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즐겨찾기 | 블로그홈 | 바로가기 바로가기 | 로그인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
블로그  |  사진갤러리  |  동영상갤러리 방명록  |   즐겨찾기 추가
닛시 (mpooo.7000)
프로필     
 인기도 :
 이 블로그 점수주기
전체 글보기(1145)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들 새 글이 있습니다.
창조의 권능
기사와 표적/무지개
기사와 표적/무안단물
만민중앙교회
특송-동영상
이재록 목사,신앙간증
환자를위한 기도
생명의 말씀
천국
지옥
십자가의 도
믿음의 분량
영혼육
사랑장
성령의 9가지 열매
팔복
성령의 음성을 듣고 인도받는 법
공간과 차원
창세기 강해
요한계시록 강해
생명의 말씀,칼럼
해외성회
이스라엘 연합성회
뉴욕 연합대성회
콩고 연합대성회
페루 연합대성회
독일 연합대성회
러시아 연합대성회
인도 연합 대성회
온두라스 연합 대성회
필리핀 연합대성회
케냐 연합대성회
파키스탄 연합대성회
나고야 신유 대성회
우간다 대성회
손수건 성회
찬양과 경배
설문
백만가지 주제
오늘 전체
방문자 75 33910
구독자 0 2
댓글 0 2
참조글 0 0
HanRSS 로 구독하기Fish 로 구독하기
2009 11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다녀간 블로거 더보기
- hidukyoon
- 에스더
- 마리짱
- UCC조아
- 후천사랑
 즐겨찾기
 즐겨찾기 글모음
90,552
개설일 : 2009/01/31
 

팔복(1)
 
이재록 목사 | 2002-01-20 | 마5:1-12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 주님을 닮아 온영을 이루고 새예루살렘을 들어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팔복>에 관한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시간인 오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면 어떤 복이 임하며 이를 위해서는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진정한 복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 가는 것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물질이 풍족하고 건강하며 명예, 권세가 있고 가정이 화평하다면, 이를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썩어지고 변질되기 마련이요, 잠시 있다가도 순간에 사라질 수 있으며 이런 것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없기 때문에 참된 복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한평생 부귀 영화와 즐거움을 다 누렸다 해도 죽은 후에 지옥에 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참된 복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 가는 것이지요. 또한 이 땅에서도 구원받은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라야 변함없고 풍성한 참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까닭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되고 영원한 축복을 천하만민이 받게 하시려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축복의 말씀을 전파하셨던 것입니다.
  
   2.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천국을 소유할 수 있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 중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이 없어 가난한 것이 아니라 심령, 곧 마음이 가난한 것으로서 악이 없고 선한 마음으로 아무 욕심이 없어서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중심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심령을 채울 영적인 것을 사모하며 마음을 채워 주실 하나님의 은혜에 갈급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를 해도 쉽게 받고 말씀을 들으면 쉽게 순종할 수 있으니 구원받기도 그만큼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으로 마음이 가득 찬 사람들, 곧 심령이 부유한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업이 잘 되고 가정이 화목하며 아쉬운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전도를 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 것을 사랑하는데 교회에 다니면 끊어야 한다고 하니 전도받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요. 바로 이런 사람들이 세상 것들로 마음이 가득 차서 부유하므로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심령을 가진 것이요 구원받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도 계속 전도하다 보면 어느 때인가 심령이 가난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질병이나 사업의 실패 등, 어떤 계기로 인해 심령이 가난해지면 예전에는 복음을 반대하던 사람이라도 겸손하게 복음을 받아들이므로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는 누가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예화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며 살았지만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집에서 구걸하여 먹으며 몸에는 병까지 있어 개들이 그 헌 데를 핥는 등 참으로 가난하고 불쌍한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그 형편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지요.
   구원받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편히 안식할 때에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형벌의 불 가운데 고통받던 부자는 나사로를 통해 물 한 방울이라도 얻을 수 있기를 애걸하는 것입니다. 이 끔찍한 지옥에 떨어지게 되면 이 땅에 살 때 아무리 재벌이나 권세자, 심지어 왕이었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 같이 불 가운데 고통받는 비참한 존재요 영원한 고통중에 세세토록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비록 아직은 다 버리지 못한 죄악이 있다 해도 심령이 가난하므로 복음을 받아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지요. 빌립보서 3:12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까지 끊임없이 믿음을 쌓아가는 신앙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 번 성령받고 구원받았다고 해도 기도하지 않고 진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그의 구원을 아무도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가난한 심령이 되어 하나님을 믿고 충성해 나가다가도 어느 순간이 되면 교만해지고 욕심이 틈타서 세상 정욕을 좇아가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해서 갈라디아서 3:3에 있는 말씀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사람이 되면 구원받아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얻었다 해도 원수 마귀에게 빼앗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12에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신 것이지요. 날마다 악을 벗어 버리고 더욱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참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며 그럴 때 영원한 천국이 우리의 것이 될 뿐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도 천국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하는 참된 복을 누리려면
  
