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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6/08/12
 

[스크랩] <요코 이야기>에 쏟아지는 비난 한국은 과연 전쟁강간에서 자유롭나

2007.01.18 20:12 | 스크랩자료 | 靈通開眼

http://kr.blog.yahoo.com/leechilles/15 주소복사


뉴스 : [오마이뉴스 김홍주선 기자]   ▲ 를 둘러싼 언론 보도로 네티즌들이 '들끓고' 있다. 에서 지난 17일 라는 선정적인 제목으로 보도한 기사를 살펴보자. 전범 가족의 딸 요코 가..

神과 신들에게 하고 싶은말 <Mind game과 구타 유발자들>

2006.12.27 00:06 | 내가 본 영상 | 靈通開眼

http://kr.blog.yahoo.com/leechilles/12 주소복사

神과 신들에게 하고 싶은말 <Mind game과 구타 유발자들>

2006년 초 구타유발자들 이라는 영화가 개봉을 했었다.
작품성이 높다는 말을 듣고 봤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남은것은 이것저것 생각하고 싶지 않을만큼 불편한 감정뿐이었다. 그리고는 나 답지 않게 작품자체를 파헤치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불편했던 영화였다는 기억만 머리한구석에 방치해놓았다.

약 한달전쯤 마인드게임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봤다.

스팀보이를 만든곳에서 제작한 애니라는데 우리가 흔히 봐왔던 극장용 애니와는 작화부터 다른 아주 독특한 애니이다. 문제는 이 애니 역시 나를 아주 불편하게 했다는 점이다.

마인드게임의 주인공은 오사카에 사는 만화지망생인 대학생 니시라는 청년이다. 어느날 니시는 지하철에서 우연히 어렸을때 짝사랑했던 소꿉친구 미요를 만나게 된다. 미요는 니시에게 술이나 한잔 하자며 자기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로 데리고간다. 그곳에서 미요의 약혼자와 함께 술을 마시는 도중 야쿠자가 들이닥치고 겁탈당하려던 미요를 니시가 도와주려다가 총을 맞고 죽는다. 니시는 죽어서 온갖 모욕적인 소릴 듣고난 후 神앞에 선다. 억울하게 죽은 니시는 자신은 무엇을 위해 태어난 거냐며 뭔가 잘못된거 아니냐며 울부짖지만, 神은 오히려 화를 낸다. "그래! 그냥 심심해서 만들었다. 그냥 웃고 즐길려고 만들었다고! 그래서 어쩔건데 새꺄!" 라고 하고는 각종 화려한 레슬링 스킬을 구사해가며 니시를 팬다.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神의 말을 거역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니시는 야쿠자를 죽이고 도망치다가 고래뱃속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30년이나 혼자 살아온 할아범을 만난다.

주인공 니시는 무척 소심한 캐릭터로 미요를 좋아하면서도 청혼도 못한다. 그저 미요를 앞에두고 머릿속에서만 결혼해 달라고 소리 지를 뿐이다. 한편, 미요는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현실을 결혼을 통해 탈출하려고 한다. 그래서 자길 앞에두고 머뭇거리기만 하는 니시가 아닌 생활력이 강해보이는 남자를 택한다. 이렇듯 마인드 게임에 나오는 인물들은 한 두가지씩의 결함을 가지고 있다. 마인드 게임은 등장인물들이 안고있는 문제들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그린 초현실주의 영화다. 마인드 게임이라는 제목에서도 알수있듯이 간단히 설명하자면 '생각하기 나름' 정도라고 할수있겠다. 헌데 마인드 게임처럼 이 세상은 정말 내가 생각하기 나름인걸까?

난 커피를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1.5리터 정도를 만들어 놓고는 하루종일 마셔댄다.
하지만 난 인스턴트 커피를 못마신다. 즉 지금 마시는 커피는 원두커피다.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건 군대있을때 부터 였는데, 물론 인스턴트커피였다. 군대에서 간부가 아니고서야 사병이 원두커피를 마실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커피는 일종의 어른인 된다는 상징성도 있었다. 어렸을때 부모님이 커피를 마시는걸보고 나도 마시게 해달라며 조르면 엄마는 프림과 설탕을 탄 정체불명의 액체를 주시고는 "어린애는 커피먹는거 아냐."라고 하시곤했다. 아마도 어른=커피에 대한 도식은 이때부터 자리잡았던듯 싶다. 내가 커피를 마시려고 했던 또한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건 사람들이 너도나도 커피를 마신다는 거였다. 사회생활을 위한 필수음료쯤으로 인식되는 그 맛없는 인스턴트 커피를 제대 이후에도 오년동안이나 마셔댔다. 하지만 특이체질인 나는 인스턴트커피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 커피를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히는 사람들 속에서 살고있던 난 강제로라도 중독되고 싶었음에도 결국 오년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작년에 우연히 원두커피를 사다 마셔봤는데, '럴수럴수 이럴수가' 커피가 이렇게 맛있는 거였다니. ㅠ,.ㅠ

커피라고 다같은 커피가 아니다. 일단 인스턴트와 원두커피로 나뉘고 원두커피는 각 산지마다 다르게 구분될뿐만 아니라 만드는 방식으로도 구별된다. 다 뭉뚱그려서 커피라곤 부를순 있어도 엄연히 다르다. 내몸속에 들어가는 인스턴트 커피를 원두커피라고 생각할순 있어도 그건 엄연히 인스턴트커피이듯이 말이다. 커피를 많이 마시다보니 가끔 속이 쓰릴때가 있는데 커피가 위를 자극하기 때문이란다. 만약 커피때문에 위궤양이 생겼는데 계속 커피를 마셔대며 '난 아프지 않아' 라고 생각한다면 난 정말 아프지 않은걸까?

