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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박명림 나남출판

2009.06.19 12:31 | 적어두기 | 구들장군

http://kr.blog.yahoo.com/nobody2504/126 주소복사

*해방후 건준/인민위원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은 엄청난 속도/규모로 조직됨-1945년 11월 전국의 거의 모든 도/군/읍/면에 조직됨[3개 군은 창설준비 중이었고, 3개 면만이 구성되지 않았을 정도]. 같은 때 전평은 조직원이 55만이 넘었고, 전농은 330만이 넘었음.

*독립운동도 지역적 특색이 있었음. 평안도는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영향력이 컸고, 함경도는 공산주의의 영향이 컸음-그래서 할아버지께서 흥남으로 가셨나?

*각지역은 해방즉시 자생적으로 조직화되면서, 그와 동시에 중앙과 연계됨.
평안도는 해방후 외세의 진주없이도 소란이 없었음-Merrell H Benninghoff가 자치위원회는 무기를 소유하진 못했으나, 도전체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고 할 정도.

함경도는 8월 16일 함흥형무소에서 200여명의 정치범이 석방되자 시민들은 함흥부청으로 달려가 권한을 이양받았고, 도내 경찰서와 지서는 한국인들의 습격을 받아 점거됨.
함경북도는 8/15 이전 소련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있었음. 웅기는 8/12에 소련군이 일본군을 깨뜨리고 해방시킴. 다른지역과 달리, 소련군의 영향 아래 자치조직이 구성됨[다른지역보다 오히려 늦게 구성됨]

황해도도 도청과 경찰서를 조선인들이 점령했고, 해주항의 공장들이 조선인종업원의 관리로 넘어감[공장내 일본인들은 추방됨]-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어느쪽도 지배적이진 못함.

*지도적 공산주의자였던 현준혁은 해방된지 보름만인 9월 3일 암살됨-최초의 지도자 암살

*해방은 기쁨과 함께 두려움과 탄식이었음:김일성도 평양비행장에 파라슡로 떨어질 계획이 이뤄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함. 박헌영/함석헌 등도 대중적 투쟁이 결여된 상태에서 뜻밖에 이뤄진 해방을 맞이했음을 지적-그때 치르지 않은 핏값을 지금까지 갚고 있는 것 같다.

*소련군은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치안과 행정 일체를 자치조직에 넘겼고,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는 자치조직을 좌익이 장악하게 하고 권한을 넘김. 산업시설이 소련으로 반출되었지만, 상당부분의 산업시설이 북한에 인수됨.

*소련군 초기 점령정책은 엉망-소련군이 진주한 도시 어디에서나 약탈과 강간이 넘쳐났음. 주요산업설비/쌀/가축을 소련에 가져감. 소련군의 범죄는 소련군내부에서도 문제점으로 지목되었음. 이는 점령초기를 지나며 현저히 줄어들지만, 많은 반감을 심어줌.

*소련군 치하에서 좌우대립은 격렬-습격/시가전등이 있었음. 우파가 황해도 인민위원회를 습격한 사건은 소련군과 좌파지도자의 우파인식에 결정적 영향

*해방직후 온건사회주의자들이 민족사회당을 결성하려다 소련군에 검거되어 무산. 함흥에 민족주의자들이 민주청년회를 만들어 치안유지/계몽사업 실시하다가 간부들이 45년 9월 반소반공혐의로 체포. 흥남에서 흥남반공청년동지회가 결성, 45년10월 검거-반공운동이 초기부터 자발적으로 시작되었고, 소련은 이들을 빠르게 검거해 일부를 시베리아로 보냄. 한 회고록에 따르면, 소련감옥에는 친일파도 있었으나, 민족주의자들/소련군에 저항하다가 체포된 자들이 더 많았음.

*45년 11월 신의주학생들의 대규모 반공시위-조직적/계획적으로 공산당 본부등을 공격. 사살/체포/고문/시베리아 유형 됨. 학생들은 북체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이었음.

*매우 많은 정치범을 체포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소련으로 압송됨.
북체제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어, 보안기관 내부자료에 의하면 북한의 감옥은 46년에 이미 만원.

*북한보안기구 내부자료에 의하면, 초기에 인민의 원성을 사게된 이유로 일본경찰출신이 남아있다는 것과 좌경적급진성을 꼽음- 전자는 숙청으로 금방 해결되었으나, 후자는 그렇지 않음.

