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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직원의 참회 시국선언 다음 글은 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 홈피와 한나라당 안기영 국회의원 홈피에 올려있는 글입니다. 전. 현직 국가 정보원이 드리는 시국 선언문 전, 현직 국가 정보원들이 국민 여러분과 국군에게 드리는 시국 선언문 이 글은 전, 현직 국가정보원 직원 4명이 그동안 본의 아니게 좌익에게 포섭되어 저지른 이적 행위를 국민 앞에 속죄하고, 이 땅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는 좌익 세력들의 엄청난 흉계와 범죄 사실을 폭로하여 그들을 징계함과 동시에, 발발 위기에 처해 있는 전쟁을 막고자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호소문입니다. 1. 좌익 혁명에 미쳐서 독도를 일본에게 떼어주고 압록강 이북 땅과 그 역사를 중국에 팔아버린 김대중의 범죄 사실 을 폭로한다. 김대중은 이미 60년대 초에 김일성으로부터 대남 적화혁명의 남한 현지 사령관으로 임명받은 자이다. 지금까지 남한 내에서 일어난 북한의 대남공작 활동은 전부가 김대중과 협의를 거친 것이다. 김대중이 권력을 잡기 이전에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는 인편으로 북한과 정보를 교류하였고, 대통령이 되고부터는 자신의 측근인 고정간첩을 통해 교류하기도 한다. 오늘날 남한을 적화시키기 위한 북한의 대남 혁명 전략전술은 김대중이 대통령 재직 시에 완성한 것이며, 김대중이 남북 좌익세력들을 총 지휘하게 되어 있다. 육영수 여사 시해 사건도 김대중과 일본 조총련의 합작이다. 박대통령을 시해하려다 빗나간 사건이었지만 만약 성공을 했었다면 당시 그는 북한군을 불러들였을 것이다. 김대중은 10.26 사태 당시 호남인들을 봉기시켜 남침과 적화통일의 결정적 기회를 삼는다는 계획에 따라 남한내의 고정간첩들을 앞잡이로 세워 호남인들을 충동질하는 악성 유언비어를 살포하였다. 결국 호남인들을 봉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북한의 개입을 예측한 미국의 움직임 때문에 김대중은 망설이다가 기회를 잃어버렸다. 당시 언론에서는 남한을 해방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 김일성이 크게 후회를 하고 있다고 보도하였으나 총 지휘를 한 김대중의 후회는 더 컸다. 김대중의 5.18 내란음모 죄는 과거의 우익정권이 정략상 유야무야시켰으나 그의 내란 음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대중은 대통령 재직시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요약) "과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땅굴 미확보) 기회를 놓쳤지만 이번에는 틀림없다. 늦어지면 다음 정권 때(노무현 정권 때)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나의 뜻을 이어줄 차기 대선 후보가 문제다. 후보만 마땅하면 당선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돈이 문제이긴 하지만..... 돈만 충분히 준비되면 쉬운 일이다. 그리고 호남인들을 한번 더 봉기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호남인들은 내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한다." 이 말은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자살 압력을 받고 버티다가, 끝내 살해당한 (창밖으로 던져 죽인 사건) 정몽헌 회장이 김정일로부터 들은 것이다. 정몽헌 회장은 사업상 본의 아니게 북한 권력층에 포섭되어 있었고, 김대중의 정체와 그의 햇볕정책 내막을 알고 나서 괴로워 했다고 한다. 특히 김대중과 북한으로부터 무리한 요구를 받고 나서는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일본이 최근 독도의 영유권을 전과는 달리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과, 중국의 고구려 역사 편입 사건은 전부가 김대중의 좌익 혁명전술이라는 것을 미리 밝힌다.(8항 참고) 2.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운동 비리 김대중에게 남한에서의 투쟁목적은 일차적으로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되면 좌익혁명의 기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선 당시 북한으로부터 받아두었던 공작금과 미국, 일본의 친 북한 단체로부터 받은 공작금, 그리고 남한의 호남계 기업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사용하여 선거운동 친위대를 조직하였다. 호남지역에서 발생한 국내 종교단체인 증산도와 대순진리회의 수뇌부와 밀약하여 엄청난 선거운동 자금을 전달하고 신도들을 비밀리에 선거운동에 투입하였다. 증산도에게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경우 특별한 혜택을 약속하였다. 김대중은 호남인들을 포함하여 전국의 천주교, 개신교 신도들의 지지만 받으면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증산도와 대순진리회의 신도들을 기독교인으로 위장시켜 전국의 천주교와 개신교 단체들에게 당선을 기원하는 헌금 명목으로 비밀리에 수백억원의 자금을 살포하고 선거운동을 부탁하였다. 한편, 남한내의 고정간첩들과 호남 지역 신도들로 구성된 선거운동원들을 시켜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지역인 영남.충청권, 경기.강원권을 돌면서 선전하기를, 외국에서는 김대중을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유일한 민주인사로,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정치가로 인정받고 있으나, 국가안전기획부가 김대중의 좌익성을 날조하여 국민을 속이고 있다. 이번에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지 못하면 한국은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없다. 통일도 이룰 수 없고 영원한 정치 후진국이 된다는 등이었다. 우리 국정원에서는 당시 불법적인 자금살포와 당선공작을 포착하고 있었으나, 국내외의 여론에 부딪쳐서 다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선거 결과는 역시 종교단체에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보수 여당의 텃밭인 강원도의 경우, 과거의 선거에서는 김대중의 표가 거의 전무하다고 할 정도였는데, 놀랍게도 전체 유권자 네 명 중 한 명 정도의 지지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3. 김대중이 장악한 좌익단체들 김대중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겉으로는 대통령 본연의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속으로는 적화통일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국내의 기관, 단체 등 다섯 곳에다 좌익계를 침투시켜 장악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 다섯 곳은 국가안전기획부, 국군기무사. 군 수뇌부, 정당, 언론단체 등이다. 권력을 잡기 이전의 김대중에게 정치활동과 좌익활동의 발목을 잡아왔던 것은 다름 아닌 국가안전기획부(중앙정보부)였다. 그는 자신에게 패배의 고통을 안겨준 안기부에 관해서는 한을 품고 있었다. 이 두 단체는 대남 적화혁명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단체다.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제일 먼저 안기부와 기무사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측근인 좌익계 인사를 국정원과 기무사의 고위직에 끌어 올렸다. 그리고 이들 친북(좌익) 인사들이 다시 좌익계들을 끌어들였고, 이들이 직원들을 하나씩 포섭하여 의식화시키거나 금품으로 매수해 나갔다. 기무사의 경우 좌익계의 주축은 역시 호남인들이다. 호남인들은 김대중의 뜻이라면 무조건 잘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런 만큼 김대중으로서는 이들은 포섭하기가 특히 쉬웠다고 한다. 김대중 역시 호남인이 아니면 믿지 않는다. 호남인들을 중심으로 한 포섭과 매수공작은 기무사 사령부부터 시작하여 빠르게 지방부대로 확산되었고, 지금은 전국의 모든 기무사 부대원들이 의식화되어 좌익 혁명분자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기무사 사령부내의 호남인들은 대개 원적이나 본적을 날조하여 출신지를 감추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사건화 되면 호남출신 대원들을 지방으로 보내고 지방부대의 대원들을 사령부로 끌어올리기도 한다. 지방의 기무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호남출신 대원들을 사령부에서 불러 활동시키다가 다시 지방으로 되돌려 보내는 치밀한 작전을 쓰고 있는데, 이와는 또 다른 방법이 있어서 기무사의 호남계 밀집 사건은 쉽게 밝혀내기 어렵다 한다. 기무부대원들은 주로 군부 내의 좌익계를 끌어올려서 그들의 인맥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군 인사들의 좌우익성을 파악하여 포섭이 가능한 경우에는 포섭하기도 하고 도태시키는 공작도 한다. 이러한 공작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적지 않은 우익계 기무사 대원들이 전역 조치되었다. 지금의 국군기무사령관은 좌익이 아니지만 형식적으로 동조하기도 하고 모르는 척 하기도 한다. 국정원의 경우 역시 김대중과 사상적으로 통하는 친북인사들을 고위직으로 특채하였다. 이들 또한 좌익계 직원들을 채용하였다. 이들은 군인 신분인 기무사 대원들과는 달리 교묘한 방법으로 직원들을 포섭해 나갔다. 즉,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언제부터인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통일과 체제 이념에 관한 리포트를 작성하게 하여 직원들의 이념성을 평가한다. 친 좌익 성향을 보이는 직원의 리포트는 공개 강의시키기도 하였다. 그런 사람들은 괄목상대라고 해야 할 만큼 진급과 대우가 달라졌다. 리포트뿐만이 아니다. 분류와 평가 방법은 여러가지다. 평가 결과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금품으로 매수하기도 하고, 좀 까다로운 상대인 경우는 직업적인 위기감을 느끼게 한 다음 일단 거액의 돈으로 매수한다. 그런 다음 좌익과 관련된 업무에 우연히 동참시키거나 범죄성의 불법적인 직무를 담당하게 한 다음, 어쩔 수 없게 된 상태에서 서서히 의식화시킨다. 이러한 공작과정에서 직책상 방해가 되는 직원들은 비밀리에 퇴출시켰다. 안기부 법을 개정하여 무더기로 수 백명을 퇴출시킨 적도 있다. 일부는 좌익계의 기밀누설을 막기 위해 암살하기도 하였다. 이런 경우는 전사(戰死)나 실종 처리한다. 종교단체 증산도에게는 애초에 약속한대로 거액의 자금을 풀어서 각 지역에 증산도 지부를 설치해 주었다. 한편으로는 종단 간부(호남계)들을 의식화시켜 좌익혁명의 세포분자로 만들었다. 또 호남 출신 신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국가정보원 직원으로 특채하였다. 군 미필자인 경우는 기무사의 부사관으로 임관시키기도 하였다. 증산도는 국정원, 기무사와 긴밀히 협조하는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증산도 각 지부는 국정원 지부라 해도 틀림이 없다. 상당한 인원의 비 호남계 신도들도 돈에 매수되어 좌익활동에 동조하고 있다. 이들 증산도 신도들은 국가정보원의 지휘를 받아 민심파악, 정보수집은 물론, 선거 운동과 필요시 좌익혁명을 위한 선동대원(민심 조장, 시위 등)으로도 활동한다. 현재 국정원 직원들은 60%가 좌익분자들이다. 그 나머지 40%는 업무상 좌익혁명에 불필요한 부서의 직원들이지만 이들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마지못해 좌익활동에 가담하고 있다. 대공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까지도 부서에 침투한 세포분자에 의해 돈으로 매수되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은 대개 불법 좌익활동(간첩 행위 등)을 방관해주는 방법으로 협조하고 있다. 김대중 정권부터는 국정원과 기무사에서 간첩을 잡는 일이 없어졌다. 전부가 형식적인 수사를 하고 있으며, 말썽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고정간첩 몇 명을 내세워 위장 체포한 적은 있다. 현직 국정원장 고영구는 친북인사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좌익 골수분자다. 무수한 국정원 우익직원들을 축출하고 살해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다. 국군기무사와 국가정보원 직원들은 자신들을 좌익 혁명분자라 여기지는 않는다. 영원한 분단을 가로막는 미국과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통일을 이룩하여, 다같이 잘사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일하는 통일의 기간이라 여기고 있다. 다만 이러한 통일과업은 한국인으로서는 남북한과 중국, 러시아에서 공히 인정받고 있는 김대중 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분을 믿고 따르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좌익전술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기고 있다. 국정원과 기무사의 좌익활동 업무는 본래의 국가보위 업무와 완전히 구별된다. 겉으로는 우익을 표방하고 국가를 보위하지만 비밀리에 좌익 업무를 수행한다. 이러한 좌익활동은 대개 문서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밝혀내기가 어렵다. 김대중은 언론단체, 종교계, 시민단체, 사회단체 등에도 좌익계를 내부에 침투시켰다. 그런 한편으로는 국정원과 기무사, 증산도의 다른 공작팀들이 이들 단체원들을 포섭, 또는 매수할 수 있도록 교섭시켜 주기도 한다. 4. 국정원과 기무사 외에 김대중의 친위대들이 따로 있다. 국정원과 기무사 전체가 김대중의 지시를 받고 있지만 이들 대원중에는 국정원장과 기무사령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김대중의 지시를 받는 팀이 있다. 한 예로, 국정원의 경우 증산도 신도들 중에서 특채된 직원 가운데 일부가 소속은 국정원이지만 활동은 김대중이 지시하는 임무만 독립적으로 행한다. 이들 대원들은 평상시에는 국정원과 기무사의 여타 직원들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김대중 측근의 지시를 받아 필요한 인사나 단체 감시, 포섭공작 정보수집, 납치, 암살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고 유사시에는 유언비어 살포, 선동과 시위 등의 공작도 한다. 이들은 하급 요원들이라 감사를 해도 적발되지 않는다. 이들의 활동이 사건화 되면 국정원 본래의 비밀요원 행세를 하면 되고 김대중은 모르는 척 하면 그만이다. 김대중은 상기와 같은 공직자로서의 대원들 외에도, 호남출신 증산도 신도들로 구성된 또다른 비밀행동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의 숫자는 수도권에만 무려 1천 500명 정도가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국적으로는 1만명에 달한다. 이들 중 일부는 북한 또는 일본 등지로 보내져 비밀교육을 받고 오기도 한다. 이들의 임무는 주로 선거 운동, 정보수집 등과 같은 일반적인 임무 외에도 우익인사 세뇌, 포섭, 강제납북, 협박과 살해, 유언비어 살포, 민심교란, 파업 선동 등을 행하고 있고, 유사시에는 유격전, 폭파 등의 특수전 임무도 수행한다. 이들에 의해 실종된 사람들은 실로 수 백명에 이른다. 대개 포섭에 실패하여 후환을 없애기 위해 죽인 것이다. 간첩 신고를 하고 실종된 사람들도 비일비재하다. 이들은 대개 누가 누군지 서로 알아 볼 수가 없으며, 절대로 노출되는 일이 없는 완전한 신분의 고정간첩으로 암약하고 있다. 이 밖에도 국정원에는 개인적으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정보원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김대중이 정권을 잡고부터 이들은 유사시 선동대원으로 쓰여지고 있다. 잘 알려진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 즉 노사모는 바로 이런 사람들 가운데 일부를 모아 만든 것이다. 이들 노사모의 남자들은 전부가 좌익 골수분자이다. 이들 정보원들은 수도권에만 수천 명이 된다. 노무현의 국회 탄핵에 분개하여 분신자살 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자와, 자동차에 방화한 사람, 국회로 자동차를 몰고 돌진했던 자들은 국정원 정보원들이다. 휘발유통을 들고 국회를 불지르겠다고 상경하다 붙잡힌 자도 여론을 선동하여 탄핵을 취소시키기 위해 동원된 국정원 정보원(노사모)들이다.(사건 후 나는 노사모가 아니다라고 먼저 발뺌을 했지만 그들은 분명히 노사모다.) 촛불 집회의 주동자들도 전부가 국정원 정보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들은 증거도 없고 아무리 조사를 해도 입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5.실수한 대원들은 가차 없이 죽인다. 상기와 같은 비밀 대원들이 좌익혁명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 중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거나 기밀을 누설시킬 경우, 또는 우익의 냄새가 나는 경우에는 김대중은 가차 없이 죽여 버린다. 대개 그들의 안가로 데려 가서 국정원 직원들이 권총으로 살해한다. 또는 전자충격기로 실신시킨 후 독극물을 주사하여 살해한 다음 화장을 하여 버리기도 하고 급한 경우에는 독침으로 공격하여 살해한 후 국정원 직원인 의사가 부검을 해서 사인을 심장마비로 꾸미기도 한다. 죽는 것을 모르고 불려 갔다가 죽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낌새를 알아차리고 도주한 정보원이 한 둘이 아니다. 좌익계 대원들이 좌익 활동을 하다가 다른 대공 수사기관에 적발이 되면 돈으로 매수하여 위기를 모면한다. 그것이 안 되면 대공수사관을 협박하거나 암살한다. 죽은 대공수사관이 적지 않다. 적발의 빌미를 제공한 좌익계 대원들은 물론 비밀리에 죽여 버리지만 더러는 북한으로 보내기도 한다. 김대중은 죽은 좌익계 대원들과 우익계 인사들을 위로하고 자신의 죄를 없애기 위해 불사(佛事)를 하였다. 언젠가 자신이 데리고 있는 역술인으로부터 억울하게 죽은 영령들이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난 다음부터 수시로 제물을 바치고 있다. 불교의 보살들과 기독교 신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헌금, 방생, 불사를 하면서 그들이 자신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빌기도 하고, 방해하지 못하게 영령들을 신들에게 바치기도 한다. 자신의 살인죄를 없애고 좌익혁명의 성공을 기원하는 제사나 헌금은 수시로 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6항의 '김대중의 종교 행위'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돈 주고 사들인 노벨 평화상, 이 거대한 상으로 위장한 평화주의자 김대중의 이면에는 천인공노할 만행이 숨어 있다. 6.김대중과 노무현의 만남 지난 대선 직전 김대중은 자신의 통일과업을 이어줄 후계자를 선정하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다. 경선 후보 가운데 두 사람이 물망에 떠올랐는데 접촉 결과 두 사람 모두 가능하다는 판단이 나왔다. 어떤 후보를 선택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을 하던 중 평소 정사에 관해 의논하던 역술인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의 조언으로 선택한 사람이 바로 노무현이다. 우리는 우리만의 정보망을 통해서 그 역술인의 이름을 알아냈다. '비룡도사'라고 하는 꽤 알려진 사람이다. 노무현은 김대중으로부터 남북통일(고려연방제) 계획을 자세히 듣게 된 후, 처음에는 좀 망설이다가 응답을 했다고 한다. 노무현은 그 당시 거부할 수 없는 압력을 받았다고 한다. 거절했다면 물론 노무현은 생매장되었을 것이다. 여당 의원들에게는 노무현을 대통령 후보로 만들기 위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뜻이 전달된 것은 물론이다. 김대중은 만약 노무현이 후보 경선에서 낙선할 경우 공개적으로 그를 대통령 후계자로 지목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노무현 정권의 뒤에는 김대중이라고 하는 몸통이 도사리고 있다. 김대중이 사사건건 수렴청정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무현은 김대중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은 사실이다. 모든 정치적 결단은 김대중이 하는 것이다. 지난 대선 때, 우리 국정원 직원들이 대통령 후보들의 출신 배경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노무현은 과거 고시공부 당시 사법고시에 도저히 합격할 가능성이 없자 그의 집안에서 지역의 변호사를 내세워 재물을 써서 당선시켰다고 한다. 우리가 조사한 현직 국회의원 중에는 그런 사람이 또 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율사 출신의 어떤 의원도 뇌물을 써서 고시에 합격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김대중의 종교행위 김대중은 대통령 임기 말년에, 대통령이 불사(佛事)나 헌금 등의 보시를 하고 기원을 하면 그 효과가 특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다. 그는 상대 후보자들의 운기를 특정 후보에게 바치는 헌금이나 불사를 하면 그것이 그대로 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회창에게 있는 대통령 운기를 노무현에게 가게 해 달라,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게 해달라면서 엄청난 불사를 하였다. 국정원 직원들을 시켜서 노무현의 당선을 기원하는 방생도 몇 차례 하였다. 카톨릭 신자인 김대중은 대통령 재직시 은근히 불교를 탄압하는 발언을 적지 않게 하였다. 그러던 그가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고부터는 엄청난 불사에 매달렸다. 자신의 집안에다 불상을 모시는 것은 물론이고, 모처에 있는 절을 사들이기도 했다. 또한 자부(子婦)를 시켜 경북 풍기에다 '동천사'라는 절도 지었다. 이 절은 영남 쪽의 운기를 호남 쪽으로 가게 해달라고 지은 것이다. 김대중은 불사의 효과를 키우기 위해 이 절과 관련된 친인척을 비밀리에 불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불교 집안의 사람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가 다시 불교신자로 만들었음) 이와 동시에 비룡도사는 국정원 김대중팀과 함께 팔공산에서 갓바위의 정기를 끊어 놓았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목포에는 '급전사'라는 절도 지어놓았다. 이 절은 호남인들이 자신의 뜻을 따라 필요시 좌익혁명에 동참하게 해달라고 지은 절이다. 요즘 김대중은 틈만 나면 자신의 집에 모시고 있는 불상에다 제물을 바치거나 헌금 등을 하고 있고 국정원 직원들을 시켜 방생도 하고 있다. 그 목적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측근을 통해 들은 것을 대강 열거하자면, 노무현이 탄핵이 안 되게, 탄핵이 취소되게, 국민들이 탄핵을 저지하게 해달라고, 좌익활동이 탄로나지 않고, 탄로날 경우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고 혁명이 성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이미 탄로난 땅굴 관련 보도가 알려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우익 군부들의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국민들이 여당을 지지하게 해달라고, 지난 대선 때의 비리가 탄로나지 않게 해달라고, 시민단체 등에 기부한 돈이 말썽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등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라 한다. 심지어 주한미군이 철수되게 해달라고, 전 대통령들을 비롯한 우익인사들의 목숨 운수를 자신이 누리게 해달라는 뜻으로 불사를 하고 방생을 했다고 한다. 노무현 역시 불사의 힘을 굳게 믿고 있다. 그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결국에는 믿게 되었다고 한다. 김대중의 종교행위 때문에 당선되었다는 것은 노무현 측근들도 인정하고 있다. 지금 노무현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불교와 기독교에 엄청난 불사와 헌금을 하고 있다. 물론 이같은 사실은 극비에 해당한다. 특히 자신의 집안에 불상을 모시는 것이 알려지면 비밀리에 즉시 철거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불교에 관한 투자는 불교 신도들이 잘 알고 있다. 민심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기독교계를 의식해서 사실을 숨기고 있다. 7.적화통일을 위해 일한 북한 대통령 김대중 김대중은 자신의 정체가 웬만큼 탄로 나도 이제는 겁을 내지 않는다. 야당 일각에서, '반미 친북 세력', '북한 대통령', '북한 노동당 2중대'를 외쳐대도 눈 하나 깜짝 않는다. 최근에는 이화여대의 교수가 해양 전략연구소에서 강의를 하면서, 군부의 쿠데타가 아니면 현 좌익정부를 척결할 수 없다는 발설을 했는데도 그는 별 염려를 하지 않고 있다. 그가 장악한 군부와 그가 조직한 좌익단체, 그리고 돈으로 매수한 언론들이 방패막이 구실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예비역 장성들을 포함한 전, 현직 고위급 수백명이 강의를 들었지만 보도진을 매수하여 잘 알려지지 않았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그는 햇볕정책을 구실로 철저히 북한을 위해 일하였다. 그런 만큼 임기 중에 일어난 그의 좌익활동의 범죄 사건도 무수하다. IMF를 해결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구조조정을 하면서 엄청난 기업자금을 착복하여 통일 공작자금으로 비축해 놓았다. 안 해도 되는 기업을 정리하여 자산을 착복하기도 하였다. 합법을 가장한 불법인 것이다. 재직 중에 저지른 범죄 가운데 모르는 것을 말하면 믿지 않을 것이고 이미 노출된 범죄 사실만 몇 가지 공개한다. 가) 군부 포섭 남한의 군 수뇌부가 김대중에게 포섭되어 완전히 좌익화가 되어버렸다. 그들을 도태시키고 그들의 인맥을 좌천시키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들을 징계하기 위해 명단을 공개한다. 현 국방부 장관, 한미연합사령부의 부사령관 외 1명 합참 작전본부장, 육군참모총장, 차장, 육군의 군사령관 전부, 군단장 2-3명 정도, 특전사령관, 해군참모총장과 차장, 해병대 부사령관 공군참모차장, 공군의 수도권 기지 전투전단장 1명, 호남권 기지 전단장 1명 등이다. 이들은 거의가 포섭되어 좌익혁명에 동조하는 자들이다. 나) 도청과 포섭 공작 과거에는 국정원과 기무사가 좌경 불순분자를 색출하기 위해, 또는 여당의 정략적인 이익을 위해 주요 인사들을 도청해 왔었으나 김대중 정권부터는 좌익혁명을 저해하는 자를 도태시키기 위해 도청을 하고 있다. 김대중 정권 이후 웬만한 인사는도청을 안 당한 적이 없을 정도다. 주요 인사의 e-메일은 수시로 열어본다. 국민들이 정당이나 언론단체에 제공하는 정보, 기사 제보 등의 내용도 매일 열어본다. 한나라당을 비롯한 야당 내부에서 일하는 직원들 중에는 국정원으로 정보를 유출하는 사람들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컴퓨터의 한글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문서를 작성하다보면 커다란 리본(아이콘)이 나타나 문서를 찍어 가고 있다. 화면상에서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리본과는 다른 커다란 리본이 확실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국정원과 증산도에서 문서 정보를 흠쳐갈 때 화면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장비를 외국에서 들여와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단어를 입력해 두었다가 전국의 PC 단말기에서 그 단어가 접촉되면 곧바로 개입하여 찍어간다. PC 단말기가 있는 위치(주소)까지 알 수 있다. 이런 공작은 필요할 때만 한다. 유출된 정보는 여당과 김대중에게 전달되는 것은 물론이다. 김대중은 좌익계들을 고발하는 글을 차단하기 위한 방책으로 인터넷 상에서 실명과 주민등록번호를 의무적으로 쓰도록 만들었다. 이는 또한 자신들의 탄압을 피해 행방을 감춘 우익인사들을 찾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제는 다 찾아 죽이고 남은 인사들은 몇 명 안 된다고 한다.(주객이 전도된 나라임) 요즘 국정원 인터넷 팀들은 daum.net에 특히 신경을 쓰고 있다. 주민등록번호를 기입하지 않아도 가입을 받아주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들은 가입상황을 살펴보다가 주소와 전화번호, 실명이 일치하지 않는 가입자는 특별히 감시한다. 그들은 그러한 조회를 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일반인을 매수하는 경우는 대개 국정원에서 한다.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종교인, 학생 등, 좌익활동에 필요하거나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일단 돈으로 매수 또는 포섭한다. 법조계, 반공단체, 인권단체, 교육계, 시민, 사회단체, 공무원 단체, 노동계, 학생운동권, 국가 안보에 관련된 기관에도 침투하였거나 매수하였고, KBS를 비롯한 언론계와도 접촉한 것은 물론이다. 지면을 통해 좌익을 경계시키는 글을 한번이라도 게재한 인사도 일단 포섭대상이 된다. 의원 출신 김x길, 모 월간지의 조x제씨 등도 포섭 대상에 들어 있었는데 접촉 여부와 결과는 알지 못한다. 조선일보에는 부장급 인사 1명 정도와 기자 2명 정도가 좌익계이고, 한계례 신문에는 기자 2명 정도가 매수되어 있다. 다른 신문사는 더하다. 조선일보의 칼럼 주인공 김대중씨는 의롭다고 알려져 있고 한국일보의 경우 강준만씨는 여당과 정권에 아부하기 위한 목적으로 게재하고 있다는 판정을 받은 적도 있다. 조선일보사의 김대중씨는 현재 좌익계의 원흉 김대중이 매장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도 밝혀둔다. 금품으로 매수할 때는 안보전략상, 경제전략상 필요한 남북화합 분위기를 해치지 말아달라는 좋은 의미로 주기도 하지만 명분 없이 그냥 돈을 주기도 한다. 탄핵이 결정되었을 때 국정원에서는 일부 단체들에게 그릇된 정치인들을 질책해 달라는 의미로 주기도 했다. 뇌물의 댓가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받은 사람은 나중에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그 돈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뇌물은 현금을 줄 때도 있으나 거액인 경우는 대개 주식으로 준다. 뇌물을 주었는데도 잘 안 되면 뇌물을 폭로하여 매장시키기도 한다. 돈을 받고도 좌익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과 좌익계의 비밀을 알게 된 우익계 인사들, 자신의 비밀을 누설시킨 사람들은 비밀리에 암살시키거나 자살로 위장하여 죽이기도 한다. 우리가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지금 김대중은 이인제 의원을 죽일 계획이라 한다. 잘 알려진 사람들 가운데 좌익계 인사들은 정동영 의원을 비롯한 열린 우리당 수뇌부와 정대철, 김근태 의원, 임종석 의원, 문성근(영화배우), 명계남( “)이덕화(탈렌트), 황대웅(씨름선수), 박노해(노동운동가), 김홍업(김대중 아들은 전부가 좌익혁명분자다) 등과, 요즘 TV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도올 김용옥, 그리고 노사모 집회에 동원되는 일부 연예인들이다. 이들 중 김근태, 임종석, 문성근, 이덕화, 박노해 등은 간첩이나 다름없는 골수분자들이다. 첩보에 의하면 운동권 출신인 임종석은 간첩활동을 하면서도 남한 현지의 대남 공작 총책임자가 누구인지를 몰랐었는데 최근에 그 주인공이 김대중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고 한다. 정동영 의원은 비밀리에 김대중으로부터 대남 좌익혁명의 불가피성에 관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남한의 타락한 부르주아를 북한의 청렴한(?) 프롤레타리아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김대중의 통일 이론에 감탄했다고 한다. 그는 아나운서 출신의 곱상한 이미지와는 달리 매우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라 한다. 열린 우리당의 국민운동본부를 이끌고 있는 문성근은 요즘 열린 우리당에서 포섭 가치가 없는 의원들을 축출하기 위해 분당을 시도 중이다. 좌익 핵심분자들만으로 당을 구성하려는 것이다. 물론 김대중의 지시에 의한 것이다. 정대철은 현재 국정원 비밀직원 신분으로 국정원에 관여하고 있으며, 현재와 같은 정치상황이 지속된다면 열린 우리당의 당 지도부로 다시 등장하게 될 것이다.(국방부장관, 합참 작전본부장도 동참시킬 계획이다.) 김용옥은 해외(일본, 미국 등)에서 체류할 때 우연히 북한의 해외 공작 팀에 포섭되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북한 노동당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다. 김용옥 역시 근래에 와서 김대중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다) 승률 조작과 마약 유통 공작 언론에 공개되는 국정원과 기무사의 예산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정부 예산 외에도 김대중이 직접 지원하는 것이 있고, 기업체로부터 거두어들이기도 하지만 정기적으로 상납하는 좌익계 기업들도 있다. 이런 기업들 중에는 김대중이 만들어놓은 기업도 있다. 국정원 인터넷 팀이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싸이트sayclub.com에서는 매년 수십억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데 주로 좌익계들의 활동자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싸이트의 동호회 회원의 절반은 국정원 직원들이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ID를 쓰고 있다. 기무사도 마찬가지이지만 국정원이라는 집단은 이미 본분을 잊은 정도가 아니라 좌익혁명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대국민 테러집단, 국제테러집단으로 전락한 지가 오래다. 공작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천인공노할 만행도 서슴치 않는다. 이들이 운영하는 도박성 게임 싸이트인 '피망(pmang)'에서는 승률을 조작하여 엄청난 불법이득을 취하고 있으며, 경마에도 개입하여 그날의 마지막 한 두 경기는 국정원과 이들과 내통하는 고정간첩들이 수익을 올리는 시간이다. 더 놀랄 일은 북한의 마약 밀매단과 조직적으로 결탁하여 국제마약 유통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범죄행위는 전부가 김대중 정권 때부터 그의 지시에 의해 시작된 일이다. 라) 땅굴 은폐 사건 북한이 땅굴을 파 내려온 지가 벌써 30년이다. 이미 발견된 것은 일부분이고 진짜는 이미남쪽 깊숙이 내려와 있다. 줄기는 세 줄기인데 출구는 여러 곳으로 낸다. 한 때 땅굴을 찾아 시추하던 한 사람은 지하에서 터지는 발파소리까지 녹음했는데도 김대중 정권은 그 사람을 몰아 부쳐 입막음을 해 놓았다.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대령 계급장을 단 군인이 그에게 더 이상 땅굴을 주장하면 좋지 않을 것이라는 협박성 발언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의 생사 여부에 관해서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를 죽일 가능성이 있었는데 정보가 수집되지 않아서 안타깝다. 그 뿐이 아니다. 민간 탐사팀이 시추공을 뚫고 지하에서 시멘트 조각을 끌어올리고 땅속의 갱차 소리를 녹음하여 제출하였는데도 육군 탐사 팀은 묵살해 버렸다. 육군 탐사과 간부들을 현장으로 데려와서 소리를 들려주면 당황해 하면서도 그 때뿐이었다. 경기도 화성 지역의 주민들과 지역 종교단체에서 조사를 촉구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항의를 하고 지서에 신고를 해도 좌익계인 탐사 관계자들은 감추기에만 급급하였다. 이런 상황인데도 이들 좌익계 탐사반 군인들은 상급부대에 보고하기를, 민간인들이 포상금을 노리고 꾸며낸 수작이라 보고하였다. 민간인 탐사팀들은 증거가 충분한데도 신고를 할 곳이 없다고 아우성이었지만 기무부대, 헌병 등, 그 어느 쪽에서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이들과 이들에 의해 매수된 언론사들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부 일간지(한계례 신문) 등에서 이미 보도한 적이 있고, 지금도 인터넷에 접촉하면 사건 전말을 좀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이런 글이 알려지면 국정원에서 인터넷에 실려 있는 글을 즉시 삭제할 것이다.(삭제를 막기 위해 삭제 수작을 알리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건의 전말을 간단히 알린다. 김대중은 민간인들의 증거 제시와 항의가 거세지기 시작하자 화성지역으로 출구를 내려던 것을 포기하고 공사를 중단시켰다. 본래 땅굴의 출구로 지정된 지역에는 그 지역을 담당하는 군부대장과 경찰서장(해당 경찰관)을 좌익계 인사들로 배치한다. 이와 함께 고정간첩들을 그 동네로 이주시켜 출구 주위에 밀집 배치시켜 놓는다. 화성지역도 마찬가지다. 본래 남한 쪽으로 내려온 땅굴은 전부가 세 갈래인데 출구는 여러 곳이다. 출구는 호남 쪽에도 있고, 충청도 쪽에도 있으며 수도권에도 있다. 호남의 김제 부근과 대전 부근, 그리고 강원도와 경상도 쪽에도 있다고 한다. 이런 곳들은 해안으로 침투하는 북한군과 전술전략 상 연계시킬 수 있는 거점인 곳이 있고, 주한 미군을 공격하기 위한 곳이 있다. 김대중은 땅굴로 침투한 북한군(아군의 반란으로 위장한 군대)이 행정수도와 군 수뇌부를 동시에 장악하기 쉽도록 행정 수도를 충청도로 옮기려 하고 있다. 마) 서해 교전 사건 1차 서해교전 때 북한은 한국군에게 망신을 당했고 북한과 김대중은 북한 해군의 열세를 처음 알게 되어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보복을 해서 명예를 회복한다는 계획에 따라 김대중에게 협조를 부탁했고, 이에 2차 서해 교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미 남침의 징후가 포착되었는데도 김대중 정권은 방치시켰으며, 해군의 월등한 전투 능력에도 불구하고 김대중과 좌익계 군부들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음에도 반격을 못하게 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사건의 원인을 군부의 태만한 작전 때문이라 보도했으나 내부 사정은 그것이 아니다. 전몰 해군장병들은 김대중과 좌익계 군부들이 북한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위해 죽인 것이다. 바) 작전 계획 지연 공작 김대중 정권과 좌익 군부들이 전시에 국군의 작전이 효과가 없도록 시간적으로 지연시킬 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다. 어떤 작전인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북한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김정일은 한국군의 특전사 및 육군의 개인 화기의 하나인 유탄발사기의 파괴력을 두려워하여, 고속유탄 발사기를 비롯한 M-16계열에 부착되어 있는 유탄발사기를 없애고, 부착되지 않은 자동소총으로 무장해 달라는 요청을 김대중에게 하였다. 특히 전시에 후방으로 침투하는 특전사 등, 특수부대가 이 화기를 휴대하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다. 사) 대우그룹 자금 착복 사건과 대북 송금 사기사건 김대중은 재직시절 수많은 기업으로부터 돈을 거두어 들였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대우그룹과 관련된 자금 수백억 원을 구조 조정을 하면서 착복하고는 김우중을 도피시켰다. 김우중의 신병을 확보한 프랑스 정부에서는, 한국정부가 원한다면 김우중을 인도하겠다고 했어도 김대중 정권은 못들은 척 했다. 최근에 자살한 남상국 사장은 대우 그룹과 김대중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남사장이 특히 선거자금과 관련된 비밀을 누설시킬까봐 상당히 두려워했었다. 아) 북한의 남침 자금과 김대중의 혁명 자금 햇볕정책은 김정일이 김대중에게 요청한 것이다. 김대중은 햇볕정책을 구실로 북한의 도발책동을 돕기 위해 엄청난 물자와 자금을 북한으로 들여보냈다. 북으로 넘어간 돈은 북한군의 무기 개발 비용으로 쓰이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특히 금강산 관광 수익금 중 북한이 가져간 금액 가운데 30% 정도는 비밀리에 다시 김대중의 수중으로 되돌아 와서 좌익혁명 공작자금으로 쓰이고 있다. 기가 막힐 일이지만 사실이다. 김대중은 자금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카드사를 창업하였다. 그 카드사의 이름을 우리는 알고 있으나, 물증이 없어서 이름은 거론하지 않는다. 자) 정몽헌 살해 정몽헌 회장은 북한과 남한을 오가면서 김대중 정권의 비밀을 깊이 알게 되었다. 특히 김대중이 햇볕정책이란 구실로 북한에 송금한 돈과 비밀리에 송금한 돈의 일부가 김대중에게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다 북한이 무기개발에 관한 부담스러운 요청을 했다고 한다.(방위산업체에서 생산하고 있는 무기설계 및 생산 기술과 자금을 요청하였음) 정회장은 거부하였다. 결국 정 회장에게 이적 행위라는 짐을 지워 완벽하게 포섭하려던 김정일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고, 비밀 누설을 두려워 한 김대중에 의해, 국정원 김대중 팀 직원 3명이 그를 반 마취 상태에서 창밖으로 던져 살해했다. 차) 교과서 편찬위원 매수 언론에 보도된 바 그대로 고교 도덕 교과서에는 북한의 실상에 관한 내용이 전부 삭제되어 있고 통일의 당위성만 기술되어 있다. 북한의 열등한 정치체제, 온갖 비리와 정치범 처형 등의 범죄, 아사자 300만명 돌파, 탈북자 수십만 명 등과 끊임없는 도발책동과 피해 상황 등은 일체 삭제시켰다. 카) 좌익 불감증 김대중은 지금 자신이 대통령 재직기간 중에 심혈을 기울여 완성시킨 통일 전략전술을 실행으로 옮기려 하고 있다. 그 내용은, 한국이 독도 문제로 일본과 전쟁을 하여 패하게 한 다음, 북한 해군의 지원을 방해하는 주한미군을 궁지로 몰아서 철수시키는 한편, 남북한 해군이 연합함대를 구축하여 독도를 탈환하면서 통일로 이어가겠다는 것이다.(이 통일전술은 아래에서 공개한다) 이러한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한 예비 책동의 일환으로 김대중은 지금 남한 국민들을 좌익 불감증에 걸리게 하는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북한을 남한의 주적(主敵)에서 제외시키더니, 급기야 교과서 내용까지 개편하여 북한을 두둔하였고, 매수한 방송사를 통해 간첩 송두율을 민주 인사처럼 만들었다. 북한군과 국군의 이미지를 뒤바꿔 놓기 위해 만든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도 김대중이 기획한 것이다.(영화감독은 좌익이 아님) 이들 사건들은 전부가 친북 활동, 사회주의 체제에 불감증이 생기게 하여 용공세력, 좌파세력의 확산을 점진적으로 돕기 위한 것이다. 대남 혁명의 초기 전술이다. 어떤 신문의 칼럼에서는, 이러한 불감증 공작을 일러서 반미 친북 세력이 국정원과 공안 당국을 느슨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 해설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해설 또한 좌익계들의 수작이다. 이미 좌익화가 되어버린 국정원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또 다른 음모인 것이다. 생각해 보라. 국정원은 대통령이 시키는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선악을 안 가리고 행하는 집단이다. 오로지 대통령의 명령만 따르는 단체이다. 그리고 좌익세력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단체다. 북한대통령, 반미친북 세력이라 하는 자들이 국정원을 장악하지 않고 방치해 놓았겠는가! 친북인사라는 이유로 국회에서도 반대한 고영구를 국정원장에 임명한지도 벌써 오래다. 국정원은 고영구 이전부터 좌익화되어 있었다. 김대중은 황장엽씨가 북한정권의 비밀을 폭로하지 못하도록 그를 신변 보호라는 구실로 거의 연금상태로 만들었다. 햇볕정책에 방해가 돼서가 아니다. 그의 용공 정책, 친북 정책, 좌익 불감증 공작에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황장엽씨가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국정원 직원을 북한 공작원인 것처럼 꾸며서 살해 위협을 느끼게 한 적도 있다. 카) 증산도의 종교계 침투 공작 증산도 신도(국정원 직원 신분)들이 각 종교단체에 잠입해서 신도로 위장하고 있다. 이들은 각 증산도가 사이비 종교로 알려지는 것을 막고 정통종교로 인정받기 위해 증산도를 비호하는 세력으로 작용한다. 이들은 종교계의 동향을 파악하는 한편, 유사시 좌익정권을 비호하고 종교계를 선동하는 공작도 한다. 증산도는 자신들의 교리와 정면으로 위배되는 신흥 종교들과 교세가 열세한 종교단체들을 전복시켜 장악하는 공작도 하고 있다. 심한 경우에는 타 종교 교리의 간행을 방해하고, 협박과 납치, 살해를 하기도 한다. 최근 신도 살해 암매장 죄로 투옥된 영생교의 조희성도, 내부에 침투한 증산도 대원들이 정보를 제공하고, 증산도의 종정 안경전이 김대중에게 구속을 요청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이들 증산도 공작조들은 기독교 청년회 등의 여러 단체와 대형 교회, 지방의 각 교회(증산도가 있는 지방의 교회, 천주교 포함)에 침투하여 신도와 목회자, 신부, 수녀 신분 등으로 위장하고 있다. 불교계로는 불교청년회, 대학생 불교청년회, 조계종 종단 등에 신도와 스님(비구니 스님 포함)의 신분으로, 태고종 종단에는 하급 승려 신분으로, 지방 사찰에는 신도로 가장하고 있다. 해외의 교포 사회에까지 잠입한 것으로 안다. 기독교 방송과 불교방송에도 한두 명이 들어가 있다. 기독교와 불교계의 일부 신문사와 군종계도 마찬가지다.(침투 또는 포섭) 증산도의 공작에 매수, 또는 포섭된 사람들은 대체로 증산 강일순의 사상을 인정해 주는 발언을 하고 다닌다. 경남 마산시 운전자 불자회 회원들은 겉으로는 불교신도 행세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전부가 증산도 신도(국정원 비밀 직원 신분)들이다. 증산도의 종정 안경전은 김대중이 하사한 권총과 독침 등, 몇 가지 살인 무기도 감추어 두고 있다. 그는 김대중 정권 시절, 자신이 갚아야 할 채무를 없애기 위해 신도 수명을 협박하여 법적으로 채무를 없애놓고 살해, 암매장한 살인범이기도 하다. 김대중의 힘으로 급성장하여 막강한 권력단체로 군림하고 있는 증산도는 종교 단체라기보다는 제 2의 국정원 또는 북한단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김대중 재직시절 한국의 많은 신흥 종교단체 중에서 유일하게 증산 강일순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면을 TV 뉴스로 내보냈을 정도로 김대중의 비호를 받고 있다. 지금 증산도는 증산 강일순이 생전에 남긴 교리의 허황됨을 감추기 위해, 불리한 기록을 아예 없애려고, 과거에 간행했던 교리집을 수거하여 증거를 인멸하고 있다. 타) 동 티모르의 간첩 교육 사건 김대중의 지시에 의해 동 티모르에 파견되었던 국군 장교 3명이 극비리에 북한의 대남 공작팀을 만나서 간첩교육을 받고 왔다. 8번은 생략합니다(지금 진행중이므로 결과가 계획과는 다르게 나올수도 있으므로 이미 밝혀진 내용만 옮깁니다. 궁금하신분은 인터넷 검색해서 찾아보십시오) 9. 뭘 모르는 좌익분자 김대중 우리는 이 좌익혁명 계획에 관한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김대중 측근(또는 국정원이나 기무사 고위직일 수도 있다. 자세히 밝힐 수는 없다.)으로부터 입수하고, 분석하고, 작성하는 데만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시나리오는 통일에 목적이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미군 철수와 좌익혁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대로 전개되기에는 무리가 많다. 한 예로, 한국과 일본의 전쟁에서 미국이 개입을 못한다고 해서 미국이 수수방관하는 것은 아니다. 그 상황에서는 영국이 한국을 도와 일본을 정벌하게 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김정일과 김대중을 비롯한 남한의 좌익계 군부들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또 위기를 느낀 일본이 독도를 반환하는 대신 한국의 자유민주체제를 보장해 달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거부할 수가 없다. 그러 잖아도 좌익계들의 음모에 속아서 외국에 영토를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른바 적화통일까지 되었는데, 거부하게 되면 내적으로는 자유민주체제를 원하는 무수한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고, 외적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개입하여, 국내외에서 유혈 사태를 면할 수 없게 된다. 좌익분자들의 혁명전술에 휘말려 한국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미국이 극동지역을 화약고로 만들어놓고 그냥 물러날 것 같은가! 전략적인 손실, 재산권 손실을 방치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말라! 어리석게도 김대중은 국내 우익계 인사들이 궐기하지 못하도록 필요한 경우에는 죄를 날조하여 탄압, 숙청할 계획만 세워놓고 있으니, 이 나라의 운수가 망하지 않았다면 김대중은 노벨 평화상이라는 거대한 상으로 위장하고 있는 지금의 그 가면이 벗겨지고 그 대신 북한 정권이 부리는 일개 좌익혁명분자의 얼굴을 드러낼 때가 멀지 않았을 것이다. 10. 준비는 되어 있다. 김대중은 모든 준비를 마쳐놓고 있다. 