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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은 이런 도시
2008/02/18 오전 11:45 | 여행 자료실

빈은 오스트리아의 수도다.
지난 2001년 빈의 중심지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세계에서 3번째로 생활의 수준이 높은 도시라고 한다.
빈은 BC 500년 경에 세워졌으며 켈트족의 주거지였다. 로마에서는 켈트족을 갈리아인이라고 불렀다. BC 15년에는 로마에 점령당해 게르만족의 침략을 막는 로마제국의 북방 경계도시가 됐다.
중세기에는 바벤베르크 왕조의 본거지였고 1440년에 합스부르크 왕조의 주거지가 됐다. 이때부터 빈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가 됐다.
1805년 빈은 오스트리아 제국(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가 됐고 1815년 빈 회의를 주재하는 등 유럽과 세계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도 1907~13년 빈에서 살았다. 당시 빈의 미술학교는 히틀러를 학생으로 받아들였다가 내쫓았다고 한다. 히틀러는 쫓겨난 뒤 돈이 없어 거리에서 노숙자 생활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후인 1918년 빈은 제1 오스트리아공화국의 수도가 됐고 히틀러는 호프부르크 왕궁의 발코니에서 오트스리아 국민들에게 일장 연설을 했다.
1945년 러시아 군이 빈에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고 2주일만에 러시아군에 함락됐다. 빈은 4대 열강에 의해 4개 지역으로 분할됐다.
2001년 기준으로 빈 인구의 16%만이 오스트리아 출신이고 절반 이상은 옛 유고 출신이다. 또 터키인이 2.5%, 폴란드인이 0.9%, 독일인이 0.8%를 차지한다.
빈의 도심 지역(Innere Stadt)은 과거 외부 침입자를 막기 위해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벽은 도시를 확장하기 위해 1857년에 철거됐다.
비은는 오래 전부터 문화, 예술의 도시였다. 부르크 극장은 독일어권 최고의 극장으로 인정받으며, 빈 폴크스 극장과 조제프슈타트 극장도 명성이 높다. 이밖에 수많은 극장이 빈에 흩어져있다.
빈은 또 오페라 극장의 본고장이다. 슈타트오페르와 폴크스오페르를 비롯해 많은 오페라 극장이 있다. 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홈인 빈 뮤지크베레인 등에서 클래식 음악 연주회도 수없이 열린다.
오늘날 빈에는 많은 유엔기구와 국제기관들이 들어와있다. 대표적인 기구로는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제원자력기구(IAEA),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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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에 대하여
2007/10/25 오전 10:07 | 여행 자료실

 *뮌헨 개요 



 뮌헨은 독일 바바리아주의 주도다. 독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인구는 130만 명이다. 주변 지역 주민까지 합치면 260만 명에 이른다.

뮌헨 시내

  과거 이 도시는 ‘가슴으로 세계를’이라는 표어를 내세웠으나 지금은 ‘뮌헨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로 바꿨다.  도시의 공식 색깔은 검정과 금색이다.

 뮌헨은 알프스 산맥 자락에 위치해있으며 대륙성 기후를 띤다. 1월 평균기온은 영하 2도에 이르며 가장 더운 7월에는 19도 정도가 된다. 

 컨설팅회사인 머서 HR 자료에 따르면 뮌헨은 2007년 현재 세계에서 가장 수준높은 삶을 사는 10대 도시 가운데 8위에 올랐다. 이 자료는 뮌헨을 세계에서 39번째, 독일에서 첫 번째로 물가가 비싼 도시로 꼽았다. 뮌헨은 대도시이지만 함부르크나 베를린 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범죄발생률이 매우 낮다. 높은 생활의 질과 안전도 덕분에 뮌헨은 ‘장난감 도시’(Toy town)이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뮌헨’이라는 이름은 원래 '작은 수도승(Moch)'이라는 뜻으로서 건설 당시 이곳이 수도원이었다고 한다. 수도승(Moch)이라는 단어에 ‘귀엽다’ ‘사랑스럽다’라는 뜻을 함유한 chen을 붙여 오늘날의 ‘뮌헨(Muenchen)’에 이르게 된 것이다. 뮌헨을 상징하는 수도승의 이름은 ‘아이’라는 뜻인 ‘뮌흐너 킨들’이다.