마인드 게임이 말하는 내용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니시는 분명히 남이 보면 쪼다나 바보라고 불릴수 있는 행동을 했고 또 그런 놈이다. 하지만 니시같은 사람들의 소심함이 정말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가? 니시를 죽인 야쿠자 아츠도 사실 알고 보면 불쌍한 놈이다. 아츠의 야쿠자 두목은 불행하게 성장한 아츠에겐 축구가 낙이었고 월드컵관람을 학수고대했는데 표를 잃어버리고는 폭주했다며 경찰이 들으면 좋아할 얘기라고 비웃는다. 아츠를 죽이고 도망치다 고래뱃속에 갇힌 니시일행은 그곳에서 30년이나 살아온 할아범을 만난다. 여기서 고래뱃속은 관계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 할아범은 젊었을적 바다에서 마약밀거래를 하다 당국에 들켜 쫓기던중 고래뱃속에 갇힌 사람이었다. 아츠와 그 일행이었던 형님이라는 야쿠자와 마약밀매범인 할아범이 등장하는 건 이영화가 범죄를 현실도피의 한 방법으로 보기때문이다. 니시일행이 찾아간 할아범의 은신처는 흡사 오타쿠의 방처럼 꾸며져있다. 이것 역시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한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사는 속칭 오타쿠라고 규정되어진 일본인들을 가리킨다. 이렇듯 등장인물과 장면속에 함유된 메타포가 갖는 의미(니시의 공상과 야쿠자들의 과격함 그리고 오타쿠들의 고립적 세계관)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채 도피하기 급급한사람들의 속성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처럼 애니는 소심한 니시와 야쿠자같은 범죄자들 그리고 오타쿠들이 안고있는 문제를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은채 자기만의 세계에 안주하려했던 어디까지나 너 자신의 문제일뿐이라고 말한다. 그럼 하나만 묻자. 정말 나만 다르게 생각하면 나에게 닥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건가?

사실 이 애니를 그냥 무시하려고 했지만 이 애니에 대해 생각할수록 마음속에서 걸리는 영화가 하나 있었다.
바로 구타유발자들이었다.

한적한 시골강변에서 벌어지는 가공할만한 폭력은 너무도 강렬해서 자칫 영화가 말하는 의미자체를 놓칠수도 있다.
구타유발자들은 폭력 그 자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폭력이 유발되는 부조리함을 그리는 영화다.
골빈이가 잔인하게 그려지긴 하지만 골빈이의 폭력은 철저하게 선배라는 구조위에서 그려진다.
성악교수 영선이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서 제자 인정을 겁탈하려고 하는것과 별반 다를바없다.
골빈이가 애국가를 열창하는 가운데 현재와 영선이 난투극을 벌이고 골빈이의 똘마니인 홍배와 원룡이 인정을 겁탈하려는 장면이있다.
이 장면은 골빈의 명령 즉 골빈이가 만들어 놓은 구조속에서 행해지는것 같지만 사실 골빈이는 대한민국이라는 구조를 혐오하는 자신의 반구조적인 성향을 폭력을 통해 드러낸 것이다. 왜냐하면 골빈이의 폭력성은 학생시절 야만인이라고 불리던 선배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나이가 어린 현재를 시켜 사회적 강자인 영선을 공격하게 하는것이다. 골빈이가 인정이를 냉혹하게 대하는건 자신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벤츠로 상징되는 권위적인 폭력속으로 되돌아가려 했기때문이다. 인정이에게 동질감을 느꼈던맘큼 골빈이는 이러한 인정이의 행동에 배신감을 느꼈을뿐만 아니라 그러한 인정이를 통해 자기혐오를 드러낸다. 골빈이와 현재라는 선후배의 구조를 현재가 깨려하자 "때리는 것도 힘들지."라며 야구방망이를 쥐어주는 장면은 골빈이의 반 구조적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나타낸다. 또한 이러한 현재의 행동을 통해 야만인에게 저항하지 못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현재를 통해 극복해 보려는 처절함이 묻어있다. 경찰이된 야만인 문재가 뒤늦게 사태수습을 시도하지만 거절당하자 법이아닌 선배로서 골빈이와 그일당들을 단죄한다.
"패던 새끼는 경찰이 됐어요. 맞던 새끼는 좃나게 또 맞고."라며 골빈에게 행하는 폭력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구조적 폭력이 구조의 문제가 아닌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바로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다.

神이 재미삼아 만든 존재가 인간이라면 인간자신이 아무리 잘해봐야 그 미래를 보장받을수 있을까? 마인드 게임에 등장한 神은 널 재미삼아 만들었는데 어쩔거냐며 다그치다가 돌아가겠다니까 잘해보라며 건투를 빌어준다. 도대체 뭐하자는 수작인지 모르겠다. 막말로 神이 우리인간과 아무 연관이 없다면 (흔히말하는 초월신-조물주) 그놈의 神이 도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우린 왜 아무 상관도 없는 神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神이 만든 규칙을 지키야 한다는 사명속에서 사는걸까? 만들어놓고 방치한 神은 결국 우리에게 아무의미도 없는 神이다. 그런 神은 부정되어도 할말 없는거다. 마인드 게임의 문제는 여기서부터 드러난다. 神을 등장시켰지만 나만 잘하면 된다면 神은 도대체 왜 나온걸까? 내가 만약 神이라면 기분나빠서라도 안나오겠다. 마인드 게임은 각종 상징과 갖가지 은유를 통해 니문제는 철저히 니 문제이므로 너만 잘하면 된다고 하면서 개인의 성찰을 강조하지만 그 성찰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 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단지 개인의 성찰이 갖는 본질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제대로 볼수있는 시야라는 식인데, 그럼 '우리'에게 있어서 '나'는 처음부터 괴리된 존재란 말인가? 그럼 '나'에게 있어서 '우리'는 무엇인가? 단지 '나'는 '우리'라는 시스템에 일방적으로 흡수당해야만 하는 존재일 뿐인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神이 만든 존재가 우린가? 하지만 '우리'라는 것은 인간들의 집합인것을? '우리'가 지켜야할 제도가 神인가? 그렇다면 神은 적극적으로 인간의 삶을 간섭하는데 왜 니시만은 니문제일 뿐이라며 방관하는가? 그리고 니시의 소심함과 神이 만들어놓은 제도와의 연관관계에 대해서 역시 영화는 일절 언급이없다. 마인드게임은 이러한 결정적인 결함을 가지고하고 있다.

