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쓴 발랄한 로맨스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후속작. 대물 김윤희, 가랑 이선준, 걸오 문재신, 여림 구용하, '반궁의 잘금 4인방'이 돌아왔다.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에서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 했던 정조의 참모습과 규장각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준다. [알라딘 제공]
‘공부가 가장 쉬웠던’ 성균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피똥 싸는 건 예사고, 없던 다한증까지 생긴다는 돌아온 ‘잘금 4인방’의 더욱 파란만장해진 규장각 나날!
왕의 지나친 총애 덕분에 사이좋게 규장각으로 발령 난 잘금 4인방. 동생 윤식과 바꿔치기를 하려면 외관직 발령만이 살길이었던 윤희는 앞이 깜깜하다. 윤희 윤식 남매의 사기행각은 이제 그들만의 문제를 벗어나, 발각되는 날엔 윤희의 가문은 물론 선준의 인생, 위세 높은 좌의정 대감 댁이 쑥대밭이 될 상황이다. 수염도 안 나는 주제에 규장각에 출근하는 것만도 몸이 떨릴 일인데, 윤희의 정체를 안 좌의정 대감의 진노는 윤희의 앞날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운다. 급기야 선준과 윤희의 혼사마저 중단되는데…….돌아온 ‘반궁의 잘금 4인방’ 10만 독자가 기다려온 바로 그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시즌 2
유교와 당쟁과 성균관 유생들을 소재로 한 무겁고 딱딱해질 수 있는 역사 이야기에 연애담이 어울릴 수 있을까? 정은궐은 그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녀는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에서 시대에 대한 깊은 고민, 사서를 바탕으로 한 철저한 고증, 그 시대의 사상으로 살아서 움직이는 등장인물들을 더한 다음, 그 모든 이야기를 설렁설렁 잘 읽히지만 깔끔하고 흠잡을 데 없는 문장으로 씨줄과 날줄을 짰다. 그리고 연애담을 은근슬쩍 집어넣는다. 그것도 조선시대판 ‘엄마 친구 아들’인 남자 주인공과 병약한 남동생 대신 남장하고 과거를 보게 된 여자 주인공의 연애담을. 그 솜씨는 임방울이 ‘쑥대머리’를 부르거나 이매방이 살풀이를 추는 것엔 못 미칠지 모르지만 그것에 버금간다. 우린 때로 살아가면서 읽는 내내 행복해지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그런 글을 만날 때가 있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 바로 그런 소설이다. ― 2007년 8월 11일 중앙선데이 [예스2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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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알고 보면 재미있는 박물관 이야기 1. 박물관은 살아 있는 역사책이다 2.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박물관이다 3. 문화재를 알아야 박물관이 보인다 4.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힘든 국보 지정
2부. 박물관에서 만나는 조선시대 이야기 1. 조선 최고의 예술과 과학 - 고려대학교박물관 2. 임금의 하루를 엿보다 - 국립고궁박물관 3.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국립민속박물관 4. 세계인의 찬사를 받은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 서울대학교규장각 5. 서울은 언제 만들어진 도시일까? - 서울역사박물관 6. <대동여지도>의 웅장함과 섬세함 -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7. 조선의 진정한 프로페셔널 - 세종대왕기념관 8. 두 번 다시 없어야 할 전쟁의 역사 - 육군박물관 9. 자연과 어우러진 신의 정원 - 조선왕릉 10. 백성이 잘 살아야 나라가 잘 산다 - 조세박물관 11. 조선 최고의 명의를 만나다 - 허준박물관
3부. 박물관에서 만나는 근대사 이야기 1. 목숨보다 소중했던 문화재 사랑 - 간송박물관 2. 한국전쟁과 일제에 맞서 싸웠던 위인들 - 경찰박물관 3. 역사의 아픔을 견뎌낸 자존심 - 국립중앙박물관 4. 독립운동을 이끈 이론가이자 실천가 - 도산안창호기념관 5. 아시아의 희망이 된 21세의 젊은 청년 - 매헌기념관 6. 내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 백범기념관 7.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애국정신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8. 일본인도 감동시킨 애국정신 - 안중근의사기념관 9.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외국인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10. 약소국의 서러운 외교 역사 - 외교사료관
4부. 박물관보다 더 재밌는 박물관 뒷이야기 1. 문화재의 재탄생, 발굴에서 복원까지 2. 해양 보물과 수장고 이야기 3. 박물관 전시 유물은 모두가 복제품? 4. 초상화 속 세종대왕은 진짜가 아니다?
