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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100)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2009.08.24 13:37 | 요한계시록 강해 | 닛시

http://kr.blog.yahoo.com/mpooo.7000/622 주소복사



요한계시록 강해(100)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계22:18-21 작성일 2009.06.12    
 
   지난 시간에 마치지 못한 17절 후반을 먼저 말씀드리고,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17절 후반에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했습니다.
여기서 듣는 자란 복음을 듣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만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새 예루살렘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을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고,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사람, 곧 참으로 의롭고 거룩하게 변화된 사람이라야 새 예루살렘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목마른 자가 나오는데 의에 대해, 진리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렇게 남편이 많이 바뀌었다면, 이 여인의 인생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고달프고 힘든 삶을 인내하며 어찌하든 만족을 찾아보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진정으로 충만함과 기쁨을 줄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곤고했겠으며 얼마나 갈급했겠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처럼, 사람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갈급함을 채우고자 육적인 것을 취하고 또 취해 봅니다. 그러나 육을 아무리 취해도 그 마음에 진정한 해갈은 되지 않습니다. 짠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오히려 육을 취할수록 갈급함은 더해 갑니다. 이럴 때는 육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수를 찾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수이며, 주리고 목마른 자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았을 때, 그 마음에 생명수가 채워지는 것을 느끼셨습니다. 목마름이 해결되고, 희열이 넘쳤습니다. 이처럼 거듭나는 기쁨을 맛본 사람들은 변화된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열심히 행해 나갑니다. 그 갈급함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좋아서 부지런히 배우고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 속에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를 공급받게 됩니다. 영생을 사모하며 의에 갈급한 사람은 누구라도 값없이 생명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성령을 보내 주신 것도 우리가 잘한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구원의 길이 열렸고, 주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값없이 구원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한 번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갓난아기가 세상에 태어났는데, 젖도 먹지 않고 자라지도 않는다면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수를 마신 사람이라 해도 더 이상 생명수를 마시지 않고 영적인 변화가 없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로 인해 고난당하셨고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이제는 죄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며 죄 가운데 살면, 한 번 성령을 받았다 해도 성령이 소멸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나라 생명책에서도 이름이 지워집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사람은 그 마음에 희열이 넘치고 감사가 가득하므로 부지런히 죄를 벗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심방합니다. 마음 다해 예물도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 해도 그것으로 구원의 값을 지불할 수는 없습니다. 혹여 구원에 대해 어떤 값을 지불할 수 있다 해도, 그 값은 어느 정도라고 정할 수가 없습니다. 죽기까지 충성하고 세상 모든 보화를 드렸다 해도, 구원의 값을 치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귀한 독생자가 처참한 형벌과 사망을 대신 당해 주셨는데, 무엇으로 그 값을 치를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말할 수 없는 행복으로 가득한 천국을 주신 것도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중심에서 깨닫는 사람이라면, 모든 삶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도 그냥 받고만 있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와 사랑의 향으로 드릴 때 기뻐 받으시고 우리가 드린 것보다 더 큰 축복으로 돌려주십니다. 성결의 능력을 더하시고 영혼이 잘되게 하십니다. 심는 대로 30배, 60배, 100배로 갚아 주시고 믿고 구하는 대로 마음의 소원에 응답해 주십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했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거룩함을 이루어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죄를 많이 버렸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잘했다"고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일 뿐입니다. 죄를 버리기는 하는데 그 속도가 더디고 억지로 힘들게 싸워 버린다면, 이것도 민망한 일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인생의 밑바닥, 가장 깊은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속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그 은혜가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해서 죄를 버린다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드릴 수 있는 마음인데, 더러운 죄를 버리는 것이 무엇이 어렵습니까? 더구나 그 죄 때문에 질병과 재앙과 온갖 시험 환난을 겪는 것인데, 당장이라도 벗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중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성경 말씀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됨

이어지는 18절-19절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했습니다.
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 임의로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재앙들을 더하신다 했습니다. 또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신다 했습니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을 가졌다면, 이러한 말씀을 더욱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면서 "나는 주의 종이니, 주의 종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고 위협합니다. 양 떼가 두려워 떨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면서, 양 떼에게 잘못된 길로 가도록 미혹하거나 강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주와 축복의 기준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주의 종에게 저주권과 축복권이 따르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가르치는 주의 종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면 재앙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도 하나님께서 그를 미워하여 저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은 원수 마귀 사단입니다. 성도들이 진리 가운데 거하고 빛 가운데 거하면, 사단이 송사하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께 지킴받지 못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어둠 가운데 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빼는 것도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부분은 빼거나 희석시켜서 가르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성결에 대한 부분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죄와 악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거룩하라", "성결하라", "죄를 버리라", "육체의 일을 행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이런 말씀들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씀은 빼 버리고, 주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흐린다"는 말씀도 있는데, 이런 말씀도 싹 빼고 가르칩니다. 한 번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반드시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방언이나 각종 은사를 금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잘못이라 가르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사와 표적을 비롯하여 영의 세계에 대한 말씀들이 자기 지식과 생각에 맞지 않으면, 그런 부분은 빼고 가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천국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처럼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결코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않습니다. 더구나 성경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결정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대로 행했는가, 행하지 않았는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나뉘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결코 사람의 생각 속에 더하거나 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6절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하셨습니다. 물에 빠져 죽으면 육의 생명을 잃지만, 영혼이 실족할 때는 영의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삼가 근신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3.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20절에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을 마무리 짓는 22장에서 "속히 오리라"는 말씀을 세 차례나 반복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장 7절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셨고, 12절에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말씀을 마치는 이 시점에서,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이처럼 거듭하여 경계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깊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그날과 시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때의 징조에 비춰 보면, 그때가 얼마나 가까운지는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한 2000여 년 전에 비해 끝날에 더욱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설령 그 때가 넉넉히 남아 있다 할지라도, 각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이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라 해도, 젊고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당장이라도 가야 합니다. 언제라도 부르심에 응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께서 속히 오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주님을 맞을 준비가 덜 된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말을 듣는 것이 싫습니다. 그러나 진정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말을 들을 때 소망이 되고 가슴이 벅찹니다. 그 장면을 상상하면 눈물부터 나오고, 그리운 주님께 무슨 말씀부터 드릴까, 어떤 모습으로 안길까 하면서 마음이 설렙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 믿음의 선진들은 칼에 목을 베이고 사자밥이 되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운 고통의 순간이 아니라, 그립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은 순교하는 것도 아니고 살아서 주님을 맞게 된다면 얼마나 더 행복한 일입니까? 그러니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말을 들으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면서 기쁨으로 화답할 수 있습니다. 그 날을 얼마나 소망하는가에 따라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또 내가 얼마나 신부단장이 되었는지를 스스로 측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땅에서의 삶 속에도 하나님이 은혜, 주님의 은혜가 입혀집니다.

