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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공간이론교육세미나> 2009. 6.17. 수 발제:chan-󰅇

The lay of the land

: geographies of imperialism


Anne McClintock, 1995, In Imperial Leather : Race, Gender and Sexuality in the Colonial Contest (Sage, London), pp.56-74.



■ Imperialism as Commodity Spectacle 상품 스펙타클로서의 제국주의

1) 세계 박람회와 상품 스텍타클

-1851년, 런던 하이드 파크의 수정궁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에서 팝옵티컬 한 시간과 시대착오적인 공간의 건축적 구현을 발견할 수 있음. 박람회의 진보적 서사는 대중(mass)의 스펙타클로서 소비되어지기 시작했음. 박람회는 “모든 국민국가들의 산업”이라는 기념비적 전시를 하나의 둥근 유리지붕 아래 에 집결시킴. 산업품, 장식품, 관상용 원예, 기계류, 악기, 산업용 광석들이 쌓 여 있고, 수 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음. 수정궁[박람회]은 대중 소비의 새로운 형태일 뿐만 아니라 상품 스펙타클의 새로운 형태에 있어 하나의 기념비가 되었음. 즉 전지구적인 역사의 진보가 인류 가족의 상품 진보로 재현되었음. 동시에 박람회는 마케팅 역사의 새로운 양식을 알림. 즉 디오로마와 파노라마(제국과 자연사로부터 나온 풍경에 대한 대중적이고 사실적인 복제품들)는 전지구의 모든 문화를 단 하나의, 시각적인 세계시간이라는 계보로 인도하는 환영을 제공했음.

-전형적인 이미지에서, 박람회는 문자 그대로 전세계의 사람들을 상품의 기념비적 전시에 끌어들였고 시간은 전지구적임. 즉 파노라마와 풍경에 대한 전진적인 축적은 제국적 자본의 논리에 따라 배열되고, 규정되며, 목록화됨. 동시에 그것은 서양만이 테크니컬한 기술과 혁신적 정신을 소유한다는 점을 명확히 함축하였음.

2)관음증적 훈육모델로서 팝옵티콘적 시간과 진보적 서사로서 상품스펙타클

-박람회는 팝옵티콘 혹은 감시의 집에 정치적으로 상응함. 1787년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이 사회훈육을 위한 건축적 해결책의 모델로 제안한 팝옵티콘의 조직화 원리는 단순했음. 공장, 감옥, 작업장, 학교는 중앙에 높은 관찰[감시] 탑을 세우고 설계되었음. 감시탑 내부를 볼 수 없지만, 거주자들은 자신들이 지속적인 감시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게 됨. 일상은 계속해서 가시화될 수 있는 무대 위에서 이뤄질 것임. 이러한 사고의 정밀함은 자기-감시의 원리에 있음. 즉 끊임없는 관찰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수감자들은 그들 스스로 경찰이 될 것임. 따라서 팝옵티콘은 산재되어 있는 헤게모니적 권력의 부르주아적 원리를 체현함. 감시의 집에서 스펙타클의 제도(regime)-감시, 관찰, 조망-는 권력의 제도와 병합됨.

-팝옵티콘의 중요한 지점은 누구나 감시의 집을 작동시킬 수 있다는 점임. 감시자들은 무한히 상호 변화할 수 있으며, 공공영역의 모든 성원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시하기 위한 <감시의 집>을 방문할 수 있음... 푸코가 말하듯이 “이러한 팝옵티콘은 관찰자가 한눈에 많은 사람들을 관찰 할 수 있도록 배치되었으며, 또한 와서 관찰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관찰자가 될 수도 있음. 보는(seeing) 기계는... 사회 전체가 감독/감시하는 권력의 실천 속에서 투명한 건물이 되어왔음.”

-수정궁의 혁신, 즉 전형적인 유리 감시의 집은 쾌락의 원리를 스펙타클의 훈육에 맞춰 동화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음. 유리 보는-기계속에서 수많은 시민 감시자들은 관찰자를 관찰할 수 있음. 즉 관음증적 훈육은 파노라마의 대중적 성격 속에서 완벽하게 구현됨. 파노라마는 팝옵티컬적 감시를 상품 스펙타클로 바꾸어서, 팝옵티컬적 원리를 전도시켰고, 관음증자들에 의한 전지구적 소비를 가능하게 함. 그러나 감시의 매혹 속에 사로잡혀서 있는 동안 그들 모두가 관찰하는 이러한 제국적 군주제는 타자의 관찰에서 그것들의 움직일 수 없는 이면들이 나타남.

-수정궁은 팝옵티컬적 감시를 소비자의 쾌락으로 전환했음. 수잔 벅-모스(Susan Buck-Morss)가 지적한 것에 따르면, “세계 박람회의 메시지는 혁명 없는 대중들에게 사회적 진보의 약속이었음.” 대박람회는 역사없는 박물관, 노동없는 시장, 노동자 없는 공장이었음. 동시에, 박람회의 사회적 실험실에서 중요한 정치적 원리는 형태를 갖췄다. 즉 상품 스펙타클에 대한 관음증적 소비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사고. 가장 중요하게 부상한 국민국가적 서사는 노동계급을 국민국가의 스펙타클에 대한 소비자로서 진보적 서사에 포함시키기 시작했음. 박람회가 제국적 진보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었다는 함축은 국민국가의 스펙타클로 소비되었음<그림1.15>. 박람회에, 백인 영국인 노동자들은 제국적 국가 속에 포함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인종차별적인 “우월성”이라는 관음증적인 스펙타클은 그들에게 이들의 계급적 종속성에 대해 보상적임<그림1.16>. 예) 루크 기본스(Luke Gibbons)가 “식민주의의 여명”이라고 부르는 시기 동안에는, 아이들의 장난감은 세계 전체를 소비하려는 팝옵티컬적 욕망을 고무시키는 시각적인(scopic) 과대망상을 완벽하게 구현함. 또한 장난감 세계는 제국의 과학이라는 지표면에서 상품 인종차별주의와 제국적 키치로의 하나의 과도기를 보여줌. 제국적 키치와 상품 스펙타클은 식민 지도가 단 하나 약속할 수 있는 것을 가능하게 만듦. 즉 기호들의 전지구적 시스템으로서 제국주의의 대중 시장<그림 1.17>

■ Colonial Mimicry and Ambivalence 콜로니얼의 모방성과 양가성

-나는 역사가 단하나의 특권적인 사회범주를 둘러싸고 형성되지 않는다는 신념에서 글을 씀. 인종과 계급의 차이는 성적 차이를 순차적으로 끌어낸다고 이해될 수 없음. 혹은 그 역도 마찬가지임. 오히려 공식적인 제국적 근대성의 범주들은 각각의 역사적 관계 속에서 생겨나며, 변동하고 역동적이고, 친밀한 상호의존성 속에서만 출현하는 범주들에서 접합됨. 이러한 범주들[인종, 계급, 섹슈얼리티]은 복잡하고 종종 모순적인 방식 속에서 서로를 소환하고 병합하고 중층결정함. 코베나 메르제르(Kobena Mercer)는 우리에게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양가적이며, 불완전한 ‘정체성들’의 성격에 대해 말하는 방식”에서 변동적이고 불안정한 사회적 차이의 이율배반을 경고함.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살아진 경험들 속에서 거주함.

1)이리가레이의 젠더 모방성과와 호미바바의 식민적양가성

루스 이리가레이

-정통 정신분석학에 대해 도전하는 이리가레이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여성들이 여성성이라는 필수적인 가면을 쓰고 수행한다. 이리가레이에게, 여성들은 사회적 마스크로서 모방적 여성성을 학습함. 남성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여성은 이성애를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 연극 못지 않은 아이러닉한 수행성을 상연함. 이리가레이가 제시하는 특정한 국면들에서, 여성들은 우리에게 부과된 여성다운 역할들은 신중하게 생각해야만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방식에서 “종속의 형태를 긍정으로 전환”하도록 할 수 있음. 이성애를 지탱하는 “모사놀이”의 비가시적인 규준들에 따라, 여성들은 “자연”과 젠더 수행성 사이의 동등성의 결여를 기교적으로 드러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방은 부득이하게 대가를 치러야함. 즉 필수성에서 태어난, 그것은 망각(무의식)을 거부하는 양날의, 이중적이고, 일시적인 전략임. 이는 ①모방을 여성 전략에 있어 본질적인 것으로서 우선권을 주는 위험이 있음.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녀의 뛰어난 도전들이 그러한 ②젠더 이분법을 정확히 재각인시킨다는 점임. 그 과정에서 이리가레이 또한 ③남성 가면[가장]의 연극적이고 전략적인 가능성들을 생략함. 즉 캠프, 보깅(패션모델 같은 걸음걸이나 몸짓을 흉내낸 디스코 댄스), 드래그(이성복장착용), 패싱, 복장도착 등등.

호미 바바

-이리가레이의 젠더화된 개입을 제외하면, 호미바바는 모방에 대한 생각을 식민의 무대(arena)로 가져가서, 모방을 미묘하게 설명함. 즉 모방을 “식민 권력과 지식의 가장 효과적이고 난해한 전략중 하나”로서 설명함. 바바의 도식에서, 모방은 피식민지인들에게 부과된 흠집있는 정체성임(“거의 동일하지만, 백인이지는 않은”). 문명화의 사명에 종속되어 있는, 모방적 인간(바바에게 이들은 유일한 남성들로 보임)은 제국의 중개자로 복무함. 즉 그들은 “식민 문화의 식민화된 교사, 군인, 관료, 문화해설가들임. 이러한 모방의 계통은 맥컬린, 포스터, 키플링, 오웰, 나이폴 등 몇몇 작가들에 의해 추적될 수 있었음.

-바바의 독창성은 제국의 상황에서 정신분석학적 목적에서 미적 범주(아이러니, 미메시스, 패러디)를 도발적으로 전개한데 있음. 바바에게 식민담론은 “재형성되고 재인식할 수 있는 타자... 즉 거의 동일하지만 조금은 다른” 이미지의 재생산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양가적임. 모방적 남성은 양가성이 존재할 수 없는 구역, 즉 정체성도 차이도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구역에서 강제로 살게됨.

-여기에 바바가 모방을 본 것처럼, 모방의 실패가 놓여 있음. 우리는 정체성과 차이 사이의 미끄러짐 속에서 식민 담론을 “표준화하는” 권위에 질문을 던짐. 포스트-계몽 문명화의 꿈은 그것 자체로부터 양도됨. 왜냐하면 식민국가에서 그것은 상 자연 상태로서의 퍼레이드일 수 없기 때문임. 모방은 “곧 유사와 위협”이 됨.

-나는 바바의 식민적 모방에 대한 관념의 풍부한 통찰력에 의문이 없으며, 파농을 따른 그의 가치있는 주장, 즉 식민 논쟁들 속에서 판타지, 욕망, 무의식에 대한 어려운 작업에도 의문이 없음. 그러나 나에게 흥미로운 점은 모방적 도식에서 함축하는 행위자의 정치학임. 바바는 그것을 볼때, 적어도 이 글에서, 모방의 위협은 그것의 양가성에서 기인함. 즉 식민담론의 이중적 관점을 노출시키고 그럼으로써 그것의 권위를 붕괴시키는 인식론적 미끄러짐. 자멸적이고, 내부적인 전복은 식민주의에 흠집을 냄. 즉 담론들의 공식적 전복, 담론들의 “파열”, 담론들의 “붕괴”, 담론들의 “양가성”, 담론들의 “in-between". 식민적 모방은 자신의 “전략적 실패”를 보증하는 “아이러닉한 타협”임.

