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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3/21
 

[스크랩] 우정과 용기에 대하여

2010.02.05 05:33 | 대표폴더 | 실버윙

http://kr.blog.yahoo.com/o58dr/1380976 주소복사

1. 이런 마음가짐으로 「인간관계」는 바뀐다

 

「오래 계속되는 우정, 깨지기 쉬운 우정」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는 「우정과 용기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학생이나 청년을 대상으로 서술해 가겠습니다만, 젊은 사람에 한정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인생을 살아갈 때 중요한 마음가짐으로 참고가 되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나는 젊은 사람을 상대로 「공부는 중요하다. 장래를 위한 투자로서 젊을 때 확실하게 공부해 두라」는 가르침은 비교적 많이 설하였지만, 「젊을 때 인간관계를 어떻게 하면 좋은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젊을 때는 어떻게 인간관계를 맺으면 좋겠습니까?

  내가 청년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우정이란 어느 정도 자립한 사람들끼리 사귈 때 잘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잘 어울려 다니는 것이 우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관계가 너무 끈끈하여 지나치게 밀착되면 좋을 때도 있지만, 나중에 싸우거나 헤어지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적절히 우정을 키우고 오래 사귀어 가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느 정도 「자립」해 있어야 합니다.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우정을 맺기 쉬운 법입니다. 또 우정을 맺은 상대도 그렇게 자립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제각기가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적절한 우정을 만들어 오래 지속하기 쉬운 법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전면적으로 계속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는 관계」나 「욕망이나 이득이 결부되어 강하게 밀착된 관계」 등은 깨지기가 매우 쉽습니다.

 

  인간관계를 향상시키기 위해 「거리를 두는 방식」

 

  사람 사이에 거리를 잘못 두면 인간관계가 잘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조금이라도 호의적인 자세를 보이거나, 친절한 말을 걸거나 하여 이쪽이 문을 살짝 열면 확 안쪽까지 들어와서 너무나 가까이 밀착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대하여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이쪽이 조금 관심을 보이거나 이해하며 문을 조금 열면 현관에서 안쪽까지 들어와서 눌러앉는 사람과는 우정이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은 밀착된 관계를 만드는 것이 우정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과 우정을 맺기는 의외로 어렵습니다.

  우정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사귀는 가운데 길고 차분히 성립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돈독해지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짧은 시간 사귄 사람과 바로 친구가 되어버리는 데에는 역시 위험이 있습니다. 자신이 상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상대도 자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인간관계를 키워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을 충분히 알리는 시간이나 상대를 충분히 아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금씩 시간을 들이면서 관계를 심화해야 합니다.

  갑자기 들러붙었다가 떨어졌다가 하는 관계를 반복하면 자신뿐 아니라 상대도 상처받습니다.

  그렇게 되는 원인의 대부분은 단순히 상대를 오해하거나 자신이 오해를 받는 데 있습니다. 그 결과 빼도 박도 못하는 관계가 되어 최후에는 비극적으로 헤어지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서로 다 이해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므로 단계를 밟아서 사귀어 가도록 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처음의 얕은 단계의 친구로서는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사귈 수 있습니다. 그다지 심화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관계라면 무리하게 심화하려고 하지 말고 얕은 단계의 교제로 그쳐 두면 친구관계를 오래 계속할 수 있습니다.

 

2. 자신도 상대도 상처받지 않는 인간관계를 만든다

 

  마음속 카드를 상대에게 어디까지 보일지를 생각한다

 

  단계를 밟아서 사귀어 가는 가운데 차츰 깊은 교제를 하면 자신의 속마음을 서로 보이고 상호간에 우정을 확인할 수 있게 되어 갑니다.

  서로 자신의 생각이나 사고방식 등 가지고 있는 카드를 차례로 꺼내 보이면서 「상대가 어떤 카드를 가지고 있는가? 강한 카드를 가지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에잇, 얏」하고 카드를 서로 보이고 상대의 카드를 보면서 「어, 상당히 강한 패를 내는구나」하고 느끼기도 합니다.

  우정이 깊어짐에 따라 차츰 강한 카드를 꺼내게 됩니다만, 「어디까지 카드를 계속 내야 하는가? 마지막 카드까지 내야 하는가 어떤가?」는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어느 수준까지 사귈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모든 것을 서로 이해하기는 상당히 어려우므로 서로 상처받는 관계가 될 것 같으면 거리를 두는 편이 좋고, 서로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관계라면 「어느 수준까지 사귈 수 있는가?」를 잘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이상의 수준에서 사귀기는 무리다」라고 느낀다면 그 수준에서 멈추는 편이 좋습니다. 그래도 어떤 계기로 더 깊은 관계까지 가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너무 강한 카드를 꺼내면 우정이 성립되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젊은 시절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종교적인 것을 이해하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기 쉬웠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책을 많이 읽고 있는 교양이 있는 사람과는 비교적 이야기를 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단계까지 가면 대화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인생론이나 인생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준에 머무는 교제를 자주 하였습니다.

  내가 함께 이야기하기 쉬웠던 상대는 열 살에서 열 몇 살 정도 윗세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분야의 교양서를 섭렵하여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내면이나 세상 일을 깊이 직시하던 면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평소에 내가 생각하던 것은 주로 인생론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동년배와 사귀는 일은 그다지 잘되지 않았습니다.

20대의 젊은 사람은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나와는 이야기가 잘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열 살 이상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 가치관이 맞으면 우정이 성립되는 일이 있습니다. 만약 같은 또래와 아무래도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면 연상의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본심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깊은 우정관계도 있다

 

  사람들이 가진 카드에는 신조 등 마음속 가장 깊은 부분에 관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의 경우는 신앙의 카드가 그것입니다만, 이 카드를 꺼내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같은 학교나 학원에 다니고 있고 학력이 비슷하거나 회사에서 같은 입장에 잇는 사람일 경우에는 신앙의 카드를 꺼내지 않으면 이 세상적인 수준에서 그럭저럭 그와 사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카드를 꺼내면 딱 절벽 같은 것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 마음에 드는 이성과 이야기를 해 보았더니 외골수인 유물론자였다면 슬퍼질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구나. 꼭 사귀어서 결혼하고 싶다」고 바라더라도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 경우에는 장래에 대단히 어려운 관계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받게 됩니다.

  신앙심은 깊은 내면의 부분이며 그 사람이 어떤 인간인가 하는 본질의 부분, 가장 최후의 부분에 가깝습니다.

  서로 신앙의 카드를 꺼내고도 우정을 견고히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상당히 마지막에 가까운 단계입니다. 신앙심은 사람에 따라 얕고 깊은 차이가 있으므로, 신앙의 카드를 꺼내는 방법은 매우 주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최후에 꺼내는 신앙의 카드란 정말로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만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친형제나 부부 가운데 법연(法緣)이 깊어서 인생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숨김없이 상당히 깊은 이야기도 할 수 있는 데까지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 수준에서 그 단계까지 이르는 법우(法友), 도반(道伴)은 평생에 그리 많이는 나오지 않습니다.

  신앙의 면에서 「예스인가, 노인가?」라는 것만으로 사람과 사귀는 방식을 정하려고 하면 좌절하거나 서로 상처받는 일이 많아질 것입니다. 사람과 사귀는 방법이 서투르기 때문에 자신이 상처받거나 상대를 상처주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조금씩 카드를 꺼내어 가며 「어느 정도까지라면 잘될 것 같은가?」를 확인하면서 우정을 심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능숙하게 친구를 사귀어 가는 방법입니다.

 

3. 나쁜 인간관계에 휩쓸리지 않는 용기

 

「누구를 스승으로 삼고 누구를 친구로 삼는가」는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학창시절이나 청년기에 중요한 것은 「누구를 스승으로 삼는가」, 「누구를 친구로 삼는가」이며, 이 「스승과 친구 관계」가 인생에 대단히 큰 영향을 끼칩니다. 여러분의 인생관이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 바로 스승과 친구입니다.

  스승과 친구를 선택하는 방법에는 상당히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스승이란 수십 년에 걸쳐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가리켜 주는 북극성과 같은 존재이므로 더욱 선택이 어렵습니다.

  친구도 그렇습니다. 친구를 잘못 선택하면 인생이 꼬이기 때문에 누구를 친구로 삼는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26백 년 전에 석가는 「어리석은 사람을 친구로 삼지 마라, 나쁜 친구와 사귀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 나쁜 친구와 함께 있을 바에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친구로 삼아라.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을 친구로 삼아라. 그런 친구를 얻을 수가 없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석가의 설법에는 「무소의 뿔」이라는 비유가 자주 나옵니다. 무소가 하나의 뿔을 세우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연상해 보면 확실히 「고고(孤高)한 사람」이라는 분위기가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석가의 이 말은 「진리를 추구하며 수행하는 사람, 뛰어난 점이 있는 사람과 사귀어라. 나쁜 사람과 사귈 정도라면 오히려 사람과 사귀지 않는 편이 좋다」는 가르침입니다.

확실히, 「주홍과 섞이면 빨갛게 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나쁜 친구와 사귀면 자신도 점점 나빠져 갑니다. 나쁜 친구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동료의식 때문에 악행에 가담해 버리는 수도 있습니다.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하는 것이 우정이다

 

  요즘 중ㆍ고생들 중에는 혼자보다는 몇 명이 팀을 짜서 남의 가게 물건을 훔치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이때 물건을 훔쳐오는 것 외에도 망보는 역할, 무엇인가를 사는 시늉 등의 페인트(feint) 역할이 있습니다. 편의점 등은 점원이 한 사람밖에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몇 명이 짜면 도둑질을 쉽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몇 명의 동료가 팀을 만들어 함께 물건을 훔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이것은 나쁜 친구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대여섯 명 정도가 친구가 되어 일단 교류관계를 맺어버리면 물건을 훔칠 때만 빠지기란 여간해서 불가능합니다. 빠지려고 하면 「넌 건방진 놈이다. 친구로 여기지 않을 거다」라는 등으로 협박하기 때문에 마지못해 참가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교류관계는 나쁜 것입니다. 오히려 친구라면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제대로 말하는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친구관계에서도 그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나쁜 짓을 막으려고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인간관계가 깨어져서 「너 따위는 친구로 받아줄 수 없다」는 말을 듣는 일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무소의 뿔처럼 오로지 혼자서 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친구를 사귀지 않으면 안된다면 차라리 혼자 가겠습니다. 진리를 구해서 혼자 살겠습니다. 그런 가운데 진리의 친구도 나타날 테니까 나를 친구로 받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친구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잘못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할 만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말해 주지 않으면 그들이 범죄자가 되거나 장래를 망쳐버릴 우려도 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므로 해야 할 말은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따돌림의 문제」는 나쁜 교류관계의 축도

 

  요즈음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에서의 따돌림 문제 속에서도 나쁜 교류관계의 축도(縮圖)를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1 1」의 따돌림은 적어지고 있고, 대부분은 두목격의 아이와 추종자가 무리를 지어 「다수 대 한 명」으로 누군가를 괴롭힙니다. 대단히 비겁한 방식이지만 소수의 사람을 다수가 괴롭히는 형식입니다.

  괴롭히는 아이들 중에도 「사실은 괴롭히고 싶지 않지만 두목이 무서우니까 하고 있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두목을 따르면 여러 가지로 보호해주거나 같이 놀아주거나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동료에게 따돌림당하는 것이 싫어서 그 그룹에 들어간 이상은 반드시 함께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따돌림 그룹」이 있어서 신입생이나 전학생 등 색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여럿이서 따돌립니다. 그들은 따돌리는 의식을 함께 행함으로써 동료 의식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도 같이 했다」고 하는 일종의 범죄자 심리와 같은 것입니다. 함께 도둑질을 하면 그 사람들과 동료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범죄자 그룹 같은 동료 의식이 생겨 따돌림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도 그런 동료들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집단 따돌림에 가담함으로써 동료들이 받아주고, 자신의 몸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집단 따돌림의 표적이 된 아이도 결국에는 그 그룹에 편입되게 됩니다. 표적이 자신에게서 다른 아이에게로 옮겨질 때 이번에는 자신도 학대하는 쪽이 되어 학대하는 그룹과 함께 새로운 표적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도 동료로서 인정받자」는 사람이 늘어나 차츰 악의 세력, 악의 그룹이 증식됩니다. 처음에는 한두 명이었던 것이 3, 4, 5, 10, 20명 등으로 커져 갑니다.

  이것은 「모두가 같이 하면 무섭지 않다」는 심리 때문입니다.

 

  힘에 의해 성립되는 악의 인간관계는 지옥 세계와 비슷하다

 

  교실에서 10명이나 20명이 누군가를 괴롭힌다면 누가 했다라고 범인을 특정 짓기가 어렵습니다. 범인이 한 명이라면 교사도 야단치려고 하겠지만 한 반에서 10명이나 20명이 어느 한 명을 괴롭히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10명이나 20명을 처벌하고 한 명을 보호한다는 것은 좀처럼 하기 힘듭니다.

