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번거사는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한일 관계와 관련해서 결행한 것이다. 1905년의 5개조 보호 조약에 대한 것이다. 이 조약은 황제를 비롯하여 한국국민 모두가 보호를 희망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토는 한국 상하의 신민과 황제의 희망으로 조약을 체결한다고 말하며 일진회(一進會)를 사주하여 그들을 운동원으로 만들고, 황제의 옥새와 총리대신의 부서가 없는데도 각 대신을 돈으로 속여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이토의 정책에 대해 당시 뜻있는 사람들은 크게 분개하여 유생 등은 황제에게 상주(上奏)하고 이토에게 건의했다.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에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인민들은 신뢰하며 일본과 더불어 동양에 설 것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이토의 정책은 이와 반대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토는 한밤중에 칼을 뽑아 들고 황제를 협박해서 7개조의 조약을 체결시켜 황제를 폐위시켰고, 일본으로 사죄사를 보내게 되었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경성 부근의 상하 인민들은 분개하여 그 중에 활복한 사람도 있었지만, 인민과 군인들은 손에 닿는 대로 무기를 들고 일본 군대와 싸워 경성의 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후 십수만의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황제께서 조칙을 내리셨는데, 나라의 위급존망에 즈음하여 수수방관하는 것은 국민된 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점점 격분하여 오늘날까지 일본군과 싸우고 있으며 아직도 수습되지 않았다. 이로인해 십만 이상의 한국민이 학살됐다. 그들 모두 국사에 힘쓰다가 죽었다면 본래 생각대로 된 것이지만, 모두 이토 때문에 학살된 것으로, 심한 사람은 머리를 노끈으로 꿰뚫는 등 사회를 위협하며 잔학무도하게 죽였다.
이토의 정책이 이와 같이 한 명을 죽이면 열명, 열 명을 죽이면 백 명의 의병이 일어나는 상황이 되어, 시정방침을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의 보호는 안 되는 동시에 한일간의 전쟁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토 그는 영웅이 아니다. 간웅(奸雄)으로 간사한 꾀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 간사로 꾀한 한국의 개명은 날로 달로 나아가고 있다고 신문에 싣게 했다. 또 일본 천황과 일본정부에 한국은 원만히 다스려 날로 달로 진보하고 있다고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동포는 모두 그의 죄악을 미워하고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을 즐기고 싶어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한국민은 십수 년 동안 도탄의 괴로움에 울고 있기 때문에 평화를 희망함은 일본국민보다도 한층 깊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까지 일본의 군인, 상인, 도덕가, 기타 여러 계급의 사람과 만난 이야기는, 내가 한국에 수비대로 와 있는 군인에게 이같이 해외에 와 있는데 본국에 부모처자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분명히 꿈속에서도 그들의 일은 잊혀지지 않아 괴로울 것이다. 라고 위로 했더니,
그 군인은 본군일이 견디기 어렵지만 어쩔 수는 없다라며 울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동양이 평화롭고 한일간에 아무 일이 없기만 하면 수비대로 올 필요가 없을 것이 아니냐? 라고 물으니,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지만 필요가 있으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수비대로 온 이상 쉽사리 귀국할 수 없겠다라고 했더니, 그 군인은 일본에는 간신이 있어서 평화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우리들도 마음에 없는 이런 곳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이토 따위를 혼자서는 죽일 수 없지만 죽이고 싶은 생각이다.라고 울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농부와의 이야기는, 그 농부가 한국에 왔다는 당시에 만나서 한 이야기이다. 그가 말하기를 한국은 농업에 적합하고 수확도 많다고 해서 왔는데,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안심하고 일을 할 수가 없다.
또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이전에는 일본도 좋았지만 지금은 전쟁 때문에 그 재원을 얻는 데 급급하여 농민들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기 때문에 농업은 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있자니 이와 같아 우리들은 몸둘 곳이 없다라고 한탄하며 호소했다.
다음으로 상인과의 이야기를 말하겠다. 한국은 일본 제작품의 수요가 많다고 듣고 왔는데 앞의 농부의 이야기와 같이 도처에 의병이 있고 교통이 두절되어 살 수가 없다며, 이토를 없애지 않으면 상업도 할 수 없으니 자기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죽이고는 싶지만,
어떻든 평화로워 지기만을 기다릴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덕가의 이야기라는 것은 예수교 전도사의 이야기이다. 나는 먼저 그 자에게 말을 걸어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는 일본인이 전도가 되겠는가?라고 물으니, 그가 도덕에는 나와 남의 구별이 없다.
학살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자이다. 천제의 힘으로 개선시키는 수밖에 없으니,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해서도 일본인이 동양의 평화를 희망하고 있는 동시에 얼마나 간신 이토를 미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본인에게도 이런데 하물며 한국인에게는 친척이나 친구를 죽인 이토를 미워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한국의 역사상 현인의 경지에 근접한 인물을 꼽으라면 관점의 차이는 있겠지만 율곡 이이 선생을 꼽는데 누구도 주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율곡 선생은 9번 과거시험에 모두 장원급제 한 인물이다.우리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며 또한 예언자적 능력도 뛰어나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 하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며 정치, 경제, 국방 등 모든 분야에 식견이 탁월한 정치가요,사상가이며 교육자였으며, 철학자였다.
그의 가문은 또 유명한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둔 뿌리깊은 천재가문의 집안이었으며 한국판 제갈공명, 한국정신사의 큰 산맥, 성리학의 대가, 등 여러 가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그러나 천재는 단명이라고 했던가 그는 타고난 건강이 좋지 않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다
7개 국어에 능통했던 신숙주
보통 4-5개의 국어에 능통한 사람을 보고도 천재라고 극찬을 한다.그런데 한사람이 7개국를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바로 조선조에 영의정을 지낸 범옹 신숙주가 주인공이다.정치적인 얘기는 접어 두고 학자적으로만 평가한다면 그는 뛰어난 언어학자였으며 한국최초의 일본관련책 해동제국기를 저술하는 등 어문학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그는 특히 설총의 이두문자는 물론 중국어, 몽고어, 여진어, 일본어, 등에 능통했으며 인도어, 아라비아어, 까지도 터득했다고 한다.명문가답게, 일제하 독립투쟁의 주역들인 단재 신채호, 신규식 선생 등이 그의 후손들이다
조선왕조 실록에 3000번이상 등장하는 송시열
송시열 그는 선조임금부터 숙종 임금때까지의 문신 학자이다.본관은 은진이며 호는 우암[尤庵]이다. 그의 전성기는 효종때이며 효종임금의 오른팔이 되어 정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는 문장과 서체에도 뛰어났으며 정계의 명망 때문에 교우관계가 넓었고 방대한 저술도 남겼다.
그러나 우암은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가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경우가 많았는데 이점이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그는 성리학으로 철저히 무장된 학자였으며 흙탕물같은 정치판에는 끼어들지 말아야했다.
그는 83세로 제주도 유배에서 서울로 압송되어오던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을때까지 당쟁과 파벌의 투쟁을 벌인 전형적인 외골수 선비였다.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000번 이상 나오는 사람은 오직 송시열 뿐이며 또 전국 42개 서원에 배향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역사적 비중을 가늠할수 있다.
왕의 얼굴한번 보지도 않고 정승에 오른 윤증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다.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당쟁의 한 축이었으며 재야의 막후실력자 소론의 영수였다.
