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즐겨찾기 | 블로그홈 | 바로가기 바로가기 | 로그인
추억,그리움 그리고 평화
블로그  |  사진갤러리  |  동영상갤러리 방명록  |   즐겨찾기 추가
고동소리 (lisukum)
프로필     
 인기도 :
 이 블로그 점수주기
전체 글보기(599)
그리운 나의 사랑아
화니의 글과 영화평
인간을 생각한다
승자와 패자의 세월
마야의 천년꿈
역사,신화,외경을 넘나들며
수생 필기장(남편)
사랑하는 사람들의 글
어울려 삽시다
잡동사니
시와 인생 -우정과 사랑
우리시조 한마당
커피 한잔의 산책
설문
최근 글
장부의 단심 장부의 충..
장부의 단심 장부의 충..
꽁치와 과매기 <..
꽁치와 과매기 <..
꿈에 본 내 고향 (8..
지난 글
2009년 1월
2009년 2월
2009년 3월
2009년 4월
2009년 5월
2009년 6월
2009년 7월
2009년 8월
2009년 9월
2009년 10월
2009년 11월
오늘 전체
방문자 175 417002
구독자 0 34
댓글 0 374
참조글 0 2
HanRSS 로 구독하기Fish 로 구독하기
2009 11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 댓글 전체보기
^ l 제가 글을 ..
브라보
곧 우리나라의 하늘을 ..
안녕하세요 백구노래를듣..
백구노래가듣고 싶어요 ..
최근 참조글 전체보기
블로그친구님들 희망
한적(閒適)
다녀간 블로거 더보기
- scc
- seoulherbs
- j9850084
- friend
- 블로그관리자
 즐겨찾기
 즐겨찾기 글모음
개설일 : 2004/04/10
 

장부의 단심 장부의 충절 (2) 사육신의 노래 – 성삼문

2009.11.22 03:51 | 시와 인생 -우정과 사랑 | 고동소리

http://kr.blog.yahoo.com/lisukum/1239032 주소복사

장부의 단심 장부의 충절 (2)

사육신의 노래 성삼문

 

 

首陽山(수양산) 바라보며 夷齊(이제)를 恨()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菜薇(채미)도 하는것가

아모리 프새엣거신들 귀 뉘 따희 낫더니

成三問(성삼문)         甁歌(병가)  62

 

그의 나이 한창 나라를 위해 펄펄 날며 일 할 수 있을 아까운 서른 여덟 장년으로 아버지 승()
박팽년(朴彭年)등과 같이 단종(斷種)의 복위(復位)를 꾀하다 발각되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등과 함께 체포 되어 친국(親鞫)을 받고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居烈)의 극형
(極刑)을 받았다.

 

이에 부()인 승()도 주모자(主謀者)로 극형(極刑)을 받았고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
의 세 동생(同生)과 맹담(孟澹), 맹년(孟年), 맹종(孟終)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殺害)
되었다.

 

 

이몸이 죽어가셔 무엇이 될고 하니

蓬萊山(봉래산) 제일봉에 落落長松(낙낙장송) 되야이셔

白雪(백설)이 滿乾坤(만건곤)할제 獨也靑靑(독야청청) 하리라 

成三問(성삼문)             甁歌(병가)   63

 

 

병자(丙子,1456) 6 8일 형장으로 가던 수레가 잠시 머물렀을 때 그의 종이 울면서 술을 올리니
몸을 숙여 받아 마시고 그의 충절(忠節)을 다음과 같이 시()로 나타냈다
.


식인지식의인의 食人之食衣人衣  임의 밥 임의 옷을 먹고 입으며
소지평생막유위 素志平生莫有違  일평생 먹은 마음 변할 줄이 있으랴
일사고지충의재 一死固知忠義在  이 죽음이 충과 의를 위함이기에
현릉송백몽의의 顯陵松栢夢依依  현릉(문종의 능) 푸른 송백꿈 속에서도 못잊져라

 

수레에 실려 형장(刑場)으로 끌려 갈 때 대여섯 살 밖에 안된 그의 딸이 따라오며 울부짖으니 그는
뒤돌아 보며


사내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죽지 않으리라
하고는 목이 매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식 사랑하지 않는 아비가 어디 있으며, 아비 사랑하지 않는 딸이 어디 있을까마는, 아버지가 목에
칼을 쓰고 오랏줄에 묶여 음산한 죽음의 괴기(怪氣)가 감도는 수레에 실려가는 모습을 보고 기절해
버린 어머니를 뒤로하고 대여섯 살 어린 딸이 엄습하는 무서운 공포를 이겨내고 세상에서 누구보다
도 더 사랑하는 아버지를 향하여 아버지하고 목 메여 울부짖으며 수레 뒤를 따라오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절로 가슴이 울렁거리게 된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그가 읊은 이 절명시(絶命詩)에서 다시 한번 인간 성삼문의 다른 진면목을
만나게 되어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제 홀로 가야 할 저 저승길, 그 멀고도 먼 길의 외롭고 쓸쓸하고 길고도 음산하며 고단한 걸음을 생각
하며 그는 오늘 밤 잠자리를 염려하고 있다. 외롭고 쓸쓸한 저승 길, 어쩌면 가도가도 적막한 어두움의
노중(路中)에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함께 그 길을 걸어가야 할 아버지 성승과 함께 세 동생들 그리
고 자신의 네 아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마땅한 잠자리를 잡지 못하고 어느 황량하기 그지없는 들녁
같은 곳에서 저승의 하룻밤을 쉬어야 하는 것 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어쩌면 아버지의 잠자리를 염려하
는 불효자의 안타까운 심경을 이렇게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으려나하여튼 그도 보통 사람과 별 반
다를 것 없는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이 절명시
(絶命詩)에서 적나라(赤裸裸)
하게 보여주고 있다.

   

절명시(絶命詩)

 

檄鼓催人命 (격고최인명) 북은 어서 목을 베라고 조급히 울리고

西風日欲斜 (서풍일욕사) 저녁해는 하늬바람 속에 기울어 가는데
黃泉無客店 (황천무객점) 저승길엔 나그네 머물 집도 없으리니
今夜宿誰家 (금야숙수가) 오늘밤은 뉘 집에 들러 자고 간단 말인가)


황천무객점 (黃泉無客店) 저승길엔 나그네 머물 집도 없다는데 

오늘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절명시 한 구절을 떠 올리노라면 절로 550년 전의 어느 장면이 아련히
펼쳐진다.

