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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170)-모든 탓을 라반에게 돌리는 야곱 창세기 강해(170) 이재록 목사 | 2005-04-22 | 창 31:1-16 창 31:1-16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떼 있는 들로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찌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그 양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었더라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서론 야곱이 점차 부를 쌓아 가게 되자 라반과 그의 아들들은 야곱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라반의 아들들의 말과 라반의 얼굴에서도 곧바로 드러나고 있지요.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말하였고 라반 역시 안색을 보니 예전에 야곱을 대하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자기 유익에 맞지 않으니 즉시로 이러한 모습이 나왔던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유익에 맞지 않는 일 앞에서 금방 안색이 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면서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지요. 혈기를 내며 폭발해 버리는 경우도 있구요. 여러분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지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인은 얼굴색이 변한 것을 모르고 언성을 높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감정 섞인 표정과 말에 가시가 돋친 것이 느껴지게 되지요. 이렇게 안색이 변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안에 감정이 있고 악이 있음을 스스로가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3:9 전반절에도 보면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말씀했지요. 그렇다하여 상대의 얼굴 표정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속에 있는 것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무엇보다 사람의 중심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라반과 같이 속에 있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내고 마는 수준에 있는 사람이라면 선의 단계에 비추어 볼 때에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라반의 아들들이 했던 말로 인해 야곱과 라반 사이가 더욱 금이 가게 되었던 것처럼 자신의 입술의 말이 사람들 사이에 화평을 가져다주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화평을 깨는 말인지도 돌아보아야 하지요. 우리가 고의적으로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결국 마음에 있는 것이 입술로 나오기 때문에 마음에 있는 악으로부터 자신도 모르게 이간시키는 말, 상대를 상처 주는 말, 지시하고 명령하는 말 등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같은 말이라도 해야 할 자리와 하지 말아야 할 자리를 분별하고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분별하며 꼭 필요한 말인가 아닌가도 분별하여 말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말의 실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늘 진리의 선한 말만을 낼 수 있습니다. 본론 1. 모든 탓을 라반에게 돌리는 야곱 마침내 하나님께서도 야곱으로 하여금 고향 땅으로 돌아가도록 지시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정하신 '때'가 된 것이지요.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갈 본격적인 준비를 하면서 먼저 라반의 딸들이자 자신의 아내인 라헬과 레아에게 상황을 설명합니다. 이때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정당성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들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고 말하면 될 텐데 라반의 부당함을 거듭 강조하였습니다. 라반을 위해 힘을 다해 섬겼음에도 라반이 자신을 부당하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모든 탓을 라반에게 돌리며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하고 있습니다. 7-9절에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말합니다. 라반은 부당하고 자신은 정당하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셨고 라반의 짐승을 빼앗아 자신에게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분명 자신의 지혜 가운데 꾀를 내어 라반의 재산을 가지고 자신의 부를 쌓은 것임에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요, 섭리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야곱이 부를 쌓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일이지만 야곱이 사용한 방법까지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야곱은 자신이 사용한 방법을 마치 하나님께서 친히 보장하시고 역사하신 것처럼 말합니다. 야곱이 좀 더 선한 마음을 가졌다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굳이 라반의 부당함을 더 크게 부각시켜서 말하지는 않았겠지요. 또한 자기 생각과 지혜 가운데 한 일을 마치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한 것처럼 포장하여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구요. 오늘날도 이런 모습을 흔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굳이 다른 사람의 부당함까지 들추어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상대방의 허물이나 잘못을 더 크게 부각시키고 드러내어야 상대적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확실하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또는 "다른 사람은 이렇게 하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라든가 "다른 사람도 다 그러는데 왜 나만 잘못되었다고 하느냐"는 등 자신을 지키고 정당화하기 위해 쉽게 다른 사람의 탓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행동이 마치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 행한 것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못된 일은 무조건 남의 탓이고 자기에게 유리한 일은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주장해서 밀고 나간다는 말입니다. 야곱에게서도 두 가지 경우가 다 나타나고 있습니다. 라반의 부당함을 드러냄으로 모든 탓을 라반에게 돌림과 동시에 자신의 행동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 속에서 지킴받고 보장받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2. 꿈을 통해 야곱이 부(富)를 쌓아 갈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 10-13절에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었더라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이러한 꿈 이야기만 들으면 양 중에 얼룩무늬 있고 점 있으며 아롱진 것이 야곱의 소유가 된 것이 마치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 자신의 지혜에서 나온 자기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얼룩무늬 있고 점 있으며 아롱진 것이 그의 소유가 될 것을 꿈으로 보여 주시며 야곱이 자신의 지혜 가운데 방법을 동원하여 부를 쌓아가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야곱이 그동안 성실과 행함으로 심었던 것에 대해 공의 가운데 합당한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섭리 가운데 야곱이 축복을 받도록 그와 함께하시며 그를 지켜 주시기는 했지만 야곱이 행한 방법까지 다 주관하신 것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다만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인 바라봄의 법칙을 자기 나름대로 활용하여 부를 쌓아 갈 수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알 수가 있습니다. 라반과 함께하면서 그처럼 연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아직도 온전하지 못한 가운데 자기 생각과 자기 방법을 동원해 나가고 있지요. 예를 들어 야곱이 지금 고향을 향해 떠나려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처신이 옳았던 것은 아닙니다. 야곱이 급하게 떠나려고 하는 것은 라반이나 라반의 아들들과의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을 피하려는 의도가 크지요. 즉 먼저 라반의 마음을 풀어 줄 방법이나 그와 화평함을 좇을 선한 방법을 찾기보다는 어떻게든 자신의 것을 지키면서 동시에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원함으로 당장 떠나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좇는다고 하지만 그 내면에는 자기 생각과 계획이 있었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처럼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야곱이 도망하듯 라반에게서 떠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라반과의 관계도 화평함 속에서 아름답게 마무리를 한 후에 떠났겠지요. 물론 야곱이 라반과의 화평을 좇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유를 어느 정도 다시금 라반에게 내어주어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욕심 많고 이미 마음이 상해 버린 라반이 야곱을 순순히 보내 줄 리가 없을 테니까요. 야곱은 그렇게까지 해서 라반과 화평을 좇으려는 마음보다는 자신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다 보니 야곱은 라헬과 레아의 동의를 얻자마자 곧바로 자식들과 아내들과 모든 소유를 챙겨서 라반에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길을 떠나지요. 이때 라헬과 레아가 남편 야곱의 제안을 순순히 따랐던 데에도 사실 숨은 뜻이 있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라반의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비진리 또는 야곱의 어떠한 비진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야곱의 아내들의 비진리를 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내 마음도 그렇지 않은가를 살피고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재산으로 인해 야곱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는 라헬과 레아 14-16절에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말씀합니다. 라반이 자신들에게 어찌 행했든 그래도 아버지인데 라헬과 레아는 마치 감정 있는 사람처럼 아버지 라반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그들이 불만을 가지게 된 주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지요. 바로 재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돌아올 분깃이나 유업이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지요. 더욱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라는 말을 보면 재물에 대한 강한 집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라헬과 레아가 남편 야곱의 편을 전적으로 들어 주고 있는 것이 단순히 라반의 부당함이나 야곱의 정당함을 인정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지요. 겉으로는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하며 남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좇으라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지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마음 속에는 자기 유익을 구하며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부를 지키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남편 야곱과 아버지 라반을 비교해 볼 때 야곱 편에 서는 것이 자신들에게도 훨씬 유리하고 득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지요.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도리보다도 자기 유익을 먼저 앞세우고 있는 모습입니다. 만약 라헬과 레아가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다하는 사람이었다면 떠날 땐 떠나더라도 이처럼 아버지에 대해 단번에 등을 돌리기보다는 남편과 아버지를 화해시키는 길을 찾았겠지요. 이렇게 떠나고 나면 남편과 아버지의 사이가 완전히 금이 간다는 것을 잘 알 테니 말입니다. 본인들도 다시 아비의 고향에 올 수도 없을 것이구요. 하지만 라헬과 레아는 선이나 도리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고 자신의 유익에 맞도록 적극적으로 남편의 편을 들어 주지요. 4.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盜用)하고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야... 겉으로 볼 때는 똑같이 행동을 한다 해도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의 속마음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일을 이룬다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이때 단지 순수한 의도에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을 하느냐, 그렇지 않고 다른 의도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지요. 또는 자신의 것을 취하고 자기를 지키고자 하나님의 이름을 파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하며 강압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감으로 결국 화평도 깨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게 되기도 하지요. 또 어떤 일에 대한 책임이 돌아오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었기에 내가 이렇게 한 것이다" 하며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신을 정당화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하고 망령되이 일컬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의견을 하나님의 뜻이라 하면서 강압적으로 밀고 나가는 일은 없어야 하지요. 제가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많이 알고 있고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인가를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일꾼들이나 성도들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것을 알려는 주지만 본인 스스로가 자유의지 가운데 선택할 수 있도록 하지요. 