윤증은 왕의 얼굴한번 보지 않고 우의정 까지 올랐던 우리나라 역사상 단한명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는데 그가 받았던 관직을 보면 36세 때 내시교관부터 공조정랑, 사헌부 지평, 호조참의, 대사헌, 우찬성, 좌찬성, 83세 때 판돈녕부사까지 계속 관작이 승진되면서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어쨌든 그는 출사하지도 않은 채 재야에서 일정한 세력을 등에 업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한번도 조정에 나가지 않고 왕의 얼굴도 보지 않으며 정승이 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천재 가문에 또하나의 천재(이율곡의 아우) 이우
"왕대밭에 왕대난다"조선왕조 천재가문인 이율곡, 신사임당 가문이 배출한 또 하나의 천재 가 있다.바로 이율곡의 동생 이우. 그는 조선조 통털어 시,서,화,금[詩,書,畵,琴]에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여 4절로 불려지는 유일한 인물이다.천불여이물[天不與二物]이라 하여 하늘은 인간에게 두 가! 지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대개 용모가 뛰어나면 머리가 부족하고, 머리가 뛰어나면 행동이 부족하고, 행동이 뛰어나면 지성이 모자라고,...이렇듯 여러 재능을 겸비하기란 천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그림은 물론 시와 글 가야금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고 특히 어머니의 화풍을 따라 초충[草蟲], 사군자 등을 잘 그렸으며 초충을 그려 길에 던지면 닭이 벌레인줄알고 와서 쪼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아들 경절도 書,畵,琴에 뛰어난 삼절이었으며 신사임당의 삼절과 자신의 사절을 합치면 십절이 탄생되어 불세출의 기록을 역사속에 남겼다.신사임당 家의 천재적 재능은 오늘날에도 살아숨쉬며 역사속의 거울이 되고 있다.
과거급제 60년만에 판서가 된 윤경
인간은 불평등 한 것일까? 앞장의 정태화 같은 인물은 판서란 직책은 모두거치며 정승도 여러차례 거쳤는데, 누구는 급제 60년만에 겨우 판서에 올랐으니 말이다.관료들의 경노당 최고령 기록을 갖고 있는 윤경은 30세에 급제하여 90세가 되는 60년만에 공조판서가 되는 불가사이하고 유일무이한 진기록을 갖고있다.
90이 될 때까지 인내하고 꾸준히 자기관리를 하며 버텨낸 그의 집념과 불굴의 의지는 인간승리의 전형을 보여 준 예라 하겠다.마음이 너그럽고 욕심이 없는 것이 장수의 비결일까? 윤경은 98세까지 살다 간 장수인물이며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83세에 과거급제한 인간승리 박문규
조선왕조 최고령 과거 급제자 박문규.83세의 나이에 노익장을 과시하며 당당하게 최고령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한 박문규는 최고령 급제라는 새로운 기록을 역사에 남기고 떠난 인간승리의 표본이었다.
도대체 학문의 끝은 어디이며 인간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일까?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나이에 자기도전에 성공하여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연출했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조선조에 있어서 과거란 무엇이길래 80이 넘은 나이에도 과거시험에 집착하는가?그 답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조선시대는 문신중심의 사회이고 문관에게 가문의 영광과 명예가 주어지며 부의 축적은 물론 부인의 축첩 등 수많은 특전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시험은 양반들의 유일한 출세길이었으며 가문의 흥망성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그렇다면 83세의 박문규는 과거시험을 몇 번이나 보았을까. 약 50여년을 시험에 매달렸으니 아마도 수 십 번은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887년에 급제하여 고종의 특명으로 병조참의를 제수 받았으나 지상과제의 한을 풀어서인지 그 이듬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76세에 처음 장가 들고 99세까지 장수한 홍유손
조선시대 하면 사내아이는 보통 10세를 넘으면 장가를 가게 되는데, 무려 76세의 죽을 나이에 첫 장가를 가고 아이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주인공은 홍유손.그는 소위 죽림칠현으로 속세를 떠난 청담파를 자처하는 인물이다.
76세에 장가를 들어 아들 지성을 낳고 99세까지 살다간 조선시대 기인중의 한명이다. 같은 죽림칠현이자 생육신이었던 남효온은 그를 평해 [글은 칠원같고 시는 산곡을 누빈다. 고 하였다.
그는 거의 기인에 가까웠으며 특히 세조가 정권을 잡은 후 김시습, 남효온, 등과 어울리면서 세상을 비관하고 냉소로 일관하면서 풍자적인 인생을 살았다.99세의 천수를 누린 그는 역사 인물사전에 나오는 최장수 인물이 되고 있다.
섹스심벌 어우동은 효령대군의 손주 며느리였다
조선조 최대의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어우동,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어우동은 성종 때의 승문원 지사였던 박윤창의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도 책마다 다른데 , [용재총화]에는 어우동, [실록]에는 어을우동, 이라고 되어있다.어우동의 시댁은 세종대왕의 바로 위 형님인 효령대군의 손주 며느리였다.
어우동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는 즉시 그 자리에서 본능적인 행동을 하였고, 특히 근친 상간도 마다하지 않았다.그는 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몸에 자신의 이름을 문신하기를 강요하였다.한국의 3공화국때 정인숙 LIST처럼 그는 어우동 LIST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그녀로 인해 신세를 망친 관리들이 많았으며 나중에는 도승지 김계창의 줄기찬 탄핵으로 의금부의 문초 끝에 삶의 여정을 끝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조선왕조 최연소 급제자[만14세] 이건창
조선시대 20세 미만 급제자는 30명이며 그중 최연소 급제자는 1866년[고종30년] 강화도별시문과에서 6명중 5등으로 뽑힌 만14세의 이건창[전주이씨]이다.이건창은 판서 이시원의 손자로 강화출생이며 5세에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조정에서도 너무 일찍 급제하였다 하여 4년뒤인 만18세가 되어서야 홍문관직의 벼슬을 주었다.
이건창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않았다.그는 천성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성격으로 암행어사 때는 충청감사 조병식의 비리를 낱낱이 들쳐 내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고 1년여의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그후 그는 저술에 몰두하여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당의통략]을 저술하는 등 조선말기의 대문장가로 손색이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시험 부정행위
조선(朝鮮)에는 과거제도가 있었는데 과거에도 지금과같이 많은 부정행위가 있었고 그 적발사례가 있다. 태조(太祖)에서 철종(哲宗)까지 472년간의 역사(歷史)를 기록한 편년체 사서(史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면밀히 살펴보면 문무시험 공히 시험 부정행위 및 그 처벌(處罰)에 관련된 기록(記錄)을 찾을 수 있다.
실록(實錄)에 따르면 과거시험의 부정행위 기록은 태종조에 처음 등장(登場)한다.경승부윤(敬承府尹) 김 점(金 漸)의 아들이 문과시험을 치렀는데 그 답안(答案)을 고쳐 쓰게 해 적발(摘發)되자 태종에게 용서(容恕)를 빌었다는 대목이다.특히 세종조 기록에는 부정행위 유형(類型)과 처벌에 관한 기록이 상세히 나와 눈길을 끈다.
'고려말기 과거법이 크게 훼손(毁損)돼 시험 보러 가는 사람이 남을 고용(雇用)해 대신 답을 쓰게 하고 시험을 관장한 사람이 아는 사람을 먼저 뽑으려고 부정한 짓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또 다른 사람을 시험장에 보내 제술(製述)한 자에게는 과거 시험자격을 영원히 정지(停止)시켰고 속임수를 쓴 자에게 장(杖) 100대와 도형(徒形) 3년을 집행(執行)하고 영구히 서용(敍用)치 않았다.
성종때 우부승지(右副承旨) 정성근(鄭誠謹)이 '무과 별시(別試)에서 표적(標的)이 맞지 않았는데 감적관(監的官)이 북을 쳤고 4표적까지 화살을 쏘지도 않았는데 도청관(都廳官)이 5발 중 4발이 적중(的中)했다고 해 이들을 국문하게 했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다'며 '과거(科擧)는 국가의 큰 일으므로 반드시 징계(懲戒)해야 할 것'이라고 왕에게 청(請)한 대목도 나온다.
중종 55년에는 동지사 허 굉이 중종에게 '세종조에는 책(冊) 지니는 것을 금단(禁斷)하는 법령(法令)을 엄중히 했기 때문에 초집(抄集)한 참고서적의 글씨를 잘게 써서 머리털 속에 감추기도 하고 입 속에 넣기도 해 과장(科場)에 들어왔는데 이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폐단(弊端)이 많다'고 아뢰었다는 기록도 보여 과거에도 오늘날의 '커닝 페이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 때는 사헌부(司憲府)에서 '전 강릉부사 박경업(朴慶業)이 강원도 시관으로 시험응시자 30여명의 답안지 겉봉에다 '삼가 봉한다'(謹封)고 손수 써 알아 볼 수 있도록 해 초장(初場) 시험에서 합격된 사람이 무려 17명이나 된데다가 응시(應試)한 여러 선비들의 분노(憤怒)까지 사 과장을 파하고 말았다'는 대목도 보인다.