 

, 지는 해를 바라보며 형장으로 끌려가는 성삼문의 쓸쓸한 그림자여

 

장부의 단심 장부의 충절 (1) 사육신의 노래 - 이개

2009.11.19 12:41 | 시와 인생 -우정과 사랑 | 고동소리

http://kr.blog.yahoo.com/lisukum/1239031 주소복사

장부의 단심 장부의 충절 (1)

사육신의 노래 이개(李塏)

 

 

사육신의 의기와 충절이 담긴 시를 앞에 하고서는 필설이 무용하다.

그저 가슴으로 와 닿는 표현키 어려운 뜨거운 무엇이 차오르는 것으로….

 

 

방안에 혓는 燭()불 눌과 離別(니별) 하엿관듸

눈물을 흘니면서 속타는 쥴 모르는고 

우리도 져 촉불 갓도다 속타는쥴 모로노라  

李塏(이개)           甁歌(병가)  67

 

 

이개는 같이 죽은 성삼문 보다 한해 먼저 태어나 서른 아홉 살로 같은 날 죽었으며 그의 생몰연대는
1417(태종 17)1456(세조2)이다.

조선 제6대왕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청보
(淸甫)·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 ()의 증손이며, 중추원사 종선(種善)의 손자이고, 계주
(季疇)의 아들이다. 태어나면서 글을 잘 지어 고려 삼은의 하나로 높은 지조와 학문으로 이름을 떨친
고려 말 유학자인 증조 할아버지 목은 이색의 유풍(遺風)이 있었다.

 

성삼문 등과 함께 같은날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는데,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갈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

우정중시생역대 (禹鼎重時生亦大) 우정(禹鼎)①처럼 중하게 여길 때에는 사는 것도 또한

소중하지만

홍모경처사유영 (鴻毛輕處死猶榮) 홍모(鴻毛)②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는 죽는 것도 오히

려 영광이네

명발미침출문거 (明發未寢出門去) 새벽녘까지 잠자지 못하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

현릉송백몽중청 (顯陵松柏夢中靑) 현릉(顯陵)③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고나!.

 

. ()나라 우왕이 9주의 쇠를 거두어 9주를 상징하여 만든 아홉 개의 솥

. 기러기의 털, 즉 아주 가벼운 물건의 비유

. 문종의 능

 

 

동정(洞庭)밝은 달이 초회왕(楚懷王)의 넉시되야

칠백리 평호(平湖)에 두렷이 빗쵠 뜻은

굴삼려(屈三閭) 어복충성(魚腹忠誠)  못내 발키 흠이라

병가(甁歌) 623

 

이개의 인물 됨과 학문을 사랑하였던 세조는 이개에게 할 수 있는 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권한다.

            

“자고급금(自古及今) 두고 보면 충신열사 자손있나, 왕자비간(王子比干) 이름나도 이름은 전하였으되
자손이 끊어졌고 백이숙제 두고 봐도 수양산 깊은 곳에 채미하고 죽었으니 그 무엇이 쓸대 있나, 이윤
같이 어진이도 하사비군(何事非君) 섬겼으며 너는 어이 고집만 하느냐, 단종이 내 조카(足下)인데 삼촌
되고 못할 소냐, 사직을 두고 보면 불사이군 하랐으나 족하위()를 삼촌이 하니 두 임금이 어이 되며,
한 자손 한 혈육에 분간이 별로 없다. 일월같은 너의 충성 나도 역시 아는 바라, 충신 이름 일반이니 부디
한번 항복하라.

 

이개는 세조에게 대답하면서 오히려 호령하듯 하는 말이 일호도 흔들림이 없다.

 

자고로 두고 보면 삼촌으로 족하를 죽여 그 위()를 뺏는 임군 누구를 보았느냐, 이윤이 섬긴 임금 골육
상쟁 임금이냐, 형의 뒤를 어이 끊고 네 욕심을 생각하면 금수와 같을 지라, 더러운 말 다시 말고 사속히
죽여 다오.”

 

이때 그는 작고 약한 몸집에 파리한 용모여서 얼마 못 견디리라 짐작하였지만 작형(灼刑)을 당하면서도
태연하여 모두들 놀랐다고 한다.

 

꽁치와 과매기 <>

 

 

4.  과매기의 유래 <>

 


과매기(貫目)를 아십니까?
과매기는 영일만 근해에서 잡히는 대표적인 어종인 청어를 말려만든 이 고장 특유의 전통
적인 토산품으로 그 유래와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이 고장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 지역에 청어가 예로부터 오랫동안 잡혀왔으나 조선시대 때
진공품(
進貢品)으로 선정된 관련 식품은 영일과 장기 두 곳 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1832
년과 1871녀의 읍지(
邑誌)에 다 같이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전하는 말에 의하면,매년 겨울이면 청어가 반드시 맨 먼저 여기서 잡힌다고
하는 데 먼저 나라에 진헌한 다음에야 모든 읍에서 이를 잡았다. 잡히는 것이 많고 적음
으로 그 해 (오는 해 겨울을 가르킴) 의 풍흉을 짐작했다.라는 기록은 영일만 앞바다에 청어
가 많이 잡혀 형산강 하류에 까지 올라왔음을 지적해 주는 훌륭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동해안의 청어잡이가 이 고장의 청어잡이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이 고장과 청어 사이에
이루어진 특별한 역사적 사연을 말해주는 사화(
史話)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진공품(進貢品)이 바로 청어(비웃)를 말려서 만든 관목(貫目),관매기, 과매기 이가.말린
청어 또는 건청어(
乾靑漁)라고 불릴 수도 있는 것이나 만드는 과정에서 특별히 붙여진 이름
으로 이해된다.관목(
貫目)은 오늘날 이 고장에서 '과매기'라고 부르는 이 곳 주민의 애호를
받고 있는 건강식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름철의 포항 물회와 함께 포항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겨울철의 향토 식품이 되고 있다

 

.식품으로의 청어는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와서 남겨진 기록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도문대(屠門大 )1611)의 청어(비웃)에 관한 설명을 보면,북도(北道)에서 나는 것은 외피
(
外皮)가 검고 뱃속이 붉으며 전라도에서 잡히는 것은 경상도의 것보다 작고 경주 근해에서는
2
월에야
잡히고 맛이 극히 좋다. 예전에는 천한 물고기 더니 고려 말년에는 쌀 한 되에 마흔
마리만 줌으로 목은집(
牧隱集)에서 이색(李嗇)이 한탄하기를 '세상이 어지럽고 흉년이 들어
백물(
百物)이 주천함으로 청어 마져 드물다고 하였다' 는 것이다.