나는 나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사회속에서 나라는 개인이 존재하는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우리속에서 결코 떼어놓을수 없다. 즉 나의 문제는 곧 우리의 문제이다. 본질적으로 나라는 한 개인에게 발생하는 결함은 우리모두의 결함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찰해야한다' 라는 명제보다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성찰이 이루어져야 하는가가 더욱 중요한문제이고 그것이 곧 본질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곧 나라고 한다면 나 라는 자아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진 존재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하기때문이다. 그걸 파악하지 못하면 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결코 얻을수 없다.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얻은 깨달음은 자신을 유혹하는 악마와의 싸움에서 이겨서 얻어낸 전리품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를 철저히 논리적 체계하에서 분해함으로 해서 나의 본질적 문제에 접근한 것에 대한 해답이 곧 깨달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이루는 자아를 없애지 않고는 이 세계를 진실되게 바라볼수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즉 나의 문제란 나라는 개념의 인식론적인 문제라는 뜻이다.
파도를 넘는 니시를 그리면서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니시가 초인적인 힘으로 파도를 넘다가 발목이 삐긋하며 뼈에 금이가는걸 보여주는데 그장면 다음에 어린 니시에게 니시의 엄마는 "우유를 마시지 않으면 뼈가 약해진다." 는 말을 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장면은 지금 니 발목뼈가 나간 이유가 그때 엄마말을 안들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다 다음장면에서 니시의 엄마가 씽크대에 쏟아진 우유를 보고 '할수없지' 하며 음식속에 우유를 섞는걸 보여준다. 그리고 니시의 발목뼈는 다시 붙고 니시는 힘차게 파도를 헤쳐나간다. 즉 니시가 초인적인 힘으로 세상을 향해 뛰어나가야 하는 이유가 엄마말씀 즉 제도적 기제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세상에 에반게리온 이후 이렇게 돼먹지 않은 애니는 처음본다. 도대체 무슨깡으로 이런 애니를 만든걸까?
너를 극복하라고 실컷 떠들고는 고작 엄마말씀이나 잘들으라고? 엄마말씀을 듣는거 중요하다. 그걸 부정하는게 아니다. 하지만 엄마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기위해 그 힘든 고행을 해야하는건가? 그게 그렇게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나와야 할만큼 깨우치기 힘든 법칙들인가? 그리고 이영화는 결정적으로 간과한것이 또 하나있다. 그건 깨달음이라는 명제의 본질적 의미이다. 단순하게 '아!' 하고 한순간 깨달아 버리는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그렇게 깨달은 생각들도 살면서 각종 유혹들 속에서 흐려지기 마련이다. 깨달았다는 사람이 깨달은 대로 행하지않고 그게 현실이야 라며 현실에 안주했다면 그게 과연 깨달은걸까? 깨달음이란 생각의 깨우침으로 완성되는것이 아니라 그 깨우침을 꾸준히 유지하기 위해 육체적인 수행을 계속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경지이다. 즉 깨달음은 정신을 통해 발현되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통해 완성된다. 마인드 게임에는 이러한 태도나 자세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이래놓고 관객들에게 '니들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못사는건 엄마말씀을 안듣기 때문이야.'라며 그 보잘것없는 성찰을 강요한다. 자본주의가 이젠 깨달음마저 상품화 하고있다. 오랫만에 글쓰면서 열받아본다.

이런면에서 구타유발자들은 아주 솔직하고 정직하다. 날것의 폭력이 보여주는 피비린내가 역겹지만 그 역겨움은 단지 피비린내에 대한 역겨움이 아니라 제도가 가하는 폭력에 비굴하게 굴복해왔던 자신에 대한 역겨움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문재의 품에서 골빈이가 절대 용서할수 없다고 아직 다 값을려면 한참 멀었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전달되어오는 아픔이 외면해왔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해서 불쾌해 했던것은 아닐까? 구타유발자들은 마인드게임처럼 잰체하며 관객들을 훈계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을 불쾌하리만치 처절한 폭력속으로 끌어들인다. 골빈이가 폭력을 통해 보여준 자기내면의 처절함을 마지막에 풀어놓긴하지만 그렇다고 폭력을 정당화 시키진 않는다. 그냥 담담하게 그려낼 뿐이다.

만약 당신이 구타 유발자들을 보고서 감정이 불편해졌다면 당신은 영화를 제대로 본거다.
만약 당신이 구타 유발자들을 보고서 화가 났다면 당신은 영화를 정말 제대로 본거다.
만약 당신이 구타 유발자들을 보고서 화가 단단히 나서 쌍 욕을 하며 나왔다면 당신은 이 영화에 대해 더할수없는 찬사를 보낸것이다.
만약 당신이 구타 유발자들을 보고서 아무런 감정적 동요가 없다면 그 초연함이 나는 정말 부럽다. 하지만 그런 당신을 닮고 싶진않다.

끝으로 이세상에 神이 있다면 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똑바로 살라고? 세상이나 똑바로 만들어 놓고 그따위 소릴 해라."
그리고 이 세상의 신들에게 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똑바로 살라고? 너나 좀 똑바로 살면서 그런소릴해라. 니 주제나 파악하세요."

mind game (2004)
감독: 마사키 유이사
더빙: 이마다 코우지, 마에다 사야카, 후지이 타카시, 세이코 타쿠나

구타유발자들 (2006)
감독/각본: 원신연
출연: 문재- 한석규, 봉연(골빈)- 이문식, 오근- 오달수, 인정- 차예린, 현재- 김시후, 영선- 이병준, 홍배- 정경호, 원룡- 신현탁

미래를 위한 과거의 전쟁 - The 4400

2006.11.16 05:27 | 내가 본 영상 | 靈通開眼

http://kr.blog.yahoo.com/leechilles/10 주소복사

X-File과 4400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

 어린시절 봤던 미국 드라마들을 꼽아본다면 A특공대나 에어울프, 전격Z작전, 맥가이버등을 꼽을수있는데, 요즘 사람들에게 대표적인 미국드라마를 꼽아보라면 거의 대부분은 X-File을 꼽을것이다. (어린세대라면 CSI나 24, 프리즌브레이크정도) X-File의 어디가 그렇게 특별했던 것일까? 군대 제대하고 한 두달쯤 후부터 첫시즌이 한국에서 방영된걸 정말 우연하게 봤었는데, 단한번의 시청으로 나도 X-File에 열광했었고 급기야 제대와 첫방송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것을 큰 행운으로 여길 정도였다.

