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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도록용 리플릿에 실릴 글을 쓰겠다고 7시 부터 노트북을 열어 놓고 있다만.....
한줄도 못썼다.
어우~ 도대체 나에게 있어서 미술치료란 머냔 말이다!!!!
아래는 이번 전시회를 위해 그분이 뽑아주신 질문 에 대한 나의 답.
이건 1시 부터 열어 놓고 5시까지 썼다. 정의는 어려워!
암튼 질문지를 받고 정말 깜딱 놀랐다.
딱 4번 만났을 뿐인데, 나를 간파하는 어휘 8개를 뽑아냈다.
이래서 내공 강한 사람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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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미술이란? 미술은 새로운 나를 받아들이는 예행연습의 장이다. 나는 ‘나’라는 인간을 알고 싶다. 알아 갈수록 양파 껍데기처럼 까도 까도 새로운 내가 계속 나온다. 이 새로운 양파 껍데기가 나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만만치 않다.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 나의 ‘추한 면’을 받아들이기 까지는 객관적인 시각과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일부로 인정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 없이 그냥 받아들이면 금방 부정하던가 또 다른 양파 껍질로 합리화 시키게 되더라. 가끔은 인간 말종-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 두렵고 나를 비난 할 것 같은 다른 이들의 시선이 무서워 외면하게 되기도 한다. 미술은 나에게 ‘받아들이기’ 연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이고 도구이다. 썩어 문드러졌든, 말라 갈색으로 변해버렸든, 혹은 달콤하고 즙이 가득 하든 간에 그 놈을 나로 인정하고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체가 미술이다. 사실 미술을 통해 나를 인정하고 들어내고 나면 별거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새로운 양파 껍질이 나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다음 껍질을 깔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n 체험이란? 체험은 양파 껍질 까는 작업이다. 나에게 체험의 의미는 ‘체화(體化)를 위한 전 단계‘ 양파 껍질을 까다 보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만져보고, 맛 보면 이상한 놈들이 있다. 제대로 알려면 맛을 봐야 한다. 난 양파 껍질을 까다가 내가 봉사에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뿌듯해 했었다. 그래서 맛을 한번 보기로 하고 1년 동안 봉사를 했다. 봉사라는 체화(體化)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나란 사람은 ‘자원활동(봉사)을 직업으로 갖고 사는 멋진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거다. 체험해 보지 않았다면 난 아직도 내가 맘 내키면 언제나 봉사를 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말 섞기 불편한 부류는 ‘실천하지 않는 지식인’ 카테고리이다. 체험하지 않는 지식은 너무 가볍다. n 질병이란? 질병이란 마음 혹은 정신의 뒤틀림에 대한 몸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난 기본적으로 육체는 정신의 ‘사념체’라고 믿고 있다.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을 생각해 봐라.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아토피안(atopian)이었고 치료를 위해 안 해본 게 없다. 육체적 치료가 효과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정도의 치유를 가능하게 했던 것들은 대부분 정신작용에 의한 것이다. 종교, 심리치료, 미술, 단식을 통한 명상, 그리고 수행하는 삶! 심지어 처음 집단치료를 끝냈을 때 내 피부는 화장품 모델 보다 더 좋았다. n 치유란? 자신에 대한 사랑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전제는 양파 껍질을 벗겨낸 후의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양파 껍질을 벗기기 전에는 ‘진짜 나’가 아닌 ‘내가 생각하는 나(我像)’가 대상이 된다. 사랑 받는 대상이 달라지면 치유가 불가능 하다. 예전엔 ‘언제나 봉사를 할 수 있는 나’라는 상을 사랑했는데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 봉사 할 수 있는 나’를 사랑한다. 