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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아홉가지 열매(1) 이재록 목사 | 2000-08-20 | 갈5:22-23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 올바른 신앙의 척도가 되는 성령의 9가지 열매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하고자 합니다. 1. 신앙의 척도가 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팔복 그리고 사랑장 본문 갈라디아서 5:22-23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데 있어서 척도가 되는 말씀들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영으로 들어왔고 어느 정도의 믿음의 분량에 이르렀는지를 점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거나 성경을 지식적으로 많이 안다고 해서 믿음이 큰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러한 영적인 열매들이 얼마나 맺혀 있는가를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신앙의 척도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토록 사모하는 새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최종 목표에 얼마나 가까이 왔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팔복, 그리고 사랑장의 열매가 맺혀 있다면 적어도 믿음의 4단계에는 들어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천국가는 길에 있어서 큰 정거장 같은 역할을 해 주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우리가 어떤 곳에 가려면 목표 지점을 알고 가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서울에서 전라남도 무안에 간다고 하면 중간에 수원, 대전, 광주 등 큰 도시는 물론, 작은 읍, 면 단위의 마을을 거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적어도 큰 도시정도만 알고 있다면 '아, 내가 지금 어디쯤 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목표를 분명히 알고 그 목표를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도시나 마을들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목표 지점에 정확하게 도착할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지요. 이 세상에서는 어떤 장소를 찾아가려면 설령 전혀 길을 모른다 해도 길을 아는 사람만 따라가면 갈 수 있겠지만 천국으로 가는 길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천국은 옆 사람을 따라간다고 해서 함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믿음으로 구원받아 가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천국에 가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 안에 다 들어 있는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성경 66권의 말씀을 다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목표하는 천국, 그 중에서도 새예루살렘에 바로 가기 위해서는 설령 하나님의 말씀 66권을 다 알지는 못한다 해도 꼭 기억해야 할 말씀들이 있지요. 바로 무안에 가는데 있어서 제대로 가기 위해서 적어도 큰 도시들은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성경에도 이처럼 큰 도시의 역할, 즉 목표점을 가는 중간 중간에 큰 정거장과 같은 역할을 해 주는 말씀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팔복, 그리고 사랑장의 말씀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자신이 얼마큼 성결되어 새예루살렘에 가까워졌는지 또 신랑되신 우리 주님을 얼마나 닮았는지 분별하여 더욱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3.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해 나가야 본문 갈라디아서 5:22-23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했는데 그러면 먼저 성령의 열매란 무엇일까요? 열매란 씨를 뿌렸을 때에 그 씨가 싹이 나고 자라 꽃을 피우면서 맺게 되는 것처럼 성령의 열매 역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안에 성령님이 오심으로 이제까지 죽어 있던 영이 살아나고 그 영이 점차 성장함으로 맺게 되는 열매이지요. 우리 안에 성령이 오시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우쳐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주관해서 우리가 죄와 불법 등의 육을 버리고 변화되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래서 천국에 갈 수 있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신앙생활해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 가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령은 육적으로 비유하면 하나의 발전기와 같습니다. 발전기가 돌아감으로 전기가 발생하고 이 전기가 전구에 공급되어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임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역사하심으로 육에 속한 어두움들이 물러가고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맺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발전기가 있다고 해서 전기가 생기고 빛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지요. 이 발전기를 가동해야 하는데 이 발전기를 가동하려면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열매가 맺혀 빛을 발하게 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 불같이 기도하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좇고자 하는 것을 바로 성령의 소욕이라고 하는데 이 성령의 소욕을 좇아 열심히 행해 나갈 때 신속히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령의 소욕을 좇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소욕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육체의 소욕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아직까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비진리의 마음을 좇아 갖가지 죄와 불의와 불법들을 행하고자 하지요. 그래서 육체의 소욕을 좇다 보면 성령께서 탄식하심으로 마음에 곤고함이 찾아오고 점점 성령의 충만함을 잃어감으로 성령의 소욕을 좇기가 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은 서로가 상반되는 방향으로 이끌고자 합니다(갈 5:16-17). 그래서 성령의 소욕은 우리를 빛인 천국으로 이끌고자 하지만 육체의 소욕은 우리를 어두움인 지옥으로 이끌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소욕을 좇아 나가야 합니다. 만일 비진리의 마음을 좇아 행하고자 하는 육체의 소욕을 좇는다면 그 열매는 죄와 불법인 육체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체의 일이라는 열매를 내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갈 5:19-21). 결국 육을 좇아 행하면 그 결과는 썩어질 사망이요, 성령을 좇아 행하면 그 결과는 영생을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갈 6:8). 4. 