  그 때문에 교사는 집단 괴롭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체합니다. 집단 괴롭힘을 행하는 그룹이 교실의 주류가 되어 있어서 그쪽을 야단치면 교실 붕괴를 일으켜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선생이 말하는 것은 듣지 않을 테다」라고 모두들 수업을 거부하거나 하기 때문에 교사도 화를 낼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런 형태로 악은 증식되어 갑니다.

  이 패턴은 영계(靈界)에 있는 지옥 세계와 아주 흡사합니다. 지옥 세계에서는 대개 강한 자가 자신보다 약한 악마나 악령 등을 부추겨서 다른 자를 습격합니다.

  지옥 세계는 힘의 관계에 의해 성립되어 있으므로 보다 많은 욕을 하고 공격력이 강한 자가 리더가 됩니다. 그에게는 부하가 많이 붙어서 약한 자를 괴롭힙니다. 그들은 언제나 동료를 늘리려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사회의 집단 괴롭힘을 보면 실로 지옥계 그대로입니다. 그 수법은 지옥계와 놀랄 정도로 닮았습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작은 악마가 들러붙은 아이도 많이 있고, 큰 악마가 들어가 있는 아이도 있습니다. 일정한 규모의 나쁜 집단을 이끄는 리더 중에서 어느 정도 강한 영향력을 가진 경우 큰 악마가 들어가는 수도 있습니다.

  이런 나쁜 인간관계에 빠져서 악행에 가담해서는 안됩니다.

 

4. 선악을 준별하는 용기를

 

  악을 증식시키는 두 가지 사고방식

 

  세상에는 여러 분야에서 악을 증식시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근본에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는 2차 세계대전 후의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리, 「다수의 의견이 옳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학교 아이들은 「교실 안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하는 일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함께 물건을 훔치고, 모두가 함께 폭력을 휘두르고, 모두가 함께 집단으로 학대하고 있으니까 옳은 것이고 그 그룹에서 빠지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인 「촌락 사회」의 의식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동질이라는 동료 의식을 가지고 똑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 옳고, 동료에게서 벗어난 일을 하면 악이다」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내용은 어찌 됐건 모두와 다른 의견을 말하거나 다른 행동을 하거나 하여 동료에게서 벗어난 사람, 집단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악이다」라고 판정하는 원리입니다. 이것이 악의 증식 원리로서도 현실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규칙으로서의 선악을 배우면 올바름이 보인다

 

  학교에서 따돌림이나 범죄행위 등을 집단으로 행하는 것을 보고 곧바로 이상하다고 의견을 말하는 학생은 대체로 외국에서 귀국한 자녀나 부모가 외국에서 돌아온 아이들입니다. 또 해외로 나간 적이 없는 아이라도 부모가 미션 스쿨 등 종교 계통의 학교를 나왔거나, 자신이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란 경우도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외의 아이들은 숫자가 많은 쪽이 옳다고 생각하고 다수의 세력 쪽에 말려들어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나누는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나 신이 「이것은 옳다. 저것은 잘못되었다」고 가르치는 것을 믿고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촌락 사회에서의 다수가 어떤가?」는 그다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진리를 바탕으로 행동하고 선악을 판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것은 잘못되었다. 이렇게 약한 자를 괴롭히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러 가지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외국에서 돌아온 사람은 꽤나 「그것은 잘못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국제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역시 무엇인가의 기준, 보편적인 규칙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국적이나 민족 의식을 넘어선 기준으로서 올바른 종교의 선악 기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학교는 국제적인 안목에서 종교적인 선악을 가르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느낍니다.

 

  올바른 일을 실현하기 위해 더욱 용기 있는 삶을

 

  세상을 좋게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다수결의 원리에 휩쓸릴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선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더욱 용기를 가지십시오. 젊을 때 용기를 갖지 못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용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젊을 때 용기가 있던 사람도 가정을 갖거나 회사를 다니면서 점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보수화(保守化)되어 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젊은 시절에 용기가 없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절대로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용기를 내어 행동해도 누군가의 반대로 좌절하거나 방해받으면 점점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보통의 흐름입니다.

  그러나 그런 흐름에 맞서서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누구나 다 「권력이나 세력이 있는 것에는 반항하지 말고 참고 따르는 쪽이 득이다」라고 말하면 세상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나 세상을 좋게 하고 옳은 것을 실현하기 위한 가치관을 추구해 온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보편적인 가치관을 전하면서 「이 세상 가치관은 잘못되었다」고 계속 가르쳐 왔기 때문에 옛날부터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가치관을 바꾸는 혁명운동과 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다수결을 따르면 대개의 경우 처음에는 종교적 견해는 이 세상적 의견에 패배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다수결의 세계이니까 다수의 의견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 종교적 진리를 지상에 수립할 수 없게 됩니다. 타협을 하면 종교적 진리는 그것으로 사라져 가게 됩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비록 반대에 부딪치거나 박해나 수난을 당하더라도 계속 힘을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옳은 일을 실현하려면 역시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무쪼록 용기를 가지십시오. 용기를 가진 삶을 살아 주십시오.

 

5. 도전하는 용기가 길을 연다

 

  화제가 풍부한 재미있는 사람이 되어 자꾸 의견을 말한다

 

  용기와 관련하여 젊은 사람에게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재미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종교를 배우는 학생이나 청년은 착실한 사람이 많습니다만, 윗세대 사람들은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해 보아도 뭔가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어느 종교든지 「부처나 신에 대한 복종과 순종」이라는 덕목을 강조하기 때문에 착실하다는 것 자체는 좋습니다만, 그것이 「인간으로서 재미없다」는 평을 듣는다면 착실하다기 보다는 「관심 분야가 좁고 화제가 적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 나는 결코 재미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뉴욕에 머무르던 20대 시절 나는 미국인 친구들에게 솔직하다, 유머러스하다는 평을 들은 일이 많았습니다.

  미국인에게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함으로써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 수 있어서 평판이 좋았고, 주변 사람에게 「아주 재미있는 사람」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학생이나 청년 여러분도 부디 재미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여러 가지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견을 자꾸 말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좌절이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자꾸자꾸 도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미 젊은이가 아니다

 

  도전하는 한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목표가 높은 사람은 반드시 실패를 합니다. 그러나 실패를 두려워하면 젊은이가 아닙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미 노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점점 보수적으로 되고 신중해져서 여러 가지 일에 도전하기 않게 됩니다.

  경영자 등은 나이가 들면 새로운 일을 하지 않게 되므로 물러나라는 압력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대가 변하는데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일정한 나이가 되면 「늙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니까 이제 물러나 주세요」라는 말을 듣고 회사에서 퇴출당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에게는 당연히 도전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없으면 안됩니다. 나이가 든 사람에게서 하지 마라는 말을 들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며 돌진해 갈 정도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닙니다.

  젊은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해야 합니다.

  실패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도전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일에서도 그렇습니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실패도 없지만,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일을 하는 사람은 실패의 숫자도 많아질 것입니다.

  도전하지 않으면 절대로 새로운 기업을 일으킬 수도 없습니다. 기업을 일으켜도 확률적으로는 열에 하나 정도밖에 성공하지 못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목표를 높게 가지고 도전하지 않으면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스포츠도 똑같을 것입니다. 야구부나 축구부 등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든 후보 선수가 되겠다고 뜻을 세운다면 절반 정도가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식 선수가 되어 지역 대회나 전국체전에 출전하겠다는 식으로 목표를 크게 세우면 점점 이루기가 어려워집니다. 올림픽 등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다는 목표를 세운다면 99.99%가 실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세계에서건 목표가 높을수록 실패할 확률도 높아집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도 몇 번이나 실패를 경험하였습니다. 새로운 것을 향해 가는 한 반드시 실패는 하게 됩니다. 도전을 계속하는 한 실패는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미래를 열기 위해 늘 도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도전하지 않으면 길은 열리지 않습니다.

  목표를 낮추면 실패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실패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은 아무것도 도전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에도 도전하지 않은 채 인생을 마쳐도 정말로 좋다고 생각합니까?

  인생 최대의 실패는 「실패가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실패한 적이 없다는 것이 인생 최대의 실패입니다. 그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수없이 많이 실패한 사람은 수없이 많이 도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부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나중에 따라온다

 

「어느 정도의 목표를 세우는가?」하는 것은 스포츠나 기업 외의 다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 문제입니다. 목표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실패는 많아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고 흥미와 관심이 있어서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 길을 돌진해 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초석이 되고 싶다는 커다란 목표를 내걸어 주셨으면 합니다.

  새로운 시대는 혼자서만은 열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상을 가지고 도전하다가 도중에 쓰러져서 시체로 길이 뒤덮인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넘어서는 이들이 잇달아 나옴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실패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그 시체 중 하나가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갈 수 있는 데까지 가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역시 청년입니다.

  이미 넘어졌다면 5, 10, 20년 후에 그 뜻을 이어받아 도전하려는 사람에게 「나를 넘어서 가라. 나의 실패를 참고하고 지혜로 바꾸어 더욱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하며 격려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도 비판 따위는 젊을 때부터 산더미처럼 많이 받았습니다. 종교가로 일을 하고 있으면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수준이 아니라 훨씬 더 심한 비난을 받았지만 태연히 역할해 왔습니다.

「내가 질까 보냐」고 생각하며 계속 열심히 활동을 하는 동안 차츰 동료가 늘어갔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단체가 만들어지고, 몇십 년이 지나자 세간의 평가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군」이라는 식으로 바뀌어 왔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훨씬 뒤에 따라오는 법입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사람들의 평가를 받지 못하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식의 사고를 가진 비겁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건 옳다. 이건 진실이다」라고 생각한다면 도전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정과 용기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이루는 방법과 선악의 가치관, 도전 정신 등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소중한 마음가짐에 대해 설했습니다. 부디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힘찬 인생을 걸어가는 용기를 가져 주십시오. 이 글이 여러분에게 지침이 되면 다행입니다.

 

< 2007년 3월 18 설법 >

[스크랩] 우정과 용기에 대하여

2010.02.05 05:32 | 대표폴더 | 실버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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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런 마음가짐으로 「인간관계」는 바뀐다

 

「오래 계속되는 우정, 깨지기 쉬운 우정」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는 「우정과 용기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학생이나 청년을 대상으로 서술해 가겠습니다만, 젊은 사람에 한정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인생을 살아갈 때 중요한 마음가짐으로 참고가 되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나는 젊은 사람을 상대로 「공부는 중요하다. 장래를 위한 투자로서 젊을 때 확실하게 공부해 두라」는 가르침은 비교적 많이 설하였지만, 「젊을 때 인간관계를 어떻게 하면 좋은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젊을 때는 어떻게 인간관계를 맺으면 좋겠습니까?

  내가 청년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우정이란 어느 정도 자립한 사람들끼리 사귈 때 잘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잘 어울려 다니는 것이 우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관계가 너무 끈끈하여 지나치게 밀착되면 좋을 때도 있지만, 나중에 싸우거나 헤어지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적절히 우정을 키우고 오래 사귀어 가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느 정도 「자립」해 있어야 합니다.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우정을 맺기 쉬운 법입니다. 또 우정을 맺은 상대도 그렇게 자립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제각기가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적절한 우정을 만들어 오래 지속하기 쉬운 법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전면적으로 계속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는 관계」나 「욕망이나 이득이 결부되어 강하게 밀착된 관계」 등은 깨지기가 매우 쉽습니다.

 

  인간관계를 향상시키기 위해 「거리를 두는 방식」

 

  사람 사이에 거리를 잘못 두면 인간관계가 잘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조금이라도 호의적인 자세를 보이거나, 친절한 말을 걸거나 하여 이쪽이 문을 살짝 열면 확 안쪽까지 들어와서 너무나 가까이 밀착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대하여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이쪽이 조금 관심을 보이거나 이해하며 문을 조금 열면 현관에서 안쪽까지 들어와서 눌러앉는 사람과는 우정이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은 밀착된 관계를 만드는 것이 우정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과 우정을 맺기는 의외로 어렵습니다.

  우정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사귀는 가운데 길고 차분히 성립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돈독해지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짧은 시간 사귄 사람과 바로 친구가 되어버리는 데에는 역시 위험이 있습니다. 자신이 상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상대도 자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인간관계를 키워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을 충분히 알리는 시간이나 상대를 충분히 아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금씩 시간을 들이면서 관계를 심화해야 합니다.

  갑자기 들러붙었다가 떨어졌다가 하는 관계를 반복하면 자신뿐 아니라 상대도 상처받습니다.

  그렇게 되는 원인의 대부분은 단순히 상대를 오해하거나 자신이 오해를 받는 데 있습니다. 그 결과 빼도 박도 못하는 관계가 되어 최후에는 비극적으로 헤어지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서로 다 이해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므로 단계를 밟아서 사귀어 가도록 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처음의 얕은 단계의 친구로서는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사귈 수 있습니다. 그다지 심화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관계라면 무리하게 심화하려고 하지 말고 얕은 단계의 교제로 그쳐 두면 친구관계를 오래 계속할 수 있습니다.

 

2. 자신도 상대도 상처받지 않는 인간관계를 만든다

 

  마음속 카드를 상대에게 어디까지 보일지를 생각한다

 

  단계를 밟아서 사귀어 가는 가운데 차츰 깊은 교제를 하면 자신의 속마음을 서로 보이고 상호간에 우정을 확인할 수 있게 되어 갑니다.