특히 숙종 33년 '국가의 성쇠(盛衰)와 인재의 득실은 오로지 과시(科試)의 공사(公私)에 달려있다'는 예조참의(禮曺參議) 박 권(朴 權)의 상소(上訴)는 이번 수능시험을 관리한 교육관청이 귀감(龜鑑)으로 삼을 만한 내용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험은 공정(公正)해야 하며 부정행위가 적발됐을 경우에는 가차없이 엄벌을 내려야 한다는 데 별 이견(異見)이 없는 것 같다.또 부정(不正)을 저지른 과거(科擧) 응시자와 관원(官員)들을 탄핵(彈劾)하는 상소를 임금에게 올려 벌하게 하고 시험을 책임진 관리가 그 책무(責務)를 소홀히 했다며 자신의 파직(罷職)을 청한 사실은 모든 부정행위 사건에서 처벌(處罰)을 면(免)한 가담자와 관련 공무원들에게 경종(警鐘)을 울리고 있다.
몇달 전 일본 동경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사람입니다. 일본에서는 4년 정도 있었구요.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에서 식당, 유흥업소 서빙 등등 안해본 게 없습니다.
한번은 일식당에서 서빙을 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전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민망하고 부끄럽고 죄스럽기까지했던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겪었던 그때의 경험을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흔히 일본인들을 가리켜 족보도 전통도 없는 민족이라 말합니다. 일본이 오늘날 경제대국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저 남의 것을 잘 베끼는 능력 때문으로 폄하해 버리기도 합니다.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이 훌륭하든 보잘 것이 없든 그것을 받들고 존중하고 계승해 나가려고 하는 자세만큼은 세계 제일의 수준이라고 봅니다.
일본의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거리들을 지나다 보면 조상으로부터 3대, 5대, 심지어는 10대에 이르기까지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는 가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알바를 했던 일식당 사장님(주방장) 역시 3대째 식당을 경영해오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원래는 사장의 형님이 가업을 물려받아 식당을 경영했는데 12년 전 형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어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가업을 잇게 되었답니다.
(중략)
열달 좀 안됐네요. 식당 문을 닫을 무렵이었는데 사장이 불쑥 역사에 관심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것도 임진왜란에 대해서요. 그렇다고 했죠. 역사를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전 관심 정도가 아니라 많이 안다고 자부했던 쪽이었습니다. 특히 전쟁사, 영웅전기 같은 책들을 많이 봤었고, 그래서 사장의 물음에 대해 속으로는 "일본의 역사도 아마 당신보다 내가 더 많이 알 걸"이라고 생각했었고요.
내가 역사에 관심이 있다고 하자 사장이 다짜고짜 "이순신에 대해서 잘 아느냐"고 하더군요. 안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우쭐해지는 게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저는 사장이 어디서 이순신 이야기를 듣고 자세히 알고 싶어서 그러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얼마든지 대답해 줄 용의가 있었죠. 밤이 새도록 말이죠. 그래서 그의 다음 질문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질문은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이순신이 구사한 해전술의 핵심이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거북선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느냐, 복원은 언제 되느냐"고 하더군요.
질문을 받고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핵심 해전술?" "거북선의 복원?" 뭐 하나 제대로 답해 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위의 두 가지 질문 외에도 바로 이어서 몇 가지가 더 있었던 것 같았는데 너무 당황했던 나머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자, 여러분이 제 입장이었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답변을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또 그 답변이 정답이고 오답이고를 떠나서 아마 대부분의 분들은 저처럼 당황해 하셨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전술에 대해서야 누구라도 학익진이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합니다만, 그 전술의 원리, 그리고 그 전술이 해전장별로 어떻게 응용되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설명하실 수 있는 분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거북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저는 거북선이 2층인지 3층인지, 머리가 유황을 뿜는 굴뚝용인지 대포를 쏘는 포탑용인지 선수 하단부체 충돌용 돌기가 있는지 없는지 몰랐습니다.
저는 그날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순신에 대해서라면 이를 갈며 증오심과 적개심을 드러내리라고 생각했던 일본인을 통해서 제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을 알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사장은 나에게서 자신이 원했던 것을 얻기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해 주더군요.
"이순신은 중세기 세계 최강의 군력을 보유하고 있던 일본군을 꺽었다. 만약 이순신이 없었다면 일본은 그 군력으로 중국은 물론 아랍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의 정신과 해전술은 우리 근세 일본해군의 동력이 되었다. 생각해 보라. 임진왜란은 조선과 중국 대 일본의 싸움이 아니었다. 이순신과 일본의 전쟁이었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이죠.
사장은 어렸을 적부터 일본 전국시대를 풍미한 영웅전기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하더군요(사실 일본사람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특히 전국시대 3대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일본인들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인물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우익과 성인남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일본이 개국한 이후, 처음으로 섬을 벗어나 대륙으로 눈을 돌린 인물이기 때문이랍니다. 아울러 평민출신으로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점도 일본인들에게 영향을 줬겠죠.
사장은 대학시절 이순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다의 맹장들이 왜 하나같이 맥을 추지 못하고 연거푸 패해야 했는지, 천하의 용장들이 총출동한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해야 했는지.... 일본 자위대는 물론 정계의 정점으로 추앙받고 있는 도고 헤이하치로는 무엇 때문에 이순신을 칭송했는지.... 말이죠.
관련 서적, 논문 같은 것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많다고 하더군요. 일본인의 시각으로는 아무래도 연구에 한계가 있지 않겠냐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한국인은 세계적인 영웅을 배출한 민족이면서도 그 가치를 제대로 구현해 내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만약 이순신 같은 인물이 일본에서 배출되었다면 징키즈칸 못지않은 세계적인 인물로 부각되었을 거라면서....
그날 숙소에 돌아온 저는 마치 무엇에 홀린 것 마냥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죠. 그리고는 서울 형님에게 전화를 걸어 이순신 장군에 관한 책을 좀 사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형님이 보내주신 몇권의 책이 왔습니다. 소설류에서부터 해전에 대해 기술해 놓은 전문 서적류까지... 모두 읽었습니다. 그런데 공허해 지더군요. 너무 막연했고 황당했으며 거기서 거기였습니다. 또 이미 알고 있던 얘기들이었구요.
그리고 한달 전, 금년 5월에 나온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울면서 봤습니다. 새로운 사실들, 그리고 지금껏 그 어디에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얘기들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됐습니다. 책의 머릿글을 보니 작가들은 이 책을 쓰기 위해 무려 20년이 넘게 집필에 전념해 왔다고 하더군요. 어떤 분은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 두면서 말입니다.
또 서문에는 사카모토 사장이 제게 물었던 이순신의 해전술의 원리와 거북선의 실체를 밝혀주는 글이 들어 있었습니다. 전율을 느끼며 책장을 넘기고 넘겼죠. 거짓말 않고 꼬박 밤을 세워 1권의 반을 읽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까지 나는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도대체 제도권 교육에서 우리가 배웠던 것은 무었이었을까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말로는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문화민족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교육이 문화민족의 일원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던 것일까요. 제가 지금까지 배웠던 교육이 12000원 짜리 단행본 1권보다도 충실하지 못했다면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 1권 서문의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이것이 많은 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20세기 일본 해군은 직충(直衝,ramming) 등을 오역하지 않았기에 충무공의 '거북선+학익진의 해전원리'를 제대로 해독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일본은 20세기 초 세계사의 지각변동을 가져온 청일해전과 러일해전에서 승리했고, 한반도는 일본에 합방되었으며, 청나라와 러시아는 차례로 문을 닫는다. 그 후 일본 해군의 학익진(丁자진) 해전원리를 승계한 영국 해군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해군을 분쇄했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미국 해군이 레이테만(스리가오)에서 학익진(T자진)으로 일본의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켰다. 미국 해군의 학익진 원리에서 맥아더의 (도쿄를 향한) 개구리 뜀뛰기 상륙작전과 란체스타 공군전술이 개발되었다. 그런데 기존의 서적에서는 세계 해군들의 학익진 연구사가 빠져 있기에 지금까지 우리의 이순신 연구는 우물안 수준에 머물러 있음이다.