성령의 열매 중 첫 번째 열매인 사랑에 대해 요한일서 4:7-8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사랑을 말하는데 하나님은 근본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도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을 안다 할 수 있는 것이며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라고 해도 다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사랑과 세상에 속한 육적인 사랑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첫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에 주셨던 사랑은 영적인 사랑이었지만,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죄가 들어와 영이 죽고 난 후부터는 사랑 역시 육적인 사랑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은 오직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고 마는 육적인 사랑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참된 사랑인 줄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간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결혼 전에는 서로가 당신 없으면 못 산다고 하며 그 사랑이 변치 않을 것처럼 말하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면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이 점차 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생각에 맞지 않고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상대를 힘들게 하며 쉽게 이혼까지 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이밖에도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은 물론 형제간이나 친구간의 사랑 역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적인 사랑이 많으며 자신의 유익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 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혹자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로부터 받으려고만 하는데 대부분은 내가 사랑을 준 만큼 상대로부터 받기를 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내가 충만할 때는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경우도 있으니 결국 이것도 받기 위해 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든 것이 육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리에 속한 영적인 사랑은 고린도전서 13:4 이하에 잘 나와 있는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보다도 한 차원 더 높은 사랑으로 자기 생명까지 줄 수 있는 희생이 포함된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랑은 자기적인 것이 전혀 없는 온전한 사랑으로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내어 주면서도 어떠한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그냥 주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사랑을 주셨으니 우리 역시 이러한 사랑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축복 주시지 않고 어렵게 놔두셔도, 가진 모든 것을 가져 가셔도 여전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요구하거나 나에게 잘 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나 대가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줄 수 있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지요. 이러한 사랑은 성결되어진 만큼 임하는 것이므로 모세나 사도 바울은 설령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진다 할지라도 자신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출 32:32, 롬 9:3). 또한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행 7:60).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온전한 사랑을 보이셨던 것처럼 주님을 닮은 사람들 역시 생명까지 주시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사랑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사랑에 대해 깨달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기회가 될 뿐 아니라 새예루살렘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히 사랑을 나누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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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아홉가지 열매(2) 이재록 목사 | 2000-08-27 | 갈5:22-23 지난 시간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첫 번째 열매인 사랑에 대해 말씀드렸고, 이어서 오늘은 희락과 화평의 열매에 대해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영적인 열매 분별의 척도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추수의 계절인 가을이 다가오는데 과연 어떤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한 말씀은 자신의 영적인 열매들을 분별할 수 있는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20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말씀하셨으니 각 사람은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하는 것이요, 아무리 잎이 많고 가지가 무성하더라도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결코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열심히 자신을 변화시키며 성령의 열매들을 맺어 날마다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2. 성령의 열매 중 두 번째 열매인 희락에 대해 희락(喜樂)의 사전적인 의미는 기쁨과 즐거움을 뜻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희락은 단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차원이 아니라, 어떠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전서 5:16 말씀처럼 좋은 일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궂은 일이 있다 해도 항상 기뻐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 안에 죄와 악과 불법 등의 육이 없으면 자연히 희락만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아담에게 희락을 주셨지요. 아담은 생령으로 창조되어 육이 없었기 때문에 슬픔, 눈물, 고통, 애통, 염려, 근심, 걱정 등 육의 요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에덴 동산에 살면서 희락과 반대되는 일들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상대성의 개념이 없었고, 따라서 자신에게 있는 희락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희락의 참 가치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가 들어와 육의 사람이 된 후로는 점차 하나님께서 주셨던 희락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육이 있기 때문에 슬픔, 눈물, 근심, 걱정이 나오는 것이며, 갖가지 문제들과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예로, 우리 마음 안에 시기 질투가 있다면 어떻습니까? 잠언 14:30에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많은 고통이 따르게 되지요. 이 밖에 남의 것을 탐하는 마음, 내 유익만을 구하려는 마음, 혈기나 짜증을 내는 것도 결국은 자신을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또한 근심이나 걱정도 마찬가지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근심, 걱정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것이 아닌 세상적인 근심, 걱정을 의미하며, 정녕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러한 근심 걱정이 있을 리 없습니다. 당장 일용할 양식이 없다 해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면 자신의 생각과 계획 속에서 행하다 보니 근심하고 걱정할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성령의 음성만 바로 듣고 나간다면 만사 형통이요, 축복이 넘칠 텐데 자기 안에 있는 욕심과 이론, 생각 등으로 인해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육의 것들로 인해 근심과 걱정과 고통, 슬픔 등이 찾아오고 마음에서는 점차 희락이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서 이러한 육의 모양들을 신속히 벗어 내어야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에게 주셨던 희락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지요. 