이처럼 사심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이름을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데 급급합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지요. 말로는 "이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고 자신의 명예가 드러나기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권세를 자신이 쓰려고 하고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받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교만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 해도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과 목적인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면 항상 열매가 나타나야 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면 그 말씀이 보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 6:1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말씀한 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하지요. 5. 깊은 내면에 자기 유익을 구하며 자기 생각과 방법을 좇아 행한 야곱 그래도 믿음이 있어서 일꾼이 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일로 어떤 선택을 할 때 일부러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하려는 경우나, 일부러 자기 유익을 구하려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며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쪽을 택한 것이라 하지요.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되는 쪽으로 일을 추진해 나갑니다. 그런데 막상 결과를 놓고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나오지 않고, 그 일로 인해 화평이 깨어지며 상대가 힘들어하고 고통을 당한다면 자신을 한번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진리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 안에 있는 사람은 늘 자신이 하는 일은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진리라는 것이 여러분의 한계 속에서 틀로 만들어 놓을 만큼 그렇게 좁고 얕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진리는 너무나 깊고 넓고 무한하기 때문에 자신의 좁은 틀 안에 진리를 짜 맞추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요. 예를 들어 사각형이 진리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이 아는 정사각형만을 사각형이라 생각하며 진리라 고집합니다. 그러나 사각형에는 정사각형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 안에서의 진리의 틀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늘 더 넓고 깊게 보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는 이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데 상대방은 저것을 진리라고 말한다면 적어도 왜 상대가 그것을 진리라 주장하는지 상대방의 입장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요. 그런데 여전히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만을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진리 안의 자유함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진리의 틀을 만들면 화평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의 틀로 인해 자신을 얽어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틀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영을 향해 변화되어 가는 사람이라면 요 6:63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말씀한 대로 많은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주어야 할 텐데 자기적인 진리의 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판단과 정죄로 인한 고통을 주게 되지요. 예를 들어 율법을 가지고 만들어 놓은 자기적인 진리의 틀 안에 매여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눈에는 간음한 여인은 당장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 대상이었지요. 그러나 율법을 뛰어넘는 사랑의 눈을 가지신 예수님에게는 그 여인이 정죄받고 죽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이켜서 죄사함받고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이처럼 진리를 적용함에 있어서도 내 마음이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닮았느냐에 따라 정확하게 주님의 뜻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진리의 틀이 있다 하여 하나님께서 그것을 악하다 하지는 않으십니다. 물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는 마음에 할례는 하지 않은 채 행위적인 율법을 가지고 틀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했기에 그들에게는 사실 진리의 틀이라는 말 자체가 맞지 않지요. 그래서 우리 주님은 화 있을 진저 이 외식하는 자들아 말씀합니다. 이와는 달리 온전히 영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에 있어서 때로는 아직 온전하지 못한 가운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리 안에서 스스로 틀을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악하다 말씀하지는 않으신다는 말이지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정말 악한 의도에서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 온전하지 못한 가운데서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진리의 틀이 있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이 마음에는 할례하지 않은 채 행위적인 율법을 가지고 진리라 하면서 틀을 만들어 놓은 경우와 악을 벗고 온전히 영으로 들어가기 위한 과정에서 스스로 진리의 틀을 만들어 놓은 경우와는 분명히 구분을 해야 합니다. 물론 진리의 틀도 하나님 앞에서는 합당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영으로 이끄시고자 연단을 허락하셔서 그 틀을 깨도록 하시지만 사람 편에서 판단,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인도해 가시도록 해야 하지요. 야곱도 스스로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잘 좇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자신이 축복받고 때가 되어 고향을 향해 떠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이것이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진리가 진리와 교묘하게 섞이면서 자신의 행동을 진리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도 속는 경우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여전히 그 깊은 내면에 자기 유익을 구하며 자기 생각과 방법을 좇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음에도 자기 스스로는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국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철저히 깨어지는 역사가 있도록 허락하신 것이지요. 이렇게 야곱이 자기 생각과 방법을 동원하여 고향을 향해 떠났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가 바로 드러납니다. 이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결론 여러분이 마음의 악을 발견하여 벗고 성결을 향해 달려갈 때 크고 굵직굵직한 것들을 발견하여 버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자기 스스로는 물론이고 누가 보아도 당연히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쉽게 발견할 수가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신속히 버려 나갈 수가 있지요. 이렇게 하나하나 버려 나가다 보면 이제 어느 정도 악의 모양을 벗고 스스로 볼 때나 다른 사람이 볼 때도 경건한 모양을 갖추게 됩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죄와의 싸움을 휴전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악의 모양이 드러나지 않고 주변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인정받는 위치에 섰다싶으니 더 깊고 세미한 악의 모양을 발견하여 벗어 버리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게 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안주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신 것은 자기 보기에 이 정도다 싶을 때까지만 악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지요. 악이란 그 속성상 조금만 뿌리를 남겨두어도 다시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모양을 온전히 뽑아내기까지는 결코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아니 됩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생각이 들 때가 오히려 더욱 깨어 기도하며 자신을 발견하여 변화되어 가야 할 때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신앙의 성장이 정체된 채 미지근한 신앙으로 빠질 수도 있고 오히려 다시금 육으로 빠져들 수도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온전히 깨어져 변화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딤전 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하셨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불같은 기도의 능력 가운데 쉬지 않고 기도해 가면 반드시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영의 자녀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열망과 소망을 잃지 말고 더욱 뜨겁고 충만하게 여러분의 목표를 향해 달려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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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169) - 욕심 때문에 야곱의 꾀에 넘어간 라반 창세기 강해(169) 이재록 목사 | 2005-04-15 | 창 30:37-31:5 창 30:37-31:5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떼의 눈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떼 있는 들로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찌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서론 지난 시간에는 '바라봄의 믿음의 법칙'에 대해 설명을 드렸는데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바라봄의 대상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야곱은 사랑하여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인 라헬이 있음으로 인해 연단 중에라도 감사하며 승리할 수가 있었지요. 이처럼 여러분에게도 소망의 목표나 대상이 있을 때 능히 연단 중에라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승리해 나가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소망의 목표나 대상이 결코 이 세상의 헛된 것이 되어서는 안 되지요. 이 세상의 것을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소망과 기쁨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절망과 고통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당장에는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 같지만 어차피 이 세상 육의 것들은 변질되기 때문에 온전한 소망의 목표나 대상이 될 수가 없지요. 오직 바라봄의 대상은 주님이 되셔야 하며 새예루살렘이 여러분의 소망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해 감에 있어서 가까이 바라보고 닮아갈 수 있는 신앙의 본이 될 만한 대상도 필요하지요. 그러한 대상이 있음으로 인해 그 모습을 보고 배움으로 한결 수월하게 믿음의 단계들을 통과해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믿음의 선진들에 대해 기록해 놓으심으로 후대에 믿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본이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님을 대신하여 양 떼를 갈무리하도록 주의 종들을 목자로 세워 주신 것도 이와 같은 목적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이라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목자로서 양 떼들에게 신앙의 본이 될 수 있어야 하지요. 단지 말로만 진리를 잘 가르친다고 해서 좋은 목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행함의 본이 되며 믿음으로 양 떼들을 인도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양 떼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닮아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신앙의 푯대와 같은 역할을 해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역할을 잘 감당해 준다면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이고 양 떼들로부터도 당연히 사랑을 받습니다. 모든 주의 일꾼들과 성도님들도 서로서로 본받고 닮아 갈 수 있는 모습이 된다면 서로 간에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발견하고 변화되며 상대의 좋은 점을 닮아 갈 수 있으니 얼마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빌 3:17에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말씀합니다. 바라봄의 법칙이란 단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닮아 간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주는 법칙이지요. 그러므로 바라봄의 법칙은 많은 분야에 적용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사람을 보고 배우며 항상 선한 것을 듣고 선한 것을 말하려고 노력하면 자신도 더 쉽게 선을 이뤄낼 수 있지요. 반대로 늘 불평, 불만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 보면 자신도 불평하는 말을 배우게 되고 짜증을 잘 내는 사람을 가까이하다 보면 자신도 짜증스러운 말투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어떤 사람을 가까이하며 보고 배우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바라봄의 법칙은 영적인 믿음을 갖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삼년 반의 가뭄 중에 비를 끌어 내리기 위해 기도할 때도 그는 바다에서 일어나는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바라본 대로 큰 비가 내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 선지자도 넘실거리는 홍해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기에 바다가 갈라지고 길이 열리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육으로 바라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한 바다였지만 모세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기에 바다 가운데로 길이 났다는 사실입니다. 