-“식민적 전유”에 대한 “전략적 실패”는 담론적 양가성에 의해 보증된 구조적 효과라는 관점에서 임. 바바가 질문하는 “어떻게”, 즉 “어떻게 욕망이 훈육되며, 어떻게 권위가 들어서는가?”는 권력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임. 그리고 그것은 또한 역사적 행위자에 관한 물음임. 일부 비판들에 반하여, 나는 이리가레이가 모방이 여성들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라고 제안하지 않았던 것처럼 바바가 모방이 식민현상에서 유일하다거나, 가장 중요하다고 제안했다고 생각하지 않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바바에게 식민적 권위는 사회적 모순들 혹은 피식민지의 투쟁적인 전략들을 전환시키기 보다는 식민적 재현 그 자체의 공식적 양가성에 의한 것으로 대체하는 것처럼 보임.

2)이리가레이와 바바의 양가성 개념의 문제

① 이리가레이와 바바에게 양가성의 개념이 매우 중요하게 인식된 반면, 문제는 담론의 내부조직에서 행위자를 충분히 위치켰는가의 여부는 여전히 남아있음. 가성속에서 행위자를 위치시키는 것은 페티시즘의 형태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함. 즉 그들 자신들의 삶을 인격화되고 주어지게하는 공식적 추상들로부터의 역사적 행위자의 투사(projection). 여기 추상들은 역사적 행동가들이 됨. 즉 욕망과 꿈을 말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사망을 확실하게 하는 식민주의 작업을 행함. 그 과정에서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형식들 사이의 구조적 관계, 즉 역사적 변화와 사회적 행동주의에 대한 복잡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삭제하는 형식주의적 페티시즘을 통해서 변경됨.

② 다른 방식들을 통해서 제기된 중요한 문제는 양가성이 본래부터 전복적인지 아닌지 임. 이후 저작에서, 바바는 그의 모방에 대한 생각을 복잡하게 제시하고, 식민화된 주체성의 양가성이 결국 식민적 권력을 위협하는 자세를 할 필요가 없다고 제시함. 즉 “...이러한 변동하는 위치성들은 결코 지배권력 관계를 심각하게 위협하지 않을 것임. 그것들은 그들이 즐겁고 생산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바바는 오히려 식민화된 주체성의 “변동하는 위치들”은 ‘상상’속에 사로잡혀”있기에, 여기서 지배권력을 권력 내부의 보다 큰 전투적, 정치적 혹은 경제적 세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양가성의 놀이로부터 보호하는 것으로 이해함. 그러나 일단 행위자는 변동하고 불확정적인 상태의 조건을 보증하는 구조적 추상(상상)으로 배치됨.---> 또 다른 글, “경이롭게 여겨진 기호들(Signs Taken for Wonders)"에서 바바는 모방에 대한 사고를 더욱더 발전시킴. 이것은 자기방어적인 식민 전략보다는 반(anti)식민적 거부의 형태로서 식민전략에 더 맞추어져있음. 현재 모방은 “이러한 시민 불복종의 순간들을 문명화의 훈육 내에서 표시함. 즉 스펙타클한 저항의 기호들” 이것은 저항이론에서 중요한 약속을 제공했고, 동시에 역사적 복잡함에 대한 새로운 영역을 제공함. 이것은 또한 모방이 탈세력화된 전략으로서 보여지지만, 만일 모방이 항상 정체성과 차이 사이의 미끄러짐을 드러낸다면, 실제로 만일 모든 담론들이 양가적이라면, 탈세력화된 담론과 세력화된 담론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식민과 반식민 사이의, 남성과 여성 사이의 모방은 이론적 그림자를 드리움.

③ 만일 이리가레이가 라캉의 매스큘리즘(masculinism:남성주의)에 도전하고 모방을 특별한 여성의 전략(인종과 계급을 삭제하는 것이 본질주의자의 특징)으로서 주장한다면, 바바는 이리가레이를 우회하여, 젠더와 계급 과정들 속에서 삭제된 인종만으로 모방을 주장함. 탈젠더화된 모방으로 되돌아가서, 바바는 효과적으로 그것의 젠더화된 특수성을 인식하지 않고서 남성 전략으로 재기입함. 아이러닉하게 바바가 실재로 남성에 관한 유일하게 말하고 있는 바바의 제목( “모방과 인간에 대하여(Of Minicry and Man”)에서 일반적인 “대문자 남성”은 은폐하면서도 드러남. 그러나 젠더차이를 삭제함으로써 바바는 암묵적으로 젠거 권력을 승인하고, 따라서 남성성은 탈식민적 담론의 비가시적인 규범이 됨. 인종적 차이를 삭제함으로써, 이리가레이는 제국적 권력의 비가시성을 승인함.

-so, 무엇보다도 이들은 양가성의 초역사적인 편재에 대해 주장하고, 양가성을 보다 덜 강력한 개념으로 만듦. 반복해서 말하면, 어디에나 있는 양가성은 동일한 장면(scene)이 됨. 만일 양가성이 도처에 있다면, 그것이 전복적이게 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그러나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물음들이 양가성의 개념을 실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그것을 복잡하게 하는 것임.

■ Hybridity, Cross-Dressing and Racial Fetishism 혼성성, 이성복장착용과 인종적 페티시즘

-앞서서 나는 모방이나 양가성과 같은 개념이 (이리가레이에게서는 젠더가, 바바에게서는 인종이라는) 우선적인 사회적 범주만으로 축소되었다면 덜 강력하다라고 주장함. 인종적 모방성은 중요한 방식에서 젠더 모방성과 유사할지 모르지만, 그것들은 사회적으로 상호교환 될 수 없음. 실제로 용어로서 모방성은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함.

-패싱과 이성복장착용과 같은 모방성의 또 다른 형태들은 다른 방식에서 애매모호함을 전개함. 즉 비판적인 구별짓기는 역사적으로 다른 이러한 문화적 실천들이 무역사적인 동일한 기회들 아래에서 붕괴되었다면 상실됨. 인종적 패싱은 이성 복장착용자들과 동일하지 않음. 즉 흑인 보깅은 흑인 얼굴을 한 백인적 수행성과 동일하지 않음. 페티쉬의 장면에서, 복장 도착(transvestism)은 종종 애매모호함(실크 스커트 아래 털복숭이 다리)의 명백한 전시를 포함함. 즉 실제로 복장도착의 수많은 스캔들은 차이로서 정체성에 대한 그것의 연극적 패러디속에 존재함. 반면에, 패싱은 정체성으로서 차이에 대한 애매모호함의 주의깊은 가장을 보다 더 포괄함.

1) 문학에서의 혼성성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식민주의의 맥락에서, 제국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전구지구적 변화는 소름끼치는 효과를 지닌 문명화의 미션에 대한 양가성을 포함할 수 있었음을 드러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에서, 말로우(Merlow)는 하이브리드한 모방적 남성에 대한 명백한 사례가 되는 아프리카인을 통해 상류를 향하는데 주의를 기울임. 배의 기관장으로 일하는 아프리카인은 식민지배자와 피식민자들 사이의 불가능한 경계에 거주함. 말로우는 자신을 역사적 예외로서 재현함. 즉 근대성의 기초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는 또한 구시대의 거류민[외국인]임. 이러한 “개선된 사례(improved specimen)”는 “총미와 깃털 모자의 패러디 속에서 한 마리의 개로서 만들어지는 것처럼...” 바바의 명칭에서, 그는 모방성의 “아이러닉한 보상”인 동시에 완벽한 백인은 아님. 그러나 콘래드의 모방적 남성은 그의 불완전한 패러디가 아프리카인의 퇴보에 대한 식민적 서사와 일치하기 때문에 식민적 귄위성보다는 처음에 보여준 모습을 더 파괴시킴. 상류로 올라가면서, 식민지들은 시대착오적인 공간의 뒤쪽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줌.... 시대착오적 공간에 대한 비유 내에서, 선장의 모방적 실패는 담론적 딜레마 보다는 식민 지배의 발전 서사와 유사한 요소가 더 많음. 전(前)역사와 제국적 근대성의 끝에 거주하면서, “개선된 사례”는 아프리카인들이 모더니티의 달성을 위해 어느 지점까지 여행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살아있는 측정단위로서 이해되었음. 다시말해서, 차이와 정체성 사이의 미끄러짐은 시간의 축을 제국적 진보의 자연적 기능으로 기획함으로써 비-모순성을 보여줌.

-사실상, 콘래드의 모방적 남성은 포스트 계몽 이미지의 남성을 치명적으로 파괴하지 않으며, 그것의 전략적 실패도 보증하지 않음. 즉 그의 모방적 부조리는 오히려 피식민지의 역사적 뒤늦음에 대해 필수불가결함. 게다가, 그의 양가성은 그의 죽음, 즉 내러티브의 소멸[삭제]에 의해 심각하게 배제됨.

키플링의 󰡔킴󰡕

-식민의 박물관과 식민의 총(gun)의 측면에 서있는 키플링의 서사에서 모방적 남성인 킴의 남근적 잠재성은 인종적 정당성의 문제임. 식민주의는 시적인 문화적 양가성으로서(유럽 박물관의 페티쉬적인 Wonder House속에서 체현된)뿐만 아니라 군대 폭력의 정치학에서도 나타남. 총과 박물관으로 통제하는 것은 큰 게임의 지배에 있어서 필수적임.

-역사적 행위자에 대한 물음 제기(“어떻게... 귄위성이 들어서는가?”)는 양가성의 형태들보다 더 많은 의문들을 수반함. 즉 그것은 또한 복잡한 역사의 불명확성, 전투태세를 갖춘 협상들, 탈세력화된 자들의 전략들, 남성성의 군국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권력으로부터의 여성의 삭제, 에스틱한 폭력에 대한 결정적인 배제 등등의 의문들을 수반함. 양가성은 전복의 비판적인 측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식민적 실패의 충분한 작인(agent)은 아님.

2) 이성복장착용

-문화적으로 모방성의 또 다른 사례로서 이성복장착용이 있음. 옷은 사회적 정체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기호이지만, 그것은 또한 혼란과 상징적 절도라는 것에 영원히 지배받기도 함. 이러한 이유에서, 이성복장착용자는 잠재적이고 전복적인 권력을 부여받을 수 있음. 마저리 가버(marjorie garber)의 󰡔기득권󰡕(Vested Interests: Cross-Dressing and Cultural Anxiety )은 복장도착을 병리학적이고 생물학적으로 변형된 것이라는 전통적 서사를 거부하고, 애매성의 위반적 구체화[체현]로 이성복장착용자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함. 가버는 복장도착적 가면 아래의 (남성 혹은 여성의) “현실의” 정체성을 가정하는 진보적 서사에 도전함. 그녀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범주에 복장도착을 빠트린다고 말하면서, 결과적으로 [그것을] “분열시키는 모습”이 됨. 가버의 책은 이성복장착용하는 장면에서 인종의 문제를 포함하려는 그녀의 시도는 적어도 유효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3장과 4장에서 보다 자세하게 주장하는... 모든 이성복장착용자들을 위반적으로(“분열시키는 모습”)보편화함으로써, 그리고 모든 페티쉬를 라캉의 거세 장면(“팔루스는 페티쉬이며, 페티쉬는 팔루스이다”)속에서 발생되는 것으로서 재기입함으로써, 가버는 문화적인 이성복장착용자의 풍부한 다양성과 그녀가 스스로 드러내는 역사적 페티쉬들에 대한 역사적 정의(justice)를 수행하지 못함.

