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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8/08/21
 

사서 봐야할 책

*서해안의 지리적 특성상 해상교역이 빈번-금강유역에 동검문화/철기 발달.

*백제는 정복자 집단과 토착세력간 괴리가 심각했음- 언어도 달랐음.

*마한지역은 차령/노령산맥과 금강/영산강/섬진강/탐진강 때문에 지형적 통일성이 없고, 서해안과 가까워, 마한의 소국들이 낙랑/대방군과 자유로이 내왕-삼국지에 의하면 하호들 중에 대방군에 나가 의책과 인수를 받은 자가 천여명에 달함-이는 백제 주도의 마한통합을 오래 방해. 하지만 이후 백제가 통합한 뒤에는 해상활동이 백제의 자산이 됨.

*초기 백제역사는 마한사의 일부였을 뿐- 백제가 마한을 통합한 것이 언제인지 알 수 없음. 마한잔존세력이 가야/왜와 관련을 갖기도.

*백제란 국호의 뜻은 불명확- 삼국사기의 십제에서 백제가 되었다는 기사는 미덥지 못하다함. 백제의 뜻에 관해 여러 견해가 있음.

*초기 백제 왕실은 온조계와 비류계의 이원적 구성으로 되어 있어, 왕위계승도 두 계통이 때때로 교대한 듯한 흔적이 보임

*박사 고흥, 왕인은 대방/낙랑군 출신이나 그 후예일 수도 있음.

*백제는 늦어도 5세기쯤 왕을 대왕으로 보는, 화이사상에 입각한 백제 나름의 천하관을 갖춤-유물들도 발굴되고, 중국에 신하들에게 내린 관작의 승인을 요청하는 국서에 지명에 왕을 붙인 제후왕들이 나타남[송서 백제국전 남제서 백제국전].

*백제는 周禮의 영향을 많이 받음-정치체제에서 쓰인 말 가운데 상당수가 이책에서 따옴.

*백제조정은 지방세력가에게 진귀한 물품을 내려주며 충성을 확보.

* 6세기중후반 전국을 중방[古沙城], 동방[得安城], 남방[久知下城], 서방[刀先城], 북방[熊津城]의 5방으로 나눔. 왕도인 고마성[古麻城]은 상전중하후의 5부로 나눔.
멸망시 왕도는 거발성. 기내5부에는 각기 5항이 있어 士人이 거주.
방/군/성[후대의 현]체제로 지역사회를 장악. 다만 백제의 지방지배는 멸망의 순간까지 군사적 성격이 강했음. 국가권력이 지방사회말단까지 들어가지 못했고, 이는 고구려/신라와 비교할 때 큰 약점.

*백제에는 신라인/고구려인/왜인/중국인까지 섞여살아 주민구성이 복잡[수서 백제전]

*성왕때 사비로 천도한 즈음, 백제조정이 응준鷹準을 표방-이는 마한선주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됨.
황룡사 9층탑의 5층이 응유의 침략을 막기 위함이라는데, 이는 거의 틀림없이 백제로 보임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백제의 별호를 응준이라 명시-온조의 후계왕들이 사비시대 남부여 말고 응준이란 나라이름도 썼다고.

*신라/고구려보다 넓고 기름진 곡창지대를 확보, 서해안을 통해 중국과 교역 쉬움-농업생산력/대외교역 많음.
고구려와 군사적으로 대립하며 문화적 접촉은 계속-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때 휴전선같이 완전히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테고, 고구려와 백제의 변방주민들은 중앙과 깊은 관계는 아니었을테고, 가까이 있는 상대국 국민들과 관련이 더 깊었을 것이다. 이들간의 접촉을 중앙이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중앙이 더 잘 알았을 것.

*무령왕릉은 중국 6조의 묘제를 본뜬 것이 분명하나, 아치천정을 벽돌로 쌓고, 돌로 석수를 만들고 머리에 철판을 오려만든 뿔을 붙였으며, 왕과 왕비의 관뚜겅은 중국과 다른 독특한 것.

*고구려와 백제의 예술은 쇠퇴기 없이 전성기에 갑자기 소멸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온조를 주몽의 둘째아들이라 함. 別傳에서 온조형제의 생부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손자 우태優台인데, 그가 죽고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한 것이라 함. 주서백제전에는 백제의 시조가 부여의 별종인 구태仇台라 하고, 수서에는 구태를 동명의 후예라 함.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서 백제가 그 조상인 구태의 묘를 세워 일년에 네차례 제사지냈다고 함. 구태가 우태일 수도 있음.