   1)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2:15-16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인 마귀로부터 온 것으로, 이러한 것이 있는 만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요 심령이 부유한 것이므로 천국의 복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육신의 정욕은 육신이 죄를 범하고자 하는 속성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게으름, 간음, 방탕, 미움, 시기, 질투, 판단, 정죄 등 육체의 일들을 행할 수 있는 근본적인 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을 때에 이것이 유발될 수 있는 어떤 환경 조건을 만나게 되면 여기에서 바로 육신의 정욕이 나오게 됩니다.
   이 육신의 정욕은 행위적으로 범죄하는 육체의 일을 계속 쌓아가는 만큼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혈기를 한 번, 두 번 내기 시작하면 그것이 쌓여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혈기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며, 어떤 힘든 상황만 되면 혈기를 내고 짜증을 부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육신의 정욕을 버리기 위해서는 먼저 행위적으로 나타나는 구습과 육체의 일부터 끊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불 같은 기도를 통해 마음 속에 자리잡은 육신의 정욕을 버리고 또 본성 속에 있는 것까지도 하나하나 버려 나가면 결국은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을 이루게 됩니다.
   예를 들어, 혈기 내던 사람은 마음에 명심하여 혈기를 낼 만한 상황이 되어도 자신을 절제하여 혈기를 내지 않으며 온유한 마음과 행동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불같이 기도하면서 마음 깊이 남은 혈기의 근본 뿌리까지 태워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안목의 정욕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속성을 말합니다.
   담배를 끊으려는 사람이 담배를 손에 쥐고 계속 냄새를 맡으며 바라보고 있으면 안목의 정욕을 통해 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성을 포위해서 공격하고 있는 사람이 그 성 안으로 계속 적의 지원군이 들어가게 놔두는 것과 같지요. 포위된 성을 하루 속히 함락시키려면 지원군을 완전히 차단해야 하는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죄의 속성을 벗어 버리려면 먼저 안목의 정욕을 통해 범죄하게 만드는 근거를 완전히 차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진리가 아니면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아야 하며 오직 진리로 보고 듣고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미 자리잡고 있던 안목의 정욕까지도 기도를 통해 신속히 빼내 버려야 하는 것이지요.
   끝으로, 이생의 자랑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는 속성을 말합니다.
   이생의 자랑이 틈타면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인해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교만하게 되지요. 이러한 이생의 자랑이 있을 때 역시 심령이 부유하여 "낮아지라, 섬기라, 희생하라, 헌신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생의 자랑을 다 벗어 버려야 하는 것이며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 때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음껏 여러분을 축복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3에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는 단순하고 순수하며 또한 교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직 때묻지 않은 아이들은 좋은 것을 알려 주면 쉽게 믿으며 자존심이나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여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처럼 우리도 교만하지 않고 낮아진 마음으로 진리를 들을 때 즉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진리를 보고 들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영적 어린아이가 되어야 천국을 소유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때가 될수록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 자긍하고 자기를 사랑하며 세상을 사랑하여 정욕적인 것들을 더욱 추구해 나갑니다. 이런 세대 속에서 심령이 가난하여 성결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온 여러분들은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죄와 악들을 벗어 버리고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 천국의 축복을 온전히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입혀 주시고 말씀대로 이룰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더하심으로 팔복이 신속히 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팔복(2)
 
