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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8/08/21
 

대동야승 선집 1, 2 홍기문 옮김 한국문화사

2009.06.02 08:59 | 적어두기 | 구들장군

http://kr.blog.yahoo.com/nobody2504/119 주소복사

북에서 옮긴 것을 복사한 듯-인쇄상태가 엉망이고, 북한사람이 읽다가 적어둔 것이 그대로 복사되어 있음.

용재총화 성현:1439~1504
*최치원의 글 수준을 그다지 높게 보지는 않음. 김생의 글씨와 공민왕의 그림은 높이 침.

*거문고는 신라에서 나온 것이고 대금은 당조의 저를 모방해 만든 것이라 씀-거문고는 잘못 아는 듯?

*오음과 십이율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율명은 그때도 그렇게 쓴 듯.

*그때까지 부여에는 백제의 반월성터가 남아있었음.

*그때도 유밀과/찜/구이 같은 음식이 있었음.

*그때도 염색을 전문으로 하는 염색집이 있었음.

*군기시에서 불꽃놀이도 주관. 관상감에서 악귀몰이를 함.

*왕릉옆에 절을 짓고, 양반들도 조상무덤 옆에 암자를 지음-불교를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중들에게 무덤/산을 지키게 하는 것.

*'~라쓰고 ~라 읽는다'는 것은 일본말투가 아닌듯. 옮긴이가 각주에서 '제조提調라 쓰고 제주라고 읽는다'라고 함.

*이성계와 퉁두란 사이의 일화[뒷간에 앉아 있을 때 화살을 쏜]와 비슷한 이야기가 이방실이 도둑잡은 이야기로 전해짐-결말 다름.

*최영/정몽주/길재의 일화를 아름답게 써줌- 이때 즈음에는 이렇게 써도 좋을 상황이었나보다. 고려사는 어찌 썼나 봐야될 듯?

*고려때 후궁으로 원에 바쳐진 여자들이 후궁에 들지 못하면, 고급관리들에게 내줌

*태종이 궁궐의 까마귀를 잡으려 하니, 양녕대군말고는 그정도로 활을 잘 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양녕이 잡음-이 정도라서 대마도 정벌시 그렇게 되었나? 아니면 태종과 양녕 사이를 좀 낫게 해보려고 궁궐사람들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가?

*조선초에도 수벽치기를 했음.

*고려때 지공거와 문생의 관계는 부자와 같았음-내실에는 약혼한 사윗감도 드나들지 못하는데, 지공거는 문생들에게 부인을 보여주기도 함. 조선조에 들어서 지공거를 폐지했으나 문생과 좌주의 칭호가 남아있었음. 하지만 이책을 쓸 때 즈음에는 서로 소닭보듯 함.

*한글의 자형은 범자[고대 인도글자]를 모방-잘못 안듯.

*세조때 즈음에도 복어를 잘못 먹으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돌았음.

*여승들은 여승들만 있는 절에 모여 살았음.

*향도: 동네/이웃의 천인들이 적으면 일고여덟, 많으면 백여명이 모임을 만듦. 달마다 돌아가며 술을 내고, 상을 당하면 서로 상복/관곽/횃불/음식을 만들어 부조하고 장례를 도우며 석달 복을 입어줌.

*정몽주이전에는 불교만을 숭상해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는데, 정몽주가 예법을 세워 집집마다 사당을 세우게 되었고, 큰집은 맏아들에게 전하고, 적서의 구별을 중시하며, 아들이 없으면 일가사람의 아들을 얻어 가계를 이음.

*경상도 영산현에 시원찮은 온천이 있었는데, 일본사람들이 많이 와서 그 고을에서 임금에 고하고 그 근원지를 막음. 동래온천은 이름나서, 우리나라에 오는 일본사람들이 반드시 목욕하기를 청해, 그 고을에서 아주 괴로워함-국가에서 온천을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듯. 일본사람들이 오는데 왜 괴로웠을지?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이 '비록 큰 승전은 얻지 못했으나 일본사람도 그제야 우리 위력에 겁을 먹어 더는 어쩌지 못했다'고 함-표해록을 보면 해적이 많다 했는데? 표해록에서 최부가 배에 군사를 왜 이리 많이 태웠냐고 물었다는 것은 최부도 몰랐다는 뜻. 대규모해적은 없었고, 중앙에서 알지 못하는 소규모 해적이 많았나보다.

*세종 때 일본사람 두어집이 삼포에 와서 살겠다고 청해 허락했더니, 자꾸 불어나 처치곤란할 정도가 되어 골칫거리였음-우리 땅을 갈아 밭을 만들고, 우리나라 사람과 싸우며, 일년에 오십여척이 내조해 와서 이들에게 나눠주는 료미도 많이 들었음.

