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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본 내 고향 (8) 8. 외국에서 부르는 노래 1) 최치원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 가서 쓴 〈추야우중 秋夜雨中〉이라는 시는 고향을 그리는 시의 고대 형태가 될 것이다. 타향에서 비가 올 때는 울적하며, 달을 볼 때는 부모 생각이 간절하고, 몸이 아플 때는 슬프고, 돈이 떨어질 때는 막막하다. 이러한 경험은 바로 고향에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최치원의 이 시에 나타난 향수는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秋夜雨中 추야우중 가을밤 빗소리 속에
秋風惟苦吟 추풍유고음 가을바람 맞아 그렇게 괴로이 읊었건만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 내 뜻 알아주는 사람 이세상에 적구나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창 밖엔 비 흩뿌리는 이 한밤중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등잔 앞에 두고 마음은 만리 저쪽
스산한 가을 바람 홀로 괴로이 읊조리나 온 세상에 이내 심경 아실 이 드무네 창 밖에는 삼경의 비가 오는데 등불 앞에 까마득이 만리의 마음이여 <역 : 단산 선생> 與于愼微長官(여우신미장관) 우신미 장관에게 上國羈捷久(상국기첩구) : 상국 당나라에 와서 산지 오래되어 多慚萬里人(다참만리인) : 먼 나그네 너무 부끄럽습니다 那期顔氏巷(나기안씨항) : 어찌 안씨의 누추한 동네인들 바랐겠읍니까만 得接孟家隣(득접맹가린) : 뜻 밖에도 맹자 같은 이웃을 얻었습니다 守道唯稽古(수도유계고) : 참된 도리를 지킴에는 오직 옛 일을 살펴보고 交情豈憚貧(교정기탄빈) : 정을 나눔에 어찌 가난을 탓하겠습니까 他鄕知己少(타향지기소) : 타향에 친구 드물어 莫厭訪君頻(막염방군빈) : 당신을 자주 찾는 것 싫어하지 마십시오 소위 고시만 합격하면 출세가 보장되어 중앙 부처의 좋은 자리나 아니면 지방이라도 힘깨나 쓰고 <영감님 대우> 받으며 행세깨나 할 수 있는 그런 막중한 자리에 보내질 줄 알았던 열 여덟 살 청소년에 불과한 최치원 이 막상 벼슬길에 올라보니 이 것은 당나라 인의 텃세에 밀려 별 볼일 없는 한직으로 발령받아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한 대접을 받게 되자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한 동안 오도 갈 데도 없는 외톨이 신세가 되어 그 한계를 절감하고 당시 최치원을 아까운 인물로 가까이 해준 당나라 유력 인사에게 자주 찾아가더라도 괄시 말고 귀찮게 여기지 말고 받아 주기 바란다는 그의 외로운 심사를 이 시는 숨김 없이 담고 있다. 비록 자존심까지도 팽개치고 읍소하는 모습이 약간 우리 비위에 거슬리는 것 같지만 사실 이국 만리에 홀로 어찌할 방도가 없이 생계가 막막했던 열 여덟 소년의 처지를 깊이 살펴보자면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지는 상황 이다. 他鄕知己少(타향지기소) : 타향에 친구 드물어 이 짧은 한 구절에는 최치원이 처하였던 당시의 처지가 참으로 적나라하게 함축되어 있다.
2) 정몽주

봉사일본(奉使日本) 水國春光動 수국춘광동 섬나라에 봄빛 흐드러졌구나, 天涯客未行 천애객미행 하늘 끝(떠도는) 나그네는 아직 (고향에) 가지 못하네. 草連千里綠 초련천리록 풀은 끝없이 푸른데 月共兩鄕明 월공양향명 달빛은 두 나라를 밝게 비치네.
