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즐겨찾기 | 블로그홈 | 바로가기 바로가기 | 로그인
나대지 말고 바르게 보자. 끓어오를 때는 글을 쓰지 말자.
블로그  |  사진갤러리  |  동영상갤러리 방명록  |   즐겨찾기 추가
전체 글보기(143)
알림
적어두기
긁어붙임-법
긁어붙임-연해주/러시아
긁어붙임-그밖
이소리 저소리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오늘 전체
방문자 154 105591
구독자 0 0
댓글 0 29
참조글 0 0
2009 11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 댓글 전체보기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1심은 수원지법 안산지..
레포트/방학숙제때문에 ..
짜증나 도움되는 글 없..
짜증나 도움되는 글 없..
 즐겨찾기
 즐겨찾기 글모음
HanRSS 로 구독하기Fish 로 구독하기
개설일 : 2008/08/21
 

여운형을 말한다/ 이정식최상용조영건 외 /아름다운책

2009.05.26 20:03 | 적어두기 | 구들장군

http://kr.blog.yahoo.com/nobody2504/116 주소복사

(사)몽양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가 가진 몽양추모학술심포지움을 실음-정치인들 축사, 여운형의 글들도 있음.
여운형의 조부는 중국을 치고자 노력하다가 유배당함. 여운형은 배재학당과 흥화학당에서 공부.

*전국무총리 이수성: 열살 때 달팽이 잡으러 담을 넘었다가, 여운형을 호위하는 청년들에게 잡혀가 여운형과 대면-여운형이 이수성의 아버지를 알고 있었음.-- 그 시절에도 애들보면 '아버지 뭐하시니?' 를 물었던 듯.

*여운형은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지만 폭력혁명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배척-이정식교수의 글인데, 무슨 뜻으로 쓴 것인지 알 수 없음.
여운형은 계급투쟁사관이나 프롤레타리아독재는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자주 밝힘-민족주의와 상용될 수 있는 공산주의의 변용을 생각했음.

*여운형은 1914년 중국 금릉대학에서 3년간 영문학 공부-1917년 상해로 감.
윌슨 미대통령의 특사 크레인이 상해에 오자, 만나서 한일합방의 부당성 지적. 조동호등 34인과 신한청년당을 조직, 국제회의에 대표파견-여운형이 작성한 독립청원서 가운데 하나를 일본에 빼았겼는데, 이 일은 1919년 12월 일본의 하라다카시 내각이 회유정책의 대상으로 여운형을 선택한 단서가 됨.

일본은 독립운동을 자치운동으로 유도하기 위해 여운형을 일본으로 초청-여운형과 친분이 있는 프랑스영사를 통해 신분을 보장. 임정에서는 찬반논의[이동휘등 반대, 안창호등 찬성]가 있었으나, 일본의 당국자와 지식인들에게 독립운동 정당성 설명위해 방일-1919년 12월. 각료들과 회견하고 '한국독립선언'의 연설을 함. 일본내에서는 회유정책을 실패했다고 평가. 또한 여운형과 일본내 진보지식인의 연대가 이루어짐.

1920년 상해에 파견된 코민테른의 극동부장 보이친스키의 권고로 여운형은 고려공산당에 가입. 보이친스키와의 회동에 중국의 진독수, 일본의 오스기사카에 등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동석. 여운형은 고려공산당에서 번역부원으로서 공산당선언등을 번역[공산당선언의 최초의 한역].

그후 자동차/마차/썰매를 타고 고비사막을 넘어 모스크바로 가 레닌을 만남. 한국에서는 공산주의혁명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 운동에 주력해야 한다는 레닌의 말에 공감하고, 볼셰비키들과 연대. 그 뒤 스탈린의 중국내 대리인쯤 되는 보로딘에게 합류-1925~1927 상해의 타스통신사에서 일하고, 보로딘의 조역 또는 고문의 역할을 함.

*1921년 여운형은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해 레닌,트로츠키등을 만남. 독립운동가들은 파리회담/워싱턴회의가 본질적으로 식민지재분할을 위한 열강의 회의라는 것을 몰랐음. 워싱턴회의를 지켜보던 코민테른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극동민족대회를 열음. 극동민족대회에서 한국대표단은 13개 단체 53명으로, 참가인원 총수의 1/3이 넘음. 여기서 여운형은 2차례 레닌을 만남. 여운형은 레닌이 한국에 공산주의를 선전하려 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레닌은 한국이 농업국가로 계급의식이 형성되지 않아 우선 민족주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봄. 레닌은 여운형을 한국혁명의 현단계에서 반제민족통일전선의 형성에 필요한 지도자로 봄.

*여운형은 '원동 피압박민족 대표자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다가, 이르쿠츠크에서 흑하사변 관련 반동분자의 처벌에서 배심원이 됨. 재판장은 홍범도.
흑하사변이후 연해주/북만주 일대 조선무장단을 모조리 이르쿠츠크에 불러들여 고려독립군단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서 군법회의가 열린 것. 주로 상해파의 영향아래 있던 군단의 일단이 동만주에서 북만주로 와 흑하지방에 있던 이르쿠츠크파의 무장단과 합작되었다가, 분파적 갈등과 충돌로 다시 분리하고 탈주를 계획. 곧 흑하군단이 추격해 원대복귀시킨다음 무장해제를 시키려던 계획이었음. 그런데 상해파군의 진영에 가니, 참호를 파고 응전준비를 하고 있었음. 이르쿠츠크파는 블라디보스톡의 적위군을 불러서 강제로 무장해제-근 백명이 사상. 여운형과 홍범도 앞에서 재판받은 수십명은 반항하거나 탈주를 계획한 상해파.--당시 잡지에 여운형이 썼던 글. 좌익의 입장에서 쓴 것.

