨가 더욱 훌륭한 것으로 평가받았지만, 그림 솜씨도 경지에 올라 있었다. 당대의 문장가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박제가를 평가하여 말하길, “제가는 나이 열아홉에 문장에 능통했다.”고 하였다.
백아와 종자기 같은 만남 박제가는 자연스럽게 같은 처지의 서얼들과 어울렸다. 그 중에서도 남산 밑에 이웃하며 살던 백동수(白東修, 1743~1816)와 친하게 지냈다. 백동수는 체구가 크고 무예에 출중하여 훗날, 박제가, 이덕무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조선 후기의 무예 훈련 교범)』를 완성하였다. 박제가는 백동수를 통해서 이덕무(李德懋, 1741~1893)를 만났다. 어느 날, 이덕무가 지금의 남산 일대인 훈도방(지금의 을지로 2가)에 있는 백동수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때 이덕무는 백동수의 집 문에 ‘초어정(樵漁亭, 땔감을 줍고 물고기나 잡으면서 유유자적하게 사는 보통사람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쓰인 세 글자에 눈길이 쏠렸다. 뜻도 좋으려니와 자획이 모두 성난 듯, 움직이는 듯한 필체였다. 그때 백동수가 “이것은 나의 고향 친구 박승지의 아들인 열다섯 살 동자가 쓴 것이오.”하고 자랑하였다.
박제가의 나이 18세 때의 일이다. 이덕무는 여느 때처럼 백동수의 집을 찾아갔다. 이때 마침 문밖에서 동자 하나가 나오더니 영특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시냇물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이덕무는 그가 박씨 집안의 아들, 박제가임을 직감하였다. 이덕무가 동자에게 눈길을 보내자, 그도 알아차린 듯 이덕무를 바라보았다. 동자가 이덕무에게 다가와 5백 자쯤 되는 매화시를 지어 바쳤다. 옛 군자들이 교제를 맺던 풍취를 흉내 낸 것이었다. 이덕무는 시험 삼아 그에게 말을 던져 보았다. 되돌아온 대답을 통해서, 이덕무는 동자의 성품과 영혼에서 빛이 난다고 느꼈다. 두 사람은 금방 의기투합하였다. 박제가는 다른 사람과 마주해서는 능히 말을 할 줄 모르는 듯하였으나, 이덕무를 만나면 말을 아주 잘했다. 이덕무 역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는 능히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박제가의 말은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박제가가 비록 말을 하지 않으려 해도 이덕무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백아와 종자기(백아가 거문고를 잘 탔는데, 종자기는 그의 연주를 가장 잘 이해하였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더 이상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여기고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같은 사이였다.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 박제가가 가장 좋아했던 이덕무는 종실 무림군(茂林君, 정종의 아들)의 후예인 성호(聖浩)의 서얼이었다. 이덕무는 겉으로는 약한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높은 선비의 기질을 갖춘 은자였다. 박제가가 천재적인 기질을 바탕으로 앞뒤를 잘 살피지 않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이덕무는 내면으로 큰 공덕을 품었으되, 겉으로는 항상 온화한 빛을 잃지 않음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뒷날에 국왕 정조도 호리호리한 큰 키에 단아한 모습을 잃지 않았던 이덕무를 특히 사랑하였다. 이덕무는 역사와 지리, 초목과 충어(蟲魚)의 생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적 편력을 자랑하여 국왕 정조에게 깊은 총애를 받았다. 또한 이덕무는 굶주림 속에서도 항상 독서를 통해서 시름을 달랬으므로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이덕무는 오로지 독서를 통해서만 삶의 희열을 찾던 선량하고 고고한 선비였다. 평소 말수가 적은 박제가도 자상한 이덕무 앞에서만은 자신의 소회를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박지원 선생을 만나다 사제지간이 될 수도 있는 9살이라는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박제가와 이덕무의 관계는 박지원이라는 실학의 거두를 중심으로 더욱 공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박지원이 백탑(탑골공원) 부근으로 이사를 한 것은 1768년(영조44) 그의 나이 32세 때였다. 근처에는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등이 있어서 이들과 함께 북학파의 학문적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1770년 박지원은 시험 삼아 초시에 한번 응시했다가 사마시 초장과 종장에서 모두 장원을 하였다. 방이 붙은 날 저녁에 영조는 친히 침전으로 박지원을 입실케 하였다. 그리고 지신사(知申事, 국왕 비서실장)에게 시험 답안지를 읽게 하고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면서 장단을 맞추며 들었다. 시험을 주관하는 사람들은 영조의 총애를 얻기 위해 박지원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박지원은 회시에 응시하지 않았다. 자신의 실력을 어느 정도 시험해 본 그는 각박한 벼슬살이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끝에 미련 없이 과거에 대한 꿈을 접었다. 박지원이 과거를 포기하자 출세를 위해 아부하던 인물들의 발길이 끊기고 대신 홍대용,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박제가 등이 그의 집에 자주 출입하였다.
