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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주1786~1841 정조 때 태어나, 순조 때 활동. 명문가 출신[홍낙성이 조부, 홍석주가 형]이나, 벼슬길을 즐겨하지 않음-생원/진사시 합격 후 과거응시 않음. 잠시 외관을 했으나 곧 그만둠. 홍길주의 사유방식은 기호학의 사유방식과 비슷해 주목됨.
*어머니 영수합 서씨가 수학에 조예가 깊어, 홍길주는 7-8세부터 산술/역법을 배웠고, 수학 특히 기하학 관련해 저술[호각연례- 구면삼각을 다룸. 서양선교사들의 구면기하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임]을 남김.
*글을 읽을 때 수백번을 넘게 보지 않음. 적을 때는 30-40번 읽고 그만 둠. 어떤 사람은 천번이나 만번도 읽음-수백번/삼사십번이 적게 본 축에 끼는 듯함.
*선비들이 쓰다버린 초고는 하인들이 유황고 초석에 적셔 불쏘시개로 씀.
*소원을 물어보자, 여색을 밝히는 자가 '어린 소녀와 하룻밤을 자서 문득 기력이 배나 튼튼해졌으면 좋겠다'고 함-이런 속설이 널리 퍼진 것인 듯. 구약성서에서 다윗이 늙었을 때 일을 생각하면.
*'긴요한 일로 남에게 편지를 써 부탁할 때는 그 사람이 글에 능하다 해도 편지 속에 절대로 어렵거나 모호한 말을 써서는 안된다. 가장 중요한 곳에 이르러서는 곧장 한글로 써도 괜찮다'고 함- 그때 사대부들도 한문으로 완전한 의사소통이 힘들었던 듯. 그걸 핑계로 거절하는 일도 있었던 듯 싶고.
*당시 사회에 떠돌던 이야기들은 모두가 중국의 패서稗書에서 따온 것들- 예컨대 일지매는 환희원가에 있던 이야기.
*왜사탕이란 것이 있었음.
*한글은 배우지 못한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 만들었는데, 그들 가운데 한글을 잘 쓰는 자는 드물었음. 그런데도 그들 사이에서는 글자를 안다고 일컬어짐-한글의 보급이 성공적이진 못했던 듯.
*우리나라의 혼인은 오로지 집안만을 숭상한다. 그래서 대대로 벼슬한 뿌리있는 집안은 자주 서로 혼인으로 맺어지지 않음이 없다. 느닷없이 만나도 서로 그 집안을 묻게 되면 성이 다른 친족이 아닌 경우가 드물다고 씀- 아마 이 사람 집안이 명문가라 그런 듯?
*평양의 기자묘를 두고 진위논쟁이 있었음-거짓이란 주장이 논리적이었지만, 정서적 이유로 진짜란 주장이 우세했던 듯.
*부싯돌을 잘치는 사람은 한번만 쳐도 불을 붙이지만, 잘 못하는 사람은 하루종일 쳐도 안됨. 보통사람은 서너번 치면 되는데, 어떤 때는 대여섯에서 열번 넘게 치기도. 부싯돌과 종이가 다 좋으면 불을 얻기 쉬움-그때는 부싯깃으로 종이를 쓴 듯. 잘 안될 때는 날이 눅눅할 때인지?
*연천 홍석주가 전시를 볼 때, 많은 선비들이 홍석주에게 다가와 물어보고 답을 작성. 이 일로 홍석주가 임금[정조]의 눈에 띔-과거볼 때 왔다갔다하며 물어보는 것은 문제되지 않은 듯.
*순조때 명문가니 아주 부유했을 것이고 국정파탄에 책임이 없진 않았을텐데, 백성의 가난을 걱정하는 내용이 많음. 입에 발린 말인지?