 맥가이버류의 액션물들이 기존의 체제나 가치관의 수호자로서 정의를 지키는 사도들이 주인공이었다면,  X-File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당연하게 여기던 가치체계를 뒤집는다. X-File의 주인공은 사건을 과학이 아닌 오컬트적인 해석으로 해결하려 한다든지 정부를 조종하는 그림자정부(빅 브러더)에 맞선다. 이러한 관점은 과학의 시대라고 할수있는 근대사회에 대한 조롱이며,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가치에 대한 도전 이기도하다. 문제는 이렇듯 불량스럽기만한 드라마가 세기말 이라는 시대적 조류와 맞물리며 다양한 사회학적 해석이 등장할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X-File은 참으로 영리한 드라마다.
의문만 던질뿐 결코 해답을 제시하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러한 의문만으로도 사람들이 열광했다는 점이다.
열광의 크기만큼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얼마나 모순과 헛점 투성이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고있었다는 뜻이라고 본다. 과학으로는 설명할수없는 현상과 민심에 반하는 정부앞에서 사람들은  멀더의 시니컬한 문제제기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러한 대리만족은 단순히 세기말적인 시대적 조류라는 식으로 해석할수도 있겠지만, 좀더 본질적으로 국가나 사회의 가치체계를 절대적인 선의 위치에서 관점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뀌고 대체되어야할 가치로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X-File은 드라마의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했다고 할수있다.

             

 TV를 안보고산지 오년도 넘은거 같다.
한번 안보기 시작하니까 잘 안보게 되더라.
그렇다고 집에서 그런걸 아예 안보는건 아니고 영화나 애니들을 인터넷을 통해 보긴 보는데 원래 다작 스타일이 아니라 재밌다고 소문난거 아니면 안찾아보는 그런 스타일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직장에서 CSI를 보고 재밌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직장인이 시간맞춰서 TV프로를 찾아보기가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한동안 포기했다가 영화나 애니처럼 미드도 인터넷에서 찾아볼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검색을 시작했더랬다. 아니나 다를까 CSI는 이미 대세였고, 내가 모르던 미드의 바다가 그야말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 작년부터 내 미드인생은 시작되었다. ^^;;

 CSI를 다보고 허전함을 느끼던 무렵 내가 즐겨보던 클럽에서 다소 선정적인 소개글이 붙은 미드를 보게되었다.

"4400명의 실종자들. 작가들 완전 천재! 강추!"

 '뭔데 이렇게 호들갑이야.' 싶었지만 역시나 광고효과란 무시할수 없는거다. 이렇게 4400에 손이간 나는 쥔장의 발랄한 소개글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게 봤다.
4400의 첫번째 시즌은 귀환자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극을 끌어나간다는 점에서 얼추 로스트와 비슷한점이 많다. 그러다가 두번째 시즌으로 넘어오면서 귀환자들이 조직화되는것에 위기를 느낀 정부와의 갈등이 표면화되는데, 이런 모습은 X-File에서 멀더와 그림자 정부의 대립구도를 보는거 같았다. 드디어 올해 8월말 미국에서 세번째 시즌이 끝나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몰아보기 시작했다.(궁금한거 기다리면 말라죽는 스타일^^;;)
세번째 시즌의 초반부와 중반부는 극의 전개와 대립구도가 전편과 다를바가 없어서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엄청빨리 싫증내는 스타일 ;;;;;)
그러다가 중후반부로 넘어오면서 앞으로 전개될 사건이 내포하는 대립구도가 놀랄만큼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2006년 10월 마지막주 일요일 'KBS일요스페셜'은 미국산 쇠고기에 관한 방송을 내보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앞둔 시점이라 그 파급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지난주 최대의 이슈였으니 다들 아시리라 본다.
여기서 다시 이 방송에서 제기한 문제점들을 짚어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난 '미국산 쇠고기 문제가 미국 축산업계의 문제일 뿐일까?' 라는 의문을 던져보려고 한다.

 광우병이 최초 발병한 영국은 목축업이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광우병이 발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축산업계는 건재하다. 광우병 발병 이전부터 각종 경고들이 나왔음에도 미 정부는 무시로 일관하다가 광우병이 터졌음에도 대처를 제대로 해서 확산되지는 않았다는 의견을 보이며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다는 자세를 견지하고있다. 왜 미국과 영국은 같은 광우병을 두고 이렇게 다른 모습을 보일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것을 미국산 쇠고기 문제가 단순히 미국 축산업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정치시스템의 문제라고 본다.

 방송에서 오프라 윈프리가 축산업계를 비난하자 축산업계는 일제히 소송으로 맞대응한다. 오년동안의 지리한 싸움끝에 윈프리가 이기긴했지만, 축산업계는 언론과 비판자들에게 입 함부로 놀리지 말라는 경고를 대놓고 과시했다. 부시는 축산업계 선거자금의 80%를 끌어다 썻으며 역대 미 농무부장관들은 축산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들로 채워졌다. 이러한 정부가 미국일반시민이 아닌 축산업계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건 어찌보면 참 당연한거다. 상황이 이렇자 미국인들의 쇠고기 소비가 줄기시작했다. 시민사회가 소비저하로 대응하자 미국정부는 수출로 축산업계를 보호하려했다.
쇠고기라는 불똥이 이젠 주변국가로 튄것이다.