-예를 들면 핑크 삼각형은 급진적으로 대안적인 정치적 실천들이 양가적 기호로 전개해왔던 것임. 이성복장착용도 똑같이 정치적 목적의 다양성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전복적인 것은 아니었음. 그러한 페티시즘은 그것이 전복성을 반드시 보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모순 속에서 발견됨. 그러나 그러한 이성복장착용은 안정적인 사회적 정체성들을 붕괴시키지만, 젠더, 인종 혹은 계급 권력의 전복을 보증하지 않음. 미국에서 해병대가 드래그(여성복장)로 꾸미거나 얼굴을 검게 칠할 때, 백인 권력이 반드시 전복되지도 않으며, 남성성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지지도 않음. 반면에, 군대에서의 레즈비언이 날마다 이성복장을 착용하거나, 게이인 흑인 남성이 밤바다 보깅클럽에서 공연한다면, 그 효과를 단순히 유쾌하거나 무식한 것으로 간과할 수 없음.

-문화적으로 강요하는 에스닉한 패싱(미국에 동화된 유태인 혹은 아일랜드 이주민) 혹은 잔인하게 강요하는 혼성성(보스니아-헤르체코비아에서 강간을 통한 무슬림 여성에 대한 계획적인 임신)은 혼성성과 애매성의 매우 다른 관계를 초래함. 차이와 정체성의 미끄러짐은 이러한 모든 경우 속에서 현존하지만, 정신적 요금(toll)과 정치적 결과는 완전히 다름. 양가성과 혼성성을 넘어선 일부 포스트 식민 이론가들에 의해 서정적이며 매혹적인 배역은 항상 역사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음.

-이성복장착용은 젠더 애매성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적, 계급적, 에스닉한 이성복장착용의 풍부한 증거가 있음. 남근적 애매성 때문에 이론적인 미묘함과 역사적 깊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성적 차이를 남근적 기호 아래에서 포함될 수 없는 인종적, 국민국가적, 에스닉한 페티쉬들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것을 막고 있음을 발견했음. 라캉의 이론에서(4장에서 제기함), 언어적이고 문화적인 차이는 성적 차이 내에서 발견되며, 아버지의 법속에의 상징적이고 체현적인 것 아래에서 질서지워짐. 결과적으로 인종적이고 계급적인 차이는 남성 이성애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연결고리에 대한 기호화를 따라서 성적 차이를 이론적으로 유도해 냄.

-가버는 페티쉬를 “거세의 결정불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모습”으로 독해함. 3장에서 보다 상세하게 내가 주장하는 것으로서, 그녀는 “미국에서 흑인 남성의 패러독스를 동시에 성적 잠재성의 기호이자 무력화 혹은 거세의 기호로서” 기록하고 있기에 성적 애매성의 이차적 기능으로 인종적 복장도착을 축소시키는 위험성을 지님. 여기서 흑인여성은 사라진다- 반드시, 아마도, 왜냐하면 백인 페티시즘속에서, 그리고 그들 자신의 페티시즘의 형식들 속에서 그들의 역할은(라캉주의자들의 장면에서 어떤 경우라도 방해됨) 거세에 대한 남근 기호의 아래에서 설명될 수 없음.

-한편 이성복장착용, 드래그, 패싱, 캠프와 보깅은 전부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방의 형태들이지만, 그것들은 또한 매우 다른 문화적 가능성들을 규정하는 경향이 있음. 만일 그들이 남근적 양가성의 초역사적 기호아래로 착실하게 정렬한다면 이러한 차이들은 상실됨. 라캉의 백인 남근주의의 상황에 도전하는 것은 이성애적 진보 서사 속에서 휘말리기 보다는 그러한 현상에 대해 보다 문화적으로 말하고, 역사적으로 세력화하는 계보학을 구체화하는 것임.

-사회적 규준들의 붕괴는 항상 전복적이지 않음. 특히 차이를 통해 형식적인 유동성, 파편화 시장화가 중심적 요소인 포스트모더니스트적 상품 문화 속에서는 전복적이지 않음. 실제로, 지배집단은 때때로, 자신들의 애매성에 대한 권리를 엄청나게 전시하면서 그들의 우선권을 드러낼 수 있음. (축구스타, tv쇼->사회적 규준들을 불곤하게 붕괴시키면서 백인 남성 이성애자의 특권을 긍정함.)

■ Colonial Passing 콜로니얼 패싱

1)루드야드 키플링의 󰡔킴󰡕 줄거리와 주인공 킴의 모방성

-루드야드 키플링의 킴은 식민 전복의 기법이 아니라 감시의 기법으로서의 모방성과 복장도착에 대한 훌륭한 사례를 제공함. 다른 측면에서, 키플링의 이야기는 인종적 패싱의 서사로 독해될 수 있음. 킴의 출신은 거의 모든 장면에서 양가성 속에 있음. 왜냐하면 그는 완벽하게 출신에 있어서 식민적 위기를 체현하고 있기 때문임. 영국인인 유모와 아일랜드 하사관 사이에서 태아나 고아가 된 아이인 킴은 라호르의 북적북적한 시장통에서 스스로 백인으로 패싱한 “혼혈인 여성half-caste woman"에 의해 길러짐. 반면에 킴은 많은 시간을 인도인으로 패싱하는데 보냄. “현지인처럼 피부는 검게 그을렸고”, “제나라 말은 방언”을 하고, 잠자는 것은 “현지인들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하고, “현지인들처럼” 물을 마시고... 킴은 책속에서 인도인이 아니라 백인으로 패싱할 수 있는 방식에서 “현지인”들에게 패스함. 문화의 맨 끝자락에서, 즉 시장의 경계구역, 거리, 지붕 그리고 길에서의 거주에서 킴은 문화적 잡종과 인종적인 모방적 남성임.

-킴의 인종적 애매성은 그의 이성복장착용에 대한 재능에 의해 고양됨. 즉 그는 “사업을 수행하면서 힌두식 옷이나 이슬람식 옷이 입고 벗기에 얼마나 편한지” 발견했음. 보다 정확하게 킴은 스위치임. 그 내러티브 곳곳에서, 그는 백인 신사의 정체성과 옷 입는데 있어서 “힌두식 옷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일상생활에서는 완벽하게 낮은 카스트의 힌두소년으로 되돌아감. 문화적 잡종으로서 킴은 키플링이 “양면적 남성”이라고 부르는 존재임. 그러나 여기서 모방성은 지배국에서 부과한 흠집난 정체성도 아니면, 반(anti)식민저항의 전략도 아님. 복장도착적인 킴은 식민지배와 피식민지 사이를 구별을 휘젓고 다니지만, 오로지 재형성된 식민적 통제를 제시하기 위해서임. 부랑아인 모방적 남성은 상징적 애매성과 윤리적 혼성성을 체현하지만, 그의 애매성을 식민적 귄위를 전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고양시기기 위해서 전개함. 그는 인도스러운 영국신사임. 즉 인도인이지만 인도인은 아닌...

-킴의 패싱은 백인성에 우선권을 부여함. 영국계 아일랜드인 복장도착자로서, 그는 인종 정체성성의 모순적인 관념을 구체화함. 백인 혹은 흑인? 식민지 개척자 혹은 피식민지배자? 그의 패싱과 복장도착은 “개인적 정체성이라 불리는 것으로 진지한 사색에” 빠져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백인 혈통”과 아일랜드적 의식은 비판적 계기들에서 이점을 제공함. 즉 인종, 그것은 피부 혹은 의복만으로 보다는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 처럼 보임....콘래드처럼, “개량된 혹은 개선된 사례”는 영국인이 아니라 바바가 영국화된 남성이라고 말한 사람임. 반면에, 킴은 인도인은 아니지만 인도화된 남성임. 분명히 문화적 위계 “바닥에” 패싱은 허용될 수 있음. 그러나 문화적 위계 “위쪽” 패싱은 허용될 수 없음.

-킴의 “백인 혈통”은 그로 하여금 문화적 애매성을 포함하도록 했으며, 그를 “모든 카스트들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특권적인 보편주의를 획득함. 킴은 또 다른 모방성의 측면을 가지고 있음. 즉 타자를 보다 더 잘 지배하기 위해 패스하는 식민 개척자. 이러한 방식에서 영국계 아인랜드인 고아의 갱생은 제국적 통제를 재형성시키고 보다 신중한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한 전형적인 알레고리가 됨.

-킴에서 패싱의 특권은 유일하게 남성만이 가진다는 점에서 간과되지 않음. 그 내러티브 곳곳에서, 여성들이 아브젝시옹의 모습을 하고 거부되지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임. “나는 엄마가 없지만, 나의 엄마”라고 말하는 킴... 여성들은 경계적 표식자로서 그리고 맨 끝의 모습으로 존재함. 이 여성들은 남성 플롯과 남성 변형물을 용이하게 하지만, 그들은 변화의 작인들이 아니며, 또한 그들의 정치력을 고려할 수도 없음. 이러한 맥락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계속해서 남성권력을 위협하는 역할을 함. “항상 여자들에게 시달리면서 어떻게 한 남자가 도를 추구하며 ‘큰 게임’을 해나갈 수 있단 말인가?” 성적재생산은 서사 속에서 폭풍우를 표시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되고 거부되는 성적 재생산은 인종의 애매성을 억제하는 필수적인 요소로 되돌아감.

-여성 섹슈얼리티가 킴에서 부인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인종의 불안정성을 포함하는 위태롭게 안정적인 이성애임. 서사가 결말로 치달으면서, 킴의 다형적인 에스니시티는 통제를 벗어나서 나선형적으로 공격함. “ 킴-킴-킴은 누구인가?”...나는 누구지? 무슬림인가, 힌두인인가, 자이나교인인가 불자인가?... 나는 킴이며, 킴이다. 그리고 킴은 누구란 말인가? 에스닉한 선회에 의해 압도되고, 고행적인 발견으로 제어하기 어려워진 그는 큰 게임에서 없어도 되는 “맞물리는 톱니바퀴”임. 킴은 그의 정체성을 복구된 이성애에 대한 기묘한 의례를 통해 교정함. 언덕에서 여성의 위협적인 섹슈얼리티를 막아내는 것에서, 그는 지구상에서 그 스스로는 넘어쓰리면서, 그리고 “대지Mother Earth"에 대체되고 근친상간적인 뒤섞임을 실행함. 즉 섹슈얼리티는 거부되면서 확인되는 애매한 행동임. 거부된 엄마[여성]은 남성섹슈얼리티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한계로 복귀할 것임. 이는 줄리아 크레스테바아 아브젝시옹으로 부르는 것임.

■ Abjection and A Situated Psychoanalysis 비체(아브젝시옹)과 상황적 정신분석학

1)크레스테바와 아브젝시옹

-아브젝시옹(라틴어, ab-jicere)는 내쫓거나 추방하거나 버림받는 것을 의미함. 󰡔토템과 터부󰡕그리고 󰡔문명속의 불만󰡕에서 프로이트는 문명화가 특정한 전-오이디푸스적 쾌락과 근친상간적 애착을 거부하는데 근거해 있다고 제안했음. 프로이트와 메리 더글라스의 경계적 의례에 관한 작업을 따라서, 크레스테바는 사회적 존재가 추방력을 통해서 구성된다고 주장함.회적 자아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가 더럽다고 간주하는 특정한 요소들을 삭제해야만 함. 즉 배설물, 월경, 땀, 오줌, 정액, 눈물, 구토, 음식, 자위, 근친상간 등등. 그러나 크레스테바에게, 이러한 추방된 요소들은 완벽하게 지워질 수 없음. 그들은 붕괴의 위협 혹은 심지어 소멸의 위협이 있는 주체의 정체성의 가장자리에서 붙어있음. 그녀는 이러한 과정을 아브젝시옹(비체)이라고 불렀음.