4.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21절에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자들은 이미 주님을 믿는 자들과 앞으로 믿을 자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매일의 삶 자체가 은혜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속하셨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 날마다 인도받게 하십니다. 진리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심같이 구하는 것마다 응답하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지요. 성령의 불담으로,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범사에 형통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가 끝나면 그립던 주님의 품에 안기고 천국의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값없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억할 것은, 이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주셨을지라도 각자가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은혜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는 "이것도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하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말로는 은혜와 감사가 풍성한데 정작 그 마음은 변화가 더디기도 합니다. 감사할 줄도 모르고 은혜도 모르는 사람보다는 낫지만, 정말로 그 은혜에 감사한다면 그 은혜를 통해 변화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열매를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다가 깊은 진리를 깨우쳤다. 하거나, 나의 근본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는 "내가 이러한 사랑을 받았으니 내 생명 다해 은혜를 갚겠습니다." 하고 눈물로 고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길이 보입니다. 속히 영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지켜보면 그 뜨거웠던 마음이 식어 있기도 하고 더 이상 은혜에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처럼 은혜를 받고 쏟아 버리기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낭떠러지에 매달린 사람이 밧줄을 필사적으로 잡는 것처럼, 그 은혜를 꼭 붙잡아야 합니다. 중심에 새겨서 영적인 열매를 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결단하고 마음을 지키고자 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힘을 다해 성결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며 더 많은 열매를 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럴 때 아버지께서 성결의 능력뿐 아니라 실한 열매를 맺을 능력도 더하시고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6년 10월 13일부터 2009년 6월 12일까지 2년 8개월 동안 100편에 걸쳐 말씀드린 요한계시록 강해를 마무리합니다. 마지막 때의 비밀한 말씀을 풀어 주시고, 말씀을 통해 믿음과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요한계시록 강해를 통해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정립하면서 혹여라도 7년 환난과 짐승의 표, 심판과 지옥 등의 말씀이 두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분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시는 까닭은 겁을 주거나 힘들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듣고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천국에 이르게 하시려는 사랑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어찌하든 여러분을 더 좋은 천국에 들이시고자, 애틋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육과 영은 점점 더 양극화 되고 세상을 좇는 사람들과 진리를 좇는 사람들도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아무리 교회에 다닌다 해도, 깨어 있지 않으면 세상 사람과 다름없이 방탕한 정욕과 죄악에 물들게 됩니다. 여러분은, 결코 이런 풍조에 물들어서는 안 됩니다. 깨어 기도하며 더욱 근신하여 진리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그냥 이렇게 신앙생활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영으로 들어가 있겠지 이런 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혹은, 언제쯤 되면 주님이 오실까? 아직은 적당히 세상을 취하고 살다가 마지막 날이 눈앞에 닥친 것 같으면 그때 쯤 회개하고 열심히 해야지 이런 생각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신 대로, 주님께서는 진실로 속히 오십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지 않으면, 마치 잠자다가 도적을 맞는 것같이 순간에 마지막 때를 맞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먼저 온전히 거룩함을 이루고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보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을 감사하며, 부지런히 마음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하루라도 빨리 성결을 이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다시 만날 때까지 성결의 능력과 권능으로 멋지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나가야 합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의 섭리를 이뤄드리는 주역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이 영적 장수로서 마지막 순간에는 문들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 이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9-06-15 오후 9:04:15 Posted
2009-08-07 오후 4:07:10 Updated
  

요한계시록 강해(98)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2009.08.24 13:34 | 요한계시록 강해 | 닛시

http://kr.blog.yahoo.com/mpooo.7000/621 주소복사

 요한계시록 강해(98)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계22:14-15 작성일 2009.05.29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영적으로 신랑 되신 주님의 신부입니다. 장차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시면, 우리는 주님의 신부로서 흠도 점도 없으신 신랑을 맞아 혼인 잔치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혼인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땅히 예복을 갖춰야 하며, 영광스럽고 거룩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그에 맞는 거룩한 단장을 해야 합니다.

1.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14절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했습니다.
두루마기는 주님의 신부들이 입어야 할 예복을 의미합니다. 예복을 입으면, 자세가 반듯해지고 행실도 평소보다 품위 있게 변합니다. 마음가짐도 달라집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 예복, 곧 두루마기는 우리의 행실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기 전에는 두루마기가 검은 색입니다. 온갖 죄악에 찌들어 새까맣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고 나면, 맑은 물로 부지런히 두루마기를 빨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할례하며, 거룩한 행실로 신부단장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행실을 가지려면, 먼저 그 마음부터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결국, 죄악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정결하게 할례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뜻하게 됩니다.
이렇게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했습니다.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했는데 생명나무에 나아간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이때 문들을 통하여 간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서 더 좋은 천국으로 침노해 들어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낙원의 문으로 들어가 1천층으로, 다시 2천층으로, 3천층으로, 이렇게 문들을 통과해서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둘째는, 여러 단계의 천국 문들을 통과하면 마침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즉, 문들은 새 예루살렘의 열두 진주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이유는 단지 구원받은 성도들을 얻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낙원이나 1천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성결을 이루어 새 예루살렘에 거할 참된 자녀들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혼들이 이 진주문을 통과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이 문들을 아무나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 왕정시대에는 왕이 사는 도성의 문을 지키는 군병들이 있었습니다. 성에 들어가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은 그 문을 통과할 수 없었고, 궁전의 문을 당당히 통과하려면 그만큼 더 큰 권세와 지위가 필요했습니다. 천국의 문을 통과할 때도 그에 합당한 자격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가 있어야 하며,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더 큰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려면, 낙원이나 1천층, 2천층, 3천층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권세보다 더욱 큰 권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권세는 하나님을 닮은 만큼, 즉 두루마기를 빨아 성결을 이룬 만큼 위로부터 임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열심히 두루마기를 빨아서 문들을 통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권세를 얻었다면,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그 증거가 나타납니다. 영혼이 잘되는 만큼 가정과 일터에서 영육 간에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성령의 역사가 불같이 따르며, 어둠과 질병의 세력들이 물러갑니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신 말씀처럼, 참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권세와 능력이 따릅니다. 두루마기를 온전히 빠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뱀과 전갈을 밟으며 악한 영들의 능력을 제어하는 등 표적을 나타낼 수 있는 권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두루마기를 빨지 않는 자들은 성 밖에 있으리라