좌익계 계엄사령관(육참총장)도 준비되어 있고, 남한 깊숙이 내려와 있는 땅굴 속에는 군수품도 준비되어 있다. 한미연합사에도 대 미군 공작 팀이 준비되어 있고, 선동할 좌익단체도 충분하고 언론도 매수되어 있고 언론 탄압 계획도 준비되어 있다. 그들에게 지급할 자금과 뇌물도 넉넉히 준비되어 있고, 노무현의 탄핵를 저지하기 위한 좌익단체와, 매수된 언론들이 이끄는 대로 휩쓸리는 국민 여론도 시험삼아 확인해 둔 바다. 김대중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우익계 인사들이(이들 대개 감시당하거나 숨어 지내기도 한다)유사시 음모를 폭로하거나 혁명을 방해하는 집단행동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것을 막고 우익계들을 감시하기 위해 김대중은 올해 총선이 끝나는 즉시 예비군의 상한 연령을 52세 정도로 높여서 소집을 할 계획이다. 이 점은 여자라 해서 예외일 수 없다. 이미 몇 곳에서 여자 예비군을 창설하였으며, 분위기를 확산시키기 위한 선동 세력까지 준비해 놓고 있다. 김대중은 남북 경제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10만원 권 화폐를 준비하고 있다. 이것은 물가를 올린 후, 화폐개혁을 하면서(전시가 끝나고) 남북한이 공히 쓸 수 있는 화폐통일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지금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폐를 발행하기 위한 공작을 강행 중에 있다. 부작용은 전혀 거론하지 않고 매수된 언론을 통해서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만을 거론 중이다. 즉, 현존하는 화폐에는 이순신, 이율곡, 이퇴계, 세종대왕 등 이씨들만 실려 있다. 일본의 화폐에는 한국을 침략한 이등박문의 얼굴이 실려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독립투사가 실리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10만원권이 발행된다는데 안창호 선생의 초상을 넣어야 한다. 또는 장영실의 초상을 넣어야 한다. 남자들만 실려 있는데 여자(유관순)를 넣어야 한다. 등이다.(이상은 TV와 KBS 라디오 등에서 실제로 방송된 내용들이다) 11. 노무현이 탄핵되면 곧바로 시작한다. 김대중의 좌익혁명은 본래 노무현 임기 3년 이내에 일으킬 계산이었는데, 올해가 적절하다는 판단을 하여 지금 실행 중에 있다. 그의 전술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최근 일본이 전과는 달리 강하게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오는 것도 김대중의 요청 때문이다. 일본이 독도 우표를 발행한 것도 김대중이 요청한 일종의 예비 전술이다. 한편, 중국에게는 압록강 이북 땅의 소유권을 주장해달라는 요청도 해놓았다. 이것은 일본을 시켜서 중국 측에 전달한 일종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사전 시험이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인지, 우연인지 하늘의 뜻인지, 꼭두각시 노무현이 탄핵될 위기에 처해 있다. 만약 노무현이 탄핵된다면 곧바로 혼란을 일으켜 일본의 독도 침략을 유도할 계획이라 한다. 일본이 독도 침략을 하지 않아도, 김대중은 탄핵을 반대하는 시위를 일으켜서 곧바로 땅굴 침투로 이어간다는 것이다. 12. 김대중을 죽여야 나라가 산다. 평생을 투쟁해 온 김대중이 단 5년간 대통령을 해먹고 그냥 물러나기 위해 정권을 잡았다고는 생각지 말라. 그의 과거 행적과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그냥 물러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김대중은 아직도 대통령이고 변함 없는 60년대 좌익 골수분자다. 그를 설득할 생각을 말라. 그는 붉은 혁명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와 같은 사람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투쟁만 생각하는 철모르는 좌익분자일 뿐이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무수한 좌익 공작의 증거가 포착되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남의 일처럼 간과하고 말았다. 한국이란 나라는 더 이상 일어서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느낌도 들지만 이제라도 정신만 차린다면 이 나라를 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이란 것은 국내,외의 조건이 성숙하였을 때, 자연히 획득하게 되는 결실이 아니겠는가! 노벨평화상이 부족했는지, 통일의 영웅이 되고 싶어 무리수를 쓰는 것도 어느 정도이지, 멀쩡한 한국 영토를 일본에게 내어주는 대가로 통일을 한답시고 또 다른 휴전선을 만들려고 하는 좌익혁명분자들의 광란을 철저히 막아야 한다. 14. 우익 군부의 쿠데타 외에는 뿌리 뽑을 수 없다. 이 글이 알려진다고 해서 김대중의 붉은 혁명이 좌절되는 일은 없다. 오히려 혼란한 상황을 만들어서 혁명으로 이끌고 갈 것이다. 만약 김대중이 궁지에 몰리게 되면 자신이 암살된 것처럼 위장하여 호남인들을 봉기시켜놓고, 자신은 북한으로 들어가 혁명공작을 지휘할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북한에서 지휘한다는 것이다. 이 글로 인하여 탄핵을 전후 한 시기에, 또는 노무현의 임기 내에 혁명을 일으킬 수 없게 하는 또 다른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해도 그는 포기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또 다른 전술을 구사한다는 것뿐이다. 국정원과 기무사, 증산도, 그리고 좌익 군부를 뿌리뽑기 전에는 그의 투쟁은 계속된다. 좌익인사(여당)들이 대통령직을 차지하기 위한 공작 역시 계속될 것이다. 김대중의 장남은 대를 이어서 혁명을 수행할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우익 군부들의 쿠데타가 일어나야 한다. 한국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붉은 도적집단을 도태시키는 일은 군부 외에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쿠데타 외에는 아무도 그들을 수사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쿠데타가 발발하면 국정원과 기무사 대원들, 증산도 신도들은 증거를 없애거나 종적을 감출 수도 있고 모르는 일이라 둘러댈 수도 있다. 그러나 증거는 충분하다. 증거를 인멸한다 해도 객관적인 동기는 충분하다. 즉시 쿠데타를 일으켜 내란음모를 밝혀내야 한다. 이 글이 알려지면 좌익계들은 야당이 총선을 의식해서 꾸며낸 음모라고 둘러댈 것이다. 영남쪽의 민심이 열린우리당 쪽으로 기울자 지역감정을 조장하기 위한 음모라 할 것이다. 그들의 변명에 굴복한다면 민족사의 정통성을 비롯한 자유민주 체제는 영원히 끝나버린다. 이 글을 작성하는 우리 전, 현직 국정원 직원들은 국정원과 기무사의 고위층과도 접촉을 하고 있다. 이 글은 그 고위층의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의 도움을 얻어 위태로운 시국을 알리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면서 궁여지책으로 폭로하는 것이다. 이 글에 들어 있는 정보에는 우리 정보원들의 피땀이 서려 있다. 목숨을 걸고 얻은 것이다. 특히 이 글에 등장하는 인명(人名)은 확실한 경우만 거론하였다는 것을 밝힌다. 우리는 죄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팔아 그들을 생매장시키는 짓은 하지 않는다. 주인 없는 이 나라가 다행히도 도적을 몰아내고 다시 안정을 되찾게 된다면 우리는 떳떳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 나라를 구한 공 따위는 필요 없다. 다만 참회하는 마음으로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출처 : 라이트코리아 글쓴이 : olive 김대중의 실체 글: 민주시민 『DJ 는 일제 때 도요타(豊田)로 創氏改名 (창씨개명)을 했어. 일본에 가서 옛 일본인 은사를 만나 「도요타 데스」라고 인사를 했대. 그 은사가 당황했다는 얘기가 아사히신문에 실렸어. JP는 일본기자들에게 李會昌 총재를「바카야로」(바보)라고 했다잖아. 다시 말하지만 DJP 의 공통분모는 親日과 親北이여. 『DJP의 공통분모가 또 있지. DJ와 JP 모두 일본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는 한국 정치인이여. DJ는 일본에 가서 일본 천황의 한국 방문을 고대한다고 했고, 모리 일본수상이 독도를 저희 것이라고 해도 말 한마디 않고,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시켰고, 어업협정 에서 양보해서 이제는 일본 어선이 잡은 생선을 수입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여. 지금 교과서 왜곡 문제가 일어나도 강력하게 대 응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이철승 월간조선 4월호 정치평론가 이청암 김대중은 일본이 학생들이 주로 다니던 목포 상업학교로 진학...... 교사인 "이사보로"는 웅변실력이 마치 대의사 (국회의원) 같다고 극찬할 정도였다......국어(일본어), 수신(修身) 산술(算術)과목에서 여러 차례 만점을 받았다. 이 사실은 그가 일본어를 잘 했고 일본 제국주의의 규범과 가치관을 주입시켰던 수신과목을 잘 이수했으며, 계산 실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물론 김대중씨는 항일운동을 한 경력이 없다, 오히려 친일성향이 강한 편이다. 김대중씨는 친일파와 제휴한 여운형씨가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일제시대에 친일경력이 있는 민주당 신파의 주요 인사들에게서 정치를 배우고 성장했다. 그러므로 김대중에게 있어서 일본은 친숙한 존재로 다가왔으리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는 망명생활을 하며 1972년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투쟁을 한 바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자민당 출신이면서도 좌파의원인 우스노미야 의원 등 일본 국회의원들의 지원을 받는 한편 반국가 단체로 규정된 "한민통"을 조직하여 의장으로 앉는 등 일본을 무대로 반정부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김씨는 1989년 1월 7일 일왕 히로히토가 사망했을 때 , 우리나라 정치인으론 이례적으로 주한 일본대사관 빈소 히로히토의 영정앞에 45도 가량 숙여 조의를 표명한 일 조차 있다. (경향신문 1989년 1.9일자 참조) 그의 이러한 처신은 뜻있는 국민을 깜짝 놀라게 했다. 김대중은 1944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목포상선 주식회사의 경리사원으로 입사했다. 뒤에 그는 학력과 관련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 관리 양성소인 만주 건국대를 중퇴했다고 선전하기도 했다. 김대중씨는 이처럼 일제 말엽에 유창한 일본어 실력과 빠른 계산 실력을 발휘하여 돈을 벌고 출세하려는 것을 청춘의 꿈으로 간직했다. 일본인 사장에게잘보여 신임을 받은 김대중은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목포상선 주식회사를 재빨리 접수하여 22살에 이 회사의 사장 자리를 차지 한다. (죽을 고비의 실체) 나는 일생동안 5번의 죽을 고비를 거쳐 왔다. 첫 번째의 수난은 공산당에 의해나머지 네 번은 독재자에 의해서였다 -대중경제론 중. 거짓말입니다. 첫 번째는 공산당이 아니라 대한민국 육군입니다. ***첫번째 죽을 고비!!!! (진짜는 이것 뿐!!) 김일성과 긴밀하게 접촉한 여운형씨 중심의 건국 준비위원회에 가담함으로써 좌익 이데올로기를 신봉하고 좌파 조직을 발판으로 삼아 파란많은 정치생애의 첫발을 내 딛는다........... 건준은 미군정청의 탄압이 심해지자 1945년9월7일 해산 당했다. 여운형도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해 휴양당하는 신세가 됐다. 따라서 건준의 맥은 극좌파의 손에 넘어갔다. 이들은 일방적으로 "조선인민공화국" 을 선포하고 .....각 지방에 인민위원회를 신속히 조직하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공산주의 색깔이 보다 강화된 인민위원회에 호감을 갖고 목포시 인민위원회에 가입하여 이 조직의 행동대 격인 민주애국 청년동맹 목포지부 부위원장으로 맹활약 했다............ 그는 이무렵 경찰이 목포시 인민위원회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리고 검거에 나서자 좌익인사 백남운이 대표로 있던 남조선 신민당에 가입 목포시당 조직부장으로 활약했다. 남조선 신만당은 1946년 11월 23일조선 공산당 ,인민당과 함께 남조선 로동당 (남로당) 으로 합당하여 공산주의 운동의 총본산이 되었다. 김대중은 또한 1946년 10월 31일 민애청 목포지구가 주도한 목포시 남교동 파출소등 4개 파출소 습격사건과 관련 하여 체포되 20일간 구류처분을 받았다....... 김대중은1949년 2월 21일 조선노동당 섭외부장, 민전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전남도경에 점거되 수사를 받는다. 그러나 해군 목포헌병대장 "박성철"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된다. (박성철? 많이 듯던 이름인데, DJ가 주장하는 "목포해상방위대 사령관설" 을 입증해준 인물로 알고 있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김대중은 좌익 경력이 있는 자들이 등록되어 있는 '보도연맹'의 맹원으로 군경에게 체포되 신안군 앞바다의 배 위에서 총알받이가 될 위기에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한 관계자가 살려주어 오늘까지 목숨을....... 군이 부산으로 철수하기 이전이 1950년 7월 15일경 목포지역의 보도연맹 맹원들을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을 상부로부터 받았다. A급(20명)은 체포 즉시 처단, B급(수백명)은 수감, C급(수천명)은 훈계 후 감시하게 되어 있었다. A급 상위 랭킹에 김대중이 있었다. 나는 당시 김대중을 체포하라 명령했다. 그러나 김대중과 잘 아는 해군 중위 박성철이 정보를 미리 알고 입수, 2시간 전에 이미 체포한 뒤였다. 박성철은 부하에게 "김대중은 똑똑한 놈이니 요령껏 살려주라"고 명령했다 한다. 김대중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향해 날아올 총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던 이 당사자는 "젊은 사람이 빨갱이지만 너무도 처량하고 불쌍해 그를 살려주었다" 고 증언……. 그는 "젊은 놈이 왜 빨갱이 짓을 하냐!! 총은 쏘겠지만 살려주겠으니 총소리와 동시에 바다로 뛰어 들어 살든 죽든 마음대로 해라" 며 공포만 쏘라고 저격병에 지시……. ***두 번째 죽을 고비는 과장 (군대안가고 얼쩡거리다 죽을 뻔 함.) "주님 6.25 당시 공산군 감옥에 갇혔던 저를 220명 재소자 가운데 140명이나 학살되는 가운서 탈옥해서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옥중서신 중.) 확률 36%를 가지고 웬 天運? (220-140=80, 80/220=36) 전쟁 통에 죽을 뻔 한 것이 자랑? 또 다른 서적에는 100명 중 20명 죽고 80명 탈출하는데 섞여서 살았다고 적고 있음. ***세 번째 죽을 고비는 뻥 교통사고--단순 교통사고임. 교통사고가 자신이 박해 당한다는 허구를 조작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대통령된 뒤에 지팡이 안 짚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입증됨. (월간조선 1월호에 자세히 나와 있음) ***네 번째 죽을 고비도 뻥 이후락 현해탄 납치사건--말 그대로 단순납치사건. 죽일 의도는 전혀 없었음. (월간조선 2월호) ***다섯 번째 죽을 고비는 자작극 80년 사형선고--(광주 사태는 전-DJ 모종의 합의) 5번이라 얘기하면서 한번은 꼭꼭 숨기고 거의 모두가 알고 있지 않습니다. 불리한 1번은 빼고 4번이라 얘기하면 될 것을 왜 그랬을까? 이는 진짜는 그것 한번뿐이라서 뺄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또 이를 가슴에 묻어두고 있는 것은 그가 대한민국 육군에 절대 우호적일수가 없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또 만약 통일될 시 이북인민에 선전하기 위해 남겨 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 DJ-사기연설 비법공개) DJ가 "(박정희가)죽이려 한다." 는 과대망상을 "죽을 뻔 했다"는 참말, 실체로 둔갑시키며 어떻게 이미지를 조작하는지를 살펴봅시다. DJ 언사의 특기는 연상법. 박통때 사용하던 대중반정(大衆反政)----대중(大衆)이 정부(政府)를 엎는다. 속뜻은 대중반정(大中反正)----김大中이 박正희를 엎는다. 그는 87년 6.29 선언 사면 복권 후, 후보 단일화의 열망을 뒤로 한 채, 전국을 돌며 서서히 출마할 바람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인천 유세 -- 여러분이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김대중이가 16년만에 "살아서" 돌아 왔습니다.! 두 번째 청주 유세 -- 꼭 "죽을 줄만" 알았던 나가 "살아서" 여러분 앞에 돌아왔습니다! 세 번째 광주 유세---울먹이며 -- "살아서" 여러분과 만날 수 있게 해준 2000여 광주 영령과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광주 시민들은 눈물을 주루룩.... ) 공통점을 보이시죠? ①"죽을 뻔 했다" 하며 집권층이 반드시 죽이려 할 만큼 자신이 대단한, 위험한, 큰일 낼 인물이라는 피암시를 은연중 상대방에게 주입합니다. ②또 , 자신은 그 죽을 고비를 넘기고 불사조와 같이 살아 돌아온, 반드시 살아서 역사해야 할 존재라는 것, (대통령 뽑아 달라, 이 얘기죠) ③또 자신은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민주화 투쟁을 했다는 것, ④또 동시에 상대를 살인자(가해자)로 몰고 ⑤자신은 핍박받았다(피해자다)--약자의 피해의식을 자극, 특히 호남에서 약발 만점. ⑥.또 항상 하느님을 등장시켜 신이 자기를 살렸다는 것.---자기에게 신이 역사한다? 과대망상의 극치. 어쨌든 일제 강점기 때 감옥에서 김일성과 장기 뒀다고 구라치는 이의 말을 들어줄 이유가 없습니다. (87년 대선 관훈토론시 "진짜 김일성과 장기를 뒀냐"는 조선일보 김대중 패널의 질문에 바둑을 둘 줄 몰라서 장기를 뒀다고 둘러댐 ) 김일성과 장기 뒀다는 구라는 왜 치나? 고작 "장기"란 말에 숨어있는 술수는? 이는 "신선 장기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 는 말을 이용한 것으로 1) 장기⇒신선으로의 연상을 유도함으로써, 감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조차 신선같이 완전히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준 신적 존재라는 것을 은연중 주입하기 위함. (훗날 예수 동생으로 발전.) 2)일제 때 감옥에 있었다, 하필이면 김일성과? 이는 둘이 항일운동을 했다는 뻥, 3)김일성과 장기를 뒀다는 것은 북의 대표가 김일성인데 반해 자신이 남의 대표라는 것, (김일성의 실체를 인정함) 4)더 나아가, 결국 둘이 신선 장기 놀 듯 한반도를 말아먹고 싶다!!!(이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5)결국 국민을 장기판의 졸로 보고 있다는 얘기. 만약 김일성과 장기 둔 것이 사실이라면 이북 방문시 김정일에게 "선친과는 같이 감옥에 있었고 장기도 뒀었다"는 인사말을 안 할 리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DJ 광신도들은 거짓 신선 장기놀음에 지금껏 도끼자루가 썩는 줄도 모르고 빠져있었다는 것을 이제 서서히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도끼자루 아예 썩어 없어지면 나무는 날 도끼로 합니까? 더 썩기 전에 정신 차려야지요. (퍼온 글) 광주사태를 민주화 운동으로 보지 못하는 이유 가끔 억지 주장을 전개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그들의 주장을 분석해 보면 즉시 억지 주장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나는 광주에서 무고한 많은 인명이 유명을 달리한 것을 무척 안타깝게 여긴다. 그러나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과대 포장하는 것을 절대 반대한다. 역사는 후세가 평가한다. 당대에는 관련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자료가 제시되지 않고, 무엇보다도 감정이 개입되기 때문에 냉정하게 평가할 수 없다. 광주사태가 발생한지 20 년이 지났다. 이재는 어느 정도 냉혹하게 평가하여 후세에 교훈을 남겨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미화하거나 격하시키면 사건의 진면목(眞面目)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후세에 올바른 교훈이 될 수 없다. *광주사태가 진실 된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광주사태를 냉정하게 분석하여 이 땅에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데 진실 된 의미가 있다.* 민주화 운동이라고 거창하게 명분을 부여하면 무조건 일방적으로 가해자를 매도하게 되면 광주사태에서 진실 된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사실 이런 종류의 글은 한 편의 논문이 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내 사정으로 그렇게 할 수 없고 제기된 몇몇 논점만 거론한다. 논쟁을 명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글의 결론과 전제, 전제에서 --------- (퍼온 글) 제목 : 호남피해망상론 글쓴이 펌식이 날짜 2001-07-16 오후 9:02:04 조회 48 일부 청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역감정에 관한 토론을 지켜보면 호남 측에서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치가 합당하고 설득력이 있는 근거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한 권의 무협지를 쓰는 듯 한 터무니없는 주장을 전개하는 청년들이 있다. 문제는 그런 엉터리 주장을 계속적으로 전개하면,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 엉터리 주장이 진실인 것처럼 생각이 되고 결국 자신도 모르게 진실로 믿게 된다. 이러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진실을 볼 수 없게 된다. 또 진실을 볼 수 없을 뿐더러 심지어 스스로가 만들어낸 허구에 사로잡혀 더욱 과장을 하게 되고 사태를 점차 악화시킨다. 한 마디로 자기 최면에 걸리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제시한다. <경상도는 50년을 해 처먹었는데 김대중 이는 겨우 5년 해먹은 것까지고 왜 그러나?> 이 말에는 두 가지가 담겨져 있다. (1) 경상도가 50년 집권했다. (2) 경상도가 50년 동안 해 처먹었다. 이런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 알고 있어도 감정이 격해져서 계속하여 외치게 되면 결국 자기최면에 빠진다. 이런 식의 주장은 전라도 피해망상에 젖어있는, 특히 비난의 손가락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를 좋아하거나, 희생양을 찾기를 원하는 성향을 가진 호남사람에게는 집단최면을 유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주문이 된다. 문제는 집단최면은 허구를 사실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다는데 있다. 나는 김대중 일당을 지지하는 사람이나 헌겨레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이런 부류로 분류한다. (1) 경상도가 50년 집권했다. 1945년 8.15일 일제의 압제로 부터 해방되었다. 1948년 법이 제정이 된다. 이전에는 미군군정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주권국가로 볼 수 없다. 따라서 1948년을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 정부수립후 이승만 정권이 취임했다. 이승만씨는 본관은 전주이씨 출신으로 고향은 황해도다. 일단 이북출신으로 보아야 한다. 이승만을 뒤를 이은 윤보선은 충남아산 출신이다. 장면 총리는 인천 출신이다. 1961년 5.16 그 당시 군인이었던 박정희씨를 중심으로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일단 그를 영남정권의 시발점으로 보자.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더불어 원적이 호남인 전두환이 집권하였다. 그 뒤에는 본토박이 영남출신 노태우가 집권하였다. 노태우 다음에는 본적이 고흥인 김영삼이 집권하였다. 여기서 100번 양보하여 원적과 본적을 무시하고 전두환, 김영삼을 영남인 으로 간주하자. 김대중이 1998년 2월에 공식적으로 집권했지만 김영삼이 말년부터 그는 사실상 임시대통령 직을 수행했다. 따라서 김영삼이는 1997년 까지 집권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래놓고 산수놀이를 해 보자. 1961 년부터 계산하면 영남정권은 총 36 년간 집권했다. 즉 호남인들이 내세우는 50년과는 14년 차이가 있다. 이 부분은 단순한 숫자 차이가 아니다. 즉 50 년이 되기 위해서는 1998년을 기준으로 보면 1948 년이다. 즉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된 그 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이북출신 이승만 정권, 윤보선(충남)/장면(인천) 정권을 모두 경상도 정권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것은 호남차별론이 진실이 아니라 과대망상에서 발생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또 한 가지 사실은 호남차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남한에서 호남이외의 지역을 모두 영남으로 취급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것이다. 이 역시 과대망상이다. 즉 호남차별론을 뒷받침하는 큰 기둥이 진실이 아니고 허구라는 것을 아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2) 경상도가 50년 동안 해 처먹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GMP가 이디오피아보다 훨씬 낮았다. 1961년 5.16 이전까지 국민 일인당 GMP가 겨우 몇 십 달러로 1948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을 착수하려고 하니 국내자본이 형성되지 않아 외자를 유치하여 경제개발에 나섰다. 5.16 이전 이승만, 윤보선 정권이 무슨 해 처먹을만한 것을 남겨놓았는가? 윤보선 정권 때 부정부패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을까? 50년 동안 해 처먹었다면 지금 이 정도 경제개발이 되었나? 1961년 이전보다 더 못해야 되지 않나? 한 마디로 "(2) 경상도가 50년 해 처먹었다"는 중상모략이고 지극히 비열한 선동이다. 여기에 상대방을 깔아뭉개 자신이 응호하는 정권을 지지하려는 정말 야비한 심보가 담겨져있다. 같은 고통을 받아도 남의 고통은 축소하고 자신의 고통을 이 우주의 모든 것인 양 자기최면에 집단최면을 걸고 있다. (1), (2)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호남인들이 내세우는 호남차별론이 사실상 허구에 근접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호남차별론은 호남의 피해망상이다. 김 대 중 국가보안법 고 발 장 2003.6.16. 15:00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은 첨부한 내용과 같은 고발장을 특별검사에게 제출하였다. ========================================== 고 발 장 고 발 인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 회 장 정 기 승 고발대리인 임 광 규 서울 강남구 역삼동 702-2 삼성제일빌딩 1205 tel 02-558-6565 fax 02-527-2560 피고발인 (1) 김 대 중 (2) 박 지 원 (3) 임 동 원 위 송달장소 : 서울 마포구 동교동 178-15 (4) 정 몽 헌 서울 종로구 계동 140-2 고발인은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에 위험을 초래한 피고발인들을 국가보안법(일반이적죄) 등으로 고발합니다. 엄중조사하여 의법기소하여 주실 것을 요구합니다. 죄명 및 적용법조 1. 국가보안법위반(일반이적) 국가보안법 제4조 제1항 제1호 제5조 형법 제99조 2.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 제3조 형법 제356조 제1호 3.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위반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제27조 제1항 제2호 제13조 4. 외국환거래법위반 외국환거래법 제27조 제1항 제8호 내지 제10호 제28조 제1항 제1호 제15조 내지 제18조 제7조 고 발 사 실 1. 고발인 모임은 나라의 안전과 자유와 번영을 위한 대한민국 헌법을 연구하고 현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변호사단체입니다. 2. 피고발인(1) 김대중은 1998. 2.부터 2003. 2.까지 사이에 대한민국 대통령직에 있던 사람, 피고발인(2) 박지원은 위 기간 대통령 수석비서관, 문화관광부장관, 대통령비서실장직에 있던 사람, 피고발인(3) 임동원은 위 기간 대통령보좌관, 국가정보원장, 통일원장관직에 있던 사람, 피고발인(4) 정몽헌은 위 기간 현대건설주식회사 현대전자주식회사 현대상선주식회사 현대아산주식회사 각 회장직에 있던 사람입니다. 3. 피고발인(1) 김대중은 별지1『김대중씨의 의사와 행동표』에 기재한바와 같이 (가) 대한민국의 국가방위를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려 노력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행위를 하여왔고(번호1, 번호2, 번호3, 번호4, 번호5, 번호6, 번호7) (나) 국가보안법의 해체를 끈질기게 주장하므로써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을 위태롭게 해왔을뿐 아니라 실제로 국가보안법 위반자들과 투명하지 않은 관계를 맺어 왔으며(번호8) (다) 반국가단체가 50여년간 강점하면서 2000만 동포들의 인권을 짓밟는 세력과의 남북연방제에 이르는 남북연합제를 시도하여 왔고(번호9) (라) 젊어서 공산주의자들 주도의 통일전선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중앙위원, 신민당(해방직후) 해당지역 조직부장, 민주청년동맹 해당지역 부위원장을 역임한 경력과 그 좌익사상을 은폐하면서도 수시로 이 사상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한다고 볼 수밖에 없는 언동을 하여 왔으며(번호10 내지 번호22) (마) 북한 인민의 불행의 원인이며, 대한민국 타도의 전략전술에 전력을 기울이는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까지 하여 국민 특히 자라나는 젊을 세대를 오도하여 왔고(번호23) (바) 기회있을 때마다 북한 인민의 의식주에 앞서 대량살상무기 개발취득에 전력을 기울이는 북한지배층을 위해서 국내외에 걸친 경제지원을 호소하여 온 사람입니다.(번호24 내지 번호26) 4. 피고발인(2) 박지원, 피고발인(3) 임동원은 피고발인(1) 김대중의 제2항 기재 노력, 위태행위, 시도, 언동, 오도, 호소를 잘 아는 사람들이고 5. 피고발인(4) 정몽헌은 자기 스스로 기업을 일구어 보지 않는 제2세 기업인으로서 우연한 상속으로 대기업을 이끌다가 그 기업들을 사실상 몰락시킨 사람입니다. 6. 피고발인(1)(2)(3)(4)는 공모하여 반국가단체인 북한 당국자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달라는 요구를 받고, 북한 지배층은 가용자금을 인민의 생활향상에 쓰는데보다 무기증강과 대남공작에 우선하여 지출하여온 세력이고, 특히 1994.부터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의 의심이 커왔음에도 불구하고, 거액의 자금을 북한지배층에게 주기로 작정하고서, 대한민국 시민들의 세금으로 지탱하는 국책은행인 한국산업은행으로 하여금 현대상선주식회사 등에 대출케하거나 여타 현대 계열회사의 자금을 동원하여(그 대가로 국민세금이 뒷받침하는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현대 계열사에 거액지원을 하면서) 북한지배층에게 몰래(국내적으로는 국민 거의 대부분이 모르게 하고 국외적으로는 미국 등 동맹국이 모르게 함) 송금할 것을 치밀하게 계획한 다음, 2000. 6. 9. 미화 200,000,000달러(그 중 40,000,000달러는 황급한 송금의 실수로 2000. 6. 12.에 송금완료)를 중국은행 서울지점, 중국은행 마카오 북한계좌, 중국은행 홍콩지점 북한계좌를 순차로 거쳐 북한에 송금하는 등 전후 여러차례에 걸쳐 별지2『피고발인들의 공모관계』표시와 같이 도합 미화 500,000,000달러 내지 800,000,000달러의 현금과 현물을 북한에 송금 내지 반출하므로써 반국가단체인 북한지배층의 지령을 받아 그 무기개발 특히 대량살상무기개발, 정밀무기개발의 군사상 이익에 공여한 것이고, 국민세금으로 이루어진 33조의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현대그룹에 배임적인 위 같은 금액의 손실을 입게 하고, 반국가단체 지배지역과의 교류협력에 필수불가결한 승인절차를 회피하고, 외국환거래법상 신고와 허가의무를 위반한 것입니다. 증 거 서 류 증1-1 신문기사(세계일보 1999. 6. 4.) 2 신문기사(대한매일 1999. 6. 15.) 3 신문기사(한겨레 1999. 6. 17.) 4 신문기사(한겨레 1999. 6. 17. 비료북송선출항) 5 신문기사(조선일보 2001. 6. 6.) 6 신문기사(동아일보 2001. 6. 6) 7 신문기사(동아일보 2001. 6. 6.) 8 신문기사(문화일보 2001. 6. 9.) 9 신문기사(한겨레 2001. 6. 15.) 10 신문기사(주간조선 2001. 6. 28.) 11 신문기사(세계일보 2001. 7. 12.) 12 신문기사(월간조선 2002. 8. 기습한 적함을) 13 신문기사(조선일보 2002. 6. 30.) 증2-1 신문기사(조선일보 1999. 2. 8.) 2 신문기사(조선일보 1999. 3. 1.) 3 신문기사(조선일보 1999. 3. 2.) 4 신문기사(조선일보 1999. 7. 4.) 5 신문기사(조선일보 1999. 7. 5.) 6 신문기사(조선일보 1999. 8. 15.) 7 신문기사(조선일보 1999. 9. 28.) 8 신문기사(조선일보 1999. 9. 30.) 9 신문기사(문화일보 1999. 10. 23.) 10 신문기사(조선일보 1999. 10. 23.) 11 신문기사(조선일보 1999. 11. 2.) 12 신문기사(한겨레 1999. 12. 17.) 증3-1 신문기사(월간조선 2001. 9. 항공테러억제) 2 신문기사(대한매일 1998. 6. 12.) 증4-1 신문기사(조선일보 1999. 4. 7.) 2 신문기사(조선일보 1999. 4. 10. 사설) 3 신문기사(한겨레 1999. 4. 12.) 증5-1 신문기사(동아일보 2000. 4. 1.) 2 신문기사(세계일보 2000. 4. 14.) 증6-1 남북공동선언 전문(www. koreascope.org) 2 연합통신(2000. 10. 9.) 3 연합통신(2000. 12. 7.) 4 신문기사(한겨레 2000. 10. 10.) 5 신문기사(조선일보 2000. 11. 30.) 6 신문기사(대한매일 2000. 11. 18.) 증7-1 신문기사(한국일보 1999. 5. 6.) 2 신문기사(조선일보 1999. 4. 8.) 3 청와대 홈페이지(2001. 2. 27.) 4 신문기사(동아일보 2001. 3. 2.) 증8-1 신문기사(경향신문 1998. 12. 16.) 2 신문기사(국민일보 1998. 12. 25.) 3 신문기사(세계일보 1998. 12. 16.) 4 신문기사(한겨레 2001. 8. 24.) 5 신문기사(세계일보 2001. 11. 16.) 증9-1 청와대 홈페이지(2001. 9. 28.) 2 신문기사(동아일보 2001. 9. 30.) 3 청와대 홈페이지(2001. 7. 12.) 4 청와대 홈페이지(2001. 7. 19.) 5 청와대 홈페이지(2001. 8. 14.) 6 청와대 홈페이지(2001. 8. 22.) 증10-1 신문기사(조선일보 2000. 2. 10.) 2 신문기사(동아일보 2000. 2. 29.) 3 신문기사(조선일보 2000. 6. 15.) 4 신문기사(경향신문 2000. 7. 18.) 5 신문기사(대한매일 2000. 8. 17.) 6 청와대 홈페이지(2000. 8. 17.) 7 청와대 홈페이지(2000. 8. 22.) 8 청와대 홈페이지(2000. 8. 26.) 9 신문기사(대한매일 2000. 12. 11.) 10 청와대 홈페이지(2000. 12. 10.) 증11-1 신문기사(대한매일 2000. 4. 1.) 2 신문기사(경향신문 2000. 3. 15.) 3 신문기사(문화일보 2001. 5. 1.) 4 신문기사(국민일보 2001. 5. 1.) 5 신문기사(대한매일 2001. 5. 1.) 6 신문기사(한국일보 2001. 5. 4.) 7 신문기사(대한매일 2001. 5. 8.) 증12-1 신문기사(조선일보 2000. 8. 26.) 2 신문기사(한겨레 2000. 8. 30.) 3 신문기사(조선일보 2000. 9. 1.) 증13-1 청와대 홈페이지(2000. 6. 16.) 2 청와대 홈페이지(2000. 6. 18.) 증14-1 청와대 홈페이지(2001. 4. 16.) 2 신문기사(월간조선 2001. 5.) 3 신문기사(동아일보 2001. 3. 6.) 4 신문기사(동아일보 2001. 11. 20.) 5 신문기사(문화일보 2001. 12. 1.) 증15 신문기사(월간조선 2002. 11.) 증16-1 신문기사(조선일보 1991. 5. 4.) 2 신문기사(동아일보 1994. 5. 4.) 증17-1 신문기사(동아일보 1995. 3. 23.) 2 신문기사(조선일보 1995. 3. 26.) 3 신문기사(대한매일 1995. 3. 27.) 증18-1 신문기사(대한매일 1994. 5. 17.) 2 신문기사(조선일보 1994. 5. 17.) 3 신문기사(동아일보 1994. 4. 3.) 증19-1 해방50주년과 우리 민족의 내일 2 신문기사(중앙일보 1992. 9. 23.) 3 신문기사(조선일보 1992. 12. 23.) 4 신문기사(조선일보 1993. 1. 15.) 5 신문기사(중앙일보 1993. 7. 13.) 6 신문기사(조선일보 1989. 12. 21) 7 신문기사(동아일보 1989. 5. 2.) 8 신문기사(조선일보 1997. 10. 15.) 증20-1 해방조선Ⅰ 2 진실은 이렇다 3 신문기사(産經新聞 1986. 9. 16.) 4 光州市 騷亂の背景 5 공산주의의 활동과 실제 6 김대중 정치방황 30년 7 누구를 위한 내란음모인가 8 全貌(ぜンボウ) 12 증21-1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6. 10.) 2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6. 10.) 3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6. 10.) 4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6. 10.) 5 신문기사(중앙일보 2003. 6. 7.) 6 신문기사(중앙일보 2003. 6. 5.) 7 신문기사(중앙일보 2003. 6. 5.) 8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6. 3.) 9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5. 28.) 10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5. 22.) 11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5. 15.) 12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5. 14.) 13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5. 7.) 14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5. 9.) 15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5. 6.) 16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5. 3.) 17 신문기사(동아일보 2003. 5. 2.) 18 신문기사(동아일보 2003. 4. 21.) 19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4. 22.) 20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4. 22.) 21 신문기사(독립신문 2003. 4. ) 22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4. 21.) 23 신문기사(동아일보 2003. 3. 11.) 24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3. 5.) 25 신문기사(주간조선 2003. 2. 27.) 26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2. 18.) 27 신문기사(동아일보 2003. 2. 18.) 28 신문기사(동아일보 2003. 2. 15.) 29 신문기사(동아일보 2003. 2. 14.) 30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2. 14.) 31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2. 12.) 32 신문기사(조선일보 2003. 2. 10.) 33 신문기사(동아일보 2003. 2. 8.) 34 신문기사(동아일보 2003. 2. 6.) 35 신문기사(조선일보 1면 2003. 2. 6.) 36 신문기사(조선일보 3면 2003. 2. 6.) 37 신문기사(조선일보 5면 2003. 2. 6.) 38 신문기사(중앙일보 2003. 2. 5.) 39 신문기사(동아일보 2003. 2. 5.) 40 신문기사(동아일보 2003. 1. 17.) 41 신문기사(동아일보 2002. 11. 7.) 42 신문기사(조선일보 2002. 11. 6.) 43 신문기사(조선일보 2002. 11. 5.) 44 신문기사(동아일보 2002. 11. 2.) 2003. 6. 16.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 회 장 정 기 승 대한민국 특별검사 송두환 귀 하 6.15 정상회담의 의미 정상회담은 두 정상의 인격이 동등하게 존중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김대중-김정일과의 만남은 파탄된 두 인격의 만남이었다. 김정일은 “나를 만나려면 비밀자금 10억 달러를 내놓으라”고 했고, 김대중은 국민 몰래 돈을 바친 후에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이를 누가 두 국가 간의 정상회담이라고 부르겠는가. 거기에 더해 5,000만 달러에 대하여는 김정일의 건강식품, 건강도구, 사치품들을 세계각국을 수소문 쇼핑해서 보내주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황제의 자격으로 조공을 받은 것이고, 김대중은 조공을 바친 변방의 임금인 셈이었다. 조공으로 바친 엄청난 금액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기분상하는 것은 국민의 자존심이 도둑질 당했다는 사실이다. 김대중은 국민의 자존심을 몰래 훔쳐다가 김정일에 바친 것이다. 이어서 김대중은 국민 몰래 안보를 김정일에 바쳤다. 서둘러 지뢰를 제거하고, 영해가 너무 넓다며 북에 떼어내 주자고 했고, 보안법을 사실상 철폐했고, 간첩을 양성화했고, 반미감정을 부추겨 주한미군을 몰아내려 했다. 국민 몰래 언론도 바쳤다. 46개 언론사 사장들을 그에게 보내 사실상의 충성서약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는 왜 이렇게 했을까? 그는 23살에 노동당에 입당했고, 정치생활을 하는 동안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자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되자 김정일은 쾌제를 부르며 서둘러 그를 쥐어짜서 얻을 것을 최대한 빨리 얻으려고 했을 것이다. 1999.7.19, 한민전이 “김대중 역도의 부정부패행위를 고발한다. 는 제목으로 먼저 포문을 열었다. “맑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겠다며 출범한 국민의 정부 하에서 지금 극심한 부정부패의 악취가 풍기고 있다. 고급옷 뇌물사건과 그림뇌물사건, 판사비리사건과 농, 수, 축협 비리사건을 비롯한 각종 부정비리사건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내외를 경악케 하고 있다. 이 땅에 출몰한 역대 부패정권에 이어 드러나고 있는 현 정권의 부정비리작태를 목격하면서 국민들은 김대중 역도를 추악한 부정부패의 왕초로 낙인찍고 그를 하루빨리 권력의 자리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민전 중앙위원회 선전국은 김대중 역도의 부정부패행위를 고발하기 위해 이 글을 낸다.. 한민전의 폭로내용은 김대중의 실체에서부터 거짓말, 도둑질 등 온갖 부정 행각을 집대성한 장문의 글이었다. 1999.12,5. 북한 김병식 부주석이 1971년 김대중에게 20만 달러를 주면서 동지애로 뜨겁게 포옹했다는 편지를 공개했다. “선생과 처음으로 상면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6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즘 텔레비죤 화면에서 선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1971년 가을 일본 도꾜 플라쟈 호텔에서 서로 뜨겁게 포옹 하던 때가 생생히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는 물론 약소하였습니다. 선생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20만 딸라 밖에 보탬 해 드리지 못한 것 지금도 괴롭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을 오늘의 성공에로 이르도록 돕는데 밑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보람을 찾습니다.. 이어서 1999년 12월호, 일본 문예춘추지에 김정일이 김대중을 압박하는 육성녹음이 소개됐다. 우리 아버지 수령으로부터 사랑과 배려와 도움을 받고도 배은망덕하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시기에 구국전선이라는 노동당 기관 잡지와 전단을 통해 김대중이 스위스 은행에 10억 달러를 보관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 책자와 전단은 한국의 휴전선과 해외교포들에게 뿌려졌다. 바라는 요지는 김대중이 김일성 주석의 은혜에 빨리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했을 김대중이 2000년3월, 갑자기 베를린으로 날아가 접선을 요청했다. 김정일의 입을 빨리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제까지 민간단체를 통해 북한을 도와주었지만 도와준 양이 변변치 못했다. 좀 넉넉하게 도와주려면 아무래도 정부가 앞장서야 할 것 같다. 그러려면 명분이 필요하다. 정상회담을 열자”는 요지의 선언이었다. 김정일은 쾌히 그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차안에서 단둘이 55분간 접선을 했다. 색깔로 의심받아온 그가 대열을 이탈해 적장과 단둘이 1시간씩이나 밀담을 나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접선과정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소문과 추측만 무성하다. 하지만 그 접선 이후에 나타난 김대중의 행동은 결코 대한민국 대통령의 행동이 아니라 약점 잡힌 사나이의 허둥대는 행동이었다. 김정일이 앉아라하면 앉고 서라하면 서야 하는 사람으로 비쳤다. 그 후의 남북한 간 거래는 거래가 아니라 한쪽 협박하고 다른 한 쪽은 그 협박에 못 이겨 허겁지겁 대국민 명분을 만들어가면서 퍼주기만 하는 약점 잡힌 전주에 불과했다. 이를 어떻게 정상회담이라 볼 수 있으며 대북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2003. 6. 17 한민전의 폭로 내용 요약 [김대중 역도의 부정부패행위를 고발한다]의 핵심 요지 요약 “김대중은 일본인 상선회사에 입직해 업주에게 굽실거리며 잘 보인 덕에 돈푼이나 얻어 쓰면서 돈맛을 알게 된 김대중은 일본이 패망한 후 일본인 소유였던 상선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돈벌이에 나섰다. 한국사회에서 불경기를 모르는 기업, 가장 확실한 돈벌이는 권력을 쥐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아는 김대중은 재빨리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야당의 고위직을 차지하면서 가신그룹을 만들고 그를 통해 엄청난 정치자금, 선거자금을 염출해 냈다. 그 가신그룹의 핵심멤버들은 김상현,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남궁진, 최재승, 장재식, 박태영 등 재력가, 모략가, 사기협잡배들이다. 사조직을 통해서도 수많은 돈을 뜯어냈다. 대표적인 사조직으로는 「민주연합청년회」,「민주헌정동지회」,「한국정치문화연구소」등이다.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이 직접 조직운영한 「민주연합청년회」가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전위대로, 비자금조성의 별동대로 기능해왔다. 김대중의 보증만 받으면 국회의원 당선은 땅 짚고 헤염치기라고 하는 호남권에서 공천후보자들로부터의 자금 염출은 말 그대로 수탈행위였다. 지난 13대총선때 전북 남원지구에서 지역구후보 첫 내정자는 이형배였다. 그런데 조찬형에게서 4억원의 뇌물을 받아먹은 김대중이 이형배를 전국구의 당선 불가능한 순위로 돌려놓고 그 대신 조찬형을 내세운 것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13대 총선때 김대중이 호남권 후보자들로부터 받아먹은 사례금만도 1백억 원이 넘는다. 김대중의 돈 그러모으기는 14대 총선때 더욱 노골화되었다. 김대중은 후보선정에서 공천헌금상납액수를 후보선정기준으로 삼고 민주당의 전국구당선권으로 보는 24번까지에 전 주택은행장 장재식, 무등산관광호텔사장 김옥천, 삼양실업사장 강희찬, 미주산업회장 박은태, 대림필름사장 국종남, 예식장경영자 김충현, 전 뉴욕한인회회장 박지원 등 재력가들을 넣었다. 50억 원을 헌납하면 당선이 확실한 후보순위에 들고 40억 원을 내면 밀려났다. 대선 때마다 집권 후에 이권을 보장한다며 재벌들과 기업인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뜯어내 비자금을 조성했다. 지난 71년 7대 대선 때 대통령후보로 출마한 김대중은 럭키재벌 총수 구자경에게 집권 후 제2정유공장건설을 지원할 것을 약속하고 그로부터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던 내화 5억 원을 긁어냈고 한일합섬회장 김한수에게는 마산한영섬유확장허가를 담보로 1억 원을, 삼양그룹총수 김연수에게는 전라도 토착 기업으로 내세워주겠다면서 2억 원을 뜯어낸 것을 비롯해서 재벌들과 대기업 주들로부터 무려 1백여 억 원의 자금을 뜯어냈다. 김대중의 비자금 뜯어내기는 92년의 14대, 97년의 15대 대선 때 절정에 이르렀다. 