일찍부터 박지원의 명성을 흠모하고 있던 19세 소년 박제가는 백탑 근처에 있는 우거(寓居,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사는 집)로 박지원을 찾아갔다. 백동수와 이덕무를 통하여 이미 박제가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박지원은 박제가가 찾아왔다는 전갈을 듣고 옷깃을 채 여밀 경황도 없이 황급히 나와 맞으며 마치 오랜 친구라도 본 듯이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글을 전부 꺼내어 박제가에게 읽어 보게 하였다. 박제가는 뜻밖의 환대인지라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다. 이는 천고 이전에나 있을 법한 멋진 일이라 생각한 박제가는 그 자리에서 글을 지어 이에 응답하였고 박지원은 탄복하였다.
젊은 그들 1767년 백동수의 집에서 박제가가 이덕무를 만난 그 해에 이덕무는 남산골 대흥동을 떠나 대사동(큰절골, 탑골공원 일대)으로 이사를 했다. 대사동에는 원래부터 있던 흥복사를 없애고 세조가 그 터에 원각사라는 절을 창건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세조 11년에 탑을 세웠는데, 그것이 지금도 남아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다. 당시에는 이것을 백탑이라고 불렀다. 이덕무가 대사동으로 이사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백탑을 중심으로 하여 서얼 출신의 문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유득공, 서상수, 윤가기 같은 청년들이 그들이었다. 윤가기(尹可基)는 후에 박제가의 사돈이 되었다. 이들은 ‘백탑시사’라는 시사(詩社)를 결성했는데, 여기에는 사족(문벌이 높은 집안의 자손)인 이서구도 가담하였다. 이외에도 홍대용, 박지원, 정철조 같은 선배 학자들이 포진하였고, 남산골에 살던 박제가와 백동수도 역시 백탑시사에 참여하였다. 박제가는 탑골 주변에 사는 벗들을 보러 오는 날이면 일찌감치 집에 들어가는 경우가 없었다. 박제가는 신혼 첫 날 밤에도 백탑 주변의 벗들을 찾았다.