-아브젝트는 모든 것, 즉 주체가 사회적이게 되기 위해서 삭제되어야하는 것임. 그것은 또한 이러한 야망의 실패의 징후이기도 함. “비난과 동경”사이의 타협으로서, 아브젝시옹은 자아의 경계를 표시함. 동시에 그것은 영속적인 위험은 지닌 자아를 위협함. 신성불가침적인 경계들을 허용하지 않는, 아브젝시옹은 유동성을 넘어선 사회의 불확실한 지배력을 그리고 정신과 신체의 난잡한 측면을 증명함.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경계로 부를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적고 있음. “아브젝시옹은 무엇보다도 애매함이다.” 아브젝시옹은 자아에 대한 불확실한 경계 위에서 사회의 실루엣을 추적함. 즉 그것은 동시에 정신착란과 분열의 힘을 지닌 사회질서를 위태롭게 함. 이것은 크레스테바의 놀라운 통찰력임. 즉 추방된 아브젝트는 주체를 그것 내부의 구성적 경계로서 붙어있음.

-이 책에서 부분적으로, 아브젝시옹의 패러독스를 근대 산업 제국주의의 공식적인 면모로 설명함. 제국주의 아래에서, 특정한 집단들이 모더니티의 불가능한 가장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거주하며, 추방되기도 함. 슬럼, 게토, 쪽방, 집장촌, 수도원, 식민지의 반투스탄(반자치 흑인구역) 등등. 아브젝트한 사람들은 산업 제국주의가 거부하였지만 그들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임. 즉 노예들, 매추부들, 피식민자, 가사노동자, 정신병자, 실업자 등등. 특정한 경계 지역은 아브젝트한 구역이 되었고 경비가 삼엄함. 즉 아랍 카스바, 유대인 게토, 아일랜드 인 슬럼가, 빅토리안의 쪽방과 부엌, 판자촌, 정신병원, 홍등가, 도시의 베드타운. 가정생활, 시장, 산업.

-아브젝시옹은 나의 목적을 풍부하게 제시하는 것임. 즉 그것은 신체의 경계와 신체의 정치학의 위를 맴도는 경계적 상태임. 그리고 따라서 정신분석학과 유물론적 역사 사이의 경계 위. 내가 2장과 4장에서 주장하는 것으로서, 정신분석과 역사 사이의 훈육적인 완충지대는 그 자체가 아브젝시옹의 산물임. 전통적인 프로이드적 정신분석학은 가족 로맨스에서의 특정한 요소들을 삭제하고자 함. 노동계급의 보살핌, 여성의 섹슈얼리티(특히 클리토리스), 경제학과 계급, 이성애, 인종과 제국, 문화적 차이 등등. 그러나 이러한 아브젝트된 요소들은 정신분석학을 구성적이고 내부적인 한계의 억압으로 따라다님. 이와 달리, 유물론적 역사, 특히 경제론적인 맑스주의적 형식에서 무의식적이고 성적인 욕망, 정체성, 비합리적인 것, 페티시즘 등등과 같은 다루기 어려운 요소들을 거부함. 아브젝시옹은 정신분석학과 유물론적 역사 사이의 접근금지 영역을 그늘지게 하고 있지만, 그것들의 역사적 분리를 급진적인 질문으로 제기하는 방식 속에 있음.

2)상황적 정신분석학

-이 글에서, 나는 상황적 정신분석학의 발전을 제안함. 즉 동시에 문화적으로 맥락화된 정신분석학은 정신분석학적으로 알려진 역사임. 아브젝시옹에 관해서는, 예를 들면 구별짓기가 아브젝트한 objects(클리토리스, 가정 쓰레기, 생리혈)과 아브젝트한 states(거식증, 자기도취적 상상, 히스테리)사이에서 만들어질 수 있음. 즉 이는 아브젝트한 zones(이스라엘이 차지한 영토들, 감옥, 오래된 여성의 쉼터들)과 동일하지 않음. 사회적으로 아브젝시옹(군인들, 가사노동자들, 간호사들)을 지명한 작인들(agents)은 사회적으로 아브젝트한 집단들(매춘부, 팔레스타인, 레즈비언)과 동일하지 않음. 아브젝시옹의 심리적 과정들(페티시즘, 부정, 초자연적인 것)은 아브젝시옹의 정치적 과정(에스닉한 제노사이드, 대중청소, 매춘 “정화”)과 동일하지 않음. 이것들은 상호의존적이만, 또한 아브젝시옹의 구별적 차원들을 포함함. 그러나 오히려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구성물의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에 대한 모순적인 요소들이라면 상호관계적으로 출현함.

-예) 백인 국민국가의 서사로부터 그들을 배제하는 것은 원시적인 어머니에 대한 남성의 공포와 관련되어 있음. 어머니에 대한 전형적인 남성 공포라는 관념은 여성의 배제를 충분히 이해하는데 있어서 부적절한 것임. 왜냐하면 그것은 인종에 대한 역사적 비틀림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음. 즉 왜 그것은 흑인이며 영토적으로 추방되는 자가 백인 여성인지. 내가 10장에서 설명하는 것으로서, 국민국가적 모성성에 대한 신화는 남아프리카에서 흑인여성과 백인 여성에게 다르게 적용됨. 역사적 다양성에 대한 물음은 양가성의 무대에서 비판적 역할에 대한 물음을 또한 제기함.

-요약하면, 이 책 Imperial Leather은 정신분석학과 유물론적 역사가 불안정한 권력을 전략적으로 보증하기 위해 상호간에 필수적이다는 확신에서 쓰여졌음. 나는 그것들의 이분법적 대립물의 그림자 양쪽을 유지하지 않으려는 정신분석학과 유물론적 역사사이의 관계에 의문을 품은 서사들을 구체화하고자 함. 여성과 인종적 페티시즘, 이성복장착용, S/M, 식민의 파로나마, 가정용 쓰레기의 제거, 시대착오적인 공간, 팝옵티컬적 시간 등등을 설명하면서, 나는 정신분석하는 무엇보다도 제국주의와의 역사적 관계 속에서 출현해왔기 때문이라면, 정신분석학이 식민지의 경합장 위에서 무역사적으로 부과될 수 없다고 주장함. 대신에 나는 정신분석학의 반식민화와 식민주의의 정신분석학 둘 다를 포함해야 한다는 상호 계약을 불러냄. 아마도 사람들은 정신분석학이 없는 유물론적 역사는 없을 것이며, 유물론적 역사 없이는 정신분석학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임.

J.K. Gibson-Graham, "Class and the Politics of Identity" 후반부

2009.06.18 14:24 | 대학원 세미나룸 | 달라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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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K. Gibson-Graham, 1996, “"Class and the Politics of Identity”", in The End of Capitalism as We Knew it: A Feminist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Blackwell, London, 59-71.


계급과 정체성의 정치학

계급 정의: 사회적, 개인적 정체성의 문제들

계급에 대한 다른 개념

계급 정치학을 위한 사회적, 개인적 정체성과 그것들의 영향에 대한 대안적인 개념

Sue와 Bill의 계급 규명하기

여성, 가구, 계급

결론


Sue와 Bill의 계급 규명하기


동질적인 자본주의적 사회형성의 세계적인 재현이 탈중심화되고 복합적인 이질성으로 대체될 때, 다른 과정과 같이 계급은 이질적이고, 불균등하게 발전된 것으로 보여질 수 있음. 공산주의적, 노예적, 봉건적, 자본주의적, 그 외 다른 계급 과정은 -단일하고 체계적인 사회적 정체성의 개념에 의해 모호해진-현대 사회적 형성의 구성체로서 인식되고 이론화될 수 있음.

사회적 형성의 “정체성”과 같이, 개인적인 계급 정체성은 탈중심화되고 다양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음. 개인은 다층적인 계급 위치를 지니면서 다양한 계급 과정에 참여할 것임.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수준에서 다층적이고 탈구된 계급 정체성의 개념을 예증하기 위해서 필리핀 태생의 간호사인 수와 그녀의 백인 오스트레일리아 광부인 남편 빌의 이야기를 고려함.

<빌>은 경제적으로는, 임금노동자로서 연간 65,000달러를 벌고, 수입 수준이 트럭운전사보다는 높고, 경력 있는 대학교수와 동등한 수준임. 그가 재직하고 있는 광산에서 수입-공유 계획은 생산성 획득을 북돋우고, 산업적 붕괴를 약화시키기 위해 도입돼 왔음. 그래서 빌은 그의 임금을 보완할 수 있는 추가 수당을 받음. 빌은 수입의 일부를 저축하고, 투자해왔음. 임대 주택과 주식을 소유하고 있음. 빌은 정치적으로는, 보수당의 지지자이고, 광부로서는 호주광산노동자연맹에 가입. 여가로 야생돼지 사냥 부업을 함. 집에서는 전통적인 역할에 그침. 수입은 본인이 관리하고, 수에게는 생활비, 필리핀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할 돈을 줌.

계급을 사회적 집단으로 이해한다면, 빌의 계급적 위치는 규명하기가 어려움. 광부로서의(임노동자) 생산관계에 우선성을 준다면, 노조활동은 “진정한” 계급이해가 되고, 보수당 지지는 “허위의식”의 산물임. 그러나 야생돼지 사냥사업이나 펀드투자자 측면의 생산관계에 우선성을 둔다면, 그 반대가 될 것임. “노동계급”으로서의 빌의 소속은 그가 포함하는 일부 관계를 강조하고, 그 외는 강조하지 않는 것에 의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음. 즉 중요성의 위계에서 그의 경험의 구성요소를 서열화하는 것에 의해서 혹은 근본적인 혹은 필수적인 요소를 위해 총체적인 사회적 경험을 줄이는 것에 의해서.

수의 이야기는 전통적인 계급 측면에서 말하기가 더 어려움. 수는 필리핀인이고, 빌과 결혼해서는 임노동을 포기해야하는 훈련된 간호사임. 현재는 전업주부로서 가사, 양육을 전담하고, 친구들과 서비스제공자들과 함께 가족관계의 주된 관리자임. 게다가 필리핀에 있는 가족의 교육과 복지를 위한 재정적 책임을 지고 있고, 호주 광부들의 필리핀 부인들의 지역 지원집단으로 자원활동에 적극적임. 수는 고전적인 유연한 다업종숙련 노동자임. 다른 결혼이주 필리핀 여성들에 비해 나은 경제적 배경과 다른 언어집단 출신이지만, 수는 인종차별에 대비해 주류 집단과 동일시함.

수의 계급적 정체성에 있어 빌의 역할을 중시한다면, 그녀는 결혼, 재생산역할, 사회적 구성에서 임노동자와 연결되어 노동자 계급의 성원으로 간주될 수 있고, 광산촌으로 이사하기 전 관리자격인 간호사였고, 이주 전에는 필리핀에서 쁘띠 부르조아의 딸이었음. 이러한 “계급적 위치선정들(location)” 중에 하나는 남편에게, 과거에, 아버지에게 속해있으면서 사회적 범주로서 계급은 수를 이해하는 데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 같음.

그러나 계급과정 관점으로부터 수의 계급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거나, 계급관점으로 그를 “위치시키기” 위해서 빌의 경험을 간과하거나 계급위치를 낮출 필요는 없음. 수는 가구에서 부인과 어머니로서의 역할로 잉여노동 생산, 전유에 대한 “봉건적” 착취계급과정에 포함됨. 그녀의 노동은 안식처의 제공 댓가로, 가정적인 생산의 상품화된 수단에 접근하면서 빌에 의해 전유되었음. 빌이 돈을 벌어오고, 따라서 집에서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적, 가족적, 동료관계의 관습도 수의 착취 조건을 제공함. 수도 역시 자신의 잉여노동이 그 마을에 필리핀 집단의 구성원에 의해서 전유되고 있는 자발적인 계급과정으로 포함됨. 인종, 의존(부양), 연대감, 국가적 충성(로열티)에 관한 주류 담론은 착취형태의 실존조건을 제공함. 수의 공적인 정치참여의 부족은 광산촌의 독특한 문화에서 인종화된 “아시안”정체성의 사회적 구조를 포함하는 계급과정과 “강조된” 여성성과 모성에 포함에 의해서 영향 받음.