이재록 목사 | 2002-01-27 | 마5:1-12 
 
지난 시간에는 팔복 중에 첫 번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축복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축복에 대하여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육적인 애통이 아닌 영적인 애통을 원하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5:4에 보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복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늘 인상을 찌푸리고 슬퍼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애통에는 육적인 애통과 영적인 애통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악함과 감정 가운데서 나오는 애통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으며 축복을 받지도 못하는 육적인 애통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난하여 슬퍼하고 질병과 연약함으로 한탄하며, 혹은 어떤 일을 자신의 욕심대로 이루지 못함으로 애통하고 낙심합니다. 슬픈 영화를 보고 울기도 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거나 누군가 자신을 서운하게 할 때 가슴아파하고 애통하지요.
   이런 애통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하셨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말씀하셨지요. 이는 어떤 시련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구원받고 천국을 약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려움이 있을 때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께 아뢰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줄 믿기 때문에 온전히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의 애통은 이런 육적인 애통이 아니라 영적인 애통인데 영적인 애통이란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애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애통의 예
  
   첫째로, 자신의 죄나 사명감당하지 못함으로 인한 회개의 애통이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로 인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실을 깨달음으로 눈물, 콧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애통합니다.
   그런데 죄를 회개하여 애통하고 은혜를 받았다 해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또다시 애통할 일이 생깁니다. 믿고 구원받았으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죄악을 벗어 버리고 성결되어 나가야 되겠는데 믿음이 연약한 가운데 다시 범죄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죄악이 발견되는 것도 다시 애통하면서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결국은 다 벗어 버려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하여 어느 정도 신앙이 있고 충성하는 일꾼이 되면 이런 회개의 애통은 더 이상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범죄하고도 애통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범죄하지 않음으로 애통할 일을 아예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명감당을 못했을 때도 회개의 애통을 하게 됩니다. 직분자로서 마땅히 성도의 본이 되어 기도하고 전도하며 열심히 심방하여 부흥시켜야 하고 맡은 분야에서 열매 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을 때 이로 인해 마음을 찢으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형제가 죄로 인해 사망의 길로 가므로 애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범죄하여 사망의 길로 가고 있을 때, 또 형제가 시험 들어 힘을 잃고 있을 때 마땅히 그에게 권면해 주고 힘을 줘야 하는 것이며 자신의 일과 같이 애통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하지요. 불쌍하고 긍휼한 마음 가운데 자신이 대신하여 회개하며 상대가 진리로 행할 수 있도록 애통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통하고 기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허물과 티를 보고 판단하고 정죄하며 찌르는 말로 고통을 주거나 다른 사람에게 그 허물을 전하기도 하지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결코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히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때 그들을 대신하여 회개하며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자비를 간구했던 모세처럼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도 사랑하여 대신 회개하며 기도하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 앞에 합당한 마음인 것이지요.
   이 외에도 영혼 구원을 위한 애통이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가족, 일가 친척이나 이웃이 사망의 길을 가고 있을 때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애통하는 것이지요. 또 세상에서 멸망으로 가는 무수한 영혼들을 위해 애통하며 나라와 민족에 대한 애통, 교계에 대한 애통,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는 일들에 대한 애통이 바로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영적인 애통입니다.
  