 이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주 양조업을 비롯하여 자동차, 광학 정밀기기, 전기, 화학, 직물, 제지 및 인쇄 등의 공업이 다양하게 발달했다. 또한 남부 독일의 철도 요지로서 3개의 아우토반(고속도로)이 지나고 국내는 물론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로 통하는 국제열차가 발착한다.

 이외에도 막스-플랑크 연구소와 핵 연구용 원자로를 갖춘 학문 연구의 중심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독일 최대 종합대학인 뮌헨대학, 공과대학, 정치대학, 조형미술대학, 주립음악대학, 바이에른 과학 아카데미 등이 있다.

 2개의 음악당과 45개의 박물관, 42개의 극장이 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과 초현대식으로 발전한 시장이 조화를 이루어 나가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다.

*뮌헨과 맥주

 뮌헨은 맥주의 본고장으로 친숙하며, 1972년의 올림픽 개최지로 잘 알려져 있다. 뮌헨의 대표적인 축제로서, 10월에 열리는 맥주축제인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에는 세계의 관광객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기도 한다. 축제 기간 동안 매년 대략 5백30만ℓ (5백cc로 1천6백만 잔)의 생맥주와 60만 마리의 닭, 생선 17t, 110t의 소시지 등이 순식간에 소비된다고 한다.

호프브로이하우스

 이밖에 '리하르트 바그너 축제', '모차르트 축제' 등이 열리며, 각종 박람회와 국제회의가 수시로 개최되고 있다.

  중세, 근대로 접어들면서 독일인의 바깥생활 중심지는 선술집이었다고 한다. 당시 놀이도 신통치 않았고 스포츠도 별로 없었던 시대라 선술집에 모여 관심사를 얘기하고, 주사위나 카드놀이를 하기도 하며 익살을 떨기도 하면서 맥주를 마셨기 때문에 1인당 맥주 소비량은 그 당시가 현재보다 한층 더 많았다.

  그들은 맥주를 마시기 위해 일부러 음식을 짜게 먹었고, 음식에 양념을 많이 넣었는데 그것이 당시의 유행이었다. 또한 여자들도 맥주 집에 앉아 남자와 동일하게 마셨다고 한다.

  뮌헨을 비롯하여 독일에서는 맥주를 마시러 가자는 의미로 ‘캘러(Keller)’에 가자고 한다. 캘러의 본래 의미는 창고로 맥주공장에서는 저장탱크가 설치된 서늘한 지하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캘러에 간다고 하는 것은 지하 저장실에서 잘 숙성된 맥주를 곧바로 마실 수 있는 장소에 가자는 뜻이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뮌헨에는 대단위 맥주광장이 탄생했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호프브로이하우스(Hofbraeuhaus)가 그것이다. 이곳은 3천500개의 좌석을 확보하고 있다. 이 외에도 각 마을마다 수 백 명이 함께 마실 수 있는 비어가든(Biergarten)이 많이 있다.

  19세기 말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은 당시 뮌헨에서 부인 쿠루프스카야와 몇 년을 지낸 적이 있었다. 쿠루프스카야는 당시에 쓴 자신의 일기에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맥주를 마신 시간을 상세히 기록했고, 말년에는 일기를 보면서 뮌헨의 생활을 회상했을 정도로 대형 맥주광장은 뮌헨의 명소가 되었다.

  호프브로이하우스가 유명하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의 아돌프 히틀러와의 관련성 때문이다. 1918년 11월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부상을 당해 뮌헨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해에 독일 사회주의 노동당에 입당한 후 1920년 2월 24일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당세 확장을 위한 대집회를 가졌는데 나치가 힘을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베를린의 바이마르 중앙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예비 단계로써 바이에른 주의 정권 탈취를 시도했다.  이를 ‘뮌헨폭동’ 또는 ‘맥주홀 폭동’이라고 부른다.


*뮌헨의 근대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뮌헨은 연합군의 봉쇄조치로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1차 대전이 끝나고 뮌헨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1918년 혁명 전날 바바리아 국왕 루드비히 3세와 가족은 뮌헨을 탈출했다. 1919년 공산주의 혁명파인 안톤 그라프가 당시 공화국정부 총리였던 쿠르트 아이스너를 살해한 뒤 정권을 잡고 바바리아소비에트공화국 설립을 선포했다.  뮌헨에서 몇 년 동안 살았던 레닌은 이에 대해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소비에트공화국은 불과 몇 개월 뒤 프레이코르프스(자유군)이라는 민병대에 쫓겨났다. 소비에트공화국이 진압되고 공화국정부가 부활한 뒤 뮌헨은 독일 우익정치의 본거지가 됐다.

