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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전쟁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2) 1. 한국전쟁과 맥아더 장군 2) 인천 상륙작전 전쟁영웅은 전쟁에서 이룬 역할과 성과로 평가되어야 한다. 낙동강 전선이 위태로운 중에도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구상을 그대로 추진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적의 의표를 찌르는 인천상륙을 감행하여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켰다. 10월 1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개시했으며,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다. 맥아더는 북진을 계속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한 후, 미군 장병들이 크리스마스 까지는 귀향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1950년 6월 29일 한국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일본에서 건너와 수도 서울을 공산 인민군에게 내주고 남쪽으로 향하는 무질서한 한국군 철수 병력과 수만 명의 피난민들을 한강 둑에서 지켜 보던 맥아더는 북한군이 계속 남하를 계속하다 보면 병참선이 길게 이어지고 또 서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에 만약 서울 탈환을 이룰 수만 있다면 북한군의 병참 보급로 차단과 유엔군이 배후에서 남하한 북한군을 공격하게 되어 서울 이남에 있는 북한군 은 문자 그대로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리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 속을 섬광처럼 스치면서 이런 거친 구상이 극비리에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실전 작전개념으로 다듬어져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된 세계전사상 가장 우수하고 성공적인 작전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제 1단계 : 9월 15일 오전 5시 40분 한.미 해병대가 월미도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작전개시 2시간 만에 점령을 끝냄 제 2단계 :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 7보병사단, 제 1해병사단이 전격공격을 감행하여 인천을 점령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함으로 인천반도를 완전히 탈환 제 3단계 : 한국 해병 2개 대대, 미국 제 1해병사단이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너 26일 정오에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작전 종결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이라 명명된 인천 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으로 구성된 제10군단에 의하여 인천항 해변에 맹공격을 가하기 시작함으로써 드디어 세계 전쟁사를 통해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한 가장 극적인 사례라고 평가 받는 인천 상륙작전 결행의 막을 열었다. 이는 맥아더 장군의 전략적 혜안과 담대한 용기에 기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 사용에 있어서 지략과 전문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제7합동기동부대(JTF-7)를 편성했는데 71,339명의 한 미 육 해군 및 해병대 장병과 7개국의 해군함정 230척 뿐만 아니라 34척의 일본 LST(상륙정) 까지 포함하였다. D일 작전으로 진남포와 군산 그리고 주문진에 대한 함포사격에 이은 양동 및 양공작전이 실시 되었고 2일간에 걸쳐 치열한 함포사격과 항공폭격이 인천항에 집중되었다.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새벽 5시 40분 한국 해병 1개 중대가 배속된 미 해병 제5연대 제 3대대 병력이 상륙주정에 옮겨 타고 월미도로 향발했다. 기동함대 기함 메킨리호에서는 몸소 승선한 맥아더 사령관과 주요 지휘관 및 참모들이 쌍안경으로 포연에 쌓여 그 자태를 드러내지 않는 월미도 해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 1파견대가 ‘녹색해안’에 상륙한 것은 6시 31분. 뒤이어 6시 59분에는 대대 예비대까지 상륙이 끝났다. 월미도를 경비하고 있던 적군은 400명 정도였으나 이들은 별로 저항도 하지 않은 채 항복하여 포로 136명 전사자 180명의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는 부상 17명에 불과하였다. 대대장의 상황보고를 접한 맥아더 장군은 다음과 같은 격찬의 메시지를 보냈다. “해군과 해병은 오늘 아침보다 더 찬란하게 빛난 적은 없었다.”