백탑파 인사들 가운데 이덕무, 서상수, 유득공, 유련, 박제가는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여기에는 사족층도 끼어 있었으나 백탑파 내부에서는 신분적 차별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박제가와 사족 출신인 이서구와의 사귐이 그것을 잘 보여주었다. 박제가는 1777년 지은 시 <야숙강산(夜宿薑山)>에서 벗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노래하였다. <야숙강산>이란 강산의 집에서 함께 잔 뒤에 지은 시란 뜻이다. 강산은 이서구의 호로, 이서구는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을 거쳐 승지?대사간?이조판서?대사헌?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명문장가로서 특히 시명(詩名)이 높아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함께 당대의 한시(漢詩) 4대가로 알려졌다. 이서구는 명문 사대부가의 적자 출신이었다. 박제가는 신분의 벽을 넘어 어린 이서구와 절친하게 지냈다. 백탑파 인물들 중에 박제가보다 어린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였으므로 박제가는 자기보다 연하인 이서구를 특히 귀여워하였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자란 이서구도 박제가를 친형처럼 따랐다. 박제가는 이런 이서구의 집을 한번 방문하면 보통 사흘씩 시간이 지나도록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기질 다른 형제요 한방에 살지 않는 부부라 사람이 하루라도 벗 없으면 좌우의 손을 잃은 듯하리 - 박제가, 『정유각집』초집, <시> -
일찍이 이들의 시를 눈여겨 본 유득공의 숙부 유금(본명 유련)이 그들의 시를 엮어 『건연집(巾衍集)』이라 제목을 붙였다. 이것이 편찬된 당시의 연령은 이덕무가 36세, 유득공이 29세, 박제가가 27세, 이서구가 22세였다. 1776년 유금은 『건연집』을 가지고 연경(북경의 옛 이름)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청나라의 지식인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으로부터 『건연집』의 서문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반정균은 청나라를 방문한 홍대용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고 홍대용이 귀국한 뒤에도 서찰을 통해서 우의를 나누던 인물이었다. 이조원과 반정균의 시평으로 인하여 네 사람의 시명(詩名)은 연경의 시단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것이 다시 조선에 전해져 그들의 청신한 시풍이 널리 인구에 회자되었다.
유득공은 그 또한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서얼 신분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요절하여 모친 아래서 자랐고, 18~19세 때에 숙부인 유금의 영향을 받아 시 짓기를 배웠다. 20세를 지난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1774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검서관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유득공은 시인이면서도 역사에 관심이 많아 개성?평양?공주 등 옛 도읍지를 유람하였고, 두 차례에 걸친 연행(사신이 중국의 북경에 가던 일. 또는 그 일행)을 통해서 문학?역사 방면의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특히 대표적 저술인 『발해고』에서 그는 발해의 시조 대조영이 고구려인이었고, 따라서 발해의 땅도 고구려 땅이라는 점을 밝혀내었다. 그에 더해 외세를 불러들여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시대라는 표현보다는 북쪽의 발해와 남쪽의 신라를 우리의 민족사로 아우르는 ‘남북국시대’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였다. 유득공은 또 당시에 화이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많은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만주?몽골?남장(라오스)?타이완?서양의 홍모번(영국)에도 관심을 가지는 등 중국을 벗어난 폭넓은 세계관을 유지하였다.
이른바 백탑파의 구성원은 연암 박지원과 동년배의 친구들인 홍대용, 정철조, 서상수와, 약간 연하의 후배인 유금, 이덕무, 그리고 연암의 제자인 박제도, 이희경, 유득공, 박제가, 원유진, 이서구, 서유본, 서유구 등이었다. 박제도는 박제가의 이복 맏형으로 박제가와 함께 백탑시사의 시회에 자주 어울렸다. 이외에도 김용겸, 임배후 등이 백탑파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존장(尊長, 어르신)’으로 받들어졌다. 이들은 성품이 꼿꼿하고 아울러 풍류 기질도 가져 젊은이들이 ‘지사(志士,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사람)’의 전형으로 삼았다. 특히 임배후는 “과거(科擧)는 장사꾼이나 하는 짓이다”라고 하여 비리가 만연해 있던 과거제도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이들은 모순된 체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재야 지식인들이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꿈꾼 것이다.