 

그런데 이익(李瀷)의 성호사설(1763년경)에는 청어에 관한 설명을 '지금 생산되는 청어는
옛날에도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해마다 가을철이 되면 함경도에서 생산
되고 있는데 형태가 아주 크게 생겼다. 추운 겨울이 되면 경상도에서 생산되고 봄이 되면
차츰 전라도와 충청도로 옮겨갔다. 봄과 여름 사이에는 황해도에서 생산 되는데 차츰 서쪽
으로 옮겨감에 따라 점점 잘아져서 천해지기 때문에 사람마다 먹지 않은 이가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성호사설 시대의
청어는 서해의 청어이다. 이 서해 청어를 가리켜 서울 지방에서는
'
가난한 선비들이 잘 먹는 고기'라고 지적 하고 비유어로 표기 하였다. 이렇듯 선비들을 살찌게
하는 물고기 이니 '비웃'이 된 것이다
.

1940
년대 까지만 해도 많이 잡히던 영일만 동해안의 청어가 근래에 희귀해져서 오늘날 시장에
나오는 대부분의 것이 북태평양 원양어업이 잡아 오는 청어로서 맛이 훨씬 떨어진다. 관목(
貫目)
은 음력 동짓달 추운 겨울에 잡힌 청어를 배를 따지도 않고 소금도 치지 않고 그냥 온 마리를
엮어 그늘진 곳에서 겨울내 충분한 시간을 두고 말려 만드는 것인데 곧 냉훈법으로 얼렸다
녹혔다를 반복해서 얼말린(동결건조)식품이다. 이같은 방법 은 경상도 동해안 지방에서 전해
오는 청어 말리는 방법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농가의 부엌은 밤에 차고 밥짓는 동안은 열과 연기로 따뜻해진다.아궁이에 송엽을 땔 때 부엌
안은 연기로 자욱하게 되고 자연 통풍의 필요가 생긴다. 채광을 겸한 그 통기구가 추녀 바로
아래에다 뚫은 살창이다. 그 곳이 바로 청어의 건조장 비웃 및 두름을 겨우내 그 살창에 걸어
두면 동결 건조되고 송엽의 향연으로 훈제 되어 이른 봄 에는 빳빳한 관목(
貫目)
이 되는 것이다.
조상의 미각과 삶의 지혜가 한층 돋보이는 장면이다
.

이규경(
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涎文長散稿)에도 '청어는 연기에 그을려 부패를
방지하는데 이를 연관목(
烟貫目)'이라 썼고 (음식디미방) 1670년경에 말린 고기를 오래 두려면
연기에 씌어 말리면 고기에 벌례가 안난다'고 한 것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하고 있다.

 

그리고 규합양서(閨閤養書)(1815년경) '비웃 말린 것을 세상에서 흔히들 관목(貫目)이라 하니
잘못 부름이요 정작 관목은 비웃을 들어 비추어 보아 두 눈이 서로 통하여 말
게 마주 비치는
것을 말려 쓰면 그 맛이 기이 하다고 한 것과 천소지(
天笑地)
'동해안 지방의 한 선비가
겨울에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 해안가를 걸어가다가 민가는 보이지 않고 배는 고파
오고 있었는데 해변가를 낀 언덕 위의 나무에 고기의 눈이 나뭇가지에 끼인 채로 죽어있는 것을
보고 찢어 먹었는데 너무나 맛이 좋았었다. 과거를 보고 내려온 그 선비는 집에서 겨울마다 생선
중 청어나 꽁치를 그 방법대로 말려먹었다' 는 기록은 관목의 명칭에 대한 의미를 밝혀주는 것
으로 이채롭다.

 

다른 지방에서도 청어가 많이 잡혔으나 유독 이 고장과 장기지방의 청어가 관목으로 진상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연유 에서일까
.
앞서 성호사설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청어의 맛이 그 질이나 기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이 때문에 경상도 동해안 특히 영일만 연안에서 잡히는 겨울 청어가 최상품의 것이 된
것이다. 이러한 청어는 다른 생선과는 달리 특이한 불포화 지방산을 함유하고 있어서 성인병의
예방과 치료에 특효가 있는 우량상품으로 오늘날 판명되고 있다
.

근래에 이르러서는 청어가 잘 잡히지 않기 때문에 그 대용으로 꽁치를 얼말려 과매기를 만들어
먹고 있는 실정이다.그러나 그 대용식품이 옛날 청어관목(
靑漁貫目)못지 않은 맛을 내며 인기
있는 식품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이 고장 특유의 역사적 지혜와 산물로서
그 맥을 이어 가고 있는 때문이다. 오늘날의 꽁치도 핵산이 많이 함유된 건강에 유익한 수산식품
으로 꼽히고 있으며 꽁치는 서리가 내려야 제 맛이 난다는 말이 있듯이 역시 겨울의 꽁치로 만든
과매기는 청어 과매기 이후 이 고장의 토산식품으로 손색이 없게 된 것이다.

 

현재 장기지방에서는 과매기를 만들지 않고 유일하게 포항지방에서 만 그 명맥을 유지하여 전통
적 향토 식품으로 오늘에 계승 발전되고 있기 때문에 포항의 과매기는 더욱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출처 : 다음블로그 푸른소나무

 

 

5.  꽁치의 맛 (영화)   오즈 아스지로 (1962) <>

 

홀아비 노신사인 주인공은 딸에게 중매가 들어오자 시집 보내야 할지 고민한다.

나이가 스물 넷이니 아직 늦은 건 아니지만  딸을 계속 곁에 두다가 좋은 혼사자리를 놓치면
어떡하나 하고 염려가 된다.

 

그러다가 지금은 조기마한 국수집을 하고 잇는 옛 은사,쪽박 선생을 만나는데 예전에는 귀엽
고 예뻤던 쪽박선생의 딸이 40 대에도 시집을 가지 않고 아버지를 돌보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그리하여 얼마 후 딸을 시집 보내고 술에 취한 채 집에 돌아온 아버지.
적적한 집안 복도에 앉아 있는 그의 쓸쓸한 뒷모습에서 영화가 끝난다.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기술적인 수식어는 많다. 고정된 카메라, 일명 다다미 샷이라고 불리
우는 로우 앵글. 그런데 이영화에서는 소위 ‘180도 법칙도 파괴하고 있다.   

180도 법칙이란 ,간단히 말해서 촬영을 할 때 한 컷과 이어지는 다른 컷의 각도가 180도 이내
여야 한다는 것인데 전의 컷과 정 반대에서 촬영을 하게 되면  관객이 혼란을 느낄 수 있다는
이유에서 확립된 촬영의 기본 수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 꽁치의 맛에서는 그 법칙을 무시하거나 애초부터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아예
정반대의 각도에서 퐐영된 화면이 툭툭 이어지고 있었다. 공간적인 면에서는 복도를 저감으로
고정시켜놓고 촬영한 샷이나 공간의 이동을 나타내기 위해 도쿄의 굴뚝, 콘크리트, 아파트의
외관 등을 보여 준 후 바로 폐쇄공간의 이미지가 이어지는 구성 등이 눈에 띈다.