『14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은 권노갑, 김옥두, 한화갑, 송천영 등 심복들에게 「대선자금 조성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있다. 돈 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특히 재벌들을 잘 구슬려야 한다.」면서 권노갑에게는 삼성, 김옥두에게는 대우, . 이런 식으로 분담까지 해 재벌들과 대기업 인들로부터 막대한 선거자금을 뜯어냈다.』 지난 91년과 92년 대선직전까지 2년 기간에만도 집권 후 특혜보장을 담보로 삼성과 대우, 진로 등 재벌들과 주식회사 한창, 대호건설, 벽산개발, 풍성전기 등 10개 회사로 부터만도 1백34억 원 상당의 대선자금을 뜯어낸 것을 비롯해서 근 8백억 원의 대선자금을 긁어모았다. 특히 15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이 감행한 정치자금염출 행위는 말 그대로 광적이었다. 97년 15대 대선에 출마하면서 김대중은 이번 대선 싸움은 생사를 가름하는 마지막 전쟁이라며 장남 김홍일과 처조카 이형택, 핵심측근인 김원길, 김한길, 재력가들인 김봉호, 김인곤, 경제통으로 알려진 장재식, 박태영으로 대선자금 모금 팀을 구성하고 사조직과 지구당조직은 물론 폭력 조직 배들까지 총 발동해 대선자금을 거두어들이도록 했다. 1982년 김대중은 미국망명 때 전두환에게 미국에서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그 대가로 30만 달러의 돈을 받아먹은바 있다. 92년 대선 직전 그는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 전 평민당 창당자금으로 3백억 원을 받았고 6공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문제로 궁지에 몰렸던 노태우에게 그것을 유보한다는 담보를 주고서도 그에게서 5백억 원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노태우로부터 모두 1천2백여 억 원을 받았다. 60년대 말 업자로부터 엄청난 뇌물을 받아먹고 코카콜라를 끌어들이게 하고는 그것이 문제시되자 재빨리 국회에서 업자를 비판해 이에 분격한 업자로부터 멱살을 잡히고 뺨을 얻어맞은바 있다. 미국에 망명했을 때 김대중은 미국교포들이 광주학살희생자 유족들에게 전해달라고 기탁한 15만 달러와 한국 민주화운동에 써달라고 모금해준 수백만 달러를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고 호화판생활을 해 미국교포사회의 지탄을 받은 적도 있다. 김대중이 87년부터 청와대 권좌에 오르기 전까지 조성하여 친인척명의로 관리해온 비자금은 8천여억 원에 달한다. 청렴결백을 좌우명으로 삼는다며 권좌를 차지한 김영삼이 집권 1년 만에 한국 7대 갑부로, 집권 3년만에는 일약 최대갑부로 둔갑해 도둑왕초의 신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김대중은 도둑왕초로 악명 떨친 김영삼을 아연케 할 정도이다. 집권하자마자 국제통화기금과의 합의사항 이행이란 명분으로 「개혁」의 구호를 들고 재벌들과 기업주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뜯어냈다. 「재벌구조조정」에서 살아남느냐, 죽느냐 하는 기로에서 재벌들은 살아남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저마다 돈뭉치를 들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30대재벌그룹에 속한 H그룹회장은 『재벌구조조정은 경제회생차원이 아니라 재벌들의 목을 비틀어 정치자금을 뺏어내기 위한 수단이다. 김대중은 재벌개혁이란 올가미를 걸어놓고 재벌들로부터 엄청난 돈을 뜯어내고 있다. 나도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없이 1백50억 원을 청와대에 상납하였다』고 실토했다. 기업주들로부터 챙긴 검은 돈만도 5천억 원이 넘는다. 김대중은 구조조정을 한다는 명분으로 기업체들과 은행을 외국투자가들에게 매각하면서 또한 큰 돈벌이를 하고 있다. 김대중은 미국의 에이에스회사가 한국화학의 발전 사업을 헐값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해준 대가로 5백억 원의 사례금을 받았고 한국의 유망 기간산업의 주식을 헐값으로 팔아넘기기로 하고 또한 막대한 사례금을 받았다. 김대중은 국제금융투기수괴로 국제사회에 악명 떨치고 있는 소로스에게 단기 채권시장을 내주고 서울증권을 헐값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해준 대가로 그로부터 4백억 원의 사례금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외국투자가들에게 온갖 이권을 보장해준 대가로 지금까지 받아먹은 돈은 2천억 원이 넘는다. 김대중은 외세에 기업을 팔고 시장을 팔다 못해 우리 영해와 영토까지 팔아 엄청난 돈을 챙기고 있다. 김대중은 지난해 10월 일본상전을 찾아가 독도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황금어장을 팔아넘기는 것을 골자로 한 한일간의 어업협정을 발효시키기로 한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아먹었다. 일본의 재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재경부의 한 고위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한일어업협정의 체결로 막대한 이득을 보게 된 일본의 재계는 어업협정이 정식 발표된 즉시에 김대중의 해외은행 구좌에 수억 달러에 달하는 사례금을 넣어주었다 한다. 김대중은 집권 후에도 광주살인마, 비자금도둑왕초 전두환, 노태우를 잘 보살펴주면서 그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뜯어내고 있다. 김대중은 전두환, 노태우의 비자금문제와 추징금징수를 무마시켜주기로 하고는 그들로부터 각각 2천억 원씩의 사례금을 받았고 정치활동재개를 보장해주고 또한 엄청난 돈을 받아먹었다. 김대중은 지난 1월 추징금도 내지 않고 또 금고이상의 형을 받아 「전 대통령의 예우」를 받을 수 없게 된 특등범죄자 전두환에게 외교관여권을 주어 방일행각을 하도록 한 대가로 5백억 원의 사례금을 받아먹었다. 심지어 김대중 역도는 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금 모금운동」이라는 것을 벌여놓고 거기서도 막대한 돈을 착복하였다. 김대중은 국민들로부터 수집한 금붙이들 가운데 일반적인 금붙이는 금괴로 만들어 팔고 값비싼 금패물들은 그대로 외국의 보석상들에게 넘겨 돈벌이를 했는데 그 금액은 대략 2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예상된다. 인사는 곧 돈줄이었다. 역대집권자들에 의해 행해진 인사권을 이용한 돈벌이는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하에서 더욱 번창해지고 있다. 김대중의 인사를 통한 돈 사냥은 주로 장남 김홍일을 통해 벌어지고 있다. 김홍일은 애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정치권은 물론 군과 검찰, 경찰의 인사권에까지 개입하여 돈벌이를 톡톡히 하고 있다. 장성별 한 개의 공정가격이 1억 원이라는 것은 공개된 비밀이다. 김대중 부자가 군과 경찰인사를 통해서만 착복한 돈이 6백억 원은 넘는다. 김대중은 친족은 물론 처가 족속들까지 발동하여 검은 돈을 긁어모으고 있다. 김대중의 여섯째 처남 이성호는 해외여행 알선업체인 「평화관광」을 경영하면서 김대중을 등대고 해외 특혜여행을 미끼로 여행자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걷어 들이는 한편 유학시절 미국 에리모 대학과 조지 워싱턴대학원에서 친교를 맺었던 인맥들과 짜고 미국현지에 진출한 한국재벌업체들에게 이권을 보장해 준다고 하면서 막대한 돈을 뜯어내 김대중의 금고를 채워주고 있다. 김대중은 이형택과 이세작 등 처조카들까지 발동해 막대한 비자금을 긁어 들이고 있다. 김대중의 처조카인 동화은행 영업1본부장 이형택은 금융계에 손을 뻗쳐 신탁통치로 인해 생사기로에 놓여있는 은행들과 종금사들을 살려주겠다는 담보로 수백억 원의 비자금을 걷어 들였다. 김대중의 둘째 처남 이경호의 차남인 이세작은 변호사의 간판을 걸고 각종 비리에 걸려든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을 살려준 대가로 막대한 돈을 거두어 들였다.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소유한 재산이 9억4천만 원인 것으로 신고했고 대선 후의 재산공개 시에는 8억8천만 원으로 6천만 원이 줄어든 것으로 공개했지만 지금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알려진 것만 해도 1조원이 넘는다. 김대중은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뜯어낸 돈을 스위스와 싱가포르를 비롯한 외국은행들에 있는 자기의 비밀구좌에 입금시켜 놓았는데 그 규모는 10여억 달러에 달한다. 부정부패의 왕초 김대중 역도를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 정치적 안정과 경제와 민생안정도 이룩할 수 있고 깨끗한 정치도 실현할 수 있다. 한국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선전국 주체88(1999)년 7월19일 ------------------------------------------------------ [이제는 나서야 한다]에서 저들이 노략질해간 부채를 우리가 떠안았습니다. 자자손손 빚을 갚아야 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160조의 공적자금, 또 다른 200여조의 국가채무, 100여조의 연기금을 마구 풀어헤쳐 놓고 그 돈을 노략질했습니다. 우리는 이 노략질에 대해 알아야만 합니다. 저들은 돈을 풀어 가장 먼저 금융기관을 국유화했습니다. 은행에 빚을 진 600여 개의 대기업, 중견기업들을 국유화했습니다. 기존의 공기업이 405개입니다. 이 1,000여 개의 대형 기업들이 한 순간에 정부 소유가 됐습니다. 이미 이 나라는 국영공화국이요 사회주의 국가로 변신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경영의 "경"자도 모르는 정치꾼들이 나가 연봉을 170%까지 올리고, 수당을 얼리고, 판공비를 수백 프로씩 올리고, 하청업체 및 조폭들과 야합하여 돈을 털어 갔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공자금을 넣어야 기업이 산다며 떼를 쓰고 있습니다. 공자금을 통제하는 부서도 없습니다. 풀어헤친 공자금은 그의 추종세력에게, 알아서 챙겨가라고 내놓은 돈입니다. 이걸 우리더러 갚으라 강요합니다, 세금을 올리고, 세무행패를 강화하고, 공공요금을 올리고, 거리마다 무인 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우리의 주머니를 털어 가는데 혈안이 돼 있는 것입니다. 전기료를 단 한번에 2배나 올렸습니다. 농촌 심야전기 시설비를 40만원에서 170만원으로 대폭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북한에 전기를 준다 합니다. 기업들이 은행에 담보로 잡혔던 토지와 건물도 정부가 차지했습니다. 정부는 자산관리공사라는 대형 브로커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1,600명이나 됩니다. 이 브로커 기구가 토지와 건물을 헐값으로 인수하여 급매물로 외국에 내놓았습니다. 골드만삭스, 론스타. 리만브라더스, 싱가포르투자청 등 해외 브로커 업체들에 고물가격으로 마구 팔아치웠습니다. 그들은 웬 떡이냐 싶어 이들을 사서 곧바로 다른 외국기업들에 되팔았습니다. 더러는 3배, 더러는 5배의 가격으로 횡재를 했다 합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외국 브로커 업체들이 자기 돈은 10-30%만 대고, 나머지는 국내 은행에서 빌려 가지고 샀다는 사실입니다. 돈을 빌려줘 가면서 외국인들에게 폭리를 준 꼴입니다. 왜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정권에 급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여의도의 60배에 해당하는 금싸라기 땅이 외국인 소유가 됐습니다. 2000년12월27일자 매일경제신문은 "웬만한 빌딩 치고 외국인 손에 넘어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고 보도했습니다. 이면계약의 존재에 대해서도 밝혔습니다. 강남에서 가장 큰 건물인 "현대 I-타워", 서울시청 옆에 있는 "파이낸셜센터", "벽산빌딩", "아시아나항공", "힐튼호텔", SK 증권, 동양증권, 쌍용증권, 고려증권, 대우증권, 여의도 KTB 빌딩, 은석빌딩, 한효빌딩, 대한방적 빌딩, 금호그룹 신사옥, 광주은행 사옥, "시티타워", "현대중공업빌딩" 등, 서울에서 가장 큰 건물들이 외국인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이렇게 팔아넘긴 돈은 두 동강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공식계약서에 표시된 돈은 은행으로 들어갔고, 이면계약서에 쓰여진 돈은 저들의 주머니로 갔을 것입니다. 공식계약서에 잡힌 돈은 외환보유고로 잡혔습니다. 정부는 툭하면 외환보유고가 늘어났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잘난 외환보유고는 바로 이렇게 헐값에 팔아넘긴 잔돈이었습니다. 이면계약서에 쓰여진 검은 돈이 더욱 클 수 있습니다. 개혁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내걸고 기업을 도륙질 했습니다. 빅딜이라는 생소한 낱말로 국민을 혼란시키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기업을 마음에 드는 기업에 합쳐 주었습니다. 워크아웃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말을 듣지 않는 기업을 망하게 하거나, 빼앗았습니다. 빼앗은 기업은 식솔들에 나누어주었습니다. 기업의 살생부까지 만들어 가면서 겁을 주었습니다. 기업의 운명을 거머쥔 실세들에, 알아서 돈을 바치라는 신호였습니다. 기업은 앞을 다투며 저들에게 상납을 했습니다. 저들과 선이 닿는 연줄을 찾아 대표이사 자리에 앉혔습니다. 벤처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이용해 사기도 쳤습니다. 청와대 식솔, 동교동 가신, 국정원, 조폭들이 총 동원되어 어린 벤처 사장들과 사기 친 돈을 나눠 갖았습니다. 그야말로 난장판 놀이를 한 것입니다. 김대중역도의 부정부패행위를 고발한다(한민전) 김대중 역도의 부정부패행위를 고발한다. 「맑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겠다며 출범한 「국민의 정부」하에서 지금 극심한 부정부패의 악취가 풍기고 있다. 고급옷 뇌물사건과 그림뇌물사건, 판사비리사건과 농, 수, 축협 비리사건을 비롯한 각종 부정비리사건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내외를 경악케 하고 있다. 이 땅에 출몰한 역대 부패정권에 이어 드러나고 있는 현 정권의 부정비리작태를 목격하면서 국민들은 김대중 역도를 추악한 부정부패의 왕초로 낙인찍고 그를 하루빨리 권력의 자리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민전 중앙위원회 선전국은 김대중 역도의 부정부패행위를 고발하기 위해 이 글을 낸다. 1 김대중의 부정비리는 어제 오늘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일찍이 8·15전에 일본인 상선회사에 입직해 업주에게 굽실거리며 잘 보인 덕에 돈푼이나 얻어 쓰면서 돈맛을 알게 된 김대중은 일본이 패망한 후 일본인 소유였던 상선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섰다. 그는 온갖 사기협잡의 방법으로 짧은 기간에 「목포의 젊은 실업가」,「재력가」로 등장했다. 한국사회에서 불경기를 모르는 기업, 가장 확실한 돈벌이는 권력을 쥐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아는 김대중은 재빨리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김대중의 근 반세기에 걸친 정치권에서의 「활약」은 돈을 착복하기 위한 부정부패의 행적으로 일관돼 있다. 대선을 치르자면 후보들은 최소한 2천억~3천억 원의 선거자금이 있어야 하고 총선에 출마하려고 해도 수십억 원의 선거자금을 지참해야 하는 것이 한국의 선거풍토이다. 김대중이 8차에 걸친 총선과 4차례의 대선에 출마하면서 쏟아 부은 선거자금은 천문학적 액수에 달한다. 이 엄청난 선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김대중이 저지른 비행에 관해 야당시절 그와 「동고동락」하다가 결별한 김 모 씨는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은 달변과 술수로 사람들의 등을 쓸어주고 간을 빼먹는 흉물이다. 그는 돈을 잡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즘의 화신이다. 그가 집권 전까지 총선과 대선에 뿌린 돈은 적게 잡아도 5조원이 넘는데 이 돈은 다 부정한 방법으로 긁어모은 것이다.』 김대중은 오랜 기간 야당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자기의 심복들로 「가신그룹」을 만들고 그를 통해 엄청난 정치자금, 선거자금을 염출해 냈다. 그 가신그룹의 핵심멤버들은 김상현,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남궁진, 최재승, 장재식, 박태영 등 재력가, 모략가, 사기협잡배들이다. 그들은 김대중의 정치자금획득을 위해 실업계는 물론 언론계, 심지어 해외 교포 계와 외국의 재계에까지 손을 내밀어 많은 돈을 긁어모았다. 김대중은 사조직을 통해서도 수많은 돈을 뜯어냈다. 김대중의 대표적인 사조직으로는 「민주연합청년회」,「민주헌정동지회」,「한국정치문화연구소」등이다.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이 직접 조직 운영한 「민주연합청년회」가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전위대로, 비자금조성의 별동대로 기능해왔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총선과 대선이 있을 때마다 「민주연합청년회」는 30여만 명의 회원들을 내몰아 수많은 선거자금을 모금하군 했다. 야당시절 김대중의 재산을 관리해왔다는 국민회의 최 모 의원은 김대중이 사조직으로부터 걷어 들이는 각종 명목의 자금이 한해에 수백억 원이나 된다고 실토한바 있다. 김대중은 국회의원공천과 각종 특혜제공공약을 비자금조성의 중요한 공간으로 삼았다. 김대중은 야당내 정치지망생들로부터 국회의원공천을 미끼로 총선 때마다 수억 원, 심지어 수십억 원씩의 사례금을 받아 착복하였다. 특히 김대중의 보증만 받으면 국회의원 당선은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하는 호남권에서 공천후보자들로부터의 자금염출은 말 그대로 수탈행위였다. 지난 13대총선때 전북 남원지구에서 지역구후보 첫 내정자는 이형배였다. 그런데 조찬형에게서 4억 원의 뇌물을 받아먹은 김대중이 이형배를 전국구의 당선 불가능한 순위로 돌려놓고 그 대신 조찬형을 내세운 것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13대총선때 김대중이 호남권 후보자들로부터 받아먹은 사례금만도 1백억 원이 넘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김대중의 돈 그러모으기는 14대 총선 때 더욱 노골화되었다. 김대중은 민주당국회의원 후보선정에서 정치활동의 경력이나 능력보다도 공천헌금상납액수를 후보선정기준으로 삼고 민주당의 전국구당선권으로 보는 24번까지의 순위에 전 주택은행장 장재식, 무등산관광호텔사장 김옥천, 삼양실업사장 강희찬, 미주산업회장 박은태, 대림필름사장 국종남, 예식장경영자 김충현, 전 뉴욕한인회회장 박지원 등 재력가들을 넣어 당직자들로부터 비난까지 받았다. 당시 후보공천에 탈락된 이 모 씨는 『그때 50당40락이라는 말이 민주당 안에서 널리 통용됐다. 50억 원을 헌납하면 당선이 확실한 전국구후보순위에 들고 40억 원을 내면 밀려난다는 얘기다. 김대중의 가부장적인 야당에서 전국구나 지역구 후보의 공천을 받자면 김대중에게 수십억 원의 성금을 바쳐야 했다』고 폭로했다. 김대중은 대선 때마다 집권 후 이권보장 담보로 재벌들과 기업인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뜯어내 비자금을 조성했다. 지난 71년 7대 대선 때 대통령후보로 출마한 김대중은 럭키재벌총수 구자경에게 집권 후 제2정유공장건설을 지원할 것을 약속하고 그로부터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던 내화 5억 원을 긁어냈고 한일합섬회장 김한수에게는 마산한영섬유확장허가를 담보로 1억 원을, 삼양그룹총수 김연수에게는 전라도 토착 기업으로 내세워주겠다면서 2억 원을 뜯어낸 것을 비롯해서 재벌들과 대기업 주들로부터 무려 1백여 억 원의 자금을 뜯어냈다. 김대중의 비자금 뜯어내기는 92년의 14대, 97년의 15대 대선 때 절정에 이르렀다. 민주당선거대책본부에서 선거자금 관계를 맡아본 적이 있고 지금은 한나라당의 민주계에 소속돼있는 이모의원은 김대중의 비열한 선거자금 뜯어내기 행위를 고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14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은 권노갑, 김옥두, 한화갑, 송천영 등 심복들에게 「대선자금 조성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있다. 돈 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특히 재벌들을 잘 구슬려야 한다.」면서 권노갑에게는 삼성, 김옥두에게는 대우, … 이런 식으로 분담까지 해 재벌들과 대기업인들 로부터 막대한 선거자금을 뜯어냈다.』 이미 신한국당의 이사철대변인이 폭로한바와 같이 지난 91년과 92년 대선직전까지 2년 기간에만도 집권 후 특혜보장을 담보로 삼성과 대우, 진로 등 재벌들과 주식회사 한창, 대호건설, 벽산개발, 풍성전기 등 10개 회사로부터 만도 1백34억 원 상당의 대선자금을 뜯어낸 것을 비롯해서 근 8백억 원의 대선자금을 긁어모았다. 특히 15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이 감행한 정치자금염출행위는 말 그대로 광적이었다. 국민회의 고위당직자의 말에 따르면 97년 15대 대선에 출마하면서 김대중은 이번 대선싸움은 생사를 가름하는 마지막 전쟁이라며 장남 김홍일과 처조카 이형택, 핵심측근인 김원길, 김한길, 재력가들인 김봉호, 김인곤, 경제통으로 알려진 장재식, 박태영으로 대선자금 모금팀을 구성하고 사조직과 지구당조직은 물론 폭력 조직 배들까지 총 발동해 대선자금을 거두어들이도록 했다. 15대 대선은 지금까지 있어보지 못한 여야 간의 금권대결이었다. 부정선거 고발과 관련해 내적으로 수사를 펴다 청와대의 압력으로 중지한 대검찰청의 한 관계자는 15대 대선에서 한나라당은 2조원, 국민회의는 3조원정도의 대선자금을 쓴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그는 『재력가로 알려진 이모후보는 여권의 후원을 받으면서 단 한 번의 대선에 출마하고서도 빈털터리신세가 되어 주택까지 경매에 붙이고 전세 집에 나앉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였는데 김대중은 대선을 4차례나 치르고도 수억대의 호화주택을 새로 짓고 수백억 원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니 그 돈이 어디서 났겠는가 하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하다』고 말했다. 집권당국은 15대 대선이 『선거사상 가장 깨끗한 선거였다』라고 광고했지만 역대 대선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을 뿌린 최대의 금권선거였고 김대중은 가장 많은 돈으로 대통령 권좌를 매입한 특등 부정선거 사범이었다. 김대중은 돈이라면 살인마의 돈이든 창녀의 돈이든, 도둑놈의 돈이든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를 감옥에 가두고 사형판결까지 내렸던 광주살인마들인 전두환, 노태우에게서까지 막대한 정치자금을 받아먹은 인간추물이다. 1982년 주미대사관이 공개한데 따르면 김대중은 미국 망명때 전두환에게 미국에서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그 대가로 30만 달러의 돈을 받아먹은바 있다. 김대중은 노태우한테 받아먹은 정치자금도 엄청나다. 이미 신한국당 사무총장이었던 강삼재는 『92년 대선직전 당시 청와대수석 비서관이었던 현 청와대비서실장 김중권이 노태우의 지령을 받고 김대중에게 20억 원을 넘겨준 것은 이미 공개된 자료이다』고 하면서 이밖에도 김대중은 전 평민당 창당자금으로 3백억 원을 받았고 6공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문제로 궁지에 몰렸던 노태우에게 그것을 유보한다는 담보를 주고서도 그에게서 5백억 원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노태우로부터 모두 1천2백여 억 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하였다. 김대중은 돈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양심과 의리마저 서슴없이 내던지는 비열한 돈벌레이다. 지난 60년대 말 업자로부터 엄청난 뇌물을 받아먹고 코카콜라를 끌어들이게 하고는 그것이 문제시되자 재빨리 국회에서 업자를 비판해 이에 분격한 업자로부터 멱살을 잡히고 뺨을 얻어맞은바 있다. 미국에 망명했을 때 김대중은 미국교포들이 광주학살희생자 유족들에게 전해달라고 기탁한 15만 달러와 한국 민주화운동에 써달라고 모금해준 수백만 달러를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고 호화판생활을 해 미국교포사회의 지탄을 받은 적도 있으며 야당시절 분수에 맞지 않게 엄청난 돈을 뿌리며 호화생활을 해 야당당직자들한테서까지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김대중이 87년부터 청와대 권좌에 오르기 전까지 조성한 비자금이 1천여억 원이라고 신한국당이 밝힌바 있지만 검찰청 비자금수사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실제로 김대중이 친인척명의로 관리해온 비자금은 8천여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2 김대중의 청와대 입주는 부정부패왕초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다. 한국에서의 대통령권좌는 일확천금의 노른자위다. 이승만으로부터 김영삼에 이르기까지 선행자들이 대통령권좌를 이용해 얼마나 지독스럽게 부정축재를 해왔는가는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가깝게는 「청렴결백을 좌우명」으로 삼는다며 권좌를 차지한 김영삼이 집권 1년 만에 한국 7대갑부로, 집권 3년만에는 일약 최대갑부로 둔갑해 도둑왕초의 신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김대중은 도둑왕초로 악명 떨친 김영삼을 아연케 할 정도이다. 『늦 도둑이 밤 새는줄 모른다.』는 격으로 인생말년에 대통령권좌에 오른 김대중은 부정부패로 날을 맞고 부정부패로 날을 보내고 있다. 『내가 이때까지 여러 차례 감옥 밥을 먹고 5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뻗쳐낸 건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다. 김영삼이 3년 만에 일류갑부가 됐다지만 나는 단 2년 동안에 그 일을 해낼 것이다』이것이 청와대 주인으로 올라앉으며 김대중이 내뱉은 첫 뇌까림이었다. 국제통화기금의 신탁통치는 만 사람에겐 무서운 고통과 재난을 안겨주었지만 그것을 통해 한밑천 잡으려고 별러온 김대중에게는 말 그대로 물방앗간에 물대주는 것과 같은 호기였다. 김대중은 집권하자마자 국제통화기금과의 합의사항 이행이란 명분으로 「개혁」의 구호를 들고 재벌들과 기업주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뜯어냈다. 김대중은 「개혁」의 칼을 먼저 재벌에 대한 구조조정에 들이대었다. 김대중은 「재벌구조조정」이 경제회생을 위한 근본여건의 하나라고 하면서 재벌들에게 부채를 조기상환하고 계열사 간의 상호지급보증을 금지하며 부실기업을 정리할 것을 강요하는 동시에 재벌계열사들을 강제 퇴출시키거나 재벌그룹을 해체시키는 강경조치를 취해 재벌들에 대한 목조르기를 강행하였다. 당국의 「재벌구조조정」에서 살아남느냐, 죽느냐 하는 기로에서 재벌들은 살아남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저마다 돈뭉치를 들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30대재벌그룹에 속한 H그룹회장은 『재벌구조조정은 경제회생차원이 아니라 재벌들의 목을 비틀어 정치자금을 뺏어내기 위한 수단이다. 김대중은 재벌개혁이란 올가미를 걸어놓고 재벌들로부터 엄청난 돈을 뜯어내고 있다. 나도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없이 1백50억 원을 청와대에 상납하였다』고 실토했다.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측근에서 새어나온 말에 의하면 김대중이 경제구조개혁을 표방하고 지금까지 기업주들로부터 챙긴 검은돈만도 5천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김대중은 구조조정을 한다는 명분으로 기업체들과 은행을 외국투자가들에게 매각하면서 또한 큰 돈벌이를 하고 있다. 김대중은 미국의 에이에스회사가 한국화학의 발전 사업을 헐값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해준 대가로 5백억 원의 사례금을 받았고 한국의 유망 기간산업의 주식을 헐값으로 팔아넘기기로 하고 또한 막대한 사례금을 받았다. 김대중은 국제금융투기수괴로 국제사회에 악명 떨치고 있는 소로스에게 단기 채권시장을 내주고 서울증권을 헐값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해준 대가로 그로부터 4백억 원의 사례금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외국투자가들에게 온갖 이권을 보장해준 대가로 지금까지 받아먹은 돈은 2천억 원이 넘을 것이라는 것이 금융권에서 돌아가는 말이다. 김대중은 외세에 기업을 팔고 시장을 팔다 못해 우리 영해와 영토까지 팔아 엄청난 돈을 챙기고 있다. 김대중은 지난해 10월 일본상전을 찾아가 독도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황금어장을 팔아넘기는 것을 골자로 한 한일간의 어업협정을 발효시키기로 한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아먹었다. 일본의 재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재경부의 한 고위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한일어업협정의 체결로 막대한 이득을 보게 된 일본의 재계는 어업협정이 정식 발표된 즉시에 김대중의 해외은행 구좌에 수억 달러에 달하는 사례금을 넣어주었다 한다. 김대중은 집권 후에도 광주살인마, 비자금도둑왕초 전두환, 노태우를 잘 보살펴주면서 그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뜯어내고 있다. 김대중은 전두환, 노태우의 비자금문제와 추징금징수를 무마시켜주기로 하고는 그들로부터 각각 2천억 원씩의 사례금을 받았고 정치활동재개를 보장해주고 또한 엄청난 돈을 받아먹었다. 김대중은 지난 1월 추징금도 내지 않고 또 금고이상의 형을 받아 「전 대통령의 예우」를 받을 수 없게 된 특등범죄자 전두환에게 외교관여권을 주어 방일행각을 하도록 한 대가로 5백억 원의 사례금을 받아먹어 한나라당으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김대중 역도는 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금 모금운동」이라는 것을 벌여놓고 거기서도 막대한 돈을 착복하였다. 한국은행의 고위관계자에 따르면 『김대중은 국민들로부터 수집한 금붙이들 가운데 일반적인 금붙이는 금괴로 만들어 팔고 값비싼 금패물들은 그대로 외국의 보석상들에게 넘겨 돈벌이를 했는데 그 금액은 대략 2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관직이 돈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이미 세상에 공개된 사실이다. 인사는 곧 돈줄이다. 역대집권자들에 의해 행해진 인사권을 이용한 돈벌이는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하에서 더욱 번창해지고 있다. 김대중의 인사를 통한 돈 사냥은 주로 장남 김홍일을 통해 벌어지고 있다. 김홍일은 애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정치권은 물론 군과 검찰, 경찰의 인사권에까지 개입하여 돈벌이를 톡톡히 하고 있다. 장성별 한개 공정가격이 1억 원이라는 것은 이미 공개된 비밀이다. 장성급 승진에서 탈락돼 예비역으로 전역된 이 모 씨는 김대중은 집권해서 군과 경찰에 대한 대폭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여기엔 군과 경찰 수뇌를 호남출신과 심복들로 교체하자는 데도 그 목적이 있지만 그보다는 자기 금고를 늘리자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김대중 부자가 군과 경찰인사를 통해서만 착복한 돈이 6백억 원은 넘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폭로하였다. 세칭 「고급옷 로비의혹사건」의 주범인 김태정을 검찰총장직에서 법무부장관에 발탁하게 됐던 것도 김대중이 그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고 한 짓이란 일설이 돌고 있다. 김대중은 친족은 물론 처가 족속들까지 발동하여 검은 돈을 긁어모으고 있다. 김대중의 여섯째 처남 이성호는 해외여행 알선업체인 「평화관광」을 경영하면서 김대중을 등대고 해외 특혜여행을 미끼로 여행자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걷어 들이는 한편 유학시절 미국 에리모대학과 조지 워싱턴대학원에서 친교를 맺었던 인맥들과 짜고 미국현지에 진출한 한국재벌업체들에게 이권을 보장해 준다고 하면서 막대한 돈을 뜯어내 김대중의 금고를 채워주고 있다. 비자금조성에 혈안이 된 김대중은 이형택과 이세작 등 처조카들까지 발동해 막대한 비자금을 긁어 들이고 있다. 김대중의 처조카인 동화은행 영업1본부장 이형택은 금융계에 손을 뻗쳐 신탁통치로 인해 생사기로에 놓여있는 은행들과 종금사들을 살려주겠다는 담보로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걷어 들였다. 김대중의 둘째 처남 이경호의 차남인 이세작은 변호사의 간판을 걸고 각종 비리에 걸려든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을 살려준 대가로 막대한 돈을 거두어 들였다.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경선당시 소유한 재산이 9억4천만 원인 것으로 신고했고 대선 후의 재산공개 시에는 8억8천만 원으로 6천만 원이 줄어든 것으로 공개했지만 지금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알려진 것만 해도 1조원이 넘는다. 김대중이 오래지 않아 한국 굴지의 갑부서열에 들어설 것이라는 말이 정계와 재계에서 나돌고 있는데 결코 낭설이 아니다. 강도적인 IMF의 신탁통치로 실업홍수가 터지고 가정이 파괴되고 자살대란이 일어나 아우성을 치고 있지만 김대중 일족은 막대한 돈을 탕진하면서 초호화판 생활을 하고 있다. 김대중은 하루가 멀다하게 가신그룹을 불러놓고 먹자판을 벌여놓고 친인척들 역시 하루 수천만 원씩 탕진하며 주지육림에 묻혀있다. 김대중의 연이은 해외행각으로 탕진되는 돈도 헤아릴 수 없다. 김대중은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뜯어낸 돈을 스위스와 싱가포르를 비롯한 외국은행들에 있는 자기의 비밀구좌에 입금시켜 놓았는데 그 규모는 10여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김대중 역도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지른 부정비리에 대해 일일이 다 열거하려면 끝이 없다. 그러나 나타난 사실만을 가지고도 김대중 역도야말로 역대집권자들을 찜 쪄 먹을 극악한 도둑왕초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추악한 도둑이 권좌에 앉아 정치를 하고 있기에 이 땅이 「도둑놈의 소굴」로, 「부정부패의 전시장」으로 세계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국은 IMF의 신탁통치로 망하고 김대중의 부정부패로 망하고 있다.』이것이 국민들의 일치한 평이다. 부정부패의 왕초 김대중 역도를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정치적 안정과 경제와 민생안정도 이룩할 수 있고 깨끗한 정치도 실현할 수 있다. 한국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선전국 주체88(1999)년 7월19일 서 울 DJ의 최후 발악; 내통행위를 통치행위라고! 금강산 사업은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파는 것보다 더 황당한 사업입니다. 20억 달러 이상의 돈이 나갔는데도 국민은 그냥 “퍼주는구나!”하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하지만 국민 몰래 적장과 뒷거래한 5억 달러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5,000만 달러어치는 김정일의 보건식품, 보건기구, 사치품 등 진상품을 사서 바쳤다 합니다. 처음에 비밀거래의 의혹이 일었을 때 그들은 단 돈 1 달러도 몰래 간 돈은 없다며 눈발에 힘을 꼿꼿이 세웠습니다. 이제 전모가 드러나자 저들은 통치행위는 실정법에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말로 얼버무립니다. DJ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서서 마지막 발악을 합니다. DJ는 이 나라를 경제적으로 허물어 놓고 안보전선을 통째로 붕괴시켜 놓았습니다. DJ는 적장과 내통했고, 적장에게 군자금을 보내주었고, 남한사회 대부분을 좌익들이 장악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DJ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는 반드시 법정에 서야 합니다. 그런데 그를 옹호하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민주화세력과 호남세력들입니다. 민주화세력은 DJ의 도움으로 정권과 사회를 장악했습니다, 호남인들은 DJ의 도움으로 신흥부자가 되었습니다. 160조의 공적자금은 그와 그들의 식솔들 그리고 호남 세력들이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민주화세력과 호남인들은 얼굴마저 두껍게 특검을 중지하라며 반기를 들고 나섰습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아직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호남인들의 95.2%가 뽑은 노무현 정권도 특검에 제동을 걸고 나섰습니다. 특검을 맡은 변호사들이 [민변] 출신이라 조사결과에 대해 많은 국민은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민변과 주사파들과는 코드가 맞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특검팀은 이러한 의혹과는 달리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특검 팀에 일단은 찬사를 보냅니다. 만일 특검팀이 대다수 국민의 바람을 등졌다면 이는 또 하나의 사회분란의 요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김대중-임동원-박지원-정몽헌은 법의 심판을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청와대-호남주민-호남정치인-친북언론-김대중이 아무리 떼를 지어 나서도 이들은 반드시 법의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대통령은 헌법 위에 설 수 없습니다. 법 앞에 모든 국민은 동등하며 법 앞에서는 대통령도 국민일 뿐입니다. 민주화세력의 입에서 어떻게 [통치행위]라는 낱말을 뱉어내는지 참으로 해괴합니다. 통치행위라는 말은 반민주 전제군주에 대해 쓰여지는 낱말입니다. 민주화를 내걸며 출세한 사람들이 사정이 좀 다급해졌다 해서 내통행위를 통치행위로 둘러대는 모습은 참으로 해괴하고 역겹습니다. 이번 6.15일 DJ의 방송 출연은 현세의 가장 추한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3. 6. 14 김대중의 출생비밀 「金大中 출생 비밀 10년 추적자」孫昌植씨 죽다 禹鍾昌 月刊朝鮮 부장대우 편집위원 2005-01-17 10:32:37 孫씨의 아버지는 좌익에게 피살되고, 孫씨는 金大中씨를 돕는 과정에서 옥살이를 했다.金大中씨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조사는 엉뚱한 비밀을 드러내었고, 그는 金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훼손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末年은 「출생의 비밀」이란 그늘 속에서 스러져 갔다. 死因은 심장마비 - <月刊朝鮮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생전의 孫昌植씨.> 2004년 11월25일 오후 1시30분쯤, 서울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본점 뒤쪽 길에서 지나가던 한 남자가 갑자기 쓰러졌다. 남자는 일어나지 못하고 길바닥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한 행인이 급히 119에 신고했다. 119 구급차에 실려 서울 강북삼성병원 응급실로 후송된 이 남자는 끝내 소생하지 못했다. 死因은 심장마비. 사망 시각은 오후 3시20분. 亡者의 이름은 孫昌植(손창식·56). 「자유 언론수호 국민포럼」 前 사무총장이다. 그는 모처럼 을지로 입구에 있는 사무실에 나왔다가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이 세상을 하직했다. 亡者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金大中 前 대통령을 비롯한 이른바 「동교동 家臣」들 사이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그가 1988년부터 10년간 金大中 前 대통령의 출생 비밀을 몰래 추적해 그 실체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해 놓았기 때문이다. 비밀리에 이뤄지던 그의 추적 작업은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한길연구회」란 단체가 기관지 한길소식지에 「金大中씨는 金海 金씨가 아니고 諸葛씨다」라고 보도함으로써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일로 당시 한길연구회 간사장이었던 그는 金大中 국민회의 대통령후보 측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를 당해,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 취재 과정에서 기자는 孫昌植씨를 만났다. 10년 동안, 긴장과 불안 속에서 비밀 探査(탐사)작업을 하고, 그 후 1년 6개월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孫씨는 건강을 크게 해친 상태였다. 과중한 스트레스가 심장병을 일으켜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조금만 걸으면 숨이 차는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생활도 말이 아니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5만원의 13평짜리 아파트에서 살다가 이 아파트가 철거대상이 되자, 좀 더 허름한 서울 시내 모처에서 살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추적 작업은 계속되었다. 그의 추적 작업을 검증하기 위해 기자는 2001년 여름, 그와 함께 金大中 前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 일대를 둘러보기도 했다. 50代 후반의 나이에 건강도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추적 작업을 책으로 출간하는 것이 孫씨의 숙원이었다. 한 인간의 家系(가계)를 폭로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대통령 후보로 나온 모든 사람들의 家系를 조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가 10년의 세월을 바쳐 왔던 비밀 탐사작업의 종착역은 국민들에게 지도자감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客死했다. 다음의 글은 기자가 생전의 孫씨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金大中 선생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려고 시작했다』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 내막을 추적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朴正熙 대통령이 충복 金載圭(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逝去(서거)함으로써 민주화를 위한 바람이 거세게 일던, 이른바 1980년 「서울의 봄」이 오면서 저는, 제가 존경하는 金大中 선생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10일자 신문을 보면서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 날짜 조선일보, 동아일보, 대구매일신문 등 3개 신문의 정치면에 「金大中씨는 金海 金氏가 아니라 尹씨라는 주장이 김해 김 씨 문중 제사에서 거론되었다」는 기사가 실린 것입니다. 선생님이 金海 金氏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 「尹씨」라니요. 선생님에게 대통령이 될 찬스가 오니까, 경상도 사람들이 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별의별 음해를 다 가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명을 바쳐서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해 드려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孫씨는 문제의 기사를 보여 주었다. 기사 내용은 이랬다.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金庾信(김유신) 장군을 위한 제사인 金山祭가 1980년 5월9일 경주 인근인 興武王陵(흥무왕릉·김유신 장군묘)에서 열렸다. 金鍾泌 공화당 총재는 初獻官(초헌관: 제사에서 첫 술을 따르는 사람)으로 금빛 모자에 남빛 도포의 朝服冠帶(조복관대) 차림이었으며, 金大中씨는 일반 祭官(제관)으로서 검은색의 제복을 입었다.(중략) 이날 아침 大祭가 열린 興武王陵 앞에는 「金大中」 아닌 「尹大中」이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려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좌익들에게 맞아 죽은 아버지 기사를 읽고 나자 孫씨는 이렇게 말했다 『제 고향은 전남 완도군 고금면입니다. 金大中 선생의 고향인 하의도에서 뱃길로 한 시간 거리입니다. 恨서린 전라도 사람으로서, 또 같은 섬마을 출신으로서 선생님의 누명을 벗겨드리는 일이야말로 저의 숙명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누가 권해서가 아닙니다. 출생에 관한 흔적은 고향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다녔던 학교, 어릴 적 친구, 동네 어른들이 다 증인입니다. 저는 이들이 말하는 내용을 녹음해서 있는 그대로를 공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孫씨는 계속해서 말했다. 『姓氏 문제는 金大中 선생의 정치 행보에서 아킬레스건입니다. 자기 姓氏와 관련된 더러운 모함이 제기되면 본인이 직접 해명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金大中 선생은 너무나 미온적인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이는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적게 얻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수십 년간 그를 따르는 동지들에게 허탈감을 안겨 주는 사안이었습니다. 본인이 못한다면 그를 대신하여 그의 政敵들에게 모함의 추잡스런 실체를 밝혀 줘야겠다는 것이 제 탐사 작업의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제 어머니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는 6·25 사변 중에 빨갱이들 손에 죽었습니다. 나이 마흔에 청상이 된 어머니는 저 하나를 보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金大中씨를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하던 저에게 「사상도 온전하지 않은 金大中이를 따라다니는 것은 무덤을 파는 격이니 제발 조심하라」고 신신 당부를 하셨습니다. 저는 이 작업을 통해 金大中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모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 앞에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孫昌植씨는 누나만 일곱인 집안의 외아들이다. 그의 아버지(孫貴峰)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건너갔다가 광복 직후에 귀국해서 뒤늦게 아들을 보았다. 孫씨 아버지는 孫씨가 태어난 지 2년 후, 6·25 혼란기에 마흔여섯이란 젊은 나이로 지방 빨갱이들에게 타살되었다. 집안의 代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 孫씨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친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일본에서 鐵공장에 다니며 고물상을 했다고 합니다. 돈도 꽤 벌어 일본에 온, 완도 출신들에게 학비를 지원했다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도움 받은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귀국 후엔 면장, 군수 등 지역 유지들과 어울리며 지역 사회를 살리기 위해 주민 계몽운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6·25 동란 때 저는 세 살이었기 때문에 사연을 알 수 없었습니다. 고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완도중학 2학년에 다닐 때, 하루는 만취한 외삼촌이 잠자는 저를 깨워 바닷가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외삼촌은 완도군에서 오랫동안 조선일보 지국장을 했던 분입니다. 외삼촌은 저를 보고 「네 아버지는 내가 죽였다」고 하면서 막 우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내가 너한테 죽을죄를 지었다」며 그냥 우는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니까 저로서는 세상물정을 모를 때였죠. 궁금해서 호적을 살펴보았습니다. 호적에는 아버지가 1949년에 病死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물으면 한숨만 쉬면서 「억울하게 당하지 말고 살아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그 말이 그 당시 제 가슴속에 늘 맴돌았습니다. 대학 입학 후, 누님으로부터 비참했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처음 들었습니다.』 