반대로 두루마기를 빨지 않는 자들은 너무도 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생명나무에 나아가지도 못하고,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가지도 못하므로 성 밖에 남겨지게 됩니다. 성령을 받고 직분이 있다 해도, 두루마기를 빨지 않으면 구원조차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고백했던 사람이라 해도, 여전히 세상의 더러움 가운데 머물러 있었으므로 결국 성 밖으로 버림받는 것입니다.
15절에는 두루마기를 빨지 않는 자들의 대표적인 유형이 나옵니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했는데 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개들
베드로후서 2장 22절에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했습니다. 개는 더러운 배설물을 먹기도 하고, 자기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러운 죄악을 버린다 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지키기 못하여 다시 취하는 사람을 개에 비유합니다.
어떤 사람은 연단을 크게 받으면 좀 변화된 것 같다가도 얼마 후에 보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또 시험 환란이 오면 잘못을 회개했다가도 얼마 지나면 또 같은 죄를 짓고 회개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도 나름대로 기도생활을 하며 마음의 할례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마음에 변화가 없습니다. 두루마기를 빨았다가 더럽히기를 반복하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는 아예 빨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더럽습니다. 이런 경우는 오히려 초신자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안 그럴게요, 버릴게요. 기도해 놓고, 반복해서 어겼으니 번번이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때 열심히 마음의 할례를 했다 해도 현재는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고 멈춰 있다면, 이 역시 자칫하면 구원받기가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은 마치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열심히 노를 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노 젓기를 멈추면 배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떠내려갑니다. 마찬가지로, 미지근하고 정체된 신앙은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세상 정욕과 불의가 틈타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떨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지 못하니 뭔가 허전하고 적적합니다. 결국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다시 육을 찾아 취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했습니다. 차가운 신앙도 문제지만, 미지근한 신앙도 차가운 신앙과 마찬가지로 버림받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 술객들
이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서 설명한 적이 있는데, 더 자세한 내용은 [요한계시록 강해 87번]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술객은 점을 치거나 악한 영과 교통하는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다 하면서도, 사단의 역사를 단호히 차단하지 않고 계속 받아나가는 사람들도 술객입니다. 사단은 비진리의 생각을 통해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역사하는 악한 생각이 떠오르면, 즉시 사단의 역사를 차단하고 진리의 생각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비진리의 생각을 통해 사단의 역사를 계속 받아나가면, 점점 더 깊은 어둠의 역사를 받게 됩니다. 처음에는 사단의 역사를 받지만, 나중에는 마귀의 역사를 받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여 귀신의 역사를 받기도 합니다. 신접하는 술객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가증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3) 행음자들
행음자의 경우도 육적인 행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행음도 경계해야 합니다. 영적인 행음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성도들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세상을 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한때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라도, 세상에 마음을 하나씩 내어주기 시작하면 그 하나가 둘이 되고 또 셋이 됩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어지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런 사람들은 혼자서만 세상을 취해 나가지 않습니다. 주변의 성도들까지 미혹하여 함께 세상 것을 맛보게 하고, 하나님께 열심을 내는 마음이 식어지게 합니다.
육의 부부라 할지라도 서로 사랑할 때는 다른 이성에게 한눈을 팔지 않습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인 신랑이 되시는데, 이처럼 거룩하고 존귀하신 신랑을 두고 어떻게 신부가 세상에 한눈을 팔 수 있습니까? 창조주이자, 만유의 주가 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티끌 같은 인생들을 향해 사랑을 주셨습니다. 범죄 한 우리를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참혹한 십자가 형벌에 내어주셨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변화되게 하시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또, 말할 수 없는 천국의 영광을 예비해 두시고, 그곳에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런 사랑을 알면서, 성령을 받았고 은혜를 체험했으면서 어떻게 주님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명예와 권세, 물질이나 정욕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배를 멀리한다면, 그는 주님의 사랑을 떠나 행음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원수 마귀 사단이 우는 사자같이 달려들어 자기의 밥으로 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대충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다해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지혜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전부를 하나님을 위해 드리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되, 하나님께서 더욱 기뻐하시는 쪽을 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살인자들
육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도 큰 죄가 됩니다. 영적인 살인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미움을 드러내지 않고 마음으로만 미워했다 해도, 영적으로 보면 이는 살인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육적으로 살인하는 것과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은 동일한 근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진리를 잘못 가르쳐서 형제를 실족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양 떼를 가르칠 때, "사람은 죄를 다 버릴 수 없습니다, 그냥 믿습니다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설명했다고 합시다. 죄를 벗어버리기 힘들다, 좀 편하게 신앙생활하고 싶다 생각하던 사람은 얼른 그 말을 마음에 받아들입니다.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함께 사망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사망의 길로 가게 된 책임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물으십니다.
만일 교회의 머리 되는 일꾼들이 성전 안에서 오락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나 세상 사업에 대한 대화를 했다고 합시다. 진리를 모르는 초신자들이 이런 장면을 보면, 그래도 되는 줄 알고 따라할 수 있습니다. 혹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운 성도들도 머리 되는 분들이 그러는 것을 보고 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비진리를 행한 당사자들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머리 된 입장에서 본이 되지 못하고 실족하게 만든 사람들도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9장 42절에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했습니다.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분들은 더욱 더 이런 말씀들을 기억하여 삼가 절제하며 근신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주의 종이나 일꾼의 입장에서 맡은 영혼을 잘 돌보지 못하여 잃어버리는 경우입니다. 자신이 맡은 양 떼는 항상 영적인 꼴을 먹여서 믿음이 성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쉼 없이 영혼들을 돌아보며, 시험에 들지 않도록 지켜 주고 축복을 받도록 늘 기도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양 떼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할 때는 그가 맡은 양 떼가 파리해지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럴 경우, 하나님 앞에 살인한 것과 같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나 선생 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책임이 중하다고 해서, 사명을 사모하지 않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양 떼를 맡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이렇게 양 떼를 맡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진 것과 같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감당했을 때는 큰 영광이 됩니다.

5) 우상숭배자들
일반적으로, 우상숭배는 어떤 형상 앞에 나가 절하거나 미신적인 행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점을 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재미삼아 한 번 해봤다" 하면서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또는 "가정의 화평을 위해서 어쩔 수 없다" 하면서 제사상 앞에서 절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결과적으로 악한 영과 접하며 숭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심히 가증한 일이며, "별 생각 없이 그랬다" 변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영적인 의미의 우상숭배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의미의 간음도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우상숭배와 영적인 간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는 그 사람의 믿음 수준에 따라 달라집니다. 비유를 들어, 남녀가 사랑하여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 외에 다른 이성을 사랑하여 마음을 내어주었다면, 이것이 바로 간음입니다. 영적인 의미의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며 믿음도 있고 체험도 있는 일꾼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이것이 바로 영적인 간음입니다.
그런데 아직 믿음이 연약한 초신자는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사랑하던 세상 것들을 한번에 다 버리기가 힘듭니다. 여전히 그대로 취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남아있고, 실제로도 버리지 못하여 계속 취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믿음이 연약하여 아직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초신자가 물질에 집착하여 아직 주일을 성수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골로새서 3장 5절 후반에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한 대로, 물질이 그에게 우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들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수록 점점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만큼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합니다. 결국에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천국을 사기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까지 팔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을 영접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믿음이 자라지 않고 여전히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자라지 않으면, 얼마 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우상을 섬김으로 인해 믿음이 계속 성장하지 않고 있다면, 결국은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7년 환란 때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도 우상숭배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도 있고, 핍박 때문에 두려워서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은 결국 짐승에게 경배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 됩니다. 그러므로 7년 환란에 떨어진 사람이 어찌하든 구원을 받으려면 짐승의 표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6)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
육적인 거짓말도 벗어버려야 하는 죄이지만, 영적인 거짓말은 더욱 중한 죄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하는 것 등은 거짓말에 속합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마귀에 대해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라 했습니다.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들은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크고 작은 거짓말 속에 파묻혀서 살지만, 성도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새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여러분이라면, 거짓의 근본 뿌리까지 뽑아버려야 합니다. 거짓말과는 좀 다른 종류처럼 보이는 비진리 중에도 그 근본을 살펴보면 거짓이라는 큰 뿌리에서 나오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약속을 임의로 어기는 것, 한 번 정했다가도 자기 유익을 좇아 변개하는 것, 정도를 걷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는 것, 외식하는 것, 동문서답하는 것 등은 결국 진실하지 않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이렇듯, 거짓이라는 큰 뿌리 하나만 뽑아내도 많은 비진리들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7년 환란 동안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미혹하는 세력들도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에 포함됩니다. 이는 곧 적그리스도와 짐승을 돕는 거짓 선지자의 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종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을 속여 원수 마귀 사단의 종이 되게 합니다. 이들은 결국 유황 못에 들어가게 되고, 이들의 미혹을 받은 사람들도 성 밖 어둠에 버려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개들, 술객들, 행음자들, 살인자들, 우상숭배자들,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이 성 밖에 있다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사소한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혹은 미움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는 회개하여 용서받을 수 있지만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직분을 받아가면서도 계속 죄성들을 버리지 않고 있다면, 상황이 다릅니다. 이럴 때는 구원을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에 머물다가 결국 구원받지 못할 상황에 처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구원을 받고, 어느 정도까지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궁금해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새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분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까지 죄성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성을 온전히 다 벗어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면 어떤 죄악도 쉽게 버릴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는 축복은 개척 이후 계속해서 받아왔습니다. 2009년에는 이 축복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가나안성전에 들어갈 때쯤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했습니다. 이 은혜의 때를 결코 놓치지 말고 꼭 붙잡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와 능력을 물 붓듯이 부어 주시는 2009년, 여러분 모두가 반드시 두루마기를 깨끗이 빨아 큰 권세를 얻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9-06-01 오후 11:09:19 Posted
2009-07-20 오전 11:14:08 Updated
 