국제적인 학자 홍대용 홍대용은 1765년 숙부인 억(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軍官)으로 수행하였다. 그 덕분에 백탑파의 인물들 중에서는 가장 일찍이 국제 시세를 파악하는 폭넓은 감각을 익혔다. 홍대용은 독일 사람인 할러스타인(Hallerstein), 고가이슬(Gogeisl)과 면담하고 천주교와 서양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그는 서양과학 이론을 통해 얻은 신지식을 이용하여 지구설과 자전설을 주장하고, 근대적 우주관에 입각하여 중국 중심의 화이론을 부정하는 등 파격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홍대용은 사실상 북학파의 선구자로서, 특히 박지원과 박제가의 북학론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1780년 박지원은 삼종형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를 축하하는 사절단으로 파견되자 그 수행원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1783년에 탈고한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熱河日記)』도 이 기행의 산문이었다. 박지원은 청나라에 가서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홍대용의 소개장을 받아 가서 청나라의 지식인들과 필담을 나눈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유쾌한 일이었다. 그런 중에 익히 홍대용으로부터 들었던 지구 자전설을 소개하여 청나라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중국에 대한 재인식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치욕스런 항복을 하고, 볼모로 잡혀갔던 봉림대군이 돌아와 효종으로 등극하였다. 효종은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품고, 아울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북벌론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청에게 명나라가 망하자, 조선의 사대부들은 더욱 더 청나라를 원수의 나라로 생각하였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견하여 조선을 구한 은인이기 때문에 이를 망하게 한 청나라는 불구대천의 원수라고들 생각하였다. 이제 명나라가 망한 이상 중화(中華)의 적통은 조선으로 옮겨졌다는 소중화(小中華, 세상의 중심이 중국에서 조선으로 옮겨왔다고 생각)의식이 팽배해져갔다. 그렇기 때문에 오랑캐에 불과한 청나라 사람들과는 상종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지배층들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렇지만 백탑파의 인물들은 생각이 좀 달랐다. 그들이 보기에, 조선이 소중화라는 당시 정치인들의 자부심은 스스로를 위안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의 현실은 그저 가난할 뿐이었다. 백탑파의 인물들은 조선이 진정한 중화가 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내실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청나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북학론(北學論)이라 한다.
원래 ‘북학’이란, 『맹자』 <등문공장구>에서 남만(南蠻)의 지식인이 ‘주공중니지도(周公仲尼之道)’, 곧 유학(儒學)을 북쪽 중국에 가서 배운다고 하는 의미로 처음 사용되었다. 1778년, 박제가가 이 부분을 인용하여 중국의 문물을 배울 것을 주장한 자신의 저서 제목을 『북학의』라 이름 한 이후, 북학은 백탑파를 대표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당시 조선의 사상계는 대단히 경직되어 있었다. 그래서 백탑파의 지식인들은 대명의리론과 어긋나는 주장을 폈을 때 그들에게 쏟아질 비난이 솔직히 두려웠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북학론의 명분과 논리가 필요했는데, 이는 박지원의 『열하일기』 <일신수필>에서 체계가 잘 갖추어지게 되었다.
북학의 논리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백성들을 위하고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굳이 그 출처를 따질 것 없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개방적 자세를 강조하였다. 둘째, 지금 청나라가 누리고 있는 문명은 오랑캐의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전해 내려온 중화문명의 진수라고 하는 발상을 보였다. 즉 오랑캐가 중원을 점유하고 있을지라도 실제 중원의 문명은 역사적으로 면면히 전승되어온 고유한 중화의 유제(遺制)라는 인식이었다. 셋째, 조선이 북학을 통해서 이루려는 궁극적인 목표는 이적(夷狄)을 물리치기 위한 실제적인 힘을 기르기 위한 것이고, 이는 결국 북벌론이나 대명의리론과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북학론의 명분을 앞세워 박지원이나 박제가 등 백탑파내의 대표적인 북학파 인사들은 청나라의 번화함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이용후생지물과 그들의 공리적 생활 태도를 당장에라도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박제가, 청나라에 가다 정사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특별한 후의로 박제가는 이덕무와 함께 사행을 따라 그리던 연경을 찾게 되었다. 당시의 연경은 영명한 군주 건륭제의 치세로 정령(政令)이 엄명하고 상화(商貨)가 번영하였다. 박제가에게 연경은 모든 것 하나하나가 진기한 구경거리였다. 연경에는 대낮에도 수레바퀴 구르는 소리가 ‘쿵쿵’ 거리는데 꼭 천둥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수레 안에서는 책을 볼 수도 있고 손님을 맞을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한 채의 움직이는 집’이었다. 또 수레는 모든 것을 실을 수 있어서 그 이로움이 실로 엄청났다. 박제가는 수레가 있어야만 조선 전국의 산물들이 대량으로 유통되어 인민들의 생활이 윤택해질 것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중국 배는 내부에 물 한 방울 없을 정도로 건조하고 깨끗했다. 곡식을 실을 때에도 뱃바닥에 그대로 쏟았다. 또 중국은 성을 모두 벽돌로 쌓았다. 적을 만났을 때 버리고 달아나려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선에는 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고 박제가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벽돌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 하나가 벽돌 하나보다 단단할지 모르지만, 여러 개를 쌓았을 때는 벽돌이 돌보다 단단했다. 중국은 땅 위든 땅속이든 5~6길이나 되는 건물은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그리고 서양은 벽돌로 집을 지어서 천 년 동안이나 보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들었다.