   3.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염려하며 애통하였던 사도 바울
  
   고린도후서 11장에는 복음전파를 위해 무수한 고난을 당했던 사도 바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여러 차례 옥에 갇히며 매도 수없이 맞고 파선함으로 일주야를 바다에서 지내며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춥고 헐벗은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하여 사도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매를 맞고 피를 흘리며 차꼬에 채여 깊은 감옥에 갇힌 것을 인하여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염려하고 애통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하는 사람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굳게 서지 못할 때, 교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할 때 이를 인해 애통하고 염려합니다. 또 주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을 때 핍박받는 것이 힘들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영혼을 위해 애통하고 기도하게 되며 세상이 흑암이 짙어 가는 것을 볼 때 애통함으로 더 크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무수한 영혼들이 구원받게 하시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4. 행함이 따르는 참된 애통을 할 때 임하는 축복
   말로만 '안타깝다' 하고 눈물만 흘린다고 해서 참된 애통이 아니요, 행함이 따르는 애통이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죄로 인해 애통한다면 말로만 회개하고 계속 같은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열매를 맺음으로 죄악을 버려야 합니다. 영혼들을 위해 애통한다면 그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 전도, 심방하는 행함이 따라야 하지요.
   이렇게 참된 애통을 할 때 임하는 축복이 있는데 곧 저희가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떤 위로를 받기에 축복이라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사람들이 주는 위로와는 다릅니다.
   요한일서 3:18에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행함과 진실함이 있는 사랑이지요. 배고픈 사람에게는 양식을 주시고 질병이 있는 사람은 치료해 주시며 마음의 소원에는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애통을 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는 반드시 그 열매가 있습니다.
   시편 32:1에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말씀하신 대로 범죄함으로 인해서 마음을 찢고 애통할 때는 죄사함의 축복이 오지요. 이렇게 용서받아 죄의 담이 헐어지면 충만함과 기쁨이 임하며 그 충만함 가운데 위로부터 능력과 은혜도 주시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능히 죄악을 벗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죄악을 벗어 버리면 그만큼 영혼이 잘 되고 그러면 요한삼서 1:2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게 하시지요. 곧 마음의 소원에 응답하시며 가정과 사업터, 일터에 넘치는 축복으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사명감당을 못해서 애통하는 사람에게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영혼들을 위한 애통의 기도와 행함은 맡은 분야에 부흥의 열매를 맺게 하시지요. 그리고 이러한 애통 가운데 죄를 버리고 성결되어가는 만큼 사도 바울과 베드로와 같이 큰 권능도 나타내어 주십니다. 또한 이 땅에서 위로하여 축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천국에도 상급으로 쌓이게 되니 참된 복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죄를 지어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들을 위해서 애통하며 기도해 줄 수 있는 참믿음과 사랑이 있을 때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위로는 말로만이 아니라 이처럼 반드시 축복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과 혀로만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싸워 버리기 위해 또 영혼들을 구원하고 열매 내기 위해 애통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풍성히 임하게 됩니다. 다시는 눈물도 애통도 없는 천국에서 이 땅의 모든 영적인 애통을 말할 수 없는 영광과 상급으로 갚아 주시지요.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처럼 내 유익에 맞지 않으므로 육적으로 슬퍼하고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영혼들을 위해 영적으로 애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할 뿐 아니라 그토록 사모하는 새예루살렘에 들어가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팔복(3)
 