요한계시록 강해(97)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2009.08.24 13:33 | 요한계시록 강해 | 닛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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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97)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계22:13 작성일 2009.05.15    
 
   오늘 본문 13절에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세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존재하시며 무한한 공간 자체이시므로 시작이나 끝이 없으십니다. 또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한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하나님에 대해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라 표현하셨습니다. 영적인 의미를 모르면, 이 세 구절은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각각의 구절에는 서로 다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1) 알파와 오메가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가장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첫 번째 글자인 에이(A)와 마지막 글자인 제트(Z)에 해당하며, 한글 자음으로는 첫 번째 글자인 기역(ㄱ)과 마지막 글자인 히읗(ㅎ)에 해당합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는 헬라 문명이 찬란히 꽃피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알파와 오메가는 단지 헬라어만 아니라 인류가 사용하는 모든 문자를 대표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알파와 오메가는 바로 지식의 시작과 끝을 말합니다.
또, 문자는 인류 문명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문명이 발전하고 전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자라는 수단이 있어야 합니다. 한 세대에 뛰어난 지식과 기술이 있어도, 이것을 기록할 문자가 없으면 후세까지 전수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문자를 가지고 생각을 표현하고 지식을 전달하며 문명을 발달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문명이 태동하고 급속한 발전을 이루는 데에는 문자가 큰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자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 곧 알파와 오메가는 이 땅의 모든 지식, 혹은 문명의 시작과 끝을 의미합니다.

2) 지식과 문명의 시작과 끝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
사람은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부모와 교사, 서적과 각종 대중 매체 등을 통해 여러 가지 지식을 쌓아 나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지식을 습득하고 지식에 지식을 더하여 문명을 발달시킨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과 문명의 시작은 근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지식을 쌓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을 지으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오랜 세월 동행하시면서 진리의 지식을 하나하나 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지식을 마음껏 활용하여 펼칠 수 있는 뛰어난 지혜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사는 동안 그 뛰어난 지식과 지혜를 활용하여 고도의 문명을 발달시켰습니다. (이런 문명들에 대해서는 창세기 강해를 통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이 땅으로 쫓겨나 살 때에는 에덴동산에 살 때와 같은 뛰어난 문명을 이룰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 17절에 보면, 아담의 아들인 가인이 살던 시대에 이미 성을 쌓을 수 있는 지식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창세기 4장 22절에는 가인으로부터 몇 대가 지난 두발가인의 시대에 이미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처럼, 수백만 년 이상의 석기 시대를 지나 청동기, 철기 시대로 발전한 것이 아닙니다.
아담 이후로, 사람들은 지식을 계속 쌓으면서 문명을 발달시켜 왔습니다. 이러한 문명은 인류가 쌓아온 모든 역사의 집약물이며,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낸 모든 지식과 재능이 결집된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문명의 발달로 인해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가능해지면서, 사람들은 인간의 능력에 대해 자부심을 갖습니다. 앞으로도 문명이 계속해서 발달할 것이며, 그만큼 삶의 질이 향상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일들도 머지않아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합니다. 가령, 생명체를 만들어 내거나, 질병이나 노화를 극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줄로 예측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과 문명이 한없이 발전해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 문명의 시작점이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그 끝점도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모든 과정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시작되고, 또 끝이 나는 것입니다. 계시록 강해를 통해 들으셨던 것처럼, 7년 환란이 끝날 무렵이 되면 전쟁과 자연 재해 등으로 인해 모든 문명이 대부분 소멸됩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이 시작될 즈음에는 거의 원시적인 상태가 됩니다. 긴 세월 동안 축적해 온 지식도, 기술도, 모두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지식과 문명이 발달하도록 허락하신 이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식을 주시고 오늘날까지 문명이 발달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경작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문명의 발달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자녀를 최대한 많이 얻으려면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인류 역사가 이어져야 하는지 정확히 아셨습니다. 그래서 아담 이후 6000년이라는 기한을 정하셨습니다. 이렇게 긴 세월 동안 지면에 번성한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문자와 문명의 발달이 꼭 필요합니다. 문자가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될 수 있고, 후세까지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또 문명이 발달해야 세상 구석구석까지 복음이 전파될 수 있습니다. 문자와 문명이 발달해야,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떻게 찾고 만나야 할지를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므로, 자신들의 좁은 지식과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또 지식을 우상으로 삼아 하나님의 영역을 넘어서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바벨탑 사건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본래, 아담 이후부터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함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세워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할 때, 사람들을 쉽게 규합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민족마다 언어를 서로 다르게 하셨습니다. 같은 언어를 쓰고 있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으므로 공사는 중단되었고, 결국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지면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한 곳에 모여 살던 인류를 이 시점에 지면에 흩어지게 하신 것도 결국 하나님의 섭리 속에 들어 있었던 일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아무리 지혜와 능력을 동원한다 해도 결코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넘어설 수도 없습니다. 잠언 1장 7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했습니다. 잠언 9장 10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성결을 이룬 만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이시라 해서 악한 지혜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지식을 주셔도, 사람 편에서 원수 마귀 사단의 역사를 받아 악하게 변질시킨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화약에 대한 지식을 선하게 활용하면, 건축이나 채광사업에 유익하게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을 악한 쪽으로 활용하면,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다른 예로, 약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질병을 치료하는 약을 만들 것인가, 사람을 죽이는 독약을 만들 것인가 하는 선택은 그 지식을 활용하는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식을 선한 용도로 진리에 맞게 쓰도록 주셨지만, 인간들이 사단의 역사를 받아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2. 나는 처음과 나중이라