본론 1. 욕심 때문에 야곱의 꾀에 넘어간 라반 라반이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하며 야곱이 원하는 대로 품삯을 정하라고 했을 때 야곱은 육으로 볼 때는 참 어리석은 제안을 합니다. 하지만 야곱이 이렇게 제안을 했던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계산해 넣은 것이었으며 결국 야곱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끌어가지요. 결과적으로는 라반이 야곱의 꾀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름대로 지혜가 있다고 하는 라반이 왜 야곱의 꾀에 넘어가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약 1:14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는 말씀처럼 자신의 욕심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마음에서 욕심만 버려도 사리 분별을 정확히 할 수 있는 눈이 떠질 수 있는데 라반은 그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욕심을 좇았기에 그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 보려는 마음조차 갖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은 야곱은 가축들에게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하여 막대한 부를 쌓아 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때 야곱의 행동을 살펴보면 그가 단지 자신의 정당한 품삯만을 보상받으려는 순수한 마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지요. 결코 선한 마음이라 할 수 없는 모습이 나옵니다. 야곱이 사용한 방법은 가축들이 물을 먹으러 와서 교미를 할 때 알록달록한 무늬의 나뭇가지를 보게 함으로써 그때 밴 새끼들이 얼룩얼룩하거나 점 있고 아롱진 것으로 나오도록 하는 것이었지요. 40절에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했습니다. 여기서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했다는 것은 흰색만을 띠고 있는 라반의 양들로 하여금 평상시에도 계속해서 얼룩 있고 검은 빛 있는 것을 보도록 만들었다는 뜻이지요. 새끼를 밸 때만 알록달록한 나뭇가지를 보게 한 것이 아니라 라반의 흰 양들로 하여금 평상시에도 계속해서 무늬 있고 검은 것을 보게 함으로써 라반의 양들이 바라봄의 법칙에 따라 더욱 확실하게 입력되어 무늬 있고 알록달록하며 점 있는 새끼들을 더 많이 낳도록 했습니다. 이어지는 41-42절을 보면 야곱이 자기 양과 라반의 양이 섞이지 않게 했던 이유를 알게 됩니다.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말씀한 대로 야곱은 바라봄의 법칙을 교묘하게 적용하여 실한 양은 자신의 것이 되게 하고 부실한 양은 라반의 것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사실 야곱이 단순히 그동안 품삯을 여러 번 변역하며 자신을 속이고 일만 시킨 라반으로부터 자신의 정당한 대가를 취하려고만 했다면 그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정당한 품삯을 받으려는 차원을 넘어 라반의 실한 가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야곱이 교묘한 방법까지 동원한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동원한 모습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연단하여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되도록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자기 생각을 동원한 야곱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한다는 것은 전폭적인 의지와 의뢰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 하면서도 늘 자기 생각과 자기적인 방법을 동원해 갔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을 때도,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 기도를 받을 때도 또한 지금 자신이 노동한 대가에 대한 값을 찾을 때도 자기적인 육의 지혜가 동원되었지요. '어차피 처음부터 장자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기로 정한 것이니까…' '어차피 장자에게 주어지는 축복 기도는 내가 받아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어차피 나는 내가 일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찾아오는 것이니까…' 야곱은 이렇게 이유를 댈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더더욱 자기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되었지요.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어차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자신에게 돌아올 장자권이었고, 어차피 자신에게 돌아올 장자의 축복이었으며, 어차피 하나님의 지키심과 도우심으로 라반으로부터 정당한 대가를 찾아올 것이었다면 그 방법도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동원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는 것과 자기 생각을 동원하는 것과는 하나님의 역사가 전혀 다릅니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한 것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지만 시작과 끝 모든 것을 생각을 동원해 버리면 "네 생각대로 해라" 하나님이 하시고 보시기만 하지요. 그러니까 기적을 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어떤 역사를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면서도 막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은 자신의 생각과 지혜를 동원하여 사람의 방법을 쓴다면 이는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람의 방법을 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야곱의 경우도 그가 사용한 바라봄의 법칙 자체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지혜였지만 그것을 적용해 가는 방법은 온전히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야곱의 입장에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라반으로부터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이런 방법을 썼습니다"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처한 상황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에서도 아브라함을 축복해 가셨던 것을 봅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기는 일이 있었지요.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꿈으로 역사하여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순순히 돌려보내도록 하십니다. 이에 아비멜렉은 사라만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양과 소와 노비까지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지요. 육적으로 보면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오히려 축복으로 돌아오더라는 말입니다. 이삭의 경우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땅에 거하는 그에게 한 해 농사의 수확을 무려 백 배나 더하심으로 거부(巨富)가 되도록 역사하셨지요.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들의 눈치를 보며 농사를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축복 주시기로 정하시니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백 배의 축복이 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상황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역사해 주시면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반드시 축복받고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축복을 받은 것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야곱과 함께해 주셨기 때문이지만 그가 사용한 방법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43절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 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말씀한 대로 야곱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지혜로 축복을 받아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3. 야곱에게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라반과 그의 아들들 그러자 라반과 그의 아들들로부터 시기, 질투와 견제가 시작됩니다. 창세기 31:1-2에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했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살면서 자신을 낮춰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처가살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기도 했지만 마치 품꾼과 같은 입장에서 일을 해야 했기에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요. 그러다보니 늘 자신을 낮추면서 눈 밖에 나지 않아야 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의 겸비함이나 섬김이 아니라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는 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점점 재산이 늘어나고 거부가 되어 갈수록 라반과 그의 가족들의 눈치도 더 살펴야 했습니다. 자신이 부자가 되어 가는 것을 볼 때 욕심이 많은 라반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늘 라반 쪽의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야 했습니다. 어느 날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에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살펴보니 자신을 대하는 라반의 안색이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육의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육의 사람들은 상대의 잘되는 것을 함께 기뻐해 주지 못하며 혹여나 자신의 것이 침해당하지는 않을까 하여 서로를 견제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도 자신의 부가 늘어날수록 라반을 경계하는 모습이었고 라반과 그의 아들들도 야곱의 부가 늘어날수록 야곱을 경계하는 모습이었지요. 그러니 야곱과 라반의 사이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금이 가며 화평이 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결국 서로가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육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진정 상대가 잘되기를 원하며 상대가 잘되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 모습이신지요?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까지는 괜찮겠다.' 했는데 그 이상을 넘어가게 되니 혹시 그때부터는 견제하고 경계하지는 않았습니까? 마음 안에서 시기, 질투하는 마음을 온전히 벗어내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영적인 사랑이 임했을 때만이 진정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좇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육의 사람은 설령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사람들 사이를 이간하는 말이나 행동이 나오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라반의 아들들이 바로 그러했지요. 만약 라반의 아들들 중에 선한 아들이 있어서 아버지 라반에게 야곱에 대해 좋은 말, 선한 말을 했다면 야곱과 라반의 사이가 금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평하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야곱의 소유가 그처럼 늘어났다면 라반의 소유도 함께 늘어났겠지요. 물론 야곱이 꾀를 써서 자신의 소유를 더 늘려 가기는 했지만 라반의 소유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의 소유가 늘어나는 것만 말하지 말고 라반의 소유도 함께 늘어난 것에 대해 말한다든지 그동안 야곱으로 인해 자신들이 축복받은 것에 대해 상기시켜 줄 수도 있었겠지요. 라반의 아들들이 좀 더 선했다면 '그동안 야곱이 우리 집을 위해 수고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는가 보다' 하며 야곱을 좀더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라반의 아들들은 오히려 야곱이 자기들의 아버지의 소유를 빼앗았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니까 점점 사이가 나빠질 수밖에 없고 나중에는 야곱이 삼촌에게 말도 하지 않고 도망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언 17:9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했는데, 라반의 아들들은 사랑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야곱과 라반 사이를 더더욱 이간시키고 깨뜨리는 자들이 되었지요. 이제 야곱은 더 이상 라반과 함께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3절을 보면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시며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알려 주십니다. 그렇다 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에게 나타나 음성을 주신 것은 아니며 다만 야곱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본격적으로 고향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합니다. 먼저 라헬과 레아의 마음을 온전히 자기 편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4-5절에 "야곱이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 있는 들로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정당성과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으로 자신이 오늘날 이같이 축복을 받게 되었음을 부인들에게 설명합니다. 마침내 야곱은 자식들과 아내들과 모든 소유물을 가지고 아버지 이삭이 있는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나게 되는데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결론 야곱이 이처럼 크게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온전해서가 아닙니다. 아직은 자기 생각도 남아 있고 자기 지혜 가운데 나와진 방법도 사용했지만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하시며 그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했습니다. 