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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9번- 국밥 - 국밥은 눈물이다-
국밥은 우리 생활에서 가장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종류도 다양하게 많지만 그 맛이 다르기 때문에 먹는 이의 입맛에 따라 골라 먹는 재미도 여간 쏠쏠하리라. 그러나 그것보다는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서민들에게는 삶의 애환이 담긴 눈물의 국밥이며 삶이며 생명인것이다. 따뜻한 국밥 한그릇으로 허기진 속을 채우고 또 다시 삶의 세상속으로 나서는 발걸음은 희망의 눈물이 아니겠는가.
-희망가를 부른다 .이마의 깊은 주름은 세상을 덮고 머무는 나를 본다. 국밥은 눈물인 것을.........- 
@ 2009. 멍석작 / 국밥 ( 화선지에 수묵, 물감 50 x 80 ) @ 전시일시 : 2009 년 6월 한 달간 @ 전시장소 : 클레르몽-페랑시 관광의 집 홀 전시공간 (Le hall de la Maison de Tourisme de la ville de Clermont-Ferrand)
@ 전시내용 : 2명의 한국 출신 화가의 먹화작품 및 프랑스 거주 1명 (김문태, 석창우, 수니아) @ 전시제목 : 미풍은 어디서 오는가 ? ( D’o? vient la brise ? ) @ 전시조건 : 1.클레르몽-페랑시의 초청 전시회 2.시는 초대장, 광고 포스터 제작 및 배부, 전시 개막식 칵테일, 각종 메디어 광고, 그림의 보험료, 전시장 무료 대여, 전시장 지키기 및 방문객 안내를 위한 인력지원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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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집에서 / 최산 시
노래를 부른다 허리가 굽은 그가 탁자를 타닥치며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희망가를 부른다 이마의 깊은 주름은 세상을 덮고 머무는 나를 본다
그렇다 저 노인은 가는 길을 안다 끝내 흙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다.
-장사익 노래로 유명한 국밥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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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문화의 유래에 대해
우리나라사람들은 국을 무난히 좋아했습니다. 국밥은 멀게 보면 보신탕(예전에는 개장국이라고 불렀는데 이승만 전대통령이 듣기가 뭐하다고 보신탕으로 개명시켰다는 설이 있고 그 후에 사철탕, 멍멍탕, 보신탕 등 다양한 애칭이 생겨났음)에서 그 조리법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 보신탕의 기원은 국내 석기시대 유적지에서 개 뼈가 발견되거나 심지어 1795년 음력 6월18일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상에 개장국을 올렸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로 유서기 깊습니다.
이 보신탕으로부터 시작된 국밥은 국밥의 원조격인 '따로 국밥'을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19세기 말엽에 대구 읍성의 관문격인 영남제일문(남문)과 서문인 달서문, 북문이 공북문, 동문인 진동문 앞에 짧은 윗저고리 밑으로 젖을 훤히 드러낸 뚱보 주모가 세 자(약 1m) 길이의 놋쇠 국자로 가마솥 가장자리로 모이는 벌건 쇠기름을 사방으로 휘휘 내저으면 한 과객이 국밥을 주문합니다. 그러면 주모는 오지 뚝배기에 찬보리밥 한 두 덩어리를 떠 낸 뒤 쇠고기국으로 토렴(찬밥을 뜨거운 국으로 덥힌는 것)을 하는데 찬이라 해 봐야 깍두기가 전부입니다.
당시 대구에서 국밥집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은 현재 중앙로 YMCA 옆 골목에서 뽕나무 골목(염매 시장에서 구 효성초등학교 쪽으로 나가는 좁은 골목으로 임진왜란 당시 한국으로 귀화한 두사충의 세거지였다고 함)으로 나가는 길 양쪽입니다. 이 공간은 달성 서씨 부자들이 밀집해 있던 진골목으로 연결된 19세기 말 대구의 핵심 상권으로, 1893년 청도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온 최초의 일본 상인 히자즈끼 마스키치와 무로가 굳이 남문 근처에 상점을 연 것만 봐도 이곳의 파워를 짐작할 수 있으며 이어 서문 밖 거리에 구리다 에이치로란 일본 상인이 조일상회를 개점했죠.
이 영남제일문을 통해 아침 일찍 감영안으로 들어가려면 이 골목 근처 주막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으며 남문 앞 좌판과 주막, 난전은 훗날 염매시장(동아소핑 옆 염매시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대구를 따로 국밥의 고장으로 만든 주인공은 '국일따로국밥(중앙네거리 구 대구은행 본점 옆)', 육개장으로 한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옛집(중구 시장북로)', 설렁탕 맛의 진수를 보여주는 '부산설렁탕(중구 북내동 종로초등하교 후문 옆)'은 대구 국밥의 빅3 로 6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잇는 달구벌 맛 지킴이라고 합니다.
그 뒤를 잇는 국밥이 '설렁탕'으로, 설렁탕은 세종이 선농단(宣農檀)에서 의례를 행하고 직접 시골 농부와 함께 논을 가는 친경(親耕) 행사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 행사를 거행하던 중 갑자기 폭우가 내려 식사 장소로 이동을 하지 못해 점심을 굶을 판이었고 보다 못한 신하들이 친경 때 쓰던 소를 잡아 맹물에 넣고 끓여 설렁탕을 해 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특히 이 국은 국물이 우유처럼 뽀얗고 맛이 농후하다 하여 설농탕(雪濃湯)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설농탕에 매운 고춧가루가 가미돼 '육개장, 쇠고기 국밥, 선지국, 소피국'등이 파생되게 됩니다.
육개장이란 말 속의 '개장'은 바로 보신탕을 의미하며 '육'자가 붙은 것은 개고기대신 쇠고기를 사용하면서 생긴 말이죠. 육개장은 일명 쇠고기국, 장국밥으로 통하며 육개장은 양념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설렁탕과는 달리 입안이 얼얼하도록 무척 맵고 짭니다.
여름에는 푹푹 찌고, 겨울에는 동장군한테 시달리는 혹한혹서(酷寒酷暑) 지역에서 살아가는 대구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절식(節食)입니다. 물론 서울, 경기도에서는 맵지 않는 설렁탕이 잘 팔렸으며, 대구의 육개장은 한 때 대구탕으로 불렀는데 대구탕이란 말이 생선 대구탕과 잘 구별이 되지 않아 육개장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따로 국밥'의 탄생은 국과 밥이 한꺼번에 들어간 국밥을 싫어하는 손님들 때문에, 서술동 할아버지와 김이순 할머니가 문을 연 '국일따로국밥'에서 초창기에 한 손님이 할머니한테 특별 부탁을 해야 먹을 수 있었다고 하며 그 후로는 할머니가 따로 먹을 건지 함께 말아서 먹을 건지를 일일이 손님들에게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차차로 밥말이 국밥파는 국과 밥을 말아주는 서성로 돼지골목 등으로 이동하고 따로국밥집에는 국 따로 밥 따로 파들이 많이 모여들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 출처 야후지식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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