 영국과 미국이 광우병이라는 사안에 저토록 다르게 대응할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이 패권국가이기 때문이다. 영국도 광우병 초기엔 찍소리 못하다가 시간이 좀 흐르자 자기들만 뭐라한다고 볼멘소리를 해대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반응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십분 활용해가며 축산업계의 위기를 타개하려고 한다. 특히 한국처럼 미국의 그늘아래서 50년이상 머문나라는 미국이 안전하다고 하면 그냥 받아들일수밖에 없다. 일본처럼 무시할수없는 데이터를 축적해가며 대응하지도 못하는 한국정부는 산업을 보호하기위해 그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하며 그것이야말로 국익이라고 떠든다. 어디선 많이 보던 논리 아닌가? 자이툰부대 파병할때도 들었던 소리고, 미국과 FTA체결의 당위성을 주장할때도 들었던 소리고, 주한미군을 위해 대추리주민 내쫓을때도 역시 들었던 소리들이다.
소수를 희생해가며 다수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국익인가?
그리고 이 사회에서 희생을 요구받는 것은 정말 소수일 뿐인가?
경제개발기 노동자들이 저임금으로 희생하며 한국경제를 세계 10위권의 반열에 올려놓았지만 아직도 노동자들은 찬밥신세다. 쌀수입쿼터 증가로 쌀농사에 기대는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존권이 위협받는다며 울부짖지만, 그저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 무지렁이들이라며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는다. 미국도 문제지만 한국은 더 문제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러한 문제의 원인들이 단지 이익단체의 이기심과 관련산업 종사자들에게만 해당되는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와 투표권을 보장받는 민주주의가 근간인 근대국가가 중세나 봉건시대의 왕정보다 확실히 나은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문제점이 없는것은 아니며 왕정보다 낫다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체제의 문제점들을 방치해서는 안된다. 시간이 흐르며 사회와 국가의 정의가 변해왔듯이 현재의 시스템도 변화할것이다. 또 그래야 한다.

 

 처음 4400명의 귀환자들은 자신들의 납치와 귀환의 목적에 대해 알지 못했다. 정부도 이러한 의도를 알아내기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4400명을 사회에 풀어놓는다. 극 초반에 귀환자들의 초능력은 위험요소로 간주되기는 하지만 파편화된 귀환자들을 통제할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조던 콜리어라는 귀환자가 4400센터를 통해 귀환자들을 조직화하고 인류를 구하기위해 4400명이 돌아왔다는 메세지를 전파하며 정부와 본격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인류를 구한다는 메세지가 참 통속적이고 황당하기만 했다. 인류를 구하기위한 정의의 사도들을 그동안 엄청나게 보아온 우리가 아닌가?
또한 4400은 기존의 미스테리 스릴러물과는 달리 등장인물들간에 벌어지는 갈등을 극을 전개시키는 주된 요소로 사용하면서 어떻게 보면 가족 드라마나 멜로물처럼 보이기도한다. 이처럼 루즈하고 감성적인 극이 인류의 구원이라는 소재와 만나면서 나름 신선하기도 했지만 그 약발도 3시즌 부터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조던 콜리어가 부활해서는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적이 체제의 전복을 통해서라는 충격적인 메세지를 전달하고, 이부분에서 난 '뜨악'하고 놀라고 말았다.

 X-File의 문제제기는 어디까지나 흥미를 위한 요소일뿐 절대 그선을 넘지는 않았다. "진실은 항상 저 너머에 있어요."라는 대사야 말로 이러한 X-File의 의도를 가장 잘 전달한다. 헌데 4400은 단계적으로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무엇인지를 세개의 시즌을 통해 풀어놓았다.

1. 인류를 구원하기위해 4400명은 귀환한 것이다.
2. 인류를 구원하기위해서는 전쟁은 불가피하다.
3. 전쟁의 목표는 바로 현 체제의 전복이다.

 인류가 미래에 멸망하는 이유가 현체제의 모순된 구조에 있으며, 4400의 목적이 지배구조의 변화 즉 국가시스템의 변화에 있다는 것이다.
실로 엄청난 떡밥이다.
떡밥의 가짓수에서야 다른 드라마들과 비교조차 안되겠지만 단일떡밥의 스케일로 본다면 단연 최고이다. 사실 황당하기까지한 드라마이지만 구성은 결코 엉성하지 않다. (황당한건 이해해도 엉성한건 절대 용서못하는 스타일;;;) 조던 콜리어가 센터의 구심점 역할을 할때 보여준 인물상과 4400이 아닌 대중의 구세주가 되어 돌아온 후 보여주는 인물상의 차이와 데니스 라일랜드라는 인물이 그리는 국가에 대한 헌신이라는것의 폭력성과 노바그룹과의 대결에서 수호하려는 국가의 가치가 보여주는 편협한 모습등등은 이 드라마가 굉장히 정교한 설계도위에서 세워지고 있슴을 의미한다. 4400을 보신분들은 아시겠지만 프로마이신이라는 물질이 원래는 지배자들의 권력을 강화하기위한 수단으로서 피지배자들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기위해 사용되어진 물질이라는걸 아실것이다. 미래의 인류는 오히려 이 물질을 이용해서 과거의 전쟁으로 미래를 바꾸려한다.

'미래를 위한 전쟁은 과거에 이미 치뤄지게 될 것이다.'

 단순한 메세지같지만 그 의미는 결코 녹록치 않다.
인류는 지구온난화와 핵위기같은 안보불안에 여전히 노출되어있다.
또한 이렇게 손에 잡히지 않는 사안 뿐만 아니라 광우병같은 직접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물론 대책은 늘 존재한다.
지구 온난화를 줄이기위한 도쿄 의정서도 있고 핵위기를 줄이기 위해 핵확산 방지조약 같은것도 있으며 광우병이 불거지자 해당국가의 수출을 차단하고 동종식육을 금지하며 문제가 된 소들을 도살처분했다.
하지만 이런 안전판이 제대로 작동하고있는가? 지구최대 이산화탄소 배출국가인 미국은 도쿄 의정서의 비준을 거부하고 있고 핵확산 방지조약이란것도 따지고보면 핵의 확산만 막을뿐이지 기존 강대국이 보유 하고있는 핵은 묵인하는 기만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일 뿐이다.
광우병 때문에 동종식육을 금지 했다지만 초식동물인 소에게 여전히 동물성 사료를 먹여 교차오염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으며 축산업계에 대한 감시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있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있는데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건 단순히 개별 사안의 문제가 아닌 총체적인 시스템의 문제이다. 그런데도, 국가는 국익을 위해 국민들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허나 그것이 사람들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장담할수 있는가. 역설적으로 왕정시대 시민들이 체제에 순종하기만 했다면 지금의 민주주의 체제가 탄생 할수 있었을까? 우리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우리의 모습이 과거의 인류가 투쟁과 저항속에서 이루어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 