일본인이 이순신을 묻는다면(2)
얼마 전, 「일본인이 이순신에 대해 묻는다면?」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사람입니다.
두서없이 정리되지 않은 저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신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며칠 전 댓글을 통해 말씀드린 대로 제가 왜, 무슨 이유로 보잘 것 없는 경험담을 늘어놓으며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라는 책을 소개하게 되었는지 말씀드리려 합니다.
제가 일본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왔을 때 TV에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를 하고 있더군요. 관심을 가지고 시청했죠.
종영이 임박한 상태라 마지막 몇 회 분만 볼 수 있었습니다. 넋이 빠져나갈 정도로 훌륭한 드라마였습니다. 특히 이순신 장군 역을 맡아 열연하신 김명민님의 연기는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중략) 이순신 게시판에 올려진 다른 분들의 글을 보다가 저는 아주 감명 깊은 글 하나를 보게 되었죠. 김세명이란 분이 올린 글인데요, 이 글이 바로 저로 하여금 이곳 토론방에 글을 올리게 만들었고 저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20년을 넘게 충무공에 관해서 연구한 성광수님을 위시한 회원들이 낸 총4권인데 현재 2권까지 발간이 되있읍니다.. 성광수님은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시고 이순신역사연구회를 이끄시고 계시더군요...책 내용의 깊이는 정말 최고입니다.. ...보니까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연구회 사정이 무척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여러분도 구입하셔서 꼭보세요..이런 연구회가 재정난 때문에 사라진다면 그건 대한민국의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자녀에게 친구에게 선물해도 돈아깝지 않은 최고의 불멸책입니다.. -불멸의 이순신 시청자게시판-에서 ---------------------------------------------------------------------
이 글을 보신 님들의 소감은 어떠신가요. 전 글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울컥하더군요. 짧고 투박해 보이는 글이었지만 저는 김세명님이란 분의 글에서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강한 외침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바로 책을 구입해 밤새워 읽었습니다. 그렇게 읽으려고 읽은 것이 아니었죠. 보는 순간부터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책을 보면서 엄청난 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던 상식의 틀은 부서졌고 그 자리에 자랑스럽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지식과 체험, 그리고 새로운 임진왜란 해전사가 꿈틀대기 시작했죠.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가 알고 싶었던 것, 사카모토(식당 사장)로부터 받은 의문부호들이 비로소 느낌표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그리고 온 몸으로 전율을 느끼게 될 즈음 저는 불현듯 이런 자문을 하게 되었죠. “왜 이런 책이 이제야 나왔을까?”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알았던 것들은 뭐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저는 머리말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죠. 작가분들이 회고하듯 써놓은 두 페이지 분량의 기록에서 말입니다. 몇 대목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 이 책을 내기까지 2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은 책을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필자들에게는 충무공을 닮아가기 위한 실천적 여정이자 깨달음의 장이기도 했다. 충무공을 연구하면서 크게 느낀 점이 있다면 우리의 모습 속에도 이순신과 같은 모습이 있다는 사실이다. 충무공의 말씀(언어, 글) 속에서 이러한 닮은 모습을 스스로 찾아내고 자율적으로 계발해 간다면 독자들 또한 값진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을 내는 필자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이순신과 임진왜란> 1권 머리말- 중에서 ---------------------------------------------------------------------
무려 25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금년 5월에 나온 책이구요. 그러니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책이었죠.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알았던 지식들은 충무공의 말씀(언어, 글)이 아닌 대개가 작가나 학자분들의 시각에서 쓰여진 주관적인 기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철저하게 이순신 장군의 기록(난중일기, 장계)을 바탕으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갑니다. 작가의 상상과 추론이 아닌 어디까지나 장군의 시각에서 임진왜란의 역사를 탐방하듯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 작가들은 역사 탐방을 위한 안내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죠.
제가 처음 올렸던 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어떤 분들은 제가 식당 사장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해서 부끄러워한 것으로 아시더군요.
왜 그것도 몰라서 답변을 못했느냐는 질타와 전문적인 분야이므로 모를 수도 있다는 동정, 중요한 것은 충무공의 정신이지 그같은 물리적 결과물은 중요하지 않다는 반박의 말씀까지.....
물론 모두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가 미처 설명 드리지 못했지만 그날 전 사장을 통해 엄청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도고의 일본 해군이 이순신 장군에게 배워간 것은 해전술(소프트웨어)이나 거북선(하드웨어)만이 아니라는 거였죠. 이순신 장군의 해전술과 거북선 속에는 장군님의 철학과 정신이 들어있다는 거예요. 따라서 도고의 일본 해군이 배워간 것은 ‘소프트웨어+하드웨어+이순신의 철학/정신’이라는 겁니다.
사카모토 사장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순신의 정신은 오늘날 일본 속에 살아계시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뼈져리게 부끄러웠고, 죄스러웠고, 민망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함대에 참패한 일본- 300년 후 일본 해군의 이순신 연구- 일본의 청일/러일해전에서의 승리-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그저 역사의 아이러니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도 많은 것이 되새겨지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정신력 자본, 우리의 지식자산이 남의 나라에 유출되면서 빚어진 통한의 역사인 것입니다.
학익진과 거북선은 그냥 지식으로 알아서 해결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 속에 충무공의 혼과 정신이 있다는 겁니다. 대한민국, 5천년 문화민족의 자긍심과 역량과 민족의 혼이 응집되어 완성된 정신력 자본의 총화라는 것입니다.
김세명님 또한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그래서 글을 올리셨겠지요. 그 글은 저를 움직였습니다. 저의 글 또한 다른 분들에게 어떤 외침과 울림으로 작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글을 올린 이유입니다. 다음을 비롯한 여러 포털 사이트의 대문을 장식했던 챔피온이란 분의 글입니다. 어떤 분이 챔피온님의 글을 모아 다음 '세계엔'에 올리신 걸 가져왔습니다. 3.1절과 이충무공탄신일을 앞두고 한 나라의 흥망과 역사의 의미를 되새겨보자는 취지에서 올려봅니다만, 지금까지 이 글을 보셨던, 그리고 앞으로 접하게 되실 분들께 한가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 인용된 김세명님의 글에서 이순신역사연구회가 재정난 때문에 문을 닫게 될 위기에 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이순신역사연구회는 설비투자가 필요 없는 연구 동아리로서 저술에 참여한 작가들 모두 현업에 종사하며 연구회 일에 관여해온 터라 재정난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죠. 책 머릿말에 적힌 '이 책을 내기까지 25년이 걸렸다'는 내용이 독자님들에게 그 같은 짐작과 우려를 갖게 했었나 봅니다. 김세명님이나 챔피온님께서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구요. 이 글 때문인지 아니면 머릿말의 글 때문인지 간혹 출판사를 통해 "연구회를 돕고 싶다"며 후원의 뜻을 전해오시는 분들이 계신데요, 그런 말을 전해듣거나 직접 전화를 받을 때마다 언젠가는 오해를 풀어드려야 하겠구나 생각하던 차에.... 바로 며칠 전 또 한번의 전화를 받고서야 서둘러 글을 올립니다. 블로그가 있다는 게 이토록 다행스럽고 대견스러울 줄은 미처 몰랐네요. 아무튼 관심 가져주시고 걱정해 주신 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관심을 받는다는 건 분명 뿌듯하고 기분 좋은 일임에도 "연구회 문 닫았나요?"라는 질문과 염려에는 저희들도 화들짝 놀라기 일쑤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은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좋은 하루 만드세요!!
▲ 386년 태자 책봉/ 396년 백제 정벌 / 400년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왜구 격퇴/ 410년 동부여 정벌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75~413). 그는 한국인임이 자랑스럽다는 사람들에게 가장 자부심을 심어주는 인물이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군사적 영웅으로서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이 한국인에게 자긍심을 심어 주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광개토대왕의 대륙 진출이 지리적으로 반도라는 한민족의 콤플렉스에 대한 보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광개토대왕 때 확대된 고구려의 영토는 어디까지였을까? 고구려의 강역이 가장 넓었을 때는 장수왕(재위 413~491)대다. 이때의 경계는 동쪽이 북간도의 혼춘, 남쪽은 아산만-조령-영일만을 연결하는 선, 서쪽은 요하, 북쪽으로는 목단강 유역의 영안(寧安·寧古塔) 방면까지로 비정된다.