앞에서 알파와 오메가라 하신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도 특히 성부 하나님의 분야를 나타냅니다. 인류의 모든 지식과 문명을 시작하게 하시고 마무리 지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물론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라는 이 말씀들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세 분은 근본 하나이시며, 결국 한마음 한뜻으로 사역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처음과 나중"이란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해당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무엇의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는 뜻일까요? 이는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십자가 구원의 섭리와 관련된 내용으로서, 주님께서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사역의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1)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범죄하므로 인류는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태어난 후손들도 원죄와 자범죄를 가진 죄인이었기 때문에 모두 사망을 당할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다시 사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 바로 처음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열매가 맺히면 그 안에는 생명의 씨가 있습니다. 그 씨가 땅에 떨어지면 싹이 나고 자라서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맺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므로 무수한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6절에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했습니다. 오늘날 성결의 복음을 듣고 생명을 얻은 여러분도 바로 주님의 아름다운 열매들입니다. 그리고 열매 된 여러분들이 다시 이 땅에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되어 또 다른 많은 열매들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처음이라 하신 것은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부활로 나오셨기에, 주님 안에서 뭇 영혼들이 구원을 얻어 부활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2) 구속 사업을 마무리 하시는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가 나중이 되신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으로 인하여 인류 구속의 사업이 마무리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했는데, 주를 믿고 먼저 죽어 무덤에 장사된 자들은 주님과 함께 공중으로 오게 됩니다. 살아서 신랑 되신 주를 맞는 성도들은 홀연히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이때가 바로 우리의 구원이 온전히 성취되는 때이며, 인간 구원의 모든 섭리가 막을 내리는 날입니다. 마치 농부가 씨를 뿌려 농사를 지은 후에 모든 곡식을 거두는 것처럼, 주님께서 알곡 된 영혼들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재림을 통해 구속 사업을 마무리 하시는 주님에 대해 나중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3. 나는 시작과 끝이라

"시작과 끝"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성령 하나님에 대한 분야를 설명합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께서는 무엇의 시작과 끝이 되신다는 말씀일까요? 이는, 인간 경작의 시작과 끝을 의미합니다. 농부가 수고하여 농사를 짓는 것은 추수 때가 되면 알곡을 거두리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알곡과 같은 영혼들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은 영혼들,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된 자녀들을 거두기 위한 것입니다.

1) 인간 경작을 도우시는 성령님의 사역
아담의 범죄 이후, 인류는 죄에게 순종하는 죄의 종, 원수 마귀 사단의 종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죄악이 없는 깨끗한 마음이었지만, 원수 마귀 사단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만큼 마음은 점점 죄악으로 더럽혀졌습니다. 미움, 혈기, 시기 ,질투, 간음, 욕심, 교만 등과 같은 육의 속성들이 마음에 하나하나 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참된 자녀가 되려면, 이러한 육의 속성들과 죄성들을 뽑아버리고 원래의 깨끗한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하나님을 닮은 영의 속성들을 심어나가야 합니다. 사랑과 선, 겸손과 섬김, 정직과 진실, 희생과 헌신 등과 같은 것들로 마음을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면, 성경에 "하지 말라" 하신 것을 하지 말고, "버리라" 하신 것은 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죄성들이 마음에서 뽑히고 깨끗한 마음을 이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라" 하신 것은 하고, "지키라" 하신 것은 지키면 됩니다. 그러면 점점 더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인생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죄인 되었을 때 행하던 구습, 곧 옛사람의 습성대로 계속 머물러 있으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속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변할 수 없는 것을 변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스가랴 4장 6절 후반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도 성령의 능력으로는 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한 자녀들에게 내주하셔서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출발점이 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성령의 역사 속에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또 들은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할 때는 자기 안의 성령님이 기뻐하시므로 자기 마음에도 기쁨과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그런데 불순종할 때는 성령님이 애통하시는 것을 느끼므로 마음이 곤고해집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심으로 변화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입게 하십니다. 예전에 행하던 어둠의 일들을 버릴 수 있도록 자꾸 자꾸 진리의 음성을 들려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주십니다. 그래서 마침내 온전한 성결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2) 인간 경작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시는 성령님
마가의 다락방에서 불같은 성령으로 임하신 이후, 성령님께서는 끊임없이 이러한 사역을 감당해 오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을 시작하실 때부터 성령님께서도 함께하셨고, 구약시대에도 많은 일들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사역에 있어서 더 중요한 분야는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할례할 수 있도록, 각 사람의 마음 밭을 개간하여 성결을 이룬 참 자녀로 나오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결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시면 인간을 경작하시는 성령의 사역도 끝이 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원수 마귀 사단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섭리를 훼방하려 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을 미혹해서 하나님을 배신하게 했고,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 했고,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믿음을 가질 수 없게 하고, 악한 자들을 사주하여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아무리 훼방하고자 해도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철저한 공의와 측량할 수 없는 지혜로 앞으로 다가올 마지막 순간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구원의 섭리를 모두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참된 자녀들을 얻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이 경작이 끝날 때가 가까울수록 더욱 불같은 역사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세상의 어둠이 심히 짙을지라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 살지라도 성도들이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도록 성령의 역사도 갈수록 더 강력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는 말씀 안에는 인간의 역사와 경작, 구원에 대한 모든 섭리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 본 교회를 세우신 것도 바로 이러한 경작의 끝이 되시는 성령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인간 경작의 시작이요 끝이 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통해 불같은 역사를 베푸시므로, 구원받을 모든 영혼들을 불러 모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고 듣고 체험한 역사들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 나타난 것보다 크고 놀랍습니다. 이제, 이런 역사를 체험한 여러분이 먼저 성결을 이룬 참 자녀가 되어야 하고,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한다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여러분 모두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9-05-18 오후 11:11:24 Posted
2009-07-20 오전 11:32:03 Updated
  

요한계시록 강해(96) 양극화 되는 마지막 때의 모습

2009.08.24 13:32 | 요한계시록 강해 | 닛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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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계시록 강해(96)      양극화 되는 마지막 때의 모습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계22:11-12 작성일 2009.05.08    
   
  요한계시록 강해도 이제 거의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100편에 가까운 설교 말씀을 들으시면서, 여러분이 가장 뚜렷이 기억해야 할 내용은 "마지막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영원히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아니며, 이 땅의 문명 역시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시작된 인류의 역사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곧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를 알리는 경고가 온 세상에 널리 선포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고, 주님 맞을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들이 아무리 마지막 때를 경고한다 해도, 모든 사람이 듣고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 12장 10절에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했습니다. 선한 것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죄에서 떠나 정결한 마음을 이뤄갑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악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여전히 악을 행하며, 점점 더 악해집니다. 검은 것은 더 검게, 흰 것은 더 희게, 육은 더 육으로, 영은 더 영으로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은 이처럼 악인과 의인으로 양극화되는 마지막 때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1. 양극화 되는 마지막 때의 모습