  서로 자신의 생각이나 사고방식 등 가지고 있는 카드를 차례로 꺼내 보이면서 「상대가 어떤 카드를 가지고 있는가? 강한 카드를 가지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에잇, 얏」하고 카드를 서로 보이고 상대의 카드를 보면서 「어, 상당히 강한 패를 내는구나」하고 느끼기도 합니다.

  우정이 깊어짐에 따라 차츰 강한 카드를 꺼내게 됩니다만, 「어디까지 카드를 계속 내야 하는가? 마지막 카드까지 내야 하는가 어떤가?」는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어느 수준까지 사귈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모든 것을 서로 이해하기는 상당히 어려우므로 서로 상처받는 관계가 될 것 같으면 거리를 두는 편이 좋고, 서로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관계라면 「어느 수준까지 사귈 수 있는가?」를 잘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이상의 수준에서 사귀기는 무리다」라고 느낀다면 그 수준에서 멈추는 편이 좋습니다. 그래도 어떤 계기로 더 깊은 관계까지 가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너무 강한 카드를 꺼내면 우정이 성립되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젊은 시절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종교적인 것을 이해하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기 쉬웠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책을 많이 읽고 있는 교양이 있는 사람과는 비교적 이야기를 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단계까지 가면 대화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인생론이나 인생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준에 머무는 교제를 자주 하였습니다.

  내가 함께 이야기하기 쉬웠던 상대는 열 살에서 열 몇 살 정도 윗세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분야의 교양서를 섭렵하여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내면이나 세상 일을 깊이 직시하던 면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평소에 내가 생각하던 것은 주로 인생론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동년배와 사귀는 일은 그다지 잘되지 않았습니다.

20대의 젊은 사람은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나와는 이야기가 잘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열 살 이상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 가치관이 맞으면 우정이 성립되는 일이 있습니다. 만약 같은 또래와 아무래도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면 연상의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본심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깊은 우정관계도 있다

 

  사람들이 가진 카드에는 신조 등 마음속 가장 깊은 부분에 관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의 경우는 신앙의 카드가 그것입니다만, 이 카드를 꺼내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같은 학교나 학원에 다니고 있고 학력이 비슷하거나 회사에서 같은 입장에 잇는 사람일 경우에는 신앙의 카드를 꺼내지 않으면 이 세상적인 수준에서 그럭저럭 그와 사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카드를 꺼내면 딱 절벽 같은 것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 마음에 드는 이성과 이야기를 해 보았더니 외골수인 유물론자였다면 슬퍼질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구나. 꼭 사귀어서 결혼하고 싶다」고 바라더라도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 경우에는 장래에 대단히 어려운 관계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받게 됩니다.

  신앙심은 깊은 내면의 부분이며 그 사람이 어떤 인간인가 하는 본질의 부분, 가장 최후의 부분에 가깝습니다.

  서로 신앙의 카드를 꺼내고도 우정을 견고히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상당히 마지막에 가까운 단계입니다. 신앙심은 사람에 따라 얕고 깊은 차이가 있으므로, 신앙의 카드를 꺼내는 방법은 매우 주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최후에 꺼내는 신앙의 카드란 정말로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만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친형제나 부부 가운데 법연(法緣)이 깊어서 인생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숨김없이 상당히 깊은 이야기도 할 수 있는 데까지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 수준에서 그 단계까지 이르는 법우(法友), 도반(道伴)은 평생에 그리 많이는 나오지 않습니다.

  신앙의 면에서 「예스인가, 노인가?」라는 것만으로 사람과 사귀는 방식을 정하려고 하면 좌절하거나 서로 상처받는 일이 많아질 것입니다. 사람과 사귀는 방법이 서투르기 때문에 자신이 상처받거나 상대를 상처주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조금씩 카드를 꺼내어 가며 「어느 정도까지라면 잘될 것 같은가?」를 확인하면서 우정을 심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능숙하게 친구를 사귀어 가는 방법입니다.

 

3. 나쁜 인간관계에 휩쓸리지 않는 용기

 

「누구를 스승으로 삼고 누구를 친구로 삼는가」는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학창시절이나 청년기에 중요한 것은 「누구를 스승으로 삼는가」, 「누구를 친구로 삼는가」이며, 이 「스승과 친구 관계」가 인생에 대단히 큰 영향을 끼칩니다. 여러분의 인생관이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 바로 스승과 친구입니다.

  스승과 친구를 선택하는 방법에는 상당히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스승이란 수십 년에 걸쳐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가리켜 주는 북극성과 같은 존재이므로 더욱 선택이 어렵습니다.

  친구도 그렇습니다. 친구를 잘못 선택하면 인생이 꼬이기 때문에 누구를 친구로 삼는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26백 년 전에 석가는 「어리석은 사람을 친구로 삼지 마라, 나쁜 친구와 사귀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 나쁜 친구와 함께 있을 바에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친구로 삼아라.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을 친구로 삼아라. 그런 친구를 얻을 수가 없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석가의 설법에는 「무소의 뿔」이라는 비유가 자주 나옵니다. 무소가 하나의 뿔을 세우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연상해 보면 확실히 「고고(孤高)한 사람」이라는 분위기가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석가의 이 말은 「진리를 추구하며 수행하는 사람, 뛰어난 점이 있는 사람과 사귀어라. 나쁜 사람과 사귈 정도라면 오히려 사람과 사귀지 않는 편이 좋다」는 가르침입니다.

확실히, 「주홍과 섞이면 빨갛게 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나쁜 친구와 사귀면 자신도 점점 나빠져 갑니다. 나쁜 친구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동료의식 때문에 악행에 가담해 버리는 수도 있습니다.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하는 것이 우정이다

 

  요즘 중ㆍ고생들 중에는 혼자보다는 몇 명이 팀을 짜서 남의 가게 물건을 훔치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이때 물건을 훔쳐오는 것 외에도 망보는 역할, 무엇인가를 사는 시늉 등의 페인트(feint) 역할이 있습니다. 편의점 등은 점원이 한 사람밖에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몇 명이 짜면 도둑질을 쉽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몇 명의 동료가 팀을 만들어 함께 물건을 훔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이것은 나쁜 친구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대여섯 명 정도가 친구가 되어 일단 교류관계를 맺어버리면 물건을 훔칠 때만 빠지기란 여간해서 불가능합니다. 빠지려고 하면 「넌 건방진 놈이다. 친구로 여기지 않을 거다」라는 등으로 협박하기 때문에 마지못해 참가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교류관계는 나쁜 것입니다. 오히려 친구라면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제대로 말하는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친구관계에서도 그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나쁜 짓을 막으려고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인간관계가 깨어져서 「너 따위는 친구로 받아줄 수 없다」는 말을 듣는 일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무소의 뿔처럼 오로지 혼자서 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친구를 사귀지 않으면 안된다면 차라리 혼자 가겠습니다. 진리를 구해서 혼자 살겠습니다. 그런 가운데 진리의 친구도 나타날 테니까 나를 친구로 받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친구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잘못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할 만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말해 주지 않으면 그들이 범죄자가 되거나 장래를 망쳐버릴 우려도 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므로 해야 할 말은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따돌림의 문제」는 나쁜 교류관계의 축도

 

  요즈음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에서의 따돌림 문제 속에서도 나쁜 교류관계의 축도(縮圖)를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1 1」의 따돌림은 적어지고 있고, 대부분은 두목격의 아이와 추종자가 무리를 지어 「다수 대 한 명」으로 누군가를 괴롭힙니다. 대단히 비겁한 방식이지만 소수의 사람을 다수가 괴롭히는 형식입니다.

  괴롭히는 아이들 중에도 「사실은 괴롭히고 싶지 않지만 두목이 무서우니까 하고 있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두목을 따르면 여러 가지로 보호해주거나 같이 놀아주거나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동료에게 따돌림당하는 것이 싫어서 그 그룹에 들어간 이상은 반드시 함께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따돌림 그룹」이 있어서 신입생이나 전학생 등 색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여럿이서 따돌립니다. 그들은 따돌리는 의식을 함께 행함으로써 동료 의식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도 같이 했다」고 하는 일종의 범죄자 심리와 같은 것입니다. 함께 도둑질을 하면 그 사람들과 동료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범죄자 그룹 같은 동료 의식이 생겨 따돌림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도 그런 동료들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집단 따돌림에 가담함으로써 동료들이 받아주고, 자신의 몸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집단 따돌림의 표적이 된 아이도 결국에는 그 그룹에 편입되게 됩니다. 표적이 자신에게서 다른 아이에게로 옮겨질 때 이번에는 자신도 학대하는 쪽이 되어 학대하는 그룹과 함께 새로운 표적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도 동료로서 인정받자」는 사람이 늘어나 차츰 악의 세력, 악의 그룹이 증식됩니다. 처음에는 한두 명이었던 것이 3, 4, 5, 10, 20명 등으로 커져 갑니다.

  이것은 「모두가 같이 하면 무섭지 않다」는 심리 때문입니다.

 

  힘에 의해 성립되는 악의 인간관계는 지옥 세계와 비슷하다

 

  교실에서 10명이나 20명이 누군가를 괴롭힌다면 누가 했다라고 범인을 특정 짓기가 어렵습니다. 범인이 한 명이라면 교사도 야단치려고 하겠지만 한 반에서 10명이나 20명이 어느 한 명을 괴롭히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10명이나 20명을 처벌하고 한 명을 보호한다는 것은 좀처럼 하기 힘듭니다.

  그 때문에 교사는 집단 괴롭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체합니다. 집단 괴롭힘을 행하는 그룹이 교실의 주류가 되어 있어서 그쪽을 야단치면 교실 붕괴를 일으켜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선생이 말하는 것은 듣지 않을 테다」라고 모두들 수업을 거부하거나 하기 때문에 교사도 화를 낼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런 형태로 악은 증식되어 갑니다.

  이 패턴은 영계(靈界)에 있는 지옥 세계와 아주 흡사합니다. 지옥 세계에서는 대개 강한 자가 자신보다 약한 악마나 악령 등을 부추겨서 다른 자를 습격합니다.

  지옥 세계는 힘의 관계에 의해 성립되어 있으므로 보다 많은 욕을 하고 공격력이 강한 자가 리더가 됩니다. 그에게는 부하가 많이 붙어서 약한 자를 괴롭힙니다. 그들은 언제나 동료를 늘리려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사회의 집단 괴롭힘을 보면 실로 지옥계 그대로입니다. 그 수법은 지옥계와 놀랄 정도로 닮았습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작은 악마가 들러붙은 아이도 많이 있고, 큰 악마가 들어가 있는 아이도 있습니다. 일정한 규모의 나쁜 집단을 이끄는 리더 중에서 어느 정도 강한 영향력을 가진 경우 큰 악마가 들어가는 수도 있습니다.

  이런 나쁜 인간관계에 빠져서 악행에 가담해서는 안됩니다.

 

4. 선악을 준별하는 용기를

 

  악을 증식시키는 두 가지 사고방식

 

  세상에는 여러 분야에서 악을 증식시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근본에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는 2차 세계대전 후의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리, 「다수의 의견이 옳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학교 아이들은 「교실 안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하는 일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함께 물건을 훔치고, 모두가 함께 폭력을 휘두르고, 모두가 함께 집단으로 학대하고 있으니까 옳은 것이고 그 그룹에서 빠지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인 「촌락 사회」의 의식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동질이라는 동료 의식을 가지고 똑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 옳고, 동료에게서 벗어난 일을 하면 악이다」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내용은 어찌 됐건 모두와 다른 의견을 말하거나 다른 행동을 하거나 하여 동료에게서 벗어난 사람, 집단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악이다」라고 판정하는 원리입니다. 이것이 악의 증식 원리로서도 현실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규칙으로서의 선악을 배우면 올바름이 보인다

 

  학교에서 따돌림이나 범죄행위 등을 집단으로 행하는 것을 보고 곧바로 이상하다고 의견을 말하는 학생은 대체로 외국에서 귀국한 자녀나 부모가 외국에서 돌아온 아이들입니다. 또 해외로 나간 적이 없는 아이라도 부모가 미션 스쿨 등 종교 계통의 학교를 나왔거나, 자신이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란 경우도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외의 아이들은 숫자가 많은 쪽이 옳다고 생각하고 다수의 세력 쪽에 말려들어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나누는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나 신이 「이것은 옳다. 저것은 잘못되었다」고 가르치는 것을 믿고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촌락 사회에서의 다수가 어떤가?」는 그다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진리를 바탕으로 행동하고 선악을 판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것은 잘못되었다. 이렇게 약한 자를 괴롭히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러 가지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외국에서 돌아온 사람은 꽤나 「그것은 잘못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국제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역시 무엇인가의 기준, 보편적인 규칙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국적이나 민족 의식을 넘어선 기준으로서 올바른 종교의 선악 기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학교는 국제적인 안목에서 종교적인 선악을 가르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느낍니다.