이외에도 박제가는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종이에 세심하게 기록했다. 축목?소?말?시장?상인극장?중국어?거름?과일?과거제 등 그가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이 기록의 대상이 되었다. 박제가는 청나라 기행을 통해서 예상했던 것 이상의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명나라가 망한 뒤 조선이 중화문명의 적통을 계승한 것이라는 조선 사대부들의 소중화 의식은 박제가에게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허구적 관념일 뿐이었다. 특히 박제가는 연경의 풍물 중에서도 상업이 번성한 시장의 모습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연경에 있는 아홉 개의 문 안팎 수십 리에 걸쳐서, 각 부의 관청과 아주 작은 골목길 외에는 길 양쪽이 모두 시장이었다. 박제가는 조선에서 ‘사?농?공?상(士農工商)’ 중에 가장 말업으로 천대받던 상업 행위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박제가는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우리나라는 검소한데도 쇠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검소하다는 것은 물건이 있어도 남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에게 물건이 없다 하여 스스로 단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박제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재물이란 우물과 같다. 퍼내면 차게 마련이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그렇듯이 비단을 입지 않기 때문에 나라 안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북학의』의 탄생 1778년 박제가는 『북학의』를 탈고하였다. 연행에서 돌아온 지 3개월만이었다. 박제가는 여기에서 이용후생을 강조하였다. 그 자신 유년 시절의 곤궁한 삶을 면치 못했던 박제가는 ‘가난이 나라의 큰 적’임을 깊이 깨달았다. 그리고 생산 기술과 도구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와 같은 공리적 입장은 성리문화의 밀폐에 대한 대안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정국을 주도한 사림파들은 국제관계에 있어서 숭명반청의 외교노선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 청조문화와의 접촉에 의해서 식자 간에 청조문화의 진보성을 수용하고 국제관계의 폐쇄성은 지양하여 개방하자는 의견이 높아지게 되었다. 북학파 학자들의 입장이 그것이었다.
조선 후기 백성들의 삶이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그토록 절박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 정부가 재정 운영정책의 기조로 추진했던 ‘절용(節用)’의 재정구조에서 파생한 것이었다. 조선의 재정이념으로 제시된 ‘절용’은 관용의 덕치를 이상으로 하는 고대 중국의 통치이념에 연원을 두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절용’의 이념에 서서 수취 대상을 파악하여 수입 재원의 양을 미리 정한 상태에서 수취하고 그에 맞추어 지출을 행하는 ‘양입위출(量入爲出)’의 재정운영을 시행하였는데, 수입 재원이 거의 토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에 한정됨으로써 사실상 재정상의 빈곤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그리고 이 ‘절용’의 재정구조는 현물의 유통이라는 상업의 기초 행위가 사실상 차단되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시장경제 활동이 위축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박제가가 수레를 이용한 적극적인 물화의 유통과 외국과의 통상을 강조한 것은 바로 조선 건국 초부터 계승되어 오던 재정운영 방식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지적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상사적 의미가 있다.