이 때 느끼는 희락은 아담처럼 전혀 상대성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이미 상대성을 알고 체험한 후에 얻은 희락이기에 기쁨과 즐거움이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며 육이 아니기에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천국에서도 이와 같은 희락이 있기에 세세토록 기쁨과 감사가 변치 않고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감사와 기쁨의 조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진리를 깨달으며 작은 문제 하나를 응답받을 때도 감사하지만 무엇보다 기쁘고 감사한 것은 바로 구원의 기쁨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육적으로 부족함없이 행복한 삶을 살았다 해도 결말이 지옥이라면 그 사람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그러니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정녕 깨닫고 믿는다면 구원의 기쁨이 항상 넘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핍박과 고난을 당한다 해도(마 5:11-12) 이 역시 우리에게서 구원받은 기쁨과 감사를 빼앗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요 살아 계시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상만 큰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위로해 주시고 반드시 거기에 대한 보상을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참이요 정녕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가는 것임을 믿는다면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으로 승리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 중심에서 희락이 넘치는 사람들은 그 얼굴에도 희락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볼 때만 충만하고 웃는 얼굴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충만함과 기쁨이 있으므로 영적인 빛이 나는 것입니다. 물론 때를 좇아 하나님 나라의 일이나 사망으로 가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로 인해 심한 애통 가운데 거할 때도 있지만 그 때도 역시 마음 중심에는 희락이 떠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육적으로 도저히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생겼다면 지금 내가 중심에서 기뻐하고 있는지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한번 비추어 보십시오. 그 모습이 바로 우리에게 얼마만큼 희락의 열매가 맺혀 있는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이 아닌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가는 천국 백성입니다. 누가복음 17:21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말씀했듯이 천국 백성들은 그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하며 그럴 때 마음 안에 희락의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기뻐하는 삶(빌 4:4)을 살아가야 하며 또한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과 언제나 아름답고 선하며 좋은 것을 좇고자 하는 마음이 더해질 때 우리 안에 희락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될 것입니다. 3. 성령의 열매 중 세 번째 열매인 화평에 대해 화평(和平)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마음이 평안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누구와도 걸림이 없고 부딪치지 않으며 평화롭게 지낼 때 당연히 마음도 평안하게 되지요. 그러나 화평이 깨어지면 마음의 평안도 깨지는데 그 원인을 영적으로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의 마음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면 진리의 마음과 비진리의 마음이 있는데 성령께서는 진리의 마음을 주관하여 빛가운데 살아가도록 인도하시지만 원수 마귀 사단은 비진리의 마음을 주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게 합니다. 따라서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두 가지 마음 중에 진리의 마음이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대로 좇아 행할 때 화평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상대를 위해 희생하고 섬기며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것입니다. 또한 무례히 행치 않으며 설령 내가 옳다 하더라도 비진리가 아니면 상대에게 맞추어 주는 마음이요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으며 나를 드러내지 않으며 상대를 먼저 생각해 주는 것이지요. 여기에 편벽됨이 없고 이것도 가하고 저것도 가할 수 있는 진리 안에서 양면성이 있는 마음입니다. 바로 성령께서는 이러한 진리의 마음을 주관하시기에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 마귀 사단은 내 유익만을 구하고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하고자 하는 비진리의 마음을 주관합니다. 그러니 화평이 깨어지고 다툼과 갈등, 대립만이 생기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가정이든 사회든 국가든 또한 교회든 모두가 화평이 깨어졌을 때 시험 환란이 찾아오고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도 항상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 있지요. 모두가 찬성해도 혼자만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다른 사람들의 티를 보고 이를 주변에 전함으로 이간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 수군거리고 험담한 결과 불평, 불만의 소리들을 만들어 내고 당을 지으며 교회를 어렵게 하니 사단의 회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들로 인해 화평이 깨어지니 그런 교회는 부흥할 수 없고 원수 마귀 사단의 밥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마태복음 5:9을 보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화평을 깨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어두움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화평의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었다 해도 하나님과의 사이에 화평이 깨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 화평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주관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데(잠 16:7)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 죄의 담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이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었던 죄의 담을 허물기 위함이므로(엡 2:14)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의 죄를 버려 나가는 것이 하나님과 참된 화평을 이루는 첫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자기 자신과의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역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될 때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비진리의 마음들을 다 벗어 내고 온전히 성령의 주관에 승리하여 진리의 마음을 좇아 나갈 때에 자기 자신과도 화평함을 이루어 그 마음이 잔잔한 호수와 같고 솜털같이 부드럽고 온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먼저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다음으로 자기 자신과의 화평이 이루어지면 자연히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도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럴 때 온전한 화평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모두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사랑이 있어야 진리를 좇을 수 있고 진리를 좇을 때 희락이 위로부터 오며 화평 또한 임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화평이 있어야 마음 중심에서 희락이 나오며 화평이 있어야 온전한 사랑도 맺히는 것입니다. 