<구당서>에는 고구려의 강역이 '동은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은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고, 남!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은 말갈에 이른다. 동서는 3,100리, 남북은 2,000리'라는 기록과 어느 정도 부합한다고 하겠다.
광개토대왕은 395년 시라무렌강 방면의 거란을 정벌했다. 396년에는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임진강과 한강 일대에서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고, 400년과 404년에도 신라지역과 예성강 일대에서 각각 왜구를 격퇴했다.
398년에는 현재의 영안 일대로 추정되는 숙신(肅愼)과 토욕혼(吐谷渾)을 점령하고 조공을 받았다. 403년에는 숙군성(宿軍城)을 점령했다. 이 전투 결과는 <자치통감>에 "고구려가 숙군을 공격하니 연의 평주자사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고만 기록돼 있으나, 고구려가 평주까지 진출했다는 서진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다. 410년에는 친히 동부여를 재차 토벌해 64성을 격파했다.
광개토대왕은 전방위에 걸쳐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군사적 위상을 아시아 국가들에 인식시켰다. 5세기 후반 북위에! 서는 주변국 사신의 서열을 정할 때 남제를 제 1위, 고구려를 제 2위로 삼 年. 고구려는 북위·남제와 맞먹는 강국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연호 제정은 천하에 대한 고구려의 자부심을 알게 한다. 연호는 천자만 제정할 수 있는 것으로, 광개토대왕은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이에 따라 영락대왕이라고도 한다. 그에 대한 칭호 '호태왕(好太王)'은 중국의 천자와 당당히 맞서는 존재였다.
광개토대왕은 정복사업과 함께 내치에도 개혁적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자신의 치세 2년,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설치했다. 광개토대왕은 18세에 왕이 되어 39세로 사망할 때까지 고구려의 영토를 전방위에서 확대해 아시아의 고구려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고구려인이었다. 그의 치적과 함께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점에서 37세에 사망한 알렉산더와 비교하기도 한다.
돌아선 신민(臣民)의 마음을 돌려세우는 일. 새로 즉위한 세종(世宗·1397~1450)이 해결해야 할 최대 숙제였다.
조선시대 초기 '건국'과 '개혁' 과정에서 나라의 원로들이 소외되자 "지금의 인심은 옛것을 버리고 새것만 취하는 경향이 있다. 자손을 위한 계책도 마련해야겠지만 늙은 자를 버리고 돌보지 않는다면 장차 나라가 어찌 되겠는가"(태종실록 18년5월11일)라는 개탄이 나왔다. 제자가 스승을 죽이라고 탄핵하고(정도전과 이색), 자식이 부왕의 뜻을 저버리는가 하면(이방원과 이성계), 수차례의 형제 간 권력다툼(왕자의 난)까지 불거지자 사람들은 이 '싸가지 없는 정권'의 향방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되는 가뭄과 흉년으로 백성들이 하루 한 끼로 연명하거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흙을 파 떡과 죽을 해 ! 먹는 상황도 시급히 해결해야만 했다. 굶주린 백성은 산속으로 들어가 초적(草賊)이 되거나 집단으로 나라를 떠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조정 신료들의 침묵과 눈치 보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나라의 희망은 없다는 것이 세종의 판단이었다. "올 겨울은 지나치게 따뜻하다. 날씨가 봄처럼 따뜻해 얼음을 저장할 수 없고, 또 어제는 짙은 안개가 끼어 매우 상서롭지 못했다. 그런데도 아직 과감한 말로 내 허물을 쟁간(爭諫)하는 자가 없으니 이상하지 않으냐."(세종실록 7년 12월8일).
태종이 사망한 지 3년이 지났지만 태종 통치하에 형성된 관료들의 복지부동은 변하지 않았다. 하기는 말 한마디 잘못하면 온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살벌한 시대를 산 그들에게 쟁간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이 첫 번째로 취한 조치는 회의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었다. 즉위한 지 사흘 만에 세종은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우의정 등과 함께 의논해 벼슬을 제수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도승지 하 연은 "전하께서 초정(初政·첫 번째 정사)을 의논으 시작하신다니 매우 다행입니다"라며 환영한다.
당시 이미 22세의 나이였고, 또 학문이나 정치적 경륜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던 세종이 '인물을 잘 알지 못할' 리는 없고, 아마도 정치란 왕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이론과 현실이 다르다는 인식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세종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직언'을 요청했고, 말끝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때로 논전(論戰)과 '끝장 토론'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를 당시 사람들은 "토론을 즐겨하는(樂於討論) 군주"라고 불렀다. 세종시대의 수많은 업적과 성대한 인물들은 바로 이런 회의 분위기에서 나왔다. 신분을 초월해 인재가 천거되고, 그 인재들이 사명감을 갖는 것은 바로 회의 안에서였다. 이런 회의를 거쳐 세종이 육성한 100여 명의 집현전 학사는 새 왕조의 예제와 법전을 마련하는 한편, 민생을 돌보는 순량한 관리가 됐다. 조선 왕조가 민심의 기반 위에 선 안정적 국가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박현모_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3. 정약용 (茶山)
역사상 최다 논저 집필… "다산 연구가 곧 조선사 연구"
▲ 1762년 경기도 광주 출생/ 1783년 경의진사/ 1789년 식년문과 급제/ 1792년 기중가설 작성/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 1799년 병조참의/ 1801년 강진 유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조선 후기의 위대한 학자다. 그는 실학의 집대성자이자 사회개혁가였고, 방대한 유교 경전을 망라해 해석한 유교 역사상 드문 경학가였으며, 어문·역사·지리·과학·의학·예술 등 학문 전 분야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긴 박학(博學)의 학자였다.
초등학생도 제목을 아는 대표 저서 <목민심서>는 일찍이 동학 농민군이 얻었다는 '구세(救世)의 비기(秘記)'라는 전설을 남겼으며, 고종에게도 올려졌고, 베트남의 민족지도자 호치민의 애독서였다. 아직도 완역되지 못한 500여 권의 <여유당전서>는 깊은 사색과 수많은 정보가 담긴 바다와도 같아, 단언컨대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논저가 그에 대해 이루어졌다.
일찍이 정인보 선생이 "다산 연구는 곧 조선사! 연구요, 조선 근대 사상 연구"라고 정리했듯, 다산의 사상은 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자유주의자 등의 모든 개혁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2007년, 그는 자유자재의 지식경영법을 운용한 신지식의 표상으로도 읽힌다.
다산은 실학, 그 중에서도 남인(南人) 실학의 지식 전통에 서 있었다. 남인 실학은 성호(星湖) 이 익(李瀷) 이래 토지와 사회제도 개혁을 통한 이상사회 구현에 관심을 기울였다. <여유당전서>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학(經學, 유교 경전 해석학)의 궁극적 지향 역시 토지공유(土地公有)에 기반한 정의로운 공동체 구현이었고, 지고한 도덕적 존재의 현현(顯現)을 통한 지배층의 각성이었다. 그 점에서 그는 당대의 기성 유학, 곧 성리학을 질타한 '유학의 근본주의자'였다.
넓게 보면 다산은 유학자였지만, 그는 딱히 유학의 틀 안에만 갇혀 있지도 않았다. 18년의 유배생활은 전도양양했던 고위 관료가 백성의 삶에 깊게 다가가 휴머니스트로 거듭나는 계기였다. 민초의 고통, 그리고 그 너머의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 대한 그의 날카로! 운 고발은 당대의 어떤 기록과 문학보다 생생하며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저 민다.
연민의 폭이 깊은 만큼, 그의 개혁책은 누구보다 치밀하고 웅장했다. 그것은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생히 보여주었다. 인애(仁愛)에 기반한 휴머니즘 정신이야말로 그를 오늘도 생동하게 하고 있다.