 

몇 개 안 되는 제한된 장소 사무실, 선술집, , 아파트, , 국수집 등-에서 영화의 대부분이
촬영되었고 웬지 이 영화의 절정일 것만 같은 딸의 결혼식은 완전히 생략되었다는 것도 특이
하다. 
그런 것을 과감히 생략할 수 있다는 것. 노련한 거장 오즈 야스지로이기 대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혼자가 된 주인공의 내면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딸을 데려
가는 사위나 딸의 결혼식 장면이나 이별 장면은 다 빼버렸다. 단지 결혼식에 가기 전, 하얀
드레스를 입은 딸이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려하자 네 맘 다 안다. 잘 살거라. 가자.”
라고 짤막하게 이야기 하는 장면이 절정의 전부다.

 

오즈 야스지로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쳐냈다.

 

과거에 쪽박으로 아이들을 다구치던 선생은 초라한 국수집의 주방장이 되어 있고 고이고이
키운 딸은 어느덧 자기 품을 떠나 빈집의 고요함 만이 가득하고 전쟁이다 뭐다 해서 보내버린
청춘은 그저 한낮의 꿈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가을이고 가을에 가장 좋다는 꽁치의 맛이 아닐까.

 

일본영화계 전체가 하향세를 그릴 즈음 오즈 야스지로가 40년 후의 오늘 날 우리가 만나고
있는
쓸쓸한 노년을 바라보는 거장의 시선으로 만든 마지막 작품이다.

 

 

꽁치와 과매기 <>

 

 

1…꽁치

 

다른 이름 : 추도어(秋刀魚) 추광어(秋光魚) 공오(貢魚) 공치어 공치

 

꽁치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학명은 Cololabis saira (BREVOORT)이다. 몸은 길이가 40㎝ 정도로
가늘고 길며 옆으로 납작〔
側扁〕하다. 양턱이 날카롭게 돌출하여 부리 모양을 하고 있다. 입은 아주
뾰족하며 아래턱이 위턱보다 조금 길다. 등쪽은 청흑색이고 배쪽은 은백색이다.

 

냉수성의 근해회유어로서 우리 나라 전연해에 분포하고, 일본과 미국 등지의 일부 연해에도 분포하고
있다. 산란기는 58월경이다.

 

그 설명에 “큰 놈이 56촌”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주척(周尺)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10여㎝에 불과
한 것이 된다. 현재 신안에서는 꽁치를 ‘공멸’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임원십육지≫에 보이는 공어
(
貢魚)는 오늘날의 꽁치를 설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한 종이 있는데 모양은 비슷하나 빛깔이 청색이고 주둥이가 학처럼 매우 길므로 속칭 학치어(鶴侈魚)
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19세기 전반기에 쓰여진 문헌에 이미 꽁치가 소개되어 있기는 하나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도
그 어획량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광복 이후에 비로소 많은 양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0년대에는 동해안에서 많이 잡혀서 1976년에는 4 2121M/T이나 잡혔다. 1980년대 이후는
어획량이 감소 추세를 보이다가 최근에는 다시 증가하고 있으며, 원양어업을 통한 어획량도 계속 증가
하고 있다. 1997년도의 어획고는 원양어업 5 227M/T, 연근해어업 1 8626M/T에 달하였다.

 

꽁치는 자원변동이 심한 편이나 남획 경향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꽁치의 주 어구는 유자망(流刺網)
이다. 연안 유자망 어업과 근해 유자망 어업에서 주로 잡고 있으며, 정치망에 어획되기도 하나 그 양은
많지 않다.

 

울릉도 연해에서는 해조류를 바다에 띄워놓고 여기에 산란하기 위하여 모여드는 꽁치를 맨손으로 잡기
도 하는데 이를 ‘손꽁치’라 하며 그 선도가 높다.

네이트 백과

 

 

2.  꽁치는 서리가 내려야 제 맛이 난다

 

서리가 내려야 제 맛이 난다고 하는 옛부터 전해오는 이 말에는 선조들의 경험을 통한 신통한 지혜가
담겨 있다.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꽁치는 실제로 계절별로 지방의 함량이 달라지는데 여름철
에는 10% 전후 그리고 가을철에는 20% 정도로 높아지다가 겨울철에는 5%대로 떨어진다. 따라서 꽁치
가 가장 맛있는 시기라고 하면 서리가 내리는 10월과 11월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양 턱이 새의 부리처럼
뾰족하게 나오고 몸통과 입이 칼 모양으로 긴데다 이처럼 가을에 제 맛이 난다고 해서 가을 추 자와
칼 도 자를 써서 추도어(秋刀魚), 또는 추광어(秋光魚), 청칼치라는 이름으로 우리 고서(古書)에 등장
하고 있다.  

 

꽁치에는 뼈릍 튼튼하게 하는 비타민 D가 성인 1일 필요량(서인 남녀 1일 권장량 5)3배정도 함유
되어 있으며 그 외에 칼슘,,나이아신 등의 각종 영양소가 많이 들어 있다. 꽁치에는 비타민 D가 약
19
/100g 함유되어 갈치의 11/100g 보다 훨씬 많은 비타민 D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이 비타민 D
뼈의 형성과 관련이 있는 지용성 비타민으로 뼈의 재료가 되는 칼슘과 인이 충분해도 몸 안에 들어 온
비타민 D가 간과 신장에서 활성형 비타민 D로 바뀐 뒤 칼슘과 인의 흡수를 좋게 하여 칼슘이 뼈에 제대로
붙어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꽁치는 오메가-3 지방산인 EPA DHA가 풍부해 매주 2-4회 꽁치를 식탁에 올리게 되면 다이어트
와 건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다고 알려졌다. 오메가-3 지방산은 생선의 껍질 바로
아래 검은 살 부위에 많고 뇌신경 대산에 중요한 비타민 B군은 껍질에, 흰 살에는 단백질,비타민, 미네랄,
타우린도 풍부하며 꽁치의 지방은 우울증을 예방하는 효과가 탁월하다.

 

꽁치의 일본 이름은 산마(sanma)이며 해방 후에도 한동안 꽁치라고 하기보다 동해안 바닷가 마을에서는
산마라고 불렀다. 중국에서는 추다오위 주다오위로 불린다.