  1923년 뮌헨에서 세력을 모으고 있던 아돌프 히틀러와 그 지지자들이 쿠데타를 시도해 바이마르공화국 전복을 시도했다.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히틀러는 체포됐다. 나치당은 잠시 활동을 정지해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치당은 뮌헨 이외 지역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히틀러


 

 1933년 마침내 나치가 정권을 잡자 뮌헨은 나치의 중심도시가 됐다. 나치는 뮌헨 외곽 다하우에 첫 포로수용소를 만들었다. 나치는 뮌헨을 ‘운동의 수도’(Hauptstadt der Bewegung)라고 불렀다. 

 1945년 미군이 쳐들어온 뒤 뮌헨은 다시 완전하게 재건됐다.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뮌헨은 고전적 형태로 복원됐다. 1972년 뮌헨에서 하계 올림픽이 열렸다. 이때 ‘검은 9월단’이라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이스라엘 선수들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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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2007/01/20 오전 10:14 | 여행 자료실

■케임브리지(Cambridge)

원래 발음은 '켐브리지'이지만 다른 지역에 있는 'Cambridge'와 구별하기 위해 일부러 '케임브리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인구는 10만8천여 명이다.
BC 1000년경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 40년 로마가 잉글랜드를 지배하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로마 군사 주둔지가 설치됐다. 875년 바이킹이 케임브리지를 침략했다. 바이킹은 이곳을 무역 거점으로 삼았고, 케임브리지는 더욱 번성했다.
옥스퍼드 출신 대학 교수들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케임브리지는 대학 도시로 성장했다. 오늘날 케임브리지는 대학 도시 외에 최첨단 IT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이 도시를 '실리콘 펜'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IT 도시인 실리콘 밸리에서 실리콘을 따왔다. 또 IT 관련 연구소가 펜 랜드라고 불리는 습지에 위치해있다는 데서 펜이라는 말을 인용했다. 도로 교통이 복잡해서 많은 시민,학생들은 자전거를 많이 타고 다닌다.

■케임브리지 대학(Cambridge University)

케임브리지에 있는 대학으로 옥스퍼드에 이어 영어를 쓰는 지역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다. 세 개의 여자 대학교와 두개의 대학원,31개의 대학(College)을 포함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이 대학은 옥스퍼드 출신 대학교수들이 만들었다. 지난 1209년 옥스퍼드에서 일부 대학교수가 여자 살해 혐의로 처형을 당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 교수들이 캠브리지로 건너가 대학을 만든 것. 원래 남자만 받아들이다 1869년부터 여학생도 입학할 수 있게 됐다. 지금은 여학생이 더 많다. 지난해의 경우 남학생 46%,여학생 54%였다.
케임브리지에는 많은 전설이 있다. 퀸스 컬리지에 매스매티컬 브리지(수학 다리)가 있다. 아이삭 뉴튼이 만들었는데 볼트나 못 하나 없이 제작했다고 한다. 이 다리와 관련한 전설도 있다. 한 호기심 많은 학생이 이 다리를 분해했지만 나중에 다시 조립하지 못했다. 이 다리는 해체된 채로 있다가 뉴튼이 죽고 22년 뒤에 다시 겨우 조립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전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이 대학 출신으로는 뉴튼 뿐만 아니라 철학자인 베이컨,17세기 독재자 올리버 크롬웰,`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인도의 네루 총리 등이 있다. 현존 인물로는 찰스 왕세자,물리학자 스티븐 호킹,한국의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악마의 시'를 쓴 샐먼 루시디가 있다.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합쳐 옥스브리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종신직인 현재 총장은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남편인 필립 공이다. 총장은 주로 명예직이고 부총장이 업무를 도맡아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재산은 2005년 현재 31억파운드(약 5조6천억원)으로 추정된다.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대학이다. 2위는 옥스퍼드,3위는 헝가리에 있는 중앙유럽대다. 케임브리지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들은 캠브리지의 중심인 캠 강을 따라 자리하고 있다.