이재록 목사 | 2002-02-10 | 마5:1-12 
 
오늘은 팔복에 대한 말씀 중 세 번째인 온유한 자에게 임하는 축복에 대해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영적인 온유는 부드럽고 온화한 가운데 덕이 있는 것
  
   마태복음 5:5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사전에는 온유에 대해 '인품이 온화하고 순함, 부드럽고 유순함,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듦'이라 풀이하고 있지요.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도 내성적이거나 소심한 성품이라서, 혹은 좀 지혜가 없고 바보스러워서 성낼 줄 모르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온유함은 이런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겸하여 덕(德)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무더운 여름 햇볕 가운데 아름드리 큰 나무가 많은 사람들에게 쉴 만한 그늘을 제공하듯이,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입니다.
   또한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한 마음을 말합니다. 단단한 쇠에다가 돌을 던진다면 쇳소리가 나고, 유리에 돌을 던지면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어집니다. 이런 것처럼 교만과 자기 중심적인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 상황이 되면 쇳소리처럼 요란하고 거친 반응이 나오지요.
   그러나 솜뭉치에는 아무리 돌을 던지고 막대기로 찌른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으며, 그저 폭 감싸 버립니다. 온유한 사람은 이러한 솜털 같은 마음을 이루므로 아무와도 걸림이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지요.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는 사람도 능히 품어줄 수 있으며 매사에 모든 것을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감싸 주고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버리며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이 불편함을 주지도 않으며 아무리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해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그가 변화될 것을 기다려 줍니다. 상대가 더 잘할 수 있는 길을 알아서 그러한 길로 이끌어 주고 도와주지요.
   또한 입술의 말도 요란하게 떠들고 다투며 들레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잔잔하며 많은 말들을 허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진리의 말을 합니다. 자신을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도 이해해 버리므로 감정을 품거나 상처받지 않으며 또 지적을 받을 때 불편한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마음 밭을 개간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의 마음을 밭에 비유했는데 마치 거친 밭에서 가시를 뽑아내고 돌을 골라내어 옥토밭이 되도록 경작해 나가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에서 미움이나 시기, 질투, 다툼, 판단, 정죄 등 악을 벗어 버리면 온유한 마음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온유함을 칭찬하신 사람이 나오는데, 바로 모세입니다. 민수기 12:3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말씀했지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40년 동안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정만 해도 60만이 되었으니, 이 무리를 다 품고 험난한 광야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시므로 나타내 주신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도 악한 백성들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모세에게 갖은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지요. 심지어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이 모세의 탓이라 하며 모세를 돌로 치고자 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백성들과 함께 40년이나 거하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진리로 인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모세가 얼마나 온유했는지를 나타내지요.
   하나님께서도 그를 지극히 사랑하여 놀라운 권능으로 늘 보장하실 뿐 아니라 혹여 백성 중에 모세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는 그들이 모세의 형이나 누이라 해도 용납하지 않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영적인 온유는 진리 안에서의 강하고 담대함과 충성이 겸해져
  
