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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황소의 난 토벌을 맡은 고변에게 우대받다가, 고변이 실세한 뒤 돌아옴. 진성여왕 때 사신으로 당에 파견되었으나[893년], 반란으로 길이 막혀 가지 못함.
도굴꾼들이 가지고 있던 벽돌판에서, 최치원이 895년 쓴 글이 발견됨-병란이 전국을 휩쓸어 해골이 들판에 널려있었다함.
고려가 건국될 즈음 죽은 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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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富人: 신라말기 지방에서 경제기반을 쌓아간 사람들을 이시기 사료에서 부인으로 표현하기도 함. 이들은 무력을 가진 자들과 결합-'성주', '장군', '성주장군'이 나타남
왕건의 6대조 강충이 예성강부근의 영안촌 부인의 딸과 결혼해 송악에 정착했고, 견원은 광주북촌 부인의 딸과 구렁이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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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은 왕후의 아버지이니 왕이 신하로 대하지 말고 동등한 예로써 대하자는 주장이 나오자, 모든 관료들이 찬성했으나 김부식 홀로 반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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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휴: 피난수도 강화에서 공부해 과거에 합격. 삼척에 갔다가 몽골침공으로 길이 막혀 6년간 강화도에 돌아가지 못함. 몽골과 강화체결뒤, 그에 반대하는 민란이 삼척에서 일어나 가산을 모두 빼앗김. 그 뒤 삼별초에게 잡혔다가 개경으로 탈출, 왕을 알현하게 되고 등용됨. 충렬왕의 측근비행을 비판하다가 파직. 뒤에 충선왕에게 중용되었으나 충선왕 퇴위로 물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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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 이색: 반원정서가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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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뒤 대후금정책은 광해군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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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일제하 우파 부르주아민족주의 세력의 중심.
*1890년생 김성수와 함께 1908년 일본유학-와세다 대 예과 입학. 메이지대학 법학부로 옮김.
*3/1운동을 준비-독립선언서에 서명은 안했으나 핵심인물.
*동아일보 합류-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을 함.
*민족운동내 자치론이 나왔을 때, 1924~26년 일본 정계의 변화를 감지하고 총독부와 접촉을 유지하면서도 사태를 관망.
*신간회를 관망하다가, 자치제실시와 합법적 정치조직이 어려워지자 신간회에 참여.
*자치제 실시가 불가능해지자, 민족문화운동으로 선회-브나로드
*1940년 동아일보 폐간 뒤 정치적 은둔
*여운형의 건준참여 제의 거절-사회주의세력에 이용만당할 것 우려.
*좌파의 인공선포에 대응해, 우파통합에 나서, 한민당 창당.
*이승만에 협력하다가 이승만이 정게통합을 제대로 못하자 돌아서, 임정을 중심으로 우파와 중도파 통합시키려 함.
*반탁이었지만 미군정과의 대립은 반대
*암살-배후로는 임정쪽이 지목되었으나, 송진우의 죽음으로 가장 큰 손해를 본 것은 임정쪽. 송진우의 공백을 메우고자 송진우의 지원자였던 김성수가 영입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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