遊說黃金盡 유세황금진 유세하다 보니 돈은 떨어지고, 思歸白髮生 사귀백발생 돌아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희어졌네. 男兒四方志 남아사방지 사나이의 큰 뜻이 不獨爲功名 부독위공명 오직 이름만 남기기 위한 것은 아니네. 정몽주가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있을 때, 고국을 그리는 심정을 쓴 것임 渤海懷古 발해회고 唐室勞師定海東 당실노사정해동 당 나라 군사들이 힘들여 해동을 평정했으나 大郞隨起作王宮 대랑수기작왕궁 대조영이 바로 따라 일어나 왕궁을 지었다 請君莫說官邊策 청군막설관변책 청컨대 그대여 변방의 정책을 말하지 말라 自古伊誰保始終 자고이수보시종 자고로 그 누가 처음과 끝을 보장하리오 철저히 원나라를 배척하고 개혁을 통해 고려를 중흥시키고자 했던 공민왕(恭愍王)의 뜻과 일치하였던 정몽주 는 처음 명나라가 일어났을 때부터 그들과의 교류를 주장하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에 가까운 외교정책을 주장했다. 蓬萊閣 봉래각 採藥未還滄海深 채약미환창해심 불사약 캐러 갔다 돌아오지 못한 푸른 바다 깊고 秦皇東望此登臨 진황동망차등림 진시황은 동쪽 바라보며 여기서 누대에 올랐어라 徐生詐計非難吾 서생사계비난오 서시의 거짓 계교를 깨닫기가 어렵지 않았으나 自是君王有欲心 자신군왕유욕심 여기에서 군왕에게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공민왕이 환관 홍윤 등에게 살해당함으로써 명나라와의 외교에 문제가 발생했다. 공민왕이 살해된 뒤 친원파인 김의가 명나라 사신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고려 고정에서는 명나라의 보복이 두려워 감히 사신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 정몽주의 주장에 따라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민왕의 죽음을 알리고, 김의의 사건을 해명함으로써 관계를 복원할 수 있었다. 3) 이색(李穡)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원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를 하자 이때, 중국의 학사 구양현(歐陽玄)이 그를 변방 사람이라 하여 글을 지어서 조롱하였다. 꿈에 본 내 고향 (8) 8. 외국에서 부르는 노래 1) 최치원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 가서 쓴 〈추야우중 秋夜雨中〉이라는 시는 고향을 그리는 시의 고대 형태가 될 것이다. 타향에서 비가 올 때는 울적하며, 달을 볼 때는 부모 생각이 간절하고, 몸이 아플 때는 슬프고, 돈이 떨어질 때는 막막하다. 이러한 경험은 바로 고향에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최치원의 이 시에 나타난 향수는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秋夜雨中 추야우중 가을밤 빗소리 속에
秋風惟苦吟 추풍유고음 가을바람 맞아 그렇게 괴로이 읊었건만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 내 뜻 알아주는 사람 이세상에 적구나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창 밖엔 비 흩뿌리는 이 한밤중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등잔 앞에 두고 마음은 만리 저쪽