   영적인 온유함을 이룬 사람이라면 그 마음이 옥토를 이룬 것이라 했는데, 옥토에는 무엇을 심어도 신속히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신속하게 성결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름진 땅에서 풍성한 소출이 나는 것처럼 영적으로 빛의 열매나 사랑장의 열매, 성령의 열매가 맺히기도 쉽지요. 또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구하는 것에도 신속히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보기에는 온유해 보이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그 온유함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영혼이나 맡은 사명에 있어서 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인데 이는 바로 그의 온유함이 영적인 온유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편한 일이 있어도 겉으로는 참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스스로 고통을 받는다거나 억지로 눌러 참다가도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폭발해 버리는 경우도 있지요. 또 어떤 사람은 비진리를 보면서도 남과 부딪치기 싫어서 타협하고 우유부단하게 행동하거나 성격적으로 조용하고 유순하기는 하지만 그 마음에 충성하고자 하는 열정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온유하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모습들은 영적으로 온유하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분명 온유한 사람이었지만 진리로 가르쳐야 할 때는 엄히 가르치고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심히 범죄할 때는 진노하여 크게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민수기 12:7에 보면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충성과 뜨거운 열정을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것을 볼 수 있지요.
   예수님의 경우를 보아도 너무나 온유하신 분이지만 때로는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강한 어조로 책망하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장사하고 더럽히는 사람들을 볼 때는 그 상을 엎으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쫓아내셨지요. 정녕 온유한 사람은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많은 사람을 품을 뿐만 아니라, 진리 안에서 필요하다면 누구보다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3. 온유의 열매를 맺은 사람은 천국에서 넓은 터를 기업으로 받아
  
   이렇게 온유의 열매를 맺은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했는데 그러면 온유한 자가 받는 기업이란 어떤 땅을 말하는 것일까요?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땅을 얻는다 해도 그것은 영원한 기업이 되지도 못하고 참된 복이라 할 수도 없으므로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땅, 곧 천국에서의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천국에서 땅을 얻는 것은 덕이 있어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기 때문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많은 사람이 중심에서부터 굴복하고 그 안에 품어지게 되며 덕이 있는 만큼 더 넓은 마음 밭이 되고 그것이 곧 영적인 권세가 되지요.
   예를 들어, 기관장이나 구역장, 혹은 주의 종이 덕이 있으면 양 떼가 먼저 사모하여 함께하고자 합니다. 머리된 사람들이 온유하고 덕이 있다면 그만큼 교회는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이 맡은 구역이나 기관에 불순종하고 악하게 찌르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를 외면하고 소외시키거나 '차라리 저 영혼이 없으면 좋겠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사랑하고 포용하여 기도해 주며 어찌하든지 그를 변화시켜 좋은 알곡이 되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하고 덕스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고 힘이 되지요. 그러니 양 떼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기 사모하며 그로 인해 힘을 내어 진리 안에 거할 수 있고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으로 인도한 사람은 그만큼 천국에서도 크고 좋은 상급을 받게 되지요. 이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천국에서 더 크고 웅장한 처소를 얻게 되며 그 집을 지을 터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더 많은 덕을 가지고 더 많은 사람을 포용한 만큼 더 큰 땅이 주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온유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이 깃들이지도 못한, 마음이 좁은 사람은 천국에서도 넓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천국에서도 제일 아랫단계인 낙원에 거하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을 품지도 못했고 죄악을 버리고 온유함을 이루지도 못했으니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1천층 이상부터는 집이 있으며 각자의 온유함과 얼마나 덕을 이루고 많은 사람을 포용했는가에 따라 집의 터가 달라지는데 특히 새예루살렘에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온유함이 온전히 임했으므로 넓은 땅이 있고 땅이 넓은 만큼 집도 크고 아름답게 되지요. 또한 집에 걸맞도록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 있고 함께 즐길 수 있는 호수나 수영장, 계곡, 운동장, 무도회장, 동산이나 각종 시설들도 있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 안에 품었던 수많은 사람들과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마음껏 잔치하고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축복 중에 온유한 자가 받을 복인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천국에 한번 들어간 후에는 '내 땅이 너무 좁고 내 집은 너무 작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온유함을 이루고 더 많은 영혼들을 품어 천국으로 인도할 것을' 하고 후회해도 이미 늦고 맙니다. 그러니 할 수 있을 동안에 열심히 마음의 성결을 이루고 온유함을 이루어 넓은 땅을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열심히 찾으십니다. 그래서 많은 영혼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품어 구원하고 진리로 인도하도록 사명을 주시고 천국에서 넓은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온유하고 하나님 앞에 합당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넓은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팔복(4)
 
