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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8/08/21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국사편찬위원회 두산동아

2009.06.09 19:41 | 적어두기 | 구들장군

http://kr.blog.yahoo.com/nobody2504/122 주소복사

*원시사회가 전쟁없는 평화시대였는지 다툼이 있음-부족사이에 전쟁이 있어도 그것은 의식적[ritualistic]이고 게임같은 소박한 전투였다는 주장도 있음

*진서 동이전에 마한에 성곽은 없다고 하면서도 성황[성과 환호가 조합된 방어시설]은 있다함. 성황과 환호는 모두 오타가 아님
신석기 후기부터 환호의 존재가 확인되지만, 방어기능이 뚜렷한 토루/목책이 환호와 결합된 본격적 방어기능의 마을유적은 청동기시대부터 집중적으로 나타남.
녹자: 목책의 외곽에 끝이 뾰족한 말뚝을 여러개 박아놓은 것.

*청동기시대도 전쟁에서 실제 사용한 주무기는 돌과 나무.

*석전: 편전/번전, 편싸움/편쌈으로 불림. 중국일본에서도 발견되는 보편적 문화. 안동,김해,경주 등지에서 널리 행해졌으나, 평양이 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 개천이나 강을 경계로 두편의 마을 사람들이 돌을 마주던지며 싸우다가 막대기를 들고 백병전을 벌이는 편싸움으로 발전. 새끼로 만든 헬멧을 쓰기도 함.

수서고려전에서, 해마다 연초에는 패수가에서 모여 놀이를 하는데 왕이 구경. 놀이가 끝나면 왕이 의복을 물에 던지는데, 좌우로 두편을 나누어 수석水石을 서로 뿌리다가 던지고, 소리치며 달리고 쫓기기를 두세차례 되풀이한 다음 그친다고 기록-석전풍속은 고구려때 왕이 직접참가하는 국중대회의 일환으로 행해졌음.

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에 석투당/석투군/척석군 등 석전전문군대가 보임.

*말타기와 관련, 삼국사기에 마숙[마기]/마희/마사희[마술+궁술], 고려시대 희마, 조선시대 마상재가 있었음.
초기의 마구는 주로 영남지역에 집중되어 발굴됨-삼국지에서 마한은 우마를 탈 줄 몰랐으나 진한/변한은 탔다고 한 기록과 관련이 있을 수 있음.

*봉수:봉은 횃불, 수는 연기. 봉수대근처는 민간의 출입을 막고 무당/토속신의 사당 건립을 금함-제의과정에서 연기나 불을 쓰지 못하게 함. 각 봉수대 사이의 거리는 중요도에 따라 다름. 변방제일선은 10~15리 이하, 내지 봉수는 거리가 멂. 평상시 낮에 연기로 신호하는 먼지역은 20~30리, 야간에 불로 신호하는 가까운 지역은 40~50리.
어느 변경에서 올린 봉수든지, 12시간 정도면 서울에 도착하는 것이 원칙이나, 봉수군의 태만/봉수대 관리소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음. 봉수군이 간망을 게을리하면 장 70~100/파직하고, 적이 침입했는데 보고 않거나 적과 접전하면서 거화하지 않은 경우에는 참수.
하지만 무엇보다도 산꼭대기의 구름과 안개때문에 봉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묘왜변/이탕개의 난/임진왜란 때 전혀 작동않음.
조선초부터 역의 파발을 썼으나 제도화하지 않다가, 선조때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파발을 실시했고, 임란때 제도화. 기발은 25리마다 1참, 보발은 30리마다 1참을 두되, 기존의 역참위에 설치.
파발은 관리들이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쓰는 폐단이 있어, 숙종대이후 봉수를 복구해 파발과 함께 운영.

여역: 급성전염병. 여역이 발생하면 여제를 거행-비명횡사한 원혼이 역병을 일으킨다고 믿었기때문. 특히 우리가 패전한 곳에서 제사를 지냄.

*1361년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도솔원에 머무를 때, 원송수와 이색에게 경치가 좋으니 시를 쓰라고 함.

*병자호란때 강화도의 일들
강화북단 연미정과 갑곶 주변에 초병이 없었음.
적이 도강할 무렵, 화약이 습기차 대포를 쏠 수 없었고, 병기를 장부에 기록하고 내주느라 시간을 다 뺏김.
전영의정 윤방은 청군이 강화를 요구하자 성문을 열어주기도.
강화도 함락 뒤 약탈/방화/학살이 있었음.
빈궁일행은 포로가 되고, 원손은 주문도로 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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