*三代이전에는 형제도 성씨가 같지 않았고, 몇세대가 지나면 서로 혼인도 했으며, 주나라의 법도는 친족과 혼인하는 것을 숭상했고, 아주 가까운 친족 이외에는 남으로 생각했음-중국만 이런 것인지, 우리도 이런 것인지? 견훤의 가족을 보면 우리도 이랬을 것 같은데
뒤에 옛 사대부는 단문袒免[문자는 컴퓨터입력한자에 없음. 면자를 쓰고 입력. 오타를 낸 것인지, 같은 글자가 다른 음을 가지고 있는지?] 즉 상복을 입는 친족외에는 길가는 사람과 같이 보았다고 씀.
*2품이상은 모두 재상이라 일컫고, 정사를 맡게되면 모두 대신으로 부름. 누군가는 찬성과 참찬은 모두 삼공에 버금가므로 좌우찬을 일상/이상이라 했고, 좌우참찬은 삼재/사재라 했는데, 재상이란 호칭은 여기서 나온 것이라 하기도 함.
*청의 고증학은 말단의 학문으로 평함.
*중국에는 가난한 선비가 출판일로 먹고사는 경우가 많은데, 우린 이렇게 하지 않음.그래서 사대부자제 중 가난해도 벼슬에 나가지 못한 자가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많았음. 부귀한 집안에서 선대의 문집을 몇권 새기려 하면 돈이 많이 들었음.-사대부 가운데 벼슬 없는 자들이 먹고살려고 범죄를 저지른다는 기술은 많이 본 것 같다.
*제갈량이 동남풍을 빈 것이 삼국지연의에 나오는데, 이는 설보연의說寶演義에 있는 것을 보탠 것.
*성호사설을 낮게 평가함
*과거에 붙으면 방꾼[피봉꾼]이 합격자 집에 와서 과거급제소식을 알림. 첫 벼슬이나 지방관에 제수되었을 때도 그러함. 호비성呼婢聲[방꾼이 대문에 달려들어와 종을 부르는 소리]이 인정을 칠 무렵에야 이르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방꾼은 응시자 쪽 사람이 아니라 시험시행처 사람인 듯.
*군대에서 북을 치면 진격, 징을 치면 퇴각하기로 되어 있었음.
*매년 6월과 12월에는 지방관의 치적을 살펴 상중하로 등급을 매겨 상부에 보고.
*'우리집 옛 아전 중에 조씨성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어릴적 이름이 손으로 태복시의 아전이 되었다'-대가에서 아전을 두었다는 말인지? 대가의 아랫사람이 관청의 서리가 되기도 한 듯.
*우리나라 습속에 서리를 승이라 부름
*안정대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둘이었는데, 비슷한 해에 급제해 경력도 비슷해 같이 승지가 됨. 나란히 명단에 올라 낙점을 받았는데 임금의 뜻이 누구에게 있는지 몰라 마침 서울에 있던 자가 명을 받아 입시하자, 임금이 웃으며 '이번에는 네가 들어왔느냐'고 함-그때 사람의 동일성을 식별하는 기준이 이름이나 호 같은 것 말고는 없었던 듯?
*생원시/진사시를 다 응시하기도 한 듯. 그래서 둘 다 붙기도.
*한나라 당나라이래 역산은 언제나 수백년이 지나면 맞지 않았다. 그러면 산술에 능한자가 나와 이를 고쳐 바로잡아 또 수백년에 이르게 한다. 서양의 역법이 행해진 뒤에는 천여년을 고치지 않고 보전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도 서양의 역법을 시행? 천여년동안 오차가 없을 것이란 것을 계산할 수 있었던 듯.
*다산 정약용의 저술 내용들을 비판-책을지어 논박하려다 그 아들과 사이가 좋아 그만둠.
*중국에서는 매질할 때 등짝을 볼기치듯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신문할 때 정강이를 때리고 매질 할 때는 종아리를 때림
*담배를 즐기지 않는 자는 백에 한둘도 안됨
*세곡선이 부서져 가라앉으면 그 고을 사람들이 물에서 건져내야 했음-김포군과 고양군은 강물을 마주하고 있어, 배가 물에 빠지면 두 고을은 서로에게 책임을 미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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