 

꽁치라는 이름은 아가미 근처에 침을 놓은 듯 구멍이 있어 구멍 공()자에 물고기를 뜻하는 를 붙힌
공치가 된소리로 변해 꽁치가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연세대학교 홍윤표 교수는꽁치, 누치(눕치>눗치>누치),
멸치, 삼치, 준치, , , , 은 그 뜻을 알기 어렵고 아직은 그 어원을 알 수 없다고 가물치와 붕어의
어원이라는 글에서 밝히고 있다.

 

꽁치는 통상 굽거나 찌개를 해서 먹지만 요즘은 동해안의 명물 과매기가 등장하여 별미의 특산물로서 한
자리를 매김하고 있다. 과매기도 겨울이 한철인데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11월 중순부터 날씨가 풀리는
설 전후까지 꽁치를 얼렷다 녹였다를 반복하면서 그늘에서 말려 낸다. 

 
                          과매기

과매기가 겨울을 상징하는 별미가 된 것은 꽁치를 얼리고 녹이는 바람이 하필이면 손이 시러워 발이 시러
워 겨울 바람 때문에…” 하고 어릴 적 우리들이 불렀던 그 동요 가사에 등장하는 차거운 겨울 바람이기
때문이다. 과매기를 만드는 과정은 별달리 어렵지 않다. 머리와 내장을 떼어내고 깨끗하게 손질한 꽁치를
얼렸다 녹였다 하는 과정을 2 주 내지 3주 정도 반복하고 나면 쫀득 쫀득 꼬들꼬들한 과매기가 만들어진다.

 

말로서는 쉽고 간단한 것 같아 보이지만 일일이 손으로 고기를 손질하고 아침 저녁으로 밖으로 내었다가
들이며 말리는 과정에 품이 많이 들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특히 과매기 철인 11월에서 이른 2월까지
추운 겨울을 나는 이 기간 구룡포에는 전국 각지에서 구매자 행렬이 줄을 이어
한 시도 숨을 돌리기 어려울
만치 바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꽁치를 요리하기 위하여는 다음과 같은 요령으로 손질을 하면 된다.

꽁치는 사실 비늘이 없는 등 푸른 생선이긴 하지만 요리할 때는 비늘을 칼등으로 긁고 아가미 족에 나무
젓가락을 넣어 내장을 빼낸다. 그리고 옅은 소금물에 깨끗하게 행군 뒤 키친타월에 올려 물기를 뺀 뒤
구이와 조림용으로 나누는데 구이용은 레몬즙이나 생강즙, 굵은 소금으로 밑간해서 잠시 채반에 널어
꾸덕꾸덕하게 말려 사용해야 모양이 살고 살이 단단해서 부서지지 않는다.

 

칼칼한 밥도둑이라는 별명을 듣고 있는 <꽁치묵은지 찜> 요리법은 다음과 같다.

 

꽁치 3 마리 묵은지 1/2 포기, 양파 1/2, 대파 1/2, 멸치육수(생수) 1, 김칫국물 1

 

묵은지가 없다면 푹익은 포기배추김치를 사용한다.

묵은지보다 깊은 맛이 덜하고 깔끔한 김치라면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 액젓 살짝.육수를 살짝 넣어 다데기
(양념)를 넣으면 좋다.

좀더 맵거나 칼칼한 것을 좋아하면 고춧가루를 추가로 넣고 묵은 김치국물과 소를 함께 넣고 멸치육수나
사골육수를 생수대신에 넣으면 진한 맛이 난다. 들기름을 살짝 넣어도 잘 어울리고 찌개 보다도 국물이 적게
자작하게 만드는 꽁치묵은지 찜은 중간 불에서 30분 이상 푹 익히면 더욱 부드럽고 깊은 맛이 난다
. 
퍼옴<꽁치묵은지 찜>-

 

한편 꽁치구이와 잡곡밥 2/3 공기 호박 된장찌개 나물과 함께 상에 올리면 400 칼로리가 조금 넘는 훌륭한
다이어트 식단이 된다.

 

3.  꽁치를 노래한 시 두 편

 

 

꽁치와 처음처럼      배설

 

 

균형 잃은 둥근 양철 식탁에

두 팔을 올려놓고

냉장고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꽁치의 눈알을 본다

목은 쳐서 버리고 나머지 부분만

내 머릿속에서 구워진다

지글지글 껍질이 터지면서

당신의 두터운 손등으로 기름이 튄다

잘 구워진 눈물이 떨어져

적당히 맛이 날 때쯤

살들은 터지고 만다

젓가락을 양 손에 쥐고  

쭈욱 벌려 놓으면

내 이중의 가슴이 함께 터진다

가시만 남은 내 머릿속을 헤집는 두통

 

꽁치 살은 처음부터 스스로 터져서

술안주의 사명을 포기한 거야

때로는 이유 없이 당신을 증오하듯

독하게 파편이 된 거야

군데군데 박혀서 상흔이 되어

영원히 당신이 기억하도록 한 거야

처음처럼 우리는 되돌아 갈 수 없어서

또 처음처럼을 처음처럼 계속 마시는 거야 

 

 

 

어촌          무화가

 

 

바람이 열젖힌 문으로

바다가 들어 앉아

 

너스레 도란도란

갯것들 낮잠이 한창

 

비바리 속속곳

미역이 나란히 마르고

비린내 고운 내음

시린 햇살 가득히 

 

고깃배 노니는 결

숭어 뜀 저리 고울까

 

동백꽃 흐드러져

제 말을 잃지 않은

 

뒷곁 응달 처마 끝

과매기 익는 마을

꿈에 본 내 고향 (8) 외국에서 부르는 노래

2009.11.10 13:48 | 그리운 나의 사랑아 | 고동소리

http://kr.blog.yahoo.com/lisukum/1239027 주소복사

꿈에 본 내 고향 (8)

8.  외국에서 부르는 노래

 

1)  최치원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 가서 쓴 〈추야우중 秋夜雨中〉이라는 시는 고향을 그리는 시의 고대
형태가 될 것이다. 타향에서 비가 올 때는 울적하며, 달을 볼 때는 부모 생각이 간절하고, 몸이 아플 때는
슬프고, 돈이 떨어질 때는 막막하다. 이러한 경험은 바로 고향에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최치원의 이 시에 나타난 향수는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秋夜雨中   추야우중   가을밤 빗소리 속에

秋風惟苦吟 추풍유고음 가을바람 맞아 그렇게 괴로이 읊었건만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 내 뜻 알아주는 사람 이세상에 적구나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창 밖엔 비 흩뿌리는 이 한밤중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등잔 앞에 두고 마음은 만리 저쪽

스산한 가을 바람 홀로 괴로이 읊조리나
온 세상에 이내 심경 아실 이 드무네
창 밖에는 삼경의 비가 오는데

등불 앞에 까마득이 만리의 마음이여

<
: 단산 선생>

 