믿고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야곱이 라반에게 한 제안은 육으로 볼 때 너무나 불리한 제안이었지요. 그런데도 야곱이 이러한 제안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볼 때는 아무리 자신에게 불리해 보이고 상황이 안 좋아 보인다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면 반드시 축복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믿은 것이지요. 물론 야곱이 자신의 지혜 가운데 간교한 꾀를 낸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지만 야곱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신과 함께하시며 축복 주신다는 사실만은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둘째로, 야곱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봉사하며 오직 성실과 책임감으로 일했지요. 비록 그 봉사가 아내를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야곱은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마치 자신의 일과 같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성실함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해 행한 것을 결코 헛되지 않게 하신 것이지요. 야곱이 만약 라반의 눈만 속이려는 마음으로 게으름을 부리거나 꾀를 써나갔다면 야곱으로 인해 라반이 축복을 받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야곱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일단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인정해 주실 만큼 성실과 인내와 정성으로 심고 행했기에 결국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공의에 따라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람 앞에서도 물론이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성실과 책임감 그리고 정성을 인정받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이 심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한 대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믿음과 정성으로 심고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거두게 하시지요.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만큼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일을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도 믿음과 정성으로 변함없이 심고 행하는 분들은 반드시 축복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셋째로, 야곱이 축복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받았을 때 그대로 순종해 나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축복해서 그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시려고 때가 되자 그의 마음을 주관해 주셨지요. 이에 야곱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충분한 부를 쌓을 수가 있었고 정말 때가 되어 "떠나라" 하셨을 때도 즉시로 순종해 떠나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이처럼 여러분도 상황과 조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다보면 어떤 결정을 할 때 '지금인가? 아닌가? 언제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이것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늘 생각해야 하는데 이때 사람의 생각이 들어가서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좇아가게 되면 결국 자기 능력과 한계 안에서만 이루게 되지요. 그러나 성령께서 주관해 주시는 대로 인도받게 되면 이삭이 한 해에 백 배의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사람의 능력과 한계 이상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모든 일을 이룸에 있어서 정도를 걷고 육의 지혜가 아닌 위로부터 난 선의 지혜를 받아 나간다면 반드시 축복을 받게 됩니다. 히브리서 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말씀한 대로 믿음으로, 선으로 바라보는 것마다 실상으로 나타난 바 되어 아버지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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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168)-야곱의 공로를 인정해 주면서 스스로 품삯을 정하라고 말한 라반 창세기 강해(168) 이재록 목사 | 2005-04-08 | 창 30:25-43 창 30:25-43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 또 가로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라반이 가로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가로되 외삼촌께서 아무 것도 내게 주실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라반이 가로되 내가 네 말대로 하리라 하고 그 날에 그가 수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양 중의 검은 자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붙이고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떼를 치니라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떼의 눈앞에 그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서론 마음에 명심을 잘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많은 면에 있어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명심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이 실수한 것에 대해서도 '왜 그런 실수가 났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등을 마음에 잘 명심해 두었다가 다음에 다시는 그런 실수가 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반면에 명심하지 못하는 사람은 실수를 해 놓고도 왜 실수가 나왔는지 돌아보지 않으며 실수된 원인을 안다고 해도 그냥 흘려버리므로 다음에 똑같은 실수가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명심을 잘하는 사람은 한 번 들은 말씀이나 지시 사항을 머리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품고 있기 때문에 설령 머리로는 잊어버렸다 해도 때가 되면 마음에서부터 주관을 받아 정확하게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명심하지 못하는 사람은 머리에 기억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그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실수나 잘못이 나오는 것입니다. 죄를 버리고 성결되어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여 하나하나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과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람과는 육을 벗고 영으로 변화되는 데 있어서도 많은 차이가 납니다. 또한 축복을 받는 경우도 '어떻게 해야 축복을 받는지' 들었던 말씀을 마음에 잘 명심하여 그대로 지켜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축복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말씀 하나만 마음에 명심해도 불의와 타협하거나 욕심을 좇아 정도에서 벗어나서 생기는 손해를 막을 수가 있습니다. 본론 1. 야곱의 공로를 인정해 주면서 스스로 품삯을 정하라고 말한 라반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명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해 놓았기에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자 그의 마음을 주관해 주시지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에게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야곱의 입장에서 그동안 외삼촌의 집을 위해 봉사한 것에 대해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동안 외삼촌의 집을 위해 이처럼 수고하고 봉사했으니 그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어서 나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해서는 라반이 순순히 대가를 주지 않을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야곱은 라반 스스로가 먼저 품삯에 대해 말을 꺼내도록 유도합니다. 야곱은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하며 외삼촌 스스로가 야곱의 수고를 시인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이에 라반도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 하며 자신이 야곱으로 인해 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고향으로 떠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는 사실을 깨달은 라반은 야곱을 어떻게든 좀더 자신 곁에 붙잡아 놓기 위해 어느 정도 야곱의 공로를 인정해 주면서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새로운 조건을 내겁니다. 28절에 "또 가로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창 31:7 전반절에서 야곱이 자기의 아내들에게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말했던 것을 볼 때 라반은 그 전에도 이미 여러 번 야곱의 품삯을 변역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라반은 또다시 야곱에게 이제는 품삯을 줄 테니 좀더 자신과 함께 있자고 합니다. 그것도 야곱 편에서 품삯을 정하라고 했는데 라반이 이렇게까지 나오게 된 것은 스스로 고백했듯이 라반이 지금 누리게 된 부(富)가 바로 야곱으로 인해 얻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라반 편에서는 야곱이 그냥 순순히 놔줄 수 없는 '복덩이'였던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29-30절에 야곱이 라반에게 하는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했습니다. 이처럼 야곱이 성실과 중심을 다한 행함으로 라반의 집을 위해 섬겼기에 하나님께서 야곱의 공력을 따라 라반의 집에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복이 임합니다. 라반도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막상 야곱이 자신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에서 어떻게든 야곱을 붙잡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품삯도 야곱에게 정하라 했던 것이며 야곱에게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하면서까지 어떻게든 야곱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2. 라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안을 하는 야곱 이러한 상황이니 야곱의 입장에서는 라반으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고 품삯을 정하는 협상에 있어서도 이미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 같았으면 자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라반에게 품삯을 청구하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러지를 않고 오히려 육적으로 보면 너무나 어리석은 것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31-33절에 "야곱이 가로되 외삼촌께서 아무것도 내게 주실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 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했던 것이지요. 즉 품삯을 따로 청구한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양과 염소들 중에서 양은 흰 것만 남기고 염소는 흰 것과 검은 것만 남겨서 앞으로 그 중에서 양은 검은 것이나 아롱지고 점 있는 것 염소는 아롱지고 점 있는 것이 태어나면 그것만을 자신의 품삯으로 가지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양은 흰색이 대부분이므로 검은 것이나 아롱지고 점 있는 것이 나오기란 쉽지 않습니다. 또한 염소도 대부분이 흰색이거나 검은색이므로 아롱지거나 점 있는 것은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목축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본다면 라반에게 100% 유리한 제안이며 야곱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어리석어 보이는 제안입니다. 욕심 많고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라반이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너무나도 자신에게 유리한 제안이다 보니 라반은 이를 거부할 수가 없었지요. 야곱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야곱은 자신이 라반에게 순순히 자기 몫을 달라고 해서는 결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의 지혜 가운데 라반이 넘어올 수밖에 없는 꾀를 짜냈던 것입니다. 라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해 보이는 제안을 함으로써 라반이 반드시 그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상황을 만들어 갔습니다. 이 정도 제안이 되어야 욕심 많은 라반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사실을 야곱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 확실한 믿음으로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한 야곱 그렇다면 야곱은 왜 이처럼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해 보이는 제안을 하면서까지 라반으로 하여금 자신의 제안을 수용하도록 했던 것일까요? 이렇게 한다 해도 야곱에게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이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하더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시고 반드시 축복해 주실 것을 믿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야곱이 이러한 제안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지혜를 믿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가축을 치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하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또한 야곱은 이미 라반의 속성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라반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처럼 모든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라반의 간교하면서도 욕심이 많으며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려는 속성을 역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요. 