이러한 관점에서 수는 전통적인 성별노동분업의 역할과 인종화된 “타자성”의 구성에 의해 중층결정된 것과 복합적인 주체성을 구성하는 것으로 포함된 두 가지 계급과정에 소속됨. 그녀의 경험이 이러한 방식으로 이론화될 때, 집안일 수행에 대한 빌과의 싸움은 그녀가 집에서 감당하는 착취정도에 대한 투쟁으로 이해될 수 있음. 즉 수는 계급에 관여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정치적인 것도 아님. 오히려 그녀는 계급의 비-연대성에 간헐적으로 포함됨.

계급과정 접근이 수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데 계급의 역할을 가시화한다면, 빌의 행동과 경험의 측면에 우선성을 부여하지 않고도 빌의 계급정체성을 이론화하도록 함. 빌은 잉여가치로서 자본주의적인 착취 계급과정으로, 그로부터 전유되는 잉여노동을 수행함.

자영업자로서 그는 자신의 잉여노동을 생산하고, 전유하고 분배하는 독립적인 계급과정에 포함됨. 집에서는 부인의 무임노동을 전유하고, 빌이 참여하는 정치적 과정은 노동계급 간에 헤게모니적 남성성, 백인 우월주의, 연대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구성처럼 다른 과정뿐만 아니라 다른 계급 과정에 참여하는 것에 의해서 영향 받음. 빌은 모순적이고 파편화된 사회적 장, 많은 다른 계급(그리고 비계급) 과정의 상호교차에 있음. 어느 누구도 이러한 과정을 그의 진정한 정체성, “계급” 이해로 정의하지 않았음. 복합적이고 변화하는 상호교차로 빌의 진정한, 단일한 계급 정체성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버틀러의 “의례적 픽션” 유형의 탐색을 포함해야함.

다양한 계급과정으로 수와 빌의 개임은 변화하고, 포개지고 겹쳐있음. 그러나 계급과정에 끊임없이 참여함. 이러한 개입은 공적, 사적인 모든 면에서 적극적이고, 강력한 주체로 구성하게 함.정체성과 계급에 대한 탈중심적 접근은 계급 정치학의 이해에 다양한 함의를 갖음.


여성, 가구, 계급


계급논쟁이 대체로 자본주의적 계급정의와 성격에 치중해왔기 때문에 여성들은 스스로의 위치를 계급과 관련해 설명하는 것을 곤란하게 여겨왔고, 여성들은 자본주의적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비계급 과정에 관여하고 있는 이들로 이론화되어 왔음.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남성을 받들듯이 재생산 혹은 가부장적 영역이 차지하는 부차적 위치에 대해 재언급함. 가부장적 억압이 계급착취에 종속적인 것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면서, 다양한 형태를 갖는 “이원론”(dual systems)적 접근을 제안함. 이원론의 첫번째 형태에서 보면, 가부장제는 계급영역으로 이동.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는 사회적 관계의 두 체제이고, 이 둘은 사회적 삶의 모든 부문에서 상호작용. 젠더관계는 따라서 “생산관계”의 부분이고, 가부장제는 분리된 영역으로 분류될 수 없음. 이원론의 두 번째 형태에서 보면, 계급이 가부장제로 이동. 가구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논리와는 다르지만 가부장적 혹은 가사영역의 “생산양식”의 중심지로 이론화됨. 이런 식의 개념화들은 가부장제를 하나의 체제 혹은 사회구조로 이론화하는 어려움에 빠뜨림. 물론 이 이론가들은 이 이론화들이 가구를 계급영역으로 식민화하려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것도 고려하고 있음. 전통적 맑스주의의 ‘전체성’에 대한 페미니스트 투쟁의 역사 속에서 여성주의적 분석은 가부장제와 젠더 지배를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이론화하려는 경향이 있음.

그러나 계급을 가구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은 잉여노동의 생산, 전유, 분배를 비가시적으로 만들 수도 있음. 따라서 가구와 다른 계급과정들을 경제적, 사회적 “체제” 혹은 구조와 떼어놓고 계급과 가구의 관계를 재협상시켜야 함. 이것은 가구분석을 위한 범주로서의 성별관계를 치워버리거나 다른 것과 바꿔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착취 혹은 계급이라는 측면을 첨가하기 위함. 산업사회의 형성과정에서 자본주의적 계급과정만이 아니라 비자본주의적 계급과정도 함께 전개되었다면, 가구는 비단 자본주의적 재생산에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 “자기-고용(자영업)”과 “자기 착취”와 같은 독립적 계급과정과 같은 비자본주의적 계급의 재생산에도 관여한 것으로 볼 수 있음. 중요한 것은 가구는 자율적인 생산 지점으로서 성립될 수 있고 다양한 계급과정이 수행된 중요한 계급갈등의 지대가 된다는 것임.

봉건적 가내 계급 과정에서 여성은 혼자 살았다면 생산하지 않았을 초과잉여노동을 사용가치의 형태로 생산. 그의 배우자가 먹고, 씻고, 입고, 자는 것은 그가 생산해낸 것, 즉 그의 잉여노동을 그의 배우자가 전유하는 것임. 그러나 많은 가구들에서 이러한 봉건적 가내계급과정은 여성들의 투쟁에 힘입어 위기에 놓이게 되었음.

가내 노동 영역에서의 잉여노동의 수행, 전유, 분배에 대한 성별화된 계급투쟁은 공동체적 계급과정이 일어나는 가구의 수를 늘려놓았고 성별분리를 통해 계급갈등이 해소된 독립가구들을 급속하게 늘리고 있음. 가구는 하나의 지배적 구조나 가부장적 생산양식과 같은 규율들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라기보다는 광범위하게 다양한, 즉 계급, 성별, 인종적, 성적 그리고 다른 행위들이 상호교차하는 사회적 지점으로 재현됨. 이 지점은 가부장제나 자본주의와 같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안정된 사회체제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차이와 지속적인 변화의 중심지로서 이론화 가능


결론


역사의 집단적 주체로서의 “노동계급”이라는 개념은 산업자본주의의 결정적이고 주요한 역할에 대한 맑시즘적 담론과 비맑시즘적 담론의 효과임. “자본주의적 발전” 담론은 사회의 개념을 객관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의해, 주관적으로는 산업화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경험에 의해 정의되는 두 가지 주요한 계급으로 조장해왔음.

계급을 현대 사회의 중추적인 사회관계로 그려냈던 이러한 계급담론은 이제 계급을 주변화시키는 데에 공헌하고 있음. 맑스주의자들이 노동계급 해체(비조직화)를 애도하고 있는 동안, 맑시즘의 비판자들은 계급의 죽음을 주장함. 그러나 죽거나 해체되고 있다는 것은 산업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지배적 관념의 부분으로 만들어진 노동계급에 대한 허구이고, 그것의 임무임. 이러한 관념이 비평가들에 의해서 가치절하될 때, “노동계급”은 주변화되고, 계급의 지위가 강등되어왔음.

“노동계급”이 이론적으로, 정치적으로 시들어가는 운에 처해 있어도 계급자체는 여전히 현존하고 지배적인 것으로 이론화될 수도 있음. 동업(craft) 노조주의와 포드주의적 산업과 관련되어왔던 “노동계급”에 대한 획일적인 상은 더 이상 사회이론가들이나 노동하는 이들에게 인정받을 수 없음. 그들이 사회적 변화를 향한 추동과 저항을 조직화하기 위해서 일하지 않고, 사회이론 단계를 주도하는 역할을 하지도 않음. 그러나 계급이 사회진보와 정치적 변화의 지적인 구성요소로서 축소될 필요는 없음. 대신 사회적 과정으로서의 계급의 역할이 다른 사회적, 이론적 틀 안에서 개작될 수 있고 여기서 새로운 정치적 기회들이 나타날 수 있음.

사회적 주체들은 계급이라는 사안에 부분적으로만 동일시할 것이고 계급변혁을 위한 전략적 연대와 동맹은 담론적으로 그리고 비담론적으로 구성될 것이며, 계급 “정체성”은 많은 다른 정체성 담론들과 사회적 구별 담론을 통해 개별적인 사회적 주체들에게서 중층결정됨.

Rey Chow (The Protestant Ethnic) 제1장 발제문

2009.06.15 22:45 | 대학원 세미나룸 | philgeog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649 주소복사

Rey Chow, 2002, “Chapter 1: The protestant ethn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in The Protestant Ethnic &the Spirit of Capitalism, Columbia University Press, 19-49.

발제: 박경환 (2009. 6. 7)

 

<글로벌 시대의 민족성(ethnicity) 거래>

중국은 1997년 장쯔민 주석이 미국을 방문한 직후 유명한 정치범인 Wei Jingsheng을, 그리고 1998년 클린턴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기 직전 또 다른 유명한 정치범인 Wan Dan을 석방했다. 이 두 명은 지금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 사실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서양은 계속 중국의 “인권‘을 문제시 해 왔다. ”인권“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서양의 매스미디어와 정부는 민주주의, 의사표현의 자유, 정치범에 대한 기본권 보장, 그리고 인간 장기의 암거래 등과 관련하여 중국은 인권에 있어 무엇인가를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냈다. 이에 대하여 중국 당국은 중국에 있어서 인권에 대한 정의가 서양의 것과 같을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즉, 서양은 계몽주의 이후 (인권과 관련된) 자신들의 도덕적 주장을 ”보편“이라는 차원에서 주장해오고 있지만, 중국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위치, 즉 문화적 전통, 가치, 역사적 차이의 기반 위에서만 말할 수 있다. (서양이든 중국이든) 오늘날 글로벌 후기 자본주의 하에서 인권은 하나의 상품으로서 국제 관계에서 생체정치적 거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즉, 중국은 정치범이라는 상품을 교환함으로써 서구 국가들이 중국의 인권문제를 보다 완곡하게 표현하게 하며, 이는 중국이 (인권문제로 수출을 금지하고 있는) 서구의 더 많은 국가들로 다른 상품을 수출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중국은 계속해서 정치범이라는 상품을 팔기 위해 새로운 정치범을 찾아 창고에 저장해 두어야 한다) 중국만이 이러한 정치범 석방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다. 중국 시장에 진출하고자 하지만 중국의 전체주의 체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서구의 기업들은 이러한 중국 정부의 계산적인 움직음으로부터 실질적인 이익을 얻는다. 요컨대, 중국과 서구 사이에 이루어지는 많은 상품들의 거래는 ”인간“이라는 상품의 거래에 의해 (죽었을 때는 장기 매매의 형태로, 살아있을 때에는 정치범 석방이라는 형태로) 더욱 촉진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중국만이 인권을 오용하는 유일한 국가는 아니다. 하지만 중국의 사례는 오늘날 글로벌 상품화의 과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바로 “중국”이라는 하나의 민족성(ethnicity) 자체가주류적이고 규준적인 것으로부터 구분되는 일종의 타자성 혹은 외래성으로서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족성은 민족집단에 의해 점유되어 그냥 거기에 있는 정적인 공간(static space)이 아니라, 민족적(ethnic)이라고 간주되는 사람들과 이들을 인식하는 서구화된 청중 간의 문화정치적 관계이다. (곧 중국의 민족성은 중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해 보고 듣는 청중들에 의해 함께 형성된다) 따라서 중국의 인권 문제는 중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미국화된(서구화된) 중국의 문제’로서 중국의 정치인 및 정치활동가와 아울러 미국 의회, 기업, 미디어, 헐리우드, 인권단체활동가, 유권자 등이 함께 관여되어 있다. 민족집단은 보편이라고 간주되는 서구에 대한 특수성으로 “그들”의 형태로 존재하며, 오직 “그들”만이 야만적인, 인권을 무시하는, 장기를 밀매하는, 인간을 교섭물품으로 사용하는 문화를 가진다고 간주된다.