주몽과 온조가 부자관계인지는 몰라도, 백제건국세력이 부여족계통인 것은 확실- 백제왕실의 성은 부여씨, 남부여라는 국호, 백제가 부여의 건국자를 기리는 동명왕묘를 세워 제사지냄,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백제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족에서 나왔다고 자칭, 속일본기에 백제왕족의 후예로 일본조정에 있던 '백제왕 인정' 등이 백제 태조를 도모왕都慕王[일본발음 은 츠모-鄒牟와 소리가 같음]이라 함-고구려왕실과 동류의식이 있었음

*온조는 북한산 기슭에 도읍했다가 한강이남 위례성으로 옮겨 십제를 건국. 그뒤 비류가 죽자 따르던 자들이 위례성에 합류해 백제가 됨.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따르면 온조의 형 은조殷祚가 최초의 왕이 되었다가 다섯달만에 죽자 온조가 뒤를 이음.

*삼국사기의 백제건국연대는 믿기 어려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사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음. 적어도 고이왕 이전의 백제왕통계보는 조작/왜곡된 듯함. 웅진시대 계보에 관한 한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믿을 수 없음-중국정사 백제전도 마찬가지. 백제신찬을 인용한 일본서기에 상세한 기록이 있음.

*관구검의 고구려침공이 끝나자, 위는 246년 마한북방지역[임진강-한강]의 여덟나라로 하여금 군현에 대한 조공의무를 대방군에서 낙랑군으로 변경-이를 마한세력의 통합을 저지하는 분열정책으로 본 마한북방의 여러나라가 맹주인 신지臣智를 중심으로 대방군의 요충인 기리영으로 쳐들어가, 대방태수 궁준이 전사-위는 현도군태수 왕기를 대방군태수로 보내 진압-한나해韓那奚등 수십나라들이 항복, 그간 뺏은 군현변경지대민호를 돌려보냄

*백제본기의 말갈은 영서지방에 있던 예濊족으로, 크게보면 부여족과 같은 계통. 예족은 고구려의 부용세력으로, 백제와 적대관계.

*책계왕: 중국군현세력이 예맥족을 앞세워 쳐들어와 전사. 분서왕: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죽음.
근초고왕 말기부터 고구려의 침공이 강력해짐-모용씨의 연이 망하고 전진과 고구려가 친교를 맺어, 고구려는 백제공격에 집중
백제와 왜국의 관계는 근초고왕때부터 시작된 듯함. 한성함락 뒤 더 긴밀해짐. 근초고왕 말기이래 남조의 역대왕조와 국교를 맺음.

문주왕때 왕비족인 해씨가 세력을 잡아, 해구가 문주왕을 암살하고, 태자가 삼근왕이 되자 반란을 일으킴-전왕비족 진씨가 진압하고 해씨 몰락. 진씨가 실세가 됨-동성왕이 즉위해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왕비족의 횡포를 막고, 연씨 백씨 사씨 등 신흥세력을 키워 진씨등 구귀족을 억누르려 함. 또 22담로제도를 통해 지방을 간접지배가 아닌 직접지배하려함[지방세력의 반발]. 이후 위사좌평 백가를 견제했는데, 사냥을 하다가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죽어 무령왕 즉위.

무령왕릉의 지석이 발견되면서 , 그때까지 무시하던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신찬의 재검토가 이뤄짐-지석의 출생년도가 그와 일치했음. 무령왕은 즉위후 반란을 일으킨 백가를 처단[동성왕의 이복형인 무령왕이 동성왕암살의 배후라는 주장도 있음]. 무령왕대 고구려의 공격을 몇번 격파하기도 하고, 남쪽으로 영산강유역을 거쳐 남해안까지 뻗어나감[가야가 호남남부를 노려서].

무령왕이 죽자, 아들 명농이 성왕이 됨-성왕은 업적이 많음.
사비로 천도:공주는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했으나, 너무 좁음-부여는 금강가에 있으며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와 수운에 유리하고, 평야를 끼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좋음. 다만 천연요새는 아니라서, 정약용은 사비성의 집중성 결여를 백제멸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봄. 그러나 사비성은 잘 계획된 수도. 부소산성을 배후에 두고, 외곽요해지에 부분적으로 나성을 쌓음. 시가지는 5부로, 부는 5항으로 나뉨.
사비시대 백제의 국가체제는 성왕때 뼈대를 세운 듯함. 22담로를 대신해 전국을 5방으로 나누고 37개 군을 두어 200~250개 성을 장악/수도를 5부로 나눈 것도 성왕때인 듯.

성왕은 50여명을 이끌고 야간에 가다가 복병을 만나 죽음. 성왕의 죽음과 관산성에서의 참패로 백제는 치명적 타격을 받음.