또한 희락이 있으므로 활력소가 되고 충만함이 와서 더 열심히 신앙생활해 나가니 다른 성령의 열매들도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서로 연결되어지며 이 모든 것이 연합되어 하나를 이룰 때에 아버지 하나님의 근본 마음에도 온전히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온전한 희락과 화평의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뿐만 아니라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음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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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아홉가지 열매(3) 이재록 목사 | 2000-09-03 | 갈5:22-23 오늘은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오래 참음과 자비에 대해 증거하고자 합니다. 1.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려면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만드실 때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의 순리를 통해 영계의 법칙에 대해서도 깨달을 수 있도록 섭리해 놓으셨습니다. 즉 이 땅에서도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듯 영계에서도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많이 심기만 한다고 해서 무조건 많이 거두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좋은 밭에 씨를 뿌렸고 또 얼마나 정성껏 돌보아 주었는가도 중요하지요. 그저 씨를 뿌려놓기만 한다면 새들이나 짐승들이 와서 그 씨를 먹어 버릴 수도 있고 따가운 햇볕을 견디지 못하여 타 버리거나 싹이 났다가도 이내 죽어 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곧 씨에 비유했는데, 우리가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마치 마음이라고 하는 밭에 씨를 뿌리는 작업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똑같이 들었다 해도 그 결과는 사람마다 다른 것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려서 아예 심지도 않는 사람도 있고, 또 심었다 해도 얼마 후에 싹이 나고 꽃을 피워 열매를 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예배드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사단이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가는 경우도 있지요. 또 당장은 싹을 내는 것 같다가도 이내 말라 버리거나, 싹이 트기는 하지만 그 이상 자라지 못함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열매를 내는 경우라 해도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보게 되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심어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얼마나 많은 씨를 심었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씨를 얼마나 좋은 밭에 심어서 잘 가꾸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싹을 내고 꽃을 피워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자신의 마음 밭에서 돌멩이나 잡초 같은 악의 모양들을 신속히 제거하여 좋은 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밭에 씨를 심은 후에는 열심히 물도 대 주며 열매를 갉아먹는 벌레와 같은 원수 마귀 사단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항상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해야 하지요. 또한 말씀의 싹이 자라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기운을 막아 버리는 잡초와 같은 악의 모양들도 계속하여 뽑아 나가야 하며, 바로 이렇게 해 나갈 때 성령의 열매들이 풍성히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열매 중 네 번째 열매인 오래 참음에 대해 사랑장이라고도 하는 고린도전서 13장에도 오래 참음이 나오는데 이것은 사랑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반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오래 참음은 모든 것에 대한 오래 참음으로서 사랑장의 오래 참음보다 차원이 더 깊은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에 대한 오래 참음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일에 대해 참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희비(喜悲)가 엇갈리고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혹은 부부나 형제 친구 사이라도 어떤 일을 참지 못함으로 평생 등을 돌리고 사는 경우도 있으며, 사업의 문제 또한 참는 여부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하나님께 응답을 받을 때도 이 오래 참음에 따라 응답의 여부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이 세상에 육이 없고 영적인 것만 있다면 오래 참음이란 단어는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즉 악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을 참아야 하는 것이지 영에는 무엇을 참을 만한 악이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셨다’라는 말도 사실은 민망한 표현인 것이며 단지 사람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작은 일 하나라도 참기 위해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며 때로는 눈살을 찌푸리며 끙끙 앓기까지 합니까. 이는 참는다고는 하지만 악 속에서 참는 것이니 결코 오래 참음이라 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악하다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영적인 오래 참음으로 선과 진리 가운데서 참을 필요조차 없는 참음이요, 사실 온전한 사랑이 임해 있다면 어떠한 사람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품게 되며 아무런 감정이 없으니 용서한다거나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오래 참음에 대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지요. 첫째로,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후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세상에서 쌓은 악과 비진리가 많았던 만큼 작은 일 하나도 참지 못하여 혈기를 내고 감정을 품었던 일들이 많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참지 못해 마음에 온갖 악들이 나올 때는 여러 가지 비진리의 일들을 행했지요. 그러나 마음을 진리로 일구기 위해 오래 참으며 악을 하나하나 버려나갈 때는 마침내 아름다운 진리의 열매들이 맺히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마음을 개조해 나가기 위한 오래 참음으로서, 이러한 오래 참음을 통해 결국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 사이의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주 안에서 사람 사이에 참는 모든 것이 해당됩니다. 상대방이 내 의견이나 생각, 성격에 맞지 않더라도 항상 선 가운데서 이해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 사이에도 서로 성장 배경과 환경이 다르므로 어떤 일에 대한 의견이 엇갈릴 수 있지요. 이럴 때 서로를 이해하려 하고 선으로 생각한다면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옛말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는데 이를 영적으로 적용해 보면 마음에서 비진리를 뽑아 내고 영으로 일굴수록 더욱 고개를 숙인다는 의미입니다. 