■킹스 칼리지 (King's College)

킹스 칼리지는 1441년에 헨리 6세에 의해 설립된 대학으로 캠브리지 대학에서 가장 오래 역사를 보유한 학교 중의 하나다. 헨리 6세는 원래 이튼 칼리지 졸업생들을 위해 이 학교를 세웠고, 많은 특혜를 줬다.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사랑받는 관광지이다. 공식 이름은 The King's College of Our Lady and St. Nicholas. 캠브리지의 31개 대학 중 가장 유명한 곳이다.
무엇보다도 깎아지른 듯이 높이 솟아있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의 꽃'으로 칭송되는 예배당인 킹스 칼리지 성당도 멋진 볼거리다. 1547년 예배당이 완성되기까지 1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워즈워드의 시에 등장하는 화려한 성당 안 장식이 볼만하며, 16세기에 만들어진 작품인 스테인드 글라스도 인상적이다. 때때로 결혼식, 방송, 녹음작업 등으로 입장이 허가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퀸스 칼리지 (Queen's college)

퀸스 칼리지는 1448년 헨리 6세의 왕비 마가렛이 설립했다. 이어 1465년 에드워드 4세의 왕비 엘리자베스가 다시 설립했다. 건물 전체가 균형있게 짜여져 캠브리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학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1749년에 건조된 '수학의 다리(Mathematical Bridge)'는 아이작 뉴튼이 수학적 이론을 기초로 디자인한 기하하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퀸스 칼리지는 학교 건물에 방음장치를 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캠브리지 대학 내에서 제일 처음 입장료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트리니티 컬리지 (Trinity college)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큰 컬리지다. 학생 수는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합쳐 1천100명에 이른다.
이 대학은 1546년 헨리 8세가 잉글랜드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 양성을 위해 킹스 홀 대학(1337년)과 마이클하우스 대학(1324년)을 합쳐서 만들었다. 이 컬리지 출신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32명이나 나왔다.
과거 뉴코트 중앙에 있는 나무의 가지에 자전거를 걸어두는 게 이 학교의 전통이었다. 수년이 지나 자전거가 낡으면 학교 측에서 끌어내리고,다른 학생들이 다시 자전거를 건다. 지금은 자전거 대신 의자를 건다고 한다.
1695년 영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의 디자인으로 완공된 도서관 건물과 그린링 깁슨이 제작한 조각물이 유명하다. 도서관 이름은 건축가의 이름을 따서 렌 도서관이라 불린다. 이곳에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적과 뉴턴의 노트를 비롯한 여러 문헌과 필사본을 전시하고 있다. 중앙정원에 있는 분수는 바이런이 나체로 목욕한 곳으로 유명하다.

■피츠윌리엄 박물관(Fitzwilliam Museum)

피츠윌리엄 박물관은 뛰어난 소장품으로 유럽에서 손꼽히는 박물관 중의 하나이다.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박물관 건물은 1848년에 비스카운트 피츠윌리엄이 그의 소장품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것. 그가 죽은 뒤 유언에 따라 캠브리지 대학에 증여되었다.
대표적인 소장품으로 세잔, 루벤스, 모네, 드가, 르느아르, 피카소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과 동양의 도자기, 보석, 옛날 유럽에서 쓰였던 도자기, 유리공예품, 가구, 시계, 갑옷,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의 고대유물과 고대, 중세, 현대의 주화와 희귀한 도서, 유명한 작가들의 필사본, 악보 등을 들 수 있다. 1층에는 이집트, 그리스, 중국 등 세계 각지의 미술품과 16세기 독일의 동전, 도자기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2층에는 미켈란젤로, 다빈치 등 근대 유럽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회화잡품을 전시하고 있다.

■케임브리지 기차역

플랫폼이 영국에서 가장 긴 역이었지만 최근 글루체스터 역에 그 명예를 뺏겼다. 플랫폼은 십자가형으로 돼 있다. 이 때문에 이 역에 들어오는 기차는 먼저 멈춘 뒤에 미리 와 있던 다른 기차가 떠난 뒤에야 출발할 수 있다.
런던 킹스크로스 역~캠브리지 케임브리지 역을 운행하는 기차를 이용하면 버스보다 빠르게 캠브리지로 올 수 있는데 1시간여가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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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관광지
2007/01/10 오후 2:59 | 여행 자료실

■ 국회 의사당(Houses of Parliament)