與于愼微長官(여우신미장관)  우신미 장관에게

 

上國羈捷久(상국기첩구) : 상국 당나라에 와서 산지 오래되어

多慚萬里人(다참만리인) : 먼 나그네 너무 부끄럽습니다

那期顔氏巷(나기안씨항) : 어찌 안씨의 누추한 동네인들 바랐겠읍니까만

得接孟家隣(득접맹가린) : 뜻 밖에도 맹자 같은 이웃을 얻었습니다

守道唯稽古(수도유계고) : 참된 도리를 지킴에는 오직 옛 일을 살펴보고

交情豈憚貧(교정기탄빈) : 정을 나눔에 어찌 가난을 탓하겠습니까

他鄕知己少(타향지기소) : 타향에 친구 드물어

莫厭訪君頻(막염방군빈) : 당신을 자주 찾는 것 싫어하지 마십시오

 

소위 고시만 합격하면 출세가 보장되어 중앙 부처의 좋은 자리나 아니면 지방이라도 힘깨나 쓰고 <영감님
대우> 받으며 행세깨나 할 수 있는 그런 막중한 자리에 보내질
줄 알았던 열 여덟 살 청소년에 불과한 최치원
이 막상 벼슬길에 올라보니 이 것은 
당나라 인의 텃세에 밀려 별 볼일 없는 한직으로 발령받아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한
대접을 받게 되자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한 동안 오도 갈 데도 없는 외톨이 신세가
되어 그 한계를 절감하고 당시 최치원을 아까운 인물로 가까이 해준
당나라 유력 인사에게 자주 찾아가더라도
괄시 말고 귀찮게 여기지 말고 받아 주기
바란다는 그의 외로운 심사를 이 시는 숨김 없이 담고 있다. 

 

비록 자존심까지도 팽개치고 읍소하는 모습이 약간 우리 비위에 거슬리는 것 같지만 사실 이국 만리에 홀로
어찌할 방도가 없이 생계가 막막했던 열 여덟 소년의 처지를
깊이 살펴보자면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지는 상황
이다.

 

他鄕知己少(타향지기소) : 타향에 친구 드물어

 

이 짧은 한 구절에는 최치원이 처하였던 당시의 처지가 참으로 적나라하게 함축되어 있다.


2)  정몽주  

 

봉사일본(奉使日本)

 

水國春光動 수국춘광동 섬나라에 봄빛 흐드러졌구나,
天涯客未行 천애객미행 하늘 끝(떠도는) 나그네는 아직 (고향에) 가지 못하네.
草連千里綠 초련천리록 풀은 끝없이 푸른데
月共兩鄕明 월공양향명 달빛은 두 나라를 밝게 비치네.

遊說黃金盡 유세황금진 유세하다 보니 돈은 떨어지고,
思歸白髮生 사귀백발생 돌아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희어졌네.
男兒四方志 남아사방지 사나이의 큰 뜻이
不獨爲功名 부독위공명 오직 이름만 남기기 위한 것은 아니네.

 

정몽주가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있을 때, 고국을 그리는 심정을 쓴 것임

 

渤海懷古         발해회고

 

唐室勞師定海東 당실노사정해동  당 나라 군사들이 힘들여 해동을 평정했으나

大郞隨起作王宮 대랑수기작왕궁  대조영이 바로 따라 일어나 왕궁을 지었다

請君莫說官邊策 청군막설관변책  청컨대 그대여 변방의 정책을 말하지 말라

自古伊誰保始終 자고이수보시종  자고로 그 누가 처음과 끝을 보장하리오

 

철저히 원나라를 배척하고 개혁을 통해 고려를 중흥시키고자 했던 공민왕(恭愍王)의 뜻과 일치하였던 정몽주
는 처음 명나라가 일어났을 때부터 그들과의 교류를 주장하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에 가까운 외교정책을 주장했다.

 

蓬萊閣           봉래각

 

採藥未還滄海深 채약미환창해심 불사약 캐러 갔다 돌아오지 못한 푸른 바다 깊고

秦皇東望此登臨 진황동망차등림 진시황은 동쪽 바라보며 여기서 누대에 올랐어라

徐生詐計非難吾 서생사계비난오 서시의 거짓 계교를 깨닫기가 어렵지 않았으나

自是君王有欲心 자신군왕유욕심 여기에서 군왕에게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공민왕이 환관 홍윤 등에게 살해당함으로써 명나라와의 외교에 문제가 발생했다.
공민왕이 살해된 뒤 친원파인 김의가 명나라 사신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고려 고정에서는 명나라의
보복이 두려워 감히 사신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
정몽주의 주장에 따라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민왕의
죽음을 알리고, 김의의 사건을 해명함으로써 관계를 복원할 수 있었다.


 

3)  이색(李穡)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원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를 하자 이때, 중국의 학사 구양현(歐陽玄)이 그를 변방
사람이라 하여 글을 지어서 조롱하였다.

꿈에 본 내 고향 (8)

8.  외국에서 부르는 노래

 

1)  최치원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 가서 쓴 〈추야우중 秋夜雨中〉이라는 시는 고향을 그리는 시의 고대 형태가 될 것이다. 타향에서 비가 올 때는 울적하며, 달을 볼 때는 부모 생각이 간절하고, 몸이 아플 때는 슬프고, 돈이 떨어질 때는 막막하다. 이러한 경험은 바로 고향에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최치원의 이 시에 나타난 향수는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秋夜雨中   추야우중   가을밤 빗소리 속에

秋風惟苦吟 추풍유고음 가을바람 맞아 그렇게 괴로이 읊었건만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 내 뜻 알아주는 사람 이세상에 적구나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창 밖엔 비 흩뿌리는 이 한밤중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등잔 앞에 두고 마음은 만리 저쪽

스산한 가을 바람 홀로 괴로이 읊조리나
온 세상에 이내 심경 아실 이 드무네
창 밖에는 삼경의 비가 오는데

등불 앞에 까마득이 만리의 마음이여

<
: 단산 선생>

 

與于愼微長官(여우신미장관)  우신미 장관에게

 

上國羈捷久(상국기첩구) : 상국 당나라에 와서 산지 오래되어

多慚萬里人(다참만리인) : 먼 나그네 너무 부끄럽습니다

那期顔氏巷(나기안씨항) : 어찌 안씨의 누추한 동네인들 바랐겠읍니까만

得接孟家隣(득접맹가린) : 뜻 밖에도 맹자 같은 이웃을 얻었습니다

守道唯稽古(수도유계고) : 참된 도리를 지킴에는 오직 옛 일을 살펴보고

交情豈憚貧(교정기탄빈) : 정을 나눔에 어찌 가난을 탓하겠습니까

他鄕知己少(타향지기소) : 타향에 친구 드물어

莫厭訪君頻(막염방군빈) : 당신을 자주 찾는 것 싫어하지 마십시오

 