 4400이 3시즌 마지막에 던져놓은 저 엄청난 떡밥을 앞으로 어떻게 처리해 나갈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된다. 4시즌에서도 여전히 인물들간의 관계가 극전개의 핵심이 되겠지만 다이애나와 마이야가 스페인으로 떠나고 알리나가 다시 미래로 납치되는등 이전까지와는 다른 큰 변화를 암시하고 있다.  솔직히 어떤 모습으로 4시즌이 시작될지 전혀 예측을 못하겠으니 답답하기도하고 흥분되기도 한다. 그래도 이런 즐거움이라도 있으니 사는데 조금이라도 낙이 있는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써놓고 나니 여지껏 미국을 있는대로 까놓고서 미국산 드라마에 기대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내 모습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ㅎㅎ



<4400의 등장인물들>




워뗘 자네도 함 해볼텨? 죽지 살지는 반반인디. 생각있음 함 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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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짓거 인생 뭐있나. 함 줘봐요. ^^;;

2001년 아주 우연하게 '좀머씨 이야기'라는 제목의 얇은책을 보게되었다.
그냥 무심코 집어들었는데 책이 얇아서 시간때우기용으로 읽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무심코 집어든 이 책 한권은 소설을 한동안 도외시 해왔던 나에게 충격적일만큼 감동과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헤르만 헤세 이후 독일 최고의 문호라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팬이 되었다.



소설은 독일의 한 작은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삼았다.
마치 한 소년의 성장드라마 같은 외형이고, 소년이 주인공이면서 화자의 역할이라 철저하게 소년의 시각속에서 소설이 전개된다.
외투를 입은채 바람부는 언덕에서 마치 날개를 펴듯 팔을 펼치고 달리면 날아오를것같이 가벼운몸을 가졌던 어린 소년이 키가 170에 몸무게는 49Kg이 나갈때까지의 이야기이다.
예전에 '러브레터'라는 일본영화가 있었는데 년도는 '어느때'라던지 도시는 '일본의 어느도시'라는 식의 표현으로 동화적인 분위기를 냈었었다.
'좀머씨 이야기' 역시 년도나 지역이름 심지어 소년의 이름조차 소설이 끝날때까지 언급이 없다.
이런 소설에 한 페이지나 두 페이지를 차지하는 삽화 까지 포함 됐으니 그러고보면 참 동화같은 소설이다.



한 10년전 쯤으로 기억되는데, 교육방송에서 2차대전당시 나치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한걸 본적이 있다.
2차대전후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지적이라는 독일인들이 어떻게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에 의해 그토록 철저히 통제 될수 있었는가를 연구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초기 연구의 핵심은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어떤식으로 운영되었는가에 모아졌었다는데, 인원이 최소 십만명은 있어야 그 정도의 통제가 가능할거라는 예상을 했었다고 한다.
헌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일만이 조금넘는 숫자만이 실제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걸 밝혀낸다.
결과가 이렇자 어떻게 이런 적은 숫자로 독일인들이 그토록 철저히 통제될수 있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서 더욱 면밀한 조사가 벌어진다.



대전이후 독일의 작은 마을에 살고있는 한 어린소년이 성장하면서 좀머라는 기인과의 행적과 묘한 교차점이 발생하는 내용이 주된 내용인 이소설에서 좀머라는 인물에 대해 소년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마을사람들 심지어 좀머씨가 세들어사는 집주인조차 좀머씨의 과거 행적에대해 아는이는 없다.
해가 뜨기전에 배낭하나 메고 지팡이를 짚은채 나가서는 별이 하늘을 가득채워야 들어오는 좀머씨는 비가 오나 눈이오나 당구공만한 우박이 떨어지나 하루도 빠지지않고 온 마을을 돌아다닌다.
사람들은 밀실공포증 때문에 저러는것이라고 단정해 버리고는 좀머씨에 대해 더이상 알려고 들지 않는다.



게슈타포를 통한 나치의 통제수단에 집중됐던 연구는 실제로 게슈타포가 무슨 공작을 벌인것이 아니라 주민의 신고를 받으면 나가서 처리를 하는 단순한 업무만을 봤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2차대전당시 나치가 벌인 학살극의 최대 피해자들로 유태인을 꼽지만 사실 나치의 표적은 유태인 뿐만이 아니었다.
소련침공당시 수용소에 가두지만 않았지 전장에서 행해진 슬라브 민족에 대한 학살은 유태인 학살 이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분포하던 집시들역시 학살의 대상이었다.
어떤 학자는 유럽집시의 80%가 이시기에 학살 당했다고 주장 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게르만민족 내에서는 이런 학살 행위가 없었을까?
다큐멘타리는 한 독일여성을 사례로 보여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지방마을에 중년의 한 독일 여성이 혼자살고 있었다고 한다.
혼자 살고 있어서인지 사람들과의 왕래가 거의없던 그녀는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면서 수상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더니, 어느 주민의 신고로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돼 의료시설로 끌려가게된다.
정신질환자들이 수용되어있던 그곳은 실은 생체실험을 자행하던 곳이었고, 나치에의해 열성인자로 분류된 그녀는 결국 생체실험의 희생양이 되고만다.
다큐멘타리는 끝으로 50여년이란 시간이 흐른 현재에 그녀를 고발했던 마을로 찾아가 주민들과 인터뷰를 시도한다.
처음에는 거리낌없이 인터뷰에 응하던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대고 의도를 밝히자 낯색을 바꾸면서 화를 내고는 황급히 자리를 떠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는다.
"왜 다 잊혀진 얘기를 꺼내는 것이오!"