이 책은 서울사와 도시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역사와 인류학, 공간 비평과 문화 비평을 가로질러 도시 ‘서울’에 대해 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한 보고서로 서울에 관해 깊이 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한 곳에 모아서 들려주고 있다. 서울의 과거와 현재 구석구석을 탐색하며 그 표피에 가려진 다양하고 심오한 의미와 사연들을 소개하고 있다.
먼저 ‘서울’이라는 말의 본 의미를 살피는 데서 시작해, 서울에 대한 종합적인 해설과 비평을 시도한다. ‘똥개’, ‘땅그지’, ‘무뢰배’, ‘깍쟁이’등의 말의 유래를 추적해 오래전 서울의 생태와 풍속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는가 하면, 청계천, 종로 거리, 덕수궁 분수대 같은 상징물들의 변화에 담긴 의미를 과감하게 추리해내기도 하고, 또 물장수, 복덕방 같은 사라져버린 문화를 회고담처럼 들려주기도 한다.이 풍성한 이야기들의 바탕에는 소비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현대 도시, 현실과 멀어져 장식품으로 전락한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깔려 있다.
역사적 사실과 고전 자료에 대한 적절한 참조, 탄탄한 역사적 지식에 기반한 과감한 추리,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발견하는 에세이적 구성, 시의성 있는 비판적 성찰 등을 책에 수록된 200여 컷의 풍부한 사진자료와 함께 더욱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역사와 인류학, 공간 비평과 문화 비평을 가로지르는, 도시 ‘서울’에 대한 인문학적 보고서
이 책은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하고 서울학연구소에서 10년 이상 서울사 관련 연구를 해온 전우용의 본격적인 저작이다. 서울에 관한 책들은 많지만, 건축가나 저널리스트, 혹은 근대문학 연구자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서울사와 도시이론을 공부한 연구자가 ‘서울’에 대한 종합적인 단행본을 출간한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건축이나 근대사 등 지엽적 시각에 한정되지 않은 채 서울에 관한 깊이 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는 서울의 과거와 현재 구석구석을 탐색하며 그 표피에 가려진 다양하고 심오한 의미와 사연들을 들추어낸다. 먼저 ‘서울’이라는 말의 본 의미를 살피는 데서 시작해, 서울에 대한 종합적인 해설과 비평을 시도한다. ‘똥개’, ‘땅그지’, ‘무뢰배’, ‘깍쟁이’ 등의 유래를 추적해 오래전 서울의 생태와 풍속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는가 하면, 청계천, 종로 거리, 덕수궁 분수대 같은 상징물들의 변화에 담긴 의미를 과감하게 추리해내기도 하고, 또 물장수, 복덕방 같은 사라져버린 문화를 회고담처럼 들려주기도 한다. 이 풍성한 이야기들의 바탕에는 소비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현대 도시, 현실과 멀어져 장식품으로 전락한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깔려 있다.
역사적 사실과 고전 자료에 대한 적절한 참조, 탄탄한 역사적 지식에 기반한 과감한 추리,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발견하는 에세이적 구성, 시의성 있는 비판적 성찰 등을 고루 담은 이 책은 200여 컷의 풍부한 사진자료와 함께 학생들부터 연구자들까지 다양한 독자들이 즐길 수 있는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서울의 유래부터 생태·주거환경, 계층적 분포와 습속의 변화까지 ― 정도 600년 서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 책은 먼저 도시의 의미, ‘서울’의 본뜻을 묻는 데서 출발한다. 서울은 ‘높이 솟은 울’, 즉 신과 가장 가까운 도시, 가장 신성한 공간이고 정치와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라는 뜻이다. 한편 그러기에 서울은 ‘생산’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주변 시골의 생산물을 빨아들이는 ‘소비’의 공간이기도 하다.
