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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03/21
 

國母 살해한 일본인의 만행 ‘생생히’

조선을 죽이다혜문스님 지음 / 동국대출판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1909.10)가 올해로 100주년이 됐다. 그는 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는가.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사무처장 혜문스님은 “다시 안중근을 생각건대,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10가지 이유 중 첫째로 ‘우리나라의 국모(명성황후)를 죽인 죄’를 들었다”고 말했다.
스님은 명성황후의 죽음에 대한 탐구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일본 공사 미우라에 의해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사건의 죄과를 이토에게 물은 것이다. 바로 그 명성황후의 살해와 밀접하게 관련된 기록들, 시신이 불태워져 향원정 연못에 한줌의 재로 뿌려진 뒤, 시신 없이 2년 2개월 동안 치러진 세상에서 가장 길고 슬픈 장례식의 기록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는 1922년 조선총독부의 기증으로 일본 천황궁 황실도서관으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슬픈 역사의 기록이 천황궁에 있다는 사실은 나의 발걸음을 일본으로 기울이게 하는 인연으로 작용해 왔다.”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 밝히는 스님의 수행기록
 
“역사기록 되찾아가는 역할에 불교계가 앞장서야”

<사진>일본 후쿠오카의 구시다 신사에 소장된 명성황후 살해사건 당일 사용한 칼. 칼집에는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다(一瞬電光刺老狐)’란 충격적인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스님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가 왜 일본 천황궁에 있는가’라고 자문하고 명성황후 살해는 ‘조선을 죽이기’ 위한 일본의 책략임을 밝혀낸다. 혜문스님의 책 <조선을 죽이다>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국모를 죽인 자’들의 고향과 무덤을 누비면서 그들이 남긴 유품과 기록을 찾아 이국의 곳곳을 만행하는 스님의 비장한 수행기록이다. 
명성황후 살해에 직접 가담했던 당시 한성신보사 편집장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가 쓴 수기 <민후조락사건>은 일본에서 사건의 배경과 현장을 가장 생생하게 기록한 회고록으로 평가받는다. 고바야카 히데오는 <민후조락사건> 서언에서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한 동기와 그 결과에 대한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민비가 살해당한 명치 28년 10월8일, 그때 나는 경성(京城)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다가올 일본의 앞날을 생각하면 비분강개를 금할 길이 없어 동지들과 함께 미우라(三浦) 공사의 계획에 참가하였다. 우리는 대원군을 앞세워 궁궐로 들어간 뒤, 총성과 칼부림이 난무하는 틈을 타 몸소 암살에 뛰어들었다. …(중략)… 우리가 민비 암살에 참가했을 당시 마음속에 품었던 뜻은 이미 이루어졌다. 반도의 하늘과 땅은 이제 우리 일본의 것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진심으로 마음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희열을 참을 수 없다.”
 
고바야카와는 그러나 당시 미우라 공사의 지시와 자신들의 음모로 왕비 살해가 자행되었음을 밝히면서도 이 사건의 살해 주범은 조선인의 소행인 것처럼 기술함으로써 교묘하게 역사를 왜곡하고 일본의 책임 회피의 빌미를 만들었다. 그가 “민비의 치명상은 이마 위에 교차된 두 개의 칼자국이었다”며 “양복입은 조선사람이 지사들 사이로 섞여 들어와 칼부림을 한 것이란 소문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고 진술한 대목은 눈여겨 볼 만 하다.
<사진>명성황후 살해범 48명의 일본인 중 일부가 한성신보사 건물 앞에서 기념촬영하는 모습. 이들은 명성황후 살해 이후 “마음 속 희열을 참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명성황후 살해의 진범이 일본인이란 사실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일본의 저명한 문인 츠노다 후사코(角田房子)가 쓴 <민비암살>에는 “나카무라 다테오(中村楯雄)가 왕비의 침전인 곤녕합(坤寧閤)에 숨어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도오 가츠아키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고 기술했다. 또한 일본 후쿠오카의 구시다 신사(櫛田神社)에는 도오 가츠아키가 사건 당일 사용한 칼이 보관되어 있다. 칼의 수장(收藏)내역을 기록한 책에는 ‘조선 왕비를 살해한 칼’이라는 기록이 있고, 칼집에는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암호명 ‘여우사냥’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다(一瞬電光刺老狐)’란 구절이 새겨져 있다.     
책에는 이외에도 1895년 을미사변 당시 조선정부 고문관이었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가 을미사변 다음날인 10월9일에 일본정부의 법제국 장관인 스에마츠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외교라인을 통해 서간으로 보고한 최초의 공식문서인 <에이조 문서>의 원문의 영인자료와 전문 번역내용이 수록돼 있다. 문서에는 명성황후의 사체를 능욕한 입에 담을 수 없는 내용이 신랄하게 기록돼 있으며, ‘조선왕비 암살사건’이 조선 독립운동의 시발이 되었다는 취지의 발언도 있다.
 
혜문스님은 “을미사변 발발로부터 114년이 지났건만, 당시의 슬픈 역사를 생각하면 <에이조 문서>를 무심히 읽어내려가기가 쉽지 않았다”며 “역사의 진실을 규명해서 민족의 한을 풀고 빼앗긴 자존심과 역사의 기록을 되찾아가는 역할에 불교계가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target="_blank">tomato77@ibulgyo.com
 
 

크늘채 2009.10.16  17:36

네에....글 잘 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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