"그러다가 죽겠어요!"

주인공 소년과 그의 아버지가 당구공만한 우박속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을때 그 아수라장속을 묵묵히 걷고있던 좀머씨를 향해 소년의 아버지가 한 말이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후에 소년의 아버지는 자신의 '빈말' 때문에 좀머씨가 화를 낸 것이라며 자신을 책망한다.



"독일인들은 2차대전의 책임을 모두 히틀러에게 돌리고는 자신들은 면죄부를 받았다. 허나 히틀러에게 동조한 독일인은 모두 공범이자 전범이다."
전후 독일인들이 히틀러에게만 책임을 돌린다며, 독일인들에게 좀더 책임있는자세를 촉구한 어느 학자의 말이다. 
2차대전당시 히틀러가 철저하게 독일사회를 통제할수 있있던 이유는 독일인들이 자발적으로 서로를 감시했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자신들과 다르면 철저히 배제하던 그들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전체주의의  화신이었다.
전후 일부전범만이 처벌을 받고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전쟁 당시 자신들이 벌인 행위에 대한 기억들이 그렇게 쉽게 사라졌을까?



역자는 에필로그를 통해 좀머라는 인물이 작가 쥐스킨트 자신의 분신이었을 거라는 추측을 한다.
그래서인지 좀머라는 인물과 쥐스킨트의 은둔자 적인 행적을 겹쳐놓고 인생과 삶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 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분명 쥐스킨트의 분신은 소설 속에 있다.
다름아닌 주인공 소년으로 말이다.

"전쟁 직후엔 모두 배낭을 메고 다녔기 때문에 좀머씨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배낭을 메고 무엇인가를 구하러 다녀야만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년이 흐르자 필요한 물건들은 모두 마을 안에서 구할수 있게되었다. 그리고 또 몇년이 흐르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가용을 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도 여전히 좀머씨는 배낭을 멘채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소설속에서 묘사된 시간의 흐름이다.
전후 독일사회의 물질적인 궁핍이 어떤식으로 해결 되어갔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좀머씨는 여전히 배낭을 멘채 다녔다.
바로 좀머씨는 사람들의 기억을 의미한다. 전쟁의 기억말이다.

좀머씨를 밀실공포증 환자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가 왜 밀실공포증을 겪게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알려고들지 않는다.
기억하고 싶지 않기때문이다.
하지만 외면한다고 해서 그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좀머씨가 끊임없이 마을을 배회하듯 먹을것이 풍요로워지고 자가용을 살수있게 됐어도 그들이 전쟁시 벌인 행위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그들의 일상속을 배회한다.
피해자의 고통을 바라보는 가해자의 기억으로 말이다.

'빈말'이란 무엇일까?

"그러다가 죽겠어요!"

소년의 아버지는 이말을 '빈말'이라고 했다.
밀실공포증을 앓고있던 좀머씨가 차안으로 들어오지 못할거란걸 알면서도 우박때문에 차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던것이 좀머씨를 위해서 였다고는 하지만, 밀실공포증이란 단어만 알고있었지 그 고통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소년의 아버지는 좀머씨가 겪고있는 고통을 이해할수 없었기 때문에 좀머씨를 우박보다 더 치명적인 고통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러다가 죽겠어요"라는 말이 결국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쏟아낸 '빈말'일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 소년의 아버지는 자신을 책망한다.
이러한 책망은 타인에 대한 몰이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던 자신이 얼마나 위선적인가에 대한 반성이기도하다.
그리고 쥐스킨트는 이러한 책망을 통해 타인을 배제한채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려했던 독일인 스스로의 반성을 에둘러 표현하려 했던것은 아닐까?

소설을 다 읽고나서 한동안 알수없는 전율에 휩싸여 있었던 기억이 난다.
동화처럼 읽기쉬운 깔끔한 문장속에는 고통스러웠던 한시대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어떤 유려한 문체나 화려한 미사여구도 이러한 전율은 줄수 없으리라.
천진난만한 소년의 눈동자 속에 비친 어른들의 기억은 어느 늦은 저녁 아무도 없는 호수속으로 말없이 사라진 좀머씨처럼 잊혀져 갔을것이다.
잊고싶지 않았거나 혹은 잊으려 했던 우리의 기억들이 시간의 흐름속에서 어느순간 사라진 것을 자각하지 못한 것처럼 좀머씨는 그렇게 사라져갔다.


좀머씨 이야기
글/ 파트리크 쥐스킨트,  그림/ 장자끄 상뻬,  옮김/ 유혜자
2001년 늦가을의 어느날...



우리가 성장한다는 건 뭘까?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할까?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세상과 다른 사람에 대해 가지는 질문의 내용이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우리 인생은 8개의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개개인의 발달과정 뿐만 아니라 어떤 사회나 문화의 진화과정에도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일본 문화의 심리를 이 에릭슨의 8단계 질문에 대입해서 설명해보려고 한다. 최소한 이 영화 <일본침몰>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인생의 초반 3단계 질문들과 관계가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우리가 처음 세상에 태어난 직후부터 한동안 집착하는 질문은 내가 얼마나 세상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를 에릭슨은 신뢰 대 불신의 문제라고 이름 붙였다. 이때 신뢰감의 내용이란 이런 것들이다.
내가 울면 누군가 와서 나를 돌봐줄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웃어주면 그 사람도 나에게 웃어줄 것이다...
이 질문을 일본이라는 한 나라에 대입하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일단 일본은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쌓는데 불리한 동네다. 우선 지진이 있다. 일본에서는 작은 지진은 일상적이고 가끔씩은 진짜 엄청난 대지진이 일어난다. 게다가 태풍도 있다. 태평양에서 아시아로 향하는 태풍은 대부분 일본을 실컷 두드린 다음 힘이 빠져서 동해상에서 소멸한다. 우리나라에 오는 것은 그러고도 힘이 남은 일부다. 다시 말해 일본에서는 매미나 사라 같은 태풍이 거의 매년 찾아온다는 얘기다. 이런 환경에서 살다보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자연이 단번에 지워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니 <일본침몰>이라는 제목이 일본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는 <한국침몰>이라는 제목을 아예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일본 사람들에게 일본침몰은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험한 지역에서 살아야 하는 게 꼭 나쁜 일 만은 아니다. 신뢰와 불신은 동전의 양면이다. 다시 말해 불신을 모르는 사람은 신뢰도 모른다. 만약 세상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영역이 분명해지면, 나머지 영역에서는 확실하게 믿음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따른다. 일본이 거의 강박증에 가깝게 재난대비 시스템을 구성한 덕분에 그렇게 많은 자연재해를 겪으면서도 인명피해는 별로 발생하지 않는 것이 그런 예다.