 

  올바른 일을 실현하기 위해 더욱 용기 있는 삶을

 

  세상을 좋게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다수결의 원리에 휩쓸릴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선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더욱 용기를 가지십시오. 젊을 때 용기를 갖지 못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용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젊을 때 용기가 있던 사람도 가정을 갖거나 회사를 다니면서 점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보수화(保守化)되어 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젊은 시절에 용기가 없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절대로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용기를 내어 행동해도 누군가의 반대로 좌절하거나 방해받으면 점점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보통의 흐름입니다.

  그러나 그런 흐름에 맞서서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누구나 다 「권력이나 세력이 있는 것에는 반항하지 말고 참고 따르는 쪽이 득이다」라고 말하면 세상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나 세상을 좋게 하고 옳은 것을 실현하기 위한 가치관을 추구해 온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보편적인 가치관을 전하면서 「이 세상 가치관은 잘못되었다」고 계속 가르쳐 왔기 때문에 옛날부터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가치관을 바꾸는 혁명운동과 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다수결을 따르면 대개의 경우 처음에는 종교적 견해는 이 세상적 의견에 패배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다수결의 세계이니까 다수의 의견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 종교적 진리를 지상에 수립할 수 없게 됩니다. 타협을 하면 종교적 진리는 그것으로 사라져 가게 됩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비록 반대에 부딪치거나 박해나 수난을 당하더라도 계속 힘을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옳은 일을 실현하려면 역시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무쪼록 용기를 가지십시오. 용기를 가진 삶을 살아 주십시오.

 

5. 도전하는 용기가 길을 연다

 

  화제가 풍부한 재미있는 사람이 되어 자꾸 의견을 말한다

 

  용기와 관련하여 젊은 사람에게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재미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종교를 배우는 학생이나 청년은 착실한 사람이 많습니다만, 윗세대 사람들은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해 보아도 뭔가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어느 종교든지 「부처나 신에 대한 복종과 순종」이라는 덕목을 강조하기 때문에 착실하다는 것 자체는 좋습니다만, 그것이 「인간으로서 재미없다」는 평을 듣는다면 착실하다기 보다는 「관심 분야가 좁고 화제가 적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 나는 결코 재미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뉴욕에 머무르던 20대 시절 나는 미국인 친구들에게 솔직하다, 유머러스하다는 평을 들은 일이 많았습니다.

  미국인에게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함으로써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 수 있어서 평판이 좋았고, 주변 사람에게 「아주 재미있는 사람」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학생이나 청년 여러분도 부디 재미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여러 가지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견을 자꾸 말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좌절이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자꾸자꾸 도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미 젊은이가 아니다

 

  도전하는 한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목표가 높은 사람은 반드시 실패를 합니다. 그러나 실패를 두려워하면 젊은이가 아닙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미 노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점점 보수적으로 되고 신중해져서 여러 가지 일에 도전하기 않게 됩니다.

  경영자 등은 나이가 들면 새로운 일을 하지 않게 되므로 물러나라는 압력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대가 변하는데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일정한 나이가 되면 「늙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니까 이제 물러나 주세요」라는 말을 듣고 회사에서 퇴출당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에게는 당연히 도전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없으면 안됩니다. 나이가 든 사람에게서 하지 마라는 말을 들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며 돌진해 갈 정도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닙니다.

  젊은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해야 합니다.

  실패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도전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일에서도 그렇습니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실패도 없지만,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일을 하는 사람은 실패의 숫자도 많아질 것입니다.

  도전하지 않으면 절대로 새로운 기업을 일으킬 수도 없습니다. 기업을 일으켜도 확률적으로는 열에 하나 정도밖에 성공하지 못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목표를 높게 가지고 도전하지 않으면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스포츠도 똑같을 것입니다. 야구부나 축구부 등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든 후보 선수가 되겠다고 뜻을 세운다면 절반 정도가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식 선수가 되어 지역 대회나 전국체전에 출전하겠다는 식으로 목표를 크게 세우면 점점 이루기가 어려워집니다. 올림픽 등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다는 목표를 세운다면 99.99%가 실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세계에서건 목표가 높을수록 실패할 확률도 높아집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도 몇 번이나 실패를 경험하였습니다. 새로운 것을 향해 가는 한 반드시 실패는 하게 됩니다. 도전을 계속하는 한 실패는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미래를 열기 위해 늘 도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도전하지 않으면 길은 열리지 않습니다.

  목표를 낮추면 실패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실패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은 아무것도 도전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에도 도전하지 않은 채 인생을 마쳐도 정말로 좋다고 생각합니까?

  인생 최대의 실패는 「실패가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실패한 적이 없다는 것이 인생 최대의 실패입니다. 그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수없이 많이 실패한 사람은 수없이 많이 도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부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나중에 따라온다

 

「어느 정도의 목표를 세우는가?」하는 것은 스포츠나 기업 외의 다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 문제입니다. 목표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실패는 많아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고 흥미와 관심이 있어서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 길을 돌진해 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초석이 되고 싶다는 커다란 목표를 내걸어 주셨으면 합니다.

  새로운 시대는 혼자서만은 열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상을 가지고 도전하다가 도중에 쓰러져서 시체로 길이 뒤덮인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넘어서는 이들이 잇달아 나옴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실패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그 시체 중 하나가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갈 수 있는 데까지 가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역시 청년입니다.

  이미 넘어졌다면 5, 10, 20년 후에 그 뜻을 이어받아 도전하려는 사람에게 「나를 넘어서 가라. 나의 실패를 참고하고 지혜로 바꾸어 더욱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하며 격려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도 비판 따위는 젊을 때부터 산더미처럼 많이 받았습니다. 종교가로 일을 하고 있으면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수준이 아니라 훨씬 더 심한 비난을 받았지만 태연히 역할해 왔습니다.

「내가 질까 보냐」고 생각하며 계속 열심히 활동을 하는 동안 차츰 동료가 늘어갔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단체가 만들어지고, 몇십 년이 지나자 세간의 평가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군」이라는 식으로 바뀌어 왔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훨씬 뒤에 따라오는 법입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사람들의 평가를 받지 못하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식의 사고를 가진 비겁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건 옳다. 이건 진실이다」라고 생각한다면 도전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정과 용기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이루는 방법과 선악의 가치관, 도전 정신 등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소중한 마음가짐에 대해 설했습니다. 부디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힘찬 인생을 걸어가는 용기를 가져 주십시오. 이 글이 여러분에게 지침이 되면 다행입니다.

 

< 2007년 3월 18 설법 >

[스크랩] 다차원 우주(多次元 宇宙)의 비밀

2010.01.24 05:50 | 천지창조 | 실버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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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에 있는 우주의 탐구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살아 있는 인간의 의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세계, 공간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신마음의 탐구』라는 서적 속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양파 모양의 구조처럼 설명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런 설명을 들었다고 해도, 아직 그 눈이나 손가락으로 감지할 수 있는 범위에서 물질적, 물리적인 마음의 여러 모양을 감지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일찍이 이런 말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악일점(握一点), 개무한(開無限)」이라고, 쥐면 한 점이 되고 펴면 무한이 되는,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여기서 「인간」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본질에 대해, 쥐면 한 점이 되고 펴면 우주의 크기가 된다고 하는 설명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자신(自信)이 있습니까? 이것을 아는 것이 금세(今世)에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최대의 깨달음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진정한 의미를 실감으로서 붙잡을 수 있을 때, 「자신의 안에 있는 우주」의 탐험인 깨달음의 탐구와 우리를 둘러싼 「자신의 밖에 있는 세계인 다차원 우주」의 탐구, 즉 「안을 향한 탐구」와 「밖을 향한 탐구」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점에서 일치하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마음의 탐구」를 늘 제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의 가르침으로서는 「안에서 밖으로」, 「소승(小乘)에서 대승(大乘)으로」라는 이야기도 해 왔습니다. 이 「안을 다진다」는 마음의 움직임과 「밖을 인정하고 밖을 탐구한다」는 벡터(vector)를 전혀 다르게 이해해 온 사람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안에 있는 벡터와 밖에 있는 벡터를 융합하여 하나로 하라. 이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세계를 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부처를 안다는 것입니다. 부처를 안다는 것은 부처가 창조한 세계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이 글의 테마인 「다차원 우주의 비밀」을 나는 결코 지구 밖에 있는 우주 공간과 같은 세계로서 설명하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자기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던 그 조그마한 공간의 진정한 비밀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미경으로 보는 것과 같은 작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현미경으로 보는 것 같은 작업이 이윽고 망원경으로 보는 것 같은 작업이 되어 모든 것을 아는 일로 이어져 가게 됩니다.

 

2. 보살의 경지 --- 사랑의 실천에 의한 자기확대

 

  행복의 과학이 시작되고 최초의 2년 남짓, 나는 여러분에게 주로 아라한(阿羅漢)이 되기 위한 깨달음의 방법론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깨달음의 원리」나 「반성의 원리」 등의 설법에서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고, 나아가 보살로 들어가기 위한 마음가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는 이야기는 그 위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 보살(菩薩)로부터 여래(如來)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과 마음의 모습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행복의 원리」라는 설법에서 「아라한까지는 누구라도 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금생(今生)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라한의 상태에서 보살에 들어가기 위한 어려움에 대해서는 『석가의 본심』이라는 서적 속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라한에서 보살에 들어가는 일은 인간의 혼()을 얻어 수행을 계속해 가는 과정에서 우선 최초이자 최대의 관문입니다. 이 아라한이라고 일컬어지는 제1단계의 깨달음과 그 다음 단계인 보살에 들어가기 위한 깨달음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자기라는 존재가 「단순히 자기를 위한 자기가 아니다」라는 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납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만 보살 이상의 세계에서는 자기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고 그것을 이러쿵저러쿵 하는 마음도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개성이 주어져 있는 이상, 보살이라 해도 혼()은 각자의 개성에 바탕을 둔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이 개성이 있는 자기를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목숨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깨닫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단순한 도덕론(道德論)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목숨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것이 아니라고 아는 일은, 자기 안에 흐르고 있는 혈액이, 피가 아득한 저 편에 있는 부처의 거대한 심장에서 보내져 온다고 실감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실감할 수 없는 한 결코 보살의 경지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간단히 「무사(無私)인 봉사의 생활」이라고 한 마디로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분은 무사(無私)이면서 봉사의 생활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일까요? 진정한 무사(無私)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그것을 나는 묻겠습니다.

  무사(無私)란 결코 타인과 자기 사이의 인간관계의 조정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없앤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부처의 생명의 일부임을 자각한다」는 데까지 가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보살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주는 사랑의 세계다. 계속 주는 사랑의 세계다. 무상(無償)의 사랑의 세계다」라고 나는 말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자기자신에게 원래 갖춰져 있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람은 오랜 경험을 필요로 합니다. 지식에 의해 혹은 이념에 의해서만은 결코 사랑은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이 사랑으로서 홀로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이 실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조그마한 육체 속에 한정되고 규정되어 있는 「아무개」라는 인간이 자기의 테두리를 넘어서 자기를 확대하려고 하는 움직임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진정한 부처의 자녀로서의 각자의 자기발전에 있습니다. 각자의 자기발전이 단순한 에고이즘에서 발하고 있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물론입니다. 부처의 생명의 일부라고 자기를 인식하고, 그리고 자기를 발전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중의 많은 분들이 만약에 불법진리(佛法眞理)를 이미 만나서 마음의 먹구름을 걷고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고 한다면, 이제부터 여러분의 노력 목표는 이 사랑의 실천행(實踐行)을 통한 자기확대에 있습니다. 참다운 의미에서 자기를 확대하고 확장한다는 것은 이미 성스러운 사명 아래에 스스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보살의 경지에서 필요한 사랑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사랑이란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까지 수없이 이야기해 왔습니다. 써 왔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듣고 읽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해되었습니까?

  여러분의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겉치레 말이 아닙니다. 머리로 생각한 것만이 아닙니다. 혹은 표면상으로만 선()이 되는 것과 같은 행위를 가지고 사랑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 염()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여러분의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다면 사랑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뜨거워지기 위해서는 정열이 필요합니다.

  이 정열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혼의 껍질을 타파함으로써 솟아나오는 에너지입니다. 「자기의 껍질」이란 자기한정(自己限定)입니다. 자기를 유한한 인간으로 규정지어 버리는, 태어난 다음부터의 교육이나 환경이나 자질, 혹은 기성관념입니다. 이런 것이 여러분을 속박하고 있습니다. 이 속박을 풀고 이 껍질을 타파하여 무한한 에너지를 방출할 때 사랑은 뜨거운 염()이 되어 흘러나오게 됩니다.

「이 행위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 하는 편이 낫다」거나, 「이것은 그다지 좋지 않으니까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식으로 마음 속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런 것은 사랑의 이름을 붙일 가치가 없습니다. 훨씬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훨씬 더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훨씬 더 힘찬 것입니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그 힘이 나오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만큼 살려지고 있는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감사가 없는 사람은 사랑을 모른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보고 남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동시에 남에게 감사한 적도 없겠지요. 혹은 남이랄 것도 없이 천지에, 만물에, 그리고 위대한 부처에 감사한 적이 없을 것입니다.