Houses of Parliament 또는 Palace of Westminster라고 부른다. 의회민주주의의 본고장인 영국의 의회정치의 전당이 바로 국회 의사당이다. 웨스트민스터사원 동쪽으로 템스 강에 면해 있는 고딕 양식의 건물이다.
국회 의사당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은 웨스트민스터 홀로 1097년에 만들어졌다. 원래 국회 의사당은 국왕이 살던 곳이었다.하지만 지난 16세기 이래 국왕은 이곳에 살지 않는다. 다만 대관식 전날 국왕이 하원의장의 침대에서 잠을 잔다고 한다.
지난 1834년 국회 의사당이 대화재로 대부분 파괴됨에 따라 현재 구조는 대부분 1852년에 만들어졌다. 국회 의사당을 만든 건축가는 찰스 배리와 아우구스투스 웰비 푸긴 경이었다.
3만 2000㎡의 부지 위에 정면 길이가 약 274m, 1000여 개의 방, 100여 개의 계단, 11개의 안뜰, 총연장 3km에 달하는 복도 길이 등 국회의사당의 크기는 엄청 크다. 하원과 상원이 들어있으며 또 각종 위원회와 도서관,로비,식당,바,체육관도 들어있다. UNESCO는 국회의사당과 빅벤을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

국회 의사당과 마주 보며 서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이름은 서쪽에 있는 대사원이란 뜻이다. 1066년 정복왕 윌리엄 공이 왕위대관식을 이곳에서 가진 이래 역대 왕들의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또 수많은 유명 인사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616년 웨스터민스터 사원 자리에 조그만 신전이 건설됐다. 당시 템즈 강에서 한 어부가 성인 베드로의 모습을 보았다. 그 이후 어부들은 이 신전에 연어를 잡아 바쳤다고 한다.
960-970년께 에드가 왕의 후원을 받은 성(聖) 던스턴이 이곳에 베네딕토 승려들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1045-50년에는 에드워드 왕이 이곳에 석조 성당을 만들었다. 1065년 에드워드 왕이 죽기 1주일 전에 성당이 봉헌됐다.
모턴이 쓴 '영국을 찾아서'라는 책에 보면 왕의 대관식이 열리기 전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수도승 유령이 나타나곤 했다고 한다. 유령이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지난 1937년 조지 6세 대관식 때였다고 한다. 이 책은 1051년에 만들어졌다. 따라서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 때 유령이 출현했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헨리 3세는 이 사원을 개축해서 에드워드 왕에게 바쳤다. 그리고 에드워드 왕의 유해를 사원에 안치했다. 그리고 자신도 이곳에 묻혔다. 이후 많은 왕과 유명인사들도 헨리 3세의 뒤를 따랐다. 현재 이곳에 묻힌 사람들로는 찰스 다윈,아이삭 뉴튼,지오프리 초서,찰스 디킨스,토마스 하디,로렌스 올리비에 등이 있다.

■빅벤(Big Ben)

1859년에 완성된 거대한 웨스트민스터의 시계탑. 빅벤은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건조물 중의 하나이다. 언제 봐도 멋지지만 특히 국회의사당의 조명이 빅벤 위로 쏟아지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어둠이 내린 밤의 빅벤이 환상적이다. 웨스트 민스터 바깥에 자리 잡고 있는 국회의사당을 구성하는 건물 중의 하나이다.
빅벤은 높이 97미터,시계 숫자의 크기 60센티미터,분침의 길이 4미터다. 타워 무게는 8천667톤이다. 그리고 시간마다 울리는 종 중에서 가장 큰 것의 무게는 13톤에 달하고 시계의 지름이 7미터가 넘는다.
빅벤은 시계탑 자체를 부르는 이름이 아니고 매 시간마다 13개의 종 중에서 가장 큰 것을 말하는 것이다. 빅벤의 시계는 정확한 것으로도 명성을 얻고 있어 런던 시민들은 물론 런던을 방문한 이들도 빅벤의 종소리를 듣고 시간을 맞추곤 한다.
1941년 세계 제2차 대전의 격전 속에서 국회의사당 건물 중의 하나가 파괴되는 와중에도 그 모습 그대로 살아남아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고 시간마다 종을 울리며 영국 사람들을 깨우고 있다.
건설 이래 땅 상태 때문에 빅벤 타워는 북서쪽으로 22cm 가량 기울었다. 그리고 매년 수mm씩 동서쪽으로 흔들린다고 한다.