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11절 전반에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전해도, 그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불의와 더러움 속에 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을 받고, 받지 않고는 각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강제로 의롭게 만드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주시지만,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찌하실 수가 없습니다. 불의한 사람은 그대로 불의하게, 더러운 사람은 더럽게 남겨 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의한 것"이 무엇인지는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바로 불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불의한 일들이 계속 쌓이면 더러운 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더러운 것"은 사람의 도리에서 벗어나며 난잡하며 방탕한 것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음행의 경우에도 일반적인 음행을 넘어선 것들이 있습니다. 인륜을 저버린 일을 저지르거나, 입에 담기도 민망하여 세상 사람들조차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지저분하고 충격적인 일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음행 중에서도 더러운 것에 속합니다. 다른 예를 들어, 시기의 경우에도 그 정도가 지나치면 더러운 행함이 나옵니다. 상대를 시기하는 마음이나, 그로 인해 상대에게 악을 행하는 자체도 이미 불의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투기가 지나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없애려 합니다. TV 사극 등을 보면, 종종 궁중의 여인들끼리 시기하여 저주를 하거나 주술적인 행동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대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화살을 쏘거나, 상대의 인형을 만들어 놓고 바늘로 찌르는 등 악한 영의 힘을 빌려서라도 상대를 해치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의한 마음과 행함이 도를 지나쳐서 보통 사람들의 양심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들이 나오는 것이 바로 더러운 것에 속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세상의 불법과 불의는 더 심해지고 죄악의 전파 속도도 빨라집니다. 수십 년 전, 아니 십여 년 전만 해도 너무 수치스럽게 여겼던 일들을 이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당당하게 행합니다. 한 번, 두 번, 불의하고 더러운 일들을 점점 접하게 되면, 그렇게 보고 듣는 것이 마치 씨를 뿌린 듯이 마음에 심어집니다. 양심이 무뎌져서 악한 것을 보아도 경계하지 못하고 어느새 자신도 물들어서 따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착하게 자란 평범한 아이들도 나쁜 친구들을 만나 함께하게 되면 악하게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나쁜 친구들이 때리고 욕하고 훔치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런 것들에 익숙해지면서, 아직은 양심에 찔리더라도 친구들을 따라 자기도 악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따라하다 보면, 점차 양심의 가책도 사라집니다. 이제는 자기도 자연스럽게 욕하고 때리고 담대하게 훔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에 거하면서 불의와 불법을 계속 보고 들으니 점점 더 깊은 죄 가운데로 빠져들어 갑니다. 세상 어디서도 깨끗한 곳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2)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도 선한 양심 속에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8장 4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했습니다. 죄악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나 주십니다. 빛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어찌하든 자기를 지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죄를 버려가는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신 것이 본문 11절 후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의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자"는 말씀대로 행할 뿐 아니라 온전하게 변화된 사람입니다. 말씀을 온전히 이루어 세상과 구별되며,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처럼,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는 그 깊이가 다릅니다. 성결을 이룬 사람들 중에서도 영의 사람과 온영의 사람의 깊이가 다른 것과 비슷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의로운 차원을 넘어, 진리에 속한 모든 분야를 두루 갖췄을 때 "거룩하다"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행하면서 깨우치는 만큼 성령의 감동하심 속에 주님의 마음과 성품을 닮아갑니다.
주님의 마음과 성품을 닮으면, 말이나 행동이 품위 있고 아름답게 나옵니다. 선에 속한 지식과 주의 교양을 갖추어 말과 행실에서 책잡을 것이 없게 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상황에 처해도 하늘의 지혜를 받아서 경우에 맞게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16절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의로우며 더 나아가 거룩함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거룩하게 산다는 것이 자기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죄악과 접하기 싫다 해서 세상과 분리되어 살 수는 없으며, 자신이 원치 않아도 악한 것을 보고 듣기가 쉬우므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와 악에 무감각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죄를 지적하는 교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 설령 교회에서 죄를 지적한다 하더라도, 성도들이 죄에서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들을 때 양심에 찔리기는 하지만, 결단하여 돌이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지옥이 무서워서 하나님을 떠나지는 못하지만 죄를 버리지도 못하는 상태로, 교회와 세상의 중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설교 중에 죄를 지적받고 마음이 불편해지면, 어떤 사람들은 아예 죄를 지적하지 않는 교회로 옮겨갑니다. 이런 세상이니,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고 죄를 지적하지 못하는 교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교회에서 죄를 지적해도 자기를 지키지 않고 세상에 물드는 사람들은 여전히 불의하고 더러운 채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의롭고 거룩하게 자신을 지키려면,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한 대로, 말씀과 기도 속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러면 선과 악의 갈림길에 섰을 때 말씀으로 분별할 수 있고, 기도의 힘으로 선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선택의 순간에서 불의와 타협하게 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 안의 성령이 탄식하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곤고해지므로, 무엇이 문제인가 돌아보고 회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 하면서 불의를 행하는데 곤고함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신앙입니다. 의롭고 거룩하게 자신을 지켜야 하는데 불의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심히 물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의에서 떠나고자 노력하던 성도들도 한 번 두 번 마음을 내어주기 시작하면, 원수 마귀 사단이 그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각종 예배에 다 나가던 사람이 이제는 간신히 주일과 금요철야만 나가고, 때로는 주일 대예배만 근근이 드립니다. 기도 시간도 한 번 두 번 빠지기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아예 쉬어 버리게 됩니다. 충만함이 없으니 구역이나 기관 모임도 빠지게 되고, 남의 눈을 의식해서 억지로 나간다 해도 이 사람 저 사람과 걸리고 감정이 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영에 속한 일들은 조금씩 줄이고, 반대로 세상을 하나하나 취하기 시작합니다. 충만할 때는 버린 것 같았던 것들을 다시 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으로 빠져들다가 중한 질병이 오거나 큰 시험 환란이 왔을 때, 이때라도 돌이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런 상황에 처하면 회개하여 돌이킬 힘도 없고 하나님 앞에 담대함도 없습니다. 세상 방법을 구하기도 하고, 그러다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생명의 길에서 멀어지는 분이 한 분도 없으시기 부탁드립니다. 날마다 의롭고 거룩하게 변화되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온 영과 혼과 몸을 흠 없게 보존하시기를 바랍니다.