스산한 가을 바람 홀로 괴로이 읊조리나 온 세상에 이내 심경 아실 이 드무네 창 밖에는 삼경의 비가 오는데 등불 앞에 까마득이 만리의 마음이여 <역 : 단산 선생> 與于愼微長官(여우신미장관) 우신미 장관에게 上國羈捷久(상국기첩구) : 상국 당나라에 와서 산지 오래되어 多慚萬里人(다참만리인) : 먼 나그네 너무 부끄럽습니다 那期顔氏巷(나기안씨항) : 어찌 안씨의 누추한 동네인들 바랐겠읍니까만 得接孟家隣(득접맹가린) : 뜻 밖에도 맹자 같은 이웃을 얻었습니다 守道唯稽古(수도유계고) : 참된 도리를 지킴에는 오직 옛 일을 살펴보고 交情豈憚貧(교정기탄빈) : 정을 나눔에 어찌 가난을 탓하겠습니까 他鄕知己少(타향지기소) : 타향에 친구 드물어 莫厭訪君頻(막염방군빈) : 당신을 자주 찾는 것 싫어하지 마십시오 소위 고시만 합격하면 출세가 보장되어 중앙 부처의 좋은 자리나 아니면 지방이라도 힘깨나 쓰고 <영감님 대우> 받으며 행세깨나 할 수 있는 그런 막중한 자리에 보내질 줄 알았던 열 여덟 살 청소년에 불과한 최치원이 막상 벼슬길에 올라보니 이 것은 당나라 인의 텃세에 밀려 별 볼일 없는 한직으로 발령받아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한 대접을 받게 되자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한 동안 오도 갈 데도 없는 외톨이 신세가 되어 그 한계를 절감하고 당시 최치원을 아까운 인물로 가까이 해준 당나라 유력 인사에게 자주 찾아가더라도 괄시 말고 귀찮게 여기지 말고 받아 주기 바란다는 그의 외로운 심사를 이 시는 숨김 없이 담고 있다. 비록 자존심까지도 팽개치고 읍소하는 모습이 약간 우리 비위에 거슬리는 것 같지만 사실 이국 만리에 홀로 어찌할 방도가 없이 생계가 막막했던 열 여덟 소년의 처지를 깊이 살펴보자면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지는 상황이다. 他鄕知己少(타향지기소) : 타향에 친구 드물어 이 짧은 한 구절에는 최치원이 처하였던 당시의 처지가 참으로 적나라하게 함축되어 있다. 2) 정몽주 봉사일본(奉使日本) 水國春光動 수국춘광동 섬나라에 봄빛 흐드러졌구나, 天涯客未行 천애객미행 하늘 끝(떠도는) 나그네는 아직 (고향에) 가지 못하네. 草連千里綠 초련천리록 풀은 끝없이 푸른데 月共兩鄕明 월공양향명 달빛은 두 나라를 밝게 비치네.
遊說黃金盡 유세황금진 유세하다 보니 돈은 떨어지고, 思歸白髮生 사귀백발생 돌아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희어졌네. 男兒四方志 남아사방지 사나이의 큰 뜻이 不獨爲功名 부독위공명 오직 이름만 남기기 위한 것은 아니네. 정몽주가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있을 때, 고국을 그리는 심정을 쓴 것임 渤海懷古 발해회고 唐室勞師定海東 당실노사정해동 당 나라 군사들이 힘들여 해동을 평정했으나 大郞隨起作王宮 대랑수기작왕궁 대조영이 바로 따라 일어나 왕궁을 지었다 請君莫說官邊策 청군막설관변책 청컨대 그대여 변방의 정책을 말하지 말라 自古伊誰保始終 자고이수보시종 자고로 그 누가 처음과 끝을 보장하리오 철저히 원나라를 배척하고 개혁을 통해 고려를 중흥시키고자 했던 공민왕(恭愍王)의 뜻과 일치 하였던 정몽주는 처음 명나라가 일어났을 때부터 그들과의 교류를 주장하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에 가까운 외교정책을 주장했다. 蓬萊閣 봉래각 採藥未還滄海深 채약미환창해심 불사약 캐러 갔다 돌아오지 못한 푸른 바다 깊고 秦皇東望此登臨 진황동망차등림 진시황은 동쪽 바라보며 여기서 누대에 올랐어라 徐生詐計非難吾 서생사계비난오 서시의 거짓 계교를 깨닫기가 어렵지 않았으나 自是君王有欲心 자신군왕유욕심 여기에서 군왕에게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공민왕이 환관 홍윤 등에게 살해당함으로써 명나라와의 외교에 문제가 발생했다. 공민왕이 살해된 뒤 친원파인 김의가 명나라 사신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고려 고정에서는 명나라의 보복이 두려워 감히 사신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 정몽주의 주장에 따라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민왕의 죽음을 알리고, 김의의 사건을 해명함으로써 관계를 복원할 수 있었다. 3) 이색(李穡)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원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를 하자 이때, 중국의 학사 구양현(歐陽玄)이 그를 변방 사람이라 하여 글을 지어서 조롱하였다.