더욱이 청에 대한 복수가 명분상으로나마 시대정신으로 자리하고 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북학’이라는 박제가의 파격적인 주장이 박지원에 의해서 옹호되었던 점도 주목된다. 북학파의 영수 박지원은 “법이 좋고 제도가 아름다우면 아무리 오랑캐라 할지라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원과 박제가가 추구했던 학문은 바로 민생의 회복에 절실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이었다. 이용후생, 즉 백성들의 생활환경을 이롭게 하여 삶의 질을 높이는 것, 바로 그것이다. 박지원은 기본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풍부하게 한 연후에야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덕행의 달성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박제가의 『북학의』도 이용후생의 밑받침이 되어야만 정덕이 온전해질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사실 원초유학의 중요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에서 정덕과 이용후생은 서로 분리가 되어 존재하는 항목들이 아니었다. 정덕과 이용후생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완전한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학문의 목적 ‘무릇 이용후생에 하나라도 갖추지 못한 것이 있다면 위로 정덕을 해치게 된다.’고 설파한 박제가의 철학적 입장은 현재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첫째로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자아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몰주체적인 학문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이다. 조선의 보수적 성리학자들이 말끝마다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고 중화문명의 관점에서 조선의 역사를 폄하하였던 것과 같이 오늘의 지식인들 또한 그런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성찰해 볼 일이다. 둘째로 이용후생의 필요성은 위로 정덕을 해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덕이라는 상위개념의 가치를 온전히 유지하기 위한 전제라는 점, 이것이 북학파의 논리였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황금만능에 눈이 멀어 정덕과 이용후생의 가치가 전도된 사회가 아니던가. 이용후생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필요조건일 뿐 그것이 정덕을 앞서는 상위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과제는 전도된 가치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다.
2부. 알아주는 이 있으니 무에 두려우냐
규장각의 건립 국왕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먼저 착실하게 노론 외척과 대결할 만한 자신의 힘을 키우고자 하였다. 노론을 미워하던 아버지 사도세자는 순진하게도 그 마음을 너무 쉽게 노론 당파에게 드러내 보였다. 사도세자의 마음을 안 노론 세력은 사도세자를 제거하기 위해 부왕인 영조와의 사이에서 두 사람을 이간질시켰다. 1762년 나경언의 고변서와 함께 올려진 세자의 비행 십여 조목은 노론 당파가 사도세자를 제거하기 위해 띄운 회심의 승부수였다. 세자의 비행이 아무리 크다 해도 영조가 자기 자식을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인 일은 지나친 처사였다. 영조는 왜 그런 무리수를 두었을까? 노론과 일촉즉발의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사도세자를 제어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왕위 보존도 어려울 것이라는 정치적인 고민이 앞섰으리라.
정조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우선 착실하게 자신의 세력부터 키울 것을 다짐했다. 규장각이 그 중심기관이었다. 정조는 즉위 다음 날인 1776년에 우선 찬집청(撰集廳)과 교정청(校正廳)을 지어 영조의 행장과 시장을 짓고, 영조의 어제(御製)를 교정하도록 명하였다. 이 일은 정조의 우익인 남인 영수 채제공이 양쪽 업무의 당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건물의 축조에 착수하여 규장각이 창덕궁 금원 북쪽에 세워졌다. 이와 함께 자학?직제학?직각?대교 등의 관원을 두었다. 규장작은 처음에 어제각으로 일컫다가 뒤에 숙종 때의 편액 글씨에 따라 규장각이라고 이름 하였다. 위는 다락이고 아래는 툇마루였다. 그 뒤에 정조는 어진(御眞)?어제?어필?보책(寶冊)?인장을 봉안하였는데, 그 편액은 숙종의 글씨였으며, 또 주합루의 편액을 남쪽 처마에 게시하였는데, 곧 정조의 글씨였다. 정서쪽에는 이안각(역대 임금의 영정과 글씨를 옮겨 포쇄하던 곳)인데 어진?어제?어필을 옮겨 포쇄하는 곳으로 삼았으며, 서북쪽에는 서고(書庫)인데 조선의 도서와 문적을 간직하였다.