■ 런던 아이(London Eye)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큰 회전관람차로 올라있는 런던 아이는 밀레니엄 휠이라고도 한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거대 도시 런던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 2000년 개장 이래 관광객들에게 꾸준히 사랑 받아 왔다.
런던 아이의 총 무게는 1천700t에 이르며 높이 135m, 캡슐 개수 32개, 캡슐당 수용인원 25명으로 한꺼번에 1,000여 명을 태울 수 있는 규모이다. 1초에 26cm씩 움직이며 시속 900m다. 한 바퀴를 도는데 30분이 걸린다. 런던 아이 회전속도가 너무 느려 멈추지 않고도 승객들이 타고 내릴 수 있다.
지난 1999년 12월31일 개장했지만 기술적인 문제로 2000년 3월까지 고객을 태우지 못했다. 2002년의 경우 1년 동안 850만명이 런던 아이를 이용한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 2005년 3월 런던 아이가 설치된 부지 소유자인 사우스 뱅크 센터 측이 연간 토지 임대료를 연 6만5천파운드에서 250만파운드로 인상시켜달라고 요구했지만 런던 아이 측이 이를 거부해 런던 아이 철거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이에 켄 리빙스턴 런던 시장이 개입해 문제 해결에 나섰다. 그는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지 않을 경우 토지를 강제 수용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은행과 런던 아이 측은 지난해 2월 매년 최소 50만달러의 임대료 조건으로 25년 장기 임대 계약에 합의했다.

■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

버킹엄 궁전 부지는 에드워드 왕 이래 소유자가 여러 명으로 바뀌었고,소유권 논란이 일디도 했다고 한다. 이후 블레이크 하우스,고어링 하우스,알링턴 하우스 등이 있었지만 1703년 버킹엄 공작이 사들여 건물을 지음으로써 오늘날 궁전의 기초가 탄생했다.
이후 1762년 조지 3세가 개인 용도로 사들였고, 이후 75년 동안 계속해서 개보수를 했다. 1873년 빅토리아 여왕 시대 때 마침내 왕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궁전 앞 광장에는 금빛 천사를 조각해 얹은 빅토리아 여왕 기념비가 있는데, 이 기념비는 1911년에 빅토리아 당시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2차대전 동안 궁전은 큰 피해를 입었다. 최소한 7번 이상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았다.독일은 버킹엄 궁전을 의도적으로 표적으로 삼았다. 버킹엄 궁전을 파괴함으로써 영국 국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자는 의도였다고 한다.
버킹엄 궁전에서는 여러 가지 해프닝도 많이 일어났다. 지난 1982년 마이클 페이건이라는 사람이 밤에 여왕이 잠들었을 때 침대에 침입한 사건이 발생했다. 또 2003년에는 데일리 미러 신문 기자가 2달 동안 궁전 직원으로 위장해 일해 온 사실이 발각됐다. 당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버킹엄 궁전을 방문 중이었다. 이 신문은 부시 대통령의 궁전 내 침대를 대문짝만하게 실어 난리가 났었다.
지금 버킹엄 궁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부부 외에 그의 아들인 앤드류 왕자와 에드워드 왕자 부부가 함께 살고 있다. 여왕이 궁전에 있을 때는 정면 중앙에 왕실 깃발인 로열 스탠더드가 나부낀다.

■ 트라팔가 광장
(Trafalgar Square)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여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영국의 침공을 단념 시킨 영국의 영웅 넬슨제독을 기념하기 이름 붙여진 광장이다. 당시 영국 해군은 27척의 함정으로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 33척을 상대해 상대 함정 22척을 침몰시켰다. 영국 배는 한척도 침몰하지 않았다.
중앙의 51m의 원기둥 위에 넬슨 제독 동상이 있다. 좌대의 네 군데에는 네 마리의 사자상이 있으며 광장 주변에는 내셔널 갤러리, 애드미럴티 아치 등이 모여 있다. 이 사자상은 침몰한 프랑스군 군함의 고철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광장은 비둘기로 유명하며 많은 관광객들이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곤 했다. 하지만 지난 2003년 법으로 비둘기모이주기를 금지시켜 지금은 비둘기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 하이드 파크

80개가 넘는 공원을 보유하고 있는 런던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도심공원으로 그 면적이 약 160만㎡에 이른다.
과거 에버리공의 영지였는데 면적이 1하이드였다고 한다. 1하이드는 60-120에이커(24만-48만m²). 이름이 하이드 파크라고 붙여진 것은 이 때문이다. 1536년 헨리 8세 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