이재록 목사 | 2002-02-17 | 마5:1-12 
 
오늘은 팔복 중 네 번째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임하는 축복에 대해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온유함에도 각각 영적인 깊이와 넓이가 달라
  
   우리가 새예루살렘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장의 사랑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그리고 팔복이 맺혀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성령의 열매가 다 맺히면 성결되어 영으로 들어간 것이고 팔복이 온전히 임하면 온 영이라 했지요.
   그런데 지난 시간 온유한 자에 대한 말씀을 들으시면서 여러분 중에 혹 궁금한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온유라는 항목은 사랑장과 성령의 열매에도 있는데, 팔복에 또 있으니 각각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 세 가지의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곧 유순하고 부드러우며 사랑과 덕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영적인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랑장의 온유가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온유함을 말하는 것이라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온유는 좀 더 포괄적으로 범사에 온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에서의 온유가 마음에 열매로 맺힌 것이라면 팔복은 성령의 열매가 온전히 삶 가운데서 효력을 발하여 축복을 끌어내리게 되는 것이지요.
   비유를 들자면 아름다운 나무에 탐스럽고 실한 천국의 과실들이 주렁주렁 맺혀 은혜로운 모습을 이루었을 때 이것이 성령의 열매가 맺힌 것이라면 팔복은 그 천국의 과실을 따서 먹음으로 유익을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팔복을 마음에 이루었을 때에는 행함으로 나타나고 그로 인해 삶의 매 순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본문 마태복음 5:6을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했습니다. 사전에 보면 의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또는 옳은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영적인 의로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이요 우리가 성결된 사람이 되기까지 거쳐야 될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선과 진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인 것이지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을 구하는 것처럼 의를 이루고자 간절히 사모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예전에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겪어 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다 해도 영화나 소설 같은 데 보면 배고픈 사람이 얼마나 절박하게 음식을 구하게 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음식다운 음식을 전혀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징그러운 벌레들이나 쥐, 나무껍질이나 풀뿌리조차 눈에 보이는 대로 먹게 된다고 하지요.
   이러한 배고픔만이 아니라 목마른 것도 견디기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도 체험해 본 분들이 많이 계실 텐데, 군대에서 여름날 땡볕 아래 마실 물도 없이 몇십 리씩 행군하다 보면 땀은 비 오듯이 흐르고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갑니다. 그러다가 길에 물웅덩이라도 있으면 앞 다투어 달려가서 정신없이 마시게 되지요. 그 물이 흙탕물이라 해도 당장 목을 적실 수만 있다면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3. 말씀에 순종하여 의를 행하는 자가 되면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시 119:123) 했으며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시 119:147-148) 하여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꿀처럼 달게 양식삼는다 고백하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이 정녕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하면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죄인되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당해 주셨으니 십자가의 사건을 정녕 믿는다면 말씀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하면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까, 어찌하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릴까 궁구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를 구하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말씀을 듣는 대로 열심히 순종하여 죄를 버리고 진리를 행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3:9-10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말씀한 대로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하는 자라야 구원받은 빛의 자녀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의로우신 말씀에 순종하여 행할 때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지요.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임하는 축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했는데 바로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팔복은 다 영적인 축복이므로 이 말씀의 의미도 영적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여기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르다는 것은 영적으로 배부른 복을 말씀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말씀을 사모하여 열심히 배우고 또 배운 대로 열심히 의를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55에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셨으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말씀하셨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니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열심히 듣고 행하여 양식삼는 것이 바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하셨으므로 아무리 스스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말해도 그에게는 구원도 없고 응답도 없으며 아무런 축복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말씀을 듣고 행하여 인자의 살을 먹고 마심으로 의에 배부른 사람이 되면 생명이 있으므로 구원받아 천국에 가게 됩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속하여 의에 주리고 갈급하여 말씀을 양식삼으면 우리의 영이 자라갑니다. 요한복음 6:35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주님의 말씀이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육적으로도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젖을 먹고 죽을 먹고 밥을 먹으면서 자라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지요. 그런 것처럼 영적으로도 영의 양식 곧 의의 말씀을 양식삼아 행해 갈수록 아이들의 신앙에서 청년의 신앙으로, 또 아비의 신앙으로 그 믿음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요일 2:14).
   그래서 영적인 깊이가 더하는 만큼 원수 마귀 사단을 이겨 능히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으며 점차 신령한 차원에 들어감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신령한 차원에까지 들어가면 아버지와 밝히 교통하여 범사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형통하게 됩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녀들이 의를 사모하여 행하는 만큼 성령의 감동 감화 교통함을 받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누리는 것, 바로 이것이 배부른 사람이 누리는 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앞길에 장애물이 있다 해도 피해 가게 하시고 어려움을 만난다 해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는지 알려 주시며 항상 축복의 길, 응답의 길로 인도해 주시지요. 또한 죄와 악을 깨달을 수 있고 깨닫는 대로 쉽게 버릴 수 있는 능력을 얻음으로 속히 성결을 향해 달려갈 수 있게 됩니다. 더구나 성령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편을 알고 행함으로 더욱 신속히 온 영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혼이 잘 되면 그만큼 육적으로도 축복이 따르게 되며 이 모든 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받는 영적인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태복음 4:4을 보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이 땅의 삶에서 육의 것을 취하기보다 영적인 것을 사모하여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삼아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를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하시는 것이며 여러분이 이런 사랑을 받을 수만 있다면 건강이나 물질의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이루고 장차 천국에서도 영광스러운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까지 항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여러분이 되심으로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것들로 항상 풍성하여 배부른 삶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팔복(5)
 