곧 주님의 마음이 되어 먼저 용서하고 이해하며 사랑으로 품어줌으로 모든 사람과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는 사람 사이의 오래 참음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린 기도와 간구에 응답에 대한 오래 참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당장 급하게 응답을 받아야 하는 상황일지라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사람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심으로 가장 적절한 때를 따라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기도한 것을 응답받으려면 반드시 참고 기다리는 오래 참음이 있어야 하지요. 또한 오래 참음에는 인내와 절제가 따라야 하는데 정녕 받은 줄로 믿는다면(막 11:24) 참고 기다리는 것은 하나도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 참음이 없다면 기도를 열심히 하다가도 응답이 늦으면 포기해 버리거나 의심하고 원망하니 이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요 결국은 응답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약 1:6-8).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면 응답이 올 때까지 의심 없이 믿고 기다리는 오래 참음이 필요한 것이며,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맞추어서 응답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복음 18장에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한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는데 한 과부가 자주 와서 밤낮 부르짖으니 이에 견디다 못한 재판관이 결국 그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물며 선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끝까지 구하는 자녀들의 기도를 외면하실 리가 없다는 말씀이지요. 갈라디아서 6:9에도 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했습니다. 참음이 없는 사람은 선을 행하고도 당장 눈에 보이는 보상이 없으니 결국 죄와 불법을 다시 행하며 세상과 짝하게 됩니다. 또 선을 행하면서 피곤하다는 것은 벌써 그 선행이 온전치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랑으로 선을 행하면 기쁨과 즐거움이 임하여 결코 피곤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혹자는 천국에 가고 싶은데 오래 참지 못함으로 나중에 교회에 나가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며 언제 하나님께서 영혼을 불러 가실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 다니다가도 '주님이 곧 오신다고 했는데 왜 오시지 않나' 하며 다시 세상을 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 3:8-9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천 년을 하루같이 참으시며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결코 주님께서 더디 오신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한 목회자라면 양 떼에 대해서도 선한 목자의 심정으로 오래 참음으로 이해하며 오직 천국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3.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다섯 번째 열매인 자비에 대해 자비(慈悲)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랑하고 가엽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비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라고 하는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불쌍한 사람을 보면 ‘어휴, 불쌍해라’ 하며 혀를 툭툭 찹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설령 내 형편이 어려워 내가 굶을지언정 그들을 위해 내 양식을 내어 주는 행함 있는 진실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자비는 상대를 용서하거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없는 문제라 할지라도 진리 안에서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진리 안에 들어오기 전, 자기 이기심 속에 살 때는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일들도 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용서하지 못하겠다 하는 마음도 악이라 하십니다. 물론 상대가 너무나 상식 밖의 행동을 하거나 심히 악을 발한 경우도 있겠지만 영적인 자비의 열매를 이룬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도 상대를 용서하고 이해하며 사랑해 줄 수 있는 마음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오히려 그런 상대를 도와 줄 수 있는 마음, 이것이 바로 영적인 자비의 마음이지요. 따라서 자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를 미워하고 싫어할 리도 없지만 설령 아무리 밉고 싫은 사람이라도 상관없이 은혜를 베풀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악인이나 선인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고 햇빛을 주시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러므로 자비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용서할 수 있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림으로 자신의 마음 밭을 좋은 밭으로 일굴 뿐 아니라 말씀의 씨를 잘 심고 불 같은 기도와 행함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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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아홉가지 열매(4) 이재록 목사 | 2000-09-10 | 갈5:22-23 오늘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풍성히 맺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면서, 지난 시간에 이어서 자비의 열매와 양선에 대해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 넘어야 하는 고비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순간들을 영적으로 바라보면 영으로 한 단계 더 뚫어 가는 과정이지만, 당시에는 벅차게 느껴질 수도 있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 자신을 돌아보면 어느새 영적으로 성숙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다시 그러한 고비의 순간들을 만난다 해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열매를 얻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씨를 뿌려서 열매를 맺기까지에는 태풍이나 폭우 등을 만나는 고비의 순간들이 있기 마련인데, 단단히 붙어 있는 가지와 그 가지에 든든히 달려 있는 열매는 비바람을 이겨내고 마침내 아름다운 결실로 나오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순간을 승리해 내었을 때만이 농부에게 수확의 기쁨을 안겨 주는 참 알곡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가는 과정에서도 때로는 고비의 순간이 올 수도 있지만 그 순간에도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단단히 접붙여진 가지가 되어 있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내고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울러 단에서 선포되는 영적인 말씀들을 통해 날마다 영혼을 살찌어 나간다면 마침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풍성히 맺힌 영의 사람들로 나와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2. 다섯 번째 성령의 열매인 자비에 대해 지난 시간에 자비(慈悲)란 인간 대 인간으로서 상대를 용서하거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경우라도 진리 안에서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자기가 옳다고 하면서 굳어진 자기적인 마음이 있다면 자비의 마음을 이루지 못합니다. 