『범인들을 처형하면 더 많은 원수가 생긴다.』 6·25 전쟁 중에 완도군을 점령한 지방 좌익들이 시골 사람들을 계몽하는 일을 했다는 이유로 孫씨의 아버지를 잡아다 나무에 매달아 놓고는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죽창, 몽둥이 등으로 타살했다는 내용이었다. 孫씨 외삼촌 두 사람도 이 일에 가담했다고 한다. 끔찍한 이 사건이 있은 지 3일 후, 완도는 해방되었고, 孫씨 아버지 살해에 가담했던 동네 주민 27명은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체포된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되었습니까. 『어머니의 恨이 거기에 있습니다. 당시 완도 경찰서장이 어머니 사촌 여동생의 남편이었습니다. 나중에 변호사까지 지낸 분이지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를 업고 완도경찰서로 찾아가 그분에게 동네 사람들은 한 명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사정을 했답니다. 그것은 저 하나만은 꼭 살려야겠다는 어머니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완도경찰서장에게 이렇게 호소했다고 누님이 말해 줍디다. 「내 아들은 원수가 27명이다. 나라에서 이놈들을 전부 사형시키면 이들의 자식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는 이 어린 새끼 하나 키우며 살아야 하는데, 이놈들을 전부 죽이면 내 아들은 저들에게 딸린 수십 명의 자식들한테 원수가 된다. 이 아들 키우면서 절대 敵을 만들지 않고 살 테니 저들을 단 한 명도 죽이지 말아 달라」 어머니의 이 호소로 동네 사람 27명은 무사히 살아났다고 합니다. 제가 일곱 살 때의 일로 기억이 선명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마을의 조그만 외길을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수염을 길게 기른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저를 보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나이 어린 저를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참으로 의아스러웠습니다. 마을 노인들이 저를 보면 고개를 숙이고 다녔던 것도, 외삼촌이 어린 저를 붙들고 울었던 것도 다 제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비만 오면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널려 있는 곡식부터 걷어 주고 자기 집 일은 나중에 할 정도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그런 좋은 일을 하고도 어머니는 그 사실을 자랑하거나, 그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윗사람 노릇하기보다는 항상 아랫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후배나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양보하며 살았습니다.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베풀며 사는 것이 편하지, 가진 자의 것을 뺏거나 약한 자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1971년 大選 때 金大中 후보를 돕다 완도중학을 졸업한 孫씨는 완도 수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光州로 나가 숭의실업고교로 전학했다. 孫씨는 1968년 조선大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누이를 통해 들은 것이 대학 입학 후였다. 대학생인 그는 실의에 잠겼다. 못 배운 사람을 가르쳤다는 것이 죄가 되고, 6·25 전쟁 중에 좌익 손에 죽은 아버지를 「1949년에 病死」한 것으로 허위 기록하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공부가 싫었고, 사람들의 위선적인 행동이 미웠다고 한다. 그는 학교에 가지 않고 半건달 생활을 1년간 하다가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그는 고향에서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4H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완도군 4H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1970년엔 가정을 꾸리고, 완도 특산물인 해태(김)를 수집해 일본에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 이듬해 그의 운명을 뒤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1971년 대통령 선거였다. 孫씨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던 金善太(김선태)씨가 농촌의 젊은 지도자인 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완도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金善太씨는 야당 대통령 후보 金大中씨의 당선을 위해 뛰고 있었다. 金善太씨는 전남 보성·장흥·강진·해남 지역의 유세 독찰반 책임자였다. 스물세 살이었던 孫씨는 사업을 잠시 접고, 신민당 완도군당 선전부장 겸 金善太씨 보좌역이 되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金大中씨는 공화당의 朴正熙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가 家産을 온통 쏟아 부은 해태 사업도 망해 버렸다. 실의에 빠져 방황하던 그는 친지 소개로 대구에 있는 신성무역이라는 무역회사에 입사했다. 1972년이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 大邱에 있는 공장에 공원 겸 견습사원으로 들어갔다. 신성무역은 對日 「홀치기」 무역회사였다. 홀치기는 얇은 비단에 각종 문양을 새긴 후 염색한 옷과 의복을 말하는데, 손으로 한 바늘씩 정성스럽게 짠 우리나라 제품은 일본 상류사회에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는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공휴일도 일요일도 없이 근무했다고 한다. 이 무렵 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공장 가동에 필요한 벙커C油를 구하기 위해 全직원들이 외지에 출장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는 대구에서 사귄 친구들을 통해 油公 대구출장소장을 소개받았다. 그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호소했다고 한다. 『소장님, 신성무역은 좌절한 제 인생을 구해 준 회사입니다. 이 회사에 저는 꼭 報恩(보은)을 하고 싶습니다. 말단 사원인 제가 사장님과 간부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油公 대구 소장은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봉투 한 장을 주었다. 『봉투 속에는 기름 한 차를 살 수 있는 주유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기름 한 차를 몰고 회사 정문에 들어가니 간부들이 문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장간 직원들이 1.8ℓ짜리 기름 한 통을 겨우 구해 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일로 회사의 인정을 받았죠. 다음날엔 입사 후 처음으로 회사의 최고 어른인 사장님도 뵈었습니다. 당시 郡守 월급이 1만5000원인데 저는 3만원을 받았습니다. 밤에는 大邱 계명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적을 두고 못 다한 대학 공부도 마쳤고요. 1974년부터는 대구 친구들의 도움으로 밤마다 기름 장사를 하면서 巨金 500만원을 벌었습니다. 날려버린 家産을 거의 보충했죠. 아버지 제사 지내러 고향 갈 때는 비행기를 타고 다녔습니다. 신성무역 일본 교토 지점장을 지내고 나서 정치를 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6년 정도 회사원 생활을 하였습니다』 1978년, 그는 金善太씨 권유로 정치판에 복귀했다. 金善太씨가 梁一東씨와 함께 통일당을 만든 때였다. 그는 인권 부국장을 맡았다. 金相賢씨가 만든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부장을 맡아 「동교동」과도 인연을 맺었다. 金大中씨가 金씨가 아니고 尹씨라는 말에 분노해 출생 내막을 밝혀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본격적인 야당 당료 생활을 시작하던 이 무렵이었다. 李姬鎬 여사가 선물한 벙어리장갑 결심은 했지만 孫씨는 바로 金大中씨 고향인 하의도로 내려갈 수 없었다. 光州사태와 관련해 불법 유인물을 살포한 혐의로 1980년 5월 말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보도 통제가 되었던 光州의 참상을 서울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선배 李京植씨 등 동지들과 함께 유인물을 만들어 신촌·청량리·잠실·영등포 일대의 전화 부스와 건물 옥상에 뿌렸는데, 저는 신촌 일대를 맡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해 구속된 金弘一·韓和甲·金玉斗·咸允植씨 등이 수감돼 있었다. 孫씨는 정통 동교동 맨은 아니었지만 光州사태 관련자여서 이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金大中씨는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었지만 李姬鎬 여사가 아들 金弘一씨 옥바라지를 위해 대전교도소에 자주 면회를 왔습니다. 李姬鎬 여사는 저에게도 光州사태로 고생한다며 겨울철엔 귀마개하고 벙어리장갑을 넣어 주었습니다. 참 고마워서 고맙다는 편지를 써 보냈더니 李여사가 자필로 답장도 보내 주었습니다. 金弘一씨는 저와 동갑(1948년생)이어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홍일씨는 마른 오징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뚱뚱한 사람이 운동은 안 하고 오징어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일본인 시바다 기자를 만나다 출소 후 그는 생활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양복 재단사인 매형과 합자하여 서울 종로에 양복점을 냈다고 한다. 거기서 번 돈으로 그는 서울 관악구에 있던 미원 대리점을 인수했다. 전국 270개 대리점 중에서 판매율이 꼴찌에 가깝던 이 대리점을 그는 인수 1년 만에 전국 10위권으로 올려놓았다고 한다. 강남과 과천 일대를 발로 뛰며 시장을 개척한 결과였다. 그의 활약상은 미원 社報에도 소개되었고, 그는 판매 교육 강사로 강연도 다녔다.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그는 정치판에도 열심히 나갔다. 번 돈으로 돈 없는 야당 의원들을 지원하기도 하고, 야당에서 하는 일을 위해 돈도 내놓았다고 한다. 이 시절 그는 「한국 정치범 동지회」 대변인을 맡았고, 1985년 民推協 발족 때는 인권국장에 기용됐다. 데모하다 구속된 학생이나 야당 당원들에게 인권변호사를 소개하는 것이 인권국장의 일이다. 쫓기고 숨어 지내는 야당 시절이었지만 별도 사업체를 갖고 있던 그는 항상 넥타이에 정장 차림을 하고 다녔다. 잘 나가던 그는 1987년 후반, 몇 억원 어치의 물건을 팔면서 받았던 어음이 부도가 나면서 졸지에 망했다. 부도를 막기 위해 집도 내놓았다. 그가 평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있던 때였다. 부도 수습을 위해 정치는 뒷전이었다. 겨우 빚을 수습한 孫씨는 휴식과 새로운 충전을 위해 그동안 미뤄 왔던 하의도行을 결심했다고 한다. 하의도에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기 위해 그는 맨 먼저 일본 산케이(産經)신문 한국 특파원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기자를 찾아갔다. 시바다 기자는 「金大中의 좌절」이란 책에서 金大中씨의 실제 아버지는 尹모씨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孫씨는 시바다 기자를 통해 제보자들의 이름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시바다 미노루 기자의 사무실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있었다. 孫씨는 사전 연락도 없이 사무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런 돼먹지 않은 글을 쓴 사람이 당신이오.』 孫씨의 흥분한 모습에 놀란 시바다 기자는 유창한 한국말로 『진정하시고 찾아 온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국 정치범 동지회 대변인 孫昌植이란 사람이오. 대통령에 두 번씩이나 출마한 야당 지도자 金大中 선생의 출생이 의혹스럽다며 新군부 구미에 맞는 이런 얼토당토 않는 글을 쓴 것을 보면 당신은 全斗煥 소장의 1등 첩자임에 틀림없소. 당신을 국제 법에 의하여 제소하겠소.』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소?』 『당신에게 이따위 허위 정보를 제공한 취재원을 가르쳐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행동을 국제 사회에 폭로하겠소.』 『취재원은 알려 줄 수 없고, 金大中씨 호적 초본은 드릴 수 있소』 더 따져보았자 소득이 없다고 판단한 孫씨는 시바다 기자가 건네주는 호적초본을 받고 사무실을 나왔다고 한다. 孫씨는 시바다 기자가 쓴 「金大中의 좌절」이란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金大中씨 家系와 만나야 할 사람들의 윤곽을 파악하는 한편, 하의도 출신의 金海 金씨로 金大中씨와 같은 집안인 金敬仁(김경인) 前 의원을 수시로 찾아갔다고 한다. 『金敬仁 前 의원은 金大中씨보다 나이가 두 살 정도 어리고, 초등학교는 목포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木浦에서 8대, 9대 국회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문중 사람들의 근황과 하의도 사정에 밝았습니다.』 대충의 윤곽을 파악한 孫씨는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上衣(상의) 윗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소형 녹음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준비를 마친 孫씨는 1988년 4월, 난생 처음으로 하의도를 찾아갔다. 세 개의 녹음기를 준비하다 ―어떤 방식으로 탐사를 하였습니까. 『낚시꾼 차림으로 변복하여 金大中씨 출생지인 전남 신안군 하의島와 그 인근 섬인 상태도·하태도·장병도·옥도 등지를 찾아가 그곳에 사는 村老들의 말을 녹음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쉽게 입을 열었습니까. 『보통 경계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기 몇 년 전에 젊은 사람 하나가 면사무소에 찾아와 金大中씨 호적을 떼려다 뺨까지 맞았고, 객지 사람들에게는 金大中씨 얘기를 하지 말자는 동네 회의까지 있었다고 합디다. 金大中씨 호적서류를 떼기 위해 하의면사무소 직원을 인근 다방으로 불러내어 차 한 잔을 사주고 부탁하다가 저 역시 면박만 당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가 하의도에서 맨 처음 만난 사람은 金大中씨의 하의보통학교 동창생이었습니다. 그는 金大中씨의 어릴 적 이름이 윤성만이라는 정도만 이야기했고, 제가 「그 윤성만이가 오늘날 그 유명한 金大中 선생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언제였습니까.」라고 묻자, 그때부터 입을 다물고는 가버렸습니다. 그 노인을 통해 알게 된 다른 동창생을 찾아갔더니 金大中씨와 관련된 질문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보고 『당신, 中情(중앙정보부) 사람 아니냐.』고 따지듯이 묻다가, 제가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어느 신문사 기자냐』고 물었습니다. 이 노인을 통해 얻은 유일한 수확은 金大中씨가 1923년생 돼지띠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탐사작업은 동네 사람들의 경계심으로 소득 없이 끝났지만, 木浦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만난 장사꾼들로부터 하의도 일대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의도 인근 섬에서부터 서서히 시작해 실체에 접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녹음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소형 녹음기 한 개로는 준비 부족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문부터는 녹음기 세 개를 준비했습니다. 하나는 상의 윗주머니에 넣고, 또 하나는 소형 라디오 속에 숨기고 나머지 한 개는 舊形(구형) 핸드폰처럼 개조했어요. 시험을 해보니 한두 개는 항상 녹음이 되었습니다.』 金大中 생모의 첫 남편은 제갈 성조
―출생의 내막을 개략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金大中 대통령의 생모는 張鹵島(장노도·나중에 장수금으로 개명)라는 분인데, 1893년 전남 신안군 하의면 오림리에서 張之淑의 장녀로 태어나 1971년에 사망하였습니다. 호적에 따르면 그분은 열여덟 살이 되던 1911년에 하의면 大里(대리)에 살던 諸葛成祚(제갈성조)라는 사람과 혼인을 하는데, 이 남편이 요절하였습니다. 문제는 金大中 대통령 어머니의 「호적상 첫 남편」 諸葛成祚의 호적 서류가 법원과 면사무소 양쪽에서 모두 폐기되고 없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출생에서부터 사망까지를 기록하는 호적 서류는 그 중요성 때문에 행정부(본적지 관할 面사무소)와 사법부(본적지 관할 법원) 양쪽에서 영구 보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張鹵島가 諸葛成祚와 혼인했다는 사실은 하의면 사무소에 보관 중인 諸葛成祚 부친의 제적부에 남아 있습니다. 호적은 맨 첫 장에 호주 이름이 나오고 이어서 출생순서에 따른 자식들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諸葛成祚에게는 형이 한 명 있었습니다. 諸葛成祚 부친 호적에는 諸葛成祚 형과 관련된 기록은 남아 있지만, 묘하게도 諸葛成祚 부분만 毁棄(훼기: 특정 페이지가 사라지고 없음)돼 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諸葛成祚 부분만 찢어 버린 것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張鹵島가 諸葛成祚의 妻고, 諸葛成祚가 죽은 뒤 張鹵島가 그의 부친 張之淑 호적에 再입적되었다는 단 한 줄의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오른쪽 사진 참조). 이를 근거로 하여 저는 하의면을 관할하는 光州지방법원 木浦지원에서 보관 중인 諸葛成祚 부친의 호적 원부 및 除籍(제적) 원부에 대해 「인증 등본」을 신청하였습니다. 「인증 등본」은 법원에 보관 중인 서류가 官에서 인증하는 절차를 거쳐 발급되었음을 말합니다. 이 신청에 대해 光州지법 木浦지원은 諸葛成祚에 대한 서류가 폐기되었다고 통보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金大中 대통령의 경우, 어머니의 호적상 첫 남편 호적서류가 법원에서는 폐기해 버렸고, 면사무소에는 부친 제적부에 일부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결혼과 함께 부모 호적에서 제적된 張鹵島가 1925년에 아버지 張之淑 호적에 再입적되었다는 점입니다. 1925년이라면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과 맞물립니다. 金大中 대통령의 호적에 의하면, 그는 외할아버지 張之淑에 의해 檀紀(단기) 4257년(서기 1924년) 출생신고가 되었습니다. 출생신고를 외할아버지가 했다는 것은 부친의 존재가 호적에 이름을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金대통령은 생모 張鹵島가 1960년에 金云式과 혼인하면서 金云式의 「嫡出子(적출자)」가 되었습니다. 1960년이라면 張鹵島의 나이 쉰일곱일 때의 일입니다. 스물여덟 명의 증언을 비밀 녹음 동네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諸葛成祚는 결혼하고 몇 년 후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여자는 出嫁外人(출가외인)이라 하여 시집을 가게 되면, 남편이 죽더라도 시댁의 귀신이 되는 게 옛날 풍습입니다. 金대통령의 어머니도 남편 사망 후 계속 시댁에서 살았는데, 시숙(남편의 형)이 한 분 있었습니다. 이 시숙이 울타리 하나를 담장으로 하여 제수와 나란히 살면서 홀몸이 된 제수를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諸葛成祚 사망 후에서 시작해 張鹵島가 친정 호적에 재 입적되는 1925년까지가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을 둘러싼 미궁의 세월입니다. 金대통령의 초등학교 동창생들과 金대통령 문중 사람에 따르면 金대통령은 돼지띠(1923년생)라고 합니다. 金대통령 본인도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돼지띠인 내가 뱀띠인 朴正熙 후보를 잡아먹을 수 있다」며 돼지띠라고 말했습니다. 金대통령 호적을 보면 알겠지만, 기재 내용을 정정하는 도장이 무려 아홉 개나 찍혀 있는데, 이것만 봐도 출생 내막이 복잡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왼쪽 사진 참조). 하의도 일대 村老들에 따르면 金대통령이 출생하기 얼마 전에 張鹵島는 시댁에서 멀리 떨어진 후광리에서 소금 장사들을 상대로 주막집을 차렸답니다. 이 주막집에서 金대통령이 출생했습니다. 하의도에 지어 놓은 金대통령의 生家가 이 주막집입니다. 주막집 시절에 金 前 대통령의 어머니는 尹모씨와 상당 기간 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金대통령의 어릴 때 이름이 윤성만이라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金대통령 어머니는 尹모씨와 살 때, 주막집에 드나들던 하의도 부자 金云式을 알게 되었고, 金云式이 마련해 준 집에서 살다가 1960년에 金云式과 정식 혼인신고를 합니다. 金云式은 金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입니다. 金云式에게는 본처가 있었습니다. 본처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大本(호적상 이름은 大本인데, 비석에는 大奉이라 적혀 있고 동네에서도 대봉이라고 불렀음)씨가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신고된 사실을 알고, 金大中씨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면서 동네가 시끄러워지고, 동네 사람들이 출생의 내막을 알게 됩니다. 저는 金대통령의 생모 張鹵島 집안사람과 張鹵島의 「호적상 첫 남편」 諸葛成祚네 사람들, 그리고 金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 金云式 문중 사람들과 張鹵島와 일시 동거했던 尹모씨 친척들을 만났습니다. 1950년, 60년대에 하의도 面사무소 호적계에 근무했던 직원들도 접촉했습니다. 이 가운데 스물여덟 명의 말을 비밀 녹음했습니다.』
金大中을 죽이려한 그의 이복 형 ―金대통령의 생모와 일시 동거했던 尹모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몇 년 전에 세상을 떴는데, 가정적으로 참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妻복도 없고, 아들복도 없었습니다. 아내를 얻기만 하면 딸만 낳고 죽어 버려 세 번 결혼에 딸이 여섯이나 되었답니다. 그런 형편이었던 터라 주막집 여주인 張鹵島가 아들을 낳자, 尹성만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겁니다.』 ―金대통령 호적에는 尹모씨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요. 『친척분 말은, 그때 尹모씨에게는 장성한 딸들이 있었답니다. 딸들은 바람기 문제로 아버지와 자주 다투었다고 합니다. 「이 아들이 과연 아버지 자식이 맞느냐」고 따지기도 했다는 거지요. 또 하나 이유는 尹모씨의 벌이가 시원찮아 주막집 아낙 張씨와 싸움이 잦았다고 합니다. 자식들 공부도 못 시키고 호적에도 올리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살아가던 중 金云式 영감이 나타난 것입니다. 尹모씨 딸들은, 자기 아버지가 金大中씨를 호적에도 못 올려 주고 학교에도 못 보내 준 게 두고두고 죄라고 합니다. 그 바람에 尹씨니, 金씨니, 諸葛씨니 하며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金云式씨는 어떤 분입니까. 『그분의 큰아들 大本씨와 친구라는 사람에 의하면, 돈 많고 술 좋아하고 노래 잘하고 잘 놀았던 멋쟁이라고 합니다. 金云式 어른이 주막집을 드나들면서 尹모씨가 꼼짝을 못했다고 합니다. 金云式 어른이 매일 주막을 차지하고 앉아서 술 먹고, 자고 가기도 하니까 누가 술집에 옵니까. 그래서 張씨는 술집을 그만두고 金云式 어른이 차려준 세 칸짜리 집에서 金大中씨 형제들을 키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金大中씨 어머니를 위해 木浦에 여인숙을 차려준 분이 金云式 어른입니다』 ―金云式씨 부인에게는 기분 나쁜 일이었을 텐데요. 『남편이 저지른 일인데 어쩔 수 없이 큰집, 작은집하며 살았답니다.』 ―金云式씨의 큰아들과 金대통령의 사이는 어땠습니까. 『어릴 때는 나쁘고 좋고 할 게 없었는데, 金云式 노인이 1960년에 본처와 이혼하고 張鹵島와 혼인신고한 사실을 面사무소 직원으로부터 전해듣고는 그때부터 金大中씨를 죽이려고 했답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고, 집에 불을 지른다고 고함치면서 자기 아버지까지 때려, 동네 사람들이 말리느라고 난리였답니다. 大本씨는 식칼을 들고 몇 차례나 木浦에 있던 金大中씨를 쫓아갔답니다. 그럴 때마다 金大中씨는 목포 선창가에 지프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형을 술집으로 데리고 가, 술을 사주었답니다. 大本씨는 목포 여관에서 며칠씩 머물다 동생이 돈을 듬뿍 주면 그제서야 하의도에 내려가, 낮부터 저녁까지 허구한 날 술만 먹었답니다. 그러니 그 집이 온전할 리가 없지요. 몇 해 못 가서 大本씨는 술병이 나서 어머니,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 말았습니다.』 주막집에서 있었던 일 ―金云式의 말년은 편했습니까. 『1974년에 돌아가셨는데 늙어서 설움을 많이 받고 살았답니다. 金大中씨 어머니한테 천덕꾸러기 대접받으며 서울 동교동 집을 다녔다고 합니다. 영감(金云式)이 동교동에 가서 소파에 앉아 있으면 張鹵島는 「뭐 한다고 여기까지 왔소. 당신이 대중이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또 찾아오냐」며 무안을 주었답니다. 그러다가 며느리(李姬鎬 여사)가 봉투에다 몇 만원을 넣어서 탁자에 올려놓으면 그걸 들고 슬그머니 내려오고 그랬다는 겁니다.』 ―金대통령은 어머니가 金云式과 살기 전에 태어났으니까 尹씨가 맞겠네요. 『尹씨 친척 분을 만났더니, 尹씨 생전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金大中이는 자기하고 살기 전에 주막집 아낙이 밴 아기인데 자기하고 살면서 낳았고, 그(金大中)의 동생은 자기하고 살면서 생겼으니까 자기 아들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金대통령이 諸葛씨라는 근거가 그것입니까. 『하의면에 살고 있는 나이 많은 어른들은 다 諸葛씨라고 했고, 金海 金씨 문중 어른들도 諸葛씨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諸葛成祚란 사람의 집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형과 동생이 나란히 살았는데, 동생 諸葛成祚가 요절한 뒤 시댁에 살고 있던 제수를 시숙이 돌본다고 하면서 제수 집을 드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시숙이 제수를 위해 시댁에서 멀리 떨어진, 뻘이섬 또는 봉도라고도 하는 鹽田(염전) 옆 부둣가에 주막집을 차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주막집에 시숙 친구가 되는 尹모씨가 살게 되었는데, 석 달인가 넉 달 만에 애기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애가 金大中씨라는 것이 金海 金씨 문중 어른의 말입니다. 아들이 귀한 尹모씨가 자기의 성을 따서 윤성만이란 이름을 지어 주긴 했지만 실제로는 諸葛씨라는 것이지요.』 ―諸葛씨 쪽에서도 그런 사실을 인정합니까. 『70세 후반의 諸葛 家(가) 할머니로부터 똑같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열 살 때, 시숙이 제수씨 방에서 나오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본 것만 몇 번 된다고 하였습니다. 열 살 때 일을 어떻게 지금까지 기억하느냐고 저도 추궁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 말은, 그 때 열 살이면 밥도 하고, 애도 보는 나이였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열 살쯤 더 먹은 언니도 시숙이 제수씨네 방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했다고 그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張鹵島는 시댁을 떠나 뻘이섬에 주막을 차렸답니다. 그 할머니가 클 때는, 여자들끼리 모이면 諸葛成祚의 형이 金大中씨 아버지라고 소문이 났다고 했습니다.』 ―諸葛씨 사람들은 지금도 하의도에 살고 있습니까. 『諸葛成祚의 형은 1958년에 고향을 떠나 내륙 모처로 이사 갔습니다. 제가 그곳까지 찾아가 그분 후손들을 만났지만 전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증언자들은 모두 생존해 있습니까. 『1999년 정초에 네 명이 사망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金弘一에게 진실을 이야기하다 孫씨는 「金大中 출생비밀」의 탐사작업을 기록한 녹취록을 기자에게 보여 주었다. 녹취록에는 孫씨가 만났던 사람들이 A노인, B씨 등 익명으로 기록돼 있고, 그 옆에는 성별, 나이, 만난 날짜가 적혀 있었다. 200자 원고지 500장 분량의 방대한 기록이었다. 『이 녹취록은 법원에 증거로 제출하기 위해 제가 3회에 걸쳐 다시 듣고 확인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당사자들은 제가 녹음하는 줄도 모르고 말했기 때문에 이 녹취록이 공개될 경우, 행여 불이익이나 탄압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급적 실명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이와 사는 동네 정도는 표기하고자 하였으나 하의도 일대가 워낙 작은 동네이다 보니 금방 소문날 것 같았습니다. 사투리는 가능한 살렸습니다. 생략된 부분은 취재원 보호를 위하여 옮기지 않았고요. 녹취록 원부는 CD(콤팩트디스크)에 수록해 놓았고, 녹음테이프는 외국에 거주하는 친구의 은행 비밀금고에 보관돼 있습니다. 저는 1심 재판에서는 이 녹취록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金大中 대통령 측에서 제가 한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송을 취하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되자 저도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항소심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했는데 증거 채택이 되지 않았습니다. 증거로 채택되면 재판기록에 첨부돼 영구 보존되고 열람이 가능합니다. 아마 재판부로서는 이 점을 우려했던 것 같습니다』 ―「金大中 출생비밀」에 대한 탐사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동교동에서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 작업의 결과를 혼자만의 비밀로 영원히 간직할 것인지, 아니면 金대통령에게 直言하여 뒤늦게라도 진실을 밝히도록 할 것인지 하는 문제로 고민하던 끝에 목포에 거주하던 하의도 출신 사업가를 만났습니다. 金海 金씨 문중 사람 중에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중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친구가 金大中씨는 諸葛씨라고 하는 말에 격분해 그 친구와 대판 싸움을 벌였고, 그 뒤 동네사람들이 쑥덕거리는 것을 알고 어른들께 사실대로 바로잡자고 건의했다가 야단맞은 일도 있는 분입니다. 그분이 그러더군요. 「이 문제는 본인과 무관한 부모 책임이다. 따라서 金大中씨 스스로, 우리 어머니는 참 불행했고 나도 불행했다라고 국민에게 솔직하게 얘기해야 한다. 어쩌면 귀싸대기를 맞을 수도 있겠지만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많은 내용을 알고 있는 당신이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겠다는 당초의 목적은 실체에 접근할수록 본 궤도를 벗어나 버렸습니다. 해답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해답을 안다고 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그냥 돌아갈 뿐 멈출 수 없는 수수께끼였습니다. 갈등 끝에 저는 金대통령의 큰아들 金弘一씨를 만났습니다.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金大中씨가 국민회의를 창당하고 난 이후입니다. 동갑이고, 대전형무소 감방 동기였던 그에게 제가 조사한 얘기, 들었던 얘기를 다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金大中 선생은 대통령이 되어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어머니는 불행한 분이다. 때문에 나의 소년기도 외로웠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야망과 노력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정도는 밝히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저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냉담이었습니다. 동교동 측근들을 만날 수 없었고, 다시는 동교동을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동교동의 장벽은 참으로 높았습니다』 金大中만이 풀 수 있는 새끼 꼬기 당시의 심정을 孫씨는 녹취록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나도는 金大中씨와 관련된 해괴망측한 소리들의 진원지가 하의도였다니. 내가 그렇게도 궁금해 왔던 金大中 선생의 실체가 하나씩 들춰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참담했다. 全斗煥, 金鍾泌 등 金大中 선생의 政敵들에게 『당신들은 거짓말쟁이오』라고 외치고 싶었던 내 생각들이 점점 스스로 자멸하고 있는 게 아닌지 나는 두려웠다. 역사를 밝히고, 올바른 人物史 추적을 위하여 소리 없는 투쟁가처럼 과연 나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 내가 출생의 비밀을 밝혀 낸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더 이상 추적해야만 할 필요가 있는가? 있다면 그 답은 金大中 선생 본인만이 갖고 있을 것이다. 金大中 선생이 答을 한다고 해서, 아니 答을 안 한다 하더라도 어쩌란 말인가. 선생이 해야 할 일은 이제라도 호적 정리를 하는 것이다. 호적정리를 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잘못 각인돼 있는 「金大中」을 새롭게 바꿔야 한다. 누가 하는가? 그것은 오로지 金大中 선생 본인만이 풀 수 있는 「새끼꼬기」가 아닌가. 이 탐사작업을 하면서 때로는 봉변도 당했고, 기관원들이 눈치를 챌까 봐 긴장되고 두렵기도 하였다. 직장도 없는 상태에서 몇 년 동안 돈벌이도 되지 않은 일에 매달린 家長으로서의 책임도 나를 고달프게 했다.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집사람 볼 낯도 없었고, 점차 쇠약해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金大中 선생에 대한 나의 애정을 식혀 버렸다> 이 탐사작업을 통해 孫씨는 많은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인생 후반기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족쇄로 작용했다. ―金大中 대통령이 金씨가 아니고 諸葛씨란 사실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길소식지에 실렸습니다. 그 기사는 직접 쓴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썼어요. 한길연구회 간사장 겸 한길소식지 편집인이었던 저도 원고를 보지 못했습니다』 ―검찰 조사를 몇 번이나 받았습니까. 『7개월 동안 열여덟 번 검찰에 불려 나갔습니다. 조사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했는지는 몰라도 주로 야간에 출두하라고 했어요. 담당 검사가 金海 金씨였는데, 제가 조사한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 내막을 소상히 이야기하니까 놀라더군요. 담당 검사는 출생의 실체를 다 알 것입니다. 그러나 제 진술을 듣기만 할 뿐 조서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검사는 저보고 「조사만 하지 기소하지는 않겠다」고 하더니 기소 만기일인 1998년 6월18일에 저를 기소했습니다』 1심 첫 재판은 1998년 7월14일 오후 4시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밤 8시에 열렸다. 다른 재판이 다 끝난 뒤였다. 서울형사지법 319호 법정의 방청객은 孫씨의 친구인 李京植씨와 趙福衡씨가 유일했다. 이날 재판에서 孫씨는 冒頭(모두) 발언을 통해 재판장과 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재판은 누구를 위한 재판입니까. 이 재판이 대통령의 통치에 보탬이 됩니까. 입에 담기조차 조심스러운 현직 대통령의 출생과 관련된 재판입니다. 두렵고 무서워서가 아니라 不敬스럽기 때문에 재판을 취소해 주십시오』 재판이 시작되자 金弘一 의원의 측근이며 孫씨도 잘 아는 현역 국민회의 의원이 孫씨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돈과 자리를 제의하며 입을 다물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해외 대사관에 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까 국내를 떠나라고 해요. 돈도 10억인가 20억을 준다고 했어요. 제가 그랬어요. 명예훼손 사건이니까 訴부터 취하해 달라고요. 세 번인가 찾아왔는데 訴 취하를 안 하니까 계속 재판을 한 겁니다』 혼자서 재판 준비 ―재판을 받는 심정이 어땠습니까. 『첫 재판 기일을 통고받은 뒤, 이틀인가 사흘일인가를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잤어요. 변호사도 없이 재판하는 놈이 잠만 자니까 친구들은 저를 속이 없는 사람으로 봤을 거에요. 그러나 저는 원칙대로 살아왔으니까 꿀릴 게 없었어요』 ―변호사는 누구였습니까. 『세상 인심이라는 것이 참 웃기더라고요. 25년을 야당생활하면서 제가 주로 맡은 분야가 인권입니다. 구속된 운동권 학생들과 야당 당원들의 변호사 선임이 인권국장인 저의 일이었으니까 세칭 인권 변호사라는 사람들을 많이 압니다. 그분들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더니 노골적으로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맡지 않았으면 하는 낌새더라고요. 대통령과 관련된 사안이니까 겁이 났던 모양입니다』 ―수임료를 못 받을 것 같아서 거절한 것 아니겠습니까. 『돈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피하는 거예요. 무지하게 서럽더라고요. 혼자서 재판 준비를 했습니다. 法大 출신인 李京植 선배로부터 법률적인 도움을 받았고, 남산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를 찾았습니다』 ―법정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오후 4시에 시작한다고 하고는 밤 10시에 개정하는 재판은 처음 보았습니다. 재판이 언제 시작될지 모르니까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못 먹고 법정에서 기다렸지요. 오후 7시나 8시쯤 재판이 시작돼 끝나고 나오면 컴컴했어요. 텅 빈 법정에서 재판부하고 검사하고 나하고 셋이서 재판을 했으니까요』 『이 재판은 불행의 씨앗을 남기는 계기』 ―증인 신청도 했습니까. 『金鍾泌씨와 全斗煥 前 대통령을 증인으로 신청했지요. 「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이 붙었던 金海 金씨 문중 제사에서 초헌관이 金鍾泌씨였기 때문이고, 全斗煥씨는 金大中씨에 대해 「대통령은 고사하고 자기 姓氏나 찾도록 하라」는 발언을 했기 때문인데, 재판부가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재판장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1심 재판장이 대구 분이었어요. 대구는 신성무역 다닐 때 살았던 곳이라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하는 뎁니다. 재판장한테 호의를 가졌고, 재판장도 저한테 호의적이었습니다. 1심 때는 金弘一 측 사람이 저를 찾아오고 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정을 재판장에게 얘기했더니 만나보고 나서 재판하자며 재판 날짜를 계속 연기해 주었습니다. 재판장도 화해를 원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홉 번째 재판을 하는데 시작하기 전부터 재판장 얼굴이 상기돼 있더라고요. 그러더니 선고를 하는 겁니다. 그 후 재판장은 법복을 벗었습니다』 ―항소심의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1심과 똑같았습니다. 제가 신청한 증인들과 제가 제출한 증거들을 재판부는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審理(심리) 미진과 採證(채증) 법칙 위반 등을 이유로 상고했는데, 대법원에서 역시 기각했습니다. 제 사건은 1999년 10월26일 종결되었습니다』 ―재판의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金大中 정부가 왜 저를 기소했는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이 재판은 불행의 씨앗을 남겨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제 친구나 친척, 심지어 제 아내에게도 金大中씨 출생 비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金大中씨 본인이 직접 말하기 전에는 제가 들었던 얘기들을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을 했습니다. 제 녹음 테이프가 공개될 경우, 증언자들에게 미칠 金大中씨 측의 협박, 공갈도 두려웠지만 제 질문에 순수하게 대답해 준 하의도 주민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가 녹음하는 줄도 모르고 투박하게 응해 준 그들의 눈망울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증언자들뿐 아니라 하의도에서 터를 박고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2세나 3세, 4세에 미칠 파장이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재판으로 인해, 제가 했던 일은 제 뜻과 다르게 공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숨길 게 없습니다. 저에게 유죄를 선고한 이 재판은 제 개인에게도 불행이지만 金大中 대통령에게도 불행입니다』 ―생활은 어떻게 꾸려 나갔습니까. 『金泳三 정부 시절에 광주사태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이 나왔습니다. 1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던 저도 몇 천만원의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살았습니다』 하의도를 찾아가다 2001년 여름, 기자는 孫昌植씨의 탐사 작업을 검증하기 그와 함께 하의도를 찾은 적이 있다. 金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 金云式이 살았던 집은 대리마을에 그대로 있었다. 金云式은 문중의 종손이었지만 처가 두 사람인 관계로 문중 묘소에 묻히지 못하고 집 뒤의 산에 묻혔다. 金云式 묘를 바라보고 왼쪽에 그의 본부인 金順禮 묘가 있고, 그 오른쪽에 張鹵島의 假墓가 있었다. 金云式-金順禮 묘는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으나 金云式-張鹵島 묘 사이는 그보다 훨씬 간격이 넓었다. 남자가 두 여자를 거느리다 죽으면 첩의 경우엔 본부인보다 묘 사이의 간격을 더 두는 게 옛날 풍습이다. 金云式 묘는 破墓(파묘)가 되어 봉분은 있지만 유골은 없었다. 유골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두고 경기도 龍仁으로 옮겼다. 金대통령은 용인 묘소에 金云式-張鹵島만 合葬(합장)하고, 金云式의 본처 金順禮 묘는 고향에 그대로 두었다. 金云式 묘소 바로 위에 金대통령의 배다른 형 金大本 묘가 홀로 있었다. 묘 앞에는 비가 서 있는데 앞에는 「金海 金公 大奉之墓」(김해 김공 대봉 지묘)라 쓰여 있고, 뒤에는 「弟 大中 追慕 奉立」(제 대중 추모 봉립)이라 새겨져 있다. 동생이 형을 추모해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묘 곁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을 때 孫씨가 기자에게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다. 『출생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사람의 입을 막고, 호적서류 일부를 없애고, 관련자들을 핍박했으니 정치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저는 지혜롭거나, 요령 있게 살지를 않았습니다. 적당하게 하는 식으로 살지도 않았습니다. 사는 방식이 서툴렀는지는 몰라도 미련이나 후회는 없습니다』 孫昌植씨는 光州 5·18 묘역에 묻혔다. 기자는 유족의 요청에 따라 그의 碑文을 썼다. <30대의 그는 기업인이었고, 40대의 그는 민주화 투사였다. 그는 富貴와 榮華 대신에 신념을 위해 살았다. 故人의 진지한 삶에 대하여 많은 민주화 동지들은 경의를 표한다>● independent@independent.co.kr 천하의 친일파 , 김대중 1. 김대중은 일본인에 잘 보여 해운회사를 인계받은 사람이다. 2. 김대중의 일본 이름으로 도요타이다. 3. 가는 망명생활을 일본에서 했고, 일본에서 북한 돈을 받아 썼다. 4. 1989년 그는 일본대사관저에 차려놓은 히로히토 국왕 빈소에 조문하러 가서 고개를 깊숙히 숙였다. 친일파 중의 친일파 김대중! 빨갱이 중의 가장 악질적이 빨갱이 두목 김대중! 열우당은 친일파의 정의도 모르면서 친일청산에 나섰나? 친일파의 상징은 김대중이다. 김대중 청산 없는 청산은 사기다. 우리는, 일본 총리나 각료들의 신사 참배시에 더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지요. 이것은, 그보다 골백번 골 천번 더 악질적인 매국행위입니다. 친일파 청산, 당연히 해야 합니다. 민족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한, 친일파를 샅샅이 찾아내서 일그러진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무덤 속의 '친일파'를 청산하기에 앞서 살아 있는 '친일파'부터 먼저 청산하는 것이 그 순서입니다. 여러분, 물론 정치적인 역할과 비중의 차이는 있었습니다만, 히틀러와 히로히토 일왕의 다른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히로히토에 비하면, 자살로 삶을 깨끗이 끝내버린 히틀러는 차라리 용기 있는 자였습니다. 히로히토는 그 구차하고 누추한 목숨을 수십 년 간이나 더 부지하며, 지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히틀러가 아무리 으뜸가는 살인마라 한들, 우리 민족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것은 없습니다. 히로히토는 이 강산 낙화유수의 굽이굽이와 골골샅샅을 피로 물들이고, 그 골골샅샅과 갈피갈피에서 살아가는 이 땅의 억조창생 인간생명을 수 없이 수 없이 죽였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히틀러보다 히로히토가 골 천번 골 만번 더 악마적인 존재라는 말이지요. 당신은, 만약 김대중씨가 우리와 아무 관련 없는(?) 히틀러의 영정 앞에서 저렇게 90도로 몸을 휘어 머리를 숙였다고 해도 그것을 용서할 수 없겠지요, 당신은 도저히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겠지요, 당신은. 절대로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되겠지요, 당신은. 당신은, 우리 민족을 수없이 죽인, 히틀러보다 골천번 골만번 더 악마적이었던 히로히토에게 저렇게 90도로 몸을 휘어 머리 조아린, 저 김대중씨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당신은? 저 김대중씨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당신은? 그대들이여, 김삼웅, 김재홍 등 앞장서서 '친일', '친일파'란 문자를 입에 담았던 그대들이여, 당신네들에게 묻습니다. 또한 친일파 청산을 소리높여 외쳐온 현 정권과 실세386,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당신네들에게도 묻습니다. 또한 김대중씨에게 더 없는 애정을 보여온 호남 지역의 지식인들에게도 묻습니다. 또한 전국 각 대학의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의 학생들에게도 묻습니다. (정치적인 투쟁을 하는 학생회의 경우) 또한 김동민, 김주언, 김종배 등등 그 어설픈 나부랭이들, 그 따위들에게도 묻습니다. 당신네들은 이제부터 친일파 김대중씨를 청산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것만이 지금껏 당신네들(이하부터 일부)이 해온 행위에 정당성을 얻는 것입니다. 김대중 청산 없는 친일청산은 다 정신나간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일왕 앞에서... '천황이시여,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천만 명을 죽여줘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90도로 머리 꺾어 인사하는 김대중의 모습을 보십시오. 종군위안부... 수많은 꽃다운 처녀들을 끌어가서 미치게 미치게 만들어줘서, 인생을 망치게 해줘서... 