소위 고시만 합격하면 출세가 보장되어 중앙 부처의 좋은 자리나 아니면 지방이라도

힘깨나 쓰고 <영감님 대우> 받으며 행세깨나 할 수 있는 그런 막중한 자리에 보내질

줄 알았던 열 여덟 살 청소년에 불과한 최치원이 막상 벼슬길에 올라보니 이 것은

당나라 인의 텃세에 밀려 별 볼일 없는 한직으로 발령받아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한

대접을 받게 되자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한 동안 오도 갈 데도 없는

외톨이 신세가 되어 그 한계를 절감하고 당시 최치원을 아까운 인물로 가까이 해준

당나라 유력 인사에게 자주 찾아가더라도 괄시 말고 귀찮게 여기지 말고 받아 주기

바란다는 그의 외로운 심사를 이 시는 숨김 없이 담고 있다. 

 

비록 자존심까지도 팽개치고 읍소하는 모습이 약간 우리 비위에 거슬리는 것 같지만

사실 이국 만리에 홀로 어찌할 방도가 없이 생계가 막막했던 열 여덟 소년의 처지를

깊이 살펴보자면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지는 상황이다.

 

他鄕知己少(타향지기소) : 타향에 친구 드물어

 

이 짧은 한 구절에는 최치원이 처하였던 당시의 처지가 참으로 적나라하게 함축되어 있다.


2)  정몽주  

 

봉사일본(奉使日本)

 

水國春光動 수국춘광동 섬나라에 봄빛 흐드러졌구나,
天涯客未行 천애객미행 하늘 끝(떠도는) 나그네는 아직 (고향에) 가지 못하네.
草連千里綠 초련천리록 풀은 끝없이 푸른데
月共兩鄕明 월공양향명 달빛은 두 나라를 밝게 비치네.

遊說黃金盡 유세황금진 유세하다 보니 돈은 떨어지고,
思歸白髮生 사귀백발생 돌아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희어졌네.
男兒四方志 남아사방지 사나이의 큰 뜻이
不獨爲功名 부독위공명 오직 이름만 남기기 위한 것은 아니네.

 

정몽주가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있을 때, 고국을 그리는 심정을 쓴 것임

 

渤海懷古         발해회고

 

唐室勞師定海東 당실노사정해동  당 나라 군사들이 힘들여 해동을 평정했으나

大郞隨起作王宮 대랑수기작왕궁  대조영이 바로 따라 일어나 왕궁을 지었다

請君莫說官邊策 청군막설관변책  청컨대 그대여 변방의 정책을 말하지 말라

自古伊誰保始終 자고이수보시종  자고로 그 누가 처음과 끝을 보장하리오

 

철저히 원나라를 배척하고 개혁을 통해 고려를 중흥시키고자 했던 공민왕(恭愍王)의 뜻과 일치

하였던 정몽주는 처음 명나라가 일어났을 때부터 그들과의 교류를 주장하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에 가까운 외교정책을 주장했다.

 

蓬萊閣           봉래각

 

採藥未還滄海深 채약미환창해심 불사약 캐러 갔다 돌아오지 못한 푸른 바다 깊고

秦皇東望此登臨 진황동망차등림 진시황은 동쪽 바라보며 여기서 누대에 올랐어라

徐生詐計非難吾 서생사계비난오 서시의 거짓 계교를 깨닫기가 어렵지 않았으나

自是君王有欲心 자신군왕유욕심 여기에서 군왕에게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공민왕이 환관 홍윤 등에게 살해당함으로써 명나라와의 외교에 문제가 발생했다. 공민왕이 살해된 뒤 친원파인 김의가 명나라 사신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고려 고정에서는 명나라의 보복이 두려워 감히 사신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 정몽주의 주장에 따라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민왕의 죽음을 알리고, 김의의 사건을 해명함으로써 관계를 복원할 수 있었다.

 

3)  이색(李穡)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원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를 하자 이때, 중국의 학사

구양현(歐陽玄)이 그를 변방 사람이라 하여 글을 지어서 조롱하였다.

 

獸蹄鳥迹之道 交於中國 (수제조적지도 교어중국)

"짐승의 발자취와 새의 발자취가 어찌 중국에 와서 왕래하느냐?" 하자.

 

목은은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犬吠鷄鳴之聲 達于四境 (견폐계명지성 달우사경)

"개 짖고 닭 우는 소리가 사방에 들려오고 있다."

하여 구양현을 놀라게 했다.

 

구양현은 기이하게 여기고 또 글 한 짝을 지었다.

 

持盃入海知多海  (지배입해 지다해)

"잔을 가지고 바다에 들어가니, 바다가 큰 줄 알겠더라." 하자.

 

목은은 또 즉석에서,

 

坐井觀天曰小天  (좌정관천 왈소천)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고, 하늘을 작다고 하는도다."

하고 회답하니, 구양현은 크게 경탄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이때 목은과 성명이 같은 사람이 있었다. 이것을 비유해서 중국의 어느 학사가 목은을 조롱하는 말로,

 

藺相如 司馬相如 名相如 姓不相如  (인상여 사마상여 명상여 성불상여)

"인상여와 사마상여는 이름은 서로 같으나 성은 서로 같지 않네." 하자.

 

목은은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魏無忌 長孫無忌 古無忌 今亦無忌  (위무기 장손무기 고무기 금역무기)

"위무기와 장손무기는 옛날에도 꺼릴 것이 없고 지금에도 꺼릴 것이 없네."

 

하였더니 무릎을 꿇었다고 전하여진다.

 


4) 
청나라 유배 김상헌 

조선 인조 대왕 시절.

 

병자호란(1637)을 맞아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임금을 모신 충신 김상헌 과 최명길
은 죽기를 결하고 서로 반대 의견을 주장한다.

 

즉 수도를 점령하고 남한산성 코밑에 들이닥친 청나라 군사와 화의(和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최명길 이
청 태종 앞으로 보내는 화의국서를 작성하자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다 죽을지언정 오랑캐 따위에게 항복할 수
없다며 최명길 이 쓰고 있는 화의 국서를 찢어버린 김상헌. 결국 최명길 의 의견대로 화의가 이루어지고 전쟁은
인조 임금이 오랑캐 추장 앞에 세 번 조아리고 아홉번 머리를 쳐박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는 항복으로 끝났다.