이재록 목사 | 2002-02-24 | 마5:1-12 
 
오늘은 팔복 중 다섯 번째로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임하는 축복에 대하여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본문 마태복음 5:7에 보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했습니다. 여기서 긍휼히 여긴다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가엾게 여긴다, 불쌍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긍휼은 무엇일까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양선의 마음과 비슷합니다. 양선이란 다투지 아니하고 들레지도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는 마음으로 바로 우리 주님의 마음이지요(마 12:19-20). 성령의 열매 중에 양선의 열매가 맺힘으로 양선이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과 거기에 징계의 행함이 더해진 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항목들이 우리 마음에 맺혀 있는 것이고 팔복은 마음에 맺힌 성령의 열매들을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했지요. 이렇게 행함으로 인해서 삶의 매 순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긍휼
  
   1) 용서의 긍휼
   양선이란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예수님의 마음이라 했지요. 여기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해도 아직 양심이 화인 맞지 않고 구원받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에 대해 참고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리대로 살지 못한다 해서 즉시 그를 버리지 않는 것을 나타냅니다. 아직 온전치 못하여 범죄하는 사람이라 해도 어찌하든 성령으로 깨우치고 진리 가운데 변화되어 갈 수 있도록 끝까지 인내하며 인도하시는 것이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누가 자신에게 악을 행해도 이해하고 용서하며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자기 입장에서 자기 유익을 좇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그의 유익을 좇아 주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고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도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여 우리가 우리에게 범죄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 때라야 우리가 범죄한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긍휼히 여겨 달라고 구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게 죄를 범한 형제에 대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여 무한히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어 줄 것을 말씀하시며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말씀하고 계시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크신 긍휼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모든 죄를 사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고통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용서받고 구원을 얻었으니 우리도 마땅히 상대를 용서하고 긍휼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육으로 보면 어떤 사람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악을 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믿음의 형제가 악을 행하여 큰 어려움을 당하게 하는 일도 있지요. 그러나 이럴 때도 긍휼의 마음이 있다면 미워하거나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않은 것은 돌이키도록 권면하고 진리로 변화되기까지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상대의 허물을 말하고 권면할 때도 상대가 악을 행한 것이 내 틀과 의에 맞지 않으므로 불편한 가운데 찌르는 것을 사랑의 권면인 것처럼 포장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내가 높은 마음이 되어 상대를 가르치고 내 뜻대로 주관하려고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참으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긍휼 가운데 그를 위해 대신 죽어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하며 권면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2) 징계의 긍휼
   얼핏 생각하기에 용서와 징계는 반대되는 말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징계의 긍휼은 미움이나 정죄함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징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6-8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징계도 따르는 것이요, 징계해서라도 진리로 행할 수 있게 하고 구원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데 자녀가 잘못을 고백하고 눈물로 회개한다면 여러분은 당연히 따뜻하게 안아 주며 용서해 줄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긍휼이지요.
   그러나 자녀가 말로는 회개한다 하면서 계속하여 잘못을 범한다면 권면하고 책망해야 할 것이며 그래도 듣지 않으면 징계의 매를 들어서라도 깨우쳐 줘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징계해서라도 돌이키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자녀가 아니라 이웃집 자녀가 자신의 물건을 도적질했다면 어찌합니까? 선한 사람은 이 때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지만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잘못을 기억하며 정죄하는 눈으로 바라보지요. 징계를 한다 해도 사랑의 징계가 아니라 미움과 악한 감정으로 징계합니다. 이런 미움의 징계가 아니라 사랑의 징계를 하는 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형제에게 사랑의 징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가 범죄하는 것을 볼 때 마음에서 정죄하여 여기저기 전하고 수군거린다면 사랑 없는 이웃집 부모와 같은 마음이지요.
   마태복음 18:15-17에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하여 범죄한 형제에 대하여 진리로 권고하고 징계하는 과정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알리고 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사랑으로 권면하여 돌이키게 하고 이를 듣지 않을 때에 윗 단계 분에게 말하여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교회에 알려 교회에서 치리해서 구원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는 것이 징계의 긍휼에 속하는 것이며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 아무 감정이나 미움도 없고 판단 정죄하지도 않으며 오직 사랑과 긍휼을 베풀 때 우리도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 밖의 긍휼
   예를 들면,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가령, 형제가 가난으로 인해 고통받는다면 말로만 "참 안 됐다. 불쌍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긍휼이지요.
   어떤 사람은 도와주고 싶지만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남을 도와주는가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나의 자녀가 굶고 있다면 내일 먹을 것이 없다 해도 지금 있는 것을 자녀에게 나누어 줄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에게도 이렇게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긍휼을 베풀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며 천국에서도 우리에게 영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가 구제를 한다 해도 범죄함으로 하나님께 징계받아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구제를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 요나서에 보면 고의적으로 불순종하여 연단받는 사람을 도울 때 그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징계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도우면 긍휼을 베풀었다 하면서도 오히려 어려움을 겪게 되므로 성령의 음성을 잘 들어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 병든 사람, 낮아지고 소외된 사람,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들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은 반겨 주고 가까이하지만 실패한 사람이 왔을 때는 등을 돌려 버립니다. 처음에는 몇 번 도와준다 해도 여러 번 반복되면 외면하고 푸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형제가 실패하여 낙심했다 하면 결코 외면하고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따뜻한 사랑의 마음으로 맞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줘야 하는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을 긍휼히 여김으로 핍박하고 욕한다 해도 전도해야 합니다. 그가 진리를 몰라서 핍박하는 것이요, 그를 긍휼히 여겨 전도하지 않으면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니 전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가까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 나라와 전세계의 진리 안에 살지 못하는 무수한 영혼들로 인하여 항상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복음 13:34을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이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될 때 여러분의 걸음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해질 것입니다. 마치 황무지에 장미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이 마지막 때 험한 세상에서도 포근하고 따뜻한 주의 사랑이 꽃피게 됨으로 많은 사람이 생명과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도 그 행함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시며 범사에 축복을 주십니다. 마음에 긍휼을 이루고 행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어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여러분 자신도 큰 긍휼과 축복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1 | 2 ] 다음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