獸蹄鳥迹之道 交於中國 (수제조적지도 교어중국) "짐승의 발자취와 새의 발자취가 어찌 중국에 와서 왕래하느냐?" 하자. 목은은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犬吠鷄鳴之聲 達于四境 (견폐계명지성 달우사경) "개 짖고 닭 우는 소리가 사방에 들려오고 있다." 하여 구양현을 놀라게 했다. 구양현은 기이하게 여기고 또 글 한 짝을 지었다. 持盃入海知多海 (지배입해 지다해) "잔을 가지고 바다에 들어가니, 바다가 큰 줄 알겠더라." 하자. 목은은 또 즉석에서, 坐井觀天曰小天 (좌정관천 왈소천)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고, 하늘을 작다고 하는도다." 하고 회답하니, 구양현은 크게 경탄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이때 목은과 성명이 같은 사람이 있었다. 이것을 비유해서 중국의 어느 학사가 목은을 조롱하는 말로, 藺相如 司馬相如 名相如 姓不相如 (인상여 사마상여 명상여 성불상여) "인상여와 사마상여는 이름은 서로 같으나 성은 서로 같지 않네." 하자. 목은은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魏無忌 長孫無忌 古無忌 今亦無忌 (위무기 장손무기 고무기 금역무기) "위무기와 장손무기는 옛날에도 꺼릴 것이 없고 지금에도 꺼릴 것이 없네." 하였더니 무릎을 꿇었다고 전하여진다. 4) 청나라 유배 김상헌
조선 인조 대왕 시절. 병자호란(1637년)을 맞아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임금을 모신 충신 김상헌 과 최명길 은 죽기를 결하고 서로 반대 의견을 주장한다. 즉 수도를 점령하고 남한산성 코밑에 들이닥친 청나라 군사와 화의(和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최명길 이 청 태종 앞으로 보내는 화의국서를 작성하자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다 죽을지언정 오랑캐 따위에게 항복할 수 없다며 최명길 이 쓰고 있는 화의 국서를 찢어버린 김상헌. 결국 최명길 의 의견대로 화의가 이루어지고 전쟁은 인조 임금이 오랑캐 추장 앞에 세 번 조아리고 아홉번 머리를 쳐박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는 항복으로 끝났다. 최명길이 어명에 의해 무조건 항복하는 치욕적인 글을 썼다.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 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대국의 위엄과 덕이 멀리 퍼져 있으나, 소국은 이를 모르고 이었습니다. 원한옵건대 대국의 명을 받아 그 번국(藩國)이 되고자 합니다......."
옆에서 이 글을 지켜보던 김상헌 이 서한을 찢고 최명길 에게 이르되, "대감은 어찌 항복하는 글만 쓰시오. 선대부께서는 명성이 있던 분이었소. 부끄럽지 않으시오?"
최명길 은 찢긴 서한을 붙이면서, "글을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되고, 다시 붙이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되리라. 대감으로서는 당연한 말씀이오. 대감은 과연 의사요. 그러나 종사를 위해서는 다시 붙이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하리요."
이들은 모두 절박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소신을 토로하였던 것이다.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던 김상헌 은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안동의 학가산 (鶴駕山)에 들어가,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두문 불출하였다.
가노라 삼각산 (三角山)아 다시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 말동 하여라 김상헌(金尙憲) 청 나라에 잡혀가면서 지어 남긴 김상헌 의 유명한 시조 한 수이다. 김상헌은 청 나라 심양 (1641년-1645년)에 끌려가 4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였다. 청 나라 심양의 감옥에 갇힌 김상헌 이 어느 날 보니 옆방에 최명길(1643년-1645년 2년간 수감생활)이 갇혀 있는 것이 아닌가? 김상헌 은 최명길 을 송나라 진회(秦檜)와 같이 화의함으로서 나라를 망칠 뿐만 아니라 일신 의 영화와 부귀만을 노리는 매국노라고 생각하여 원수처럼 미워하였으나 그것이 아니고 최명길 이 진심으로 임금을 구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보전하고자 항복하기를 주장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이다. 지천 최명길 은 청음 김상헌 이 이름을 후세에 날리기 위하여 척화를 고집한 것으로 오해했으나 지금 잡혀 와서도 여전히 굳굳하게 저항하며 항복하지 않는 것을 보니 참으로 충의의 선비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같이 배청숭명 (背淸崇明) 즉 오랑캐 나라인 청나라를 배척하고 비록 국력이 쇠락해가고 있지만 명 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을 지니고 있음을 그 감옥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두 사람의 길은 한 곳이었으나 다만 그 가는 길이 다를 뿐이고 만나는 곳은 하나였던 것이다 자기의 뜨거운 애국심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고 깨닫고 서로 상대방 앞에 머리 숙여 화해를 자청했던 것이다.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굴하지 않고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끝까지 저항하였던 김상헌은 1645년 소현세자와 더불어 최명길 과 함께 귀국하게 된다. 한편 먼저 잡혀갔던 삼학사(三學士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굴복하지 아니 하여 중원(中原)에서 고혼이 되고 말았다.