휴머니즘에 기반한 실천하는 양심으로 다산은 시공을 초월한 스승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개별 학문, 즉 각론(各論)이 갖는 현재성의 문제는 남는다. 그의 학문적 성과는 1930년대 국학(國學)운동의 도화선이 된 이래 전근대와 근대를 연결하는 가장 든든한 다리였다. 하지만 근대 담론이 100년을 넘어 그 한계가 또렷해지는 지금, 그의 각론에서 근대성을 추출해 왔던 방식은 개선의 여지가 없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가 이룩한 지식 혹은 가치의 통합 방식을 재음미할 시점이다. 그것은 근대 한국학이 소홀했던, 개인과 객관 사물의 조화에서 출발했던 전근대 사유를 되살리는 과정이며 전통과 근대를 넘는 새 가치론의 모색이다.
다산이 훌륭하게 구현한 각론과 ! 祈隙 조화는 그래서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이경구_한림대 한림과학원 연구교수
4. 박정희
세계 경제 11위 국가 초석 다진 CEO형 대통령
▲ 1917년 11월14일 출생/ 1937년 대구사범학교 졸업/ 1942년 중국 만주군관학교 2년 예편과정 수료/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1948년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돼 남로당 가입 등 좌익 혐의로 체포/ 1950년 육군 소령으로 복직/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주도/ 1961~1963년12월 제2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3년12월~1979년 10월 제5~9대 대통령/ 1979년10월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격당해 서거
박정희(朴正熙·1917~1979) 전 대통령은 공과(功過)가 뚜렷한 인물이다. 때문에 박 전 대통령 시대를 재조명하는 일은 현 정부 들어 진행된 각종 과거사 논쟁에서도 정점에 해당한다.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것은 분명한데, 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독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가 문제다.
논란은 거듭되지만 답은 잘 안 나온다.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면 '소유냐, 존재냐'의 논쟁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절대 빈곤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시급했느냐, 인간으로서 삶의 장치를 갖추는 것이 먼저였느냐는 질문에 답은 제각각 다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 전 대통령은 그해 7월 경! ┗銹뮈坪 설립해 산업구조 고도화와 수출 증진을 위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했다. 경제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산업금융체제를 강화하고, 수출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각종 수출금융과 수출지원 체제를 정비했다. 1970년대에는 유가 상승으로 물가 불안이 심화하는 가운데 중화학공업 정책을 추진해 고도성장 기조를 유지했다.
이런 성장정책으로 박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절대 빈곤에서 탈피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1인당 국민소득을 명목소득으로 계산할 때 박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1961년 82달러에서 1979년 1,636달러를 기록해 무려 연평균 18%의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특히 수출은 연평균 38% 증가라는 경이적 기록을 이룩했다.
때문에 '개발독재 불가피론'을 펴는 보수적 시각에서는 1960~70년대 우리나라가 이룩한 경이적 경제성장이 박 전 대통령 개인의 탁월한 능력과 함께 '독재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개인의 능력과 관계없이 한국경제는 성장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며 독재의 폐해를 지적한다. 박 전 대통령이 이룬 경제성! 揚 업적은 노동자의 희생과 인권침해, 천민자본주의의 폐단과 부작용을 낳 았다는 것이다.
최근의 추세는 박 전 대통령의 공과 중에서 'CEO 박정희'는 인정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는 듯하다. 그동안 박 전 대통령 평가에 인색했던 진보학계에서조차 그런 움직임이 포착될 정도다.
진보 진영의 대표적 원로학자 백낙청 교수는 2005년 계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서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한 다른 나라 독재자가 많다는 점과 한국처럼 극적인 성장을 이룩한 일은 더욱 드물다는 점에서 박 전 대통령을 경제성장의 유공자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민주화 진영이 박정희 개인이나 그 시대 경제분야에 대해 소홀한 면이 있었다"며 "전제적이고 포악했지만, 유능하고 나름으로 헌신적이었던 '주식회사 한국'의 최고경영자(CEO) 박정희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정해 주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 향수야말로 박정희 시대 최악의 유산"이라고 덧붙였다.
박 전 대통령은 쿠데타를 통한 집권과 철권 통치, 경제 기적이라는 양면성을 극명하게 지니! 우리 사회 모순과 함께하고 있어 평가가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의 문제점이 현재까지 우리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역사의 인물인 동시에 현재의 인물이기도 하다.
오효림_월간중앙 기자
5. 김옥균
쇄국 빗장 풀고 개혁·개방 선도한 시대의 풍운아
▲ 1872년 알성문과 장원급제/ 1882년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 방문/ 1884년 갑신정변 주도 / 1884년 일본 망명/ 1894년 상하이로 건너갔다 자객에게 피살
열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을 묘책은 무엇일까? 한 세기 전 풍운아 김옥균((金玉均·1851~1894)을 고뇌하게 한 화두는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 과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고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일본이라는 외세에 기대고 무력에 호소하는 유혈 쿠데타라는 수단으로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려고 했으며, 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후 동아시아 3국이 힘을 모아 서구의 침략을 막자는 '삼화(三和)주의'를 제창한 바 있다.
오늘 우리 지식사회는 세 가지 해법을 내놓는다. 한국사학자들은 제국과 당당히 맞설 민족을 단위로 하는 자주적 국민국가의 완성을, 경제사학자들은 제국과의 ! 타협을, 그리고 서양사학자들은 유럽공동체(EU) 같은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시대를 앞서 이를 먼저 고민했던 김옥균은 분명 선각자다.
그러나 국민을 단위로 한 국민국가를 세우려고 했으면서도 제국과 타협하려 했으며, 민족을 넘어 일종의 동아시아 공동체도 모색했던 이중성과 모호함이 그에 대한 평가를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그만큼 시대와 지향에 따라 긍부(肯否)가 엇갈리고 호오(好惡)가 교차하는 역사적 인물도 드물다. 정변 동지 서재필은 그를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을 힘 있는 근대국가로 만들기를 절실히 바란" 위인으로 기억하지만, 정변에 불참한 윤치호는 "위로 나랏일을 실패하게 하고, 아래로 민심을 흔들리게 한 경망스러운" 인물로 깎아내린다.
그와 동시대를 살고 생각을 함께한 개화파 인사들의 평가가 엇갈릴 뿐만 아니라 항상 같은 내용이었을 것 같은 북한학계의 평가도 늘 변해 왔다. 주체사상이 대두하는 1950년대 중반을 경계로 그에 대한 평! 가가 '친일주구'라는 악평에서 '부르주아 개혁운동을 주도한 혁신관료'라는 찬탄으로 뒤바뀌었으니 말이다.
오늘 우리 학계의 김옥균관도 평자가 서 있는 곳과 지향하는 바에 따라 서로 충돌한다. 남의 국민과 북의 인민이 하나 되는 민족을 단위로 한 국민국가의 완성과,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가슴에 품은 한국사학자들은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려 했던 그의 이상에는 공명하되 일본에 의존하고 민중의 힘을 도외시한 그의 전략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이처럼 김옥균에 대한 기억의 편차가 크다는 것은 갈가리 나뉜 우리 사회의 난맥상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다원화한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재는 시금석일 수도 있지 않을까?
허동현_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6. 서희
전쟁은 심리싸움! '세 치 혀'로 1백만 거란군 물리쳤다
▲ 942년 개성 출생(추정)/ 962년 고려 문과 급제/ 972년 송나라 검교병부상서/ 983년 병관어사/ 993년 중군사로 對 거란전 참전
예나 지금이나 한국 외교는 굴절로 얼룩져 있다. 사대와 자주의 틈바구니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외교 논쟁을 거듭한 것이 그것이다. 최근 벌어진 '친중외교'와 '친미외교'의 대결은 소위 '자주외교' 논쟁을 파생시켰고, 그 사이에서 등장한 '동북아 균형자론'을 둘러싼 공방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중국·일본과의 역사논쟁까지 가세하면서 한국 외교는 내부적으로 끝없는 논쟁에 휘말리는 모양새다.
이럴 때마다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고려 초 거란의 침략을 받아 국가 존망이 불확실할 때 외교적 수완으로 적을 물리친 것은 물론 오히려 영토를 확대하는 성과를 이룬 서희(徐熙·942~998)가 바로 그 주인공.
