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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로 생을 마감한 조선시대 세자 부부
5월의 늦은 밤에 생긴 일
1623년 5월 20일쯤의 강화도,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던 죄인이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위리안치란 일반 유배형과는 달리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형별로, 현대의 독방형과 같은 매우 무거운 형벌이었다.
죄인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조사결과 탈출수법이 매우 기막힌 것이었다. 울타리 안쪽에서 무려 70여척(1척 = 30cm) 즉 20여 미터나 땅을 파고 굴을 내어 탈출을 시도했던 것이다. 만약 일반 유배형을 받은 죄인이었다면 이 같은 수법이 통했을지 모르지만, 죄인이 바로 광해군의 세자(世子)였기 때문에, 엄중감시를 받고 있었다.
비록 폐세자의 신분으로 전락하긴 하였지만, 반정복고혁명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임금을 위협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강화 부사(江華府使) 이중로(李重老)는 즉각 중앙에 보고 하였다.
그리고 폐세자 내외의 수발을 들고 있던 나인 막덕(莫德),여종 향이(香伊)등을 붙잡아 들여 국문한 결과, 그동안 유배지에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죽음보다 지독한 사랑 -한국판 쇼생크탈출
나인 막덕과 여종 향이등의 증언을 토대로 폐세자내외의 행보를 살표보면 다음과 같다.
폐세자는 강화도에 안치되면서 부터 세자빈과 함께 죽기로 약속하고는 미리 멱목(시체의 얼굴을 싸매는 자줏빛 천)과 악수(幄手시체의 손을 쌓메는 천)를 만들어 놓고, 15일이 넘도록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폐세자내외의 수발을 들던 여종에 의해 발견되었긴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더 큰 불행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후 세자빈과 함께 목을 매어 다시한번 자살기도를 하였지만 역시 여종이 바로 풀어 주어 구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인두(앞부분이 뾰족한 것과 넙적한 것이 있음)
|  조선시대 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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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날인가 서울에서 가위와 인두가 보내져 왔다. 아마도 옷을 다리고 수선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뜻밖에 세자는 이것을 이용하여 굴을 뚫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손으로 직접 땅을 파서 빈으로 하여금 자루에 흙을 담게 하고는 방 안에 옮겨 두었는데, 시작한 지 26일만에 70척이나 되는 길이의 갱도를 파는데 성공한 것이다.
가위로 파고 인두로 긁어내고 다시 손으로 담아서 방 안에 옮겨놓는 수작업을 26일동안이나 한 것이다. 비록 수시로 드나드는 나인이나 여종이 있긴 하였지만, 그들은 한밤중까지 지키고 있지는 않는다. 더구나 전망을 전혀 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만든 울타리는, 오히려 안에서의 상황을 감춰주는 역할을 하였다. 비록 한달가까이 야간작업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이미 극한의 선택을 한 그들에게 그정도의 고난은 충분히 감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폐세자 이지는 무작정 땅을 파서 탈출할 생각만을 한 것도 아니었다. 폐세자는 우선 세자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던 권채와 연락을 취하였다. 권채가 갱도를 통해 탈출할 계획을 미리알고 이 말질수(李 末叱水)로 하여금 도주를 돕도록 한 것으로 보아, 사전모의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 말질수는 권채가 도감(都監)의 장수로 있던 시절 병졸로 근무하면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말질수는 권채의 청탁을 받고 강화도의 두모포(豆毛浦)라는 곳에 가서 뱃사람 가팔리(加八里)라고 하는 자로 하여금 배를 가지고 갑곶(甲串)으로 내려오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황해감사 이명(李溟)등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여, 나룻터를 통과할 때 사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이 폐세자 이지의 체포로 인해 물거품되었으며, 탈출에 공모한 권채와 이 말질수는 모두 형장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폐세자빈 박씨는 폐세자 이지가 체포된지 3일만에 자결하고 말았다. 실록에는 그녀에 대해 가정 생활에 있어서 어버이를 섬김에 예도가 없었다며 비난을 일삼고 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하였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을 때, 아마도 그들 사이의 사랑은 성리학적 가치만으로는 평가 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폐세자 이지에게도 한달정도 지나 자결형이 내려졌다. 그는 죽기전 지난번 탈출을 시도한 것과 체포된 이후 자결을 시도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부모의 안부를 알기 위해서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이전에도 자살을 시도한 경력으로 미루어 볼 때, 단순한 변명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이어서 폐세자 이지는 의관을 갖추고 광해군이 안치되어 있는 서쪽을 향해 절을 올린 후 방안으로 들어가 세조대(전통한복에서 허리에 묶는 끈)로 목을 매어 스스로 당겼다.
그러나 세조대의 중간이 끊어지자, 다시 숙주(삶아 익힌 실로 짠 비단천)로 목을 매어 생을 마감하였다.
<= 조선시대 허리에 묶던 세조대 |
보수와 진보의 충돌이 빚은 불행
폐세자 이지 부부의 비극은 광해군의 폐위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광해군의 폐위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임진왜란당시 우리나라를 도왔던 명나라의 은덕을 저버리고 황제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특히 인목대비는 조선이 중국을 섬겨온 지 2백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군신의 사이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부자의 사이와 같다고 할 정도로, 철저하게 사대정책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인조반정의 본질이며 친명반청정책을 기조로하는 보수파의 집권이념이기도 하였다.
물론 국제관계에서 전통적인 친선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매우 유효하다. 광해군역시 그것을 저버리자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나날이 증대되고 있는 여진족의 확장에 대해 좀더 신중하면서도 정확하게 국제정세를 파악하며 대처하자는 것이다. 광해군이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국내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의 극단적인 갈등양상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였다는 것에 있다.
그같은 갈등은 결국 보수반정복고혁명으로 귀결되었으며, 아직 정치에 발을 들여놓치좋차 못한 세자내외까지 불행을 가져오고 말았다. 그러나 그 수많은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낸 인조반정은, 청으로 국호를 정한 여진족의 침입에 너무나 허무하게 국권을 내어주고 말았다.
원본 : 역사의 천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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