천황이시여, 당신의 은혜에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90도로 머리 숙여 고마움을 전하는, 저 가증스러운 김대중의 실체를 보십시오. 총알을 만든다고, 솥뚜껑, 숟가락까지 다 빼앗아가고... 인체에 세균을 주입해서 처절하게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 마루타...낄낄거리며 카메라에 담아온 생체실험... '천황이시여, 그렇게, 죄 없는 수많은 인간을 개처럼 죽여줘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90도로 어깨 숙여 인사하는, 김대중의 저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십시오. 저 어마어마한 땅덩어리 만주(간도)까지 빼앗아 중국 놈에게 넘겨준 당신네들의 은혜에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90도로 어깨 숙여, 고맙다고 인사하는, 저 김대중의 모습을 보십시오. 남경학살에서 수십만 명을 총살하고, 생매장하고, 강간을 범했던... '천황이시여, 그렇게 수십만 명을 죽여서 그 수십만 구의 시체를 강물에 던져 넣어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90도로 어깨 숙여, 고맙다고 인사하는, 저 가증스러운 김대중의 실체를 보십시오. 그런 김대중이 "친일청산(인명사전)"하자며 성금까지 내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차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위선적인 작태를 자행했습니다. 일제시대의 친일은, 못 죽어서 했든, 먹고살기 위해서 했든, 적극적이었든... 어떻든 간에 '폭력적인 시대적 상황'이라는 강제성이 있는 것입니다.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 자체가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김대중은 누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고, 제 발로 스스로 걸어가서, 저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가정법이지만, 만약에 김대중이 일제시대 때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왕초였다면 과연 어땠을까요? 그 때의 조선이나 동아보다 더욱 악질적이고 교활하게 친일을 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살아생전 수천만 명을 죽이는 대 만행을 저지른 일본 천황에게, 죽었으니... 천국에 가라고 저런 비굴하고 비겁한 매국행위를 저질렀단 말입니까? (백만 보를 양보해서... 양심이고 정의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남들이 무슨 삿대질을 하든 간에... 그래도 미치도록 미치도록 꼭 하고 싶었다 해도 가벼운 목례 정도로 끝내야지, 저렇게 90도로 어깨 숙이고 머리 숙이는 게...참 기막힌 노릇이지요) 무덤 속의 친일보다 살아 있는 친일부터 청산해야 하는 것이 그 순서이고, 또 오직 마땅한 것입니다. 김대중의 위와 같은 친일작태... 또 하나는, 북한 김정일은 수백만을 굶겨 죽이고, 수만 명을 죽이고, 지금 현재도 수십만 명의 양심수를 가둬두고 있습니다. 그런 "김정일과 노벨평화상을 둘이 같이 받지 못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께 미안하다"고 말했지요. 여보시오, 김대중씨, 김정일과 노벨상을 같이 받을 생각을 했습니까?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독재언론(로동신문, 평양방송, 중앙방송 등)을 통해 북한민중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는, 그런 독재자에게 노벨상을 거론하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위의 두 개의 고리 속에, 김대중이 과연 어떤 인물인가를 가름할 수 있는 수많은 고리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친일청산, 제대로 합시다. 누구는 친일을 해도 괜찮고, 누구는 친일을 하면 안 되고... 그게 무슨 언어도단이란 말입니까? 정부 여당 사람들과 친 여권 방송과 매체들, 특히 안티 조선 구성원들은 왜 김대중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란 말입니까? (조아세 게시판에 여러 번 올렸는데, 그때그때 삭제를 하는군요.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김대중의 친일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지요. 당신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지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당신들의 치부를 백일하에 똑똑히 확인하게 되어, 심히 유감입니다. 아, 이 일을 어쩔거나!) 다시, 그대들이여, 당신네들(이하부터 일부)에게 나는 당당히 요구합니다. 동아와 조선의 친일에 대해, 지금껏 수천 번 난리를 쳐 왔지요. 내용은 언제나 그게 그거였지요. 조선과 동아가 친일을 했다는데, 총칼이 무서워서, 강압에 못 이겨 한 것도, 진정한 의미의 친일파가 될 수 있습니까? 도둑놈이 쳐들어와서 칼을 들이대며 돈 내놓으라고 해서 돈을 줬다면, '도둑파'가 되겠군요. (동아든 조선이든 스스로 했다면, 그것 또한 당연히 심판 받아야 합니다) 만약, 그 당시 당신네들이 동아나 조선의 왕초였다면, 어떻게 했겠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보셨지요, 김대중씨의 친일은 누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고, 제 발로 스스로 걸어가서 한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위안부 할머니들이 하얀 소복을 입고, 일본 대사관 앞에서 눈물로 부르짖었습니다. 김대중씨는 그 안에 들어가, 저런 비굴하고 비겁한 매국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노벨평화상은 개가 심사하는 것도 아니고, 소가 심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런 만행을 알았다면...노벨상을 받았겠습니까? 당신네들(이하부터 일부)이 개자식이 아니라면, 지금껏 동아와 조선을 수천 번 울궈먹었듯이 (당신네들이 그랬듯이 강도질, 도적질이라는 문자까지 써가며) 반드시 수천 번 김대중을 등장시켜, '친일 김대중' 꼬리표를 붙여주며, 울궈먹고 울궈먹고... 끝없이 울궈먹어야 할 것입니다. 김대중 청산 없는 친일청산은 있을 수 없습니다. 김대중씨에게 권고합니다. 아직도 자랑스럽게 머리 들고 이곳저곳 다니시며 정치권에 훈수나 두시고... '행동하는 양심'인 양 그렇게 가식과 위선, 거짓으로 인생을 살아가실 것이 아니라, 반성하고 참회하는 뜻으로 모든 재산 국가에 헌납하시고, 쥐 죽은 듯이 고요히 근신하며 살아가시기를 권고합니다. 현존기록이 김대중을 말한다 1. 김대중은 김정일에 충성하는 골수 좌익입니다 (1980. 5월, 김대중 자필 진술조서) 김대중은 80년 5월 17일 체포되어 수사 받는 과정에서 5월 20일과 5월 25일 2차례에 걸쳐 자술서를 썼습니다. 1. 1945년 9월경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목포지부의 선전부장으로 참가했음. 2. 1945년 9월경 결성된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했음. 3.. 1945년 말경에 좌우합작을 기치로 출범한 신민당(당수: 좌익 백남운)에 가입, 목포지부 조직부장을 맡았음. 4. 해방 당시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형편이었으므로, 좌익분자와 도 같이 일하게 되고,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음. 5. 1949년 친구의 형이 찾아와 서울 가는 여비를 부탁해 도와주었는데, 후일 그가 좌익활동 혐의로 체포되었음. 6. 6.25때에는 인민군을 피해 본인의 선박에 근무하는 박동련이라는 선장집에 숨어있다가 2 일 만에 발각되어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었음. 7. 정치보위부에서는 "우리 애국자(공산주의자)를 몇 명 밀고해서 죽였느냐?", "이 새끼가 아직도 반성 못했다", "네가 해군과 거드럭거리고 매일 요정 출입할 때 우리가 너를 얼마나 찢어 죽이고 싶었는지 아느냐"는 등 배신자라고 협박했으나 그 이상의 조사 없이 8 월 말경 형무소로 넘어 갔음. 8. 본인은 신병치료차 1972년 10월 11일 일본 도쿄(東京)에 갔다 거기서 유신선포를 맞이 했음. 9. 그 후 미.일 양국을 왕래하면서 기자회견, 강연, 양국 정치인의 접촉, 한민통의 결성 하고, 유신반대와 민주회복 활동을 전개하다 1973년 8월 8일의 납치사건으로 귀국하게 되었음. 10. 1973년 6월부터 해외에서의 반정부 운동을 좀더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미국 에 한민통 임시 총본부를 두고 그 산하에 미국지부, 일본지부, 캐나다지부를 두고자 모색했 으며, 총본부의장에는 본인이 앉고 미국지부 의장은 안병국 목사, 일본지부 의장에는 김재 화, 캐나다지부 의장에는 이상 목사를 내심 지목하고 있었음. (1980. 7, 국가보안법 위반행위 및 내란음모죄: 사형) 1980. 7. 31일, 검찰은 김대중의 성장 환경, 해방 후의 좌익 활동, 한민통의 조직 및 좌익 활동, 폭력시위, 광주사태 선동 및 배후조정에 관해 단죄했습니다. 김대중은 일본에서 한민 통을 결성하여 북한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가면서 좌익 활동을 했습니다. 한민통은 "한국 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약자입니다. 지금의 민주당도 "국민회의"였습니다. "한민통"은 좌익들로 구성된 조직입니다.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고 사살한 문세광이가 한민 통 조직의 일원입니다. 그 직후에 들어왔다가 간첩으로 체포된 김정사도 한민통 조직의 일 원입니다. 이로 인해 대법원은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을 했습니다"(988년 11월 18일 국회 광주사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신경식 의원) 조총련이 한민통에 매월 1000만 엔 내지 2000만 엔씩 자금을 공급했습니다, 한민통은 좌익인 광동희가 발행하는 "민족시보"를 기관지로 활용했습니다. 이는 공산당 선전지였습니다. 김대중에 적용된 법조문은 1)형법 제90조 제1항, 제2항, 제 87조 2)계엄법 제15조, 제 13조, 계엄포고령 제1조 제1항 3)국가보안법 제1조 제1호 4)반공법 제5조 제1항 5)외국환 관리법 제35조, 제17조 제1항 6)형법 제37조, 제 38조였습니다. 그의 좌익행각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1. 8·15해방후 신민당(후에 남로당에 합병)과 민주애국청년동맹, 전국노동평의회등 "극렬 좌익정당과 단체"에서 활동했고 "남로당" 목포시 당청년부장으로 공산계 파괴활동의 중추적 분자였다. 이 당시 김대중은 공산독재체제를 위한 적색혁명투쟁에 광분했다. 2. 6·25가 발발, 목포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자 목포시 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역 행위를 관리했다. 3. 특히 남로당 섭외부장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죄 로 전남도경에 검거됐다. 4. 김대중이 의장인 국민연합이 1980. 5월 22일 개최하기로 예정한 민주화 촉진 집회에서 시 위를 선동하여 폭력으로 국가기관을 장악하려 했다. (핵심죄목 1: 내란음모죄: 15년) 5. 김대중은 1972년 도일하여 정치적 망명을 가장하여 한국을 비난,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 했고, "한민통"을 결성하여 반정부 교포들을 규합, 한국정부를 전복시키려했다. 국가보안법 제1조 제1호 위반에 해당하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저지른 것이다(사형). 6, 동년 8월 귀국, 반국가단체인 한민통 일본본부 구성원들과 통신하면서 10·26 사태로 인 한 정국불안을 틈타 민주회복을 구실로 반정부의식이 강한 복학생 및 재야인사들에게 활동 비를 뿌리며 반정부 조직을 강화했다. 7. 박수부대까지 동원, 강연장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강연 모습과 내용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 녹음테이프, 책자까지 제작하여 학원가 및 추종자들에게 배포, 학생 및 일반 국민들에 게 반정부의식을 고취하다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5백만 원을 주어 광주사태를 유발시켰다. (핵심죄목 2: 반국가단체 구성죄, 국가보안법 제1조제1호: 1980년 9월 11일 사형구형) 8.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이 김대중의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바로 이날 전두환은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으며 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3월 3일 징역 20년형으로 또 감형했습니다. (1988년 11월 30일 국회청문회에서 밝혀진 사실) 1. "해방 후 1946년까지는 좌익 활동을 했고 1947년부터는 완전히 손을 끊었다"(김대중의 말). 2. 1945년 8월 25일 좌익단체인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시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한 사실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3.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목포시지부 청년들이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한 배후 조종의 혐 의로 구속되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4. 당시 좌익정당인 신민당(당수 김두봉, 북한 부주석)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사 실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5. 1950년 9월 7일 "간첩" 장금성이 남로당 전남 목포시 당위원장 앞으로 제출한 당원등록 청원서에 1946년 6월 16일 김대중씨의 활약상이 나열돼 있다. 여기에는 "민주청년동맹 목포 시지부위원회 간부 김대중이 적극 찬동하고 있다", "민청 간부 김대중에서 교양을 받았다 "는 대목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북에서 받은 돈) 1, 일본에 있는 동안 간헐적으로 좌익인물들로부터 산만하게 수십-수백 만엔씩 받았다는 수 사기 록은 있으나 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사자 간에 주고받는 돈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2. 1997년, 평양에서 김병식 부주석이 김대중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여기에는 김대중이 1971년 20만 달러를 김병식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확실히 기록돼 있습니다. 3. 1999년 김정일 발언록에는 "DJ가 김일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총애를 받았다" 요지의 글 이 있습니다(일본 문예춘추 12월호). 4. 일반에게 노출된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입니다. 이것 말고도 김대중은 61억 엔을 받았다 는 설을 포함해 많은 말들이 돌고 있지만 아직은 이를 수사할 조직이 없습니다. 이는 앞으로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 김대중이 상식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북한에 퍼다 주는 것은 이 빚을 10배 이상으로 갚으라는 김정일의 요구라고들 하지만 이 역시 심증만 가지 확증은 없습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통령에 대한 의혹은 그 개연성이 있는 한 공론화돼야 한다는 것이 2002년도의 대법원 판결입니다. 첫째, 김대중은 일본에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많은 자금도 사용했을 것입니다. 많은 신세도 졌을 것입니다. 그 중에 북한 돈이 없었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둘째, 그가 북한으로부터 20만 달러를 받았다는 편지가 있습니다. 그 당시의 20만 달러라면 지금의 수백억 원에 해당합니다. 셋째,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빚을 졌고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김정 일로부터 노출됐습니다. 넷째, 그는 쫓기는 사람처럼 북한에 퍼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금강 산 관광객이 가거나 안 가거니 무조건 1년에 50만 명이 간 것으로 하고 1인당 300달러씩 정산해주는 것은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입니다. 몰래 준 돈도 수십억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미국이 공식적으로 밝혀 준 것은 아직 4억 달러에 불과합니다. 이 네 가지는 그를 의심할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제공합니다. 김일성과 좌익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자금을 받았는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가 좌익으로 정치 일생을 출발했고, 좌익들과 조직을 만들었으며, 좌익들과 꾸준히 연대해왔고, 지금도 좌익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적장인 김정일 찬양) 1. "김정일은 식견 있고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지도자"라고 평가했습니다. (2000년) 1)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 등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 다". (2000년 2월9일 도쿄방송) 2) "김정일 총비서는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한다.". (2000. 2.28. 독일 슈피겔지) 2. 2000년, 제3차 ASSEM회의를 김정일 외교장으로 활용했습니다. 대통령의 직분을 망각하 고 김정일 영업부장을 자처했습니다. 그는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북한과 수교하라고 종용했 습니다. 3. 많은 돈을 뿌리면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갔으면 로버트 김을 석방해달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김정일 식견 있는 지도자입니다. 국제금융을 동원하여 북한을 도와줍시 다"하다가 THIS MAN의 경멸적인 호칭을 얻고 힘이 빠져 돌아왔습니다. (적장과의 내통행위) 1. 김대중은 김정일로부터 동지적 사랑도 받고 깊은 은혜도 입었다 합니다. 일본잡지 문예춘추 2000년 12월호에 실린 김정일의 육성녹음입니다. 중요한 것만 발췌합니 다. "지금 정권을 쥐고 있는 김대중은 야당 시절을 아득히 먼 옛날처럼 잊어버리고 미제의 등에 업혀 반사회주의 책동에 음양으로 혈안이 돼있다". "김일성 수령님은 김대중이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애국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 씀에 그리고 수령님의 사랑과 배려, 동지적 신뢰에 대해 오늘의 김대중은 배신으로 대답하 고 있다". "김대중은 야당 시절 민주화를 외치며 우리들에게 접근했으면서도 신뢰와 의리를 버리고 반 사회주의·반통일 책동에 광분하고 있다". "김대중을 두목으로 하는 남조선 당국자는 동포와 민족을 위한다는 구실로 ‘태양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나 사실은 우리 공화국을 혼란시키려는 기만정책에 불과하다"(1999.2월). "그도 한때는 민족자주와 미군철수를 주장, 민족주의자임을 자칭했으나 민족의 존엄과 양심 을 저버리고 악랄한 친미·친일의 사대매국 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다"(1999.11월). 2. 김정일의 추가적인 폭로가 무서워서인지 김대중은 200.3월에 베를린 선언을 기획하여 김 정일에 접선해 줄 것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드디어 2000년 6.13 및 6.15일 90분 간의 단 둘이 차 속에서 밀담을 나누었습니다. 일생동안 색깔로 의심받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대북 관계에서 만이라도 투명해야 했습니다. 북한에 가서 김정일과 단 둘이 갈 때 에 40분 올 때에 50분간 일행을 이탈해 따로 밀담을 갖는 것은 의심받아야 마땅합니다. 남 북한 관계의 특성과 그의 색깔론에 비추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3. 국민과 국회의 동의도 없이 김정일과 연방제 통일안에 합의 서명했습니다. 초법행위요 국가보안법 위반입니다. 3. "김정일이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은 없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이었습니다. 4. 북한의 사상 최대의 전력증강과 훈련 사실을 국민에게 속이려 했습니다. "2000년의 전력 증강은 과거 5년 치에 해당한다.", "지난해의 훈련은 10년 이래 최대 규모였다"는 연합사령관 의 보고내용은 쉬쉬하고 감췄습니다. 한국군의 군사훈련을 모두 축소 생략했습니다. 2001년 에 대대적으로 수백억 원의 예산을 들여 준비한 6.25행사도 못하게 했습니다. 5. 북한의 적화통일 행사에 많은 이적단체들을 여러 차례 보내 김정일에 충성을 보였고, 저 들의 적화통일에 동조한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6. 2001. 2월, 미국방문 전, DJ는 평화선언을 획책했다가 부시에게 저지당했습니다. 1973년 월맹의 레둑토와 키신저가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맞고 노벨상을 탔습니다. 2년 후인 1975년 월맹은 순식간에 월남을 삼켜버렸습니다. 800 - 1,200 만이 재교육 캠프에서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이슬"로 사라질 뻔했습니다. 7. 지난 2월 김정일 방문이 임박하다며 갑자기 중령급 이상 20%를 삭감시키라고 했습니다. 반 DJ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반공전선 와해) 1. 국가통수권자로 전쟁은 없다고 선포한 것은 군. 민의 안보정신을 허무는 이적행위였습니 다. 2. 적을 의심해야할 위치에 있는 군 최고 통수권자가 적을 의심하지 않으면 내통자로 의심 받아야 합니다. 3. 북한은 주적이 아니라 감싸야 할 민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4. 스스로 주한미군 지위변경, 보안법 개정 또는 철폐를 주장하여 지하에서 활동하던 좌익들 에게 면죄부를 주어 공공연히 활동하도록 격려했습니다. 5. 임동원, 한완상, 이태복 등을 포함한 좌익용공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고 있습니다. 6. 46개 언론사 사장단을 북에 보내 김정일의 술자리 매너에 홀리도록 하고 그 언론사 사장 들이 국내에서 김정일 찬양론을 펴게 했습니다. 7. 국정원으로 하여금 사회단체를 초청해 김정일 초호화판 생일잔치 비디오를 보여주고 김정일이 식견 있는 지도자이며 매우 합리적인 지도자라고 선전하게 했습니다. 8. 국정원으로 하여금 언론 및 사회단체 간부를 데려다가 전쟁은 없다고 교육했습니다. "110만 대군은 남침용이 아니라 일자리가 없어서 붙들어 둔 것이다". "서부전선에 콘크리트 장애물과 지뢰를 설치한 것은 옛날 장군이 바보였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와 철로는 방어하는 우리에게 더 유리하다"는 식의 교육을 했습니다. 모두를 뒤집어서 교육했습니다. 많은 언론사 간부들이 교육내용을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9. 초등학교 교과서에 김정일 사진을 실었습니다. 학생의대부분, 초등학생의 90% 이상이 김 정일을 멋있는 장군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10. 전교조의 좌익 용공 교육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남침 통로 열기) 1. 2000년12월까지 지뢰를 제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열흘 묵던 나그네 하루가 급한 식으로 제거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마도 그럴만한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 타당성 분석과정 없이 경의선을 환상의 실크로드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남침용으로 사용 될 수 있는 남측 길만 열어주었습니다. 북으로 가는 통로는 지금도 막혀 있습니다. 3. 2001.6월, 북한에 제주해협 통항권을 주자고 있고, NLL도 개방하며, NLL일부를 북한에 떼어내 줄 것을 시사했습니다. 4. 연천의 제5땅굴을 조사해보지도 않고 "천연동굴"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한국군의 손발 묶기) 1. 현장지휘관에게 부여된 "UNC 자동교전규칙"을 박탈하여 "먼저 쏘지 마라", "청와대에 먼 저 보고하라"며 군의 손발을 묶었습니다. (적장에 군자금 대주기) 1. 러시아에서 받은 돈 14억7천만 달러를 안 받을 테니 그 대신 러시아가 북한에서 받을 돈 50억 달러를 받지 말라는 거래를 했습니다. 2. 알게 준 돈은 5조 규모입니다. 3. 모르게 준 돈은 누구도 모릅니다. 단지 미국이 그 일부를 폭로해 주었습니다. 2000년도 한 해에 4억 달러를 김정일에게 비밀로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미의회 조사국(CRS)은 2002. 2. 25, 의회에 한.미 관계 보고서’에서 미CIA와 주한미군 사령부가 파악하고 있는 내용을 밝혔습니다. "정부는 1999년과 2000년 어느 날까지 현대를 통해 "비밀리"에 4억 달러를 북한에 주었다. 관광대금 4억 달러도 주었다. 총 8억 달러가 갔다. 그 중 4억 달러를 무기 구입에 사용했다"는 요지였습니다. CIA는 2001년1월 이 내용을 한국정부에 경고했지만 한국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달러주기를 강행했다 합니다. 여기에 더해 김대중 정부는 미국에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달라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2002. 3. 27 일간지들) 4. 업체들에게 북한 투자 및 지원을 강요하고, 대북지원에 나서는 업체에 세무조사를 면제해 주었습니다. 5. 2년 전에 환했던 평양 시내가 지금은 깜깜하답니다. 전기가 무기제조 및 땅굴 굴착에 사용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대중은 북한에 경수로 용량과 맞먹는 50만 KW의 전기를 공급하려다 미국에 의해 제지당했습니다. 6.. 금강산 사업으로 퍼준 돈, 비밀리에 상납한 돈, 앞으로 임동원이 북한에 약속할 돈 이외 에도 정부가 직접 또는 간접으로 북에 지원한 돈은 쌀, 비료, 투자비 등이 2조 4천억입니다. 필자의 조사로는 현 정부에 들어 이제까지 북한에 퍼 준 돈이 다음과 같이 집계됐습니다. 1) 2000.9.28: 60만 톤(3,120억 원) 2) 6회에 걸쳐 104만 톤(4,660억 원) 3) 정부가 사용한 남북 협력기금: 1조864억 원 4) 1999년 한 해 동안 대기업들이 부담한 준조세: 업체 당 평균 745억 원. 이는 기업들이 부담한 국세의 1.2배이며 지방세의 20배 규모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다. 5) 99년10월6일 현대가 20인치 칼라 TV 3만대를 북송(445만 달러: 58억 원) 6) 99년8월16일 대한제당이 연간 2만 톤(60만 달러)씩 북한에 제공(31억 원) 7) 99년11월27일 삼성이 172만 달러를 투자(22억 원) 8) 2000년 1월 25일 현대아산이 190만 달러 상당의 기와공장 설비 반출(25억 원) 9) 2000년2월 8,863평짜리 평양실내 체육관 준공(450억 원) 10) 평화자동차 공장에 금강산 국제그룹이 3억 달러 투입(4,000억 원) 11) 2000년 3월7일 삼성전자가 평양체육관용 전광판 시스템에 400만 달러를 투자(52억 원). 12)2000년3월22일 삼성이 조선컴퓨터 소프트웨어 지원에 73만 달러를 부담(10억 원) 13) 내복 1,000만 벌(600억 원) 14) 2000년 3월6일 축협에서 계란 1천만 개, 새마을운동에서 곡물 1,660톤을 보냈다. 15) 2000년 4.12일 평화의 숲에서 묘목 20만 그루. 총계 2조3,892억 원이다. 7. 앞으로 더 가는 돈: 1) 5월 중순부터 비무장지대(DMZ) 내 경의선 공사를 시작해 10월 이전에 연결을 완료하 고, 5월 중 금강산 육로관광을 위한 임시도로 연결 공사에 착수한다 합니다. 군사분계선-개 성 12㎞ 구간 공사에 필요한 레일, 침목 등 기자재를 북측에 지원 하겠다 합니다.(2002,4.23 한국일보). 2) 군사분계선에서 강릉을 잇는 동해북부선 남쪽 구간(127km) 공사를 올해 안에 시작해 2009 년께 완공한다 합니다(한겨레, 문화일보 2002. 4. 22). 3) 4월말에 비료 20만 톤을 보낸다 합니다(한겨레 2002.04.12) 4) 6월부터 3개월에 걸쳐 북에 쌀 50만톤을 수송한다 합니다(세계일보 2002.4.24). (반공 역사 말살하기) 1. 2000년10월1일, 이어서 6.25를 "실패한 통일 노력"으로 정의했습니다. 2. 어이없게도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베트남 대통령에게 한국군 파병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월남전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본 것입니다. 2001. 8. 23일, DJ가 천득렁 베트남 주석 환영만찬에서 “우리가 불행한 베트남전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 고통을 준 점을 미 안하게 생각한다.며 "사과"를 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망발이 아니라 한겨레 21의 "아! 몸서리 처지는 주월한국군의 양민학살"론과 맥을 같이 하는 색깔 있는 발언이었습니다. 한 겨레 21. 강정구, 한홍구 같은 사람들은 베트남전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보고, 월맹군을 민족 해방군, 미군/한국군을 반역 군으로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영문으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여기에 김대중이 가세한 것입니다. 3. 여수-순천, 4.3 반란사건을 일으켜 방화 살인한 좌익들을 통일의 역군으로 둔갑시켰습니 다. 4. 13년 전, 7명의 경관을 죽이고 11명의 전경에게 주상을 입힌 동의대 좌익 데모학생을 민주화투사로 명예회복 시켰습니다. 5. 13년 전, 과격한 불법노동운동으로 실형을 받은 전교조 교사 1,139명을 민주화투사로 둔갑시켰습니다. 6. 좌익 대모를 민주화투사로 둔갑시켜 최고 2억까지 보상합니다. 반면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가 싸운 고엽제 환자들과 전상자들은 약값조차 제대로 대주지 않고 있습니다. 6. 법원이 반국가단체로 판결한 한총련에까지 명예회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7. 과거의 사법부 재판의 권위를 몇 명의 수상한 무명인물들이 "민주화명예회복 및 보상위원회"를 만들어 짓밟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법부가 현재의 "민간심의위원회"보다 못한 것입니다. 과거의 정통성을 모조리 부정하고 공산주의 통일정권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9. 애써 잡은 63명 간첩은 영웅 취급해서 보내주고, 국군포로, 강제 납북자는 쥐어박고 입을 막습니다. 10. KAL기 폭파범 김현희는 극진히 대접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115명의 유족은 홀대하고 학대합니다. 11. 국군 포로를 이산가족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12. 좌경 데모는 보호하고, 보수 데모는 차단합니다. 13. 국정원, 기무사, 경찰의 간첩 잡는 활동을 은밀히 차단합니다. (언론의 입막기) 1. 46개 언론사들을 북한에 보내 북한의 명예를 손상하는 글을 쓰지 않기로 합의케 했습니다. 2. 언론사들에게 "햇볕정책"에 악영향을 주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합의케 했습니다. 3. 언론사 죽이기를 자행했습니다. 특히 김정일이 가장 싫어하는 조선과 동아를 죽이려 했습니다. 국세청 800명 인력의 半인 400명을 풀어 60-90일간 세무조사를 폈습니다. 서울방송에 51명, 조선일보에 50명, 동아일보에 35명, 중앙일보에 24명이었습니다. 여기에 공정거래위원회도 가담했습니다. 한마디로 쑥대밭을 만들어 언론을 잠재우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국가가 도둑을 맞아도 짖는 개가 한 마리도 없게 만들려 한 것입니다. (기막힌 거짓말) 1)"이 김대중은 돈을 돌보듯 합니다."(1967) "여러분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내 얼굴을 똑똑히 보십시오. 나는 내 장래에 대해서 큰 포 부가 있습니다. 나는 돈 몇 푼 받아 가지고 내 장래를 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러운 돈 같은 것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해둡니다" (1967년 6월 4일 오후 2시 목포역전 광장에서 행한 DJ의 국회의원 선거 유세). 2) "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 가족은 무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1997) "저희는 이번에도 저희자식들 재산까지 다 공개했는데 앞으로 대통령이 되면 자식뿐 아니 라 형제의 재산까지도 공개를 하고 이렇게 해서 정말 무소유가 되겠습니다. 정말로 내 자식 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가족은 무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 돈은 먹고 살 만큼 만 있으면 됩니다. 이번에 영등포의 땅과 경기도 수원의 땅은 장애인을 위해 내놓았고요 저 희 집 현재 살고 있는 것도 가족회의에서 이미 결정이 났습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3) "국민 여러분, 이 김대중은 이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 가족들이 모두 도둑질을 했습니다.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2002.6) "저는 지금 고개를 들 수 없는 참담한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국민 여러 분의 성원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저는 자식들이나 주변의 일로 걱정을 끼치는 일이 없 도록 하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드렸으나 결국 저는 국민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2002.6.21 일간지 일동) 4) 2002.07.10, “국민 여러분께 한없는 죄송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2002.7) 김대중씨가 박선숙 대변인을 통해 차남 홍업씨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상 알선수재, 조세 포탈 및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고 홍업씨 관련 의혹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가 발 표된데 대해 한 말입니다. 검찰은 홍업씨가 기업들로부터 48억을 받았다고 공소했습니다. 현대에서 16억, 삼성에서도 5억을 받았고, 이 2개 업체들로부터 매달 5천만 원을 받았다 합니다. 임동원한테서도 때때로 2,500만원, 신건한테서도 1,000만원씩의 상납을 받았다 합니다(2002.7.11 조선, 중앙). 홍업씨는 10억 원을 아파트 베란다 창고 안에 숨겨 놓고 그 앞에 가구를 쌓아 놓고 지냈다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닮아 "부정한 돈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왔습니다. 이런 사실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홍업이가 검찰에 숨긴 사실, 검찰이 또 점수 따려고 감싸 준 사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더구나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나서서 송정호 법무장관에게 수 사를 중단하라는 압력을 넣었는데도 이 정도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6.11일 오전, 국무회의 가 끝난 직후 이한동 총리가 법무장관에게 했다는 말을 소개합니다. "어른이 매우 섭섭해 하십니다. 어떻게 한 집안에서 두 자식을 구속할 수 있느냐고 하시더군요. 불구속 수사는 도저히 안 되는 건가요?" 5) "이 김대중은 일생동안 거짓말이라고는 해 본적 없습니다."(1997). "저는 일생에 거짓말한 일이 없습니다.(청중들 폭소) 저는 거짓말한 일이 없어요. 이것은 약속을 못 지킨 것이지 거짓말 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한 것하고 약속했다가 못 지킨 것 하고는 다릅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6) "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청와대가 국정을 농단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1997). "하나 첨부하면 제가 집권하게 되면 청와대 비서실을 대폭 축소해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비 서실로 만들고 모든 국정은 국무위원들과 협의해서 하겠습니다. 지금 보면 이 나라에서는 청와대 비서관 회의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국무회의라는 것은 있으나마나 해요. 청와대에 서 국민이나 누구에 대해서도 책임을 안지는 청와대 수석 비서관이 장관에게 전화 한 통 하 면 쩔쩔매고 그대로 따라가야 해요. 이건 이 나라 헌법 질서가 잘못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도 앞으로 시정할 것이기 때문에 비서들 자신들이 정치를 농단하는 일은 저희 집권 하에서는 없을 것이다, 이것도 말씀드리겠습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7) "이 김대중이가 노벨평화상을 받으면 상금을 국가에 내놓겠습니다."(2000), "노벨평화상은 한국국민 모두의 업적으로 받은 상이니 만큼 저는 상금(11억2,222만원)을 노벨상 취지에 맞게 사용하겠습니다.". (중앙일보 2000.12.11) 8) "노벨평화상 상금은 이 김대중의 것입니다"(2001) "노벨 평화상 상금은 아태재단에 넣어두었다". (2001. 12.10 조선일보). 9) "노벨평화상금을 김정일에 바치려 합니다."(2002). "노벨상금과 그 이자를 평양과학기술대학에 기탁할 것이다. 그들은 6.15 기념관을 지을 것 이다". (2002.5.20 중알일보, 세계일보, 신동아 2002.6월호) 10) "김정일은 나쁜 놈입니다"(1997). "저는 김정일을 대단히 위험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만하고 독선적이고 호전적인 사 람, 어렸을 때부터 안하무인으로 컸고 71년부터 막강한 권력을 장악해 왔고 그래서 대단히 위험한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위험한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서 정말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세가 필요하다. 저는 김정일에 대해서 조금도 방심하 지 않습니다.". (1997.10.8 관훈클럽) 11) "김정일은 식견 있고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지도자입니다"(2000년)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 등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 다". (2000년 2월9일 도쿄방송) "김정일 총비서는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한다.". (2000. 2.28. 독일 슈피겔지) 12) "김정일과 담판하여 노동당 규약을 개정시키겠습니다."(1997). "저는 집권하면 북한에 대해서 분명히 따질 것 따지고 짚을 것 짚고 그래가지고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남북정상회담을 하겠습니다. 그 가장 전제조건이 노동당 규약을 개정해서 그러한 자세를 우리가 분명히 믿을 수 있게 바꿔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노동당 규약은 북한에 있어서 헌법 이상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13) "김정일에 군자금을 대주었습니다."(2002). 그는 김정일에 알게 모르게 현금과 쌀로 군자금을 대주었습니다. 5조원 규모입니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부터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정치자금을 받았습니다. 김정일이 입을 열면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김정일은 그가 물러나기 전에 그를 최대한으로 이용할 것입니 다. 노벨상을 받으면서도 그는 김정일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김정일과 함께 상을 받지 못해 죄를 지은 기분이라고 말했습니다. 14) 1980.3.26일 김대중의 YWCA 초청 연설문입니다. 그의 사기성이 잘 나타나 있는 연설문입니다. 나는 내 일생의 교훈으로써,「어떤 경우에도 국민을 배반하지 말고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국민의 편에 서라」는 것, 이것이 내 인생과 정치의 신조입니다. 우리 집 가훈이 세 가지 있는데 그 중 첫째가「하느님과 국민에게 충실하라.」입니다. 둘째 는「자기 운명은 자기가 개척해야 된다.」이며, 셋째는「절대로 부자가 되지 마라」는 것입니다(박수, 옳소! 환호). 나는 내 자식들에게 말하기를「돈과 하느님은 같이 섬길 수가 없고, 돈과 양심을 같이 섬길 수가 없다. 돈은 먹고사는 데 부족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 이상의 부를 가지게 되면 부의 노예가 되고,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고, 국민으로부터 격리되고, 그리고 교만해지고 타락 한다. 따라서 만일 너희들이 경제계에 나가서 사장이 되고 회장이 되는 등등 경영자가 되는 것은 좋지만, 만일 부자가 되면 아버지와 너희들과는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나는 얘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국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정치인으로서의 최대의 기본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둘째, 셋째입니다.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내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내 양심에 충실하다가 기회가 있어서 대통령을 맡게 되면 봉사할 것입니다(박수, 환호). 그러나 국민과 양심을 버리고「무슨 수단을 쓰든지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 이것은 내가 죽으면 죽었지 추구할 수 없는 길입니다.(옳소! 박수) 여러분에게 솔직히 얘기한다면, 나는 다음 정권, 그렇게 대단한 매력이 없습니다. 왜? 첫째, 경제만 보더라도 박정희씨가 아주 망쳐 놓았습니다(박수. 옳소! 환호). 이것을 맡아 놓고 수습한다는 것은 마치 다 파먹은 김칫독에다 머리를 집어넣는 것과 마 찬가지입니다(옳소! 박수). 4년 동안 뒤치다꺼리나 하고 나면, 그것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뒤치다꺼리를 하고 나면 4년은 끝나는 것입니다(웃음, 박수). 남북문제, 노동문제, 청년·학생문제, 군대를 통솔하는 문제 등등 다음 대통령의 짐이 여간 무겁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생각을 하면,「누가 한 4년쯤 해서 실컷 고생하고 난 뒤 그때쯤 내가 맡는 게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박수, 환호) 여러분! 나는 아직도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여기서 공개할 수 없는, 그 동안 많은 치욕과 고 통과 괴로움을 당했지만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나를 바닷속에 상어 밥이 되게 던지려고 할 때도,「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국민은 나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으며, 내가 법정에 섰을 때도 판사를 향해, 검사를 향해,『당신들이 나를 지금 재판하지만 역사와 국민은 내 편』이라는 것을 얘기했습니다(옳소! 박수). 누구에게 천대를 받건, 누구에게 멸시를 받건, 누구에게 박해를 받건, 아니 오늘 생명을 잃 건, 내 국민만 나를 버리지 않고, 내 국민만 나와 같이 있고, 내가 내 국민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한은, 김대중에겐 불행이 없고 김대중에겐 슬픔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 립니다(박수, 옳소!) 따라서 나는 지금 게딱지같은 국민주택에 살고 있지만(웃음), 국민을 배반하면서 부를 얻는 것보다는 하느님과 우리 국민을 택했습니다. 국민을 배반하면서 안전을 택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이 신념은 내가 죽는 그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박수). 여러분! 나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입니다. 예수는 내 스승입니다. 나는 하 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는 나의 형님입니다. 나는 그의 제자이기 때문에 스승의 말씀 을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나의 스승 예수는 우리에게 이와 같이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의 자유와 권 리와 행복을 위해 싸운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의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박수). 북한은 한쪽으로는 대화를 하면서도 간첩선을 내려 보냅니다. 폭력과 무력을 통해서 남한을 뒤집어엎겠다는 소위「남조선 해방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국가의 안보와 반공 의 태세를 조금도 늦출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강조합니다(박수, 옳소!). 나는 반공주의자입니다. 그러나 국민에게 넘치는 자유와 정의와 안정을 줌으로써 국민들이 이 땅에 정을 붙이고, 대한민국에 사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자발적으로 이 나라를 지키려고 하는, 공산당 침투의 여지가 없는 반공과 안보를 주장하는 것이 나의 정책이요 박정희씨와 다른 점인 것입니다(박수). 국민이 있는 곳에, 여러분이 있는 곳에, 김대중이가 있습니다. 국민이 필요로 하는 데 김대 중이는 있습니다. 김대중이는 천 번 죽어도 국민을 떠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필요로 하면, 우리 민족의 혼이 내게 명령하면, 나는 다시 열 번 납치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백 번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천 번 연금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여러분에게 봉사할 것 을 다짐합니다!(옳소! 환호, 박수) (연설 끝) (경향신문이 보도한 김대중) 1980.5.18일자 경향신문도 이날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라 는 제목과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출생서 친북괴 활동까지'란 제목을 단 특집기사로 김대중 을 비난했다. 아래는 경향신문 기사를 요약한 것입니다. (김대중의 이력서) 1959년 6월 金은 강원도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낙선하자 빚을 지고 생활고에 허덕였다. 이때 김대중의 전처 차용수는 빚에 시달리고 계까지 깨져 음독자살했다. 김대중은 그 후 62년 10월 현재의 부인 이희호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김대중은 국회의원시절에 처 이씨를 자신의 비서관으로 등록, 해외여행에 동반하기도 했다. 김대중은 1945년 8·15해방 후 근무하던 일본인 해운회사를 인수해서 사업에 뛰어들었다. 해방 당시 일본인 소유의 회사, 토지, 주택 등 여러 형태의 재산은 적산(敵産)이라 하여 미 군정청이 인수했고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 국유재산이 되었다. 이른바 '적산불하' 로 출발한 한국의 기업은 많았다. 김대중이 어떠한 과정으로 일본인 기업을 인수했고 정계에 입문하면서 처분했는지, 김대중 은 1980년 계엄사에 제출한 자술서에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자료집 참조). 1980년 한국에 체류하면서 김대중을 집중적으로 취재한 일본의 시바다 미노루(柴田穗) 기자 는 김대중의 회사 처분에 대해 위 경향신문의 기사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이래는 시바 다 미노루,『김대중의 좌절』산께이 신문(1982) 기사다. "김대중씨가 급히 강원도로 피신을 하게 된 것은 해운회사의 부사장 나상수가 김대중씨를 횡령으로 고발했기 때문에 그는 급거 강원도로 몸을 숨긴 것이다. 당시, 군통제지역에서 행 정지구로 막 편입됐을 뿐인 강원도 인제 지구는 김대중씨가 잠적할 장소로서 가장 적당했 다. 