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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07/22
 

돈오돈수 돈오점수 -「보조 원돈문의 실체와 성철선사의 원돈비판」의 논평

2009.06.09 22:17 | 선불교 | 부송

http://kr.blog.yahoo.com/mahabuddhism/1169 주소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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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학회답변]「普照 圓頓門의 실체와 性徹禪師의 圓頓批判」의 논평
 

Q/ CE 2005년 9월 21일자 선학과 학생의 질문: 普照 圓頓門의 실체와 性徹禪師의 圓頓批判 - 선학과
「普照 圓頓門의 실체와 性徹禪師의 圓頓批判」이란 정경규 선생님의 논문에 대한 논평 요청입니다. 자료를 정리하던 중 본란의 내용과 작성자 이름이 작업 도중에 멸실되었습니다. 질문자님께 거듭 사과 말씀드리고요...... 자신을 <선학과 학생>이라고만 밝히신 질문자는 정경규 선생님의 논문에 감복한 나머지 자신의 心得이 과연 객관적인 이해인지를 평가 받고자, 논평을 신청하였다고 합니다.

논문:
http://buljahome.com/songchol_file/4_folder/file4-8.htm
A/ CE 2006년 4월 19일자 역경학회의 답변: 手談의 행마처럼 가볍게도 두텁게도 쓸 수 있는 것이 논문이고 글쓰기라 말한다면, 정경규 선생님의 논문은... 실로 筆鋒도 날카롭게 잘 쓰신 멋진 글이라 하겠으나 상대의 논조에 너무 두텁게만 응수하신 나머지 오히려 運石의 妙가 바래는 감도 없지 않습니다.
  상대와 論格을 맞춰야 하는 것이 對論이란 점을 감안터라도... 이처럼 그 立論하려는 바가... 敵論者의 허접한 論所依處까지 일일이 상대하고자 그 論陣하는 행마를 애써 두텁게만 가져간다면, 혹 찌질이들 생떼에 다 잡은 대마도 물리고 덤으로 漸修論과 같은 異端邪說에게 살 길마저 내주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정 선생님의 논문에다 가볍게 급소를 찌르는 사족을 하나 보태 봅니다만, 어쨌든 「普照 圓頓門의 실체와 性徹禪師의 圓頓批判」이란 이 귀중한 논문은 단순한 墨籍의 誦習만으로는 쓰지 못하는, 가히 論者 자신의 宿世善根이 유감없이 발휘된 當世罕見의 正論 임에는 틀림없겠습니다.

  실제로 돈오와 점수에서 소위 <漸+修>란 말은... 해당 語義상 애당초 성립조차 불가능했던 용어였답니다. 왜냐하면 自悟와 悟他에서의 ‘修’로 번역되어진 Sanskrit 원어는 ‘Dhū’나 ‘Krt’인데 여기서의 Dhū란 동사는 대나무를 탁하고 단박에 쪼갤 때 나는 소리인 Dhū란 擬聲語에 語源하는 말인 때문에 더 더욱 그렇답니다.
  초기의 번역가들이 이 Dhū란 말을 역출하는 때 <당해 語義에서 소추되는 번역상의 等價性>을 확보하고자 ‘斷’이라든지 ‘破’란 말 등등에 우선하여 ‘대나무 탁하고 쪼갤 修’로도 새겨지는 <소위 修의 字義에 내포된 ‘斷’의 勢急相>을 살려서 번역한 것이 바로 '修'인데... 아무튼 法相으로서의 ‘修’는 ‘닦을 修’가 아닌 ‘대나무 탁하고 쪼갤 修’란 의미에 내포되는 刹那의 時因性 때문에도 合釋에 기준하여 修의 頓漸을 판단하는 때, 어떤 경우에도... 시간적 漸次性을 의미하는 ‘漸’을 관형하여 시간적 速疾性을 내포하는 ‘修’를 상호 모순되게 합석하는 <漸修>란 용례의 경우는 당해 의미-통사론적 관계상 그러한 합석의 가능성 여부를 판별한다는 일마저 무의미해지는 소위 ‘토끼뿔’ 같은 헛된 말에 지나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동사 또는 명사의 합석이란 문제에 있어서 소위 ‘修의 修相’에 상당하는 유일 적법한 용례는 오직 Sanskrit語 Dhū의 의역에 해당하는 ‘頓悟’ 내지는 ‘頓修’인바... 여기서 破한다거나 斷한다는 뜻의 동사인 Dhū와 Krt를 복합시켜 쓰는 경우도 혹간 소견되는 <頓修>는 그 遮遣되어지는 心地를 無心에다 두고 그 發話되어지는 體性을 無功用에 두는 正因의 論體로써 소위 <점수> 따위와 상대되는 말로 쓰임새가 결정되는 言陳이 아니라 그 자체적으로 이미 自悟와 悟他를 모두 만족하는 換義的 명제로써만 쓰여진 말이랍니다.
  대체로 ‘修’의 頓이라는 소위 勢急을 기표하는 법상이 漸의 의미로 訛傳된 경위를 볼 것 같으면... 예전에 神秀가 지은 “身是菩提樹요 心如明鏡臺려니 時時勤拂拭하여 勿使惹塵埃하라”는 눈 먼 게송에서도 소견되듯이 '有功用의 닦을 修’를 無功用의 끊는 공부로 착각하는 경우들이 대표적이겠습니다.
  물론 禪宗에서도 圭峰대사처럼 혹간 ‘대나무 탁하고 쪼갤 修 Dhū’를 ‘닦을 修’로 새기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하겠으나 이도 역시 『화엄경』에 근거하여 引出佛性하는 悟他에서의 ‘見 Drs’하는 도리를 중생에게 점차로 開權 能立시키고자 하는 化敎方便으로 삼으려는 것인지라 이에 근거해서 禪宗에서도 ‘修’를 頓漸으로 나눈 적이 있다고 견강부회할 수는 없답니다.
  예전에 성철 큰스님께서 언급하신 적도 있는, “漸修라 말하면 이는 敎乘에 불과하다”는 말씀도 바로 이같은 悟他의 方便이 되는 ‘修’의 言依的 論體가 그 化敎되는 중생에게 所作되려면... 假說로써만 그 이치가 言敎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다름 아닌지라 혹 이러한 말씀에 기대어 敎乘的 解釋의 一環으로서의 ‘보조의 漸修’ 또한 공부고 참선이 아닌가고 부질없이 이 궁리 저 궁리한다면 이는 어딘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병통 중의 대병통이랄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보조 스님의 점수론>이란 바로 이 ‘修’의 전거에 대한 오해의 소산이고 공부에 대한 일종의 환각에 지나지 않는지라 당해 논지를 어떻게 莊嚴하든지 간에 이는 禪宗 修行의 서릿발 같은 淸白家風을 좀먹는 <毒樹의 毒果(Fruit of Poisonous Tree)> 이론에 다름 아닌... 못내 공부도 아니고 참선도 아닐 뿐만 아니라 더 더욱 교계 일각에서 되도 않는 <점수> 운운하며 파당만 짓는 찌질이 패들이 주장하듯이, 敎家의 敎乘조차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앞서도 예증하였듯이 "自悟하지 못하고 어떻게 悟他케 할 것이냐"는 문제를 약간만 생각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겁니다.

육조대사께서 게송을 붙이신 황매현 五祖寺의 벽

원문: http://buddhism.org/~abc/db/read.cgi?board=catechism&y_number=58&nnew=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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