3) 그대로 두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서는 안 됨
본문 말씀에서 여러분이 한 가지 더 기억하실 것이 있습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라는 것은, 어차피 그들은 사망으로 갈 것이니 그냥 내버려 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끊임없이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진리를 먼저 알고 생명을 얻은 여러분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무리 전해도 듣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여러분 편에서 먼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영원히 죽느냐, 영원히 사느냐 하는 영생이 걸린 문제입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기회를 봐서 다시 전도해야 합니다.
방주를 만들던 노아의 마음을 한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4장 38-39절에 보면,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지상의 모든 혈육 있는 생물들이 종류대로 들어가는 방주였으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 거대한 방주를 만드는 긴 세월 동안 노아는 틈이 나는 대로, 곧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평안한 세월이 지속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심판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노아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방주가 점점 완성되어 감에 따라, 노아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게 타들어갔을지 여러분은 상상이 가십니까? 다만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말을 듣고 방주 안에 들어와 구원을 받게 하려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얼마나 간곡하게 권면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노아가 외치고 외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때가 이르고 홍수가 시작되니, 노아는 더 이상 외칠 수가 없었습니다. 방주의 문을 닫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노아처럼 외쳐야 합니다. 먼저 믿고 구원의 방주에 들어왔으니, 온 세상 사람을 이 구원의 방주에 들이고자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노아의 시대에는 듣고 회개한 사람이 없었지만,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아직 구원받을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사랑으로 기도와 관심을 쌓아갈 때 변화될 영혼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번 주간에 몇 번이나 입을 열어 복음을 전했습니까? 실족한 영혼들과 전도할 영혼들을 위해서 하루에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세계 선교를 위해, 민족복음화를 위해 기도할 때 얼마나 간절하게 중심의 기도를 올리십니까?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애를 태우시는지 여러분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배가 떠나기 전에 울리는 마지막 뱃고동처럼 여러분의 외치는 소리가 여러분이 있는 곳곳마다 퍼져나가야 할 것입니다.

2.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이어지는 12절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셨습니다. 천국에는 각 사람이 일한 대로 받는 상이 있고, 사람마다 받는 상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전혀 맞지 않는 말을 합니다. 천국에서 무슨 서열이 있느냐,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공평한 것이다 주장합니다. 상 받기를 사모하는 것은 욕심이며 바르지 않은 마음인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천국에도 분명히 큰 자, 작은 자가 있습니다. 상에도 큰 상, 작은 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되기를 원하시며, 더 큰 상을 사모하여 받기를 원하십니다.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약속을 합니다. "얘들아, 너희가 이번 시험에 80점 이상 받으면 게임기를 사주마. 90점 이상 받으면 신형 컴퓨터를 사주고, 100점을 받으면 방학 때 유럽으로 가족 여행을 가자" 이렇게 차등을 두어 약속을 합니다. 이런 약속을 하는 부모의 소망은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자녀가 다 100점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다 잘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상을 약속하는 것이고, 약속한 상을 모두가 받을 수 있기 원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아는 자녀라면, 이런 약속 주신 부모님께 감사해서 더 좋은 성적을 거두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어떤 대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랑에 보답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녀는 "우리가 부모님께 뭘 얻으려고 공부하는 것도 아닌데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만큼만 공부할래요. 그런 상 안 받아도 괜찮아요." 하면서 부모님의 약속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뭘 얻으려는 욕심도 없고, 부모에게 요구하지도 않으니 철이 든 자녀인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모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고 부모의 사랑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이런 자녀를 보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풍성한 상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상 받을 길을 모두에게 알려 주시며 우리가 다 큰 상을 받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 약속을 고대하며, 기쁨으로 천국길 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의 영광과 서열이 같고 상급도 다 동일하다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게 하여 좋은 상을 받지 못하도록 만들게 됩니다. 그러니 혹여 구원을 받는다 해도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각 사람의 행한 대로, 일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상들을 풍성히 받아 누리므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을 소망하여 성결을 이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천국을 믿고 소망한다면, 또 아버지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성결을 이루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천국을 한 번 본 후로는 세상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새 예루살렘도 아니고 낙원을 보았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천국의 소망이 충만했습니다. 모세는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로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고난 받는 것을 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상이 얼마나 큰지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 상은 썩어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며, 세상 어떤 영광보다도 영광스러운 상입니다.
그런데 천국의 영광에도 해처럼 빛난 영광과 달의 영광이 있고, 별과 별들의 영광이 다르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사람은 약속하신 상을 온전히 다 받을 것이요, 적게 행한 사람은 조금만 받을 것입니다. 한 번뿐인 여러분의 삶을, 기왕이면 해처럼 빛난 영광에 전부 투자하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삶을 마치는 마지막 순간에 내가 정말 잘했구나, 내가 정말 복된 길을 택했구나. 하며 영원히 감사의 찬송을 드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9-05-11 오후 10:08:07 Posted
2009-07-20 오전 10:47:10 Updated
 

요한계시록 강해(95)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2009.08.24 13:30 | 요한계시록 강해 | 닛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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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95)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이재록 목사 | 2009-04-24 | 계 22:6-10 
 
지난 시간에 본문 6절을 말씀드리다가 마쳤습니다. 이번 시간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6절에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로 하여금 장차 이뤄질 일들을 힘써 전하게 하십니다. 그 말씀은 모두 신실하고 참된 말씀이며, 듣는 사람들을 깨우쳐서 가치 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믿지 않는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증거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나타내 보이십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삽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셨고, 23절에는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진실로 믿는다면, 불법을 행하고 죄 가운데 살 리가 없습니다.
   또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심을 때,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을 믿는다면, 심는 것에 인색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알려 줘도, 믿지 못하면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천국의 상급보다는 눈앞의 유익을 구하게 되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아 살게 됩니다.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아무리 표적을 보아도 마음에 믿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 믿게 하시려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어 깨우치고 또 깨우쳐 주십니다. 그래서 본문 6절에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많은 선지자들에게 천사들을 보내셔서 앞일을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들에게 필요에 따라 앞으로의 일들을 미리 알려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은 반드시 그대로 성취됩니다.
   그런데 신명기 18장 21-22절에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했습니다. 이 육의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서는 결코 앞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악한 영들 역시 앞으로 될 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악한 영들도 영의 세계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지난 일은 알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악한 영과 교통하여 예언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은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단지 확률에 의존하는 것일 뿐, 정확하게 앞일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알려 주실 때라야만 미래를 정확히 예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생각 속에서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함 속에서 영이신 하나님과 영으로 교통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선지자들의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아모스 3장 7절에도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종" 역시 영적인 자격을 갖춘 참된 종을 말합니다. 참된 종이란 자기 의사가 없이 주인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들이며, 생명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선하고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때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게 됩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이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동방의 박사들도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니 구세주의 탄생을 미리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한 마음을 보시고 앞일을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2. 내가 속히 오리니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7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속히 오리니"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는 말씀을 드러내어 설교하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는 것은 성경에 확실히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의 신랑이 되시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면, 그 사람이 아직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을 잘못 적용하여 그릇된 길로 가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곧 오신다면 지금 열심히 살 필요가 없구나, 적당히 살아도 되나보다' 생각하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당장 해야 할 자신의 의무를 뒤로 하고, 불성실하게 살아가므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잘못 적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마땅히 선포해야 할 말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겠느냐'는 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선포하는 것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혹여 그 말씀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바르게 깨우쳐 주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운 것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은 무절제하거나 방탕하게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다듬어 더욱 반듯하고 정결하게 살아갑니다. 마음을 더 거룩하게 하고, 온 집에 충성하면서, 거룩하신 주님의 신부로 단장합니다. 성도들은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이 말씀을 더욱 열심히 전하며 서로 격려하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정녕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곧 다시 오신다는 말을 들을 때 행복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 날을 얼마나 자주 떠올려 보십니까? 주님께서 임하시는 그 순간, 공중에 우렁찬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영광의 구름 속에 주님께서 임하십니다. 천군 천사와 수많은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공중에 임할 때, 우리의 몸은 순간에 신령한 몸으로 변하여 하늘로 들려 올라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이러한 감동의 순간을 떠올리면, 밤잠을 설칠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릴 것입니다. 그런 분이라면 '내가 빨리 주님 맞을 준비를 마쳐야지, 어서 속히 신부 단장을 끝내야지' 생각하면서,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살다가 갑자기 주님을 맞이하게 된다면, 큰일입니다. 만약에, 앞으로 일주일 후에 혹은 한 달 후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봅시다. 하지만, 그 시점을 알았다고 해서 남은 시간 동안 신부단장이 온전히 되겠습니까? 아무리 조급하다 해도, 신부단장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지금까지 성결을 이루기 위해 날마다 부르짖어 기도해 왔으니, 이 사실을 절실히 느끼실 것입니다. 영적인 신부단장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여인들이 결혼할 때도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준비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당시만 해도, 부모님들은 딸이 태어나면 그때부터 시집보낼 준비를 했습니다. 빠듯한 살림 속에서 비단이나 가구 등의 혼숫감들을 틈틈이 마련해 두고자 했던 것입니다. 육의 혼인을 준비하는 신부단장도 이렇게 정성들여 하는데, 하물며 우리 영의 신랑과 혼인 잔치를 하려면 얼마나 정성껏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속히 다시 오실 주님을 널리 선포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님이 곧 오신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신랑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이렇게 외치고 또 외치는 것입니다.
  