김대중씨가 59년 선거직전이 아니라 56년에 강원도로 옮긴 사실과, 56년까지의 사이에 횡령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기적으로 꼭 맞아떨어진다.". "김대중씨가 민주당에 입당한 것, 그 직후에 카톨릭 세례를 받은 것, 강원도로 옮겨간 것은 모두 56년에 일어났다. 그렇다고 하면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세례도, 횡령도 태연하게 한다는, 김대중씨의 수단을 가리지 않는 술책을 보여주는 것이다". "59년 6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제 지구에 출마, 낙선한 직후 새로운 횡령사건이 발각된 다. 선거기간 중 투개표 입회원이었던 문수룡(文壽龍)이라는 사람이 돌연 급사했다. 민주당 에서는 문수룡을 순직으로서 처우하고, 조의금을 보내게 되었다". "당 중앙간부가 조의금 30만원을 모아 김대중씨를 통해 유족에게 건네주도록 했다. 그런데 김대중씨가 이중 12만원만을 유족에게 건넸을 뿐 나머지 18만원을 착복해 버렸다. 이 사실 을 안 당시 민주당원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이 김대중씨의 파렴치한 횡령행위를 비난하고 민주당에서 탈당해 버렸다". "김대중씨의 조의금 착복사실이 널리 당내에 전해지자, 당내는 물론 선거구 전체의 비난이 집중됐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김대중씨는 반대로 탈당한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는 행동으로 나왔다. 고발당한 네 명은 김대중씨를 횡령과 무고(허위신고)로 대항,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난 듯하다" "61년 7월부터 김대중씨는 민주당의 대변인이 된다. 그런데 선전부장 시절에도 횡령 사건이 있었다. 선전부장으로서 학원공작을 구실로 조달한 선거 자금 3천 7백만원 중 7백 7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검찰에 송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김대중의 모략행위) 1960년 7월29일 4·19혁명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 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는 7명의 후보가 난립, 4·19혁명으로 쓰러진 자유당의 이름을 내걸고 선전한 전형산씨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됐다. 이렇게 되자 김대중은 4백 명의 데모대를 조직, 군청개표소에 난입, 투표한 22개중 15개를 강탈한 후 전씨의 사퇴를 강요하는 연좌데모를 벌이게 했었다. 드디어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전씨는 김대중에게 사퇴를 약속했지만 법적인 효력이 없어 전 씨의 당선은 보장됐다. 그 후 민주당 정권이 전씨를 공민권제한 대상자로 만들어 의원자격을 박탈하자 김대중은 61년 5월의 보궐선거에서 일방적으로 당선됐다. 이밖에 김대중이 각종선거전에서 저지른 폭력 및 흑색선거운동을 보면- ▲자신의 선거참모를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구타하고 상대당원이 테러를 했다고 역선전했으며 ▲목포시 만호동 상가주택을 철거한다는 낭설을 퍼뜨려 자기선거운동원을 측량기사로 위장, 주민의 불안감과 반감을 유발케 했고 ▲자신의 선거 운동원에게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 유권자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상대당원을 가장하여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하는 허위선전을 해 상대방후보에 대한 반감과 불신감을 갖게 했으며 ▲김대중의 사인을 받아오는 자에게는 돈을 주게 하여 자신의 인기를 조작했다. 1971년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을 때 그는 단순한 자동차사고를 여당 측의 암살음모라고 떠들 어대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중 운전사의 운전부주의로 김대중이 탄 승용차가 전복된 것이 조사결과 밝혀져 자동차 사고의 암살음모 주장은 결국 김대중이 조작한 혐의가 짙다는 것으로 끝났다. * 김대중의 집안에 폭발물을 설치한 세칭 폭발물 자해사건도 발생했다. 이는 대통령후보인 김대중의 집 앞에 폭발물을 장치, 공화당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한 사건이다. 조사결과 이 폭발물은 어린이들의 장난감용 딱총 화약을 은박종이에 싸서 배터리 전지로 폭발할 수 있게 만든 조잡한 것이었다. 김대중 암살용 폭발물이었다면 이같이 조잡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결국 김대중이 조카를 시 켜 저지른 조작극으로 밝혀졌었다. (김대중의 사기 행위) 김대중은 현재(1980) 그가 살고 있는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을 비롯한 부동산 4억 원, 동산 1억 원 등 5억 원의 재산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2월 29일(1980) 복권 후에는 자신이 집권할 경우 경제적 이권, 정부 요직 등을 미끼로 각계인사로부터 무려 12억 원 이상을 받아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가 정치자금을 조달한 것은 대부분 파렴치한 수법에 의한 것들이었다. ▲우선 1959년 6월 인제 지구 재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그의 선거참관인 중 문수룡이 참관도중 급사하자 민주당에서 조위금으로 보내온 30만원 중 18만원을 횡령 착복했고 ▲50-56년 사이의 목포해운회사 경영 중 선원봉급과 배를 판돈 1억 5천만원을 횡령, 도주했다. ▲또 60년 4월~61년 4월까지 민주당 선전부장으로 재직할 때 학원공작구실로 조달한 3천7백만 원중 7백70만원을 횡령, 검찰에 구속 송치됐다. ▲7대의원 당시에는 8대 국회의원 당 공천을 해준다고 속여 박종태로부터 5백만 원, 김세종 으로부터 3천8백50만원, 이원형으로부터 1백만 원 등 4천4백50만원을 사취했다. 그 후에도 국회의원이란 직위를 악용, 호남제분, 동아건설, 대한농산, 삼양수산 대표들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아낸 사실도 밝혀졌다. 1972년 10월 김대중이 일본에 머물고 있을 때 10월 유신으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됐다. 그러자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의 중단, 망명정부수립, 김일성 정권과의 접촉시도 등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했다. 1973년 4월에는 미국 하버드대 코헨 교수에게 한국의 박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미국이 대 한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도록 미 의회 지도자에게 압력을 넣어달라고 호소했다. 또한 미국에서 북한을 방문한 친 북괴 분자들을 만나 반국가 단체를 조직했다. 최고의 간첩, 김대중 거짓말 인생 김대중의 모략전 “거짓말이라도 좋다. 백번을 반복하라. 그러면 참말이 된다.” 공산주의자들에 통하는 진리입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거짓말은 죄나 수치가 아니라 기본 전략입니다. 그래서인지 김대중은 참으로 거짓말을 많이 했습니다. 거짓이 바로 그의 인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입에서 나오는 말을 믿지 말고 그 사람의 과거와 작품을 보고 믿으라 했습니다. 그런데 못난 사람이 너무 많은 대한민국 국민은 김대중의 말만 믿었습니다. 신문도 과거는 숨겨주고 거짓말만 띄워주었습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나를 도와준 사람에게는 보상만 해주고 자리는 절대로 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 말입니까? 그러나 김대중이 이렇게 했습니까? 기록을 보면 김대중은 천하의 사기꾼이고, 대통령의 행적을 보면 그는 역적이자 간첩입니다. 난수표를 날리는 간첩은 간첩 축에도 들지 못합니다. 1960년 7월29일 4.19혁명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하자 4백 명의 데모대를 조직하여, 투표함 22개중 15개를 강탈한 후 당선된 전씨의 사퇴를 강요하는 연좌데모를 벌이게 했습니다. 자기의 부하를 시켜 자기의 선거참모를 구타해놓고, 상대당원이 테러를 했다고 역선전했습니다. 자기의 선거운동원에게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시켜 상대방이 고무신을 뿌렸다고 역선전을 했습니다. 자기 당원을 상대방 당원으로 가장시켜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하는 허위선전을 해서 상대방후보를 모략했습니다. 1971년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을 때 김대중은 자기 운전자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사고를 박대통령이 꾸민 암살 작전이었다고 선전했습니다. 김대중의 집안에 폭발물을 설치한 세칭 폭발물 자해사건을 꾸며 박대통의 음모라며 역선전을 했습니다. 1959년 6월 인제 지구 재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그의 당원이 급사하자 조위금으로 보내온 30만원 중 18만원을 착복했습니다. 1950-56년 사이의 목포해운회사 경영 중 선원봉급과 배를 판돈 1억 5천만원을 횡령, 도주했습니다. 1960년 4월부터 61년 4월까지 민주당 선전부장으로 재직할 때 학원공작구실로 조달한 3천7백 만원 중 7백70만원을 횡령, 검찰에 구속 송치됐습니다. 1967년 6월 4일 오후 2시 목포역전 광장에서 국회의원 선거 유세를 했습니다. "여러분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내 얼굴을 똑똑히 보십시오. 나는 내 장래에 대해서 큰 포부가 있습니다. 나는 돈 몇 푼 받아 가지고 내 장래를 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러운 돈 같은 것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해둡니다" 1980.3.26일 YWCA가 초청한 자리에서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습니다. “나는 내 일생의 교훈으로써,「어떤 경우에도 국민을 배반하지 말고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국민의 편에 서라」는 것, 이것이 내 인생과 정치의 신조입니다. 우리 집 가훈이 세 가지 있는데 그 중 첫째가「하느님과 국민에게 충실하라」입니다. 둘째는「자기 운명은 자기가 개척해야 된다」이며, 셋째는「절대로 부자가 되지 마라」는 것입니다. 김대중이 이런 거짓말을 할 때, 청중에서는 박수가 터지고 옳소 라는 환호성이 터졌습니다. 1997. 10. 8일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기 직전에 관훈클럽"에서 행한 연설문입니다. “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 가족은 무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저희는 이번에도 저희 자식들 재산까지 다 공개했는데 앞으로 대통령이 되면 자식 뿐 아니라 형제의 재산까지도 공개를 하고 이렇게 해서 정말 무소유가 되겠습니다. 정말로 내 자식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가족은 무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 돈은 먹고 살 만큼만 있으면 됩니다. 이번에 영등포의 땅과 경기도 수원의 땅은 장애인을 위해 내놓았고요. 저희 집 현재 살고 있는 것도 가족회의에서 이미 내놓기로 결정이 나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일생에 거짓말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거짓말한 일이 없어요. 이것은 약속을 못 지킨 것이지 거짓말 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 한 것하고 약속했다가 못 지킨 것하고는 다릅니다.". 국민이 왕이라고 말들 합니다. 대한민국에는 눈먼 왕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왕들이 눈이 멀어 천하의 사기꾼에게 국가를 내준 것입니다. 이런 정치꾼들의 작태들을 보다 못해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를 한 것입니다. 김정일에 멱살 잡힌 김대중 김대중은 그가 취임한지 2개월만인 1998년 4월, 김정일이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금강산 사업, 인도적 사업이라는 위장술을 써가면서 5조 규모의 자금을 적장에 바쳤습니다. 연간 500명이 가도 50만 명이 간 것으로 하여 300달러씩 곱해주라 했고, 화장실 한번 갈 때마다 4달러를 주라 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충성했건만 김정일은 1999년 말, 4차례에 걸쳐 김대중을 협박했습니다. 가장 먼저 한민전이 나서서 김대중을 역도라 부르며 부정을 낱낱이 폭로했습니다. 그걸 읽으면 김대중은 사람도 아닙니다. 북한 부주석 김병식이 나섰습니다. 28년 전에 20만 달러를 주었고, 도쿄 플라자호텔에서 뜨거운 민족애로 포옹했었다는 내용을 폭로했습니다. 이어서 구국전선이 나섰습니다. 김대중이 스위스에 10억 달러를 예치했다는 내용을 폭로했습니다. 드디어 김정일이 직접 나섰습니다. 김대중이 아버지 수령으로부터 많은 배려와 지원을 받았다는 내용이 문예춘추에 폭로했습니다. 모두가 1999년말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여기에 무슨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까? “빨리 내 입을 막아라!” 아니나 다를까 그는 2개월 후, 베를린으로 날아가 '급히 좀 만나자’ 했습니다. 의기양양한 적장은 김대중에 거액을 내라 했고, 코너에 몰린 김대중은 미국의 눈을 피해 5억 달러를 현금으로 바쳤습니다. 5천만달러 어치의 조공물자가 따로 갔습니다. 김정일 더러 오래 살하고 건강물자도 많이 보냈습니다. 이렇게 치사하고 비참한 방법으로 충성을 보인 그는 적장과 단둘이 55분간 만났습니다. 이는 접선이지 정상회담이 아닙니다. 일본에서 2004.12.4일 발간된 최신의 책“김정일 파멸의 날”(출판사: 일신보도]. [저자: 미도 히로미찌]의 188-189쪽에는 2000. 6.15일 남북정상회담 시, 갈 때에 45분, 올 때에 45분, 계 90분간에 걸쳐 김정일과 김대중 단 두 사람이 동승한 차내에서의 밀담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미 CIA는 양 김의 차내 밀담 90분간의 내용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포착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생전의 김일성 수령님을 만나 뵙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박통시절 납치사건에 있어서 여러 모로 힘을 써 주셔서 오늘 날의 제가 있었습니다. 광주사태로 인해서 사형판결을 받았을 때에도 생명을 구해 주셨습니다. 수령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김 총서기님과 협력하며 살고 싶습니다. 남북 평화협정을 조기에 체결하고 싶습니다. 국가보안법을 철폐시키고,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민족을 자주적으로 통일하는데 매진하고 싶습니다. 북조선에 경제재건을 위해서 의욕적으로 협력하겠습니다. 클린턴 미 대통령과 일본 총리를 조속히 평양에 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남쪽의 국가정보원에 의하면 김정일이 김대중에게 남로당 입당서류와 1967년부터 김일성이 죽을 때까지 30여 년간의 김대중에게 제공한 자금원조에 관한 자료 등을 보이며 이들 자금이 도움이 되었습니까?” 라고 김대중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돌아온 그는 한국 대통령이 아니라 약점 잡힌 김정일의 신하로 보였습니다. 돌아오자마자 4개월 이내에 무조건 지뢰를 제거하라 명령했습니다. 보안법철폐와 주한미군철수를 주도했습니다. 학원을 좌익화시켰습니다. 언론을 장악해 국민에 집단최면을 걸었습니다. 46개 언론사 사장들을 김정일에 보내 사실상의 충성서약서를 쓰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영해가 너무 으니 일부를 북에 떼어주자 했습니다. 드디어! 2001년 2월, 월남 식으로 평화협정을 선포하려다 미국에 덜미가 잡혔습니다.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김대중의 국가 경제 허물기 280조 공자금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현금 달러를 국민 몰래, 미국 몰래, 비밀로 수송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판에, 남한의 좌익에는 얼마나 쉽게 퍼주었겠습니까. 뿌린 돈만큼 좌익세력이 활동하고, 사람들이 매수됐을 것입니다. 그는 이완용보다 천배 만배 악질적인 반역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60조의 공적자금, 또 다른 200여조의 국가채무, 100여조의 연기금을 마구 풀어헤쳤습니다. 너무 많이 풀어 헤쳤기 때문에 그 돈의 행방을 조사한 기관이 없습니다. 한나라당도 손을 놓고 잇엇습니다. 김대중 수족들로 들어찬 국정원에서 3대 게이트를 주도했습니다. 공적자금을 가지고 가장 먼저 금융기관을 국유화했습니다. 은행에 빚을 진 600여 개의 대기업, 중견기업들을 국유화했습니다. 기존의 공기업이 405개입니다. 중앙정부가 108개, 지방정부가 297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1,000여 개의 대형 기업들이 한 순간에 정부 소유가 됐습니다. 국영공화국입니다. 여기에 경영의 "경"자도 모르는 정치꾼들이 나가 연봉을 170%까지 올리고, 수당을 얼리고, 판공비를 수백 프로씩 올리고, 하청업체 및 조폭들과 야합히여 돈을 털어 갔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공자금을 넣어야 기업이 산다며 떼를 쓰고 있습니다. 공자금을 통제하는 부서도 없습니다. 풀어헤친 공자금은 그의 추종세력에게, 알아서 챙겨가라고 내놓은 돈이었습니다. 이걸 우리더러 갚으라 강요합니다, 세금을 올리고, 세무행패를 강화하고, 공공요금을 올리고, 거리마다 무인 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우리의 주머니를 털어 가는데 혈안이 돼 있는 것입니다. 전기료를 단 한번에 2배나 올렸습니다. 농촌 심야전기 시설비를 40만원에서 170만원으로 대폭 올렸습니다. 기업들이 은행에 담보로 잡혔던 토지와 건물도 정부가 차지했습니다. 정부는 자산관리공사라는 대형 브로커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1,600명이나 됩니다. 이 브로커 기구가 토지와 건물을 헐값으로 인수하여 급매물로 외국에 내놓았습니다. 골드만삭스, 론스타. 리만브라더스, 싱가포르투자청 등 해외 브로커 업체들에 고물가격으로 마구 팔아치웠습니다. 그들은 웬 떡이냐 싶어 이들을 사서 곧바로 다른 외국기업들에 되팔았습니다. 더러는 3배, 더러는 5배의 가격으로 횡재를 했다 합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외국 브로커 업체들이 자기 돈은 10-30%만 대고, 나머지는 국내 은행에서 빌려 가지고 샀다는 사실입니다. 돈을 빌려줘 가면서 외국인들에게 폭리를 준 꼴입니다. 왜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정권에 급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여의도의 60배에 해당하는 금싸라기 땅이 외국인 소유가 됐습니다. 2000년12월27일자 매일경제신문은 "웬만한 빌딩 치고 외국인 손에 넘어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고 보도했습니다. 이면계약의 존재에 대해서도 밝혔습니다. 강남에서 가장 큰 건물인 "현대 I-타워", 서울시청 옆에 있는 "파이낸셜센터", "벽산빌딩", "아시아나항공", "힐튼호텔", SK 증권, 동양증권, 쌍용증권, 고려증권, 대우증권, 여의도 KTB 빌딩, 은석빌딩, 한효빌딩, 대한방적 빌딩, 금호그룹 신사옥, 광주은행 사옥, "시티타워", "현대중공업빌딩" 등, 서울에서 가장 큰 건물들이 외국인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이렇게 팔아 넘긴 돈은 두 동강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공식계약서에 표시된 돈은 은행으로 들어갔고, 이면계약서에 쓰여진 돈은 저들의 주머니로 갔을 것입니다. 공식계약서에 잡힌 돈은 외환보유고로 잡혔습니다. 정부는 툭하면 외환보유고가 늘어났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잘난 외환보유고는 바로 이렇게 헐값에 팔아 넘긴 잔돈이었습니다. 이면계약서에 쓰여진 검은 돈이 더욱 클 수 있습니다. 개혁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내걸고 기업을 도륙질 했습니다. 빅딜이라는 생소한 낱말로 국민을 혼란시키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기업을 마음에 드는 기업에 합쳐 주었습니다. 워크아웃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말을 듣지 않는 기업을 망하게 하거나, 빼앗았습니다. 빼앗은 기업은 식솔들에 나누어주었습니다. 기업의 살생부까지 만들어 가면서 겁을 주었습니다. 기업의 운명을 거머쥔 실세들에, 알아서 돈을 바치라는 신호였습니다. 기업은 앞을 다투며 저들에게 상납을 했습니다. 저들과 선이 닿는 연줄을 찾아 대표이사 자리에 앉혔습니다. 벤처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이용해 사기도 쳤습니다. 청와대 식솔, 동교동 가신, 국정원, 조폭들이 총 동원되어 어린 벤처사장들과 사기 친 돈을 나눠 갖았습니다. 그야말로 난장판 놀이를 한 것입니다. 북한이 조국인 김대중 1999년 9월, 김대중 대통령이 타임지에 말했습니다. "식사 때 음식이 남으면 북한동포들의 얼굴이 떠올라 몹시 괴롭다. 충분히 돕고 싶지만 국민여론이 부정적이어서 애를 먹고 있다". 1999년 2월. 그는 일본과의 어업협정에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3,000여 척의 어선이 졸지에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어민들은 슬퍼했지만 그는 아니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 다음날 어선들을 북한에 보내자 했습니다. 같은 해 3월, 수많은 중소기업이 도산해서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습니다. 기계를 뜯어다 북한에 설치해주자 했습니다. 한전이 그의 뜻을 따라 연간 5조의 적자를 내면서도 북한이 그 기계들을 돌려야 한다며 5,000억 원을 들여 발전소를 지어주고, 송전선을 세워, 남한 전기를 보내겠다 복명했습니다. 2000년 10월. 60만 톤의 식량을 날치기로 보냈습니다. 3,120억 원어치였습니다. 98년4월부터 현재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104만 톤의 비료가 갔습니다. 4,660억 원 어치였습니다. 2001년10월, 전국 보건소에 있는 결핵 백신을 한 병도 남기지 않고 싹 쓸어다가 북한에 주었습니다. 30만 명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보건소에는 입단속을 시켰습니다. 2000년, 러시아 대통령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러시아에서 받을 14억 7천만 달러를 받지 않을 테니, 러시아도 북한에서 받을 50억 달러를 받지 말아달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정부가 사용한 남북 협력기금이 매년 5,000억 이상입니다. 최초 2년간만 해도 1조 864억원이 집행됐습니다. 현대에 이어 다른 재벌들도 망치려 했습니다. 재벌들을 닦달하여 북한에 투자 명목으로 퍼준 돈이 5.960억 원이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북한에 간 돈은 2조 5,500억 원입니다. 금강산 사업입니다. 금강산 사업은 사업이 아니라 적장에게 군자금을 대주기 위한 위장망이라는 사실을 국민이 모르고 있습니다. 금강산을 통해 10억 달러가 이미 갔습니다. 여기에 더해 몰래 준 돈도 있습니다. 얼마의 공적자금이 비밀자금으로 둔갑되어 갔는지, 누구도 모릅니다. 단지 이번에 미국이 그 중 4억 달러를 찾아냈을 뿐입니다. 적장은 이를 가지고 남침용 무기를 구매했다고 미국이 발표했습니다. 미국이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면 이는 분명한 이적행위입니다. 금강산 사업, 한 사람이 하루 입산하는 데 100달러를 바쳐야 합니다. 3일 코스에 300달러입니다. 이런 예는 지구상에 없습니다. 이에 비하면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더욱 기막힌 것은 관광객이 있으나 없으나 무조건 연간 50만 명이 간 것으로 쳐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연간 1억5천만 달러를 자동으로 주는 것입니다. 지난 3년간 금강산에 간 사람은 모두 42만 명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150만 명이 간 것으로 계산해서 4억5천만 달러를 주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99년부터 2004년까지 6년에 걸쳐 '존재하지도 않는 독점사업권'을 명분으로 하여 9억4,200만 달러를 줍니다. 연간 1억5,700만 달러입니다. 2004년 말이면 입산료와 독점권 명목으로 18억 6,200만 달러가 가는 셈입니다. 2조 5천억입니다. 그 돈을 주고 우리 관광객들은 어떤 관광을 했습니까? 바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켜도 안 되며, 카메라를 빼앗기고, 민 여인처럼 감금되어 문초를 받았습니다. "한국"과 "대한"은 북한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이유로 한국일보 기자는 "한국"이라는 낱말 때문에 H일보라는 명찰을, 대한매일은 "대한"이라는 낱말 때문에 D일보라는 명찰을 달아야 했습니다. 관광이 아니라 굴욕입니다. 관광에 대한 악 소문이 퍼지면서 관광객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관광객이 없어도 북한에는 자동적으로 매년 3억7백만 달러가 나갑니다. 관광객이 없는데 이렇게 많은 돈을 주면 비난이 쏟아집니다. 저들은 어떻게든 관광객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가공할 국민 총동원령입니다. 인구의 3분의1인 1,300만을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3년간 겨우 42만 명이 금강산을 다녀왔습니다. 42만 명과 1,300만 명을 비교해 보십시오. 여기에 지원되는 국가 예산만 정확히 4조입니다. 정부가 4조, 국민이 2조, 합해서 6조를 금강산에 바치는 것입니다. 금강산은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등극하는 반면 설악산과 한라산은 초라하게 허물리고 있습니다. 산을 가진 우리 지역경제가 망가지고 있습니다. 북한 땅이 성지가 되고, 북한정권이 상전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준 돈이 무려 5조였습니다. 북한은 이 엄청난 돈을 가지고 무얼 했습니까?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신예전투기 50대를 구입했습니다. 스커드를 500기에서 600기로 늘렸습니다. 휴전선 대포를 25% 증강했습니다. 전차와 화학무기도 전방으로 추진했습니다. 휴전선에 전진 배치된 군사력을 65%에서 70%로 늘렸습니다. 땅굴도 팠습니다. 10년 이래 최대 규모의 훈련도 했습니다. 우리를 곧 군사력으로 먹겠다는 말입니다. 이런 기막힌 정보는 미국이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정부는 쉬쉬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현 정부가 북한에 남침용 군자금을 대주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퍼주는 우리에게 북한은 고마워하던가요? 북한은 우리가 준 돈으로 최근 북한강 상류와 임진강 상류에 8개의 댐을 건설했습니다. 태백산맥을 관통하는 총 100㎞의 "지하수로"를 만들어 우리에게 흘러와야 할 물을 머나 먼 원산 앞 바다로 빼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북한강 상류에 유입되는 수량이 5분의 1 정도로 줄었고, 앞으로 수도권은 더욱 더 심한 식수난을 겪을 것이라 합니다. 북한에 홍수가 나서 수문을 열면 수도권 지역이 물바다가 된다 합니다. 저들은 우리가 준 돈으로 수도권을 물바다로 만들 수 있는 엄청난 무기를 설치한 것입니다. 배은망덕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국제법상으로 보면 임진강과 북한강은 남·북한이 함께 사용하는 공유하천입니다. 당사국의 동의 없이는 물길을 돌릴 수 없게 돼 있습니다. 이민족간에도 이런 일은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북한을 국제재판에 회부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동포가 한 일이라며 감싸주기만 합니다. 제1의 주접근로에 깔린 지뢰를 깨끗이 제거해 주었습니다. 경의선과 고속도로를 개통하여 서울로 직결되는 남침로를 활짝 열어 주었습니다. 법정에서 사실상의 땅굴로 인정된 연천 제5땅굴을 조사도 해보지 않고, 대통령이 황급히 나서서 자연동굴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2001년 6월, 북한 상선들이 제주해협을 유린했습니다. 대통령이 UN사 자동교전규칙을 박탈하여 우리 해군의 손발을 묶었습니다. 북한 선박 한 척에 우리 함정 6척이 31시간이나 따라다니며 제발 좀 나가달라고 애걸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북한에게 무해통항 권을 인정해 주자했습니다. 바다의 휴전선인 북방한계선이 너무 넓으니 일부를 북한에 양보하자 했습니다. 우리의 군을 적장 앞에 굴복시키고, 우리 영해를 적장에게 바치려 한 것입니다. 간첩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옥에 갇혀있던 사람을 끄집어내서 장관을 시키고 있습니다. 노동당 창당 55주년 기념행사에 가서 축사를 읽고, 파주에 있는 인민군 묘소에 가서 참배를 한 사람들이 부총리가 되고, 장관이 되고, 대학총장을 합니다. 대법원에서 반국가단체로 판결난 범민련을 대북 연락창구로 이용했습니다. 평양에서 열린 적화통일 행사에 311명의 방문단을 날치기식으로 보냈습니다. 그 중 100여명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난 해 9. 3일, 국회에서 탄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국회와 국민을 비웃기라도 하듯, 불과 1주일 만인 9.11일에 직제에도 없는 장관급 자리를 청와대에 만들어 놓고, 그를 앉혔습니다. 그는 남북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의심스러운 행동을 계속합니다. 학교들이 마치 1917년 프로레타리아 혁명을 방불케 하는 폭력으로 강탈되어 이념교육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를 막아야 할 공권력이 오히려 비호합니다. 전교조가 초-중-고 학생들에게 이념교육을 시키기 위해 불법 교과서를 내놓고 가르칩니다. 책에는 '인민군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통일사회'가 그림으로 영상화돼 있습니다. 북한은 불쌍한 우리 동포이고, 우리의 주적은 외세와 여기에 계신 냉전세력이라고 가르칩니다. 개인의 삶에 불편을 주는 국가안보는 부정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헌법과 국보법을 부정하는 이 엄청난 운동을 정부는 10개월 째 방치하고 있습니다. 4.3 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수많은 반정부 데모 사건; 좌익분자들에 의해 자행된 이 국가전복 사건들은 민주화운동으로 둔갑시키는 반면, 정작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가 싸운 정부군을 박대하고 멸시합니다. 그 어느 나라 국민이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가 싸운 정부군을 용병이요 살인마라고 공격합니까? 이러한 인구는 분명 이 나라 국민이 아닙니다. 이를 처벌해야 할 대통령이 저들을 비호했습니다. 주월한국군의 적장이었던 사람에게 대통령이 사과를 했습니다. 월남전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보는 것입니다. 2001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그는 6.25를 '실패한 통일 노력'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전 역시 민족해방전쟁이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국가의 정통성을 통채로 부정하면서, 북한 정권에 새로운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 이 나라 사람이 아닙니다. 가면을 쓴 북한 사람입니다. 지금 정권을 잡은 사람들의 실체는 좌익입니다. 김대중은 거물간첩입니다. 어제의 충신이 역적 된다. 김대중이 가진 돈에 대해 수조원일 것이다, 아니다 수십조 원일 것이다 하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는 지금 아방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빨갱이는 영웅취급을 하고 화장실 물을 아껴보려고 수조에 벽돌을 넣는 박정희, 허리띠를 28년씩이나 매고 다니는 박정희, 대한민국을 세계 지도에 12번째로 굵게 새겨놓은 박정희를 부관참시 합니다. 1970년대에 한국, 싱가포르, 대만, 홍콩의 1인당 국민소득이 비슷했습니다. 박정희의 빛나는 업적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됐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집권 만 3년이 지난 2001년도에 다른 세 마리의 용의 1인당 국민소득은 24,500달러를 훨씬 넘긴 데 반해 한국은 겨우 9,000달러도 안 됐습니다. 박정희를 욕하는 입으로 들어가는 밥숟갈, 다시 끄집어내고 싶습니다. 어제의 충신이 오늘의 역적이 되는 경우는 나라를 적국에 빼앗겼을 때에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김대중의 출생 비밀 전모 生前의 유일한 인터뷰 -「金大中 출생 비밀 10년 추적자」孫昌植씨 죽다 孫씨의 아버지는 좌익에게 피살되고, 孫씨는 金大中씨를 돕는 과정에서 옥살이를 했다. 金大中씨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조사는 엉뚱한 비밀을 드러내었고, 그는 金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훼손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末年은 「출생의 비밀」이란 그늘 속에서 스러져 갔다. -------------------------------------------------------------------- 禹鍾昌 月刊朝鮮 부장대우 편집위원 (woojc@chosun.com) 死因은 심장마비
<月刊朝鮮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생전의 孫昌植씨.> <2004년 11월25일 오후 1시30분쯤, 서울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본점 뒤쪽 길에서 지나가던 한 남자가 갑자기 쓰러졌다. 남자는 일어나지 못하고 길바닥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한 행인이 급히 119에 신고했다. 119 구급차에 실려 서울 강북삼성병원 응급실로 후송된 이 남자는 끝내 소생하지 못했다. 死因은 심장마비. 사망 시각은 오후 3시20분.
亡者의 이름은 孫昌植(손창식·56). 「자유 언론수호 국민포럼」 前 사무총장이다. 그는 모처럼 을지로 입구에 있는 사무실에 나왔다가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이 세상을 하직했다. 亡者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金大中 前 대통령을 비롯한 이른바 「동교동 家臣」들 사이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그가 1988년부터 10년간 金大中 前 대통령의 출생 비밀을 몰래 추적해 그 실체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해 놓았기 때문이다.
비밀리에 이뤄지던 그의 추적 작업은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한길연구회」란 단체가 기관지 한길소식지에 「金大中씨는 金海 金씨가 아니고 諸葛씨다」라고 보도함으로써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일로 당시 한길연구회 간사장이었던 그는 金大中 국민회의 대통령후보 측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를 당해,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 취재 과정에서 기자는 孫昌植씨를 만났다. 10년 동안, 긴장과 불안 속에서 비밀 探査(탐사)작업을 하고, 그 후 1년 6개월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孫씨는 건강을 크게 해친 상태였다. 과중한 스트레스가 심장병을 일으켜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조금만 걸으면 숨이 차는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생활도 말이 아니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5만원의 13평짜리 아파트에서 살다가 이 아파트가 철거대상이 되자, 좀 더 허름한 서울 시내 모처에서 살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추적작업은 계속되었다. 그의 추적작업을 검증하기 위해 기자는 2001년 여름, 그와 함께 金大中 前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 일대를 둘러보기도 했다.
50代 후반의 나이에 건강도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추적 작업을 책으로 출간하는 것이 孫씨의 숙원이었다. 한 인간의 家系(가계)를 폭로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대통령 후보로 나온 모든 사람들의 家系를 조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가 10년의 세월을 바쳐 왔던 비밀 탐사작업의 종착역은 국민들에게 지도자감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客死했다. 다음의 글은 기자가 생전의 孫씨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生前의 유일한 인터뷰 -「金大中 출생 비밀 10년 추적자」孫昌植씨 죽다 孫씨의 아버지는 좌익에게 피살되고, 孫씨는 金大中씨를 돕는 과정에서 옥살이를 했다. 金大中씨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조사는 엉뚱한 비밀을 드러내었고, 그는 金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훼손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末年은 「출생의 비밀」이란 그늘 속에서 스러져 갔다. -------------------------------------------------------------------- 禹鍾昌 月刊朝鮮 부장대우 편집위원 (woojc@chosun.com) 死因은 심장마비
<月刊朝鮮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생전의 孫昌植씨.>
<2004년 11월25일 오후 1시30분쯤, 서울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본점 뒤쪽 길에서 지나가던 한 남자가 갑자기 쓰러졌다. 남자는 일어나지 못하고 길바닥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한 행인이 급히 119에 신고했다. 119 구급차에 실려 서울 강북삼성병원 응급실로 후송된 이 남자는 끝내 소생하지 못했다. 死因은 심장마비. 사망 시각은 오후 3시20분.
亡者의 이름은 孫昌植(손창식·56). 「자유 언론수호 국민포럼」 前 사무총장이다. 그는 모처럼 을지로 입구에 있는 사무실에 나왔다가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이 세상을 하직했다. 亡者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金大中 前 대통령을 비롯한 이른바 「동교동 家臣」들 사이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그가 1988년부터 10년간 金大中 前 대통령의 출생 비밀을 몰래 추적해 그 실체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해 놓았기 때문이다.
비밀리에 이뤄지던 그의 추적 작업은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한길연구회」란 단체가 기관지 한길소식지에 「金大中씨는 金海 金씨가 아니고 諸葛씨다」라고 보도함으로써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일로 당시 한길연구회 간사장이었던 그는 金大中 국민회의 대통령후보 측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를 당해,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 취재 과정에서 기자는 孫昌植씨를 만났다. 10년 동안, 긴장과 불안 속에서 비밀 探査(탐사)작업을 하고, 그 후 1년 6개월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孫씨는 건강을 크게 해친 상태였다. 과중한 스트레스가 심장병을 일으켜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조금만 걸으면 숨이 차는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생활도 말이 아니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5만원의 13평짜리 아파트에서 살다가 이 아파트가 철거대상이 되자, 좀 더 허름한 서울 시내 모처에서 살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추적작업은 계속되었다. 그의 추적작업을 검증하기 위해 기자는 2001년 여름, 그와 함께 金大中 前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 일대를 둘러보기도 했다.
50代 후반의 나이에 건강도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추적작업을 책으로 출간하는 것이 孫씨의 숙원이었다. 한 인간의 家系(가계)를 폭로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대통령 후보로 나온 모든 사람들의 家系를 조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가 10년의 세월을 바쳐 왔던 비밀 탐사작업의 종착역은 국민들에게 지도자감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客死했다. 다음의 글은 기자가 생전의 孫씨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金大中 선생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려고 시작했다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 내막을 추적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朴正熙 대통령이 충복 金載圭(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逝去(서거)함으로써 민주화를 위한 바람이 거세게 일던, 이른바 1980년 「서울의 봄」이 오면서 저는, 제가 존경하는 金大中 선생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10일자 신문을 보면서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 날짜 조선일보, 동아일보, 대구매일신문 등 3개 신문의 정치면에 「金大中씨는 金海 金氏가 아니라 尹씨라는 주장이 김해 김씨 문중 제사에서 거론되었다」는 기사가 실린 것입니다. 선생님이 金海 金氏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 「尹씨」라니요. 선생님에게 대통령이 될 찬스가 오니까, 경상도 사람들이 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별의별 음해를 다 가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명을 바쳐서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해 드려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孫씨는 문제의 기사를 보여 주었다. 기사 내용은 이랬다.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金庾信(김유신) 장군을 위한 제사인 金山祭가 1980년 5월9일 경주 인근인 興武王陵(흥무왕릉·김유신 장군묘)에서 열렸다. 金鍾泌 공화당 총재는 初獻官(초헌관: 제사에서 첫 술을 따르는 사람)으로 금빛 모자에 남빛 도포의 朝服冠帶(조복관대) 차림이었으며, 金大中씨는 일반 祭官(제관)으로서 검은색의 제복을 입었다.(중략)
이날 아침 大祭가 열린 興武王陵 앞에는 「金大中」 아닌 「尹大中」이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려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좌익들에게 맞아 죽은 아버지 기사를 읽고 나자 孫씨는 이렇게 말했다
『제 고향은 전남 완도군 고금면입니다. 金大中 선생의 고향인 하의도에서 뱃길로 한 시간 거리입니다. 恨서린 전라도 사람으로서, 또 같은 섬마을 출신으로서 선생님의 누명을 벗겨드리는 일이야말로 저의 숙명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누가 권해서가 아닙니다. 출생에 관한 흔적은 고향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다녔던 학교, 어릴 적 친구, 동네 어른들이 다 증인입니다. 저는 이들이 말하는 내용을 녹음해서 있는 그대로를 공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孫씨는 계속해서 말했다. 『姓氏 문제는 金大中 선생의 정치 행보에서 아킬레스건입니다. 자기 姓氏와 관련된 더러운 모함이 제기되면 본인이 직접 해명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金大中 선생은 너무나 미온적인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이는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적게 얻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수십 년간 그를 따르는 동지들에게 허탈감을 안겨 주는 사안이었습니다. 본인이 못한다면 그를 대신하여 그의 政敵들에게 모함의 추잡스런 실체를 밝혀 줘야겠다는 것이 제 탐사 작업의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제 어머니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는 6·25 사변 중에 빨갱이들 손에 죽었습니다. 나이 마흔에 청상이 된 어머니는 저 하나를 보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金大中씨를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하던 저에게 「사상도 온전하지 않은 金大中이를 따라다니는 것은 무덤을 파는 격이니 제발 조심하라」고 신신 당부를 하셨습니다. 저는 이 작업을 통해 金大中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모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 앞에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孫昌植씨는 누나만 일곱인 집안의 외아들이다. 그의 아버지(孫貴峰)는 일제 시대 때 일본에 건너갔다가 광복 직후에 귀국해서 뒤늦게 아들을 보았다. 孫씨 아버지는 孫씨가 태어난 지 2년 후, 6·25 혼란기에 마흔여섯이란 젊은 나이로 지방 빨갱이들에게 타살되었다. 집안의 代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 孫씨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친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일본에서 鐵공장에 다니며 고물상을 했다고 합니다. 돈도 꽤 벌어 일본에 온, 완도 출신들에게 학비를 지원했다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도움받은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귀국 후엔 면장, 군수 등 지역 유지들과 어울리며 지역 사회를 살리기 위해 주민 계몽운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6·25 동란 때 저는 세 살이었기 때문에 사연을 알 수 없었습니다. 고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완도중학 2학년에 다닐 때, 하루는 만취한 외삼촌이 잠자는 저를 깨워 바닷가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외삼촌은 완도군에서 오랫동안 조선일보 지국장을 했던 분입니다. 외삼촌은 저를 보고 「네 아버지는 내가 죽였다」고 하면서 막 우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내가 너한테 죽을 죄를 지었다」며 그냥 우는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니까 저로서는 세상물정을 모를 때였죠. 궁금해서 호적을 살펴보았습니다. 호적에는 아버지가 1949년에 病死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물으면 한숨만 쉬면서 「억울하게 당하지 말고 살아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그 말이 그 당시 제 가슴속에 늘 맴돌았습니다. 대학 입학 후, 누님으로부터 비참했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처음 들었습니다』
『범인들을 처형하면 더 많은 원수가 생긴다』
6·25 전쟁 중에 완도군을 점령한 지방 좌익들이 시골 사람들을 계몽하는 일을 했다는 이유로 孫씨의 아버지를 잡아다 나무에 매달아 놓고는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죽창, 몽둥이 등으로 타살했다는 내용이었다. 孫씨 외삼촌 두 사람도 이 일에 가담했다고 한다. 끔찍한 이 사건이 있은 지 3일 후, 완도는 해방되었고, 孫씨 아버지 살해에 가담했던 동네 주민 27명은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체포된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되었습니까.