상대의 입장은 생각지도 않은 채 자기 입장과 유익만을 구하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의 틀로 인해 그 틀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자라면서 자기 나름대로 옳다고 굳혀온 자기적인 마음에 모든 것을 맞추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자신이 옳다고 하는 자기적인 마음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육을 벗어버리고 온전한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깊은 마음이라도 헤아리기 전에는 결코 스스로 옳다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태어나서 지금까지 진리 자체이신 주님께 친히 가르침을 받고 진리만을 보고 들으며 자랐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진리의 사람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대부분은 비진리를 보고 들으며 육의 사람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그것도 서로 지식과 교양, 생각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기를 만들어 오는 것이지요. 그러니 진리이신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육적인 자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참과 거짓, 진리와 비진리,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지식과 이론으로 가르침을 받고 비진리의 사람들로부터 보고 듣고 배운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자기의 모습 속에서 많은 비진리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비진리 가운데서 자기가 옳다고 굳혀 놓은 마음을 가지고는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하지 못하며 사랑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비의 마음을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적인 자기를 벗어버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인 자비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먼저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는 마음부터 이루어야 합니다. 한 예로,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비진리를 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판단하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어야 하지요. 이처럼 모든 것을 자기의 일처럼 넓게 받아들이고 사랑의 마음으로 상대를 돌아볼 때 비로소 상대편의 처지를 이해해 줄 수 있으며 상대의 마음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죄를 지으면서 상대의 죄는 용납하지 않으려 하고 손가락질하며, 또 마음에 맞지 않으면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비의 마음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손가락질 받는 사람을 더 불쌍히 여기고 고통 받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힘이 되어 줄까' 하고 마치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며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돕거나 구제할 때도 성령의 주관을 받아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열심히 노력해도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구제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죄 가운데 거함으로 늘 연단만 받는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먼저 그가 죄 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하지요. 그러므로 자비를 베풀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분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이 있으면 신속히 돌이킬 수 있도록 진리로 권면해야 합니다. 또한 자비의 열매의 알맹이는 바로 행함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여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행함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3. 여섯 번째 성령의 열매인 양선에 대해 양선(良善)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질고 착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양선의 영적인 의미는 단지 어질고 착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착하다고 하는 판단 기준을 양심에 둠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며 '저 사람은 착하다, 또는 나쁘다' 판단하게 되고 자신도 스스로 양심에 찔리지 않으면 착하고 선하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양심이라는 것도 보면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생각하는 선악의 기준과 저 사람이 생각하는 선악의 기준이 다르니 착하다고 하는 판단 기준도 다르게 되지요. 그래도 이러한 양심이 있기 때문에 비록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나름대로 판단해서 선한 쪽을 선택해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에서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마음인 양심이 있듯이, 주 안에서는 성령으로 영을 낳아 진리의 마음이 되어 선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바로 이 마음을 '양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영의 사람이 되어 마음이 진리로만 채워지면 그 때는 오직 선만을 좇기 때문에 양선의 마음이 곧 선 자체가 되므로 그 때는 굳이 양선이라 말할 필요 없이 그냥 선이라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양선의 마음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와지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12:19-20을 보면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하여 양선의 마음을 알 수 있도록 말씀하셨으니, 이를 네 분야로 나누어 설명하도록 하지요. 첫째로, 양선의 마음은 다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고 온갖 악한 말을 지어내고 궤계를 꾸미는 사람들과 결코 맞서거나 다투고 변론하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오직 선한 마음으로 일깨워 주셨고 선의 지혜로서 대하셨으며 피해야 할 자리는 피하셨던 것이지요. 우리도 이렇게 행하면 다툼이 생기지 않을 텐데 막상 그러한 상황에 처하면 그렇지 못한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누구를 권면할 때도 선의 마음으로 깨우쳐 주기보다는 상대의 티만을 보고 지적하므로 다툼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들보를 빼내어야 하며, 그럴 때 설령 상대의 티가 보인다 해도 그것을 드러내어 지적하기보다는 덮어 주려 하고 권면을 해도 사랑의 마음으로 상대의 영혼을 위해 해 주게 되지요. 이 때는 상대도 그 말에 담긴 사랑의 마음을 느끼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니 다툼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상대의 말에 변론을 하거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상대가 받지 않으려 할 때 계속 주려다 보면 이 또한 다툼을 일으키지요. 변론은 계속해서 변론을 낳으니 예수님처럼 상대가 시비를 걸어올 때 선의 지혜로서 더 이상 변론하지 못하도록 차단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차라리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또한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상대가 받지 않을 때는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진리의 말씀을 받지 않고 오히려 그 말씀으로 시시비비하려는 사람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7:6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먼저 선의 마음으로 상대를 품어 주고 또 선의 지혜를 좇아 행한다면 언제나 다툼을 피하고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양선의 마음은 들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요 아버지의 능력을 그대로 가지신 분이었지만, 그 위엄과 권세를 내세우지 않으셨고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셨고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심으로 항상 함께 하는 증거로 보장해 주셨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기 원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다툼이 나기도 하고 남을 시기 질투하며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험담하는 등 어떻게든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 남을 누르고자 하지요. 