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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4/10
 

장부의 칼은 울고 피는 끓고 (3)

 

 

1…신여철(申汝哲)

 


1634(
인조 12)1701(숙종 27).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계명(季明), 호는 지족당(知足堂).
영의정 경진()의 손자이며, 도정(都正) ()
의 아들이다.
효종 때 성균관에 입학하였다가 효종이 북벌(
北伐)을 위하여 훈척(勳戚)의 자제들에게 무예를 닦게 하자 유생
을 이끌고 무예를 연마하였다. 현종 초기에 선전관을 지낸 뒤 무과에 급제하였다
.
1669
(현종 10) 충청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671년 통제사,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1675
(숙종 1) 병조참판을 거쳐 1680년 경신대출척 때는 총융사가 되어 서인편에 서 활동하였다. 그 뒤 공조판서를
거쳐 1688년 형조판서로 훈련대장을 겸하고, 1694년 갑술옥사 때 판의금부사로 장희재(
張希載) 등을 처벌
하였다.


1695
년 형조판서, 1700년 호조판서, 이듬해 다시 훈련대장이 되고 공조판서를 지냈다. 당쟁이 격화되었던
시기에 병권의 요직을 거치면서 서인편에 서서 큰 정치적 역할을 하였다. 시호는 장무(
莊武)이다.

 

 

활지여 팔에 걸고 글배화 품에 품고

평원 광야에 백만군 거느리고

언제나 남만북적(南蠻北狄)을 칠종칠금(七縱七擒)하리오

신여철 申汝哲

 

 

조선 숙종 때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임을 다짐 받았던 안용복은 나라의 허락없이 외국을
출입하여 국제문제를 야기했다는 이유로 조선 조정은 우선 안용복을 서울로 불러올려 가두었는데 이에
대신들 사이에 논란이 일었다. 좌의정 윤지선(
尹址善) 은 온건 대응파의 건의를 받고, 만일 안용복을 사형에
처하여 죽이 지 않으면 앞으로 간사한 백성 중에 다른 나라에 들어가 일을 일으키는 자가 많아질 것이니
안용복에게 극형을 줄 수밖에 없다고 주장 하였다. 사헌부가 이에 동조하여 극형을 주장하였다.


 
“신이 영해(寧海)의 어민에게 물으니, ‘섬 가운데 큰 물고기가 많이 있고, 또 큰 나무와 큰 대나무가 기둥과
같은 것이 있고, 토질도 비옥하다.’고 하였는데, 왜인이 만약 점거하여 차지한다면 이웃에 있는 강릉(
江陵)
삼척(
三陟) 지방이 반드시 그 해를 받을 것입니다.

 

지사 신여철(申汝哲)은 임금에게 이렇게 아뢰고 안용복의 공이 죄보다 크므로 그에게 죄를 주어서 는 안 되고,
즉시 석방하라고 주장하였다. 영중추지사 남구만(
南九萬)
은 안용복을 죽이면 대마도 도주만 기쁘게 할 뿐이지
나라의 약함을 보여 일본과의 외교에도 업신여김을 당 할 것이라며 극형을 극력 반대하였다
.
 
“동래 부사(東萊府使)의 보고에 왜인이 또 말하기를, ‘조선(朝鮮) 사람은 우리의 죽도에 마땅히 다시 들어오는
것을 금지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는데, (
)이 《지봉유설(芝峰類說)》【고() 판서(判書) 이수광(李睟光)
이 저술한 책으로, 지봉(芝峰)은 그의 호()이다.】을 보니, 왜놈들이 의죽도(礒竹島)를 점거(占據)했는데,
의죽도는 곧 울릉도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왜인의 말은 그 해독이 장차 한정이 없을 것인데, 전일 왜인에게
회답한 서계가 매우 모호했으니, 마땅히 접위관을 보내어 전일의 서계를 되찾아와서 그들이 남의 의사를 무시
하고 방자하게 구는 일을 바로 책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라 때 이 섬을 그린 그림에도 또한 나라 이름이
있고 토공(
土貢)7942) 을 바쳤으며, 고려 태조(太祖) 때에 섬 사람이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리 태종(太宗)
때에 왜적이 침입하는 근심을 견딜 수가 없어서 안무사(按撫使)를 보내어 유민(流民)
을 찾아 내오게 하고는,
그 땅을 텅비워 두게 했으나, 지금 왜인들로 하여금 거주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조종의 강토를 또한 어떻게
남에게 줄 수가 있겠습니까?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은 남 구만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쟁론 끝에 국왕이 남구만의 중간책을 채용
해서 안용복을 사형에서 감형하여 귀양보냈고, 후에 강경 대응파가 그를 석방해주 었다.