『어머니의 恨이 거기에 있습니다. 당시 완도 경찰서장이 어머니 사촌 여동생의 남편이었습니다. 나중에 변호사까지 지낸 분이지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를 업고 완도경찰서로 찾아가 그분에게 동네 사람들은 한 명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사정을 했답니다. 그것은 저 하나만은 꼭 살려야겠다는 어머니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완도경찰서장에게 이렇게 호소했다고 누님이 말해 줍디다.
「내 아들은 원수가 27명이다. 나라에서 이놈들을 전부 사형시키면 이들의 자식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는 이 어린 새끼 하나 키우며 살아야 하는데, 이놈들을 전부 죽이면 내 아들은 저들에게 딸린 수십 명의 자식들한테 원수가 된다. 이 아들 키우면서 절대 敵을 만들지 않고 살 테니 저들을 단 한 명도 죽이지 말아 달라」
어머니의 이 호소로 동네 사람 27명은 무사히 살아났다고 합니다. 제가 일곱 살 때의 일로 기억이 선명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마을의 조그만 외길을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수염을 길게 기른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저를 보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나이 어린 저를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참으로 의아스러웠습니다.
마을 노인들이 저를 보면 고개를 숙이고 다녔던 것도, 외삼촌이 어린 저를 붙들고 울었던 것도 다 제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비만 오면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널려 있는 곡식부터 걷어 주고 자기 집 일은 나중에 할 정도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그런 좋은 일을 하고도 어머니는 그 사실을 자랑하거나, 그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윗사람 노릇하기보다는 항상 아랫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후배나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양보하며 살았습니다.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베풀며 사는 것이 편하지, 가진 자의 것을 뺏거나 약한 자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1971년 大選 때 金大中 후보를 돕다 완도중학을 졸업한 孫씨는 완도 수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光州로 나가 숭의실업고교로 전학했다. 孫씨는 1968년 조선大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누이를 통해 들은 것이 대학 입학 후였다. 대학생인 그는 실의에 잠겼다. 못 배운 사람을 가르쳤다는 것이 죄가 되고, 6·25 전쟁 중에 좌익 손에 죽은 아버지를 「1949년에 病死」한 것으로 허위 기록하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공부가 싫었고, 사람들의 위선적인 행동이 미웠다고 한다. 그는 학교에 가지 않고 半건달 생활을 1년간 하다가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그는 고향에서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4H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완도군 4H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1970년엔 가정을 꾸리고, 완도 특산물인 해태(김)를 수집해 일본에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 이듬해 그의 운명을 뒤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1971년 대통령 선거였다.
孫씨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던 金善太(김선태)씨가 농촌의 젊은 지도자인 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완도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金善太씨는 야당 대통령 후보 金大中씨의 당선을 위해 뛰고 있었다. 金善太씨는 전남 보성·장흥·강진·해남 지역의 유세 독찰반 책임자였다.
스물세 살이었던 孫씨는 사업을 잠시 접고, 신민당 완도군당 선전부장 겸 金善太씨 보좌역이 되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金大中씨는 공화당의 朴正熙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가 家産을 온통 쏟아 부은 해태 사업도 망해 버렸다. 실의에 빠져 방황하던 그는 친지 소개로 대구에 있는 신성무역이라는 무역회사에 입사했다. 1972년이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 大邱에 있는 공장에 공원 겸 견습사원으로 들어갔다. 신성무역은 對日 「홀치기」 무역회사였다. 홀치기는 얇은 비단에 각종 문양을 새긴 후 염색한 옷과 의복을 말하는데, 손으로 한 바늘씩 정성스럽게 짠 우리나라 제품은 일본 상류사회에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는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공휴일도 일요일도 없이 근무했다고 한다. 이 무렵 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공장 가동에 필요한 벙커C油를 구하기 위해 全직원들이 외지에 출장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는 대구에서 사귄 친구들을 통해 油公 대구출장소장을 소개받았다. 그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호소했다고 한다.
『소장님, 신성무역은 좌절한 제 인생을 구해 준 회사입니다. 이 회사에 저는 꼭 報恩(보은)을 하고 싶습니다. 말단 사원인 제가 사장님과 간부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 번만 도와 주십시오』
油公 대구 소장은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봉투 한 장을 주었다.
『봉투 속에는 기름 한 차를 살 수 있는 주유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기름 한 차를 몰고 회사 정문에 들어가니 간부들이 문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장간 직원들이 1.8ℓ짜리 기름 한 통을 겨우 구해 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일로 회사의 인정을 받았죠. 다음날엔 입사 후 처음으로 회사의 최고 어른인 사장님도 뵈었습니다.
당시 郡守 월급이 1만5000원인데 저는 3만원을 받았습니다. 밤에는 大邱 계명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적을 두고 못 다한 대학 공부도 마쳤고요. 1974년부터는 대구 친구들의 도움으로 밤마다 기름장사를 하면서 巨金 500만원을 벌었습니다. 날려버린 家産을 거의 보충했죠. 아버지 제사 지내러 고향 갈 때는 비행기를 타고 다녔습니다. 신성무역 일본 교토 지점장을 지내고 나서 정치를 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6년 정도 회사원 생활을 하였습니다』
1978년, 그는 金善太씨 권유로 정치판에 복귀했다. 金善太씨가 梁一東씨와 함께 통일당을 만든 때였다. 그는 인권 부국장을 맡았다. 金相賢씨가 만든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부장을 맡아 「동교동」과도 인연을 맺었다. 金大中씨가 金씨가 아니고 尹씨라는 말에 분노해 출생 내막을 밝혀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본격적인 야당 당료 생활을 시작하던 이 무렵이었다.
李姬鎬 여사가 선물한 벙어리 장갑
결심은 했지만 孫씨는 바로 金大中씨 고향인 하의도로 내려갈 수 없었다. 光州사태와 관련해 불법 유인물을 살포한 혐의로 1980년 5월 말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보도 통제가 되었던 光州의 참상을 서울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선배 李京植씨 등 동지들과 함께 유인물을 만들어 신촌·청량리·잠실·영등포 일대의 전화부스와 건물 옥상에 뿌렸는데, 저는 신촌 일대를 맡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해 구속된 金弘一·韓和甲·金玉斗·咸允植씨 등이 수감돼 있었다. 孫씨는 정통 동교동맨은 아니었지만 光州사태 관련자여서 이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金大中씨는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었지만 李姬鎬 여사가 아들 金弘一씨 옥바라지를 위해 대전교도소에 자주 면회를 왔습니다. 李姬鎬 여사는 저에게도 光州사태로 고생한다며 겨울철엔 귀마개하고 벙어리 장갑을 넣어 주었습니다. 참 고마워서 고맙다는 편지를 써보냈더니 李여사가 자필로 답장도 보내 주었습니다. 金弘一씨는 저와 동갑(1948년생)이어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홍일씨는 마른 오징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뚱뚱한 사람이 운동은 안 하고 오징어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일본인 시바다 기자를 만나다
출소 후 그는 생활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양복 재단사인 매형과 합자하여 서울 종로에 양복점을 냈다고 한다. 거기서 번 돈으로 그는 서울 관악구에 있던 미원 대리점을 인수했다. 전국 270개 대리점 중에서 판매율이 꼴찌에 가깝던 이 대리점을 그는 인수 1년 만에 전국 10위권으로 올려놓았다고 한다. 강남과 과천 일대를 발로 뛰며 시장을 개척한 결과였다. 그의 활약상은 미원 社報에도 소개되었고, 그는 판매 교육 강사로 강연도 다녔다.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그는 정치판에도 열심히 나갔다. 번 돈으로 돈 없는 야당 의원들을 지원하기도 하고, 야당에서 하는 일을 위해 돈도 내놓았다고 한다. 이 시절 그는 「한국 정치범 동지회」 대변인을 맡았고, 1985년 民推協 발족 때는 인권국장에 기용됐다. 데모하다 구속된 학생이나 야당 당원들에게 인권변호사를 소개하는 것이 인권국장의 일이다. 쫓기고 숨어 지내는 야당 시절이었지만 별도 사업체를 갖고 있던 그는 항상 넥타이에 정장 차림을 하고 다녔다.
잘 나가던 그는 1987년 후반, 몇억원 어치의 물건을 팔면서 받았던 어음이 부도가 나면서 졸지에 망했다. 부도를 막기 위해 집도 내놓았다. 그가 평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있던 때였다. 부도 수습을 위해 정치는 뒷전이었다.
겨우 빚을 수습한 孫씨는 휴식과 새로운 충전을 위해 그동안 미뤄 왔던 하의도行을 결심했다고 한다. 하의도에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기 위해 그는 맨 먼저 일본 산케이(産經)신문 한국 특파원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기자를 찾아갔다. 시바다 기자는 「金大中의 좌절」이란 책에서 金大中씨의 실제 아버지는 尹모씨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孫씨는 시바다 기자를 통해 제보자들의 이름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시바다 미노루 기자의 사무실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있었다. 孫씨는 사전 연락도 없이 사무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런 돼먹지 않은 글을 쓴 사람이 당신이오』
孫씨의 흥분한 모습에 놀란 시바다 기자는 유창한 한국말로 『진정하시고 찾아 온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국 정치범 동지회 대변인 孫昌植이란 사람이오. 대통령에 두 번씩이나 출마한 야당 지도자 金大中 선생의 출생이 의혹스럽다며 新군부 구미에 맞는 이런 얼토당토 않는 글을 쓴 것을 보면 당신은 全斗煥 소장의 1등 첩자임에 틀림없소. 당신을 국제법에 의하여 제소하겠소』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소?』
『당신에게 이따위 허위 정보를 제공한 취재원을 가르쳐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행동을 국제 사회에 폭로하겠소』
『취재원은 알려 줄 수 없고, 金大中씨 호적 초본은 드릴 수 있소』
더 따져보았자 소득이 없다고 판단한 孫씨는 시바다 기자가 건네주는 호적초본을 받고 사무실을 나왔다고 한다. 孫씨는 시바다 기자가 쓴 「金大中의 좌절」이란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金大中씨 家系와 만나야 할 사람들의 윤곽을 파악하는 한편, 하의도 출신의 金海 金씨로 金大中씨와 같은 집안인 金敬仁(김경인) 前 의원을 수시로 찾아갔다고 한다.
『金敬仁 前 의원은 金大中씨보다 나이가 두 살 정도 어리고, 초등학교는 목포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木浦에서 8대, 9대 국회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문중 사람들의 근황과 하의도 사정에 밝았습니다』
대충의 윤곽을 파악한 孫씨는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上衣(상의) 윗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소형 녹음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준비를 마친 孫씨는 1988년 4월, 난생 처음으로 하의도를 찾아갔다.
세 개의 녹음기를 준비하다
―어떤 방식으로 탐사를 하였습니까. 『낚시꾼 차림으로 변복하여 金大中씨 출생지인 전남 신안군 하의島와 그 인근 섬인 상태도·하태도·장병도·옥도 등지를 찾아가 그곳에 사는 村老들의 말을 녹음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쉽게 입을 열었습니까.
『보통 경계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기 몇 년 전에 젊은 사람 하나가 면사무소에 찾아와 金大中씨 호적을 떼려다 뺨까지 맞았고, 객지 사람들에게는 金大中씨 얘기를 하지 말자는 동네 회의까지 있었다고 합디다. 金大中씨 호적서류를 떼기 위해 하의면사무소 직원을 인근 다방으로 불러내어 차 한잔을 사주고 부탁하다가 저 역시 면박만 당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가 하의도에서 맨 처음 만난 사람은 金大中씨의 하의보통학교 동창생이었습니다. 그는 金大中씨의 어릴 적 이름이 윤성만이라는 정도만 이야기했고, 제가 「그 윤성만이가 오늘날 그 유명한 金大中 선생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언제였습니까」라고 묻자, 그때부터 입을 다물고는 가버렸습니다.
그 노인을 통해 알게 된 다른 동창생을 찾아갔더니 金大中씨와 관련된 질문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보고 『당신, 中情(중앙정보부) 사람 아니냐』고 따지 듯이 묻다가, 제가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어느 신문사 기자냐』고 물었습니다. 이 노인을 통해 얻은 유일한 수확은 金大中씨가 1923년생 돼지띠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탐사작업은 동네 사람들의 경계심으로 소득 없이 끝났지만, 木浦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만난 장사꾼들로부터 하의도 일대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의도 인근 섬에서부터 서서히 시작해 실체에 접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녹음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소형 녹음기 한 개로는 준비 부족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문부터는 녹음기 세 개를 준비했습니다. 하나는 상의 윗주머니에 넣고, 또 하나는 소형 라디오 속에 숨기고 나머지 한 개는 舊形(구형) 핸드폰처럼 개조했어요. 시험을 해보니 한두 개는 항상 녹음이 되었습니다』
金大中 생모의 첫 남편은 제갈성조
―출생의 내막을 개략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金大中 대통령의 생모는 張鹵島(장노도·나중에 장수금으로 개명)라는 분인데, 1893년 전남 신안군 하의면 오림리에서 張之淑의 장녀로 태어나 1971년에 사망하였습니다. 호적에 따르면 그분은 열여덟 살이 되던 1911년에 하의면 大里(대리)에 살던 諸葛成祚(제갈성조)라는 사람과 혼인을 하는데, 이 남편이 요절하였습니다.
문제는 金大中 대통령 어머니의 「호적상 첫 남편」 諸葛成祚의 호적 서류가 법원과 면사무소 양쪽에서 모두 폐기되고 없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출생에서부터 사망까지를 기록하는 호적 서류는 그 중요성 때문에 행정부(본적지 관할 面사무소)와 사법부(본적지 관할 법원) 양쪽에서 영구 보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張鹵島가 諸葛成祚와 혼인했다는 사실은 하의면 사무소에 보관 중인 諸葛成祚 부친의 제적부에 남아 있습니다.
호적은 맨 첫 장에 호주 이름이 나오고 이어서 출생순서에 따른 자식들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諸葛成祚에게는 형이 한 명 있었습니다. 諸葛成祚 부친 호적에는 諸葛成祚 형과 관련된 기록은 남아 있지만, 묘하게도 諸葛成祚 부분만 毁棄(훼기: 특정 페이지가 사라지고 없음)돼 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諸葛成祚 부분만 찢어 버린 것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張鹵島가 諸葛成祚의 妻고, 諸葛成祚가 죽은 뒤 張鹵島가 그의 부친 張之淑 호적에 再입적되었다는 단 한 줄의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오른쪽 사진 참조).
이를 근거로 하여 저는 하의면을 관할하는 光州지방법원 木浦지원에서 보관 중인 諸葛成祚 부친의 호적 원부 및 除籍(제적) 원부에 대해 「인증 등본」을 신청하였습니다. 「인증 등본」은 법원에 보관 중인 서류가 官에서 인증하는 절차를 거쳐 발급되었음을 말합니다. 이 신청에 대해 光州지법 木浦지원은 諸葛成祚에 대한 서류가 폐기되었다고 통보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金大中 대통령의 경우, 어머니의 호적상 첫 남편 호적서류가 법원에서는 폐기해 버렸고, 면사무소에는 부친 제적부에 일부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결혼과 함께 부모 호적에서 제적된 張鹵島가 1925년에 아버지 張之淑 호적에 再입적되었다는 점입니다. 1925년이라면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과 맞물립니다. 金大中 대통령의 호적에 의하면, 그는 외할아버지 張之淑에 의해 檀紀(단기) 4257년(서기 1924년) 출생신고가 되었습니다. 출생신고를 외할아버지가 했다는 것은 부친의 존재가 호적에 이름을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金대통령은 생모 張鹵島가 1960년에 金云式과 혼인하면서 金云式의 「嫡出子(적출자)」가 되었습니다. 1960년이라면 張鹵島의 나이 쉰일곱일 때의 일입니다. 스물여덟 명의 증언을 비밀 녹음 동네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諸葛成祚는 결혼하고 몇 년 후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여자는 出嫁外人(출가외인)이라 하여 시집을 가게 되면, 남편이 죽더라도 시댁의 귀신이 되는 게 옛날 풍습입니다. 金대통령의 어머니도 남편 사망 후 계속 시댁에서 살았는데, 시숙(남편의 형)이 한 분 있었습니다. 이 시숙이 울타리 하나를 담장으로 하여 제수와 나란히 살면서 홀몸이 된 제수를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諸葛成祚 사망 후에서 시작해 張鹵島가 친정 호적에 재입적되는 1925년까지가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을 둘러싼 미궁의 세월입니다. 金대통령의 초등학교 동창생들과 金대통령 문중 사람에 따르면 金대통령은 돼지띠(1923년생)라고 합니다. 金대통령 본인도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돼지띠인 내가 뱀띠인 朴正熙 후보를 잡아먹을 수 있다」며 돼지띠라고 말했습니다.
金대통령 호적을 보면 알겠지만, 기재 내용을 정정하는 도장이 무려 아홉 개나 찍혀 있는데, 이것만 봐도 출생 내막이 복잡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왼쪽 사진 참조).
하의도 일대 村老들에 따르면 金대통령이 출생하기 얼마 전에 張鹵島는 시댁에서 멀리 떨어진 후광리에서 소금 장사들을 상대로 주막집을 차렸답니다. 이 주막집에서 金대통령이 출생했습니다. 하의도에 지어 놓은 金대통령의 生家가 이 주막집입니다.
주막집 시절에 金 前 대통령의 어머니는 尹모씨와 상당 기간 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金대통령의 어릴 때 이름이 윤성만이라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金대통령 어머니는 尹모씨와 살 때, 주막집에 드나들던 하의도 부자 金云式을 알게 되었고, 金云式이 마련해 준 집에서 살다가 1960년에 金云式과 정식 혼인신고를 합니다. 金云式은 金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입니다.
金云式에게는 본처가 있었습니다. 본처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大本(호적상 이름은 大本인데, 비석에는 大奉이라 적혀 있고 동네에서도 대봉이라고 불렀음)씨가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신고된 사실을 알고, 金大中씨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면서 동네가 시끄러워지고, 동네 사람들이 출생의 내막을 알게 됩니다.
저는 金대통령의 생모 張鹵島 집안 사람과 張鹵島의 「호적상 첫 남편」 諸葛成祚네 사람들, 그리고 金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 金云式 문중 사람들과 張鹵島와 일시 동거했던 尹모씨 친척들을 만났습니다. 1950년, 60년대에 하의도 面사무소 호적계에 근무했던 직원들도 접촉했습니다. 이 가운데 스물여덟 명의 말을 비밀 녹음했습니다』 金大中을 죽이려한 그의 이복 형
―金대통령의 생모와 일시 동거했던 尹모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몇 년 전에 세상을 떴는데, 가정적으로 참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妻복도 없고, 아들복도 없었습니다. 아내를 얻기만 하면 딸만 낳고 죽어 버려 세 번 결혼에 딸이 여섯이나 되었답니다. 그런 형편이었던 터라 주막집 여주인 張鹵島가 아들을 낳자, 尹성만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겁니다』
―金대통령 호적에는 尹모씨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요.
『친척분 말은, 그때 尹모씨에게는 장성한 딸들이 있었답니다. 딸들은 바람기 문제로 아버지와 자주 다투었다고 합니다. 「이 아들이 과연 아버지 자식이 맞느냐」고 따지기도 했다는 거지요. 또 하나 이유는 尹모씨의 벌이가 시원찮아 주막집 아낙 張씨와 싸움이 잦았다고 합니다. 자식들 공부도 못 시키고 호적에도 올리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살아가던 중 金云式 영감이 나타난 것입니다. 尹모씨 딸들은, 자기 아버지가 金大中씨를 호적에도 못 올려 주고 학교에도 못 보내 준 게 두고두고 죄라고 합니다. 그 바람에 尹씨니, 金씨니, 諸葛씨니 하며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金云式씨는 어떤 분입니까.
『그분의 큰아들 大本씨와 친구라는 사람에 의하면, 돈 많고 술 좋아하고 노래 잘하고 잘 놀았던 멋쟁이라고 합니다. 金云式 어른이 주막집을 드나들면서 尹모씨가 꼼짝을 못했다고 합니다. 金云式 어른이 매일 주막을 차지하고 앉아서 술 먹고, 자고 가기도 하니까 누가 술집에 옵니까. 그래서 張씨는 술집을 그만두고 金云式 어른이 차려준 세 칸짜리 집에서 金大中씨 형제들을 키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金大中씨 어머니를 위해 木浦에 여인숙을 차려준 분이 金云式 어른입니다』
―金云式씨 부인에게는 기분 나쁜 일이었을 텐데요.
『남편이 저지른 일인데 어쩔 수 없이 큰집, 작은집하며 살았답니다』
―金云式씨의 큰아들과 金대통령의 사이는 어땠습니까.
『어릴 때는 나쁘고 좋고 할 게 없었는데, 金云式 노인이 1960년에 본처와 이혼하고 張鹵島와 혼인신고한 사실을 面사무소 직원으로부터 전해듣고는 그때부터 金大中씨를 죽이려고 했답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고, 집에 불을 지른다고 고함치면서 자기 아버지까지 때려, 동네 사람들이 말리느라고 난리였답니다.
大本씨는 식칼을 들고 몇 차례나 木浦에 있던 金大中씨를 쫓아갔답니다. 그럴 때마다 金大中씨는 목포 선창가에 지프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형을 술집으로 데리고 가, 술을 사주었답니다. 大本씨는 목포 여관에서 며칠씩 머물다 동생이 돈을 듬뿍 주면 그제서야 하의도에 내려가, 낮부터 저녁까지 허구한 날 술만 먹었답니다. 그러니 그 집이 온전할 리가 없지요. 몇 해 못 가서 大本씨는 술병이 나서 어머니,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 말았습니다』
주막집에서 있었던 일
―金云式의 말년은 편했습니까.
『1974년에 돌아가셨는데 늙어서 설움을 많이 받고 살았답니다. 金大中씨 어머니한테 천덕꾸러기 대접받으며 서울 동교동 집을 다녔다고 합니다. 영감(金云式)이 동교동에 가서 소파에 앉아 있으면 張鹵島는 「뭐 한다고 여기까지 왔소. 당신이 대중이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또 찾아오냐」며 무안을 주었답니다. 그러다가 며느리(李姬鎬 여사)가 봉투에다 몇 만원을 넣어서 탁자에 올려놓으면 그걸 들고 슬그머니 내려오고 그랬다는 겁니다.』
―金대통령은 어머니가 金云式과 살기 전에 태어났으니까 尹씨가 맞겠네요.
『尹씨 친척 분을 만났더니, 尹씨 생전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金大中이는 자기하고 살기 전에 주막집 아낙이 밴 아기인데 자기하고 살면서 낳았고, 그(金大中)의 동생은 자기하고 살면서 생겼으니까 자기 아들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金대통령이 諸葛씨라는 근거가 그것입니까.
『하의면에 살고 있는 나이 많은 어른들은 다 諸葛씨라고 했고, 金海 金씨 문중 어른들도 諸葛씨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諸葛成祚란 사람의 집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형과 동생이 나란히 살았는데, 동생 諸葛成祚가 요절한 뒤 시댁에 살고 있던 제수를 시숙이 돌본다고 하면서 제수 집을 드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시숙이 제수를 위해 시댁에서 멀리 떨어진, 뻘이섬 또는 봉도라고도 하는 鹽田(염전) 옆 부둣가에 주막집을 차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주막집에 시숙 친구가 되는 尹모씨가 살게 되었는데, 석 달인가 넉 달 만에 애기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애가 金大中씨라는 것이 金海 金씨 문중 어른의 말입니다. 아들이 귀한 尹모씨가 자기의 성을 따서 윤성만이란 이름을 지어 주긴 했지만 실제로는 諸葛씨라는 것이지요.』
―諸葛씨 쪽에서도 그런 사실을 인정합니까.
『70세 후반의 諸葛 家(가) 할머니로부터 똑같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열 살 때, 시숙이 제수씨 방에서 나오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본 것만 몇 번 된다고 하였습니다. 열 살 때 일을 어떻게 지금까지 기억하느냐고 저도 추궁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 말은, 그 때 열 살이면 밥도 하고, 애도 보는 나이였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열 살쯤 더 먹은 언니도 시숙이 제수씨네 방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했다고 그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張鹵島는 시댁을 떠나 뻘이섬에 주막을 차렸답니다. 그 할머니가 클 때는, 여자들끼리 모이면 諸葛成祚의 형이 金大中씨 아버지라고 소문이 났다고 했습니다.』
―諸葛씨 사람들은 지금도 하의도에 살고 있습니까.
『諸葛成祚의 형은 1958년에 고향을 떠나 내륙 모처로 이사 갔습니다. 제가 그곳까지 찾아가 그분 후손들을 만났지만 전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증언자들은 모두 생존해 있습니까.
『1999년 정초에 네 명이 사망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金弘一에게 진실을 이야기하다
孫씨는 「金大中 출생비밀」의 탐사작업을 기록한 녹취록을 기자에게 보여 주었다. 녹취록에는 孫씨가 만났던 사람들이 A노인, B씨 등 익명으로 기록돼 있고, 그 옆에는 성별, 나이, 만난 날짜가 적혀 있었다. 200자 원고지 500장 분량의 방대한 기록이었다.
『이 녹취록은 법원에 증거로 제출하기 위해 제가 3회에 걸쳐 다시 듣고 확인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당사자들은 제가 녹음하는 줄도 모르고 말했기 때문에 이 녹취록이 공개될 경우, 행여 불이익이나 탄압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급적 실명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이와 사는 동네 정도는 표기하고자 하였으나 하의도 일대가 워낙 작은 동네이다 보니 금방 소문날 것 같았습니다. 사투리는 가능한 살렸습니다. 생략된 부분은 취재원 보호를 위하여 옮기지 않았고요. 녹취록 원부는 CD(콤팩트디스크)에 수록해 놓았고, 녹음테이프는 외국에 거주하는 친구의 은행 비밀금고에 보관돼 있습니다.
저는 1심 재판에서는 이 녹취록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金大中 대통령 측에서 제가 한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송을 취하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되자 저도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항소심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했는데 증거 채택이 되지 않았습니다. 증거로 채택되면 재판기록에 첨부돼 영구 보존되고 열람이 가능합니다. 아마 재판부로서는 이 점을 우려했던 것 같습니다』
―「金大中 출생비밀」에 대한 탐사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동교동에서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 작업의 결과를 혼자만의 비밀로 영원히 간직할 것인지, 아니면 金대통령에게 直言하여 뒤늦게라도 진실을 밝히도록 할 것인지 하는 문제로 고민하던 끝에 목포에 거주하던 하의도 출신 사업가를 만났습니다. 金海 金씨 문중 사람 중에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중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친구가 金大中씨는 諸葛씨라고 하는 말에 격분해 그 친구와 대판 싸움을 벌였고, 그 뒤 동네사람들이 쑥덕거리는 것을 알고 어른들께 사실대로 바로잡자고 건의했다가 야단맞은 일도 있는 분입니다. 그분이 그러더군요.
「이 문제는 본인과 무관한 부모 책임이다. 따라서 金大中씨 스스로, 우리 어머니는 참 불행했고 나도 불행했다라고 국민에게 솔직하게 얘기해야 한다. 어쩌면 귀싸대기를 맞을 수도 있겠지만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많은 내용을 알고 있는 당신이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겠다는 당초의 목적은 실체에 접근할수록 본궤도를 벗어나 버렸습니다. 해답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해답을 안다고 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그냥 돌아갈 뿐 멈출 수 없는 수수께끼였습니다.
갈등 끝에 저는 金대통령의 큰아들 金弘一씨를 만났습니다.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金大中씨가 국민회의를 창당하고 난 이후입니다. 동갑이고, 대전형무소 감방 동기였던 그에게 제가 조사한 얘기, 들었던 얘기를 다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金大中 선생은 대통령이 되어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어머니는 불행한 분이다. 때문에 나의 소년기도 외로웠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야망과 노력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정도는 밝히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저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냉담이었습니다. 동교동 측근들을 만날 수 없었고, 다시는 동교동을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동교동의 장벽은 참으로 높았습니다.』
金大中만이 풀 수 있는 새끼 꼬기
당시의 심정을 孫씨는 녹취록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나도는 金大中씨와 관련된 해괴망측한 소리들의 진원지가 하의도였다니. 내가 그렇게도 궁금해 왔던 金大中 선생의 실체가 하나씩 들춰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참담했다. 全斗煥, 金鍾泌 등 金大中 선생의 政敵들에게 『당신들은 거짓말쟁이오』라고 외치고 싶었던 내 생각들이 점점 스스로 자멸하고 있는 게 아닌지 나는 두려웠다.
역사를 밝히고, 올바른 人物史 추적을 위하여 소리 없는 투쟁가처럼 과연 나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 내가 출생의 비밀을 밝혀낸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더 이상 추적해야만 할 필요가 있는가? 있다면 그 답은 金大中 선생 본인만이 갖고 있을 것이다. 金大中 선생이 答을 한다고 해서, 아니 答을 안 한다 하더라도 어쩌란 말인가.
선생이 해야 할 일은 이제라도 호적 정리를 하는 것이다. 호적정리를 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잘못 각인돼 있는 「金大中」을 새롭게 바꿔야 한다. 누가 하는가? 그것은 오로지 金大中 선생 본인만이 풀 수 있는 「새끼 꼬기」가 아닌가.
이 탐사작업을 하면서 때로는 봉변도 당했고, 기관원들이 눈치를 챌까 봐 긴장되고 두렵기도 하였다. 직장도 없는 상태에서 몇 년 동안 돈벌이도 되지 않은 일에 매달린 家長으로서의 책임도 나를 고달프게 했다.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집사람 볼 낯도 없었고, 점차 쇠약해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金大中 선생에 대한 나의 애정을 식혀 버렸다>
이 탐사작업을 통해 孫씨는 많은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인생 후반기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족쇄로 작용했다.
―金大中 대통령이 金씨가 아니고 諸葛씨란 사실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길소식지에 실렸습니다. 그 기사는 직접 쓴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썼어요. 한길연구회 간사장 겸 한길소식지 편집인이었던 저도 원고를 보지 못했습니다.』
―검찰 조사를 몇 번이나 받았습니까.
『7개월 동안 열여덟 번 검찰에 불려 나갔습니다. 조사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했는지는 몰라도 주로 야간에 출두하라고 했어요. 담당 검사가 金海 金씨였는데, 제가 조사한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 내막을 소상히 이야기하니까 놀라더군요. 담당 검사는 출생의 실체를 다 알 것입니다. 그러나 제 진술을 듣기만 할 뿐 조서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검사는 저보고 「조사만 하지 기소하지는 않겠다」고 하더니 기소 만기일인 1998년 6월18일에 저를 기소했습니다』
1심 첫 재판은 1998년 7월14일 오후 4시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밤 8시에 열렸다. 다른 재판이 다 끝난 뒤였다. 서울형사지법 319호 법정의 방청객은 孫씨의 친구인 李京植씨와 趙福衡씨가 유일했다. 이날 재판에서 孫씨는 冒頭(모두) 발언을 통해 재판장과 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재판은 누구를 위한 재판입니까. 이 재판이 대통령의 통치에 보탬이 됩니까. 입에 담기조차 조심스러운 현직 대통령의 출생과 관련된 재판입니다. 두렵고 무서워서가 아니라 不敬스럽기 때문에 재판을 취소해 주십시오.』
재판이 시작되자 金弘一 의원의 측근이며 孫씨도 잘 아는 현역 국민회의 의원이 孫씨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돈과 자리를 제의하며 입을 다물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해외 대사관에 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까 국내를 떠나라고 해요. 돈도 10억인가 20억을 준다고 했어요. 제가 그랬어요. 명예훼손 사건이니까 訴부터 취하해 달라고요. 세 번인가 찾아왔는데 訴 취하를 안 하니까 계속 재판을 한 겁니다.』
혼자서 재판 준비
―재판을 받는 심정이 어땠습니까.
『첫 재판 기일을 통고받은 뒤, 이틀인가 사흘일인가를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잤어요. 변호사도 없이 재판하는 놈이 잠만 자니까 친구들은 저를 속이 없는 사람으로 봤을 거예요. 그러나 저는 원칙대로 살아왔으니까 꿀릴 게 없었어요.』
―변호사는 누구였습니까.
『세상인심이라는 것이 참 웃기더라고요. 25년을 야당생활하면서 제가 주로 맡은 분야가 인권입니다. 구속된 운동권 학생들과 야당 당원들의 변호사 선임이 인권국장인 저의 일이었으니까 세칭 인권 변호사라는 사람들을 많이 압니다. 그분들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더니 노골적으로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맡지 않았으면 하는 낌새더라고요. 대통령과 관련된 사안이니까 겁이 났던 모양입니다』
―수임료를 못 받을 것 같아서 거절한 것 아니겠습니까.
『돈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피하는 거예요. 무지하게 서럽더라고요. 혼자서 재판 준비를 했습니다. 法大 출신인 李京植 선배로부터 법률적인 도움을 받았고, 남산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를 찾았습니다.』
―법정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오후 4시에 시작한다고 하고는 밤 10시에 개정하는 재판은 처음 보았습니다. 재판이 언제 시작될지 모르니까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못 먹고 법정에서 기다렸지요. 오후 7시나 8시쯤 재판이 시작돼 끝나고 나오면 컴컴했어요. 텅 빈 법정에서 재판부하고 검사하고 나하고 셋이서 재판을 했으니까요』
이 재판은 불행의 씨앗을 남기는 계기
―증인 신청도 했습니까.
『金鍾泌씨와 全斗煥 前 대통령을 증인으로 신청했지요. 「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이 붙었던 金海 金씨 문중 제사에서 초헌관이 金鍾泌씨였기 때문이고, 全斗煥씨는 金大中씨에 대해 「대통령은 고사하고 자기 姓氏나 찾도록 하라」는 발언을 했기 때문인데, 재판부가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재판장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1심 재판장이 대구분이었어요. 대구는 신성무역 다닐 때 살았던 곳이라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하는 뎁니다. 재판장한테 호의를 가졌고, 재판장도 저한테 호의적이었습니다. 1심 때는 金弘一 측 사람이 저를 찾아오고 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정을 재판장에게 얘기했더니 만나보고 나서 재판하자며 재판 날짜를 계속 연기해 주었습니다. 재판장도 화해를 원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홉 번째 재판을 하는데 시작하기 전부터 재판장 얼굴이 상기돼 있더라고요. 그러더니 선고를 하는 겁니다. 그 후 재판장은 법복을 벗었습니다.』
―항소심의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1심과 똑같았습니다. 제가 신청한 증인들과 제가 제출한 증거들을 재판부는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審理(심리) 미진과 採證(채증) 법칙 위반 등을 이유로 상고했는데, 대법원에서 역시 기각했습니다. 제 사건은 1999년 10월26일 종결되었습니다.』
―재판의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金大中 정부가 왜 저를 기소했는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이 재판은 불행의 씨앗을 남겨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제 친구나 친척, 심지어 제 아내에게도 金大中씨 출생 비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金大中씨 본인이 직접 말하기 전에는 제가 들었던 얘기들을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을 했습니다.
제 녹음테이프가 공개될 경우, 증언자들에게 미칠 金大中씨 측의 협박, 공갈도 두려웠지만 제 질문에 순수하게 대답해 준 하의도 주민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가 녹음하는 줄도 모르고 투박하게 응해 준 그들의 눈망울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증언자들뿐 아니라 하의도에서 터를 박고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2세나 3세, 4세에 미칠 파장이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재판으로 인해, 제가 했던 일은 제 뜻과 다르게 공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숨길 게 없습니다. 저에게 유죄를 선고한 이 재판은 제 개인에게도 불행이지만 金大中 대통령에게도 불행입니다』
―생활은 어떻게 꾸려 나갔습니까.
『金泳三 정부 시절에 광주사태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이 나왔습니다. 1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던 저도 몇 천만 원의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살았습니다.』
하의도를 찾아가다.
2001년 여름, 기자는 孫昌植씨의 탐사 작업을 검증하기 그와 함께 하의도를 찾은 적이 있다. 金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 金云式이 살았던 집은 대리마을에 그대로 있었다. 金云式은 문중의 종손이었지만 처가 두 사람인 관계로 문중 묘소에 묻히지 못하고 집 뒤의 산에 묻혔다. 金云式 묘를 바라보고 왼쪽에 그의 본부인 金順禮 묘가 있고, 그 오른쪽에 張鹵島의 假墓가 있었다.
金云式-金順禮 묘는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으나 金云式-張鹵島 묘 사이는 그보다 훨씬 간격이 넓었다. 남자가 두 여자를 거느리다 죽으면 첩의 경우엔 본부인보다 묘 사이의 간격을 더 두는 게 옛날 풍습이다.
金云式 묘는 破墓(파묘)가 되어 봉분은 있지만 유골은 없었다. 유골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두고 경기도 龍仁으로 옮겼다. 金대통령은 용인 묘소에 金云式-張鹵島만 合葬(합장)하고, 金云式의 본처 金順禮 묘는 고향에 그대로 두었다.
金云式 묘소 바로 위에 金대통령의 배다른 형 金大本 묘가 홀로 있었다. 묘 앞에는 비가 서 있는데 앞에는 「金海 金公 大奉之墓」(김해 김공 대봉 지묘)라 쓰여 있고, 뒤에는 「弟 大中 追慕 奉立」(제 대중 추모 봉립)이라 새겨져 있다. 동생이 형을 추모해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묘 곁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을 때 孫씨가 기자에게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다.
『출생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사람의 입을 막고, 호적서류 일부를 없애고, 관련자들을 핍박했으니 정치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저는 지혜롭거나, 요령 있게 살지를 않았습니다. 적당하게 하는 식으로 살지도 않았습니다. 사는 방식이 서툴렀는지는 몰라도 미련이나 후회는 없습니다』
孫昌植씨는 光州 5·18 묘역에 묻혔다. 기자는 유족의 요청에 따라 그의 碑文을 썼다.