그러나 설령 이렇게 해서 아무리 사람들이 알아주고 인정해 준다 해도 막상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고후 10:18). 셋째로, 양선의 마음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나무나 화초를 키우면서 상한 잎사귀를 보면 아름다움에 흠이 되기 때문에 그 잎사귀를 잘라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선의 마음은 그것까지도 꺾지 않고 살려내려는 마음입니다. 상한 갈대란, 영적으로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하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오직 선만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악을 품고 나오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했지요. 이런 사람들이라도 예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시고 어떻게든 진리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조금이라도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거나, 조금이라도 주님을 영접할 만한 마음이 있으면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떠한 죄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망에 이르는 죄가 아닌 이상은 끝까지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라고 인내하며 참아 주시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양선의 마음은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습니다. 정녕 구원받을 만한 일말의 끈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보시고 그 영혼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어찌 보면 가능성이 없고 모든 것이 포기 상태에 이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찌하면 그를 살릴까' 하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지요. 결국은 상대가 악하여 스스로 사망으로 간다 해도 내 편에서는 '여기까지만'이라는 한계를 두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려는 마음이 양선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온전히 맺어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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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아홉가지 열매(5) 이재록 목사 | 2000-10-01 | 갈5:22-23 오늘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다섯 번째 시간으로 충성과 온유의 열매에 대해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참된 양선의 마음은 진리를 위해서라면 생명도 바칠 수 있어야 지난 시간에는 양선이란 성령으로 영을 낳아 진리의 마음이 되어 선(善)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라 했고, 양선의 마음은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으며 상한 갈대를 꺾지도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도 않는(마 12:19-20) 주님의 성품을 닮은 모습으로 나와진다고 했는데, 이런 양선의 마음이 임해 있다면 이미 그 마음에는 악의 모양이 없기에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서도 악한 모습이 나올 수 없습니다. 바로 마음먹은 대로 혼과 육이 순종하므로 오직 마음에 있는 선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선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도 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2:14-15에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이 있어서 혈기를 내고 노를 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를 낳아 주신 부모님께 어떤 사람이 침을 뱉으며 욕을 하고 함부로 대한다면 자녀된 입장으로서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양선의 마음을 가졌으니 결코 분내거나 다투지 말아야지' 하며 방관만 하실는지요. 이는 참된 양선의 마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상대를 미워하며 혈기 내어 다투라는 말은 아니지만 자녀로서 부모가 당하고 있는 욕을 어떻게든 막는 것이 당연한 도리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성전이 더럽혀지고, 더 나아가 악한 사람들로 인해 교회가 훼파될 처지에 놓였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찌해야 할까요? 하나님과 성전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생명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이는 오히려 비겁한 마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정녕 양선의 마음을 가졌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물리쳤던 다윗처럼 담대히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2. 성령의 열매 중 일곱 번째 열매인 충성에 대해 충성의 사전적 의미는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성, 도덕적 관념에서 임금에게 바치는 충직한 지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충성은 어떤 것일까요? 첫 번째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 이상을 해내는 것입니다. 한 예로, 어떤 사람에게 급료를 주며 일을 맡겼을 때 그 일을 잘 감당했다면 잘했다고는 할 수 있지만 삯을 받고 한 것이기에 충성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삯을 받고 일했다 해도 마음 중심에서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잘 감당했다면 충성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께 충성했다는 칭찬을 받으려면 자신이 맡은 것 이상을 감당해 내어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충성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내게 주어진 시간 그 이상으로 마음과 뜻과 힘, 정성을 다해 열매로 내었을 때 그 열매를 보시고 충성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마음과 뜻과 정성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했던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도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나라와 민족, 그리고 섬기는 임금을 위해 충성했던 사람들을 보면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만 감당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임금을 위해 온갖 고통을 이겨내면서 생명을 바쳐 충성했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주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이처럼 행하는 사람들을 충성스럽다 여기시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주 안에서 충성하고 희생하는 것은 결국 썩지 아니할 참되고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함이며, 또한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충성이니 참으로 값지고 귀한 일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충성은 온 집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12:7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 대해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하고 칭찬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충성이란 온 집에 충성하는 것이며, 그럴 때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온 집에 충성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충성해야 하는 분야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충성, 교회에 대한 충성, 일꾼과 직분자로서의 충성, 형제 간에 충성, 가정에서의 충성, 부모에게 충성 그리고 세상 일터에서의 충성이 있습니다. 