*1926년 광둥에서 열린 중국국민당 2차대회에서, 피압박민족과의 연대를 증명하기 위해 3명의 외국동지로 하여금 연설하게 함. 그 중 하나가 베트남의 호치민, 그 다음은 여운형이었음. 여운형은 마오쩌둥과도 안면이 있었음.

*보로딘의 권유로 임정 외무부장 조소앙은 한커우에 있던 국민정부에게 5만원을 얻기 위한 수속을 취했는데, 장개석이 일으킨 공산당 숙청으로 실패.

*임정에서 구황실의 대우를 둘러싸고 갈등-보수파의 우대론이 임정을 지배하자 여운형은 상해거류민단장으로 독자활동. 1924년부터 1929년 7월 상해에서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중국혁명운동에 참여. 본국송환후 45년까지 국내에서 활동.

*1930년대 일본당국이 여운형에게 보인 태도는 세가지: 법조계와 행정관은 회유해서 청년운동에 내세우려했고, 경찰계통은 요주의인물로 구금/구속하려했으며, 군부에서는 여운형을 중국통으로 보아 중국문제 해결에 이용하려 함.
이에 여운형은 소극적 저항[언론운동으로 조선중앙일보;일본방문해 일본고위층과 만나 외교동향탐색하고, 동경유학생 중심 지하운동도모]과 적극적 준비[독립운동위한 지하조직 준비]의 전술을 택함.


*박헌영과 여운형은 가까웠음-1920년대초 상하이에서부터.
박헌영이 1927년 광인행세를 하고 병보석으로 출감했을 때, 여운형은 부인몰래 부엌의 은수저를 노자돈으로 줌. 1941년 여운형은 심복인 이임수로 하여금 콤그룹의 김한성에게 만원[당시 사무원/학교교사 월급은 100원을 넘지 못함]을 주도록해, 이임수가 3년동안 투옥됨.
그러나 박헌영의 제의로 여운형이 좌우합작을 시작했는데, 박헌영이 평양에 다녀와 좌우합작을 반대해 사이가 멀어짐. 또한 공산당과 인민당의 합당과정에서, 박헌영이 여운형의 명의로 인민당에 지령을 내리고는 여운형에게 서명을 요구하는 등 무시-1946년 8월 여운형은 미군정에 박헌영을 제거해달라고 부탁.

*1946년 박헌영은 여운형을 '대중선동을 좋아하는 야심가이고 철저한 친미주의자며 부르주아민주주의자'로 평가함.

*1943년 2월 여운형은 건국동맹 조직-친일파/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항일세력 통합. 패전이 다가오자, 일본쪽에서는 여운형과 접촉-수차례 일본을 방문해 조야에 알려졌고, 김구/이승만 등 해외의 민족우파 거물들이 입국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른 최적의 인물.
*1946년 9월 여운형은 평양에 감. 여운형을 분노케 한 박헌영의 행동들이 소련군정의 지시에 의한 것들이었다는 것을 김일성에게서 들음. 더구나 김일성은 여운형의 분노를무시하고 여운형을 질책-여운형은 공산당/신민당/인민당을 노동당으로 합당해 내겠다고 약속하고 귀환[여운형과 친밀했던 조만식이 가금된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감금을 면하고자 그러했던 듯]. 소련은 여운형이 1920년대 동경하던 그런 곳이 아니었음. 스탈린치하 소련에서 설득=폭력/공포. 이일로 여운형은 소련군정과 등을 돌림-서울로 돌아와, 남로당에 가입않고, 합당에 반대하는 사회로동당을 만들고, 인민당을 되살려냄.

*1947년 3월 16일 여운형 자택에서 폭탄이 터짐- 측근들은 남로당의 짓으로 생각. 이후 삼가오던 공산당 비판을 시작[북로당과 남로당의 사대주의 비판]

*여운형은 공산당과 적대적으로 된 뒤에도 민전의장단회의에 참가.

*1947년, 여운형은 미소관계의 장래를 매우 비관적으로 봄.
미소공위는 곧 재개되지 못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좌우합작운동이 중요함을 강조. 이후에도 미소공위가 실패하면 조선문제는 해결불가하고 전쟁의 가능성이 있으며, 전쟁은 3차대전으로 발전할 것이라 봄.

*소련군정은 여운형/김규식등의 중간세력을 기회주의자라 공격.

*여운형은 근로인민당을 창당해 남로당을 공격-남로당에 동요가 일어남.

*미군정 2인자 E.A.J. Johnson의 글: 남조선과도정부의 한국인직원이 정치에 관여않고 행정에 전념할 것을 기대하고 능력본위로 뽑았으나, 그렇지 못했음. 어느새 극우세력이 주요자리를 차지-미군정은 과도정부내 우익을 제어하고 자유주의적 세력과 중간좌파를 끌어들이기 위한 단호한 조치의 필요성을 느낌-여운형에게 중책을 맡기기로 하고 여운형을 관사로 부름.
1947년 7월 19일. 그날 여운형은 암살됨.

*여운형은 8/15이후 2년이 안되는 사이에 10차례 테러를 당함. 여운형을 죽인 것은 극우테러단 백의사의 한지근. 몽양의 큰 딸 여난구는 문상온 장택상에게 아버지를 죽이고 왜 왔느냐고 함. 둘째딸 여연구의 책에서는 미군정-이승만-장택상을 거쳐 이루어진 일이라 함-이것은 조영건교수의 견해. 이정식교수의 글은 좀 다름. 여연구가 종파분자들[박헌영계열]이 여운형을 죽였다고 말했다고 함.

댓글쓰기

댓글쓰기 입력폼

포스트 목록 닫기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