세상에서도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말도 안 되는 속임수에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교묘하고 그럴듯한 속임수로 사람을 속여서 손해를 입히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너무나 엉뚱하고 황당해서 어린아이라도 '이상하다' 생각할 수 있을 만한 속임수에 넘어가 버리는 사람도 있는 것이지요. 조금만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것은 뭔가 이상하다' 하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속임수임에도 불구하고 넘어가 버리고 말더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속임수를 써서 사람을 속이는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욕심을 최대한 자극하는 궤계를 쓰기 때문입니다. 이때 마음에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성적인 판단의 능력이 흐려지면서 욕심에만 마음을 다 빼앗기므로 결국 말도 안 되는 사기에 넘어가게 되지요. 예를 들어, 어디에 투자하면 아주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욕심이 과한 사람은 우선 욕심이 발동되기 때문에 확실히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무작정 돈을 투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속이는 사람들도 이러한 이치를 잘 알기 때문에 그러한 속임수에 넘어갈 만한 사람들만 골라서 접근하는 것을 보게 되지요. 이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사치와 허세를 부리려는 마음을 이용해서 물건을 파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똑같은 물건을 놓고도 오히려 값을 비싸게 불러야 사는 경우가 있다고 하지요. 값을 싸게 부르면 왠지 '싸구려'라고 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물건이라도 비싼 값에 부르면 '이 정도는 돼야 나한테 어울리지' 하면서 산다는 것이지요. 이것도 바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사치와 허세, 허영 등의 비진리의 마음을 이용하여 유익을 보게 되는 경우라 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야곱이 라반에게 했던 제안도 이와 같은 경우이지요. 라반과 같이 욕심 많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사람이 이처럼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안을 거절할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4. 야곱의 제안에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라반 이런 상황에서 라반이 그래도 조금이나마 선한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았겠습니까? 누가 보아도 야곱에게 불리해 보이는 이러한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기보다는 "야곱아, 내가 너의 말을 들어 보니 그 제안은 너에게 너무 불리하구나 그러지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정말 야곱에게 품삯을 줄 마음이 있었다면 "아니다, 네가 나를 위해 그동안 얼마나 수고를 해 주었는데 그럴 수는 없지, 이제부터 나오는 새끼 중에 무조건 반은 내가 가지고, 반은 네가 가지거라" 말할 수도 있었겠지요. 야곱에게 맡겨서 거기에서 불어나는 것 중에 반은 외삼촌, 반은 조카 너 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면 조카도 살고 삼촌도 야곱 때문에 버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라반은 이 제안이 야곱에게 너무나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맙니다. 더욱이 이후에 하는 라반의 행동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기 욕심만을 생각하는지를 잘 알 수 있지요. 35-36절에 "그날에 그가(즉 라반이) 수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양 중의 검은자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붙이고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 했습니다. 그날로 즉시 흰 양과 흰 염소, 검은 염소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가려서 자기 아들들에게 맡기고 자기 아들들이 치는 가축과 야곱이 치는 가축 사이를 사흘 길이 떨어지게 합니다. 이는 '혹시라도 자신의 양이나 염소가 야곱이 치는 것들과 섞여서 그 중에 점 있고 아롱진 것이 나오지나 않을까' 하여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으려는 의도에서였지요. 그러니 이 얼마나 인색한 모습입니까? 어떻게 해서든 단 한 마리라도 점 있고 아롱진 것은 나오지 않아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려는 라반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5. 행함으로 바라봄의 법칙을 응답받은 야곱 이처럼 라반이 아무리 철저히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편이셨습니다. 더욱이 야곱의 지혜까지 동원이 되면서 야곱은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지요. 여기서 말하는 야곱의 지혜란 바로 '바라봄의 법칙' 또는 '바라봄의 믿음의 법칙'을 말합니다. 37-39절에 보면 야곱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가 잘 나오지요.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 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했습니다. 버드나무와 살구나무, 신풍나무들은 그 겉껍질이 거무스름하거나 짙은 갈색을 띠고 있는 반면 속껍질은 매우 희고 윤기가 반짝이기 때문에 겉껍질을 드문드문 벗겨내면 알록달록한 형태의 무늬가 나오게 되지요. 야곱은 바로 이렇게 알록달록한 무늬의 나무 가지들을 가축들이 와서 물을 먹으며 교미하던 장소에 놓아둠으로써 가축들이 새끼를 배는 순간에 그 모양을 보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에 낳은 새끼들을 보니 정말로 얼룩하고 점이 있거나 아롱진 것이 나왔지요. 여러분 중에 혹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 생각하는 분도 있을 수 있는데 사람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잉태한 여인이 임신하고 있는 동안 '누구를 생각하고 누구를 바라보냐'에 따라 태어나는 아이의 생김새에도 큰 영향을 주지요.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동안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바라보고 생각한 아내에게서는 남편을 더 많이 닮은 아이가 태어나게 됩니다. 또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동안 거울을 보며 자기 얼굴만 보고 생각한 아내였다면 자기를 더 많이 닮은 아이가 태어나겠지요. 이처럼 누구를 바라보고 생각하며 마음에 품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 태어나는 아이의 생김새에도 영향을 주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꼭 사랑하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요. 만약 아이를 가졌을 때 누군가를 너무 미워해도 아이가 그 사람을 닮아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꼭 알아야 할 점은 단지 눈으로 바라본다고 해서만 닮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마음에도 품었기 때문에 닮을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좋아서든, 싫어서든 눈으로 봄과 동시에 상대를 마음에도 늘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아이의 생김새에까지 영향을 준 것이지요. 이처럼 '바라봄의 믿음의 법칙'이란 눈으로 바라보는 차원을 넘어 마음에 품는 것까지를 의미합니다. 이 법칙은 아주 많은 분야에 적용할 수가 있지요. 예를 들어, 어릴 때 어떤 인물을 존경하며 마음에 품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아이의 장래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신앙 안에서는 누구를 바라보며 마음에 품고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모습이 크게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신앙은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게 되는 부모에 의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장성한 어른들도 마찬가지이지요. 따라서 여러분이 신앙 안에서 누구를 바라보고 마음에 품어 나가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히 12:2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말씀하지요. 이 말씀과 같이 여러분이 바라보고 나가야 할 온전한 신앙의 대상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마음은 어떤 것이며 주님을 닮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알아서 열심히 바라보고 달려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구약이나 신약 안에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인정하시는 선지자들 또한 신약의 주의 제자들 또 사도 바울, 동정녀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든 또 마리아든 스데반 집사든 빌립 집사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장점을 양식삼아서 그대로 행해 나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고전 11:1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온전히 닮아 나온 자로서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푯대와 같은 역할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온전히 믿고 바라보며 닮을 수 있는 바라봄의 대상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요. 바로 그러한 대상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나갈 때 자신도 점점 닮아 나갈 수가 있는 것이구요. 비록 가축들이기는 하지만 야곱은 바로 이러한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하여 막대한 부를 쌓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 방법을 사용한 것까지는 좋았다 해도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야곱이 선한 마음으로 이 방법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다음시간에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 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했습니다. 여러분이 정녕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다면 그것은 반드시 실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성결되고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진리만 보고 진리만 들으며 진리만 말할 것을 당부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에만 순종한다 해도 훨씬 신속히 영으로 들어올 수가 있지요. 여러분이 바라보고 듣는 것들이 결국은 여러분의 마음 안에도 입력이 되기 때문에 아무리 입술로는 선을 사모하고 영을 사모한다 고백해도 여전히 비진리를 보고 듣게 되면 그만큼 여러분의 마음 안에는 비진리가 또다시 새롭게 자리 잡아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무엇을 보고 듣느냐에 따라 더 신속히 선으로, 영으로 나와질 수도 있고 반대로 더 악으로, 육으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들은 '나는 환경이 안 좋아서요, 나는 부모로부터 안 좋은 기를 타고 태어나서요' 이유를 대시는 경우가 있는데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를 보면 이유나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환경은 우상숭배가 극심한 환경에서 태어나 가족들로부터도 외면당해야 했으며 남편을 비롯하여 늘 악한 것들을 보고 듣고 대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좋지 않은 환경과 악한 것들을 마음에서 받아들여 심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마음에서 선으로 바꾸어 나갔지요. 부모 탓, 남편 탓, 환경 탓을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의 입장에 서서 이해해 주려 했고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며 누구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악한 것이라도 선한 것으로 바꾸어 마음에 담아 갔기에 예수님을 만나 모든 문제를 해결받은 후에는 그 선의 향기를 마음껏 발할 수가 있었지요. 이처럼 '바라봄의 믿음의 법칙'이란 바라봄과 동시에 마음에 어떻게 담느냐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본제단에서 늘 새로운 영의 세계에 대해 설명하며 지금까지 수많은 영의 현상들을 나타내 보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여러분이 영의 세계를 사모하고 영의 것만을 바라보며 오직 천국 소망 가운데 달려가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의 낙원을 보았던 한 번의 체험으로 인해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천국 소망 가운데 달려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도 늘 영의 세계를 접하며 영의 것을 마음에 품고 있을 때만이 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늘 천국을 소망하며 새 예루살렘을 품고 달려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신앙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입술로만 새 예루살렘을 외친다고 해서 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며 품고 바라보는 사람은 행함 또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만한 모습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무엇을 여러분의 마음 안에 품고 계시는지요? 그리고 그 품은 바를 이루기 위해 지금 어떻게 행해 나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봄과 동시에 그것을 늘 마음에 품고 행함으로 나타내어 여러분이 주 안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름답게 응답으로 열매 맺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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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167) - 야곱을 생각하사 라헬의 태를 열어주신 하나님 창세기 강해(167) 이재록 목사 | 2005-04-01 | 창 30:22-33 창 30:22-33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 또 가로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라반이 가로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가로되 외삼촌께서 아무 것도 내게 주실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서론 잠 17:1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집 안에 아무리 재물이 많고 풍성하다고 해도 정작 가족간에 화목하지 못하여 늘 불화하며 다툰다면 이보다 더한 고통은 없지요. 이는 꼭 가정만이 아니라 어떤 조직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역시 예외일 수는 없지요. 