태자 여창이 위덕왕[창왕]이 되어 보복을 시도했으나 실패. 위덕왕때 국제환경은 불리했음-가야가 신라에 병합/성왕말년부터 신라는 고구려와의 적대관계를 완화-중국남조 편중에서 벗어나, 북제와 통교, 왜국과 긴밀히 교섭,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수에 접근[고구려를 칠때 향도가 되겠다함]
위덕왕이 죽고 혜왕/법왕이 1년반만에 죽고 장이 무왕이 됨.

무왕이 신라를 공격해 때때로 우세를 보였으나, 결정적 승리는 거두지 못하고 국력이 소모됨. 수양제가 고구려를 치려하자, 무왕은 좌평 왕효린을 수에 보내 고구려를 치도록 요청하고, 뒤에 사신을 보내 軍期를 청하기도 했으나, 막상 수군이 침공하자 말로만 수를 돕고 군대는 움직이지 않음.
당이 들어서자 사신을 보냈으나[조카 복신을 사신으로 보내기도], 신라의 친당외교 때문에 겉돌게 됨.
570년대부터 고구려와 왜의 관계가 개선되자, 무왕은 왜와의 관계강화를 위해 손자 풍장[여풍-뒤에 부흥운동군이 국왕으로 추대]을 왜에 質子형식으로 보냄.

의자왕은 당태종에게 고구려와 한편이 아니라했지만, 당태종은 신라사신을 통해 의자왕이 고구려와 내통해 신라를 침공한 것을 알고있다고 함. 당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하며, 백제와 신라에 장량[수군을 맡음]의 지휘를 받은라 함. 그러나 의자왕은 당을 돕지 않고 신라를 침
의자왕의 왕비 은고가 정치에 개입해 큰 혼란이 와서, 소정방이 부여정림사탑에 전승기념문을 새길 때/일본서기에 인용된 고구려승려 도현의 일본세기에 망국의 원인으로 지목됨.

의자왕은 당에 가서 늙어죽고, 왕자 융은 663년 귀국해 주류성의 부흥운동을 치는데 참여하고 웅진도독이 되었다가, 고구려 멸망후 신라의 공격이 심해지자 670년쯤 당으로 돌아가 죽음.

*당군이 물러나기 전부터 부흥운동은 시작-200여성을 회복하고 사비성포위에 들어가는 등 당/신라 군을 여러차례 격파하고 부여푸이 돌아와 왕통을 이음-당/신라의 거듭되는 공격으로 약화되고 지도부 분열-백강전투에 패하고 주류성이 떨어져 끝남[뒤에도 조금 부흥운동이 있었으나]. 풍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가,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에 끌려감.

*백제의 언어: 처음 마한 북방에 건국되었을 때는 부여어만 쓰인 듯. 그 뒤 마한 여러나라를 정복하며 부여계와 한계 언어가 같이 쓰인 듯.
백제건국 이전에 한자가 전래-bc2세기 말쯤 진국이 한에 직접통교바라는 국서를 보낸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 신라에는 한자사용의 불편을 덜기위해 독특한 차자표기법이 생겼는데, 백제는 알 수 없음. 다만 사비시대 왕도 5부제의 部가 고구려평양성벽 석각문과 똑같이 생략형인 것을 보면,백제도 차자표기법을 쓴 듯.

*근초고왕때 박사고흥이 서기를 편찬한 뒤, 백제기/백제신찬/백제본기 등 백제3서가 잇따라 쓰여짐.

*백제는 온조왕이 즉위하자마자 동명왕묘를 세우고, 역대국왕은 즉위한 이듬해 정월에 어김없이 참배. 또 온조왕의 생모를 국모로 제사하기도. 그런데 정작 건국자인 온조왕묘나 비류왕묘에 대한 기록은 없음.
백제왕은 정월에 동명왕묘에 참배하고, 2월에 천지에 대한 제사를 지냄-웅진시대나 사비시대쯤 천신과 오제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중국식으로 바뀐 듯.
백제의 토착신앙으로 정천井泉신앙 또는 용신龍神신앙이 있었음-샘물/하천에 대한 신앙. 중국에서 만들어진 용신/용왕에 대한 신앙이 일찍부터 전해진듯.
삼국간 항쟁이 격화되며 미륵신앙이 유행
불교발달: 계율학/삼론학/법화사상/성실종이 연구됨.

*중국에서 지반이 약한 곳에 잎이달린 나뭇가지를 깔고 쌓는 부엽공법을 썼는데, 전북김제 벽골제/서울의 풍납토성/충남당진의 합덕제/부여사비도성의 나성을 이렇게 쌓음.
하구/해안가에 제방을 쌓아 논을 만들기도-축제개전

*백제는 역법으로 중국남조[宋]의 원가역을 씀-무왕때 관륵이 왜에 전함
*사비시대 후반에는 당대척[29센티미터]을 기준척을 썼고, 그 이전에는 중국남조의 25센티미터쯤 되는 자를 씀.