고려 건국 이후 최! 위기는 발해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의 패자가 된 거란이 8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는 데서 시작됐다. 조정에서는 아연실색해 싸워 보지도 않고 땅을 떼어주고 화친하자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러나 서희는 혼자 적진으로 들어가 적장 소손녕과 담판해 군대를 물리게 했다. 그야말로 '세 치 혀로 백만 대군을 물리친' 경우다.
그러나 서희가 오로지 '세 치 혀'만으로 적을 물리친 것은 아니다. 그가 담판을 이룰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보다 당시의 전세와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이해였다.
우선 당시 중요한 전술상의 변화가 발생했다. 안융진 전투 이후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고려군의 검차 앞에서 거란의 기마군이 맥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기마부대를 이용한 속도전과 광활한 대지에서의 싸움에 익숙한 거란의 전술이 산악지형인 고려에서 통하지 않자 소손녕은 초조해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당시의 국제정세였다. 거란이 서희의 제안을 ! 물리치지 못한 이유는 송나라와의 대립관계 때문이었다. 그 전에도 거란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 때를 틈타 송이 여러 차례 거란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 목적이 고려와 친교해 송을 견제하는 데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우리 역사상에는 당시와 아주 흡사한 경우가 또 있었다. 조선 중기 인조 때 일어난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명을 공격하려던 신흥세력 청은 후방의 안위를 걱정해 대군을 몰아 조선을 침공한다. 이 같은 정세를 미리 파악했던 광해군은 양국 간의 이해를 이용해 국가의 안위를 지켜나갔지만, 쿠데타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인조 대의 유신들은 태생부터 유교적 명분론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주전파와 주화파가 나뉘어 논쟁 끝에 주전파가 득세해 전투에 임했지만 결과는 '삼전도의 굴욕'으로 끝나고 말았다.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은 뒤에도 고려는 송과 문화적 교류를 끊지 않았다. 송 역시 고려를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는 고려와 거란·송이 팽팽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국제관계 속에서 힘의 균형을 이용해 실리외교를 편 서희의 담판은 강대국 사이에서 고도의 외교 전략을 필요로 하! 는 지금의 상황에서 두고두고 반추해야 할 역사적 교훈이다.
이항복_월간중앙 기자
7. 이건희
반도체 왕국 건설 주인공… 위기 때 빛 발하는 10년 예지력
▲ 1942년 경남 의령 출생/ 1961년 서울대 사범대 부속 고등학교/ 1965년 와세다대학교 경제학과/ 1966년 동양방송 입사/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 1987년 삼성그룹 회장/ 1998년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
우리에게는 서구에서 말하는 산업혁명 과정이 없다. 그래서 핵심 기술과 소재 등 대부분을 수입해 산업화를 시작했다. 그 결과 항상 선진국을 따라잡기에 바빴고, 한편으로 후발주자에게 덜미를 잡힐 우려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반도체에 이르러 말은 달라진다. 메모리칩 분야에서 15년째 1위. 이는 1970년 인텔사가 1K D램을 개발하면서 시작된 메모리산업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사례로 기록돼 있다. 역사 이래 대한민국발 그 어떤 성과도 이를 능가할 수 없다는 평가도 나왔다.
1983년 2월8일 이병철(1910~87) 삼성 회장은 삼성그룹이 반도체 산업에 본격적! 막 진출하겠다는 내용의 '도쿄 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이 회장은 64K D램 기술 개발에 착수하겠다는 구체적 계획까지 내놓았지만 국내외의 반응은 1974년 삼성이 한국반도체를 인수할 때처럼 냉소뿐이었다.
그러나 도쿄 선언 10개월 뒤인 1983년 12월 삼성은 전 세계 반도체 업계를 충격에 빠뜨리는 발표를 내놓는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해낸 것. 세계 반도체 업계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로서는 '꿈의 기술'이라던 64K D램을 독자기술로 개발해냈기 때문이었다.
10여 년 뒤인 1992년, 이병철 회장의 셋째 아들로 삼성 회장직을 이어받은 이건희(1942~ ) 회장은 다시 한번 세계 반도체 업계를 경악하게 하는 발표를 했다. 세계 최초로 삼성전자가 8인치 웨이퍼 투자를 결정했던 것. 일반인에게는 낯선 이야기지만 8인치 라인 가동은 1993년 삼성이 마침내 메모리칩 업계 세계 1위에 올라 올해까지 15년째 부동의 세계 1위를 고수하는 시발점이었다.
삼성의 임직원이 반도체 세계 1위를 자축하며 샴페인을 터뜨리던 1993년 2월, 이 회장은 갑자기 삼성전자 사장단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불러모았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해 독일 프랑크푸르트-일본 오사카-영국 런던으로 잇는 4개월여에 걸친 대장정에서 연인원 1,800여 명의 임직원을 해외로 불러들였고 장장 500여 시간 열변을 토했다. 1987년 회장 취임 이후 '자율경영'을 강조하며 '은둔의 경영자'로 여겨지던 그로서는 전에 없던 파격이었다. 당시 그의 강연을 들었던 삼성 임직원들은 "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다"고 회고한다. 평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보다 상대방 의견을 듣는 데 열중하던 이 회장의 스타일과는 사뭇 달랐다는 것.
대장정의 끝자락인 1993년 6월7일, 이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했다. 선친인 고 이병철 회장의 '도쿄 선언'이 있은 지 꼭 10년 만이었다. 당시 그는 이 선언을 통해 "삼성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며 강력한 개혁을 요구했다.
반도체 세계 1위에 오른 상황임을 감안하면 다소 의아한 주문이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이 회장은 "세기말적 변화를 앞두고 경! 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초일류 기업과의 경쟁에서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다른 기업들이 거품경제의 환상에 매료돼 5년 후 다가올 외환위기의 대재앙을 상상조차 못하고 있을 때 이 회장은 삼성을 살려낼 방주를 주조하기 시작한 셈이었다.
이제 세계시장에서 '반도체=삼성'의 등식은 일반화됐다. 뿐만 아니라 삼성이 세계 1등인 것은 컬러TV·LCD모니터 등 무려 10여 개에 달한다. 한국의 1등을 명실공히 세계의 1등으로 만든 삼성 이건희 회장의 행보가 여전히 주목되는 것은 앞으로 새롭게 등장할 1등에 대한 궁금증을 계속 던지고 있기 때문 아닐까?
조선 왕조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세종의 시대를 과학기술문화를 가장 찬란하게 꽃피운 시기로 꼽는다. 심지어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이때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이 '특기할 정도로 뛰어났다'고까지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조선 초기의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장영실(蔣英實·생몰연대 불확실)이다. 그의 선조는 중국의 소·항주(蘇·杭州)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해 대대로 군기시·서운관 등 과학기술과 관련된 직책에 복무했다.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蔣成暉)는 고려 말 전서(典書)를 역임한 관리였으나 어머니는 기녀였다. 그런데 어찌 된 연유인지 장영실은 ! 옆′痔 관노(官奴)로 있었다.
그렇지만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는 일찍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냄으로써 태종 때부터 중앙으로 차출돼 활동하기 시작했다. 1421년에는 세종의 특별 배려로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이천 등과 함께 천문관측기구의 제작에 참여해 두각을 나타냈다. 그렇지만 장영실의 진가는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제작 과정에서 발휘되었다. 자격루는 다른 기구들과 달리 매우 복잡한 기계였음에도 장영실은 자신의 책임 아래 세종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단기간에 완성했다. 이에 세종은 그를 호군(護軍)으로 승진시켰다. 이어 장영실은 자격루보다 더 정교한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제작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것으로,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해야 할 농사일까지 알려주는 다목적 시계였다.