*소련은 38선 이북의 중심지가 평양이 아닌 함흥인 줄 알고 처음에는 함흥에 진주할 정도로 우리에 대한 정보가 적었음. 42년 7월부터 우리에 대한 정보를 수집. 우리가 일본이나 다른나라의 지배하에 대소련 공격근거지로 되는 것이 소련의 극동에 대한 항구적 위협이 될 것이라 봄- 일본이 만주진출이후 한국을 근거지로 대소련전쟁을 준비한 것에 주목해서

*미국의 남한점령은 군정이고 소련의 북한점령은 민정이란 주장과 그에 대한 반론이 있으나, 무의미.
소련민정은 소련 25군산하의 점령정책을 담당하는 집행기구.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회의 군사위원 슈티코프의 통제를 받음. 이는 주한 미국군정이 주한 24군 사령부산하의 직접적인 점령담당기구였음과 동일.

*소련과 김일성은 서울에 있는 조선공산당의 통제를 받지 않는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을 세움-일국일당원칙에 어긋나 국내공산주의자들[박헌영 포함]이 반대했으나 강행됨. 이는 박헌영의 지도력이 사라짐을 뜻함.

*북의 행정10국가운데 사법국은 1945년11월16일 '북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건'이란 포고에서 "1945년 8월 15일 조선에서 기 효력을 상실할 법령 중 성질상 조선 신 국가건설 및 조선 고유의 민정과 조리에 부합치 않는 법령 및 조항을 제외하고 기여에 법령은 신 법령을 반포할 때까지 각각 기효력을 존속"한다고 함-일제시대 법령을 존속시킴.

*소련과 북의 지도부는 민주적 부르주아혁명 후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 아래 사회주의혁명을 이루려 했음-소련군정은 민족주의 세력을 포용해 연립하려 해, 조선민주당 창당을 허용. 민족주의자들이 넓은 기반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함이면서, 기독교도들이 소련을 지지하게끔 하려는 것. 소련은 조만식에게 집착.
최용건은 조만식의 오산학교 제자. 함석헌에 따르면 최용건은 조만식이 '안아서 길러낸' 제자.

초기의 민공연립은 소련이 진주한 동구지역에서 일반적이었음.

*1945년 가을 조선의용군의 무장입북 저지, 신의주에서의 해산[조선의용군 무장부대 습격사건이 있었음], 만주로의 추방이 있었음[이들은 중국혁명과정에서 활동하다가 1949년 귀국]. 김일성과 소련이 거부한 것. 소련을 뺀다면 이 때 조선의용군이 가장 대규모 부대. 김일성쪽은 60명 뿐이었음. 이는 중국의 영향력이 소련에 의해 저지된 사례.
연안공산세력의 개별적 입국은 허용됨.
1946년 들어서 조선의용군을 받아들임.

*찬/반탁
미국이 신탁통치를 제안했고 스탈린은 신탁통치를 바라지 않았으나, 반대로 보도됨.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박헌영도 처음엔 반대-김일성 이 미국의 간첩으로 공격하는 구실이 됨.
여운형은 조금 지나서 3상회담을 지지했지만,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압력으로 인한 내키지 않는 결정이었음.
좌파는 3상회의의 결정의 핵심은 신탁통치가 아니라 임시정부수립이라고 해명했으나 먹히지 않음.
반탁운동을 계기로 친일파가 소생.

조만식은 강력하게 저항- 최용건/김일성/소련이 돌려 세우려 했음. 조만식에게 새 정부의 대통령을 제안[김일성을 군부책임자로 한]했으나 실패하고, 조만식은 감금됨[조만식은 1950년 사망할 때까지 어떤 타협도 거부]-이를 계기로 소련군정은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립정책을 폐기[동유럽에서 민공연립정책은 수년간 계속]하고, 북한만의 정권수립을 결단.

*46년 3월 1일 북한 전역에 반공시위와 테러가 번짐-북한내 토착반공주의자들에 의한 것도 있고, 남한의 우파들이 한 것도 있음[평양의 3.1절 기념식에 반공조직이 수류탄을 투척. 김구와 신익희가 파견한 이들은 해방직후 북에서 월남해 백의사를 결성한 뒤 북파됨. 백의사는 남의사를 본뜬 것]
임정과 김구가 김일성을 비롯한 북측 지도부를 노렸던 것은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립을 모색하던 소련군정과 북측 수뇌부에게 큰 충격이었고,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감.

*북한 쪽 자료에 의하면, 1943년 북한은 4%의 농가가 58.2%의 농지를 차지하고, 56.7%의 빈농이 농지의 5.4%를 차지
토지문제의 해결에 있어,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은 식민시기부터 아주 다른 대안을 제시-민족/자본주의 쪽은 지주제 개선과 소작입법, 자작농창설과 농업협동조합 운동을, 혁명/사회주의 진영에서는 토지혁명을 주장. 이는 해방후에도 연결되어 유상몰수유상분배-무상몰수무상분배로 나타남.

