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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의 매국노 '홍씨 3代'

2009.04.27 09:35 | 한국사 인물열 전 | 기파랑

http://kr.blog.yahoo.com/oksan1973kr/16741 주소복사

원본 원본 : '성이네'

'몽골 앞잡이' 홍대순·홍복원·홍다구

배가 난파하려 하면 쥐들이 먼저 알고 도망친다고 했던가? 나라가 망할 때도 이와 비슷한 일
이 일어난다.

'조선의 매국노' 이완용이 조선의 멸망을 재촉했다면 고려가 몽골에 망할 때는 홍대순(洪大純)
홍복원(洪福源) 홍다구(洪茶丘) 3대(代)의 매국노가 있었다.
                                                                                                < 딸기... 꽃송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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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순은 평안도 의주 근처 군사요충지인 인주(麟州)의 지역사령관격인 도령(都令)으로 있으
면서 1218년(고려 고종 5년) 몽골이 거란을 압박할 때 자발적으로 몽골에 투항하였고 1231년
(고종 18년) 몽골이 장수 살례탑을 보내 고려를 침공할 때는 자발적으로 향도(嚮導)가 되어
몽골의 진격을 앞에서 이끌었다.

홍대순의 아들 홍복원(1206~1258년)도 아버지를 따라 무인(武人)의 길을 걸었다.

1232년 고려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하며 대몽(對蒙)항전에 들어가자 홍복원은 몽골군의 일원
으로서 서북지방을 책임지는 낭장으로 있었다.

이듬해(1233년)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이가 병사들을 보내 서경(西京·평양) 탈환작전을 펼칠 때
홍복원은 대패하고서 겨우 목숨만 건진 채 원나라로 숨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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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몽골은 다시 고려를 야금야금 침략하기 시작하는데 그 앞잡이가 홍복원이었다.

'고려사'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원(元·몽골)의 군사가 매년 침입해 주와 군들을 함락
했는데 이는 모두 홍복원이 인도한 것이다."

그 지역(北界·북계)현황을 홍복원이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에서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릴 것 같던 홍복원은 복병을 만나 비명횡사 하게 된다.
당시 인질(禿魯花·독로화)로 몽골에 끌려와 있던 왕족인 영녕군 왕준(王·1223~1283년)이 바로
복병이었다.

왕준은 고려 8대왕 현종의 8세손으로 명목상의 왕족에 불과했다.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승화후 왕온은 그의 친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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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려가 고종 24년(1237년) 마침내 몽골에 항복하고 몽골이 고종의 친조
(親朝·직접 황제를 찾아와 알현하는 것)를 요구하자 그 대안으로 이듬해(1238년) 왕준을 고종의
친자식이라고 속여 몽골에 보내게 된다.

요동지방으로 끌려간 왕준은 홍복원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고려사'는 "홍복원은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길어지니 사이가 나빠지고 왕준은 점차 불평을 품게 되었다."

그 사이에도 고려가 조공(朝貢)을 제대로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1246년(고종 33년), 1247년
몽골은 고려를 침공하였는데 이때도 홍복원은 선봉에 설 만큼 몽골 황실의 든든한 총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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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복원과 왕준 사이의 사단은 1258년에 벌어졌다.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두 사람이 다투던
도중 홍복원은 왕준에게 "속담에 기르던 개가 도리어 주인을 문다더니 그 격"이라고 면박을
주었다.

이 말을 몽골 황족인 왕준의 부인이 들었다. "내가 개와 살고 있단 말이냐!" 부인은 즉각 황제에
게 고했고 황제는 칙사와 장사 수십명을 보내 홍복원을 발로 밟아 죽여버렸다.

홍복원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홍다구(1244~1291년)가 매국노의 피를 이어받았다.
1261년 몽골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황제도 홍다구에게 홍복원의
관직을 계승해 몽골 내 고려군민에 대한 관할권을 내려주었다.

홍다구가 고려에 끼친 해악은 아비 홍복원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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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 12년(1271년) 황제의 칙서를 갖고서 고려를 찾은 홍다구는 원종을 보고서 배례(拜禮)도
하지 않을 만큼 오만했다.

고려와 일본이 내통하고 있다는 거짓정보를 황제에게 올려 몽골이 두 차례에 걸쳐 일본정벌
(東征·동정)에 나서게 만든 것도 홍다구의 공작이었다.

사실 지휘부 일부만 뺀다면 온전하게 고려의 국력을 동원한 정벌이었기에 고려 백성들이 겪어
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충렬왕 3년(1277년) 제3차 일본정벌을 획책했지만 몽골 내 상황으로 인해 실행
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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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홍복원에게는 홍다구 같은 매국노 아들만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홍다구의 아우인 홍군상(洪君祥·생몰년 미상)은 "영녕공은 원망할지언정 조국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충렬왕 18년(1292년) 몽골이 재차 일본정벌을 계획하며 고려로 하여금 배를 비롯한 군수물자
를 동원하려 하자 홍군상은 고려의 뜻을 존중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홍군상이 직접 사신이 되어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갔고 최종적으로는 일본정벌 강행이
결정됐으나 배를 짓고 있던 도중 1294년 황제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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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군상은 몽골 승상 완택(完澤)을 간곡하게 설득해 일본정벌은 중단됐다.
이에 고려조정에서는 홍군상에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칭호를 내려주었다.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안개꽃 2009.04.27  14:18

저도 잼있게 읽고 왔어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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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 2009.04.28  03:01

감사합니다. 기파랑님! 즐거운 아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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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파랑 2009.04.28  06:48

그러셨군요 저도 처음조금 읽다가
재미있어 담어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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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파랑 2009.04.28  06:48

제가 더 고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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