  감사와 사랑은 표리일체(表裏一體)입니다. 자기가 많은 것이 주어져 살려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이끌어내게 됩니다. 감사에서 출발한 사랑이야말로 무사(無私)인 것이 되고 무상(無償)인 것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실천은 여러분의 인생의 여러 가지 기로에서 결심을 새롭게 함으로써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오랜 세월 속에서 변색하고 왜곡되어 가는 수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필요한 방법으로서 제시된 것이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나의 서적 가운데 『진설ㆍ팔정도』라는 책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이 팔정도가 인도하는 반성은 결코 사랑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늘 부처의 마음에 맞는 사랑을 계속 주기 위해서는 이 팔정도에 의해서 스스로를 점검하여 궤도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보살의 수행의 제2단계로서는 아직 이 팔정도가 따라오게 됩니다. 주는 사랑의 실천에 있어 아직 팔정도에 의한 궤도 수정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보살의 단계에서는 아직 이 팔정도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실천과 팔정도 양쪽을 되풀이하는 동안에, 여러분은 나아가 그 다음의 진실을 깨닫기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의 실천과 팔정도를 실천하는 동안에 「육바라밀(六波羅密)」이라는 수행에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이 육바라밀의 수행은 보살에서 범천(梵天)으로 향해 갈 때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수행이 됩니다. 그것은 아라한의 단계에서의 팔정도가 아직 자기완성을 중심으로 하는 데에 대하여, 육바라밀의 단계에서는 「이타(利他)」로 상당한 중점이 옮겨가며, 이 이타로 중점이 옮겨갈 때 자기를 보다 적극적으로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길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세히는 『황금의 법』이라는 서적 속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3. 범천(梵天)의 경지 --- 일이 곧 자기

 

  그러나 내가 여기서 가르쳐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보살의 윗단계에 있는 범천의 경지입니다.

  이 범천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보살과 여래의 중간적인 영역을 말합니다. 또 본래는 여래의 영격(靈格)을 가지고 있지만 역할로서 보살의 일을 담당하는 사람을 범천이라고도 합니다.

  이 범천의 경지에서는 실은 인간으로서 자기를 발휘하는 방법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활동은 지상에서 살고 있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의 의식, 육체적인 의식도 일부에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위의 범천의 경지에서는 여러분이 자기의 손이나 발이나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을 이미 사용하지 않고 자기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지상에 있으면서 생각하듯이,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있고 모습이 있는 인간이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 그 자체가 자기다」라는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아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일에 몰두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할 만한 일일 경우 혹은 무아경(無我境)이 되었을 때 자기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오래는 계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범천의 경지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범천인 것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 그 자체가 자기라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 「내가 하는 일」이 나이며 그 밖의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밖의 나」란 사적(私的), 완전히 인간적인 영역을 말합니다. 범천들은 이미 이 사적인 부분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그것은 24시간이 일이 되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24시간이 일이란 어떤 뜻인가? 그것은 자기의 모든 생명을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 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돌이켜 보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하루 24시간 혹은 과거 수십 년을 회고할 때 어떻습니까? 지금 배우기 시작한 이 불법진리(佛法眞理)의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그 하루의 시간 혹은 수십 년의 시간의 대체 몇 퍼센트를 불법진리를 위해 혹은 불법진리에 맞는 생활을 위해 썼습니까?

「인생의 태반이 그러했다」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퍼센티지(비율)는 적어질 것입니다. 그 퍼센티지가 적다는 것 자체가 여러분의 혼의 경지가 현재 어디쯤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범천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을 전부 불법진리를 위해 쓰고, 수백 년, 수천 년의 혼() 생활을 보내도 후회가 없다는 심경이 아니면 안됩니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혼을 뒤흔들 정도의 기쁨을 수반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조그만 예를 든다면 여러분이 불법진리 서적을 읽는 자세 그 자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어떻게든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 이 「않으면 안된다」에 바탕을 두고 배우는 사람. 혼의 양식으로서 아무래도 필요하다고 해서 배우는 사람. 진리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쁨을 가져오는가를 알고서 배우는 사람. 배움은 곧 행위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읽는 사람. 서적 속에는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내용이 쓰여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흡수하고 실천하는 일이 혼의 기쁨이라고 해서 읽는 사람. 이와 같이 차이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이 자세 속에 여러분들의 혼의 편린(片鱗)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물고기가 무슨 물고기인지는 비늘 한 개를 뽑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온몸을 다 볼 필요는 없습니다. 수염을 보지 않아도 잉어의 비늘은 잉어의 비늘입니다. 붕어의 비늘은 붕어의 비늘, 도미의 비늘은 도미의 비늘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는 진리를 향해 대응하는 방법을 보면 그 순간에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혼의 본바탕이 어떤 것인지는 여기에 서술해 온 것을 참고로 자문자답하면 결론이 나올 터입니다.

  아직도 아득히 수행의 과정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오늘부터 마음을 바꿀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비늘 하나가 위대한 빛을 발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러면 이제부터 무엇을 하겠는가?

잉어는 잉어로서의, 도미는 도미로서의 헤엄치는 방식이 있으리라. 그 헤엄치는 방식을 깨우쳐라.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을 알라.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출발점으로서 자신의 혼의 편린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알고, 그리고 오늘부터 모든 의미에서, 모든 입장에서 한 걸음 전진, 두 걸음 전진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4. 일즉다(一卽多)의 인식

 

  보살의 윗단계에 범천이라는 경지가 있고, 범천은 자기의 모습이나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일 그 자체를 자기라고 파악한다고 했습니다. 이 의미에서 범천의 단계부터는 이미 인간으로서의 테두리는 초월해 있다고 해도 좋겠지요.

  그리하여 「일 그 자체가 자기다」라는 관점에 설 때 커다란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인식으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만….

  지상적(地上的)인 인식으로는 한 사람의 일이란 가령 1 1로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 한계가 있는 활동입니다. 이것이 지상적인 일입니다. 1 1로 이야기를 하는 것 이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지상인의 일의 실제입니다.

  물론 복수(複數)의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지상적인 인식이라는 의미로 설명을 하면 지상의 인간은 「사람은 동시에 한 사람하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라는 식으로 자기한정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입은 하나밖에 없고, 눈은 앞으로 밖에 향해 있지 않고, 귀도 두 개 밖에 없으니까 눈 앞의 사람하고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차원 세계인 7차원 보살계의 상단계(上段階)에 오면 그렇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면 내가 5만 명에게 강연하는 일은 3차원적으로 본 경우에는 내 모습이 5만 명 있는 것과 똑같이 보일 것입니다. 지상인의 견해라면 5만 명의 내가 존재하여 일을 하는 것과 똑같아진다는 인식입니다.

  상대방의 사람들은 모두 1 1로 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동시에 내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5만 명이 있다. 이것은 지상 세계이기 때문에 5만 명이 있고, 5만 명이 나를 보고, 내가 5만 명의 사람을 본다는, 그런 집단으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되어 있지만, 실재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각각 한 사람이 1 1로 나와 이야기를 하는 줄로 알면서 동시에 이만큼이나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인식의 출발점이 이미 이 육체에 없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라는 물리적 한계가 없기 때문에, 5만 명과 이야기를 하는 일 그 자체가 나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이 인식의 전환에 대해 이해하겠습니까? 여기서 이해할 수 없게 되면 다차원 우주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퇴전(退轉)한 사람은 다시 한 번 아라한부터 배워 주십시오. 우주론(宇宙論)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아무래도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자기라는 존재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가 있겠습니까?

  가령 자기가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강당이라고 하고서 수만 명의 사람들을 받아들여서 강연회를 개최하고 있다 --- 이와 같은「관()의 전회(轉回)」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할 수 있으면 여러분은 인간적 시야에서 떠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 지상적인 속성에서 떠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범천의 경지에서는 영적(靈的) 능력이 상당히 다르다는 이야기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범천 부근부터 「관자재력(觀自在力)」이 매우 강해진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관자재력이 정말로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이 범천의 경지에서부터입니다.

 

5. 우주즉아(宇宙卽我)

 

  그리하여 관자재력이 다다르는 곳은 대우주를 아는 일이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 대우주를 알기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 전제로서 아무래도 필요합니다. 자기를 강당으로 삼아서 강연회를 본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것을 더욱 확대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여러분은 우주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더욱 더 확대하면 대우주가 될 수 있습니다. 대우주 그 자체가 되어서 대우주의 안에 있는 세계를 볼[] 수가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주즉아(宇宙卽我)」라는 체험을 한 사람이 몇 사람인가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도 이미 몇 번인가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우주즉아의 경지에도 3단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1단계의 우주즉아는 좁은 의미의 태양계(太陽界), 즉 여래계(如來界)의 상단계(上段階)에서 얻어지는 우주즉아입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여래가 일찍이 경험했던 일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이 우주즉아를 경험했다는 것은 후에 제자인 플라톤이 쓴 『파이돈(Phaidon)』이라는 책 속에 분명히 쓰여져 있습니다. 그에게는 아득한 상공에서 지구의 모습을 내려다 본 체험이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우주즉아란 육체를 이 지상에 놓아두고서 혼()이 이 육체를 떠나 한없이 상승하고 확대되어 지구를 눈 아래로 내려다보아 지구가 조그만 공처럼 보인다는 의미에서의 우주즉아였습니다.

  8차원 여래계라 일컬어지는 세계에서의 우주즉아는 지구라는 관점, 지구를 상정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의 제2단계의 우주즉아로서 「은하즉아(銀河卽我)」라는 경지가 있었습니다. 이 은하즉아라는 경지는 자기의 의식이 은하계의 크기로까지 확대되어 지구가 조그마한 세포로 보이는 경지입니다.

  더 나아가 이 위에 있는 제3단계의 우주즉아는 어떤 경지인가 하면, 대우주가 하나의 생물처럼 보이는 경지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극히 작은 마이크로(micro, 미시적) 인간이 되어서 자기의 인체(人體)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상상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바이러스와 같은 모습이 되어 자기의 육체 속에 들어가 자기를 관철한다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그것은 거대한 우주 공간이면서 각각의 기능을 가진 부분들이 모여 있는 모습입니다.

  이 제3단계의 우주즉아의 경지에 도달하면, 가령 여러분이 「은하」라고 부르는 부분[사실은 은하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아주 많이 존재합니다만], 지구에서 본 은하라고 일컬어지는 부분 등은 하나의 심장처럼 보입니다. 분명히 심장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태양계(太陽系)」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혹성군(惑星群) 등은 하나의 동맥처럼 보이게 됩니다.

  우주의 중심부에서 부처의 에너지, 빛이 보내져 와, 은하라는 심장을 통하여 다시 태양계 쪽으로 힘차게 보내져서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지구나 금성이나 그 밖의 혹성으로 이어지는 대동맥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여러분이 천체망원경 등으로 보는 우주는 조그마한 별의 모여 있는 모습이고 나머지는 진공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靈的)인 눈으로 볼 때는 이것이 하나의 생물로 보입니다. 커다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몸처럼 보이게 됩니다.

  예를 들면, 그 몸의 오른손 부분이 올라가면 그 별무리[星群]에서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별이 생겨나거나 새로운 태양계(太陽系)가 생겨납니다. 또 병으로 인해서 육체의 여러 부분들이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만, 그런 때란 하나의 별의 죽음 혹은 그 별을 중심으로 하는 혹성군들이 죽어 가는 모습이, 사라져 가는 모습에 해당합니다.

  또 블랙홀은 일종의 암세포로 보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눈으로 보아도 마치 암세포와 마찬가지로 검게 그을려 어두컴컴한 형태로 보입니다. 그것은 실로 암세포이어서 거기에 다가간 것들의 목숨을 빼앗아 갑니다. 다가가는 것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블랙홀에 가까운 별들[이것은 은하 속에서 말하자면 세포입니다]이며, 암세포에 가까운 곳의 세포는 잇달아서 침식되어 빨려 들어갑니다. 이런 암세포와 같은 블랙홀이 있습니다.

  , 이런 은하계 우주라고 하는 광대한 세계 속에서 매우 기능적인 몸을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만, 인간의 육체도 여러 부분에 고장이 생기거나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은하를 발판으로 하여 활동하는 동안에, 그와 같이 위대한 부처로부터 갈라져 나온 몸일지라도 병드는 부분이 나타납니다. 이 병드는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상극(相剋)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각각의 혹성 집단 속에는 한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커다란 별의 무리들 속에는 한 가지 진화의 목표가 있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에는 태양계로서의 목표가 있고, 이상이 있고, 그것은 다른 태양계와는 다른 내용입니다.

  이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의 목표는 무엇인가 하면, 현시점에서 가장 중심인 목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한없이 지()를 높여가는 일입니다. 지적(知的)인 진화를 하나의 커다란 목표로 내걸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지적인 진화와 동시에 대조화(大調和), 조화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미()로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 「지()」와「미()」라는 두 가지를 목표로 내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은하, 다른 태양계에서는 전혀 다른 목표에 바탕을 두고 활동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이런 집단군(集團群)이 서로 겹치는 곳에서 하나의 알력이 생기고 그것이 블랙홀화()하는 수가 흔히 있습니다.

  이것이 제3단계의 우주즉아에서의 인식입니다.