*노반박사[금속공예]/와박사[도자기]등 기술자가 있었음. 무령왕릉의 금제품의 순도는 대부분 99%대.

*의학이 발달: 주서와 수서에는 백제가 의약을 안다고 기록. 인삼같은 약초가 재배되고, 중국의 영향으로 침구술도 보급. 인도의학이 전래되어 주술로 질병치료를 시도. 탕정성[온양]의 온천이 병치료에 이용되고, 일본의 의학서적에 '백제신집방'이 보임

*고려사 악지에 백제속악으로 지리산가가 실려있음:전남구례지방에 살던 여인이 왕의 강압에 저항하는 심정을 그린 노래. 선운사가는 전란기를 배경으로 장사지방 백성의 고통을 노래. 악학궤범에 실린 정읍사가 유일한 백제 시가.
2000년 부여능산리 절터목간에서 4언4구의 시가가 확인됨: 일부 한국식 어순과 향가/이두에 쓰이는 문구가 있어, 백제도 이두같은 것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주해 을병연행록 홍대용 소재영조규익장경남최인황 태학사 끝내지못한글

2009.07.02 19:51 | 적어두기 | 구들장군

http://kr.blog.yahoo.com/nobody2504/128 주소복사

*1765년 영조 41년에 시작된 글. 담헌 홍대용1731~1783
*주해라서 다 옮겨 놓은 것이 아님-내가 새긴 것이라 틀린 것이 많을 듯.
담헌연행[ㅎ+.+ㅣ+ㅇ]녹 권지일
*평양과 관련, 기자동래설에 대한 언급이 있음-기자동래설을 믿은 듯.

*의주가 번영했음-다른 글에서 본 것과 좀 다른 듯? 시대가 달라서?
의주군사들이 사냥을 할 때 궁시창검을 씀- 총을 많이 쓰진 않은 것인지, 살수들이었는지? 반면에 중국의 사냥꾼들은 총을 가지고 다닌 듯.

*중국인에게 말을 걸었는데, 중국인이 조선말로 대답- 중국어로 말하는 것보다 더 알아들을 수 없었음.

*십이월 초일일 솔참자다에, '댱궤지'란 표현이 나옴. 댱궤지=장궤지, 이는 '술막듕놈이'같은 것이라 씀. 그리고 주석에서 장궤掌櫃, 중국사람을 부자라는 뜻으로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 했다. 술막듕놈이는 주막이 중노미를 뜻한 것인지? 이 말이 짱께란 말과 관련있는지?

* 중국의 음악을 들으니, 調格이 우리와 다름. 나발과 태평소는 우리와 같고, '져'는 소리가 맑고 높음---져=젓대?

*중국화살을 보니 나무로 만들었고 깃이 넓어, 멀리 나가지 못함. 중국인이 수십보를 나간다고 말하자, 홍대용이 우리활은 작지만 화살은 대나무로 대나무로 반든 것이라 쏘았을 때 가까우면 백이삼십보, 멀면 삼사백보를 간다고 함 그러자 중국인이 믿지 않음-----'보'의 길이가 달랐는지? 멀면 삼사백보라는 것은 편전을 말한 것인지?

*'역관이 강을 건너면 사촌을 몰라본다'는 말이 있었음. 중국에서 녹용 따위를 수입해 올 때 경쟁이 치열해서 역관사이에 다툼이 많았음을 일컬은 말인 듯. 강은 압록강인 듯하고, 역관집안이 있었다니 사촌사이인 역관들끼리도 다투는 일이 있었을 듯.

*석탄을 돌로만든 숯이라 설명-조선에는 석탄이 없었거나, 흔하지 않은 것이었나? 대동야승 가운데 청파극담에는 지중화재와 석탄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아마 널리 알려지진 못한 듯.

을병연행[ㅎ+.+ㅣ+ㅇ]녹 권지이
*탄궁인 듯한 물건을 쓰는 사람을 만났는데, 홍대용은 무엇인지 모름. 조선에는 탄궁이 없었는지?

*고려사람을 사로잡아와 살게 한 '고려보'가 있어, 논이 있고 우리 풍속이 남아있음- 옛날에는 우리 사신이 지나가면 대접했으나, 사신일행중 도둑질하는 사람들이 있어 아는 척도 않게 됨.

*그때도 비누가 있었음.

*윤락가에서 창질[매독]을 옮는 일이 많았던 듯.

을병연행녹 권지삼
*북경의 통관[통역?]은 조선사람의 후손인 듯.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