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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완전통제구역’출신인 신동혁(25)씨가 월스트리트 저널에 수용소의 참상을 고발하는 기고문을 게재했다...
[기고문 내용]
나는 82년 11월 19일 ‘죄수’로 태어나 2년전까지 내가 집으로 부르는 정치범수용소 14호에서 살았다.
평양에서 50마일 북쪽으로 떨어진 개천의 이 수용소에는 범죄의 종류에 관계없이 잡아들인 재소자와 수많은 사람들이 범죄자의 가족과 친척이라는 이유로 수용돼 있다.
북한에는 ‘3대 규칙’에 따라 범죄자의 가족은 3대에 걸쳐 반역자로 투옥된다. 나는 곤봉과 주먹을 맞는 노예였고 사랑과 행복 기쁨 저항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곳에서 살았다. 내가 그곳에서 태어난 이유는 한국전쟁때 아버지의 형제 두명이 남한으로 탈출했기때문이었다.
‘반역죄’로 인해 할아버지와 아버지, 삼촌은 체포돼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각각 다른 곳에 수용됐다. 그러나 어머니는 왜 수용소에 투옥됐는지 아직 모른다.
그곳에서 부모님은 결혼을 허가받았다.(드물게 재소자들은 아주 열심히 일하거나 보위부 요원들의 환심을 사면 결혼을 허가받는다.) 이것이 나와 형이 수용소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다.
우리는 ‘허가’받은 가족이었지만 서로 애정을 갖지도 못했고 가능하지도 않았다. 내가 열네살때 어머니와 형이 탈출을 기도한 죄로 체포됐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투옥됐다. 그곳에서 7개월동안 보위부요원들은 우리 가족이 탈출을 공모했다는 것을 털어놓도록 강요했고 심하게 고문당했다. 당시 고문으로 등에는 흉터가 생겼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96년 11월 29일 어머니와 형은 반역죄로 공개처형됐다. 나는 현장에 끌려나와 그들의 죽음을 보도록 강요받았다.
개천으로 돌아와 교도소에서 중학교 과정을 끝낸 나는 의류를 만드는 교도소내 공장에 배치됐다. 그곳에서 교도소 밖에서 살다 잡혀온 재소자를 만났고 바깥세상 얘기를 들었다.
2005년 1월 2일 우리는 탈출을 감행했다. 나는 성공했지만 동료는 철책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죽은 것 같았다.
중국을 거쳐 서울에 온후 실망과 슬픔도 있었지만 기쁨과 행복,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북한에 있을 때 나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유일한 감정이 있었다면 오직 공포였다. 매맞는 공포, 굶주림의 공포, 고문의 공포, 죽음의 공포였다.
개천수용소의 참상을 알리려고 탈출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는 수만명이 고통받고 있다. 한끼라도 더 먹기위해 아귀다툼을 하고 풀과 나무뿌리, 진흙, 쥐와 곤충으로 연명한다. 무자비한 고문은 공개리에 자행되고 매질은 계속된다. 여성은 종종 낙태가 강요되며 어린이에게 어린시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범들에게 인간의 권위는 없으며 지능과 감정, 꿈이 있을 수 없는 짐승으로 취급받는다. 사람을 이런 식으로 다뤄서는 안된다.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학대행위에 우리는 맞서야 한다. 재소자들이 더이상 침묵속에 죽어가서는 안된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폭력에 항의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우리가 대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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