  이와 같은 우주즉아의 한 단계 더 위의 경지로서 「불즉아(佛卽我)」라고 일컬어지는 경지가 있습니다. 이 불즉아의 경지가 되면 좀 더 인식이 앞서게 됩니다.

  3단계의 우주즉아에서는 이 대우주가 부처의 몸으로서, 심장이나 내장이나 혹은 여러 가지 혈관처럼 보였던 것이 한층 시야를 높여 가면 이미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대우주 자체가 하나의 구체(球體)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것은 구체입니다. 조그마한 공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체가 한층 더 큰 대우주 속에 몇 개인가 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 구체를 만들고 있는 것은 13차원 우주라 일컬어지는 세계입니다. 13차원 우주를 한 차원 높은 14차원 이후의 세계에서 보면 정말로 공입니다. 공처럼 되어서 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 공이 또 각각 잘 통합되어서 그 다음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각각으로 떠 있는 공이 하나로 통합되어서 앞서의 은하계와 마찬가지로 보다 큰 우주에서의 심장을 만들거나 신장이나 위장을 만들거나 두뇌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층 더 높은 차원인 14차원 이후의 대우주에서 볼 때,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속한 13차원의 우주의 공[구체]은 대체 어느 부분에 해당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곳은 한 단계 더 커다란 우주에서 볼 때, 육체로 말하면 마치 「눈」의 부분에 해당됩니다. 오른쪽 눈에 해당되는 부분에 위치합니다.

  ,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계는 14차원 이후의 우주에서 본다면 눈에 해당됩니다. 이 눈을 만들고 있는 세포 하나 하나가 조그마한 여러분의 눈으로 보면 광대한 별무리[星群]입니다만, 그와 같은 우주입니다. 그런 세계입니다.

  왜 여러분의 세계가 눈에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즉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대우주는 부처가 창조한 세계를 보기 위한 「창()」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우주를 통해서 다른 모든 세계가 아주 알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살고 있는 우주 공간이란 부처가 창조한 세계 속에서는 하나의 대표 작품입니다. 부처가 이상(理想)으로 삼는 갖가지 요소를 여기에 다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모형 정원처럼 되어, 그 속에서 여러 가지 유형, 모델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세계라는 뜻입니다.

 

6. 태양계 영단의 사명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지구계 영단(地球系 靈團), 태양계 영단(太陽系 靈團)의 사명을 대강은 알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매우 긍지 높은 혼()의 그룹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우주는 한층 더 큰 우주에서 보더라도 대단히 기대되고 있는 그룹입니다. 이 속의 은하의, 이 속의 태양계에 살고 있는 여러분은 부처로부터 몹시 기대 받고 있는 그룹입니다. 혼의 집단입니다. 그것은 보다 매크로(macro, 거시적)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일은 결코 지구에 살고 있다고 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커다란 우주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지금 우리의 혼 그룹들은 상당히 전진한 커다란 이상을 가진 그룹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여러분이 지금 20세기[본 강연 당시]에 대거로 육체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의미를 알아주십시오. 우리의 이번 일은 얼마만큼이나 커다란 사명을 띤 것인가, 20세기에 육체를 가지고 지금 대호령(大號令) 아래에, 이 커다란 운동 아래에 여러분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 그것을 알아주십시오.

  그것은 대우주의 거대한 세계에서 보면 이미 몇 조() 분의, 아니 그 몇 조 분의 몇 조 분의 몇 조 분의 1정도의 확률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선택된 혼들임은 사실입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선택 받은 혼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가만히 앉아 있어도 되는가? 잠자고 있어도 되는가? 깨우치지 않아도 되는가? 행동하지 않아도 되는가? 지금 일어서지 않아도 되는가? 여러분은 그것으로 인생을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단순한 육체 인간이 아닌, 그 정도로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여러분이라면 대체 얼마만큼의 활약이 기대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지금 이후로 단순한 인간임을 그만두십시오. 여러분은 그런 다차원 우주 속에서 매우 드문 확률 아래에 기대 받고 있는 혼으로서 대체 얼마만큼의 활약을 해야 하겠는가? 다른 혹성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서도 극히 유리한, 혜택 받은 환경에 있습니다. 이 환경에 있으면서 나태한 삶을 사는 것은 용서되지 않습니다. 후퇴는 용서되지 않습니다.

  부디 명심해서 이 커다란 사명을 깨닫고 이제부터 함께 정진해 갑시다.

                                                                        <1989
년도 제3회 대강연회, 1989년 5월 28>

[스크랩] 반성은 마음과 몸을 가볍게 하는 디톡스

2010.01.24 05:42 | 대표폴더 | 실버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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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의 것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의 사실」에 대해서는 돌이킬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반성」이라는 방법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저질러온 갖가지 악은 제대로 반성을 함으로써 마치 수정액으로 지우듯이 지워갈 수가 있습니다.

  비록 당신이 나쁜 짓을 수없이 해와서 「나는 이미 어찌 할 수도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해도 그 「어찌 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을 때가 출발점입니다.

  거기서부터 반성수행을 하여 자기자신을 고쳐가서 그것이 충분한 수준까지 가면 그 과거가 소멸됩니다.

  인간에게는 불신(佛神)으로부터 그와 같은 위대한 힘이 주어져 있습니다.

 

  또 반성을 해가면, 그 중에는 오랜 세월 자신에게 빙의해 있던 악령이 쫘악 떨어지는 것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악령은 영체(靈體)이므로 무게가 없는 것처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만, 악령은 역시 무거운 존재입니다. 영체는 무게가 없다고 해도 영적(靈的) 감각으로서는 무게가 있습니다.

  그것이 5, 10, 20년이나 자신에게 빙의해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양친이 가지고 있던 악령을 이어받아 유소년시절부터 짊어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반성을 하면 자신에게 늘 들러붙어 있던 악령이 떨어집니다. 떨어졌을 때 어깨나 허리나 등이 문득 가벼워집니다. 갑자기 쓱 가벼워져서 「무거운 짐을 내렸다」는 느낌이 듭니다.

  악령이 떨어지면 정말로 가벼워져서 뺨에 붉은 기가 돌고 따뜻한 빛이 가슴에 싹 들어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맛볼 수 있는 영체험(靈體驗)입니다.

 

  악령이 떨어졌을 때의 상쾌감.

목욕을 마치고 나온 것 같은 산뜻한 느낌.

  얼굴에 붉은 기가 돌고 심장이 가벼워지고 몸 전체가 가벼워지는 느낌.

  이 감각을 맛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10년이나 목욕하지 않았던 사람이 목욕하여 때를 벗긴 것 같은, 그런 후끈후끈한 기분입니다.

  이것은 해()가 없는 영체험이므로, 꼭 맛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1. 의학의 상식을 초월한 「기적의 힘」

 

  현대에 기적은 일어나는가

 

  여기서는 「건강의 부활」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제까지의 나의 설법 가운데에서 병이나 건강에 관한 것은 그다지 숫자가 많지 않았습니다만, 종교에서는 필요성이 높은 테마이므로 이런 내용의 이야기도 늘려가고자 합니다.

  행복의 과학이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나는 병치료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만, 종교로서의 필요성에 맞추어 병치료의 기원 등을 하기 시작하자 병이 낫는 사례가 많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시작단계이며, 앞으로는 지금의 열 배, 백 배나 병이 낫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리라고 봅니다.

  병이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법칙을 초월하여 낫는 일이 없는 것은, 사람들이 유물적인 교육을 받고 있어서 그런 유물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이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기적 따윈 믿을 수 없다」는 교육을 받고, 「기적에 의해 병이 낫는 일은 없다」는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수이므로, 그 염파(念波)에 억눌려 기적이 일어나기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면 「믿는 힘」이 일정한 파워를 가지게 되어, 그 신앙자(信仰者)의 단체 속에서는 일종의 영계(靈界)라고 할까, 이차원(異次元)의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3차원(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게 됩니다.

  3차원의 상식에 지고 있는 동안에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지만, 3차원을 초월한 파워 쪽이 당연하다」는 마음이 강해지면 서서히 여러 가지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교단의 발전, 교단에 대한 신뢰, 신앙의 강도(强度) 등과 관계가 있습니다. 믿는 힘이 강해지면 기적은 차츰 늘어날 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의 재생술(再生術)에서 보는 「인체의 신비」

 

  대부분의 현대인은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만, 고대 이집트의 종교에서는 「재생술」이라는 것이 행하여지고 있었습니다.

  그 재생술이란 예를 들면, 「전쟁 등에서 손이나 발을 잃었을 경우에 그 없어진 손이나 발을 다시 자라게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이 들으면 놀라겠지요. 현대에는 그런 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수천 년 전의 이집트에서 그런 재생술이 행해졌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내가 영적(靈的)으로 조사해 본 바, 그 재생술에서는 이른바 「크리스털(수정) 파워」를 사용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치료를 행하는 술사(術師)는 크리스털의 피라미드를 이용한 피라미드 파워와 그리스의 헤르메스신()이 가졌던 「케류케이온의 지팡이」와 매우 닮은, 머리부분이 크리스털로 된 지팡이를 사용하여 고쳤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더 연구를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만, 이와 같이 상처난 부위를 재생하는 술()을 종교가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잃었던 손이나 발이 자라나는지 어떤지는 누구의 눈에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이므로 속임수라면 오래는 계속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재생술이 확실히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재생술의 근원은 어쩐지 태고의 문명, 아틀란티스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아틀란티스에 그와 같은 치료법이 있어서 그것이 이집트로 전해진 듯합니다.

  그러나 어느 시기부터 이 재생술은 행하여지지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아마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겠지요.

 

  인체에는 병을 고치는 「재생의 힘」이 깃들어 있다

 

  다만 지금도 도마뱀 등, 잃었던 몸의 일부를 재생하는 힘을 가진 생물은 존재하며, 게의 집게발도 재생한다고 하므로, 인간의 경우도 본래는 그런 재생기능이 전혀 있을 수 없을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발과 꼬리를 재생시키는 힘을 가진 생물이 있는 이상, 같은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그런 기능이 제로라는 일은 없을 터입니다.

  그것은 잠들어 버린 기능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려서 공통개념으로서 믿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게 된 것이겠지요.

  그러나 현재도 인간의 몸 속에서 재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습니다. 피부는 상처입어도 재생하고, 약해진 기관(器官)도 회복됩니다. 느린 속도이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부분이 회복된다는 것은 아시는 대로입니다.

  인간의 유전자 속에는 인체 전부의 설계도가 들어 있어서, 정자와 난자가 합체하여 생긴 조그마한 세포가 이윽고 커다란 몸이 되어 인간으로서 완성된 모습이 됩니다.

  그와 같은 설계도를 인간의 몸이 원래 가지고 있다면, 내장이든 뼈든 뇌든 두개골이든 손발이든, 인생의 도상에서 상처나 병으로 몸의 일부분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해도 유전자의 힘을 순수하게 작용시킬 수 있다면 그 부분을 재생하는 것은 가능할 터입니다.

  이 재생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없는가가 병을 치료할 때의 열쇠가 됩니다.

  병이 낫지 않는 이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유물론적인 교육을 받아 애당초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믿고 있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그 쪽이 상식이 되어, 「물질에 대해서는 물질」이라는 유물적인 치료 이외에는 믿지 않는 상황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낫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힘이 강해지면 놀랄만한 기적이 여러 가지로 일어나게 될 터입니다.

 

2. 「마음의 힘」과 병의 관계를 살핀다

 

  병이 낫는지 어떤지는 「마음의 힘」의 사용방법에 달려 있다

 

「믿는 힘에 의해 병이 낫는다」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병을 고치는 힘」은 좀처럼 갖지 못합니다만, 「병에 만드는 힘」이라면 대부분의 사람이 가지고 있습니다.

  암을 고치는 힘은 갖지 못해도 암을 만드는 힘은 거의 전원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리를 하거나 불섭생(不攝生)을 하거나 대단히 감정이 흐트러져서 파괴적인 삶을 살거나 하면 아마 암이 생길 것입니다.

「몸 속에 암세포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사실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나쁜 방향에 대해서라면 할 수 있습니다만, 「암을 없앤다」는 좋은 방향에 대해서는 좀처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이 자신의 상념에 의해 형성된다」는 염()의 힘, 마음의 형성력(形成力)이라는 것을 모르고 상념의 사용법을 충분히 마스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파괴적인 상념 쪽은 얼마든지 낼 수 있습니다만, 좋은 쪽의 상념, 조화적이고 건설적인 상념의 사용법을 대부분의 사람은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병을 고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상입니다.

  병을 만들 수 있으므로 병을 자신이 고치는 것도 본래는 가능할 터입니다.

  우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병을 고치는 첫걸음이 됩니다.

  병을 만들고 있는 것은 당신 자신입니다.

  여러분에게 「일 년 이내에 병이 들어 보라」고 하면 그것은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무슨 일을 해도 죽지 않는 튼튼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대개의 사람은 병이 들려고 하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밤에도 자지 않고 일한다」, 1억 원 이상의 빚은 무리인데도 10억 원의 빚을 진다」, 「매일 저녁 부부싸움을 한다」는 등을 하면 곧 병이 들 것입니다. 혹은 「아이가 나쁜 짓을 한다」는 경우라도 병이 들고, 젊은 사람이라면 실연을 해도 병이 듭니다.