*미군정은 45년10월 군정법령 9호로 비상사태를 포고, 소작료는 총액의 1/3을 넘지 못하게 하고 넘을 경우 소작계약 자체를 무효화시킴-북의 3/7제 실시가 남한에 전해진데 대응한 것.

*1945년 9월 평남인민정치위원회는 무상몰수무상분배결정-민족주의 계열 반발-스탈린의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수립지시 이후 철회. 민족통일전선위해 토지몰수대상을 친일반동지주에 국한.
12월 말에 이르러 소련군정은 내부적으로 근본적 사회개혁을 모색-조선에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모스크바 합의가 있자, 1946년 1월 토지조사사업실시.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일제및 친일반동분자와 대지주소유토지의 국유화, 소작제도철폐, 무상분배란 3대원칙을 결정. 이는 토지개혁시 거의 그대로 적용.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규정하면서 남한과 거의 차이가 없었으나, 해방후의 반동적 요소도 포함시킴-해방후 우파의 파괴활동을 민족반역행위로 규정, 이들의 물적기반을 박탈.

*농촌에서 토지개혁을 뒷받침할 물리력으로 농촌자위대가 조직-분대성원은 8~10명, 리마다 3~5개 분대를 둠. 전국적으로 21만2천명이 넘었음

*지방수준에서 토지개혁은 길어야 20일만에 끝남. 몰수된 토지는 북한의 총 경지면적의 거의 절반. 이 가운데 일본국가/일본인과 종교단체 소유는 4%, 나머지 약 96%는 지주/민족반역자/소작주는 자의 토지. 열농가 중 최소 네 농가는 토지의 전부 또는 일부를 몰수 당함.
전혀 토지가 없는 44만여 가구가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받음. 그런데 남한의 토지개혁도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 농민에게 실제 돌아간 토지량은 차이가 없었음. 남북의 토지개혁후 가구당 평균토지면적을 비교하는 연구도 있지만 이는 옳지 않음. 인구수와 토지면적이 달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음.
북한은 전쟁 중 점령지구에서도 토지를 몰수해, 총농가의 66%에 토지를 분배.

지주는 가축/농기구/집까지 몰수했고, 자경을 하려해도 거주지가 있는 군에서는 불가능했음. 87%의 지주가 월남. 소련과 북한 지도층은 이들의 남하를 방임-저항계급의 축출정책. 이는 북한의 토지개혁을 '무혈의 초단기혁명'으로 만든 결정적 요인임. 저항계급이 사라졌기에, 저항이 거의 없었음. 압도적 힘을 가진 소련군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토지개혁을 거치며 보안대는 46년 7월 1만5천명으로 급증. 그러면서도 내부적으로 숙청을 계속해 민족주의자들을 제거. 숙청은 보안국 창설 직후[그러니까 탁치균열 이전]부터 계속된 것. 이 과정을 소련은 철저하게 통제. 숙청된 자들은 모두 월남.

*중요산업 국유화-46년 전체 공업총생산 중 사회주의경제형태 차지 비율이 72%

*토지개혁완료 후 농업현물세를 걷었는데, 부담이 컸음[소련군에 보내는 쌀이 많았음]-할당받은 양의 45%를 못내고, 기아자가 속출하기도.

*김일성
소련군대위이면서 nkvd[kgb의 전신] 요원이었고, 소련극동방면군 사령부 정찰국장 조르킨과 가까웠음. mgb[nkvd의 후신이자 kgb의 전신]의 지지에 의해 46년 조직된 북조선임시인위 의장이 됨.
스탈린정부로부터 김일성을 북한지도자로 추대하란 지시는 없었음. 소련군이 최초로 골랐던 지도자는 조만식-소련중앙은 절대 공산당원을 전면에 내세우지 말라고 지시. 김일성은 군부지도자로 정해짐.

소련군은 45년 9월 한국어 신문을 폐간시킴. 이후 소련군의 검열과 통제를 받는 신문들이 창간됨. 평양의 경우 10월 15일까지 공산당원들의 요구에도 신문발행을 금지하다가, 김일성이 돌아오자 신문발행을 허가하고, 김일성에 대한 기사로 메워버림-극적 선전효과를 노림

47년6월 즈음까지도 소련군정의 레베데프는 김일성의 연설을 사전 검열

*미소공위에 제출하려던 소련군의 임시정부구상을 보면, 1차때는 16개 각료중 수상과 중요각료를 포함해 10명을 소련이, 나머지 중요하지 않은 1/3만을 미국이 제안하도록 함. 미국이 장관을 추천하는 부서는 소련측이 차관을 제안. 2차때는 좌익이 중요부서 10개를 차지하고, 우익에 중요하지 않은 5개부서를 양보하려함.