서얼의 등용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를 죽이기 위해서 영조에게 뒤주를 갖다 바친 자가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이며, 따라서 홍봉한과 함께 정조의 등극을 방해한 정후겸 등을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정조는 홍봉한의 처단에 관대한 모습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들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왕권 강화에 대한 꿈을 키워 나갔다. 정조는 외척에 대항할 만한 대안 세력으로 절의와 청론을 지닌 사대부들을 주목하였다. 여기에는 노론 준론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동안 권력에서 소외되어 온 남인 세력의 준절한 젊은 지식인들이나 서얼 출신의 문사들도 망라되어 이었다. 정조는 개혁 논리에 입각해 청수한 인재들을 규합하고 이들을 친왕적 인물로 키워 내고자 하였다. 규장각의 각신들이 대체로 이러한 인물들이었으며, 정조 3년에는 규장각 검서관직을 신설하여 박제가를 비롯한 네 명의 서얼 출신들을 포진시켰다. 이를 위해 정조는 서얼들의 관계 진출을 합법화하는 「서류소통절몰(庶類疏通節目)」을 1777년에 미리 반포하였다. 정조는 그 사전 정비 작업으로서 하교를 통해서 인재의 등용에는 어떤 제한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였다.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를 비롯한 그의 서얼 동료들이 맡고 있던 검서관직은 정조의 중요한 우익이었다. 검서관은 비록 7품 이하의 하급 관직이었지만, 매우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검서관은 왕이 어용(御容, 선왕들의 영정)을 삼가 살펴볼 때와 절일(節日, 한 철의 명절)에 거동할 때 성 밖으로의 호가(扈駕, 임금의 수레를 보호하여 따라가는 것)와 연회의 활쏘기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표전(임금께 올리는 글)을 짓고 서적을 햇볕에 말리는 일과 어제?일력(日曆) 및 명령하는 문자로서 내각(규장각)에서 나오는 것 모두를 손질하고 정서하며 교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와 같이 검서관은 그 맡은 일이 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임금의 일수거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의 임무까지 띠고 있었다.
규장각 4검서는 비록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던 서얼 출신이었지만, 이들에 대한 정조의 애정은 남달랐다. 1779년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리수가 검서관 생활을 하기 시작한 첫 가을에 임금인 정조가 친히 규장각에 거둥(임금의 나들이)하였다. 정조는 먼저 규장각의 부속 건물인 불운정에서 활쏘기 대회인 연사례(燕射禮)를 설행하였다. 처음에 계단에 앉을 때, 정조와 검서관들 사이에는 의장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곧 정조가 명하여 검서관들을 가까이 오도록 하고 또 그들에게 먹을 것을 하사하며 그 내용물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정오가 되어 활쏘기의 반이 끝났다. 임금이 규장각 정전(正殿)에서 술을 하사하였다. 저녁이 되자 임금을 모시고 활쏘기를 하던 자들이 모두 물러났다. 오직 규장각 각신들과 승지(비서관)와 선전관(경호원) 등이 규장각 안에 촛불을 밝히고 시열(侍列)하였다. 이어 저녁식사가 베풀어졌다. 정조는 친히 술과 음식은 물론 자잘한 것에 이르기까지 신경을 써서 말을 붙여 주었다. 검서관들은 정조의 배려에 서로를 돌아보고 감읍할 뿐이었다.
「병오소회」와 닫힌 사회 정조는 누구보다도 박제가를 아끼고 알아주었다. 박제가에 대한 서적?의복?식품?약환 등의 내사는 빈번하여 그 사랑은 각신에 못지않았다. 정조는 박제가를 견줄 자가 없는 선비라는 뜻의 무쌍사(無雙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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