 

최명길이 어명에 의해 무조건 항복하는 치욕적인 글을 썼다. 
"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 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대국의 위엄과 덕이 멀리 퍼져 있으나,
소국은 이를 모르고 이었습니다. 원한옵건대 대국의 명을 받아 그 번국(
藩國)이 되고자 합니다......."

옆에서 이 글을 지켜보던 김상헌 이 서한을 찢고 최명길 에게 이르되
,
"
대감은 어찌 항복하는 글만 쓰시오. 선대부께서는 명성이 있던 분이었소. 부끄럽지 않으시오
?"

최명길 은 찢긴 서한을 붙이면서
,
"
글을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되고, 다시 붙이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되리라. 대감으로서는 당연한 말씀이오.
대감은 과연 의사요. 그러나 종사를 위해서는 다시 붙이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하리요
."

이들은 모두 절박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소신을 토로하였던 것이다.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던 김상헌 은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안동의 학가산
(
鶴駕山)
에 들어가,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두문
불출하였다
.

가노라 삼각산 (三角山)아 다시보자 한강수(漢江水)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 말동 하여라

김상헌(金尙憲)

 

청 나라에 잡혀가면서 지어 남긴 김상헌 의 유명한 시조 한 수이다.

 

김상헌은 청 나라 심양 (1641-1645)에 끌려가 4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였다.

 

청 나라 심양의 감옥에 갇힌 김상헌 이 어느 날 보니 옆방에 최명길(1643-1645 2년간 수감생활)이 갇혀
있는 것이 아닌가? 김상헌 은 최명길 을 송나라 진회(秦檜)와 같이 화의함으로서 나라를 망칠 뿐만 아니라 일신
의 영화와 부귀만을 노리는 매국노라고 생각하여 원수처럼 미워하였으나 그것이 아니고 최명길 이 진심으로
임금을 구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보전하고자 항복하기를 주장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이다. 지천 최명길 은 청음 김상헌 이 이름을 후세에 날리기 위하여 척화를 고집한 것으로 오해했으나 지금 잡혀
와서도 여전히 굳굳하게 저항하며 항복하지 않는 것을 보니 참으로 충의의 선비인 것을 알았다
.
그리고 다같이 배청숭명 (
背淸崇明) 즉 오랑캐 나라인 청나라를 배척하고 비록 국력이 쇠락해가고 있지만 명
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을 지니고 있음을 그 감옥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두 사람의 길은 한 곳이었으나 다만 그 가는 길이 다를 뿐이고 만나는 곳은 하나였던 것이다

자기의 뜨거운 애국심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고 깨닫고 서로 상대방 앞에 머리 숙여 화해를 자청했던 것이다.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굴하지 않고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끝까지 저항하였던 김상헌은  1645년 소현세자와
더불어 최명길 과 함께 귀국하게 된다. 한편 먼저 잡혀갔던 삼학사(三學士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굴복하지 아니
하여 중원(中原)에서 고혼이 되고 말았다
.

상헌은 죽인다고 해도 응하지 않았고 삼학사는 살려준다고 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5)  왜국 유배 백수회

한등객창(寒燈客窓) 벗 업시 혼자 안자  님 생각 하며서  좌우를  도라보니
북해(
北海)인가 연옥(燕獄)인가  이 어데라 할 께 이고
청풍(
淸風) 명월(明月) 벗 삼은 몸이 위국단심(爲國丹心) 못내 슬허 하노라  

백수회(白受繪)          

 

백수회는 우리에게 '가노라 삼각산아.'로 잘 알려진 김상헌과 함께 대비되는 일본에 끌려갈 때 쓴 시로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청나라를 대항해 싸울 것을 주장하던 '주전파'였으나, '주화파'
의 최명길 등의 주장으로 전란 후에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과 함께 볼모로 잡혀 가게 되었는데 그 때의 심정을
노래한 시조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였다
.

병자호란 때의 김상헌에 대하여 백수회는 임진왜란 때에 왜군에 포로로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던 인물이다.
그의 나이 19세 되던 해 임진왜란을 맞고 왜군에 잡혀 일본으로 끌려가 거기서 무려 9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고국에 대한 애국심을 굽히지 않아 현지 왜인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 쓴 시의
하나가 이른바 <
在日本長歌>이다. 타국에서 조국애 서린 몇 안되는 우리 민족의 애국시이다.

 

재일본장가(在日本長歌)

아아! 이 내 몸이 일일도 삼추로다.
해동 이역을 이 어디라 할 것인가
?
천심이 블조하니, 만리 표림이라
.
눈물을 씻고서 좌우를 돌아보니
,
어음이 부동하고, 풍속이 상위로다
.
청의를 메었고, 성전에 절하며
,
이제의 채미와 소무의 한절과

천상의 위국단심을 잊지 않은 이내 마음

조조 모모에 서산을 창망하니
,
일촌 간장이 끊는 듯 잇는 듯

건곤을 부앙하고, 고사를 사량하니
,
부모의 은덕과 형제의 우애를 못다 갚은 잔구로다
.
침상에 꿈꾸어 고국에 돌아 오니
,
궁실이 여전하고, 송국이 황무로다
.
부모께 절하며, 이제를 덥썩 잡고
,
중년 불견하며, 양생 상비

이르며 물으면서 체루를 상휘하고
,
적적 전정을 못내 베푼 사이에

이요 난이하니, 원접 경회하도다
.
(
송담집에서
)

 

백수회가 일본에서 9년을 지낸 뒤 27세 되던 때에 풀려나 환국하게 되었다. 그 뒤 40세가 되었을 때 광해군
계모 유폐사건으로 정국이 혼란할 때 분연히 반대의사를 상소하여 광해군의 난정을 맹렬한 비판을 가하였고
광해군을 몰아내는 인조반정 후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지냈던 인물이다
.

백수회의 작품으로는 왜군에 포로가 되었을 때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5편의 한시와 가사를 남기고 있는데,
〈도대마도가 到對馬島歌〉·〈재일본장가 在日本長歌〉·〈단가 短歌〉·〈화경도인안인수가 和京都人安仁壽歌〉
로서 모두가 우국충정의 내용을 담고 있다.

 

 

어와 하도 할샤 이내 분별 하도 할샤

남 모르는 근심을 못내하야 셜운지고

언제사 하늘이 이 뜻 알으샤 사반고국(使返故國) 하려인고

 

 

해운대 여흰 날의 대마도 도라드러 눈물 베셔고

좌우를 도라보니 창파만리를 이 어디라 할게이고

두어라 천심조순(天心助順)하면 사반고국(使返故國) 하리라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다음 페이지 다음 10번째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