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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崔忠獻 1149~1219년) 최이(崔怡 ?~1249년) 최항(崔沆 ?~1257년)을 거쳐 고종 44년(1257년) 윤4월 최항의 사생아인 최의(崔�e)에게 이어진 최씨 정권은 이미 종말을 맞고 있었다. 최항도 최이가 본부인이 아닌 기생 서련방(瑞蓮房)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는데 최의 또한 최항이 젊은 시절 중이 되어 산사를 떠돌 때 송서라는 사람의 여종과 간통해서 낳은 아들이었다.
최의는 아버지 최항의 애첩 심경(心鏡)과 비밀리에 사통하다가 아버지가 죽던 그날 자신의 첩으로 삼는 패륜을 보여주기도 했다.최항이나 최의가 집권하고 있을 때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누가누가 공(公-최항이나 최의)의 출신이 미천하다고 했다' 고 고변 만 하면 곧바로 지목당한 자를 죽인 것이다. 아무리 무신(武臣)정권이라고 하나 이런 지경이 되면 곤란하다. 내부에서부터 배반을 꿈꾸는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최의가 집권한지 1년밖에 안 된 고종45년4월. 최항의 총애를 받았던 국자감(조선성균관) 대사성 류경(柳璥 1211~1289년)이 최의의 폭군적 행태를 문제 삼으며 별장 김인준 (훗날 이름을 김준으로 바꾼다), 장군 박송비, 도령낭장 임연(林衍) 등과 모의, 최의의 집을 습격해 최의와 그 일당을 모두 베었다. 김인준의 아버지 김윤성이 최충헌의 가노 (家奴)였던 데서 보듯 거사에 가담한 자들은 모두 원래는 최씨 집안의 측근이거나 가노 출신이었다.
최의의 죽음으로 60년 최씨 정권은 종말을 고하고 형식적이나마 왕권은 고종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일종의 왕정복고(王政復古)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부터다. 왕정 복고의 공신 류경, 김준, 임연은 말 그대로 3인3색의 각기 다른 정치행로와 인생역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공수신퇴(功遂身退)'는 하늘의 이치라는 말 이 있다. 공을 이루고나면 몸을 뒤로 물리라! 그렇지 않으면 몸을 보존하기 힘들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문과 출신의 류경은 이 길을 따른다. 고종은 "그대들이 나를 위해 비상한 대공(大功)을 이뤘다"며 류경에게 문무의 핵심요직을 동시에 하사하려 했다. 그러나 류경은 "왕의 총애 와 관록이 너무 많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애써 사양"하고 상장군직만 받아들였다. 그러나 고종은 강권하다시피 류경에게 문무의 인사권을 좌우하는 승선(承宣)을 맡긴다. 류경은 완급(緩急)의 의미를 아는 인물이었다.
1등 공신 류경의 권세가 날로 성하고 재물 또한 흘러 넘치게 되자 김준과 임연이 참소를 했고 고종은 류경의 승선직을 박탈한다. 이렇게 해서 2등공신 김준이 류경의 빈자리를 차지해 새로운 실세로 떠오른다. 이어 고종이 죽고 원종(元宗)이 즉위하자 공신의 순서 마저 뒤집어 김준이 1등 공신이 됐고 류경은 5등 공신으로 강등됐다.

원종은 크게 김준에게 의존했으나 몽골을 보는 시각에서 두 사람은 화합할 수 없었다. 원종은 친몽 노선이었던 반면 김준은 정서적으로 최씨 정권의 반몽 노선이 체질화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김준은 원종 즉위 전에는 원종의 동생을 왕위로 올리려 시도하기도 했고 원종 즉위 후에 도 스스로 거사를 꿈꾸기도 했다. 이에 원종은 1268년(원종9년) 12월 또 한명의 공신인 임연을 설득해 김준과 그 일당을 제거하게 된다. 이로 인해 김준은 '고려사' 반역편에 김준(金俊)이라는 이름 두자를 올리게 된다.