재정이 풍족하고 뛰어난 일꾼들이 많다고만 해서 교회가 부흥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크게 확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꾼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주님의 마음이 되어서 서로가 화평함 가운데 일을 이루어 나가느냐가 중요하지요.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가장 기본은 무엇보다도 화평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수 마귀 사단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려고 할 때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비진리를 주관해서 어떻게든 서로 간에 화평이 깨어지도록 역사해 가지요. 남을 나보다 못하게 여기는 마음,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유익을 먼저 구하는 마음, 남보다 더 높아지려 하고 더 사랑받으려 하는 마음, 자기 위치와 자리를 어떻게든 지키려 하는 마음, 이런 마음들이 발동이 되면서 사람 사이에 갈등과 부딪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나도 이만큼 하는데 나는 왜 인정받지 못하는가? 나는 왜 축복받지 못 하는가? 나도 이렇게 충성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는 것인가? … ' 바로 이러한 마음들로 인해 서로 간에 섬기지 못하며 서로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동등한 입장이나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질서에 따라 당연히 순종해 줘야 할 사람에게까지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서로 섬기는 마음이 되면 얼마든지 화평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상대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해 주는 마음, 아랫사람이라 해도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고 상대를 위해 주는 섬김의 마음이 되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할 수가 없지요. 본론 1. 야곱을 생각하사 라헬의 태를 열어주신 하나님 야곱의 가정의 경우도 만약 라헬과 레아가 서로 섬겨 주며 자매간에 우애있게 지내면 야곱은 물론이고 라헬과 레아 역시 얼마나 평안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겠습니까? 훗날 자녀들 사이의 비극적인 사건도 없었을 것이구요. 그러나 라헬과 레아는 자기 악 속에서 계속되는 육신의 생각으로 인해 끊임없는 경쟁과 다툼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런 경쟁 가운데 야곱에게는 열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태어났는데 그럼에도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을 통해서는 한 명의 자녀도 낳지 못했지요. 마침내 라헬도 잉태를 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데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22-24절에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했지요. 여기서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셔서 그를 들으시고 태를 여셨다"는 것은 라헬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여 역사해 주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라헬이 잉태하여 아이를 낳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생각하셨기 때문이지요.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의 정통계보를 잇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통해 자녀를 얻기 원하는 야곱의 마음을 생각하심으로 라헬의 태를 열어 주신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심히 사랑하여 14년간 성실하게 심었던 행함을 생각하심으로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을 통해 정통계보를 이어갈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이지요. 라헬은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며 그 아들의 이름을 "더함"이라는 뜻을 가진 "요셉"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름이 가지는 의미만 보아도 그 안에 담긴 라헬의 마음을 느낄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자족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끊이지 않는 욕심 가운데 자꾸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라헬이 더 많은 자녀를 원하는 것 자체가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고 바라보며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라헬의 마음을 욕심이라 하는 것은 아들의 이름을 "요셉"이라 한 데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헬이 정녕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오랫동안 고대하던 첫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짓지는 않았겠지요. '감사'나 '영광', '은혜', '찬양' 등 얼마든지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뜻의 이름으로 지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헬은 감사의 마음보다는 '내가 어떻게든 더 많은 자녀를 낳아서 레아를 앞서야겠다'는 욕심이 앞섰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에 악이 있고 욕심이 있으면 간절히 원하던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되었을 때 감사할 틈도 없이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욕심 많은 어린아이가 양 손에 먹을 것을 쥐고도 다른 아이의 손에 있는 것까지 탐내며 바라보는 모습과 같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한 모습이신지요? 빌립보서 4:11-12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말씀하신 대로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늘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평안하고 행복하겠습니까? 이러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사심이나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라헬이나 레아가 자녀들의 이름을 짓는 것을 보면 두 사람 다 모든 상황을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해석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에 먼저 감사하고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구하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일들은 많이 있는데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일꾼에게 일단 어떤 일을 맡겼다면 그 일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고 기다려 줍니다. 혹여 부족함이 있다 해도 아버지께서 깨우쳐 주시기를 기도하며 일꾼 편에서 먼저 진심으로 제 의견을 물어올 때라야 제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요. 그럴 때도 저는 상대가 불편하지 않기 원하므로 직접적으로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지는 못합니다. 상대의 믿음과 마음을 고려하여 우회적으로나 비유적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슬쩍 짚고 넘어가는 정도로 그치게 되지요. 이럴 때 보면 각 사람의 반응이 다양합니다. 제가 지나가듯이 한 마디 말을 해도 정녕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알기 원하고, 목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기도하며 궁구해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거나 자신의 생각에 맞춰서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맞춰 순종할 마음일 때는 설령 돌려서 말해도 그 의중을 파악하지만 자기 식의 틀을 갖고 있거나 사심이 앞설 때는 구체적으로 말해 주어도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제 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의 말을 들을 때도 번번이 자기 유익에 맞춰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안이 열려 영의 세계를 본 것을 말하거나 꿈을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유익에 맞추어 해석하거나 자기 생각에 맞추어 엉뚱하게 해석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며 자기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 생각이나 유익에 맞추어 자기 편에 좋을 대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범사에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자 할 때에 주님의 마음이 보이고, 목자의 마음이 보이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가장 합당하게 인도받아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요셉을 낳은 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야곱 25절부터는 야곱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나옵니다. 마침내 라헬이 요셉을 낳은 후,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하고 말합니다. 창세기 28:15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향하고 있던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바로 이 말씀을 잊지 않고 마음에 명심하여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때가 되자 마음에 주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야곱이 만약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소홀히 하여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면 마음에 주관을 받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을 이룰 수도 없는 것이구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미리 야곱에게도 알려 주시고 많은 세월 동안 외삼촌 집에 있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셨을 때 결코 그 말씀을 잊거나 소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혹여 그 말씀이 너무나 현실과 차이가 있고 육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 해도 결코 의심하거나 흘려버린 적이 없지요. 항상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기도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때가 되면 그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을 항상 보아 왔습니다. 혹여 그 당시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회적으로 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서 거기까지 인도하기 위해서 주셨던 말씀이고 또 그 섭리와 뜻이 있어서 주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해도 그 말씀을 이루어야 할 때가 되면 예전에 주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제 마음을 주관해 주심으로 가장 적당한 때를 맞추어 역사해 주십니다. 그런데 마음에 명심하고 새겨 놓았다가 때가 되면 그 말씀을 기억하여 행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에 언제 그런 말씀을 주셨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택하여 쓰시겠습니까? 제 편에서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면 당연히 말씀을 명심하고 마음에 새기는 사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명심했다 해도 그것을 이루도록 주관받는 시점이 매우 중요하지요. 예를 들어 어떤 일은 주관해 주시는 즉시로 일을 이루어야 할 때가 있고 어떤 일은 한참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또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한 준비가 필요할 때는 미리 주관해 주셔서 준비토록 하시는 경우도 있지요. 야곱의 경우는 미리 주관을 받아 준비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야곱은 지금 당장에라도 외삼촌의 집을 떠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당장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때부터 어느 정도의 세월을 지나면서 재산을 쌓아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주관받아 떠나겠다고 말을 한 시점과 실제로 그가 떠난 시점과는 차이가 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될 것까지 다 아시고 야곱의 마음을 주관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3. 미리 말씀을 주시고 이루도록 준비하시는 경우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나오면 금방에라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줄 알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장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40년이라는 광야의 연단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40년 후에야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지요. 모세에게도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장에 가나안 땅으로 들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하여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처럼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40년이 지난 후에야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을 출애굽 시키는 시점을 40년만큼 앞당겨서 정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시점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시점보다도 40년을 앞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셨다는 말이지요.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게 될 기간에 대해서도 미리 예언해 놓으셨으므로 이 말씀도 응하게 하시기 위해 정확한 시점을 택하여 역사해 가셨던 것이구요.