그래서 예전엔 치유가 잘 안됐다. 껍질을 하나씩 벗길수록 대상이 점점 명확해져, 사랑의 밀도는 높아지고 치유력은 커지는 것이다. n 깨우침이란?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음…. 나에겐 양파 껍질 벗기는 게 깨우침이다. ‘나’라는 인간을 알게 될수록 나의 가치관은 명확해 지고, 객관적인 시선을 갖게 된다. 즉, 작아진 나의 가치관은 접어버리기가 쉬어지고, ‘사람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보는 게 조금씩 가능해 진다. (양파는 껍질을 벗길수록 작아지지 않는가?) ‘나’라는 인간을 몰랐을 때는 자기 합리화에 빠져, 다른 사람이나 상황들을 내 편한 대로 판단하고 평가했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양파 껍질을 줄창 벗기고 있는 중이다. ㅡㅡ; 나에게 깨우침이란 나를 알고, 이전에 만들어 놓았던 나라는 상을 버리는 과정, 수.행. 그 자체이다.라고 쓰고 있지만 여전히 어려운 질문이다. n 나눔이란? 말 그대로 가진 것을 ?내가 힘들지 않을 만큼만- 나눠주는 것이다. 양파 껍질을 까다가 남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껍질을 발견하면 조금 주는 거다. 걸인에게는 돈을,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기도 하지만, 나의 특별한 양파 껍질은 ‘이해’이다. 나는 ‘이해’에 대한 이상향이 높은 편이다.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 그래서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나눔은 상대에 대한 이해이다. 이해 받고 위로 받고 싶은 사람들은 나를 찾아와 양파 껍질을 조금씩 가져간다. 이게 나의 나눔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껍질을 벗겨 내(我像)가 작아 질수록 집착은 줄고 나눠주기는 수월해 지는 것 같다. n 자아란? ‘나’가 자아 아닌가? 앞에 내내 얘기 했지만 지대로 된 나.를 얘기하는 거다. 내가 만들어 놓은 像 말구. 심리학에서는 전 인류의 1%만이 자아를 본다고 한다. 그래서 난 순수한 내 자아 보기를 애당초 포기했다. 그냥 자아 근처쯤 가보자. 머 이런 맘으로 인생 끝나는 날까지 해보기로 했다. 근데 까나가다 보니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예전보다 줄어들고 있다. 이러다 나라고 할 수 있는 게 아예 없어지는 거 아닌가 두렵기도 하지만, 나의 양파는 까도까도 끝이 없다. ㅋㅋ. 사실 1%안데 들었던 마더 테레사 수녀님, 간디 등등은 자신을 버리고 다른 것을 위해 헌신하지 않았는가? 정말 자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존재하는가? 자아란 놈을 보고 나면 냅따 버릴 수 있을 만큼 별거 아닐지도 모르겠다. 암튼 양파 껍질 까기를 계속하다 보니 부수적으로 생긴 이익들이 많다. 식탐이 줄고, 30년 만에 하고 싶은 일도 찾았고, 짜증도 줄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사람들의 입방아를 덜 신경 쓰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양파 껍질 까기를 좀더 쉽게 해준다. 이 길이 내 삶의 올바른 방식이란 확신과 함께, 계속 껍질을 까나갈 수 있는 용기와 길을 보여 주는 것이다. n 타자란? 소외 받은 자들. 서양인에 대한 동양인, 남자에 대한 여자, 부자에 대한 가난한 사람, 양부모 가정 아이에 대한 한부모 가정의 아이, 두 다리 있는 사람에 대한 다리 불구자, 부분 맹인에 대한 전맹인… 결국 ‘상대적인 기득권 층’에 대한 ‘비 기득권 층’이라고 생각 한다. 어떤 분류 기준을 갖느냐에 따라 누구나 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시선은 중요하다. 타자도 같이 살고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바라봐야 한다. 옛날엔 장애인을 격리시켜 돌봐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했으나 요즘은 장애우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고 문턱을 없애고 전용 화장실을 만들고 있다. 타자의 기준이 나라에 따라, 시대에 따라 언제나 변형 될 수 있다는 걸 알면 그 기준을 약화 시키거나 없애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원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기준이 다원화 되면 결국 ‘좋다/나쁘다’의 구분이 무의미 해진다. 그냥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불편한 사람에게, 많이 가진 사람이 조금 가진 사람에게 조금만 나눠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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