상품으로서의 민족(ethnic)은 단순히 과거의 휴머니즘이나 실존주의 내에서 이해되기보다는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자본주의 논리는 Max Weber가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의 문제, 즉 환언하면 곧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전통에서 시작된다. 민족성, 자본주의적 상품화,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의 정신문화 사이의 복잡한 계보학적 관계를 지도화하기 전에, 매우 정의하기가 어렵고 기만적인 "민족성(ethnicity)"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며, 이에 앞서 인종(race)와 민족(ethnicity)에 간략히 살펴본다. 인종과 민족은 동일한 용어가 아니지만 서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양자를 절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생산적인 논의를 가져오기 힘들다. 《Race, Nation, Class: Ambiguous Idenitities》에서 Immanuel Wallerstein은, 인종(race)과 인종주의(racism)는 글로벌 자본과 노동의 부산물이며, 민족성은 로컬 문화적 혹은 공동체적 사회화의 과정의 형태로서 인종에 대해 하위적이다고 본다. 한편, 이와는 달리 Balibar는 민족성은 모든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허구적”이지만, 민족성의 사회적 기능은 (개방적, 포함적 과정인) 언어 습득과 (폐쇄적, 배타적 과정인) 인종적 그룹화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본인은 Balibar의 정의에 가까운 접근 방법을 택하지만, 노동-자본의 자본주의 계급구조는 인종화된 혹은 민족화된 분리로 나타난다는 고전적인 주장은 나의 (지적) 탐험에 깊게 영향을 미친다.

 

<민족성(ethnicity): 보편적인 범주인가 아니면 로컬한 범주인가?>

민족성(ethnicity)의 사전적 정의는 그리스어로 민족(nation) 혹은 사람(people)이라는 의미의 어원인 “ethnos”에 기인하는데, 이는 원래 유대인과 크리스트교도들이 “이방인” 혹은 “이단자”를 차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서 민족성은 독특한 특징을 소유하는 문화적, 언어적, 인종적 공동체를 표현하는 보다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은 민족적이다(every person is an ethnic)’는 보편적인 함의를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사회과학에 있어서 민족성이라는 개념은 엄밀한 분석 개념으로 사용되기에는 너무 모호한 상태에 있다. Max Weber는 민족성의 특징을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첫 번째는 특정 민족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의 믿음에 준하는 “주관적인” 범주이며, 두 번째는 어떤 정치적 국가가 구성원의 지지를 얻는 방식으로 민족성에 호소를 한다는 측면에서 “정치적인” 범주라는 것이다. 따라서 Max Weber에게 있어서 민족성은 신화적인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서 정치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민족성은 원래 유대인/이교도, 기독교도/이단자 등과 같은 배제와 경계 구분의 용어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이들을 아우르고 경계를 없애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개념적 변화가 서구 계몽주의 시대 이후 차이, 정체성, 폭력을 다루는 과정에서 자유주의 이론가들이 민족성을 초역사적, 초문화적, 초인종적인 것으로 간주해 온 결과라고 주장한다. 근대 이전의 시기에 전형적이었던 타 민족집단에 대한 경계 짓기와 적대감은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cism)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민족적이다’라는 인식하에 민족집단 간의 ‘차이’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에 (그리고 문화적 차이에 대한 관용의 강조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오늘날 민족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백인 문화집단은 유색인만큼이나 민족적이며, 이는 우리와 그들, 집단 내부와 집단 외부 사이의 경계를 상대화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의 종식 이후 동유럽에서는 보스니아 코소보의 대량학살과 같은 민족집단 간 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백인 민족국가 내부에서도 유색인에 대한 배제와 침해가 계속되고 있고, 그 외에 팔레스타인, 중동지역, 퀘벡, 동남아시아, 티벳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민족성은 차이의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에 대한 인간주의적 관용의 토대로 나타나기보다는 타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타자를 제거하려는 폭력의 토대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미국의 경우 민족성은 주로 유색인 집단을 지칭하는 데에 관행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곧 민족성에 대한 WASP식의 정의이며, 이는 ‘앵글로 색슨에게 민족성이란 없으며‘, ’민족성은 비유럽게 혈통을 지닌 사람들에게 강하게 나타난다‘는 주장을 함의한다. 곧, 미국 대학에서 “ethnic studies”라는 이름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지식은 영국계, 프랑스계, 게르만계, 스칸디나비아계가 아니라 유색인들과 그들의 역사에 관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Ethnic Studies에서의 민족성의 “인종화된” 용법은 주로 다음과 같은 경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 도시 내부의 소수민족 집단: 히스패닉과 같은 비유럽계, 유색인 이민자들

- 원주민

- ethnonationalism movement로 대별되는 민족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한 민족집단: 쿠르드족, 팔레스타인, 시크교도, 스리랑카 타밀 등.

- 인도네시아, 케냐, 자메이카와 같은 다원사회(plural society) 내부의 이질적인 민족집단들

이처럼 민족성은 개념 자체가 대단히 모순적이며, 사실 민족성이라는 개념이 유효한 이유도 바로 그 본질이 모순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점에 있다. 즉, 민족성은 하나의 보편적, 중립적, 기술적인 용어라고 주장되지만, 동시에 민족성은 ‘시간’에 의존하는 경계 짓기의 서사에 이용되는 불안정한 개념이기 때문에 많은 정치인들의 정치적 수사를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실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경계는 항상 경계를 중심으로 어느 한쪽은 우월하고 다른 쪽은 열등한 계층적 의미를 전달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구와 북미의 경우 민족성은 문화적 경계를 시간적/역사적 차별화의 형태로 쉽게 치환될 수 있으며, 이는 어떤 민족집단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지만 (우리와 동일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상대적으로 열등하거나 종속적인 집단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다. 백인집단에 의해 민족적이라고 분류된다는 것은 곧 (직접적인 차별과 무시가 아닌) 보다 포괄적이고 자유주의적 문화 논리에 근거하여 백인 집단으로부터 “인정(recognition)”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오늘날 “다문화주의” 혹은 “다양성”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으로 찬양되고 있는 자유주의적 문화 논리인데, 이는 차별과 배제의 경계를 수사적으로 민주화하지만 실질적으로 정부, 기업, 대학 등과 같은 제도에 의해 게토나 엔클레이브(enclave)의 형성이 촉진되는 과정을 동반한다.

오늘날 미국이야말로 보편주의적 열망과 특수주의적 실천 사이의 긴장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대표적 사례라고 하겠다. Werner Sollors가 민족의 어원인 'ethnos'가 사람과 타자를 동시에 의미한다는 측면에서 민족성이라는 개념의 태생적 모호성을 지적하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규준이면서도 동시에 편차이며, 소수민족의 특징이면서도 국가 전체의 특징을 의미한다. 나는 후반부에서 밝히겠지만 여기에는 어원적인 이유 이상의 모순이 있음을 주장한다.

많은 이론가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미국 내부에서는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사이에 해결되지 못한 긴장이 잔존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민족 정체성이 공유된 역사적, 문화적 과거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 기회, 자유, 민주주의와 같은 추상적, 포괄적, 이상적인 원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현실적으로 한 번도 이러한 이상과 일치한 적이 없다. 이는 Stratton & Ang이 지적하는 것처럼 미래에 수정되어야 할 역사적 오점의 문제가 아니라 ‘헤게모니적 규준성’이 가지는 바로 그 효과로 파악되어야 한다. 곧, 이러한 헤게모니적 보편성으로 인해 미국에 있어서 민족성은 필연적으로 양가성(ambivalence)을 띠게 되는데, 소위 하이픈화(hyphenated) 미국으로 일컬어지는 것처럼 미국은 African American, Asian American, Italian American과 같이 전자는 특수성을 후자는 보편성을 동시에 의미하는 정체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설명이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이란과 같이 소위 ‘후진적’이라고 간주되는 국가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민족성 연구의 동향>

오늘날 민족성은 모더니티 내부에서 (배타적인) 경계 짓기의 한 방식으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포용적인) 경계 없음의 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모순을 안고 있고, 바로 이 점으로 인해 민족성은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이득이 위험에 처하는 순간에는 항상 (외부에 대해)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날 민족성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의 방법론적 패러다임 사이에 속해 있다.

첫째는 민족성을 인류 역사의 도처에서 발견된다는 측면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조건(universial condition)’으로 설정하는 연구로서, 이들은 민족성을 하나의 ‘문화’로 이해한다. 따라서 민족성은 개별적인 수준에서 조사될 수 있는 하나의 (문화적) ‘수행’의 문제로 파악된다. 두 번째는 특정 민족집단에 대한 불평등과 같은 ‘민족성의 정치(politics of ethnicity)’에 관한 연구인데, 이들은 앞에서처럼 민족성을 하나의 문화적 유산이자 개인의 수행으로 파악하는 보편주의에 반대하는 대신, 민족성을 (초국적 기업의 이동, 글로벌 체제의 전략적 요충지,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같은) 주요한 경제적, 지정학적 네트워크 내에 위치시켜 파악한다. 이들은 민족성을 억압의 원천 혹은 억압에 의한 이용에 취약하다고 파악하면서 현대 서구 사회에서 백인과 유색인 사이에서의 비대칭적 권력관계에 초점을 둔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관계는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식민주의와 같은 서사를 통해 분석, 비판된다.

그러나 이 두 방법론적 패러다임은 공통적으로 이론적 편견을 생산하고 있는데, 이는 곧 인간 주체(human subject)를 ‘범할 수 없는(inviolable)’ 것으로 (inviolable은 완결된, 닫힌, 투과될 수 없는 정도로 파악) 간주한다는 점이다. 전자는 인간이 고유한 민족적 속성과 관습을 담지하므로 인간성(humanity)란 항상 이미 거기에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후자는 외부의 억압에 대한 투쟁과 저항을 통해 (본래의) 인간성이 회복되어 되찿아져야 할 어떤 것으로 파악한다.

이 두 패러다임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민족성은 이미 생체정치화된 경제적 관계의 일부로서 민족적이라고 간주되는 인간성 그 자체가 상품화의 과정 그리고 권력의 비대칭적 분포 ‘내에 포섭되어 있다’는 점이다. 민족성을 (거래되어야 할 상품으로 간주하는) 상품화의 관점에서 파악하면 ‘한 민족집단의 구성원이 어떻게 자기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더 이상 충분치 않음을 알게 된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어떤 민족집단의 한 구성원이라고 믿게 하는 힘, 즉 (민족집단 내에서) 자기 자신이 목소리를 가진 하나의 주체라고 믿도록 하는 이데올로기적 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대답되어져야 한다.

오늘날 민족성은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인간주체에 대한 이상주의적 관점과 점차 강렬해지고 있는 집단적 상품화라는 과정 사이에 위치하면서, 민족성과 관련된 (1)인간주체에 대한 보다 정교한 분석과 (2)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의 합리화와 체계화 과정에 대한 (인간주의적) 반대라는 이 두 가지 패러다임이 여전히 지속되지만 또 동시에 이를 초월되고 있다. 따라서, 민족 주체화에 대한 어떠한 분석도 (1)민족적인 것들이 어떻게 비인간화를 야기하는 객체화에 종속되고 저항하는가의 문제뿐만 아니라 (2) “(신의) 호명”이라는 (혹은 Max Weber가 ’노동윤리‘라고 부리는) 심리적인 메커니즘의 이해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해야 한다.

 

<소외된 노동으로서의 민족성: 루카치의 유산>

민족성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이를 노동의 문제와 관련짓지 않고 있지만, 오늘날 현실에서 사회적 열등함을 의미하는 외래성(foreignness)은 노동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미국의 경우 민족적이라고 간주되는 많은 집단들은 사회의 윗부분에서 요구하는 필수적인 서비스를 공급하는 노동을 수행한다.