서울이 세계의 다른 도시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점은 바로 조선 초 서울의 틀을 구상한 정도전과 이방원의 경복궁 계획에서부터 드러난다. 여타의 오래된 중심도시들과 달리 서울에는 거대한 경기장이나 극장 등 스펙터클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간에 잘 알려진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갈등에서 저자는 도시 서울에서 종교성을 탈색시키고자 했던 정도전의 뜻을 읽어낸다. 또 경복궁을 『주례』에 따른 철저한 공적 공간으로 계획한 정도전과 그 ‘공’을 왕의 사적 권위와 등치시키고자 했던 이방원의 갈등 역시 경복궁과 서울이라는 장소에 고스란히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저자는 바로 이런 공간에 아로새겨진 역사의 흔적, 무늬를 섬세히 짚어가며 그 구체적인 서사徐事를 되살려내는 것이 곧 도시연구의 본무本務라고 강조한다. 또 다산이 “이里가 귀한 이름이고 동洞은 천한 이름인데 지금은 풍속이 어그러져 사람들이 서울 지명을 모두 동으로 쓴다”고 했던 것에서 출발해 조선 초기 잘 다듬어져 있던 곧은길이 왜 구불구불한 작은 길, 막다른 뒷골목들로 바뀌었는지 생각해보며 서울의 생태적·사회적 변화를 추적한다. 또 오래전 대감집과 여염집이 공존하던 골목 공동체를 기억하며 ‘끼리끼리 모여살기’가 일반화되어가는 현대 서울의 주거환경을 성찰하기도 한다. 이렇게 당시의 역사와 생태·환경적 변화, 또 그로 인한 풍속과 습속의 변화를 연결짓는 서술은 「똥물, 똥개」, 「등 따습고 배부른 삶」, 「땅거지」 등의 장에서도 이어진다.
「무뢰배」, 「촌뜨기」, 「어섭쇼」, 「압구정과 석파정」, 「남주북병」, 「탕평, 땅평」 등의 장에서는 조선시대부터 구한말,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계층적 분포와 각 계층별 생활방식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도 한다. 조선 후기 도시 상업발전 과정과 관직과 부의 양극화 현상은 서울 주민의 계층 분화를 더욱 재촉했다. 양반 사대부들이 자기들만의 성을 공고히 하자, 더 이상 건강한 방식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없게 된 서자·기술직 관리·무반의 무리가 사적인 인맥을 통해 세력 있는 자의 겸인 노릇을 하면서 인생역전을 꿈꾸는 일이 흔해졌고, 이들을 일컫는 말인 ‘무뢰배’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촌뜨기’ 역시 계층적 변화와 맞물려 생겨난 말로, ‘서울에서 나고 자란 자’들이 특권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말이다. ‘어섭쇼’는 서울의 계층구조가 변화를 겪으면서 도시의 익명성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중촌 상인들이 그러한 변화에 적응해 만들어낸 새로운 어법이었다.
가려진 역사에서 근대화의 풍경까지 ―과거를 되돌아보는 따뜻한 감성,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과감한 추리
「종로, 전차」에서는 종로의 역사를 서울의 통신교통 수단의 변화(전차의 부설과 철거, 지하철의 부설 등)와 함께 살펴본다. 조선시대와 구한말을 거쳐 1960년대까지도 서울의 중심으로 기능했던 종로의 화려한 시절이 ‘전차 철거’와 함께 막을 내리는 쓸쓸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덕수궁 돌담길」에서는 고종의 도로 정비, 경운궁 정비와 관련된 일화가, 「팔각정」에서는 오래 전부터 신성한 형상으로 여겨지던 ‘팔각’이 이승만 시대를 거치며 세속화된 사연 등이 펼쳐진다.
특히 ‘서울’을 다룰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근대적 공간으로서의 서울, 경성이다. 서울 사람들은 근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끌어갔으며 그것이 서울 공간에는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저자는 「시계탑」을 통해 서울 사람들이 서력과 요일제, 24시제에 익숙해져 가는 과정을, 「제중원」을 통해서는 근대적 위생관을 심어주고 근대적 삶을 훈육하는 장치로서 병원의 기능을 살펴본다. 「파리국」, 「협률사」등의 장에서도 서울에 근대적 의미의 ‘공중’이 탄생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특히 서울 시장의 역사를 압축한 「도깨비시장, 돗떼기시장」에서는 17세기 이후 서울의 독특한 삶을 구성했던 병상일치제兵商一致制의 상황을 조감해볼 수 있다.