  그처럼 사람은 간단히 병이 듭니다. 정신적인 쇼크에 의해 심신의 부조화를 일으키면 병은 금방 만들 수 있습니다.

 

  병에 인생의 도피처를 구하고 있지 않은가

 

  병을 만들 수는 있는 데도 고칠 수는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병을 고칠 수 없는 것은 사실은 「병을 고칠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병이 들면 자신의 욕구불만이나 실망감, 불가능한 것에 대한 변명을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병이 들면 용서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것도 병이 들면 용서됩니다. 수입이 늘지 않는 것도 병이 들면 용서됩니다. 자녀의 교육이 잘 되어가지 않는 것도 병이 들면 용서됩니다. 이 경우 병이 드는 것은 자신이라도, 자녀라도, 다른 가족이라도 누구라도 좋습니다.

  또 연애에서 퇴짜맞은 경우에도 병이 들면 왠지 그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병이라 해도 단순히 우연히 드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인생의 도피처」를 찾아서 자신 스스로 병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점을 알아 주십시오.

  몸의 컨디션이 나빠져서 병이 들었을 때에는 「자신의 도피처를 만들고 있지 않은지, 병에게로 도망쳐 들어갈 필요가 자신에게는 있지 않았는지」를 한 번 체크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병이 든 사람에게 「당신은 병에게로 도망쳐 들어간 것이겠지요?」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화를 낼 것입니다. 「문병의 말을 하면 모를까, 『병으로 도망쳤다』니, 어쩌면 그렇게 실례되는 말을 하는가? 너는 지옥에 떨어질 거야」라고 하며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표면의식에서는 자기가 병을 구하고 있는 것을 모릅니다만, 병이 생기는 과정을 제3자의 눈으로 객관적으로 보면 역시 무언가의 도피처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본의가 아닌 삶을 살고 있거나, 잘 되어가지 않거나, 좌절하거나 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병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면하여 휴식을 취할 수 없는 사람도 자기가 병을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쉴 수가 없는 타입의 사람, 자기가 휴식을 취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는 타입의 사람은 병이라도 들지 않으면 쉴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몸 쪽이 병을 만들어 「쉬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셈입니다. 잠재의식이 실은 휴식을 바라고 있어서 그래서 병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병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왜 나는 이런 병에 들었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암이 되지 않기 위한 점검항목 ---「공격적인 감정」이나 「자기처벌의 관념」은 없는가

 

  나의 저서인 『부활의 법』에는 「암은 다른 사람에 대한 공격적인 감정이나 자기처벌의 관념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이 쓰여 있습니다.

  다만 「암이 되는 것은 악인(惡人)만이고 선인(善人)은 암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아 주십시오.

  선인이라도 전술한 바와 같이 무리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선인이기 때문에 무리한 일을 자신에게 명하거나 무리한 부담을 짊어지거나 하여 쉴 수도 게으름 피울 수도 없어 무리에 무리를 거듭해 갑니다. 그리고 어느새 자기파괴상념이 쌓여서 자신을 쓰러뜨리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쓰러질 때가지 그만 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앞으로 몇십 년이나 일을 할 수 있는 데도 무리를 했기 때문에 빨리 자기를 쓰러뜨려 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따라서 「암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를 단순히 「선인인가 악인인가」라는 발상으로 파악하기만 해서는 불충분합니다. 객관적으로 보아 자신의 마음과 몸의 경영에 실패한 경우에는 병이 생긴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공격성이 강한 타입, 즉 타인에 대한 증오나 한(), 노여움 등이 너무나 강하게 계속적으로 나오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염()에 의해 상대가 병이 들어 쓰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염이 상대 쪽으로 가지 않고 자기 쪽이 병이 드는 경우도 있으므로 주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기 쪽이 병이 들어 버린다면 원망했던 자기가 손해를 보게 됩니다. 상대를 쓰러뜨리고 싶어서 「생념(生念)」을 발신하는 셈입니다만, 상대가 아무렇지도 않을 경우에는 그 염이 자기에게 돌아와서 자기 쪽이 병이 들어 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암이 들어 버려서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마이너스 염()의 발신을 멈추어야 합니다. 타인에 대한 한()이나 노여움 등, 공격적인 염파(念波)의 발신은 어느 정도에서 멈추지 않으면 자신의 몸이 나빠지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도 타인을 책망하는 염파를 부드럽게 하여 조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암 등의 병의 원인에는 자기처벌관념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타입의 사람이 병이 드는 경우는 이 자기처벌관념이 원인인 것이 많습니다.

  요컨대 자기를 「죄가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여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과거에 저지른 갖가지 실패나 과오, 타인에 대해 저지른 죄 등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그 몹시 괴로워하던 생각이 몇 년이나 쌓이게 되면 병이 생기게 됩니다.

 

  잘못된 상념이 몸의 약한 부분을 결괴(決壞)”시킨다

 

  자기 스스로 병을 만들고 있는 경우”, 병의 종류는 무엇이라도 좋으며, 자기 몸의 가장 약한 곳에 병이 나타납니다. 「이런 상념을 가지면 반드시 이 병이 든다」는 것이 아니라, 몸 속에서 약한 곳에 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암이든, 심장병이든, 뇌의 병이든, 혈관의 병이든 어떤 병으로도 나타납니다. 몸 속의 약한 부분을 찾아서 그곳에 병이 나타날 뿐이므로, 그 부분을 고쳐도 또 다시 다른 곳에 병이 나타납니다.

  물론 타고난 몸의 구조에 의해 강한 곳과 약한 곳은 있지만, 사실은 어떤 병이라도 들 수 있습니다. 병이란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강이 범람할 때 제방의 약한 곳이 결괴(決壞, 터져 무너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강물이 증수(增水)하면 제방의 엷은 곳이나 낮은 곳 등 약한 부분이 결괴하여 물이 흘러나옵니다만, 그와 마찬가지로 병을 일으키는 상념이 나타나면 몸의 약한 곳을 찾아서 거기를 결괴시키려고 합니다.

  그와 같이 하여 약한 곳에서 병이 나타납니다만, 그 부분을 낫게 해도 또 그 다음 약한 부분에 나타나거나 하므로, 강의 범람을 멈출 경우와 마찬가지로 근본원인 부분을 고쳐갈 필요가 있습니다.

 

3. 「가정의 문제」와 병의 의외의 관계

 

  담배나 술을 끊을 수 없는 사람의 본심

 

  모든 병의 원인이 마음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병의 약 7할은 마음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적인 원인, 물질적인 원인에 의한 병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담배를 지나치게 피워서 폐암이 되는 것 같은 경우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본인은 여러 가지 변명을 할 것입니다만, 타인은 「하루에 40개피나 담배를 피웠다면 폐암이 되는 것은 당연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경우 직접적으로는 「담배」라는 물질적인 원인으로 폐암이 되는 셈입니다만, 「담배를 끊을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심리적인 이유가 있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갖가지 스트레스로 초조해 하거나 죄악감이 있거나 불안감이 있거나 하여 그것을 마비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담배를 끊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술을 끊을 수 없다」는 경우도 같습니다.

  술은 물론 적당한 양이라면 몸에 좋을 수도 있습니다만, 주위 사람들에게서 「이제 끊으라」는 말을 몇 번이고 들을 정도로 마시면 몸을 나쁘게 만듭니다. 그 경우 술 자체가 직접 원인으로 병이 들었다 해도 「주위 사람들이 주의를 해도 듣지 않는다」는 부분에는 역시 마음에 무언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집에 돌아가면 부인에게 야단맞으므로 부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밖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인으로서는 깜짝 놀라겠지요. 「남편은 술을 좋아하니까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 싶지 않아서 밖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니, 몰랐다. 그런 일은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부인이 많을 것입니다.

  남성 가운데에는 「집에 돌아가면 마누라에게 야단맞으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집에 돌아가면 마누라에게서 『돈이 없다』는 말을 들으므로 그것이 싫어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집에 돌아가면 자식의 교육문제로 마누라에게서 또 무슨 말을 듣는다. 그것을 듣고 싶지 않아서 돌아가기 싫다」는 등의 이유로 집에 돌아가지 않는 변명을 열심히 만들어 집을 비우고, 그 결과 병이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토요일과 일요일에 집에 있으면 마누라에게서 또 무슨 말인가 듣게 되므로 하고 싶지도 않은 골프를 치러 나가서 허리를 다치거나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부분의 마음 속은 부부라 할지라도 서로 좀처럼 읽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마실 것이나 먹을 것, 담배 등, 물질적인 원인에 의해 병이 드는 일은 있습니다만, 그 과정 속에는 어느 정도 심인성(心因性)의 부분, 마음의 문제가 있습니다. 대체로 병의 7할 가량은 마음과 관계가 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따라서 반대로 말하면 마음 쪽을 치료하면 7할 가량의 병은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게 됩니다.

 

  유방암이나 자궁의 병으로 고민하는 사람에게 --- 잠재의식을 주시하자

 

  특히 유방암이나 자궁암, 자궁근종(子宮筋腫) , 여성 특유의 기관에 발생하는 병은 대개의 경우 부부 갈등이 원인입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남편이 밖에 여자를 만들었다」는 경우에 남편을 때려눕혀서 개심(改心)시킬만한 힘이 있는 부인이라면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어 암에 걸리지 않아도 됩니다만,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분한 생각이 질금질금 마음에 쌓여갑니다.

  그러면 대개 유방암이나 자궁계통의 병 따위가 나타납니다.

  상대를 공격하여 절복(折伏)시킬 수 없는 사람은 반대로 자기 쪽을 책망합니다.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가치나 본질의 부분을 책망하기 때문에 여성 특유의 기관에 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몸에 이변이 나타나는 데에 그다지 시간은 걸리지 않습니다. 불과 수개월 정도로 암이나 근종 따위가 생기게 됩니다.

  이 경우 자기를 책망함과 동시에 실은, 병이 듦으로써 남편을 개심시키려는, 반성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유방암이 되었다」, 「자궁암이 되었다」는 것으로 남편을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당신 탓으로 이런 병이 들었어. 어떻게 해 줄 거야? 빨리 집에 돌아와 간호해. 죽으면 앙갚음할 거야」라고 위협하여, 병을 만들어서라도 반성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표면의식에서는 그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아도 잠재의식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그것이 병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책망하는 마음」을 버리고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 위한 사고방식

 

  부부의 갈등에 의해 병이 든 경우에는 「병을 더욱 악화시켜서 남편을 반성하도록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작용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만, 병을 고치고 싶으면 역시 남편과 화해하고 조화하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편이 좋습니다.

  상대를 지나치게 책망하고 있다면, 사고방식을 바꾸어 반대로 자기의 부족한 점을 반성하거나 상대의 좋은 점을 보아주거나 칭찬해주거나 하면 상대의 태도가 부드러워집니다.

  남편은 책망받기 때문에 도망쳐 있는 것이며, 책망하는 것을 그만두면 반성을 시작하여 집으로 돌아옵니다.

  부인은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남편은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등 여러 가지로 생각합니다만, 그 책망하는 상념에는 상당히 심한 면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남편은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여 사실은 그다지 가고 싶지도 않은 술집에 가거나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책망하는 상념에서 피난하고 있을 뿐이므로 부인이 부드러워지면 돌아옵니다.

  부인으로서는 쓰라린 일일지도 모릅니다만, 남편과 조화하여 화해를 하고 자신의 일에 대해서도 잘 돌이켜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혼 때의 기분으로 돌아가 한 번 더 다시 하자」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상대가 금방 달라지므로 시도해 보십시오. 병이 들어 죽는 것 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인생의 재시도는 몇 번이고 가능하므로 남편을 영원히 계속 꾸짖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10년도 20년도 전의 일을 말하거나 사소한 일로 불평을 하여 피해를 키우는 방향으로 힘을 들이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피해는 작을수록 좋으므로 관계를 수복하도록 노력해 주셨으면 합니다.

  여성의 경우는 가족관계의 고민이 원인으로 병이 드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특히 이성(異性)인 남편과의 관계에서 병이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자궁의 병일 경우에는 남편 이외에 자식에 관한 고민이 원인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여성에게 자궁은 자신의 자식을 임신했던 곳이므로 「자식의 됨됨이가 나쁘다는 것은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성능(性能)”이 나빴기 때문이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책망하기 시작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면 자궁계통의 병 따위가 나타납니다.

  그와 같이 「인간에게는 병을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아 주십시오. 「자신이 병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하고 생각되었을 때에는 「사고방식을 바꿈으로써 인생의 모습을 바꾸자」고 생각하여 그 방향으로 노력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4. 즉각적으로 체질을 바꾸는 다이어트술()

 

  심장병을 피하기 위해 --- 「영양과다」와 「운동부족」에 요주의

 

  심장의 병에는 스트레스나 노여움 등이 꽤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남성은 중년 이후, 직업상의 스트레스과다에 의해 심장병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원인으로 심장병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폭음폭식을 하여 체중이 늘고 운동부족의 상태였다면 심장병이 될 가능성은 높겠지요. 객관적, 통계적으로 「이런 경우에는 심장병이 된다」고 이야기되는 것을 하면 역시 그대로 됩니다.