민족성은 이주의 경험과 매우 밀접하게 얽혀있지만, 본 저술에서 나의 목적은 이주 자체보다는 특정 사회 내부에서 이들이 ‘민족적’이라고 간주되면서 열등한 위치를 차지하여 노동에 참여하는 과정을 분석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성들이 저임금 혹은 가사노동에 참여하는 방식을 고려할 때 여성들은 하나의 민족집단이기도 하다.) 이주에 관한 연구는 소위 ‘노동의 민족집단화’에 관심을 두고 상품화된 노동과 민족집단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둔다. 나는 이주성, 디아스포라, 이민, 추방 등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들이 민족성이 어떤 사회의 외부에서 체계적으로 생산되고 지속되는 현행의 상황을 간과한다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들은 민족집단에 속한다는 주장은 민족성을 하나의 선험적인(a priori), 본질적인 외래성으로 파악하므로, 나는 이러한 실증주의적 관점을 넘어서고자 한다.

따라서 민족성과 노동 사이의 관계는 이주노동자의 존재론적 뿌리 뽑힘의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모더니티에서 민족성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집단에 의해 생산된 외래성의 위치이며 이는 그 사회 내의 계층화된 노동 구조에 의해 정의되는 동시에 노동 구조를 구성한다는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처럼 노동의 상품화라는 관점에서 민족성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민족성을 ‘특수한 문화’로 이해하는 기존의 관점을 넘어설 수 있다. 다시 말하건대, 민족성은 일종의 변동적인 사회관계로서, 노동에 의해 경계가 그어지는 사회적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종주의는 언제나 계층화되어 있지만, 그러한 계층 구조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연하며 가변적이다. 가령, 만약 흑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흑인이 없거나 그 수가 모자란다면, 그 사회에서는 ‘백인 검둥이’가 발견될 (혹은 고안될) 것이다.

민족 노동은 저임금이나 착취와 관련되어 있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국 학계의 경우 African American Studies이나 Asian American Studies와 같은 분야에서 가르쳐지는 민족 역사 내용은 주류사회에 의해 결코 인정받지 못한 민족 집단 내 선조들의 작품들을 공부함으로써 과거의 서사를 재반복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관점은 ‘노동의 소외’에 대한 고전 맑스주의적 분석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할 때에 게오르그 루카치가 제시한 계급 의식 모델이 이러한 (민족적) 문화연구에 있어서 가장 설득력있는 선구자적 위치에 있다.

루카치는 민족성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착취당하는 주체’를 “의식”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는 주체-외부세계의 문제를 자연/인간, 주체/객체 등과 같은 이분법적 구도 내에서 다루는 것을 초월한다. 그는 의식을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인 인식 상태’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비판의 역량을 통하여 총체성으로서의 역사를 표현하는 집합적인 인식 상태라고 이해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착취와 종속 하에서 프로레타리아트만이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계급을 위하여) 역사를 변혁하고 초월할 수 있는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루카치는 의식의 문제를 상품화의 차원에서 분석한다. 객체화와 물신화라는 경제적 과정은 자본주의 하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필연적인 현실을 정의하는데, 이러한 현실은 지주계급이든 프로레타리아트이든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지주계급은 이러한 현실에서 편안함을 느끼지만 프로레타리아트는 이를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으로 느낀다. 왜냐하면 동일한 경제적 과정 내에 있지만 이 두 계급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position)”가 다르기 때문이며, 후자의 위치가 비판적인 “입장(standpoint)”과 변혁에의 열망을 일으킨다.

루카치는 분명 프로레타리아트가 저항의 모습을 갖고 있지만, 그러한 모습의 구성은 (프로레타리아트는 상품화의 외부에 있으면서도 상품화의 내부에 있다는 측면에서) “양가성”을 갖는다고 본다. 첫 번째의 프로레타리아트의 의식은 “상품의 자기-의식”인데, 이는 ‘자기 스스로가 상품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에 (자기 자신이 노동을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상품 그 자체이므로) 비로소 사회 내에서 자신의 존재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물신화된, 상품화된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의식의 측면을 가리킨다. 그러나, 루카치는 이와 동시에 프로레타리아트는 다른 사람(혹은 계급)으로부터 자신을 구분짓는 또 다른 의식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즉, 노동자가 물신화되고 상품화되는 과정은 노동자를 비인간화하고 영혼을 위축시키지만, 정확하게도 바로 이러한 과정은 노동자의 인간성(humanity)과 영혼(soul)은 결코 상품으로 전환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노동자는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루카치가 말하는 상품화로부터 순수하게 남아있는 “인간성” 내지 “영혼”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들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루카치는 정확히도 “노동”이 이에 대한 해답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직 인간만이 노동을 할 수 있고,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재생산되며, 모든 사회적 실천과 자유의 모델이라고 본다. 따라서,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진정한 인간성”을 갖게 되며, 이는 노동에 의한 필연적인 존재론적 결과이다. 그러나 루카치는 노동을 하나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역사적 과정으로 파악하면서도 이를 동시에 (인간의) 선험적인 존재론적 조건으로 간주하는 이유로 인해 근본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다.

 

<속박의 서사로서 계급의식과 민족성의 문제를 새롭게 설정하기>

우리는 위와 같은 모순으로 인해 노동을 이상화하고 본질주의화하는 루카치의 문제설정 방식을 그대로 따르기는 힘들며, 다음의 3가지 측면에서 그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시간성(temporality)의 문제인데, 루카치는 억압과 해방, 상품과 비상품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설명함으로써 프로레타리아트 의식이 변증법적인 “현재”에서 나타난다고 본다. A이면서도 동시에 A가 아닐 수 있기 위해서는 곧 A의 외부가 있어야 하며, 루카치는 이것이 “인간성” 혹은 “영혼”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루카치는 인간성과 영혼이 의식의 (사회적 혹은 시간적) 질서의 외부에 존재다고 인식한다.

둘째, 루카치의 주장을 하나의 서사로 읽게 되면 일종의 목적론적인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즉 프로레타리아트에 관한 이야기가 (물신화와 상품화와 같은) 억압에서 (계급의식의 출현과 같은) 자각으로 그리고 (계급없는 사회의 달성과 같은) 궁극적인 해방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선형적인 발전 과정으로 그려지고 있다. 프로레타리아트는 마치 모든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만 상처입은 자의 모습 그리고 종국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함으로써 그들을 억압에서 자유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기독교적 숭배를 연상시킨다.

셋째, 루카치의 모형은 단순한 서사에 그치지 않고, 계몽주의 이후 (폭력과 반(counter)폭력과 같은) 근대적 관념에 기초한 “속박(captivity)”의 서사로 읽혀질 수 있다. 즉, 계몽주의 이후 모더니티는 폭력, 야만, 원시적 무자비함(intolerance)과 같은 전근대적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면서 보다 평화로운, 문명화된, 관용적인 사회를 그리고 있다(Leonard Tennenhouse). 이러한 측면에서 모더니티는 항상 현재의 사회적 상황에서 폭력, 야만, 원시적 무자비함 같은 요소들을 찾아내어 이를 시간적 타자, 곧 과거의 속박으로 간주하고, 모더니티는 이러한 비근대적 속박에 갖혀 있는 인간성을 해방시키는 진보적 작업으로 이해된다. 곧, 속박은 근대적 문명의 해방적 의미에 대하여 필수불가결한 이면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속박이 하나의 역사적, 담론적 구성물로 간주된다면, 자연적이고 논리적이라고 간주되어 왔던 저항이라는 관념 또한 일종의 근대적 산물로서 새롭게 개념화(역사화)되어야 한다.

속박에 대한 Tennenhouse의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루카치가 주장하는 계급과 의식의 문제를 일종의 속박 서사로 읽어낼 수 있는데, 프로레타리아트는 (인간의) 자본주의적 상품화 과정 속에서 원시적인 국가 내에 갇힌 인간성의 원형이며, 저항을 통하여 보다 문명화된 존재 조건을 달생하기 위해 투쟁해야만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프로레타리아트는 무엇을 통해 자신의 속박에 저항할 수 있는가? 루카치는 속박의 원천은 바로 상품화이며, 이 상품화라는 사슬을 깨고 스스로 해방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결코 상품화될 수 없는 자신의 ‘인간성’ 혹은 ‘영혼’을 통한 것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성 혹은 영혼은 모더니티를 하나의 해방으로 간주하는 역사적 서사에 의해 구성된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루카치에게 있어서 인간성 혹은 영혼은 역사적 조건 외부에 있는 본질적으로 흔들릴 수 없는 조건으로 간주된다.

나는 이러한 자기모순에도 불구하고 루카치의 저술은 의식에 관한 (혹은 작취당하는 주체성에 관한) 가장 영향력있는 모델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페미니즘에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에 이르는 정체성에 관한 많은 소수 담론들은 (집단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자기가 외부에 의해 소유되어 있다는 인식 그리고 자기에 대한 존재론적 긍정을 바탕으로 하는) 루카치의 서사방식을 답습하면서, 인간성과 주체성이 손상, 위협받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본질적으로 자유롭다고 간주하고 있다. 특히, 민족성에 관한 이론화의 전체 과정은 루카치의 모더니티 서사에 담긴 모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민족성이 (우리는 누구나 다 민족적이다는 측면에서) 하나의 보편이면서도 (항상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람들에 적용되어 왔다는 측면에서) ‘동시에’ 특수로서 개념화되고 있다는 모순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성의 내적 모순이 화해된 상태로 남기 위해서는 담론적 보상이 필요하며, 이는 (문화적, 민족적 차이를 관용적으로 대할 수 없는) 무관용(intolerance)의 느낌이 민족적 타자성(ethnic otherness) 혹은 민족의 과거(ethnic past) 라는 외부의 형태에 투사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개발도상국을 방문할 경우 혹은 농촌을 방문할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됨). 이는 곧 국지적인, 외래적인, 제한된 형태의 민족성을 원시적이고 미개한 영역으로 밀어붙이고 우리 스스로를 그러한 영역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과정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민족성의 내적 모순이 담론적인 화해 상태로 남게 된다. 그러나, 외면상 진보와 해방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거리화, 거부, 그리고 반박의 행위는 타자를 민족화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즉, (누구나 다 민족적이므로 우리는 민족적인 차이에 관용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우리는 (진보와 해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미명 하에) 그러한 관용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자민족중심적(ethnocentric)이라고 비난함으로써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분선을 긋는다.

 

<항의의 문화와 자본주의 정신>

민족적 존재는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저항 중에 있는 속박’의 이미지로 상상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가령 부정의에 대한 불평 혹은 희생자에 대한 인정과 보상 등을 요구하는 항의와 같은) 일종의 항의(protest)와 관련되어 왔다.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보편주의적 주장은 인간 해방을 꿈꾸기 위해서 폭력, 착취, 상품화를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속박으로 문제설정해야 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순은 보편주의를 뒷받침하는 항의의 문화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인간성을 사회적 과정의 외부에 있다고 간주하는 루카치의 본질주의적 관점으로는 대답되기 힘들며, 오히려 이러한 항의를 자본주의 “내부”의 문제로 인식함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나는 근대적 도덕을 둘러싼 이러한 모순이 Max Weber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관한 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노동윤리의 기원이 종교, 특히 중세 말의 종교개혁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추적했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물질적 추구는 단순히 어느 시대에서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탐욕의 결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서양의 종교적 세속화 과정에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내적 규율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규율은 종교개혁 이후 나타난 (주님에 의한) “소명(부르심. calling)”에 대한 믿음, 즉 모든 개인에게는 주님이 부여하신 각자만의 사명이 있으며 개인은 그 주어진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믿음의 결과이다. 이 “소명”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활동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훌륭한 도구이며, 세속적 일에 대해 (열심히) 규율화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인생을 마감할 때 종국적으로 많은 은덕을 쌓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면, 성실, 끈기는 신의 은총이 가시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며, 반대로 일하기를 거부하거나 일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것은 (더 많은 은덕을 쌓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신의 은총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베버는 종교의 세속화 과정에서 이러한 종교적 원리는 점차 약화되었지만, 이러한 원리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소위 ‘세속적 금욕주의’를 통해 더욱 명시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베버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종교의 윤리적 ”원리“가 아니라 (신의 은총이 드러나는) 윤리적 행위 형태들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청교도(Puritanism) 각 개인의 ”윤리(ethos)“를 형성하며, 개인은 (이러한 윤리적 행위를 통해 쌓은 자신의) 은총으로서 (심판의 날에) 신 앞에서 자신을 증명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 특히 근대 ”부르주아지 중산계급“의 윤리를 형성하는 데에 기여한다.”