미소공위는 성공할 수 없었고, 성공해도 임시정부 구성은 불가능했음.
미소공위 결렬로 통일정부수립 가능성은 사라짐-소련군정은 여운형을 용도폐기
미소공위 결렬뒤 미군정은 좌파탄압시작, 좌파는 정면 대응.
미소공위 결렬뒤 소련은 김일성을 옹립, 분단체제구축 결정-김두봉의 신민당이 북조선 공산당과 합당. 조선공산당과 남조선신민당 인민당의 3당합당이 추진, 이 즈음 남한내 좌파들의 투쟁에 소련군정은 전부 개입했고 자금도 지원.

*1946년 7월 소련군정 최고간부, 김일성, 박헌영은 비밀리에 모스크바에 감-미국은 이를 추적하고, 그 이유[북한에 분단정권 수립가능성]까지 정확히 파악

*북한은 구식민체제를 해체했기 때문에 많은 고등/실무교육기관을 빨리 만들어야 했음.

*김구/김규식/홍명희/김창숙/조소앙/조완구/조성환은 성명서를 발표-단정수립은 남북의 우리형제자매가 미소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여 총검으로 서로 대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일

*김구와 김규식의 서신발송후 소련군정과 북한은 대응책을 숙의-김일성은 김구를 만나도 수확이 없을 것이라 보았으나, 결국 '김구는 어리석은 인간이기 때문에 반드시 만날 필요가 있고, 그를 설득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는 동의할 것이다. 그는 심지어 북한에 머무를 수도 있다'고 보아 적극적으로 응답. 김두봉이 가장 적극적이었음.

*김구는 47년 말, 방북전에 이승만과 회담-소련의 방해로 북한의 선거를 못해도, 언제든지 북한이 참가하는 것을 조건으로 총선거를 해 정부수립해야한다고 주장. 이는 통일정부지 단독정부가 아니며, 이승만의 주장을 단독정부라 오해해선 안된다고 주장.

*남한의 선거 저지를 위해 소련군정의 지시를 받은 좌파는 강력히 투쟁-2.7구국투쟁에서 90회가까이 경찰을 공격해 100명의 인명피해. 넉달동안 721명 사망. 결국 제주도는 4.3이 터짐.

*이승만이 조파인 조봉암을 넣을 정도로 연립내각을 구성하면서도 김구를 배제했듯, 김일성은 무정이 아무 자리도 맡지 못하게 함.
김일성은 정부수립시 정부와 공산당까지 다른 정파와 공유했으나, 군만은 독점.

*해방후 45년 한해에만 461497명이 월남. 소련은 47년 10월까지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음. 월남인구를 약 160만으로 추정하기도. 월북에 비교할 수 없이 많음.
월남자들의 직업은 다양했음 친일/상류층만 있던 것이 아님.
월남사유는 생활난/구직/귀향이 많았다는 통계가 있음.

*국가수립후 1년간 군전체의 5%인 4900여명이 탈영

*여수사태
직전에 국회에 미군철수요청결의안이 제출되었으나, 여수사태로 상황은 급변. 미군이 없었다면 작은 반란도 진압못할 뻔했기에.
여수사태 이후 숙군작업-군번 1~100까지 최고위장교 100명 중 28명이 파면. 4700여명[전군의 5%]가 숙청됨. 여수사태로 인한 숙군이 없었다면 한국전은 끝장이었다는 주장이 많음.
박정희는 군내 좌파조직에서 중심적 인물. 그런데 박정희 구명에 거의 전 군지휘부가 달려들었고, 미군장교들도 그랬음.
여수사태후 준국가공식기구인 대한청년단을 창설-사병조직을 거느리고 있던 김구/이범석/이청천은 조직을 박탈당함. 족청115만을 거느리던 이범석이 저항했으나 실패했고, 족청해산으로 이범석을 이용해 군과 족청을 통할할 필요성이 사라지자 이범석은 국방장관에서 해임됨.
여수사태후 학도호국단 창설-안호상의 구상.

*미군장교들은 이승만의 군대가 북침을 할까 걱정해 무기원조 않음. 그 무기가 공산군에 넘어갈까 걱정해서이기도 함-장개석의 축소판으로 봄.

*소련과의 무역은 북한 초기 경제구축에 큰 역할을 했으나, 교역조건에서 북한이 불리하거나 대등했음-혜택 본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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