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세에게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본 교회가 이루어야 하는 가나안 성전과 관련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지난 2001년도에 "가나안 성전을 이루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순종이 되어지지 않음으로 가나안 성전을 이루지 못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시에 가나안 성전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도 왜 가나안 성전을 이루라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그때 그 말씀을 주셨어야만이 앞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점이 되었을 때에 정말로 가나안 성전을 이룰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001년도에 가나안 성전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처럼 가나안 성전을 이루라 말씀하심으로써 일꾼들과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의 연단을 받도록 하신 것이었지요. 믿음의 연단이라는 훈련 과정을 통해 앞으로 하나님께서 다시 "가나안 성전을 이루라" 하실 때는 능히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연단의 훈련 과정 없이 성전을 이루어야 할 시점이 다 되어서 "가나안 성전을 이루라" 하신다면 일꾼들 편에서 온전한 순종이 나오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므로 미리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곱 역시 예지 예정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점은 정해져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당한 시점을 택하여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가지도록 주관하시고 그것을 라반에게 말하도록 역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4. 라반의 속성을 알기에 미리 말한 야곱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야곱을 순순히 보낼 라반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정확한 때에 맞추어 고향으로 떠나게 하기 위해서 라반에게 미리 말하도록 주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도 자신이 이렇게 떠나겠다고 말을 한다고 해서 바로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요. 야곱은 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라반과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라반의 속성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떠난다고 말을 하면 라반이 어떻게 나올 것까지도 이미 예상했지요. 예전에 라헬을 조건으로 내걸어 자신이 14년 동안이나 봉사하도록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어떤 조건을 내걸어서 자신을 붙잡아 놓으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야곱은 바로 이것을 오히려 역으로 이용하기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었지요. 만약 야곱이 떠나겠다고 했을 때 라반이 순순히 가라고 보내 주었다면 야곱은 지금 그동안 고생하며 봉사했던 것에 대해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고 떠나야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라반의 속성상 결코 순순히 보내 주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야곱은 라반의 입에 맞는 미끼를 던진 것이지요. 그 방법이 바로 32-33절의 내용입니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 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하고 제안을 했지요. 이는 사람의 생각으로 볼 때 너무나 어리석은 제안입니다. 누가 보아도 라반에게만 너무나 유리한 제안이지요. 일반적으로 흰 양이나 염소들 가운데서 아롱진 새끼가 태어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목축을 해온 라반이나 야곱도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지요. 야곱은 바로 이런 점을 노렸습니다. 라반이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만큼 유리하고 그 마음에 흡족한 제안을 함으로써 야곱은 라반의 간교한 속성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지요. 다음 시간에 설명이 되겠지만 야곱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바라봄의 법칙"을 이용한 그의 지혜였지요. 누가 보아도 너무나 불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오히려 이를 통해 충분한 부를 모은 후에 고향으로 떠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느 때쯤 라반에게 떠나겠다고 말을 하면 그때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야곱이 부를 모아서 정말로 떠날 수 있을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시므로 야곱이 정확한 시점에 주관을 받아 고향으로 떠나겠다고 라반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바라봄의 법칙은 무엇이며 야곱은 어떻게 해서 부를 쌓을 수 있었는지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 야곱이나 라반은 모두 간교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지혜가 선의 지혜라고는 말할 수 없지요. 상대방의 간교한 속성을 역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있는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야곱이 라반의 간교한 꾀에 넘어갔지만 야곱이 라반의 속성을 간파한 후에는 오히려 라반이 넘어갈 수밖에 없는 더 고차원적인 꾀를 쓴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야곱이 라반의 마음속에 있는 간교하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비진리의 속성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라반을 넘어오도록 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원수 마귀 사단도 마찬가지이지요. 원수 마귀 사단은 여러분 안에 있는 비진리의 속성들을 잘 압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어떤 미끼를 던져야 걸려들게 되는지'도 잘 알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의 유혹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이성의 유혹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이생의 자랑의 유혹 등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때 자기 자신에 대해 말씀으로 깨우쳐 분별하며 늘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이러한 유혹을 물리칠 수가 있지요. 반면에 자신의 취약점을 알지 못하는 사람 또는 알면서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원수 마귀 사단의 밥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취약점이라 할 수 있는 악의 모양은 어떤 것인지요? 물론 악은 모양이라도 다 버려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버리기 힘든 것이 있다면 먼저 그것을 목표삼아 버려 나가시기 바랍니다. 어떤 유혹이 와도 내 마음에 조금의 미동함도 없다는 자신감이 올 때까지 악의 뿌리를 뽑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뽑아 나갈 때 비로소 악은 모양이라도 없는 영의 차원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죄와의 싸움에서 신속히 승리하여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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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166)-시기와 질투와 투기로 인해 지어진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 창세기 강해(166) 이재록 목사 | 2005-03-25 | 창 30:14-24 창 30:17-24 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셨으므로 그가 잉태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가로되 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레아가 다시 잉태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가로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 하고 그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서론 성경을 보면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자녀라 해도 아비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부족하다' 싶은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었지요. 결국은 아버지 다윗 왕을 대적하는 악까지 행하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던 다윗 왕에게서 그러한 아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다윗 왕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합한 사람이었다 해도 어차피 다윗 역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 속의 악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 악은 또 다시 아들 압살롬에게도 전해지게 됩니다. 다윗 왕이 완전히 성결된 상태에서 압살롬을 낳은 것도 아니었고 조상으로부터 기를 통해 전해지는 악을 갖고 태어나며 태어나 자라면서 심겨진 악들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통한 영향도 당연히 받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훌륭한 신앙을 가졌다 해도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가정의 경우에 자녀의 교육과 성장에 더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무래도 아버지 쪽보다는 어머니 쪽이 될 가능성이 더 크지요. 물론 아버지를 통해서도 많은 영향을 받지만 세세한 부분에까지 영향을 주는 쪽은 주로 어머니 쪽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렇다하여 자녀의 가정교육이 전적으로 어머니의 책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아버지 쪽에서도 당연히 자녀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책임을 함께 해야지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많은 가정들의 경우 그래도 자녀들이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다윗 왕의 경우는 늘 전쟁과 국사에 분주하여 자녀들에게 투자할 시간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의 자녀들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압살롬 역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 마아가는 이방 민족인 그술 왕 달매의 딸이었기에 압살롬을 신실한 신앙 안에서 양육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라난 압살롬은 다윗 왕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와는 먼 모습으로 성장하고 말았습니다. 본론 1. 시기와 질투와 투기로 인해 지어진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 이런 이유들을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로 이어지면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악의 모습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온전한 샘플이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던 아브라함이었지만 그의 아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만한 신앙을 가지지는 못했고 야곱 역시 아브라함의 신앙에는 크게 뒤떨어지는 모습이지요. 에서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구요. 더욱이 야곱의 아들들의 대(代)에 이르러서는 형제 간에 심히도 악한 모습들이 나오는 것까지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나오게 된 것에 대해 굳이 여자 쪽에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어머니를 살펴보면 자녀들에게서 왜 그런 모습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가 있지요. 사라의 모습, 리브가의 모습, 라헬과 레아의 모습 등을 생각해 보면 어머니로부터 기를 통해 전해진 악의 모양들이 자녀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결국 부모의 기를 통해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태어나 자라면서 입력된 악의 모양들은 어차피 자신이 스스로 연단을 통해 발견하고 버려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에서보다는 야곱의 중심이 나았기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택하여 그를 연단하시고 변화된 그릇으로 만들어 사용하신 것이지요. 또한 야곱의 열두 아들들 중에 요셉을 택하여 그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도구로 쓰신 것이구요. 잠 16:4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야곱의 다른 아들들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연단하심과 동시에 그를 통해 훗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형성하게 될 열두 명의 아들들이 태어나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에 담긴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설명을 드렸는데 육적으로 볼 때는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가 결코 좋은 의미에서 지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라헬과 레아 사이의 시기와 질투와 투기가 그 아들들의 이름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데 서로가 상대를 누르고 자신이 더 사랑받으려는 마음에서 아들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서로가 하나님께서 자기 편이 되어 주셨다는 의미에서 자기 편에 좋은 대로 지은 이름들이었지요. 18절에 나오는 레아의 아들 잇사갈이라는 이름도 '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는 의미에서 '값'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이 자기 시녀를 남편에게 준 것을 합당하게 받으시고 그 값으로 아들을 주신 것처럼 해석하고 있지요. 또한 20절에 나오는 스불론이라는 이름 역시 '이제는 그가 즉 남편 야곱이 나와 함께 거하리라'는 의미에서 '거함'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이 역시 어떻게든 남편의 사랑을 라헬로부터 빼앗아 자기에게로 돌려 보려는 레아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름이지요. 자녀를 하나도 낳지 못한 라헬뿐만 아니라 이미 많은 자녀를 낳은 레아라 할지라도 여전히 서로 간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얼마나 심한가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기나 질투는 내가 상대보다 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갖기를 원하고 그래서 마침내 상대를 완전히 제압했다 해도 또 다른 대상을 만나게 되면 그를 통해 시기, 질투가 또 다시 나오게 되어 있지요. 시기, 질투만이 아닙니다. 서로 간에 악을 악으로 갚게 되면 악순환은 결코 멈출 수가 없지요. 