임연은 김준에게 눌려 지내기는 했지만 성질이 김준 못지않았다. 김준의 아들과 토지 문제를 놓고 싸우기도 했고 임연의 처가 김준의 종을 죽이는 일도 있었다. 두 사람 간의 이런 악연을 이용해 원종은 자신의 재위 10년간 권력을 휘둘러온 김준을 마침내 제거할 수 있었다. 문제는 임연이 김준 못지않은 권간(權奸)이었다는 데 있었다.
김준의 자리를 임연이 이어받아 1등 공신을 차지하고 실권을 장악했으나 원종은 환관 최은, 김경 등을 통해 임연을 견제했다. 김준 때처럼 모든 권력을 다 넘겨주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임연은 1년 후인 원종10년(1269년) 최은, 김경을 제거하고 원종의 측근들을 대거 귀양보낸 뒤 같은 해 6월 18일 삼별초를 동원해 원종의 친동생 안경공 왕창을 신왕 으로 추대하고 대궐에서 즉위식까지 거행했다.

왕창은 김준에 의해서도 왕으로 추대될 뻔한 적이 있었다. 원종은 대궐에서 쫓겨나 민가 에 유폐됐고 임연은 김준의 옛집을 차지했다. 몽골의 간섭이 없었다면 이대로 왕위는 바뀌었을지 모른다. 마침 태자가 몽골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은 태자를 앞세워 상황 타개를 시도했다. 그리고 12월10일까지 국왕 안경공 임연 3인이 몽골에 들어와 전후 맥락을 사실대로 설명할 것을 압박하면서 그때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대군(大軍)을 고려에 파견하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임연은 11월 23일 안경공을 폐하고 원종을 복위시켜야 했다. 그리고 원종만 12월 19일 몽골로 향한다. 임연은 백성들로 하여금 섬으로 들어가도록 독려했다. 삼별초의 난이 시작되고 있었다. 임연은 그 직후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 또한 '고려사' 반역편에 이름 두 자를 올린다.

김준 임연에게 연이어 탄압을 받고 '삼한거부(三韓巨富)'로 불릴 만큼 많았던 재산도 모두 몰수당한 채 목숨만 겨우 부지하며 지내던 류경은 임연이 삼별초의 난을 일으켰을 때 강화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난이 일어나자 즉시 가족들을 이끌고 개경으로 돌아갔다. 원종은 삼별초 난이 일어 났을 때 반적(叛敵)들이 류경을 모주(謀主)로 삼을까봐 전전긍긍했다. 그런 류경이 제발 로 개경에 돌아왔을 때 원종은 너무나도 기뻐 그 자리에서 병조판서에 해당하는 판병부 사로 임명했다. 이후 충렬왕의 총애까지 받으며 승승장구한 류경은 충렬왕15년(1289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생애는 '고려사' 충신편에 실려 있다.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3/28 火石
생에 잠시 인연따라 왔다가
이번 생에 잠시 인연따라 나왔다가 인연이 다 되면 인연따라 갈 뿐이다.
장작 두 개를 비벼서 불을 피웠다면 불은 어디에서 왔는가.
장작 속에서 왔는가, 아니면 공기중에서 왔는가, 그도 아니면 우리의 손에서 나왔는가,
아니면 신이 불을 만들어 주었는가 다만 공기와 장작과 우리들의 의지가 인연 화합하여 잠시 불이 만들어 졌을 뿐이고,
장작이 다 타고 나면 사라질 뿐이다.
이것이 우리 몸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생사(生死)이다 . 불을 어찌 고정된 실체라 할 수 있겠으며 '나’라고 내세울 수 있겠는가.
다만 공한 인연생 인연멸일 뿐이다.
여기에 내가 어디있고, 내 것이 어디 있으며 진실한 것이 어디 있는가.
다 공적할 뿐이다 이 몸 또한 그러하다. 인연따라 잠시 왔다가 인연따라 잠시 갈 뿐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다...불가의말씀
,常綠樹님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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