   3.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8-9절에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했습니다.
   요한은 깊은 계시의 말씀들을 받고 너무나 감격스러운 마음에 자신을 안내해 준 천사에게 절을 합니다. 그러자 천사는 자신에게 경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했습니다. 요한이 보고 들은 모든 섭리와 천국의 영광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도, 독생자를 주셔서 구원하신 분도, 천국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선한 것이 있어서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주 안에서 사명을 감당하다 보면 칭찬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찬양팀이 특송을 충만하게 하면, 열정적인 박수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는 세상 가수들에게 박수 치는 것처럼 '노래를 잘했다'고 칭찬하는 박수가 아닙니다. 그 찬양을 통해 은혜와 감동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수고해서 힘껏 준비한 찬양팀에 대한 격려와 감사의 표현도 담겨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은혜와 감동은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입을 수 있는 것이며,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한 사람이 '내가 이렇게 잘했다' 하고 교만해지거나, 스스로 영광을 누리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찬양하는 사람의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때 이것이 참으로 천국의 상급이 됩니다.
   이것은 범사에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했습니다. 구역장이 심방을 해서 양 떼가 은혜를 받았다면,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여 양 떼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수십 년 동안 변함없이 봉사하여 교회에서 상을 받았다면,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충성할 수 있는 건강과 성실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간증하는 것도 자기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중심으로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도 감사의 조건과 영광 돌릴 조건을 여러분의 삶 속에 더욱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4.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10절에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했습니다.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은 좁게 보면 요한이 기록한 계시록의 말씀이지만, 넓게 보면 성경 66권의 말씀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성경의 모든 말씀을 보고, 듣고, 전파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비밀한 것을 알려 주시면서 종종 "공개하지는 말라" 하시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 12장 4절 전반에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시는 이유는 아직 그 비밀을 드러낼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룰 때는 가장 적절한 때와 시점이 있습니다. 그때가 무르익기 전에는 아무리 중요한 예언을 한다 해도 유익이 없고, 오히려 불필요한 핍박만 불러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앞일을 알려 주신다 해도 필요한 순간이 되기까지는 선포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는 세계와 국내의 정세나 교계의 일들을 밝히 알려 주십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즉시 선포하기도 하지만, 그러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제 주변의 몇몇 분들과만 대화하고, 때가 되기까지 함구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구체적인 내용들을 설명한 문장에서 중요한 단어의 첫 글자만 따서 주보에 실었던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계의 비밀한 일들에 대해 알려주실 때, 처음부터 모든 내용을 깊이 있게 풀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천국의 단계를 풀어 주실 때에는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점점 더 깊이 풀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3단계로 풀어주셨다가, 성도님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 성장하자 좀 더 상세하게 5단계로 다시 세분해 주셨습니다. 또 어떤 내용들은 밝히 알려 주시면서 "아직은 함구하라" 하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가 되어 어떤 것을 "선포하라" 하시면, 저는 반드시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게 될 줄 안다 해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그 결과는 우리에게도 반드시 축복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의 말씀도 이 마지막 때에 인봉하지 말고 널리 선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인봉해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들을 사람의 생각 속에서 임의대로 해석하여 잘못 적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그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모른다고 해서 '성도님들도 그 말씀을 읽으면 안 됩니다' 하고 막을 수는 없습니다. 성도들이 안 배워도 되는 내용이라면, 하나님께서 왜 성경 66권 가운데 두셨겠습니까?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교과서 한 권 전체가 시험 범위라면 전체를 다 가르쳐 줘야 합니다. "나도 이 부분은 잘 모르니까 너희도 공부하지 말고 그냥 넘어가라" 한다면, 학생들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겠습니까? 책임감 있는 선생님이라면, 자신이 모를 때는 배워서라도 가르쳐 줘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양 떼를 가르치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라도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내용이라면, 하나님께 금식하고 철야하며 매달려서라도 깨우침을 받아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가르침 받는 사람들의 영안이 열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 바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2) 때가 가까우니라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봉인하지 말라" 하신 것은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때가 가깝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간 경작의 기간이 거의 다 찼다는 뜻입니다. 이는 성경 곳곳에 기록된 마지막 때의 징조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4장 12절에는 마지막 때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셨고, 14절에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셨습니다. 또 다니엘 12장 4절에는 마지막 때에 대해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말씀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말씀들을 통해 경작의 마지막 날이 매우 가까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깨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마지막 때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한계시록 강해를 통해서 마지막 때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더욱 실감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처럼, 인류 역사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바로 때가 가깝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둘째로, '때가 가깝다는 것'은 개인적인 의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 그 사람에게는 그 순간이 마지막 심판의 때가 됩니다. 시편 90편 10절에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했습니다. 이처럼 인생은 짧고, 자신이 언제 죽을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그나마도 없습니다.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불러 가시면, 그 사람의 인생은 끝이 납니다. 설령 인류의 역사가 수천 년 더 이어진다 해도,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람은 꼭 늙어서만 죽는 것도 아닙니다. 한창 일할 젊은 나이에, 혹은 어린 나이에도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갑자기 세상을 뜨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수명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천 년 전의 사람들이나 지금의 우리들이나 마지막 때가 가깝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라도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때가 가깝다는 말씀을 널리 선포하는 것은 이를 듣고 깨닫는 사람마다 마지막 때를 잘 준비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보면,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영적인 잠에 빠진 사람들은 주님께서 더디 오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갑자기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지 못한 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성도들에게는 주님께서 갑자기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빛 가운데 살면서 준비하게 하시다가, 기쁨과 감격으로 주님을 맞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모두가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중심을 다해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랑이 되시는 주님을 만날 때 큰 영광을 누리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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