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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읽다가 잊지 않으려고 적어두는 곳입니다. 제대로 된 글들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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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체제: 지나치게 광범위한 성립기반과 병농일치에 의한 군사적 기능의 부실화, 지방수령이 지휘관이 됨에 따른 비전문성이 문제됨. 농민의 군역자체가 방군수포/대역납포화 하는 폐단.
*조선쪽이 워낙 엉망이라서 밀린 것이지 왜가 잘 싸운 것이 아님-개전 후 두달만에 초전의 패퇴를 극복.
개전초 관군의 도망이 문제되지만, 사실 관료층의 도망 이후의 문제 임.
*강압적인 의병모집도 있었음. 의병의 주역인 사림은 경제적 기반이 있어서 군량을 댈 수 있었음.
*왜가 수전에 능한 것으로 생각해 바다에서는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 육전에 대비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음.
1593년 풍신수길은 배가 없으면 군사와 군량을 보낼 수 없으니 출정시 타고간 배를 반드시 돌려보내라고 함.
임란초 왜는 해상전투에 대비한 수군편성 자체가 없었음. 왜 수군은 해적들을 모은 것일 뿐, 정규수군은 없었음.
지휘체계가 없어 장수들이 모두 동등한 위치에서 다투기도 함.
왜 전선은 수송용 선박을 전용한 것-일본측 연구자는 첫째가는 패인으로 꼽기도 함.
일본측 연구자는 한산도 대첩을 풍신수길의 조선침략에 대한 사형선고로 평가하기도- 이후 몇해동안 전쟁을 끌었지만 오직 풍신수길의 실망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봄.
*서울을 점령한 왜가 방을 걸어 불러모으자 피난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빈집들과 거리가 다시 꽉 참. 왜가 발행한 증명서를 가진 사람은 성문을 통과시켰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 증명서를 받았고, 왜에 빌붙는 사람도 많았음.
*임란 전 조선이 왜의 앞잡이가 되어 명을 친다는 정보[향도설]가 있어, 명은 조선을 의심함-조선의 사정을 파악한 뒤, 조선을 돕지 않으면 왜가 조선을 삼킨 다음 조선을 거느리고 쳐들어올 것이라 보아 조선을 돕기로 함. 복건/절강이 왜환을 당해도 요양과 천진은 그러지 않은 것은 조선이 울타리가 되었기 때문인데, 왜가 조선을 삼키고 요양/천진을 칠지도 모른다고 봄.
조승훈이 이끈 명군의 평양패전: 왜도 뜻밖에 명군이 빨리 개입해 당황.
이여송의 평양탈환 후 벽제패전으로 전의상실-왜가 중국으로 침공하진 못하니 명의 목표는 달성된 셈이기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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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리집안의 서얼- 조선왕조개창 주역들 다수가 서얼. 고려말 혁명파와 보수파 사이는 측실과 적실 소생의 갈등도 얽혀있었음. 혈통문제로 소외된 사람들이 혁명세력으로 결집한 듯함.
*이색의 제자. 성균관 출신. 북원사신의 영접사로 임명되었으나 거부해, 경복흥/이인임 등이 귀양을 보냄- 귀양살이가 완화되어 거주지선택이 가능해졌을 때도 재상들이 미워해 쫓아버리는 등 9년동안 고생하며 떠돌아야했음-결국 이성계를 찾아감.
*스승인 이색과 우/창왕 폐위 때문에 멀어짐. 소년시절부터 절친했던 정몽주와 전제개혁을 거치며 멀어짐. 승려들과 깊은 교우관계에 있었으나, 불교배척운동을 벌임[유생들의 격찬을 받음].
*공양왕때 과전법이 제정되자, 국왕을 비롯한 모든 구세력이 이성계의 왕위찬탈을 우려하고 저항-이성계는 벼슬을 버리고 함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역성혁명에 적극적이지 않았음], 정도전/남은 등이 말려서 그만 둠.