 D일 오후 5시 31분 예정대로 상륙주정으로 적색해안에 도착한 제5연대는 사전에 준비해 간 알미늄 사닥다리를 이용하여 상륙에 성공하였고, 청색해안은 평탄한 해안 조건인바 제1연대가 수륙양용차를 타고서 해안 깊숙이 진출할 수 있었다. 뒤이어 예비대인 한국해병 제1연대가 상륙하여 해안을 정리하자 30분 후에 LST가 접안하여 보급품을 양육하기 시작 하였다. 미 해병 제2사단이 태평양전쟁시 상륙했던 타라와에서는 상륙초일 1,5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최악의 상륙이었던데 비하면 인천 상륙작전은 초일 전사 21명에 전상 175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성공적인 전투지휘관이란 그의 전투지휘 원리와 역동성에 따라 작전의 성공여부가 달려 있음을 알고 작전 수행에 임해야 하며, 상황에 맞추어 전투지휘 원리와 역동성을 이해하고 적용해야 한다. 맥아더 장군은 성공적인 전투지휘에 있어서 상호간의 이해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오늘날 지휘관에게 있어서 현 사태와 상황을 평가하는 능력과 미래의 사태를 예측하는 능력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 Jeffery A. Bradford Millitary Review 2001. 3월 호
이리하여 12일 후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의 병참선을 차단하는 한편 인천 상륙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제 10군단과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던 제 8군의 양익 포위공격에 북한군 은 압착섬멸 당하여 만신창이가 되어 38도선 북쪽으로 도주하기에 급급하게 되었다. 드디어 맥아더의 도박은 성공했다. 3) 인천 상륙작전에 대한 반대 인천상륙작전만큼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 작전이 성공한 사례는 전 세계 역사상 거의 없다. 그 당시 미 육군과 해군은 상륙작전 자체가 한물갔다고 공공연히 배척하고 있었다. 더욱이 인천만의 조수상태는 상륙작전에 매우 부적당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수로 조건을 살펴보면 간만의 차이가 32피트나 되고 접근 수로의 조류속도가 7낸지 8 놋트로서 상륙주정 (LCVP)의 속력을 능가할 정도이고, D일 당일 아침의 만조시각은 일출 후 45분 그리고 오후는 일몰 후 27분으로 2시간의 만조시간을 이용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당시의 저마력에 단일 스크류의 APA와 AKA가 외항의 수송선 정박구역으로부터 상륙군을 지정된 해안까지 이동시킨다는 것이 쉽지 않고 적의 포격을 당하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등 난제로 제기 되었다. 참모장 알몬드 장군은 상륙돌격을 실시하기에는 최악의 조건을 가진 상륙장소라고 하면서도 “ 그러나 최악의 상륙가능 해안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최선의 해안이 될 수도 있다. 중국의 옛 격언에 현명한 장수는 불리한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바꿔놓을 수 있는 자란 말이 있지 않느냐? ”라고 맥아더의 뜻을 헤아려 반대자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위와 같은 물리적인 장애 이외에 더 크고 어려운 문제로 첫 번째로 조직적이고 기동성 있는 대규모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할만한 유능한 상륙군과 상륙기동함대를 편성하는 일과 두 번째로 상륙작전의 후속 위협으로 중공의 한반도 개입이나 소련의 동구 침입 같은 공산주의 자들의 반격에 대한 대응책 문제였다.
 유능한 수륙양용군은 미 해병대 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지만 이차대전이 끝난 후 미 해병대는 축구시합이 끝난 뒤 팀이 해체 되어버린 것처럼 전임 존슨 국방장관에 의하여 정예 상륙사단이 해체되고 없었던 것이다. 8월 23일 맥아더는 자신의 인천상륙작전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오마 브래들리 (Omar Bradley)합참의장이 파견한 대표단 셔먼(Sherman) 해군참모총장과 콜린스(Collins) 육군참모총장과 한국의 운명을 결정할 전략계획회의를 동경에서 가졌다. “엄청난 적들이 제 8군 사령관 워커(Walker)의 방어 돌출부로 투입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나는 북한군이 인천 방어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을 걸로 확신한다. 이번 작전의 비현실성에 대해서 언급하는 귀관들의 이견(異見)은 나로 하여금 기습요소를 더욱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적의 지휘관들은 우리가 이런 무모한 시도를 할 것이라고는 감히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습은 곧 전쟁을 성공으로 이끄는 필수 기본요소 이다.”
“나는 미 해군에 대해 확실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미 해군이 가지고 있는 현 능력보다 그 이상의 능력을 믿고 있다. 내 지휘하에서 시행된 지난 태평양에서의 수 많은 해군 상륙 경험에 의하면 이것과 비슷한 어려움은 있었으나 작전 수행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 “상륙작전은 가장 강력한 전쟁수단이다. 나는 인천상륙작전이 5천대 1의 도박이라고 본다. 그러나 나는 이런 도박에 익숙해 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며, 적을 박살 낼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맥아더장군의 자신감은 정말 대단했다. 그는 서슴없이 이번 작전결과에 그의 육사 생도 때부터 시작된 50평생 쌓아 올린 군 명예를 걸었다. 그리고 적을 부산에서부터 맹렬히 공격하면서 전 전선에 걸쳐 서울까지 수복하는 장기 전쟁을 수행한다면 병사들이 도살장의 소 때처럼 죽음을 당하게 되어 적어도 10만 명 이상의 추가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책임을 자신은 질 수 없다면서 합동참모본부가 그 책임을 질 것인가 하고 따졌다. 1950년 8월 29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이 같은 맥아더 장군의 계획을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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