숨 가쁘게 변해온 서울의 시공간을 탐사하는 만큼, 이 책에는 최근의 역사지만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가고 있는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물장수’, ‘복덕방’, ‘전차’, ‘덕수궁 돌담길’ 등 벌써 역사가 되어버린 이야기들을 단순한 복고적 감수성을 넘어 기억해내는 작업은 우리의 가까운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또 「덕수궁 분수대」에서는 침강원·분수대라는 파격적 양식이 경운궁(덕수궁)에 들어선 연유가 1904년의 경운궁 화재 사건을 배경으로 과감하게 추리되기도 하고, 다양한 자료와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똥개’, ‘땅거지’, ‘도깨비시장’ 등의 유래가 추론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흥미진진한 글쓰기는 독자들에게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예스2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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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사화중 첫 번재 사화인 무오사화는 세조 (7대)를 폭군으로 비유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성종실록>에 삽입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왕권에 대한 신권의 도전을 연산군 이 무자비하게 억누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연산군 4년(1498) 7월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 유자광 등 훈구 대신들이 사관을 배석 시키지 않고 연산군을 면대했다. 그 직후의금부도사들이 경상도 청도군으로 당시 풍병을 앓고 있던 김일손을 잡으로 갔다. 정 6품 사관이었던 김일손은 사초에 자신의 상관인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사항을 낱낱이 적었으며, 이극돈은 이 조항들을 삭제하려 다 실패했다.
이극돈의 불미스러운 일이란, 세조비 정희왕후, 상중에 당시 전라 감사로 있던 이극돈이 근신하지 않고 기생들과 어울려 놀았다는 것을 규탄하는 상소문을 사초에 적어 놓은 것이었다.
사초란 사관이 당시의 시정을 기록한 사료로서 실록 편찬의 토대가 되는 자료였다.
여기저기 압력을 넣어 사초에 실린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의 삭제를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한 이극돈 은 유자광을 끌어놓었다. 유자광은 사림파들로부터 매번 천한 서자라 하여 차별받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김일손의스승인 김종직이 함양군수 시절 함양군의 한 정자에 걸려 있던, 자신이 쓴 현판을 떼어내어 불사른 원한을 잊지 않고 있었다.
유자광과 훈구파 대신들이 김일손의 사초가 상대의 불리한 일들을 곡필하여 기록했다고 모함하자, 연산군은 김일손의 관련 사초를 모조리 가져오라고 명했다. 왕은 사초를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훈구 대신들은 연산군의 요청에 의하여 김일손 이 기록한 사초가 종묘 사직에 관계가 있다는 팽계로 이를 발췌하여 연산군에게 바쳤다.
이것이 조선 최초로 왕이 사초를 보게 된 사건이다.
무오사화는 이극돈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이를 확대 재생산하여, 세조 즉위를 부정한 대역죄라고 했다고 몰고 간 인물은 유자광이었다. 유자광은 김일손의 옥사를 이용하여 사림파를 몽땅 제거해 버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옥사가 생각대로 확대되 지 않자 그는 김일손을 국문하면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란 '의제를 애도하는 글'이란 의미로, 김종직이 생전에 꾼 꿈에 대해 쓴 글이었다. 꿈에 신인이 나타나서, "나는 초나라 회왕 손심인데 서초패왕 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에 잠겼다."라고 말하곤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한다.
이 꿈을, 꾼 후 김종직은 글을 지어 의제를 조문했으며 그 글이 <조의 제문>이다. 유자광은 이 글에서 말한 의제는 단종(6대) 을 의미하는 것이고, 서초패왕은 세조를 은유한 것으로 결국 <조의제문>은 단종을 죽인 인물이 세조인 것을 후대에 가르쳐 주기 위한 글이고, 더구나 세조가 단종을 죽여 강에 던져버렸다는 것을 후대에 알릴 생각으로 이 글을 쓴 것이라고 악의적으 로 해석했다.
<조의제문>을 검토하던 연산군은 그러나 <조의제문.보다 더 큰 문제가 사초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세조(7대)가 과부가 된 자기 며느리 귀인 권씨를 범하려 했다는 소문이 잠깐 돌았는데, 김일손이 이를 사실인 양 사초에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더구나 단종의 시신을 '산 속에 던져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 쪼아 먹었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김일손이 쓴 싸초를 보고 화가 난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의 제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국문을 시작했다. 제자들이 무슨 죄가 있으랴마는 거듭되는 고문에 칡넝쿨 얽히듯 연루자가 불어났다. 사초와 관련된 사건이다 보니 사관들이 많이 연루되었 으며, 그래서 무오사화의 '사'에 '역사 사'자를 쓰기도 한다.