<30대의 그는 기업인이었고, 40대의 그는 민주화 투사였다. 그는 富貴와 榮華 대신에 신념을 위해 살았다. 故人의 진지한 삶에 대하여 많은 민주화 동지들은 경의를 표한다>● 김대중과 전라도 김대중 컨벤션센터 http://www.kdjcenter.or.kr/ 전남 광주에 초현대식-초맘모스급의 화려한 시설, ‘김대중컨벤션센터’가 개관되었다. 9.6일 김대중이 개관식에 참석하여 호남인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는 소식이다. 그는 여기에서 미래를 향한 어떤 연설을 한 것이 아니라 “호남인들이 사랑해 줘서 고맙다.” “부동산에 투기하는 돈이 북으로 가서 북도 살고 우리도 살았으면 한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에 수많은 국민이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호남인들은 김대중이 무슨 말을 하던 “위대하신 슨상님”으로 모신다. 여기에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예전에 호남인들이 김대중을 지지한 것은 그가 '호남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지역 정서상 그럴 수 있다고 인정을 했다. 그러나 지금의 김대중은 국민을 속여 가며 적장에 군자금을 대준 빨갱이다. 그는 혼외의 딸을 낳았고, 출세를 위해, 한 때 사랑했던 모녀를 수십 년간 사회 한 구석에 맷돌로 눌러놓았다. 사랑을 속삭였던 옛 연인은 정신적으로 시달리다 자살했고, 사랑의 열매라던 딸은 입이 철저히 봉쇄당한 채,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고 있다. 당시 경향신문과 조서들을 보면 그는 천하의 사기꾼이며,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다. 다른 지역 국민들의 대부분이 증오하고 침을 뱉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바로 김대중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실들에 대해서는 호남사람들이 늘 주장하듯이 군사정권이 뒤집어씌운 모함이라 치더라도, 23세에 노동당에 입당했고, 적장에 군자금을 준 빨갱이라는 사실, 혼외의 모녀를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시달리게 해온 냉혈한이라는 사실, 입만 열면 거짓말 하는 사람으로 멸시받는다는 사실만큼은 지식인들이라면 호남인들도 알 것이다. 김대중이 욕하는 이승만과 박정희는 대부분의 국민들 가슴 속에 가난한 애국자로 각인돼 있지만, 이완용보다 더 매국적인 김대중은 대한민국 최상의 돈부자로 회자되고, 대궐보다 더 호화로운 아방궁에서 살고 있다 회자된다. 이승만! 김대중 패들이 욕하는 것처럼, 그가 독재자였다면 “국민이 원하면 하야한다 는 단 한마디로 깨끗하게 경무대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떠나면서도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나갔다.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차량을 더 이상 탈 수 없다며 극구 사양했다. 김대중은 천문학적인 돈을 챙겼다지만 이승만은 아무런 재산이 없다. 그가 무슨 재산을 남겼는지 김대중 패들은 말해보라. 6.25 때, 이승만이 부산에 피란했을 때였다. 미국 대사가 소갈비 열 근을 사서 선물로 보냈다. 고기를 먹어야, 힘을 낼 수 있다는 간곡한 편지와 함께. 이승만은 그 고기를 되돌려 보냈다. 국민이 모두 못 먹고 고생하는데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혼자 고기를 먹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953년6월13일, 그는 미국이 한국정부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휴전을 하고, 포로석방에 대해서도 북한 측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함에 따라, 미군이 억류하고 있던 인민군포로 중, 북으로 가기를 원치 않는 2만7천명을 반공포로를 탈출시켰다. 미군이 지키고 있던 포로수용소를 한국군이 기습하여 포로를 석방시킨 것이다. 이에 미국이 화를 단단히 냈다. 미 국무장관 딘 러스크가 이승만에게 달려왔다. 이승만은 참새 몇 마리를 잡아다 새장에 넣고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성질 급한 새들이 나가려고 발광을 했다. 이 새들의 몸부림을 본 러스크 장관이 새들을 풀어주지 왜 가두어 두느냐고 했다. 이승만이 그러면 풀어주겠다고 순순히 대답했다. 이에 러스크가 ‘기르는 새일 텐데 아주 도망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이승만은 ‘저 새들은 훈련이 돼 있어서 금방 돌아 올 것’이라 답하면서 새장 문을 열어 주었다. 참새들이 신이 나서 날아가 버렸다. 아주 멀리. 한 동안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러스크가 걱정을 했다. 새가 왜 안 돌아오느냐고. 이에 이승만이 이렇게 말했다. “저 새들은 길이 잘 들여졌지만, 먹을 게 많이 있는 새장보다는 자유가 더 좋은 모양이다” 반공포로 석방을 항의하러 왔던 러스크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그 후 그는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으려는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단독 북진을 하겠다 으름장을 놓았다. 이승만의 엉뚱함에 기가 질린 미국은 그래서 1953년 10월 1일에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와 김대중을 비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박정희에 대한 모독이다. 박정희가 김대중처럼 모략전을 쓰고, 속이고, 사기치고, 부자 되고, 부인-아들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정현준-진승현-윤태식-이용호 게이트 등을 주도하면서 돈 빨아먹기에 혈안돼 본 적이 있었던가? 대한민국 국민 70% 이상이 이승만-박정희를 존경하는 반면 김대중을 멸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호남사람들만 빼면 거의 100%가 이승만-박정희를 존경하고 김대중을 멸시-증오하는 셈이다. 타 지역 국민들이라면 “김대중 컨벤션센터”가 자기지역에 지어지는 것을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봉이 김선달보다 더 황당한 금강산 사업을 벌여 놓고 1년에 1억 5천만 달러를 자동현금인출기처럼 돈을 뽑아 북에 보내주고, 몰래 5억 달러 이상을 주고, 2조 규모의 쌀과 비료를 주고, 남한에 있는 결핵백신 전량을 공무원 입단속 시키면서 걷어다가 북에 주고, 화장실 한번 가는데 4달러씩 주도록 만든 김대중, 그런 김대중을 아직도 슨상님으로 모시는 호남인들, 술좌석에서도 김대중을 욕하면 싸우려 덤비는 호남인들에 대해, 타 지역 국민들이 무슨 감정을 가질 것인지 호남인들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호남인들이 얼마나 더 지금의 억지 세도를 누릴 수 있을 것인지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다른 것은 다 모른다 해도, 빨갱이인줄 뻔히 알면서 그를 감싸는 호남인들의 행동은 분명 이질적이요 이방인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이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선거의 지역 구도를 허물자며 연정을 부르짖는다. 이는 헛소리다. 김대중 이전의 지역감정은 영-호남간의 감정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이후의 지역감정은 호남-비호남간의 감정으로 악화됐다. 지역감정의 골을 더욱 깊게 파고 있는 것은 95.2%의 노무현 지지율을 보일만큼 똘똘 뭉쳐 벌이는 호남인들의 이런 이질적인 행동, 어딜 가도 "티를 내는" 특이한 행동이지, 타 지역 사람들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다. 이는 호남인들이 알아야 하는 주제이며, 호남 지역의 지도적 인사들이 풀어야 할 숙제인 것이다. 전라공화국으로 독립하지 않고, 대한민국에서 70%의 비호남 인들과 어울려 살고 싶다면! 호화로운 '김대중 컨벤션센타'를 볼 때마다 비 호남인들은 역겨움을 느낄 것이다. 이승만 동상 끌어 내리고, 박정희 동상 끌어내리고, 맥아더 동상까지 끌어내리려 하면서, 온 국민을 향해 보란 듯이 광주에 초호화판 초맘모스 '김대중센타"가 세워지다니 이 무슨 위세란 말인가! 대한민국이 전라공화국의 속국이라도 됐다는 말인가? 어느 날 그 건물은 호남인 전체에게 치욕의 모뉴멘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치욕의 김대중 컨벤션센타" 마지막으로 호남 지도층에 부탁한다. "부동산에 투기하는 돈이 북으로 가서 북도 살고 우리도 살았으면 한다 -2005.9.6. 김대중-” 이 김대중의 말을 '김대중 컨벤션센타'에 크게 새겨줄 것을! ---------------------------------------------------- 천황폐하, 인사받으십시오. 와다시와 도요타상데스 친일파의 거두 김대중! 김대중을 말하지 않고서는 친일파를 말 할 수 없다. 히로히또 일왕은 한국을 침략하고 세계 대전을 일으킨 실제의 전범이었다. 김대중의 일생 요점정리 김대중의 출생 김대중은 1926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1924년생이라는 주장들이 많다. 소위 “김대중의 출생비밀”에는 생년월일과 아버지의 성씨에 대해서도 불분명하다는 의혹들이 들어 있다. 1980.5.18일자 경향신문에 나타난 출생비밀은 아래와 같다. 김대중의 생모는 장오도 여인(71년5월9일 사망), 1911년 제갈성조와 결혼했다가 사별했고, 1920년에 윤창언의 셋째 첩으로 입적했으나 역시 사별했다. 그 후 본 남편 제갈성조의 친형인 시숙 제갈성복의 도움으로 주점을 경영하다가 김대중을 임신한 상태에서,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 사는 김운식의 첩으로 들어가 1924년 11월 16일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김대중을 낳았다. 김대중은 김운식의 서자로 자라면서 국민학교와 목포상업을 졸업한 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해운회사에 취직하여 일하다가 해방을 맞자 그 해운회사를 일본인으로부터 인수했다. 이때 그는 22세였다. 청년기 한편으로는 해운업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민당(후에 남로당에 합병)과 민주애국청년동맹, 전국노동평의회 등 "극렬 좌익정당과 단체"에서 활동했고 "남로당" 목포시 당청년부장으로 파출소를 공격하는 등 공산계 파괴활동에 참가했다. 27세 때, 6·25가 발발하여 목포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자 목포시 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역 행위를 관리했다. 인민군이 퇴각한 후, 남로당 섭외부장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했다는 죄목으로 전남도경에 검거됐었다. 한편 50-56년 사이의 목포해운회사를 경영하던 중 선원봉급과 배를 판돈 1억 5천만원을 횡령하여 도주했다. 1956년, 33세가 된 김대중은 이 일로 해운회사 부사장인 나상수로부터 고발당해 강원도로 피신한 후 민주당에 입당했다. 1959년 6월, 36세가 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자 빚을 지고 생활고에 허덕였다. 이때의 김대중의 처는 차용수, 현재 생존해 있는 차 모 목사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빚에 시달리고 계까지 깨지는 바람에 세상을 비관하고 음독자살을 했다. 정치꾼-사기꾼 시절 1959년 6월, 36세가 된 김대중은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바로 이 때 또 다른 횡령사건이 발각된다. 선거기간 중 투개표 입회원이었던 문수룡(文壽龍)이라는 사람이 돌연 급사하자, 민주당에서는 문수룡을 순직으로서 처우하고, 당중앙 간부가 조의금 30만원을 모아 김대중씨를 통해 유족에게 건네주도록 했다. 그런데 김대중씨가 이중 12만원만을 유족에게 건넸을 뿐 나머지 18만원을 착복했다. 이 사실을 안 당시 민주당원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이 김대중씨의 파렴치한 횡령행위를 비난하고 민주당에서 탈당해 버렸다. 김대중씨의 조의금 착복사실이 널리 당내에 전해지자, 당내는 물론 선거구 전체의 비난이 집중됐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김대중씨는 반대로 탈당한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고발당한 네 명은 김대중씨를 횡령과 무고(허위신고)로 대항,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지만 그 후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났다 한다. 1960년, 37가 된 김대중은 서자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이 불리함을 알고 4남매를 거느리고 있는 의부 김운식과 그의 본처 김순례에게 호적상 이혼을 강요한 다음 그의 생모 장여인을 본처로 입적시켜 자신을 김운식의 차남으로 조작해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로 분가, 전적했다. 1960년 7월29일, 4․19혁명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7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4․19혁명으로 쓰러진 자유당의 이름을 내걸고 선전한 전형산씨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됐다. 이 때 김대중은 상대방 후보를 모략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지를 발휘했다. 자신의 선거참모를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구타하게 한 후, 상대당원이 테러를 했다고 역선전을 하기도 했고, 자신의 선거운동원에게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 유권자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상대당원을 가장하여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하는 허위선전을 해 상대방후보에 대한 반감과 불신감을 갖게 했으며, 김대중의 사인을 받아오는 자에게는 돈을 주게 하여 자신의 인기를 조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했는데도 낙선 당하자 김대중은 4백 명의 데모대를 조직, 군청개표소에 난입, 투표한 22개중 15개를 강탈한 후 전씨의 사퇴를 강요하는 연좌데모를 벌였다. 그후 민주당 정권이 전씨를 공민권제한 대상자로 만들어 의원자격을 박탈하자 김대중은 1961년 5월의 보궐선거에서 일방적으로 당선됐다. 민주당 국회의원이 된 김대중은 1961년 7월부터 민주당 선전부장이 됐다. 이 때에도 김대중은 또 다른 횡령사건을 저질렀다. 선전부장으로서 학원공작을 구실로 조달한 선거 자금 3천7백만 원 중 7백 7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검찰에 송치됐다. 1962년 10월, 39세가 된 김대중은 이희호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김대중은 국회의원시절에 처 이씨를 자신의 비서관으로 등록, 해외여행에 동반하기도 했다. 반정부 활동 1971년 49세가 된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유세도중 자기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당했던 교통사고를 박대통령 측이 저지른 암살음모라고 뒤집어 씌웠다. 김대중의 집안에 폭발물을 설치해 폭발시켜놓고 공화당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7대의원 당시에는 8대 국회의원 당 공천을 해준다고 속여 박종태로부터 5백만원, 김세종으로부터 3천8백50만원, 이원형으로부터 1백만원 등 4천4백50만원을 사취했던 기록도 있다. 그 후에도 국회의원이란 직위를 악용, 호남제분, 동아건설, 대한농산, 삼양수산 대표들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아낸 사실도 밝혀졌다.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패하자 그는 신병 치료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1971년, 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김병식 부주석으로부터 20만달러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1972년10월 유신 계엄령이 선포됐고, 선포됐고 국회가 해산됐다. 이에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의 중단, 망명정부수립, 김일성 정권과의 접촉시도 등 반국가적 행위를 감행했다. 1973년 4월에는 미국 하버드대 코헨 교수에게 한국의 박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미국이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도록 미의회 지도자에게 압력을 넣어달라고 호소했다. 또한 미국에서 북한을 방문한 친북괴 분자들을 만나 반국가 단체인 한민통을 조직했다. 이 시기에 그는 자민당 출신이면서도 좌파의원인 우스노미야 의원 등 일본 국회의원들의 지원을 받는 한편 반국가 단체로 규정된 "한민통"을 조직하여 의장으로 앉는 등 일본을 무대로 반정부 운동을 벌였다. 1973년 8월 8일, 그는 도쿄 팔레스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됐다. 이에 대해 박정권은 국내 야당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과 주권 침해라는 일본의 비난에 직면했지만 미국의 주선으로 일본 정부와 막후접촉을 벌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을 해임하고,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행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고, 김종필 총리의 방일 사과 등으로 마무리됐다. 이로써 이 사건은 86일 만에 정치적으로 매듭 됐다. 선동과 내란 음모의 시절 1974년 12월, 가택연금 중에 있던 김대중은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해 재야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1976년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함석헌·문익환·김승훈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주의, 경제입국 구상 재검토, 민족통일 등을 주장하는 '3·1민주구국선언'(일명 명동사건)을 발표해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어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확정 받아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투옥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이 고조되자 박대통령은 1978년 12월 그를 형집행정지로 석방한 후 가택연금으로 전환시켰다.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그는 1979년 3월1일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약칭 ‘국민연합’)을 결성해 윤보선·함석헌 등과 함께 공동의장을 맡으며 재야활동을 계속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면서 유신체제가 붕괴되자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동년 12월에 그를 가택연금에서 해제했다. 이어서 최규하 권한대행은 1980년 2월, 그를 사면복권시켜 주었다. 1980년 초 '서울의 봄' 시기에 그는 김영삼·김종필 등과 함께 가벼운 몸으로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섰고, 학원소요사태를 배후 주동하고, 학원소요의 위력을 과시하면서 최규하 정권의 즉각퇴진을 압박하다가 5월 17일 자정의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불러왔다. 이로 인해 그는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체포, 수감되어 광주소요 기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9월에 그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그를 즉각 사형시키자는 여론과 재야파들의 끈질긴 구명운동이 한동안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전두환은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을 만난다는 조건으로 1982년 12월, 그를 석방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열어 해외에서 활동하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했다. 지만원의 시국강연(김대중의 좌익행위) 이제는 나서야 한다 (2002.4월) 존경하는 애국동지 여러분, 50년 전에 우리는 참으로 가난했습니다.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이 새까맣게 우러러 보이는 선진국이었습니다. 북한도 우리보다 2배나 잘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북한보다 14배 더 잘 삽니다. 옛날의 선진국보다 우리가 더 선진국이 됐습니다. 누가 이런 엄청난 기적을 일구어 냈습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이 나라에 가장 자랑스런 세대입니다. 한국호 최대의 주주는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이 어인 일입니까! 잠시 방심하는 사이에 이 배는 희대의 비련아, 타이타닉호처럼 침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침몰되었습니까? 배가 두 동강이 나서 가라앉고 있는데도 승객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극히 일순간에 바닷물이 들이닥쳐 모든 생명을 무자비하게 훑어갔습니다. 바로 이 침몰의 순간이 우리 한국호에 무서운 속도로 달려옵니다. 희대의 사기꾼, 브로커, 청부업자, 조폭, 친북 세력들이 선장실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모든 1등실들도 저들이 점령했습니다. 선장에게는 세 아들이 있습니다. 그 아들들이 패거리를 이끌고 우리가 피와 땀으로 일구어 놓은 자산을 마음껏 노략질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저들은 이미 걸레가 되어 버린 이 한국호를 김정일에 바치려고 북으로 북으로 끌고 갑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몇 개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첫째가 국가보안법입니다. 적화통일 활동을 드러내 놓고 하려면 국가보안법이 걸리적거립니다. 그래서 저들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 합니다. 두 번째가 주한미군입니다. 주한미군이 있는 한, 적화통일은 어렵습니다. 2001년 3월, 저들은 기습적으로 김정일을 불러들여 평화선언을 선포함으로써 적화통일의 초석을 놓으려 했습니다. 이러한 음모를 막아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 미국의 부시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주한미군을 내몰자 합니다. 미국을 증오하자며 바람을 일으킵니다. 이번 4월20일자 평양방송이 이들을 독려했습니다. "미국은 조국통일의 기본 장애물이다. 남한의 애국청년들은 반미투쟁의 선봉에 나서라"며 저들을 선동했습니다. 셋째가 언론입니다. 저들의 이적행위와 노략질을 사사건건 폭로하는 신문들을 죽이거나 국영화 하자 합니다. 네 번째가 반공세력입니다. 저들은 우리를 냉전 수구 반통일 반동분자라며 증오합니다. 재벌들의 자산을 나누어 갖자 합니다. 가진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나누어 갖자 합니다. 농토를 빼앗아 나누어 갖자 합니다. 노동계급이 똘똘 뭉쳐 사회를 장악하자 합니다. 이는 1917년, 러시아 노동계급이 사회를 전복했을 때 사용했던 섬짓한 구호들입니다. 그들은 러시아에서 농토를 빼앗기 위해 1,000만명의 농민을 죽였습니다. 재산만 빼앗는 게 아니라 생명도 무참히 앗아갑니다. 이런 게 바로 좌익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타고 있는 이 배는 지금 어디쯤 끌려 와 있습니까? 저들이 노략질해간 부채를 우리가 떠 안았습니다. 자자손손 빚을 갚아야 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150조의 공적자금, 또 다른 200여조의 국가채무, 100여조의 연기금을 마구 풀어헤쳐 놓고 그 돈을 노략질했습니다. 우리는 이 노략질에 대해 알아야만 합니다. 저들은 돈을 풀어 가장 먼저 금융기관을 국유화했습니다. 은행에 빚을 진 600여 개의 대기업, 중견기업들을 국유화했습니다. 기존의 공기업이 405개입니다. 중앙정부가 108개, 지방정부가 297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1,000여 개의 대형 기업들이 한 순간에 정부 소유가 됐습니다. 이미 이 나라는 국영공화국이요 사회주의 국가로 변신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경영의 "경"자도 모르는 정치꾼들이 나가 연봉을 170%까지 올리고, 수당을 얼리고, 판공비를 수백 프로씩 올리고, 하청업체 및 조폭들과 야합히여 돈을 털어 갔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공자금을 넣어야 기업이 산다며 떼를 쓰고 있습니다. 공자금을 통제하는 부서도 없습니다. 풀어헤친 공자금은 그의 추종세력에게, 알아서 챙겨가라고 내놓은 돈입니다. 이걸 우리더러 갚으라 강요합니다, 세금을 올리고, 세무행패를 강화하고, 공공요금을 올리고, 거리마다 무인 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우리의 주머니를 털어 가는데 혈안이 돼 있는 것입니다. 전기료를 단 한번에 2배나 올렸습니다. 농촌 심야전기 시설비를 40만원에서 170만원으로 대폭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북한에 전기를 준다 합니다. 기업들이 은행에 담보로 잡혔던 토지와 건물도 정부가 차지했습니다. 정부는 자산관리공사라는 대형 브로커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1,600명이나 됩니다. 이 브로커 기구가 토지와 건물을 헐값으로 인수하여 급매물로 외국에 내놓았습니다. 골드만삭스, 론스타. 리만브라더스, 싱가포르투자청 등 해외 브로커 업체들에 고물가격으로 마구 팔아치웠습니다. 그들은 웬 떡이냐 싶어 이들을 사서 곧바로 다른 외국기업들에 되팔았습니다. 더러는 3배, 더러는 5배의 가격으로 횡재를 했다 합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외국 브로커 업체들이 자기 돈은 10-30%만 대고, 나머지는 국내 은행에서 빌려 가지고 샀다는 사실입니다. 돈을 빌려줘 가면서 외국인들에게 폭리를 준 꼴입니다. 왜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정권에 급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여의도의 60배에 해당하는 금싸라기 땅이 외국인 소유가 됐습니다. 2000년12월27일자 매일경제신문은 "웬만한 빌딩 치고 외국인 손에 넘어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고 보도했습니다. 이면계약의 존재에 대해서도 밝혔습니다. 강남에서 가장 큰 건물인 "현대 I-타워", 서울시청 옆에 있는 "파이낸셜센터", "벽산빌딩", "아시아나항공", "힐튼호텔", SK 증권, 동양증권, 쌍용증권, 고려증권, 대우증권, 여의도 KTB 빌딩, 은석빌딩, 한효빌딩, 대한방적 빌딩, 금호그룹 신사옥, 광주은행 사옥, "시티타워", "현대중공업빌딩" 등, 서울에서 가장 큰 건물들이 외국인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이렇게 팔아 넘긴 돈은 두 동강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공식계약서에 표시된 돈은 은행으로 들어갔고, 이면계약서에 쓰여진 돈은 저들의 주머니로 갔을 것입니다. 공식계약서에 잡힌 돈은 외환보유고로 잡혔습니다. 정부는 툭하면 외환보유고가 늘어났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잘난 외환보유고는 바로 이렇게 헐값에 팔아 넘긴 잔돈이었습니다. 이면계약서에 쓰여진 검은 돈이 더욱 클 수 있습니다. 애국동지 여러분, 은행 객장을 보십시오. 10년 전부터 은행 객장에 순번대기번호표 시스템이 설치됐습니다. 고질병인줄로만 알았던 무질서가 단번에 시정됐습니다. 이게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의 위력입니다. 자유시장경제는 이렇듯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시장에 "보이지 않는 손"을 설치할 생각을 하지 않고, 소수의 가신들에게 시퍼런 칼을 쥐어 주었습니다. 개혁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내걸고 기업을 도륙질 했습니다. 빅딜이라는 생소한 낱말로 국민을 혼돈시키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기업을 마음에 드는 기업에 합쳐 주었습니다. 워크아웃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말을 듣지 않는 기업을 망하게 하거나, 빼앗았습니다. 빼앗은 기업은 식솔들에 나누어주었습니다. 기업의 살생부까지 만들어 가면서 겁을 주었습니다. 기업의 운명을 거머쥔 실세들에, 알아서 돈을 바치라는 신호였습니다. 기업은 앞을 다투며 저들에게 상납을 했습니다. 저들과 선이 닿는 연줄을 찾아 대표이사 자리에 앉혔습니다. 벤처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이용해 사기도 쳤습니다. 청와대 식솔, 동교동 가신, 국정원, 조폭들이 총 동원되어 어린 벤처사장들과 사기 친 돈을 나눠 갖았습니다. 그야말로 난장판 놀이를 한 것입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복장이 터져 나갑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게 있습니다. 적화통일 음모입니다. 음모의 수장은 바로 이 나라 대통령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북한에 군자금을 대주었습니다. 남침 길을 활짝 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국민에게는 온갖 거짓말로 환각제 주사를 놓았습니다. 불순한 교사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그를 우상화시켰습니다. 청와대 비서가 김정일을 찬양했답니다. 월간조선 2000년 9월호에는 청와대 여비서가 했다는 말이 실려있습니다. "벌써부터 우리 장관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님께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을 뵙게 되었으니 저처럼 크나큰 영광을 지닌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2000년 8.11일, 대통령이 46개 언론사 사장들을 김정일에 보냈습니다. 그들은 국빈대접을 받으며 행복해 했습니다. 김정일의 술자리 매너에 반했습니다. 더러는 귀국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김정일을 찬양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상호비방 중지를 내용으로 하는 '남북언론합의문'을 교환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보도를 저들의 입맛에 맞추어 주었습니다. 그 때 김정일은 참으로 무서운 말을 했습니다. "통일은 내가 맘먹을 탓이다", "내 힘은 군력에서 나온다". 그래도 언론사 사장들은 그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김정일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김정일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9.7%나 된다 합니다. 초등학생의 90%가 김정일을 김대중보다 훨씬 더 위대한 사람이라 한답니다. 부인들 사회에도 김정일 오빠부대가 생겼다 합니다. 사회가 위험수위를 한참 넘은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이렇듯 환각상태에 있을 때 김정일은 무엇을 했습니까? 남북정상이 만난 직후에 김정일이 지시한 공문 내용을 보십시오. "나의 통일관은 무력통일관이다", "인민군대는 반미, 반일, 반괴뢰 구호를 더 높이 들고 계급의 총창을 보다 날카롭게 벼려야 한다.", "원쑤들과 한 번은 싸워서 결판을 내야 한다."고 다그쳤습니다. 반면 우리의 대통령이란 사람은 무엇을 했습니까? 99년 9월, 김대중 대통령이 타임지에 말했습니다. "식사 때 음식이 남으면 북한 동포들의 얼굴이 떠올라 몹시 괴롭다. 충분히 돕고 싶지만 국민여론이 부정적이어서 애를 먹고 있다". 99년 2월. 그는 일본과의 어업협정에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3,000여 척의 어선이 졸지에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어민들은 슬퍼했지만 그는 아니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 다음날 어선들을 북한에 보내자 했습니다. 같은 해 3월, 수많은 중소기업이 도산해서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습니다. 기계를 뜯어다 북한에 설치해주자 했습니다. 그는 어느 나라 대통령입니까? 중소기업과 농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황무지에 기름진 농토와 기계를 깔았습니다. 김대중대통령은 이를 깔아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사람이 한 일을 비교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김대통령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1960년까지 한국에는 일자리가 없었습니다. 박대통령은 느닷없이 기능학교를 많이 만들어 기능공을 양성했습니다. 기능공들은 국제기능올림픽에 나가 1, 2, 3등을 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습니다. 특사들을 보내 선진 공장을 유치했습니다. 외국 기업들이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을 활용하기 위해 우후죽순으로 몰려왔습니다. 순식간에 일자리가 폭발한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한물 간 기술도 들여왔습니다. 한국에는 그런 기술을 소화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외국에 나간 우리 과학기술자들을 대거 유치하여 기업을 가르쳤습니다. 너도나도 공장을 세워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도 엄청난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오늘날의 일자리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도로를 포함한 사회기반시설이 없었습니다. 여기에 많은 자금이 필요했지만 그 어느 선진국도 한국에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국군을 월남에 보냈습니다. 한국군의 활약상에 감동한 선진국들이 자진하여 돈을 꾸어주었습니다. 주월한국군 덕분에 월남에 진출한 건설사들이 노하우를 축적하여 개국이래 처음으로 중동 등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경부 고속도로는 정부가 떼어간 장병들의 전투수당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강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통령을 보십시오. 일자리를 만들기는커녕 죽이기만 했습니다. 공공근로자들에게 돈을 배급해 주었습니다. 하루에 2만3천원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산에 가서 일하는 사람은 3만7천원을 받습니다. 술 마시고 낮잠 자는 사람들에게 공돈을 주는 것입니다. 놀면서 돈을 받는데 누가 밭일을 하고 공장 일을 하겠습니까? 공장을 망치고 농촌을 망치기로 작정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박정희 대통령과 그를 비교해 보십시오. 한 사람은 나라를 일으킨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나라를 망치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박대통령은 이 황무지에 기계를 깔았습니다. 김대통령은 그 기계들을 뜯어다 북한에 설치하자 했습니다. 한전이 그의 뜻을 따랐습니다. 연간 5조의 적자를 내면서도 북한이 그 기계들을 돌려야 한다며 5,000억원을 들여 발전소를 지어주고, 송전선을 세워, 남한 전기를 보내겠다 복명했습니다. 2000년 10월. 60만톤의 식량을 날치기로 보냈습니다. 3,120억원어치였습니다. 98년4월부터 현재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104만톤의 비료가 갔습니다. 4,660억원어치였습니다. 2001년10월, 전국 보건소에 있는 결핵 백신을 한 병도 남기지 않고 싹 쓸어다가 북한에 주었습니다. 30만 명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보건소에는 입단속을 시켰습니다. 이는 어느 나라 정부입니까? 2000년, 러시아 대통령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러시아에서 받을 14억 7천만 달러를 받지 않을 테니, 러시아도 북한에서 받을 50억 달러를 받지 말아달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정부가 사용한 남북 협력기금이 매년 5,000억 이상입니다. 최초 2년간만 해도 1조 864억원이 집행됐습니다. 현대에 이어 다른 재벌들도 망치려 했습니다. 재벌들을 닥달하여 북한에 투자 명목으로 퍼준 돈이 5.960억 원이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북한에 간 돈은 2조 5,500억원입니다. 금강산 사업입니다. 금강산 사업은 사업이 아니라 적장에게 군자금을 대주기 위한 위장망이라는 사실을 국민이 모르고 있습니다. 금강산을 통해 10억 달러가 이미 갔습니다. 여기에 더해 몰래 준 돈도 있습니다. 얼마의 공적자금이 비밀자금으로 둔갑되어 갔는지, 누구도 모릅니다. 단지 이번에 미국이 그 중 4억 달러를 찾아냈을 뿐입니다. 적장은 이를 가지고 남침용 무기를 구매했다고 미국이 발표했습니다. 미국이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면 이는 분명한 이적행위입니다. 국민은 금강산 사업의 속임수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하루 입산하는 데 100달러를 바쳐야 합니다. 3일 코스에 300달러입니다. 이런 예는 지구상에 없습니다. 이에 비하면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더욱 기막힌 것은 관광객이 있으나 없으나 무조건 연간 50만명이 간 것으로 쳐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연간 1억5천만 달러를 자동으로 주는 것입니다. 지난 3년간 금강산에 간 사람은 모두 42만명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150만명이 간 것으로 계산해서 4억5천만 달러를 주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99년부터 2004년까지 6년에 걸쳐 '존재하지도 않는 독점사업권'을 명분으로 하여 9억4,200만 달러를 줍니다. 연간 1억5,700만 달러입니다. 앞으로 2년 후인 2004년 말이면 입산료와 독점권 명목으로 18억 6,200만 달러가 갑니다. 2조 5천억입니다. 그 돈을 주고 우리 관광객들은 어떤 관광을 했습니까? 바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켜도 안되며, 카메라를 빼앗기고, 민 여인처럼 감금되어 문초를 받았습니다. "한국"과 "대한"은 북한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이유로 한국일보 기자는 "한국"이라는 낱말 때문에 H일보라는 명찰을, 대한매일은 "대한"이라는 낱말 때문에 D일보라는 명찰을 달아야 했습니다. 이게 관광입니까 굴욕입니까. 관광에 대한 악 소문이 퍼지면서 관광객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관광객이 없어도 북한에는 자동적으로 매년 3억7백만 달러가 나갑니다. 관광객이 없는데 이렇게 많은 돈을 주면 비난이 쏟아집니다. 저들은 어떻게든 관광객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가공할 국민 총동원령입니다. 인구의 3분의1인 1,300만을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3년간 겨우 42만명이 금강산을 다녀왔습니다. 42만명과 1,300만명을 비교해 보십시오. 여기에 지원되는 국가 예산만 정확히 4조입니다. 정부가 4조, 국민이 2조, 합해서 6조를 금강산에 바치는 것입니다. 금강산은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등극하는 반면 설악산과 한라산은 초라하게 허물리고 있습니다. 산을 가진 우리 지역경제가 망가지고 있습니다. 북한 땅이 성지가 되고, 북한정권이 상전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준 돈이 무려 5조였습니다. 북한은 이 엄청난 돈을 가지고 무얼 했습니까?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신예전투기 50대를 구입했습니다. 스커드를 500기에서 600기로 늘렸습니다. 휴전선 대포를 25% 증강했습니다. 전차와 화학무기도 전방으로 추진했습니다. 휴전선에 전진배치된 군사력을 65%에서 70%로 늘렸습니다. 땅굴도 팠습니다. 10년이래 최대 규모의 훈련도 했습니다. 우리를 곧 군사력으로 먹겠다는 말입니다. 이런 기막힌 정보는 미국이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정부는 쉬쉬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현정부가 북한에 남침용 군자금을 대주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퍼주는 우리에게 북한은 고마워하던가요? 북한은 우리가 준 돈으로 최근 북한강 상류와 임진강 상류에 8개의 댐을 건설했습니다. 태백산맥을 관통하는 총 100㎞의 "지하수로"를 만들어 우리에게 흘러와야 할 물을 머나 먼 원산 앞 바다로 빼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북한강 상류에 유입되는 수량이 5분의 1 정도로 줄었고, 앞으로 수도권은 더욱 더 심한 식수난을 겪을 것이라 합니다. 북한에 홍수가 나서 수문을 열면 수도권 지역이 물바다가 된다 합니다. 저들은 우리가 준 돈으로 수도권을 물바다로 만들 수 있는 엄청난 무기를 설치한 것입니다. 배은망덕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국제법상으로 보면 임진강과 북한강은 남·북한이 함께 사용하는 공유하천입니다. 당사국의 동의 없이는 물길을 돌릴 수 없게 돼 있습니다. 이민족간에도 이런 일은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북한을 국제재판에 회부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동포가 한 일이라며 감싸주기만 합니다. 북한에는 이렇게 관대하게 하면서 남한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안보의식과 안보시스템을 통째로 허물었습니다. 무지비한 방법으로 언론을 탄압합니다.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의 가족을 해코지합니다. 전쟁은 없다며 안보 경각심을 허물었습니다. 병사들에게 총을 놓으라는 말입니다. 간첩도 잡지 말라는 말입니다. 주한미군의 용도가 폐기됐다는 말입니다. 주한미군 철수를 대통령이 부축인 것입니다. 제1의 주접근로에 깔린 지뢰를 깨끗이 제거해 주었습니다. 경의선과 고속도로를 개통하여 서울로 직결되는 남침로를 활짝 열어 주었습니다. 법정에서 사실상의 땅굴로 인정된 연천 제5땅굴을 조사도 해보지 않고, 대통령이 황급히 나서서 자연동굴이라고 못박았습니다. 2001년 6월, 북한 상선들이 제주해협을 유린했습니다. 대통령이 UN사 자동교전규칙을 박탈하여 우리 해군의 손발을 묶었습니다. 북한 선박 한 척에 우리 함정 6척이 31시간이나 따라다니며 제발 좀 나가달라고 애걸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북한에게 무해통항권을 인정해 주자 했습니다. 바다의 휴전선인 북방한계선이 너무 넓으니 일부를 북한에 양보하자 했습니다. 우리의 군을 적장 앞에 굴복시키고, 우리 영해를 적장에게 바치려 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찌 우리 대통령 자리에 앉아있어야 합니까? 국보법을 철폐하여 좌익활동을 자유롭게 보장해 주려 했습니다. 반미. 반일 감정을 선동하여 쇄국주의와 주체사상을 식목하고 있습니다. 주한미군과 한국군을 살인집단으로 매도했습니다. 용공세력을 비호하고 용공주의자들을 요직에 중용하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에 걸려 8년간 옥살이를 했던 전직 국회의원이 버젓이 국회에 다니며 무기구매에 간여하고 있습니다. 간첩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옥에 갇혀있던 사람을 끄집어내서 장관을 시키고 있습니다. 노동당 창당 55주년 기념행사에 가서 축사를 읽고, 파주에 있는 인민군 묘소에 가서 참배를 한 사람들이 부총리가 되고, 장관이 되고, 대학총장을 합니다. 그의 분신, 임동원은 누구입니까? 대법원에서 반국가단체로 판결난 범민련을 대북 연락창구로 이용했습니다. 평양에서 열린 적화통일 행사에 311명의 방문단을 날치기식으로 보냈습니다. 그 중 100여명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난 해 9. 3일, 국회에서 탄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국회와 국민을 비웃기라도 하듯, 불과 1주일 만인 9.11일에 직제에도 없는 장관급 자리를 청와대에 만들어 놓고, 그를 앉혔습니다. 그는 남북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의심스러운 행동을 계속합니다. 학교들이 마치 1917년 프로레타리아 혁명을 방불케 하는 폭력으로 강탈되여 이념교육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를 막아야 할 공권력이 오히려 비호합니다. 전교조가 초-중-고 학생들에게 이념교육을 시키기 위해 불법 교과서를 내놓고 가르칩니다. 책에는 '인민군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통일사회'가 그림으로 영상화돼 있습니다. 북한은 불쌍한 우리 동포이고, 우리의 주적은 외세와 여기에 계신 냉전세력이라고 가르칩니다. 개인의 삶에 불편을 주는 국가안보는 부정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헌법과 국보법을 부정하는 이 엄청난 운동을 정부는 10개월 째 방치하고 있습니다. 4.3 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수많은 반정부 데모 사건; 좌익분자들에 의해 자행된 이 국가전복 사건들은 민주화운동으로 둔갑시키는 반면, 정작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가 싸운 정부군을 박대하고 멸시합니다. 그 어느 나라 국민이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가 싸운 정부군을 용병이요 살인마라고 공격합니까? 이러한 인구는 분명 이 나라 국민이 아닙니다. 이를 처벌해야 할 대통령이 저들을 비호했습니다. 주월한국군의 적장이었던 사람에게 대통령이 사과를 했습니다. 월남전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보는 것입니다. 2001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그는 6.25를 '실패한 통일 노력'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전 역시 민족해방전쟁이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국가의 정통성을 통채로 부정하면서, 북한 정권에 새로운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 이 나라 사람이 아닙니다. 가면을 쓴 북한 사람입니다. 한반도에 또 다른 전쟁이 예정돼 있습니다. 9.11 테러 이후 북한은 미국의 주적으로 떠올라 있습니다. 북한은 세계에서 테러기술과 테러무기를 가장 많이 가진 불법무기 소지자가 됐습니다. 미국은 세계 각국을 향해 미국편에 서든지 테러편에 서든지 태도를 확실히 하라 했습니다. 그런데 현정부는 주저 없이 북한 편에 섰습니다. 북한과 한 편이 된 정부는 "전쟁이 나면 큰일이다.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것을 구실로 북한과 내통할 수 있습니다. 기습적으로 '평화선언'을 선포하면서 연방제 통일을 획책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막으려면 이 길밖에 없다. 이것이 전쟁보다야 훨씬 낫지 않느냐" 하면서 국민을 선동할 수 있습니다. 4월3일부터 3박4일간 임동원 특사가 평양을 다녀왔습니다. 갈 때에는 대량살상무기로 인한 미북간의 전쟁을 막으러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그는 전혀 다른 것을 내놓았습니다. 쌀 50만톤, 비료 30만톤을 주겠다 합니다. 경원선과 동해선을 개통하여 철의 실크로드로 연결하겠다 합니다. "철로연결"이 가장 큰 성과라고 했습니다. 2002.4.8일자 도쿄 신문은 러시아철도 기술연구소가 북한 철도의 안전성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보도했습니다. 두만강에서 원산. 평강을 잇는 동해안철도 7백km의 전 구간이 위험한 상태이며 터널 130군데, 교량742군데의 보수가 시급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경원선은 어떻습니까. 철로지반이 약해 7대의 화차만 답니다. 전기가 불충분하여 가다서다를 반복합니다. 남한에서 1시간에 가는 거리를 3-4일간 갑니다. 대통령이 그토록 선전했던 실크로드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거짓말입니다. 남침 길을 열어주겠다는 수작입니다. 이번 방문을 통해 임동원 특사는 아리랑 행사, 이산가족 재회, 당국간 대화 등 얄팍한 이벤트들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남북관계가 활발하게 잘 돼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미국이 재를 뿌리는 일을 하면 곧바로 반미감정으로 치닫게 됩니다. 여기에 반대하는 남한의 반공 세력을 냉전세력으로 몰고 가려는 술책일 수 있습니다. 전쟁을 막으러 간 게 아니라 북한과 공조전략을 짜러 간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다음 정권이 보수진영으로 바뀌면 저들은 이적죄로 처벌될 것입니다. 그의 가족과 그의 편에 섰던 무리들이 국법으로 처벌될 운명을 맞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엄청난 악몽입니다. 사는 길은 김정일에게 나라를 바치는 길뿐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선민주연합국이 들어서고 천만이 죽고 천만이 보트를 타고 탈출하는 사태를 맞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싸워도 죽고 얌전히 있어도 죽습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이 내통질을 막아야만 합니다. 잠시 월남 멸망의 날을 보십시오. 정부가 부패했습니다. 병사들은 부패한 정권을 위해 왜 목숨을 바쳐야 하느냐며 싸우기를 싫어했습니다. 종교지도자, 학생들이 연일 데모를 했습니다. 간첩들이 대통령실과 정보기관에까지 속속 침투해 있었습니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미국은 스스로를 지키려 하지 않는 국민을 위해 왜 목숨을 바쳐야 하느냐며 싸우기를 거절했습니다. 싸움에 패해야 하는 쪽은 월맹이었습니다. 북폭과 경제봉쇄로 월맹은 피폐할 대로 피폐했고, 병사들을 끼니를 굶었습니다. 소금으로 두끼를 때웠습니다. 팬티도 없었습니다. 타이어 조각을 발에 동여맨 것이 군화였습니다. 반면 58만 월남 대군은 미국이 넘겨준 최첨단 무기로 무장되어 세계 제4대 군사력이 돼 있었습니다. 군사력으로 보면 상대조차 안됐지만 월남군은 총 한번 소지 못한 채 1975. 4. 30일 완전 점령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저들의 속임수와 내적들과 안이한 평화무드 때문이었습니다. 1973년에 미국과 월맹간에 평화협정이 맺어졌습니다. 전쟁에 지친 국민들이 평화무드에 들떠 있었습니다.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사람이거나, 정신나간 사람으로 취급됐습니다. 우리 한국도 바로 이와 똑같습니다. 월남은 무엇 때문에 망했습니까? 의심할 줄 몰랐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그래도 당시 티우 대통령은 확실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대통령은 절대로 반공주위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반공전선의 파괴자입니다. 안보는 의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의심이 없으면 안보도 없습니다. 적을 의심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적을 의심하지 않으면 바로 그가 의심을 받아야 합니다. 대통령이 저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국민에게 북한을 의심하지 말라 합니다. 지난 4월6일, 임동원 특사가 말했습니다. "김정일 정권을 의심하지 말자, 의심하면 될 일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성주가 성문을 열어주려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이 우리의 목을 조르는 사람들입니다. 공산 월맹에 의한 통일이 이루어진 후 거기는 어떻게 됐습니까? 106만명의 난민이 보트를 타고 도망가다가 11만명이 빠져 죽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자세한 통계는 없지만 700만에 이르는 이들이 처형되고 이 중에는 어린 아기들까지도 포함된 것으로 회자됩니다. 통일 후 8년간 세계에 문을 닫고 암흑정치와 공포정치를 해서 자유에 물들었던 사람들을 때려죽이고 굶겨 죽였습니다. 애국동지 여러분, 1975년도의 월남과 지금의 한국이 어쩌면 이렇게도 닮았습니까? 지금은 분명, 비상시기입니다. 우리의 성주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심증이 깊습니다. 우리는 이를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간이 가면 우리는 죽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는 그들의 행적에 의해 이미 평가됐습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가난하고 의로운 길을 걸어온 애국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저들은 냉전세력이라고 부르며 타도하겠다 합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공권력이 되어 자유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들이 공권력이 되어 우리의 자유와 생명을 빼앗아 김정일에 바치려 합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의 건전한 보수들은 월남의 부자들처럼 눈치만 보면서, 나서려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누군가가 나서야 합니다. 바로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십니다. 2002. 4. 26 지 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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