그 중 어느 한두 가지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 바로 온 집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을 벗고 영으로 변화되면 온 집에 충성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영으로 변화되기만 하면 비록 적은 시간을 투자한다 해도 모든 것을 영으로 하기 때문에 반드시 열매를 거둘 뿐만 아니라 상대의 유익과 입장을 먼저 생각하므로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주어진 모든 분야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절제의 열매까지 맺혀지면 어느 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살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지지요. 그런데 모든 충성은 반드시 주 안에서의 충성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벗어나서 충성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범죄 조직 들어가 그 두목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했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충성되다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작은 일 하나에 충성한다 해도 반드시 진리 안에서, 주 안에서의 충성이 될 때라야 비로소 하늘나라에 상급으로 쌓이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충성은 영적인 충성입니다. 계시록 2:10에 보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지 육의 목숨을 다하기까지 충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 나가는 충성과 더불어 주 안에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며 모든 위치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을 뜻하지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육을 철저히 죽이고 성결되어가면서 충성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충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라면 당연히 죄는 싸워 버려야 하기에 죄를 버리는 그 자체가 상급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죄를 버리고 성결되어 아버지의 형상을 닮는 만큼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 곁에 더 가까이 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3. 성령의 열매 중 여덟 번째 열매인 온유에 대해 온유(溫柔)의 사전적 의미는 '인품이 온화하고 순직함, 부드럽고 유순,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듦'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온유함은 이렇게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덕(德)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많은 사람이 깃들일 수 있는 포근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온유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처럼 온유한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거침돌이 되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매사에 모든 것을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이해하고 포용해 주며 감싸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온유함에 대해 칭찬하신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민수기 12:3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말씀했지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 하여 40년 동안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참으로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겪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심으로 나타내 주신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도 그들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모세에게 갖은 원망과 불평은 물론 하나님 앞에 죄악을 행하며 심지어 대적해 오기까지 했으니 이런 백성들을 이끌고 40년 동안이나 광야 생활을 했다는 것은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처럼 온유한 마음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사람의 마음을 밭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온유한 마음은 바로 좋은 땅, 즉 옥토(沃土)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거친 황무지라도 열심히 개간해 나가면 결국 옥토가 될 수 있듯이 사람의 마음도 주 안에서는 얼마든지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개간해 가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거친 마음, 즉 상대와 걸리고 원수를 맺고 시기, 질투, 다툼이 있는 좋지 못한 마음이 점점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에는 우리 자신의 의지와 노력도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을 주시며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더욱 신속히 옥 토로 변화시켜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을 개간하는 것이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므로 자신의 굳은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이룰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육적인 온유와 영적인 온유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온유함을 이룬 사람이라면 그 마음이 옥토이므로 무엇을 심어도 신속히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데 '왜 나는 온유한데 기도해도, 부르짖어도, 철야해도, 금식해도 응답이 없는 것일까' 한다면 자신의 온유가 육적인 온유가 아닌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순해 보이고 얌전하며 때로는 다소 바보스럽게 보이는 것을 온유하다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유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온유한 것 같은데 자비의 마음이나 희락의 마음이 없는 등 다른 성령의 열매가 함께 맺히지 않으면 이 또한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정녕 온유한 마음이 되어 옥토가 된 사람은 자연히 다른 성령의 열매들도 함께 맺어 나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만큼 온유의 열매를 맺는 것은 성결을 이루는 데 있어서 지름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5:5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한 대로 온유한 사람은 이 땅에서 많은 사람을 품으므로 천국에서는 그에 대한 상을 영원한 기업인 하늘나라의 땅으로 받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넓은 땅을 소유했다 해도 그것을 천국에 가지고 갈 수 없지만, 천국에서 주어진 땅은 큰 자랑이요 영원한 것이며 그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세세토록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충성과 온유한 마음을 이루어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가는 가운데 모든 기도와 간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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