*그때도 일본의 천황제 등 정치체제를 이해하고 있었음.

*우리나라안에도 여진족이 꽤 살았음. 우리나라 벼슬을 하더라도 속은 딴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

*중국 복건성 주민들이 풍랑을 만나 전라도에 떠밀려오는 일이 가끔 있었음. 왜구인 줄 알고 죽이기도 했는데[이렇게 한 관리들은 사형될 뻔했는데 때마침 대사를 만나 살아남], 중국인인줄 알면 요동으로 넘겨보냄.

*조선이 명에 유학생을 받아달라고 여러차례 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함.

*안동과 김해에서 돌팔매치는 풍속이 있었는데, 1510년 왜적이 침입했을 때 두 고을의 팔매꾼들을 모아 선봉으로 삼았음-왜적 격파

*요동사람이 여진족에 포로가 되어 함경/평안도로 오면 요동도사에게 보내줌-명 임금이 고마움을 표함
그러자 여진족들이 포로가 된 중국인을 사다가 우리나라에 바치고 상을 바람-비용이 많이 나가 그만둠.

*종기를 잘 치료하는 의원들을 다루는 것으로 보아, 종기가 문제였던 듯. 연주창[임파선결핵]치료법도 있었음.

*어떤 기술[충치치료, 금박입히기]을 비밀로 간직한 경우, 나라에서 잡아다 고문을 하며 알아내 보급함-그러나 말하지 않고 죽기도 함.

*나라에서 품질나쁜 무명의 유통을 금함.

*태종15년 이전에는 서자도 벼슬하는데 제약이 없었음-성현도 서자라서 강하게 비판.

*서울의 개들이 북악에서 야생화되기도 함.

*중종때 여진족이 요동을 공격-지키던 중국 관리가 고려에서 원군이 와서 성안에 있다며 편전같은 짧은 화살을 쏘고 군인들에게 흰옷을 입힘-여진족이 흰옷을 보고 의심하다가 화살을 보고 돌아감. 흰옷과 편전이 우리의 상징이었던 듯. 다른나라도 편전을 쏠 수는 있었던 듯. 여진족은 명보다는 우리를 더 두려워했던 듯.

*중종 때 어느 관리가 젊어 과부가 된 딸을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자, 풍속을 못 쓰게 만든다하여 평생 벼슬을 떼어버림.

*제주사람이 풍랑으로 류구국에 떠내려갔다가, 중국으로 보내줘서 겨우 돌아옴.

*대명률의 해석이 어려워, 율관들이 엉망으로 새김-정도전이 이두로 축조번역해 직해대명률을 만듦.

*지진의 원인에 대해 용이 싸워서 그렇다는 설명을 인용하고는 못미더워함.

*음악과 관련해, 우리나라의 음이 중국과 달라 속악이 모두 절주에 들어맞는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씀.

*여성예술가-시인과 화가가 몇 있었음. 이에 대해 업신여겨서는 안된다고 씀.

*한의학과 관련, 의원들이 의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엉뚱하게 새기는 일이 많았음. 더구나 중국에 있고 우리나라에 없는 약재 때문에 더했음.

-------청파극담 이륙- 1438~1498
*지중화재[땅속에서 불이남]가 있었음. 그때도 석탄을 알고 있었음.

*세조가 인지의[규형]을 만들어 측량이 가능했음-지도제작에 쓰임.

*부싯돌을 쓰기 전에는, 왼쪽에 쇠를 차고 오른쪽에 나무를 차고 다니다가, 맑은 날에는 쇠를 치고 흐린날에는 나무를 비벼 불을 붙였음.

------------추강냉화 남효온 1454~1492 생육신 중 하나
문종이 고려태조를 위해 마전에 숭의전을 짓고 왕씨의 후손을 찾았으나 나서지 않음. 왕숭례란 사람이 이름을 바꾸고 숨어있다가 이웃과 싸움이 나는 바람에 관청에 본 이름이 알려짐-문종이 3품을 주고 숭의전사를 시켜 태조의 제사를 받들게 함.

----------수문쇄록 조신 15세기 말 16세기초
무명 한필은 35척, 한 동은 50필

----------용천담적기 김안로
*성희안이 성종 앞에서 귤을 숨겨 어머니께 바치려 했음- 그때는 귤이 무척 귀했던 듯.

*밀물과 썰물이 왜 생기는지 논의가 있었는데, 해가 물을 격동시켜 생긴다는 주장도 있었고, 달이 가까워지는 쪽으로 물이 몰리는 것이란 주장도 있었음-모두 중국에서의 논의를 배운 것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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