*개국공신-1등공신. 태조 초기 병권을 장악, 문물제도 정비
*표전문사건: 명에서 조선이 보낸 표전문이 격식에 맞지 않는다며, 정도전을 책임자로 지목해 명에 보내라함-정도전이 요동정벌하려는 것을 탐지했기때문. 명과의 긴장으로 요동정벌계획이 더 적극적으로 추진됨-반대도 컸음. 정도전이 죽으며 끝남.
*1차 왕자의 난=공소지난=무인난
실록에는 정도전이 방석을 끼고 다른 왕자들과 종친들을 모해하려해 이방원이 선수를 쳤다고 쓰여졌으나, 의문이 많음.
*태종도 국정의 기본방향은 정도전의 주장대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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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 일본학계의 막연한 선입관과 한국학계의 감정적 반발로 요약됨.
출선기관설: 일본의 남선경영론의 뼈대. 거의 사라짐.
가야의 왜인설
분국설
백제군사령부설
외교사절설: 임나에 파견된 왜 사신.
*후백제의 견훤은 일본에도 사신을 파견. 일본은 견훤을 신라의 신하라하여, 사사로이 외교관계를 맺을 수 없다며 거절.
*일본서기: 완전한 사료도, 완전한 위서도 아닌, 비판이 필요한 일반적인 사서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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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이후 면리제가 정착, 공동납共同納이 강화되며 부세의 금납화가 전개-수령권한 강화-실무자였던 향리층 득세
특정지역 특정가계의 향리들이 세습하기도. 권세가와 유착.
19세기 중반이후 농민항쟁/갑오농민전쟁에서 하층향리는 농민군에 우호적이었으나, 상층부는 적대적. 일반농민은 향리에 적대적.
갑오개혁으로 이서吏胥의 수도 크게 줄고, 수입도 크게 줄음[직무수행과정에 나오던 역가役價가 정액화된 급료로 바뀌면서 액수가 줄었고, 조세금납화/재정개혁으로 관속들이 챙기던 돈줄이 막힘]-많은 관속들이 몰락, 이서층은 개화파 관료들에게 강력해 반발.
농민항쟁때 향리는 주요 공격목표-민보군조직에 향리들이 큰 역할
보수층의 반일의병에 향리들도 참여, 개화파관료들을 처단하기도.
*조선의 노비제도는 19세기 초에 도망/해방등으로 유명무실해짐
갑오경장으로 법적차별 철폐했으나, 유명무실. 광무10년 형법대전에서 노비매매벌칙이 규정되며 노예해방 급진전. 하지만 먹고살 여건이 안되어 노비해방을 저주하는 노비들도 많았음.
노비출신으로 관직에 오른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출세, 대부분 매국노로 일제강점기까지 부귀를 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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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빙기: 학문적으로 정립된 개념은 아니고, 신문기자가 쓰기 시작한 말.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다툼이 있으나, 17세기에 절정을 이룬 전세계적 현상. 우리나라는 효종/현종/숙종때 기근이 심했음. 경신대기근[1670ㅡ1671]이 최악.
대기근으로 폐읍이 된 사례는 없음[전란으로 폐읍이 된 사례는 있으나].
상평창과 의창으로는 모자라, 임시기구로 진휼청을 둠.
전염병이 창궐했어도, 유럽과 달리 마녀사냥 같은 피의 축제는 없었음.
*유기아: 버려진 아이들.
부자들이 데려다 길러서 노비로 삼고 싶어도, 뒷일[유기아가 노비였던 경우 상전/ 평민인 경우 부모가 나중에 따질 수 있음]을 걱정해 거두지 않기도 함- 누구라도 거두어 기르게 하려고, 유기아를 길러서 노비로 삼을 수 있게 함. 유기아가 노비였을 경우, 원주인이 돌려달라고 할 수 없도록 함.
수양유기아사목, 유기아수양법이 만들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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