  예전에 영양부족의 시절에는 결핵 등의 병이 유행했습니다만, 현대와 같이 영양과다의 시대가 되어 금방 살이 찌는 상황이 되면 이번에는 심장병 따위가 늘어납니다. 미국형의 생활을 하고 있으면 영양과다와 운동부족에 의해 심장병이 되기 쉽습니다.

  이 세상적으로 보아 명확한 원인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개선해 가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있으면 「많이 먹어서 힘을 내고 싶다」는 마음도 있겠지요. 그러나 중년을 넘었다면, 노력하여 자신을 개선해 가려고 하지 않으면, 일찍 죽어 결과적으로 가족에게 폐를 끼치고 직무상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게 됩니다.

  젊은 동안에는 매우 건강하여 「학생시절에는 운동부에 있었기 때문에 체력에는 자신이 있다」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만, 역시 35세 정도부터는 조심을 하여 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든가 해서 나쁜 곳이 없는지 어떤지를 체크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혈액검사에서 특정한 병의 징후가 나타났을 때에는 그 부분에 주의를 하여 생활을 개선해야 합니다.

「너무 먹어서 뒤룩뒤룩 살이 찌고 당뇨병이 되었다」는 경우, 그것은 부처나 신의 탓이 아닙니다. 법칙적으로 그렇게 될만하여 된 것입니다. 칼로리과다라면 과식을 수정하고 운동량을 늘리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신의 몸을 소중이 하고 몸의 상태를 컨트롤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12킬로 감량한 나의 다이어트법

 

  나 자신도 수 년 전에 몸 상태가 나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대체로 72, 3킬로 정도의 체중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의 체중이 있으면 힘이 나서 편하게 설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만, 몸의 상태가 나빠진 것을 보면 약간 체중이 많았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72, 3킬로의 체중이 있으면 확실히 파워는 나옵니다만, 혈압이나 콜레스트롤치가 올라가서 몸의 부조(不調)를 느끼기 시작하므로 체질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노력해서 다이어트를 실행했습니다.

  그 결과 3개월에 12킬로 감량할 수가 있었으므로 나는 다이어트에 대해 책을 한 권 쓸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오오카와 류우호오(大川隆法)가 다이어트 책을 내는 것도 어떨는지 하는 생각으로 그만두었습니다.

  나는 73킬로 되던 체중을 61킬로로 감량하여 그 체중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61킬로라는 것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체중입니다.

「가족이나 조직에 책임이 있는 자로서 오래 계속 일하기 위해서는 체질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깨닫고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나의 경우, 섭취 칼로리가 많을 뿐 아니라 수분의 섭취량이 많은 것도 분명했습니다. 설법이나 회의 등, 이야기할 기회가 많으므로 수분을 자주 취했고, 비서가 마실 것을 자주 내어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마시는 동안에 뱃속이 수분으로 가득 차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장병(社長病)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회사의 사장은 대개 차 따위의 마실 것을 많이 마심으로 수분이 쌓여 살이 찌고 그래서 병이 듭니다. 몸의 수분을 배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만, 좀처럼 수분의 배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섭취 칼로리가 많고 몸에 수분이 고여 있으면 병이 들기 쉬우므로 섭취 칼로리를 줄이고 체지방이나 체내의 노폐물을 줄임과 함께 고인 수분을 배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취했는가 하면, 우선 아침식사를 당근ㆍ사과쥬스로 했습니다. 당근ㆍ사과쥬스만으로는 조금 괴로웠지만 노력하여 실천했습니다.

  또 워킹을 하여 걷는 양을 되도록 늘렸습니다.

  점심은 메밀, 국수, 스파게티 등 가벼운 것으로 하였습니다. 나는 메밀을 자주 먹었습니다.

  그리고 저녁식사만은 보통의 식사를 취했습니다만, 육류를 약간 줄였습니다.

  나아가 몸의 수분을 줄이기 위해 생강홍차를 마셨습니다. 생강홍차를 마시면 이뇨작용에 의해 여분의 수분이 배출됩니다.

  이와 같은 생활 스타일을 취함으로써 나는 12킬로를 감량했던 것입니다.

 

  피로로부터의 회복이 빨라지는 다이어트의 효과

 

  다만 체중이 감소되어 갈 때는 체력도 떨어지므로 일을 하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일이 바쁠 때 다이어트를 지나치게 하면 쓰러져 버리므로 자신의 인생설계를 잘 생각하여 행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오래 전에도 한 번 다이어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체중이 72, 3킬로일 때 감량을 하여 67, 8킬로까지 떨어뜨린 적이 있습니다만, 70킬로 이하가 되는 순간 세 번 정도 행사에서 설법을 하면 피곤하여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다이어트를 중지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듦에 따라 몸의 기능이 떨어졌으므로 「한 번 더 다이어트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실행했던 것입니다.

  일정한 정도까지 체중이 떨어지면 그 다음은 그다지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만, 전술한 방법을 계속해 가면 그래도 일 개월에 2킬로 가량은 계속 떨어지는 형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12킬로 살이 빠진 정도에서 「슬슬 이쯤에서 그만두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라는 닥터 스탑이 걸렸습니다. 「고등학교시절의 체중으로 돌아가면 이제 된 것이 아닙니까? 너무 무리를 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이상적인 체중을 너무 추구해서는 안됩니다」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이 정도로 좋겠지」라고 생각하여 그만두었습니다.

  그래도 다이어트의 효과는 즉각적이어서, 체중을 줄였더니 탈 것에서의 이동이 편해졌습니다. 살이 찌면 몸을 꺾어 구부리는 자세가 힘듭니다만, 살이 빠진 덕분에 차에서의 이동이 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피로로부터의 회복도 빨라졌습니다. 살쪄 있을 때는 행사에서 설법 등을 한 뒤 한동안 타격이 남아, 체력이 회복되는 데에 나흘 정도 걸렸습니다만, 그것이 하루에 회복되게 되었습니다.

 

  중년 이후를 충분히 쾌활하게 살기 위한 「건강의 비결」

 

  나아가 다이어트를 함으로써 나는 마음 편하게 외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밖으로 나가거나 사람과 만나거나 하는 일이 즐거워져서 이전보다도 대인관계가 좋아졌습니다.

  집사람과 함께 외출하는 횟수가 는 것도 체중이 준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나는 집사람과 백화점 등에 가는 것은 피곤하고 부끄러워서 신혼 당시부터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만, 지금은 몸이 가벼워져서 함께 쇼핑을 가는 것이 걱정 없게 되었습니다. 몇 시간 정도 걸어다녀도 아무렇지도 않아, 「몸이 가볍다는 것이 이렇게도 좋은 것이구나」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장작을 짊어진 니노미야 손도쿠(二宮尊德)과 같은 모습으로 12킬로의 짐을 들면 장시간은 서 있지를 못하고, 역의 홈이나 백화점 내부 등을 걸으면 다리가 아파질 것입니다. 감량하기 전의 나는 그 상태였던 것입니다.

  체중을 줄이고 있을 때에는 활력도 떨어지므로 조금 괴롭습니다만, 중년 이후에 살이 찐 사람은 무리를 하지 않는 정도에서 한 달에 2킬로 가량씩 줄여 가면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음식물을 조금 절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아침은 당근ㆍ사과쥬스, 낮은 메밀이나 국수로 하고 저녁만은 보통으로 먹는다」는 스타일로 합니다. 그리고 밤에는 그다지 간식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식사의 양을 그 정도로 억제하고 운동량을 늘립니다. 바빠서 운동시간을 낼 수 없는 샐러리맨이라면 역 하나 거리를 걷는 정도의 노력을 해봐도 좋지 않겠습니까?

  절식(節食)에 의해 체중을 줄이고 운동량을 늘리면 즉각적으로 체질이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다소 힘들지 모릅니다만, 일정한 수순을 유지할 수 있게 되면 그 다음은 젊음이 되돌아와 몸이 편해집니다.

  중년 이후는 어딘가에서 체질개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처럼 12킬로나 감량하는 것은 큰일이겠지만, 2, 3킬로나 4, 5킬로 정도의 감량이라면 그다지 무리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므로 노력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역시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의 양을 줄이지 않으면 체중은 줄지 않습니다.

  또 전술한 『부활의 법』에 쓰여 있듯이 수분이 몸에 많이 고이면 심장에 좋지 않습니다.

  수분이 고이면 혈액의 양이 늘어나므로, 전신에 혈액을 순환시키기 위해 심장에 굉장한 힘이 필요하게 되어, 그 때문에 혈압이 올라가 버립니다.

  특히 염분이 많은 것을 먹으면 많은 수분을 섭취해 버립니다. 고혈압을 방지하기 위해 염분의 조절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됩니다만, 확실히 그런 면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금기가 적으면 처음에는 식사가 맛있게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염분을 조금 억제함으로써 몸에 섭취하는 수분량이 줄어듭니다.

  나는 「양식은 살이 찌지만, 일식은 살이 찌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일식은 의외로 염분을 많이 사용합니다. 조사해 보니 나는 하루에 20그램에서 30그램의 염분을 섭취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섭취하는 염분을 7그램 정도로 줄이고 섭취하는 수분량을 조절했더니 확실히 몸에서 여분의 물이 빠져나갔습니다.

  젊을 때에는 성장하기 위하여 먹거나 마시거나 하는 것만을 생각합니다만, 중년 이후에는 이제 몸이 성장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배설 쪽이 중요해집니다. 「어떻게 하여 몸에 쌓여 있는 독소나 물을 배출하고 잉여 칼로리를 소비하는가」라고 하는 배설이나 연소 쪽에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지혜가 필요해지므로 의학지식의 공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5. 당신의 건강을 부활시키는 네 가지 키워드

 

  의사에게는 비관론자가 많으므로 그 점은 주의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의사는 직업상 매일 환자만을 상대로 하고 있어, 병이 악화되는 것이나 환자가 죽어가는 것을 수없이 보기 때문에 자연히 비관적이 됩니다.

「이 병은 낫지 않는다」, 「당신은 죽을지도 모른다」, 「평생 이 약을 계속 복용하시오」라는 등, 의사는 나쁜 일을 흔히 말하므로, 어느 정도 의사의 불행의 예언에 견디는 힘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회복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런 나쁜 예언은 맞지 않는다」고 마음에 단단히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쁜 영향을 받고 맙니다.

  물론 병이 들었을 때에는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거나 해도 좋습니다만, 의사는 사람이 죽는 모습을 많이 보아서 비관론자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 점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의사는 최악의 경우를 말해 두면 실제로는 그것보다도 좋아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은 목숨이 6개월 가량인 사람에 대하여 「3개월 가량입니다」라고 해 두면 그보다도 수명이 늘어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일 년은 살 것입니다」라고 하고서 만약 반년 만에 죽거나 하면,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이 낙담합니다. 그 때문에 직업상 나쁜 것을 말하는 버릇이 아무래도 들어 버립니다.

  따라서 의사가 말하는 것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암시에 걸려서 더욱 나빠지는 일이 있으므로, 어느 정도 에누리하여 듣는 편이 좋겠지요. 또 「의사의 예상에 반하여 회복된다」는 경우도 많이 있으므로 회복될 가능성을 믿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건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적극적이고 밝은 상념을 가지고 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전체적으로 건강의 부활을 위한 키워드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반성」, 「감사」, 「정진(精進), 「기도」의 네 가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반성」에 의해

  영체(靈體) 속에 있는 악상념(惡想念)의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성에 의해 부처의 빛을 넣는 것입니다.

 

  다음은 「감사」입니다.

  환자에게는 대개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불평불만이나 푸념은 나옵니다만, 감사의 마음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병이 들고 싶지 않으면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병이 들어 있을 경우에는

  주위의 간호사나 가족 등에 대한 감사를 유념해 주십시오.

  그러면 병은 나아집니다.

  타인을 책망하는 마음이 있으면 병은 낫지 않습니다.

  병은 본인에게 반성을 재촉하거나

  가족의 고마움을 가르치거나 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반성이나 감사를 가르치기 위한 수행의 기회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정진(精進)」입니다.

  식사나 운동 등 몸 관리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만,

「의학지식도 공부하면서 자신의 건강을 유지해 가자」

  하는 정진의 마음이 불가결합니다.

 

  마지막에는 「기도」입니다.

「좋아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 전체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자기로서는 이런 인생을 살고 싶다. 이 정도의 연령까지는

  건강하게 현역으로 일하고 싶다. 그 후에도 이와 같이 하여 가족과 살고 싶다」

  는 인생설계를 되풀이하고 되풀이하여 마음 속에 그리는 것입니다.

  매일 자신의 건강생활에 대해 설계하고, 기도에 의해

  차츰 생활이나 사고방식, 행동 등 여러 가지가

  그와 합치된 것이 되어 갑니다.

 

  이 「반성」, 「감사」, 「정진(精進), 「기도」라는 네 가지 말을 건강을 부활시키기 위한 키워드로 삼아 주십시오.


                                                                                                    
< 2007 1 17 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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