이미 죽은 김종직은 관에서 꺼내져 부관참시를 당했고, 사신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는 능지처사에 삼족이 처형당했다. 그 외에도 25명의 신진 세력들이 참형을 당하고 유배에 처해져서 무오사화의 총 피화자는 44명에 이른다. 이로써 성종조에 부상했던 사림은 씨가 말라버렸다. 귀찮고 말 많던 사림들을 싹쓸이하고 나서 연산군은 신하들의 생사 여탈권을 쥔 절대 권력자로 부상했다.
부관참시된 김종직은 부친이자 스승인 김숙자에게서 명분을 중시하는 정통 성리학을 이어받음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조종으 로까지 충앙 받은 인물이다. 당시 사림 세력에서 김종직의 권위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2. 갑자사화 (1504/연산군 10년)
갑자사화는 무오사화보다 그 기간이 길었던 데다가 가화자와 피화자의 범위가 훨씬 넓었다. 이 사건의 본질 또한 왕권과 신권 의 갈등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피화자에 훈구 대신이 대거 참여한 것이 무오사화와 다르다. 갑자사화의 주 원인은 윤씨 폐비 문제였으나, 내면으로는 왕권을 능멸하는 신권에 대한 연산군의 징벌의 성격이 짙었다.
연산군이 모친 윤씨가 폐비된 것을 안 것은 재위 3개월만이다. 재위 1년이 넘었을 때는 윤씨의 기일도 알게 되었다. 재위 10년이 딘 어느 날 연산군은 임승재의 집에 가서 임사홍을 불러 술을 올리도록 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임사홍이 "엄숙의 와 정소용이 모후를 참소하여 폐비했다"라고 하니 임금이 울고, 궁으로 들어와서 곧 정, 엄 두 후궁을 불러 손수 죽였으며, 그 자식들까지 모두 죽여버렸다. 광기에 휩싸인 연산군은 장검을 들고 자순대비(정현왕후 윤씨)의 침전으로 가서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자순대비는 나오지 않았으며, 펄펄 뛰던 연산군은 말리는 왕비 신씨로 인하여 겨우 진정했다. 연산군은 다시 인수대 비의 침전으로 쳐들어가 행패를 부리다가 돌아왔으며, 죽인 엄숙의와 정소용의 시신을 찢어 젓을 담근 후 산과 들에 뿌리도록 했다(이 기록은 소설이다).
인수대비는 연산군이 폐비사건에 대해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는 와중인 연산군 10년 4월에 세상을 떴다. 야사에서는 연산군이 병석에 누운 할머니 인수대비에게 달려들어 머리로 들이받았고, 인수대비는 이 충격으로 죽었다고 전한다.
연산군은 드디어 명을 내렸다. "폐비할 때 참여한 재상과 궁궐에서 나갈 때 시위한 재상 및 사약을 내릴 때 참여한 재상들을 <승정원 일기>를 조사여 모두 아뢰어라."
드디어 피의 광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간 이 세좌의 가족과 친족들은 모조리 처형되었으며, 이극균, 윤필상이 사약을 받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정창손, 이세겸 등이 폐비 논의 때 찬성했다 하여 모조리 부관참시를 당했다. 거기다 연사군은 무오사화 때 유배된 사림파들에게도 당시의 형이 고정하지 않았다 하여, 유배지에 있던 사림파들을 사림 파들을 모조리 사사했다.
이 갑자사화 때 등장한 형벌이 '쇄골표풍'이다. 쇄골표풍이란 시체의 뼈를 빻아 바람에 날려버리는 형벌을 말한다. 조상 숭배를 중요한 덕목으로 삼던 당시에 쇄골표풍은 제사를 지낼 근거마저 없애버리는 극악한 형벌이었다. 이미 효수한 이세좌와 윤필상이 죽은 후에 쇄골표풍의 형벌을 다시 받았다.
-삼족- 대역죄를 지었을 때 흔히 '삼족을 멸한다'고 한다. 삼족이란 당사자의 아버지, 아들, 손자를 말한다. 그러나 이 중에서 80세 이상 되거나 16세 이하 그리고 심한 병자와 남의 집에 양자로 간 사람은 형에서 제외되었고, 여자들은 처형하지 않고 관아나 양반집에 노비로 보내졌다. 그리고 직게가 아닌 숙부나 조카들은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신분은 천민으로 떨어졌다.
-'왕을 참하라'에서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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