 

조선왕조 후기 실학파의 대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翼)은 안용복의 건에 대해성호사설(星湖僿說)’ 울릉도
조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생각건대 안용복은 곧 영웅호걸인 것이다. 미천한 일개 초졸로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하여 강적
과 겨루어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땅 을 회복했으니,
부개자(
傅介子)와 진탕(陳湯)에 비하여 그 일이 더 욱 어려운 것이며, 영특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조선시대에 횡행했던 폭력조직 소위 조폭에 관하여 숙종 때의 기록을 보자.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

 

도하(都下)의 무뢰배(無賴輩)가 검계(劍契)를 만들어 사사로이 서로 습진(習陣)합니다. 여리(閭里)가 때문에
더욱 소요하여 장래 대처하기 어려운 걱정이 외구(外寇)보다 심할 듯하니, 포청(捕廳)을 시켜 정탐하여 잡아서
원배(遠配)하거나 효시(梟示)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신여철(申汝哲)에게 명하여 각별히 살펴 잡게 하였다(숙종실록 10 212).

 

청파(靑坡) 근처에 또 살주계(殺主契)가 있었는데, 목내선의 종[] 또한 가입하였으므로 목내선이 즉시 잡아
죽였다. 좌우 포도청에서 7,8명을 잡아서 살주계의 책자를 얻었는데, 그 약조에양반 살육’ ‘부녀자 겁탈
재물 약탈등이 있었다고 한다. 또 그 무리는 모두 창포검(
菖蒲劍)을 차고 있었다. 우대장 신여철(申汝哲)
관대하게 용서한 적이 많고, 좌대장 이인하(
李仁夏)는 자못 엄하게 다스렸다.

 

17세기 후반, 신여석(申汝) . 신여철(申汝哲) 형제가 노년에 함께 모여 살 곳을 찾다가 관악산 (지금의 서울
대학교 부근) 아래 자하동에 터를 잡고 살게 되면서 두 사람은 개울가에 몇 칸 정자를 지어 이로정(二老亭)이라
이름 짓고, 자하동 여러 골짜기를 마음 가는 대로 둘러보며 다니는 것을 소일로 삼았다.

 

 

2.  김진태(金振泰)

 

 

벽상에 걸린 칼이 보믜가 낫다말가

공 업시 늙어 가니 속절업시 만지노라

어즙어 병자국치를 씨서 볼가 하노라

김진태金振泰

 

 

김진태(金振泰)는 조선 말기 영조의 가인이다. 김수장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노가재에 출입하여 가악 활동을
함께 한 사람이다. 시조 26 수가 전한다

 

벽위에 걸어 둔 칼에 녹이 설었다는 말인가.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지 못하고 몸만 늙어 가니 안타까운 마음
에서 칼만 만져 본다아아 병자호란의 치욕을 어떻게 하든 씻어 보았으면 한다

병자호란의 국치를 씻지 못함을 한탄한 노래이다. 칼에는 녹이 나고 자신의 몸은 늙어 가고 있다는 것은 때가
오면 일어나고 싶었는데 그런 기회가 없었음을 아쉬워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이 시조의 내용으로 보아 작가는
순수한 가인이 아니라 무신 출신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말은 크고 닷고 칼은 길고 들고

위국정충(爲國精忠)은 구뷔구뷔 매쳐셰라

어느끠 개가반사(凱歌班師)하여 안락태평 하리오  

작자미상

 

 

벽상에 칼이 울고 흉중에 피가 뛴다

살오른 두 팔뚝이 밤낫에 들먹인다

시절아 너 도라 오거든 왓소말을 하여라

계두거

 

 

세병관 놉흔 집에 황조팔사 버려놋코

무루에 놉히 안져 칼을 빼혀 만질젹에

쥐갓튼 왜추(倭酋)의 무리야 엇지 감히 여허보리

안민영 

 

 

천하비수검(天下匕首劒) 한듸 모와 뷔를 매야

남만북적(南蠻北狄)을 다 쓰러 버린 후에

그 쇠로 호믜를 맹그러 강상전(江上田)을 매리라

계중거 (界中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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