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8년 생. 최림/김약산/진국빈/이충/김세량/왕세덕/암일/암이/암산/왕석/운봉/김국빈/진충/김약삼 등의 이름을 씀.
*학창시절 김두전, 이명건과 친분이 있었음-약산/약수/약성이 됨.
*1918년 난징 금릉대학에서 영어를 배움. 군대양성이 현실적으로 어려워 테러를 결심-신흥무관학교 재학중 인 1919년 의열단 조직.
*파괴대상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매일신보사도 포함.
*1923년까지 주로 상하이, 이후 광저우가 본거지.
*의열단에서 신참을 훈련시킬 때는 반드시 현장에 데려가 고참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수下手를 하게 함
*의열단 조직은 상하 뚜렷한 권위주의적 수직체계가 아닌, 단원간 평등이 보장된 수평관계. 각 단원의 활동에 대해 보안유지상 개별성을 강조. 일본경찰은 의열단의 구성이 무척 불명확하고, 의렬단의 진상을 아는 자는 김원봉 하나뿐이라 봄.
*톨스토이에 쉼취, 아나키즘에 관심. 오성륜과 김산은 그의 동지였다가 공산주의자로 변모.
*1922년 베이징의 신채호를 찾아, 의열단 행동강령과 투쟁목표 성문화 부탁.
*1926년 황포군관학교 입학-졸업후 국민혁명군 초급장교로 임관.
*1926년 의열단 개조 전체회의 열림-오성륜/김산/유자명 등이 참석, 의열단을 혁명정당으로 전환할 것을 결의
*김원봉을 비롯한 황포군관학교 출신 조선인들이 공산군에 가담-국민당 정부는 광주봉기[중국의] 이후 만주사변까지 한인의 황포군관학교 입교 제한, 중국군소속한인장교를 일선부대장에 임명하지 않음.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안광천과 만나, 의열단의 진로가 좌경화됨. 중국국민당이 대일항전에 소극적인 것에 실망했음.
*1929년 조선공산당 재건동맹과 그 부속기관인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및 레닌주의 정치학교 운영-김성숙에 따르면, 항일투쟁의 방략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나타난 시도.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 레닌주의정치학교도 꼭 공산주의 간부를 양성하겠다는 것이 아닌, 항일청년을 양성하기 위한 것.
*만주사변 발생후, 중국의 도움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운영. 황포군관학교 동기인 국민군 장성들의 도움이 컸음-김원봉이 좌경화되었던 것과 모순되어 보이지만, 일본타도 위해 뭐든 이용한다는 신조였음.
*중국은 비밀결사인 삼민주의역행사로 하여금 의열단 지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결성-김규식과 김두봉은 김원봉에게 우호적이었음.
*각혁명단체대표대회 소집하려 했으나, 한국독립당의 불참으로 무산.
*1935년 민족혁명당 창당-김원봉/김두봉/김규식/조소앙/이청천. 김원봉이 당권을 장악, 의열단중심으로 독선적 운영. 이에 대한 반발로 조소앙/박창세 등은 탈당. 이청천과의 연합도 1937년 파국.
1930년대 후반기 중국관내 한인들은 김구의 우파그룹과 김원봉의 중간좌파그룹으로 양극화.
*중일전쟁 발발후 1937년 장제스는 김구/김원봉/유자명에게 한중연합항일전선구축과 그에대한 재정지원 제의-셋 모두 동의.
민족혁명당원들이 중국육군군관학교에 입학, 독립중대로 편성.
*민족혁명당에 들어온 최창익등 공산주의자들이 김원봉과 대립-민족혁명당의 계급정당화인가 비계급정당의 고수인가로.
*1937년 우파세력과 연합시도했으나 김구측 거부로 무산. 김구측에 들지 않은 중간/좌파 모아 조선민족전선연맹 창립-조선혁명은 민족혁명이고, 그 전선은 계급전선/인민전선/국민전선도 아닌 민족전선
*1938년 국민당 지원 아래 조선의용대 창설. 이는 대만의용대와도 친밀.
*1939년 김구중심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과 연합해 전국연합진선협회 결성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하에서 선전활동에 주력하다보니, 내부불만이 커짐-국민당 정부구역에서 벗어나 팔로군 구역으로 이동. 이를 막으려한 김원봉의 지도력이 약해짐. 또한 국민당의 지원중단으로 김원봉의 힘이 빠짐.
*김원봉의 비서 쓰마루는 중국공산당 비밀당원으로, 중국공산당이 그에게 김원봉 설득을 지령-아내 박차정과 김두봉 등의 동조에 힘입어 김원봉을 설득, 북상항일에 동조하게 함- 그러나 조선의용대 주력이 보내지자, 김원봉이 화북에 오면 공산당의 지도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 중국공산당은 김원봉을 충칭에 남김. 새 한인지도자로 무정을 내정하고, 김원봉은 '정치적으로 절대 믿을 수 없는 소시민적 기회주의자이며 개인적 영웅주의자'로 낙인찍음.
하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는 김원봉이 충칭을 떠나면, 국민당정부에서 지원금을 받아서 수백명의 망명객 가족을 먹여살릴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음.
*1939년 김구와 김원봉이 '동지/동포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고, 통일7단체회의 개최-통합에 실패. 국민당은 김구가 무능하고 김원봉의 도덕성망이[내가 적어두기는 도덕성이 떨어져로 적어두었다. 그런데 원문에는 도덕성망이 떨어진다고 되어 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이걸 도덕성으로 새긴 것이다. 읽은지 며칠 되서 잘못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생각해보니 도덕성망이 단순히 도덕성을 뜻하는 것이 아닐지도 몰라 적어둔다] 떨어져 통합이 어렵다고 평가.
*1941년 김원봉과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는 임정에 들어감-김원봉은 소외 됨.
*1946년 김구와의 사이를 끝냄. 이승만으로부터 제휴제의가 있었으나 성과없었음.
*민족주의민족전선[민전]에 들어감-임정세력과 결별, 공산당은 김원봉을 동반자로 봄.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에 여운형/허헌과 좌파대표로 참가. 박헌영의 철수요구에 여운형과 함께 반대.
*남한 내에서 박해를 받음-노덕술이 수갑채워 장택상 앞에 끌고가기도 하고, 신변위협도 받았으며, 체포령이 내려지기도 함-결국 48년 월북.
남에서는 신변을 위협받고, 북에는 지난날 동지들이 연안파로 있었음. 최용건이 월북결심에 영향.
한국전 도중 김원봉의 형제들은 총살당함. 여동생은 여자라서 살려줌.
*1958년 이후 북한정계에서 사라짐[이즈음 30여명의 남한출신 저명인사들이 반혁명종파분자로 숙청]- 감옥에서 자결했다고 전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