전반적으로 규칙을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일본 문화의 특성도 이와 무관치 않다. 예측하기 어려운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게 이들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규칙을 지키지 않더라도 죽을 일은 없다. 오히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더 유리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규칙은 고마운 보호막이 아니라 귀찮은 간섭으로 취급받는다.


우리가 답해야 하는 두 번째 질문은 내가 얼마나 내 몸을 통제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개인의 발달단계에서는 이 질문은 배변훈련의 문제다. 기저귀를 벗으려면 내가 언제 화장실에 가고 싶은지를 알 수 있어야 하고, 화장실에 가기 전에는 배변을 참을 줄 알아야 한다. 만약 그 통제에 실패하면, 남들 앞에서 오줌싸개 똥싸개라는 놀림이 닥쳐온다. 그래서 이 단계의 질문은 내가 내 몸을 통제할 것이냐 아니면 창피를 당할 것이냐는 문제가 된다. 이를 자율성 대 수치심 단계라고 부른다.

그런데 일본 문화에서 이 질문은 자제심의 문제로 나타난다. 일본의 자연환경은 포악할 뿐만 아니라 인색하다. 우리나라였다면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어쩔 수 없이 먹던 재료들이 일본에서는 당당히 중요한 식재료로 사용되는 것도 이런 척박한 자연환경과 무관치 않다. 이는 ‘와비’라는 일본특유의 미학에서도 엿볼 수 있다. 와비란 보통 다도에서 쓰는 말인데, ‘가난함이나 부족함 가운데에서도 만족할 거리를 찾아내려는 태도’라고 한다.

혹시 <맛의 달인>이라는 일본만화를 보신 분이라면 그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기와 갖은 양념을 넣어서 국밥과 찌개를 만드는 우리와는 달리, 일본의 요리는 대부분 기본재료 그 자체를 잘 다듬고 익혀서 원재료의 맛을 최대한 끌어내는 방식이다. 단적으로 우리는 멸치를 푹 우려내서 멸치국물을 만들지만, 일본은 가다랭이포를 끓는 물에 슬쩍 담갔다가 꺼내어 국물을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 재료의 맛이 진하기 때문에 그 배경이 되는 국물도 진해야 하지만, 일본 요리에 그렇게 진한 국물을 쓰면 원재료의 맛이 아예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풍성한 재료를 풍성하게 조리해 내는 게 우리 음식이고, 빈약한 재료를 정성들여 예쁘게 꾸며 올리는 것이 일본음식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세상에 대한 기본적 신뢰감도 얻고 자기 몸을 통제할 줄도 알게 되면 이제 우리는 본격적으로 이 세상을 탐색하고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찾아보기 시작한다. 여기 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도가 지나치면 사고를 치게 되고 처벌을 받는다. 이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어디가까지가 내게 허용된 영역이고, 어디 부터는 금지되어 있는지를 배운다. 규칙을 따르지 않고 금지를 어기면 나쁜 놈이라는 생각도 여기서 시작된다. 이게 주도성 대 죄책감의 문제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한때 엄청난 주도성을 발휘한 적이 있다. 2차 대전 때 일본은 청나라도 이기고, 러시아도 이기고, 미국에게도 큰 타격을 입히고, 아시아 전역을 점령했었다. 문제는 그게 도를 지나쳐 결국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폭탄을 맞은 나라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도를 넘은 주도성의 처벌을 확실하게 받은 셈이다. 일본이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를 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많지만, 사실 현대 일본이 국제사회에 대해 갖는 기본 정서는 죄책감이다.

이 영화에서는 침몰하는 일본 국민들을 세계 각국에 대피시키려는데 그 나라들이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만약 실제로 일본이 가라앉는다면, 전 세계가 일본을 외면할까? 물론 요즘 일본이 하는 짓을 보면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일본이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 같은 걸 고려하면 협상의 여지는 많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본은 철저하게 버림받는 존재로만 비춰진다. 원작자가 일본사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이런 설정을 제시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이런 설정이 일본 관객들에게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지는 건 심리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첫 번째는 다른 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때 일본이 보여줄 태도를 반영한다는 점. 자기들이 딴 나라의 난민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심정인 것처럼, 다른 나라들도 우리를 그렇게 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러났다는 얘기다. 두 번째는 일본이 국제 사회에 가지고 있는 자책감이다. ‘우리나라는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아무도 환영하지 않아.’ 라는 믿음이 나타난 셈이다.

영화 <일본침몰>을 보며 지진과 해일, 태풍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일본 사람들이 측은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일본을 불쌍히 여길 처지는 아니다. 우리는 천재지변이 별로 없는 대신에 사람들이 직접 재난을 일으키는 동네이지 않은가. 천재지변이 드물다는 것도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 드문 태풍이 한번 제대로 오면 일본보다 훨씬 크게 타격을 입으니 말이다. <일본침몰>과 우리영화 <괴물>을 비교하면 늘 나오는 말이 일본에서는 나름대로 재난으로부터 국민들을 지키려는 공권력의 역할이 부각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시스템은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고 주인공 가족들만이 외롭게 싸운다는 차이가 있다는 거다. 시스템에 의존하고 규칙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일본 사람들이 더 안쓰러운지, 아니면 시스템을 믿지 못하고 자력구제의 원칙에 매달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안쓰러운지는 모를 일이다.


무비위크 2006.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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