뿐만 아니라 장영실은 금속 채굴과 제련 관련 분야에서도 많은! 활약을 했다. 지방으로 파견돼 청옥·동철과 연철의 채굴 작업을 감독했다 . 또한 1434년에는 중국인 김새(金璽)로부터 금속 제련 기술을 전수받아 갑인자 주조 사업에 핵심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금속활자 주조 기술의 발달에 이바지했다. 이러한 공로로 늦어도 1438년 이전에 대호군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세종 24년(1442) 그가 제작을 감독했던 임금의 '안거(安輿·임금의 수레)'를 세종이 타고 온천욕을 위해 경기도 이천으로 가던 도중 부서진 사건으로 직첩을 회수당하고, 장형(杖刑)을 당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장영실의 등장과 퇴장은 당시 조선사회의 역동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노비 출신의 그가 관리로 발탁된 것은 신분적 자격보다 업무 능력과 경험을 더 중시했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건국 초기에 국가의 통치체제를 새롭게 정비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느 전통적 문반 출신의 사족(士族)들과 달리 그의 업적은 자손들에게 계승되지 못했다. 이는 문반 중심의 신분질서를 존중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장우_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9. 이승만
'대륙풍' 차단, 해양문명권 편입 시도한 현대판 문명 개화파
▲ 1875년 황해도 평산 출생/ 1894년 배재학당 입학/ 1898년 정부전복획책 혐의로 투옥/ 1917년 뉴욕 세계약소민족대회 대표/ 1945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 1948년 초대 대통령 취임/ 1960년 4선 대통령 당선/ 1960년 4·19혁명으로 사임
이승만(李承晩·1875~1965)이 한민족에게 기여한 사실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를 국가사적·민족사적 관점보다 거시적인 세계사적 관점 또는 문명사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승만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는 오늘날 전 지구적(globalist) 차원의 '문명충돌'이 일어나는 시대에 비추어 볼 때에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계주의'가 막 시작되던 1945년 이승만은 한국인들을 중국 중심의 대륙문명권으로부터 떼어내 '현대판 로마제국'인 미국 중심의 해양문명권에 편입하는 '문명사적 전환'을 주도했다. 한국인의 문명권 소속을 바꾸려는 혁명적 시도였다.
그는 새로운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세계적 표준에 맞도록 한국인들의 수준을 높이기에 앞서, 자신부터 그 수준에 맞추었다. 그래서 그는 배재학당에 이어 조지워싱턴·하버드·프린스턴대학을 거치면서 최고 교육을 받고, 세계어인 영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그 결과 그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최초의 한국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것은 그가 유학생 자격으로 미국 땅을 처음 밟은 1904년부터 하와이에서 죽은 1965년에 이르는 동안 <뉴욕타임스>에만 실린 그의 기사가 무려 1,256건에 이른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대한민국 땅이 '팍스 아메리카나'로 편입되는 과정은 아주 힘든 것이었다. 오랫동안 공동체주의적이고 관념주의적인 '중국적 생활방식'에 젖어 있던 한국인들에게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주의적인 '미국적 생활방식'은 낯설었다. 그 때문에 폭동, 정치파동, 6·25전쟁과 같은 수많은 진통이 따랐다.
그럼에도 1953년의 한미동맹 결성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해양문명권 편입은 확실해졌다. 또 그것을 토대로 하여 한국은 60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연간 국민소득이 35달러에서 2만 달러 가까이에 이르는 눈부신 발전을 했다.
'미국적 생활방식'인 자유민주주의의 정착은 이승만이 자유주의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려는 의지 때문에 가능했다. 6·25전쟁의 극한상황에서도 그는 선거를 중단하지 않았고, 국회를 해산하지도 않았다. 대통령 직선제를 포기하지도 않았고, 헌법을 정지시키지도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이승만은 야당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민주당이 자유당과 함께 양당제도를 운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흥사단계의 <사상계>와 한민당계의 <동아일보>가 그의 통치를 맹렬히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언론 자유를 허용했다.
1960년의 4·19 혁명은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 철학을 극적으로 보여! 주는 계기가 됐다. "국민들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소"라는 그의 하야 선언은 평생 민주주의를 신봉하던 청년 이승만의 이상 그 자체였다. 또 한 국가의 지도자가 물러날 때 어떻게 처신해야 명예로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국내가 아닌 하와이로 거처를 옮긴 일 역시 국민들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승만이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남겨 준 과제는 대한민국 땅이 다시 대륙문명권으로 되돌아가지 않게 막는 동시에, 여전히 대륙문명권에 붙어 '현대판 위정척사파'의 노선을 따라가고 있는 북한 땅을 해양문명권에 편입시키려는 '현대판 문명개화파'의 역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주영_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10. 백남준</! SPAN>
'비디오아트'로 서구 우월주의에 맞섰다
▲ 1932년 서울 출생/ 경기중·고 졸업 후 선재덕·이건우에게 음악 사사/ 1956 일본 도쿄대학 문학부 미학미술사학과 졸업/ 1958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음악 수업. 존 케이지 만남/ 1993 베니스 비엔날레 대상 수상/ 2006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회고전
백남준(白南準·1932~2006)은 시대를 50년쯤 앞서 살다 간 위인이다. 지금은 현대미술에서 당연시하는 '과학과 미술의 만남'을 이미 반세기 전에 시작했으니 말이다.
백남준이 떠나고 없는 이 시대, 포스트 백남준의 예술적 계보를 누가 잇는가가 세계 미술계의 뜨거운 이슈다. 그만큼 그의 족적은 깊고 넓었다. 그는 국내 작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박현기에서 출발해 김해민·이원곤·오경화·김영진·홍성민·육근병 등으로 이어지는 비디오아트의 계보는 백남준이 첫 단추를 끼워 짜인 것이다. 이들 한국의 후배 작가들에게 백남준은 심적 물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강익중 같은 뉴욕 거주 작가들은 백남! 蔓 영원한 정신적 지주로 여길 정도다.
백남준은 '전 세계에 통하는 브랜드'를 확실히 구축한 거의 유일한 한국 출신 예술가다. 국제무대에서 남의 눈치 안 볼 만큼 독창적 세계를 쌓은 그에게는 늘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전위음악가'라는 칭호와 함께 '동양에서 온 테러리스트'라는 별칭이 따라붙고는 했다. 이는 그에게는 훈장이나 다름없다.
서구예술의 우월주의에 맞서 '백남준표 아트'를 밀고 나간 그는 한국문화의 가능성을 낙관했다. 또 "선진국을 따라가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며 그 자신 '코리아니티 경영'을 보여주었다. 한국적 순수성을 간직한 채 국제 예술세계에 뛰어들어 테크놀러지의 예술성과 조우하고 '비디오아트'라는 신영역을 창조했다.
비디오아트를 전개해 가는 과정에서도 '거북선' '한국의 방' '종로구' '눈먼 부처'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한국적 상상력을 아낌없이 펼쳐보였다. 생각과 시도가 막힘 없이 늘 뻥 뚫려있던 그는 이질적인 것을 모아 또 다른 것을 만드는 한국의! 비빔밥과 남대문·동대문시장이 있는 한 한국은 문화강국이 될 것이라고 뺨暮척.
백남준의 일생은 진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과정이었다. 그에게 낡은 규칙은 의미가 없었다. 진정한 예술을 위해 기존 규칙은 파괴하고 해체할 대상이었다. 1967년 뉴욕에서 샬럿 무어맨과 섹스를 음악으로 표현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 대해서도 "섹스는 미술과 문학의 지배적 테마인데 왜 오직 음악에서만 금지되는가"라고 반문했다. 일상 자체가 예술이었던 그는 "욕을 먹어야 예술이 강해진다"며 기행(奇行)을 선보이기도 했다.
백남준의 작품세계는 또한 복합성을 기조로 한다. 한 가지 매체나 장르에 정착하지 않는 그의 방랑적 습성은 행위음악에서 해프닝으로, 해프닝에서 비디오로, 비디오 분야에서도 조각·설치·퍼포먼스·위성중계 등 비디오로 가능한 모든 지대를 섭렵하게 했고, 마침내 레이저아트까지 선보이게 했다.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서 끊임없이 복합성을 추구했던 그는 듣는 음악을 보는 음악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행위음악을 고안했고, 인터미디어 감수성으로 행위음악을 해프닝에 접목했다.
남다른 혜안과 용기로 미래적 비전을 제시하며 '포스트모던 시대의 비저너리'의 길을 걸었던 백남준은 10여 년의 투병 끝에 결국 우리 곁을 떠났다. 한국인이자 세계시민이었던 백남준. 그는 이제 천상의 세계에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끈질기게 도전하고,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칠 것을 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