비록 상대를 악으로 완전히 눌렀다 해도 악에 대한 보응은 반드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물론이고 어느 나라 역사를 보아도 악으로 상대를 누르고 짓밟아서 올라 선 사람이 좋은 결과를 맺는 것은 볼 수 없지요. 설령 이 땅에서는 악에 대한 보응을 받지 않았다 해도 내세에서 받게 될 악에 대한 심판과 보응은 결코 피해 갈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2. 레아와 라헬의 심한 투기를 부추기는 원인을 제공한 야곱 이처럼 아내들 사이의 심한 시기, 질투 더 나아가 투기의 모습을 본 야곱이었지만 그 또한 아내들 사이의 투기를 부추기는 원인을 스스로가 제공했습니다. 라헬과 레아 사이의 그 심한 투기 속에서도 야곱은 여전히 라헬에게만 특별한 사랑을 주었습니다. 물론 라헬에게 사랑이 더 가는 마음이야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레아를 통해 낳은 자식들까지 또다시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느끼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훗날 라헬을 통해 낳은 아들인 요셉에 대해서 특별히 편애를 하였습니다. 이는 결국 다른 자녀들이 무리를 지어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만든 것이니 아비의 잘못이 큰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이삭 이외에 낳은 다른 서자들에게까지 각각 재물을 나누어 줌으로 정통 계보를 이을 이삭과의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나머지 자녀들끼리도 서로 간에 기울어짐이 없도록 공평하게 처신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정통 계보는 이삭을 통해 이어진다 해도 나머지 자녀들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공평하게 사랑으로 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경우를 볼 때 하나님께서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섭리를 이루어 가시지만 야곱은 지나치게 요셉에 대해서만 특별한 사랑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가족들 사이의 불화를 야기시키고 마침내는 요셉이 형들의 손에 의해 종으로 팔려가는 비극적인 사건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특히 머리된 사람은 각 사람의 마음을 잘 살펴서 혹여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간에 시기, 질투가 발생할 수 있는 소지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본인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성결되고 영으로 들어왔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머리된 사람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그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화평을 이루기도 하고 반대로 불화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두드러지게 한 사람만을 칭찬하고 높여 준다거나 역으로 한 사람만을 지적하고 책망한다면 이는 결국 서로 간에 불화의 소지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물론,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도 때와 장소와 상황을 잘 살펴서 서로 간에 시기, 질투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윗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지혜이지요. 이와 관련된 유명한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황희 정승이 젊은 시절에 겪은 일입니다. 그가 일을 보고 잠시 쉬기 위해 도성을 빠져 나와 논길을 걷는데 한 농부가 검은 소와 누런 소 두 마리를 부리며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런 농부를 황희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농부가 잠시 쉬기 위해 소를 저쪽에 두고 나무 밑으로 오자 농부에게 물었지요. "두 마리 소 중에 어떤 소가 일을 잘합니까?" 그러자 농부는 갑자기 황희를 붙잡고 멀리 가더니 거기에서 황희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이는 것입니다. "검은 소는 꾀를 부리지만 누런 소는 일을 잘하지요" 그런 농부를 보고 황희는 크게 웃으며 말합니다. "아니, 하찮은 소를 보고 물어보는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귀에 대고 속삭일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농부는 약간은 노기를 띠며 "글을 배운 선비라는 사람이 무슨 그런 말을 하시오. 아무리 소같이 하찮은 동물이라도 자신에게 나쁜 말을 하면 싫어하는 법이오" 하는 것입니다. 이에 황희는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미물이라도 배려해 주는 마음과 주인된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마음 자세 그리고 어떠한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하고 경솔해서는 안 된다는 것 등 여러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또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은 어느 한편을 편애하는 말과 행동을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만약 이 이야기에 나오는 두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농부가 아무 생각 없이 황희 정승에게 "누런 소가 일을 더 잘한다"고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면 아마도 누런 소는 교만해져서 높아졌을 것이고 검은 소는 누런 소를 시기하여 심통을 부리거나 낙망하여 오히려 이전보다 일을 더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아직 시기와 질투와 교만 등을 버리지 못한 육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얼마든지 이런 모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를 더 사랑하고 인정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살펴서 지혜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3. 편애(偏愛)없이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야 제가 중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당시 서울에 사시던 큰 누님이 시골집에 오시면 가족들을 위해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씩 사오십니다. 그래서 누님이 오신다고 하면 며칠 전부터 기대에 부풀어 기다리면서 친구들에게도 미리 자랑을 합니다. 마침내 누님이 오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제게 돌아올 선물은 없었습니다. 저는 어린 마음에 많은 상처를 입고 울면서 속으로 다짐을 했습니다. '나는 앞으로 커서 절대로 편애하지 않으리라' '나는 커서 절대로 공평하게 하리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지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도 누구를 편애한다거나 차별하지 않았고 주님을 영접하고 진리 안에 들어와서는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차별이나 편애로 인해 직접 고통을 당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차별하고 편애합니다. 자신이 피해를 보았으면 그리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오히려 자신은 더한 경우가 있습니다. 혹여 예전에 차별이나 편애로 인해 고통받았다 해도, 지금 그러한 처지에 있다 해도 주님의 사랑으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상대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공평한 홀과 같은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하며 특히 머리된 사람이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아랫사람들 사이에 혹여라도 자신으로 인한 시기, 질투가 생기지 않습니다. 라헬과 레아가 자신들의 시녀를 남편에게 주면서까지 다툼과 경쟁을 일으켰던 것은 결국 남편의 사랑을 더 얻으려 함이었으며,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만으로 안 되니 육신의 생각 가운데 시녀까지 동원한 것이고 합환채에 의지해 보려고까지 했지요. 이처럼 자신의 입지를 어떻게든 지키려 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려는 모습은 오늘날 곳곳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와 권세와 부를 지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내 위치와 내 자리, 내가 가진 것들을 빼앗기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잘못과 비리를 숨기려 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모함하여 누명을 씌우기도 하면서 거짓과 속임과 술수와 궤계 등을 동원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자리와 자기 위치를 지키기 위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진리에 역행되는 일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마치 라헬과 레아가 서로 경쟁하듯이 서로가 자신의 업적을 더 드러내기 위해 과장을 하거나 이런저런 방법을 통해 자신이 한 것 이상으로 보여지게 합니다. 그러다보면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보고하고 불리한 것은 보고하지 않기도 하며, 오히려 상대의 부족된 것만을 부각시키기도 합니다. 이처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다 보면 점점 더 헤어 나오기 힘든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당장은 인정받고 열매를 더 크게 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으로 하지 않고 육으로 한 것이기에 결국 온전한 열매를 맺히지 못합니다. 만약 일꾼이나 주의 종들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자신의 것을 지키려고 한다면 성도들은 '이래도 되나 보다' 하며 잘못 입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더 크게 이루기 위해 때로 선의(善意)의 경쟁은 필요하지만 딤후 2:5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진리 안에서 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도 자칫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육의 경쟁으로 빠지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 안에서 선의의 경쟁은 상대가 잘되기를 기도해 주고 상대가 잘되면 함께 기뻐해 주며 상대가 도움이 필요하면 힘껏 도와주면서 나도 잘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과 레아는 '어떻게든 상대를 밟고 내가 더 위에 설까?' 하는 마음이었고 '어찌하면 내 입지를 더 굳게 할까?'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경쟁과 다툼이었습니다. 4. 자신들의 유익만을 구함으로 남편 야곱의 마음을 아프게 한 라헬과 레아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되면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고통을 주는 일은 결코 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입술로는 "사랑한다" 고백하면서 정작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고통을 주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이는 참된 사랑이라 할 수 없지요. 예를 들어 자녀들이 부모님을 사랑한다면 자녀들끼리 다툼이 있었을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모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려는 선한 마음을 가진 자녀라면 '우리들이 다툰 것을 아시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하면서 자기들끼리는 서로 간에 불편하다 하더라도 부모님 앞에서는 웃는 낯으로 대할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녀들이라면 서로 다투는 일도 없겠지만 혹여 서로 간에 불편한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부모님에게는 근심, 걱정을 끼쳐 드리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이처럼 라헬과 레아도 정말 남편 야곱을 영으로 사랑했다면 둘이 서로 어떤 모습이 되어야 했겠습니까? 남편 앞에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투기하는 모습으로 악을 발하겠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남편을 정말 영으로 사랑했다면 적어도 상대가 악하고 부당하게 나온다 해도 자신은 그냥 잠잠히 눌러 참기라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서로 다투고 투기하는 모습을 보면 남편이 얼마나 마음 아플까를 생각해서라도 자신이 그냥 고통을 감수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나 라헬과 레아는 남편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 유익을 구하기에만 급급하니 야곱은 아내들 사이에서 심히도 마음의 연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만약 일꾼들 사이에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하나 되지 못하여 불화한 것을 보게 될 때 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물론 이런 경우들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어쩌다가 한 번이라도 이런 일을 보게 되면 그로 인해 저는 크나큰 마음의 고통을 받게 되지요. 저는 양 떼들을 진리로 가르치며 한 사람 한 사람 영으로 낳아 가야 하는 입장이기에 사실 육의 부모보다 더한 마음의 고통을 받습니다. 육의 부모는 '아이들이 크다 보면 서로 다투고 싸울 때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오직 진리만을 가르쳐 온 제 입장에서는 '내 잘못이다' 하는 자책과 함께 마음에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하물며 그 귀한 보배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핏값으로 사신 주님께서 만약 믿음의 형제, 자매들 사이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서로 불목한 모습을 보신다면 그 마음이 어떠하시겠는지요? 주님을 사랑한다면, 목자를 사랑한다면 여러분 안에 그러한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라는 계명에도 위배되는 것이지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믿음의 형제, 자매들끼리 서로의 유익을 위해 시시비비하며 시기, 질투하고 상대에게 고통을 주겠습니까?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실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 시간에는 사람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얼마나 악한 모습으로 나오게 되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마음 안에 시기, 질투가 남아 있다면 오늘을 기점으로 해서 온전히 뽑아내시기를 바랍니다. 상대를 누르고 내가 올라서려는 마음, 내 위치,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해 가는 모습, 내가 더 인정받으려 하고 상대를 무시하며 업신여기는 마음 등, 이러한 모든 악의 모양들을 뿌리째 뽑아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 간에 늘 화평하고 서로 간에 힘과 위로가 되어주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힘차게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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