김상헌은 죽인다고 해도 응하지 않았고 삼학사는 살려준다고 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5) 왜국 유배 백수회
한등객창(寒燈客窓)의 벗 업시 혼자 안자 님 생각 하며서 좌우를 도라보니 북해(北海)인가 연옥(燕獄)인가 이 어데라 할 께 이고 청풍(淸風)과 명월(明月)을 벗 삼은 몸이 위국단심(爲國丹心)을 못내 슬허 하노라 백수회(白受繪) 백수회는 우리에게 '가노라 삼각산아.'로 잘 알려진 김상헌과 함께 대비되는 일본에 끌려갈 때 쓴 시로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청나라를 대항해 싸울 것을 주장하던 '주전파'였으나, '주화파' 의 최명길 등의 주장으로 전란 후에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과 함께 볼모로 잡혀 가게 되었는데 그 때의 심정을 노래한 시조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였다.
병자호란 때의 김상헌에 대하여 백수회는 임진왜란 때에 왜군에 포로로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던 인물이다. 그의 나이 19세 되던 해 임진왜란을 맞고 왜군에 잡혀 일본으로 끌려가 거기서 무려 9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고국에 대한 애국심을 굽히지 않아 현지 왜인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 쓴 시의 하나가 이른바 <在日本長歌>이다. 타국에서 조국애 서린 몇 안되는 우리 민족의 애국시이다.
재일본장가(在日本長歌)
아아! 이 내 몸이 일일도 삼추로다. 해동 이역을 이 어디라 할 것인가? 천심이 블조하니, 만리 표림이라. 눈물을 씻고서 좌우를 돌아보니, 어음이 부동하고, 풍속이 상위로다. 청의를 메었고, 성전에 절하며, 이제의 채미와 소무의 한절과 천상의 위국단심을 잊지 않은 이내 마음 조조 모모에 서산을 창망하니, 일촌 간장이 끊는 듯 잇는 듯 건곤을 부앙하고, 고사를 사량하니, 부모의 은덕과 형제의 우애를 못다 갚은 잔구로다. 침상에 꿈꾸어 고국에 돌아 오니, 궁실이 여전하고, 송국이 황무로다. 부모께 절하며, 이제를 덥썩 잡고, 중년 불견하며, 양생 상비 이르며 물으면서 체루를 상휘하고, 적적 전정을 못내 베푼 사이에 이요 난이하니, 원접 경회하도다. (송담집에서)
백수회가 일본에서 9년을 지낸 뒤 27세 되던 때에 풀려나 환국하게 되었다. 그 뒤 40세가 되었을 때 광해군 계모 유폐사건으로 정국이 혼란할 때 분연히 반대의사를 상소하여 광해군의 난정을 맹렬한 비판을 가하였고 광해군을 몰아내는 인조반정 후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지냈던 인물이다.
백수회의 작품으로는 왜군에 포로가 되었을 때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5편의 한시와 가사를 남기고 있는데, 〈도대마도가 到對馬島歌〉·〈재일본장가 在日本長歌〉·〈단가 短歌〉·〈화경도인안인수가 和京都人安仁壽歌〉 로서 모두가 우국충정의 내용을 담고 있다. 어와 하도 할샤 이내 분별 하도 할샤 남 모르는 근심을 못내하야 셜운지고 언제사 하늘이 이 뜻 알으샤 사반고국(使返故國) 하려인고 해운대 여흰 날의 대마도 도라드러 눈물 베셔고 좌우를 도라보니 창파만리를 이 어디라 할게이고 두어라 천심조순(天心助順)하면 사반고국(使返故國)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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