오늘날의 ‘신없는’ 세계에서 구원의 종교의식은 탈가치화 되었지만, 신의 은총을 쌓는 행위는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합리적, 체계적, 결과-지향적 노동 윤리로 나타난다. 자본주의는 청교도윤리를 계승함으로써 ‘근면(열심히 사는 것)’에 대한 심리적으로 뒷받침한다. 즉, 세속적 성공은 신의 은총을 받았음을 증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구원을 확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루카치의 모델을 베버의 분석과 나란히 놓고 이해하면, 자본주의는 (고전 맑스주의가 주장하는) 노동의 소외가 낳는 물질적 이윤을 전유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노동을 함으로써 갖게 되는) 은총과 구원과 같이 (원래 노동자에게 속하는) 비물질적인 보상까지도 전유함을 알게 된다.

루카치는 프로레타리아트의 저항의 원천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성 혹은 영혼과 같은 본질주의적 용어에 의존하고 있지만, 베버는 물질적 생산 조건과 그와 관련된 사회관계의 토대 하에서 주체성의 형성을 이론화한다. 베버는 종교가 단순히 허구적인 상부구조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물질적 지원의 형태로서 실제적인 사회적 결과를 낳는다고 본다. 이는 제머슨(Fredric Jameson)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짜 맑스주의 사고와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오늘날 주체성의 형성에 관한 심리학적 이론들과는 달리 심리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사이의 상호 적응을 보여줌으로써, 자본주의의 객관적인, 금융적인 작동 과정에 주관적인 것이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를 잘 드러낸다. 루카치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인간 내면의 힘이 자본주의의 악에 저항하고 항의하는가?”였다면, 베버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인간 내면의 힘이 자본주의 내부에서 발생하였고 어떻게 자본주의의 진보에 기여하는가?”였다. 루카치에게 노동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짓는 원초적인 인간 본질이라면, 베버에게 노동은 하나의 문화적 산물로 다루어진다. 베버의 모델은 인간(성)이 노동에 앞서 존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규율과 처벌의 세속적 실행을 통해 이루어지는 노동이 인간을 생산한다고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푸코의 주장은 베버의 근본적 주장의 연장선 상에 있다. 루카치와 베버의 관점에서 살펴본 근대 이후의 민족성에 관한 논의는 다음의 4가지 함의를 갖는다.

1) 민족성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루카치의 계급의식 모형은 강력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치의 모델은 일정한 모순을 갖고 있는데, 이는 비판의식에 도달한 집단이나 계급이 완전하게 상품화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상품화를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3) 이러한 모순적인 서사 구조는 희생자를 속박의 위치에 두고, 이러한 속박으로부터 구원이 저항과 항의에 있다고 설명한다. 4) 루카치에게 있어서 저항과 항의는 목적론적인 서사이지만, 베버에게 저항과 항의의 서사는 ‘보편적인 정의에 (도덕적으로) 몰두된 근대적 서사이자 자본주의의 정신의 효과이다’. 결국, 저항과 항의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 구조의 일부분이다. (부연한다면) 저항과 항의는 자본주의가 번영하는 원인이다.

 

<나는 항의한다, 고로 존재한다: 글로벌 자본 시대의 민족성>

중국과 서양 사이의 거래 관계와 관련하여, 인권의 상실/속박은 명백히 민족성의 차원, 즉 중국의 차이 혹은 중국적임의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초문화적 거래(구조)에 있어서 중국 사람은 논리적으로 ‘희생자’로 간주되어야 하고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계속해서 항의하고 투쟁해야 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오늘날 민족성은 그 것이 지니는 불확실한 지위 때문에 인식론적으로 매력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명백히도 민족성은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 인권과 같은 도덕적 보편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유토피아적 항의와 투쟁의 패러다임 내부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은 객체와와 물신화와 구체화와 같은 체계적인 자본주의적 윤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인간을 일종의 상품이란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오늘날 민족성은 여전히 ‘소외된 노동’ 그리고 ‘속박된 상태에서의 저항’이라는 근대적 서사 하에 놓여있지만, 나는 오늘날 민족성은 (계급의식과 마찬가지로) 소명, 기회, 보상의 메커니즘으로 충만한 자본주의의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작동 과정에 각인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적이고자 하는 것은 항의하고자 하는 것이며(to be ethnic is to protest), 이러한 항의는 실질적인 해방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세계적으로 유통되고 가시화되기 위한 것이다. 즉, 오늘날 민족적인 것은 항의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민족적인 것이 상품화될 수 없는 인간성 혹은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항의하는 것 자체가 경제적인 논리와 사회적인 소명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민족적인 투쟁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해당 민족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경우를 보면) 중국인 독재자나 반체제인사를 재현하는 종종 서양인, 특히 미국인들이기도 하다. “나는 항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오늘날 한 개인이 더 많이 항의할수록 그 개인은 더 많은 일과 비즈니스와 이윤을 창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민족성은 도덕적인 자기-생산, 자기-확장, 자기-증식되면서 급박하게 변화하는 (phantasmagoric) 글로벌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사회공간이론교육 /  09.05.26


Jonathan Friedman, 1997, “ Global crises, the struggles for cultural identity and intellectual porkbarrelling”, in Pnina Werbner and Tariq Modood, Eds.,
Debating Cultural Hybridity: Multi-Cultural Identities and The Politics of Anti-Racism, Zed, London, 70-89.


Global crises, the struggles for cultural identity and intellectual porkbarrelling: Cosmopolitans versus locals, ethnics and nationals in an era of de-hegemonisation

전지구적 위기, 문화적 정체성과 지적인 정부보조금 획득을 위한 투쟁
:탈-헤게모니화 시기에 코스모폴리탄 대 지역, 민족, 국가


?서 론


모든 사람들은 세상이 심오한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 우리는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 복지국가에서도 증가하는 도시 폭력과 하층계급의 일시적인 출현의 직접적인 경험을 거쳐 이러한 변화를 인식함. 우리는 문화적 권리에 대한 요구뿐만 아니라 전지구적인 뉴스 네트워크에서 보고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에스닉한 폭력에 관해 읽을 수 있음. 우리는 세계는 하나다라는 얘기를 들음(지구촌). 지구촌의 지배규범에 벗어나 있는 국가를 제외하고.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전지구화의 표현이 아니라 단계적인, 진화적인 사고에서 연유한다고 보고, 대신에 복잡하지만 파편화(fragmentation)의 단일한 과정으로 표현되는 평행적인 과정이 있다고 봄. 이런 과정의 논리는 분리된 영역과 연결된 동족관계(homology)로 표현됨. 이것들은 다음과 같음.

1. 지식생산에 대한 공적 영역의 파편화

2. 3가지 분리된 파편화 과정을 거친 국민국가의 민족?인종화(ethnification)

   1)현지우선(혹은 토착성) / 2)지방분권화(혹은 지역분할) / 3)이주민과 국가의 민족? 인종화

3. 민족?인종화를 수반하는 체계의 중심으로, 국가 영역의 게토화로, 증가하는 경제적 양극화와
   주변화된 인구의 출현 상황

이러한 과정들은 밀접하게 상호관련되어 있음. 파편화의 과정은 정체화의 지역화와 동등함. 국지적인 것은 지리적인 국지로서 균질적인 국민국가의 붕괴의 주된 표현임.

토착성은 에스닉한 근본성의 의미와 관련된 국지에 대한 강력한 의미와 연결됨. 토착적인 것은 역사적으로 침략이나 식민화의 산물인 또 다른 인구와 동일시된 국민국가의 원류적인 거주자들을 참조함. 이민자와 국민의 민족?인종화는 정체성의 구체화 과정의 일부임. 국가를 둘러싼 민족?인종화는 국민국가 자체의 민족?인종화와 평행적임. 이민인구의 민족?인종화는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외국 고향과 동일시되는 디아스포라 형성을 발생시킴. 국민국가는 전자의 단일성을 분해시킬 때, 양극화하는 파편화의 일반적인 과정 내에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것으로 둘러싸임.

국가의 민족?인종화는 전지구적 체계에서 헤게모니적 질서의 쇠퇴(모더니즘의 쇠퇴)의 측면임. 나는 모더니즘의 쇠퇴가 팽창하는 동아시아에서 이러한 유사한 이데올로기적 운동의 부상과 반대되는 것이라는 것을 제안해왔음. 이것은 통계적 과정, 경향이지, 결정론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주장함.

문화적/사회적 파편화는 증대되는 소외의 지친 감정에 의해서 촉진됨. 국가가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더 광범위한 인구로부터 보충된 개인에 의해 내재화된다는 사실은 권력에 대한날카로운 비평의 특정한 푸코주의에 의해 간과되어옴. 즉, 마치 권력의 특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다문화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국가는 아니라는 것임. 결국에는 동화를 실천하는 국가가 되고, 국가 이데올로기의 설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루트에 거주하는 변화하는 이데올로기를 탐색할 필요가 있음. 여기서 제안하는 점은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기능하게 하는 사회적 현실의 공유된 경험과 해석을 발견하는 것임. 강한 사회적 프로젝트 이상의 포기와 그러한 프로젝트와의 동화로서의 다문화주의는 서구 근대성의 쇠퇴에 대한 ‘정체성 공간’에서 폭넓은 변화로 나타남. 근원으로의 회귀를 낳는 모더니즘은 반작용적인 하위국가와 에스닉한 정체성의 강화를 가져옴. 그래서 우리는 위로부터(상명하달)의 단순한 함의보다는 이중적인 과정을 갖음.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사회적 행위자가 나타난 이래로 특정한 담론에서 가정되어왔던 것처럼.


?전지구적인 엘리트 형성의 잡종화(hibridisation)와 문화


연구과정의 주체인, 지적인 엘리트로서( 혹은 최소한 코스모폴리탄이라고 불렀던 엘리트의 부분이더라도) 자기-동일시하는 위치로부터 진술하기 때문에 신중한 고려를 부여하지 않는 동일시의 네 번째 과정이 있음.

이러한 정체성은 잡종화, 크레올화(혹은 혼성화), 초-민족?인종성(trans-ethnicity), 초국가성, 하이픈된 정체성 등의 용어로 표현됨. 에스닉/이주 연구에서 가장 명확한 것은 민족?인종성이 식민지 세계에서 진행했던 위로부터의( 혹은 상명하달식) 구분(classification)의 산물이라는 것임. 인류학, 심지어 역사학에서 이와 유사한 접근방식이 있음. ‘부족’, 심지어 국지(예)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에 관한 범주적 정체성의 식민지적 부과 혹은 ‘관습’법의 설정은 자기-동일시로의 동화가 되는 존재질서의 일부가 되고, 심지어 ‘민족주의자’(예)서발턴 연구 집단)가 식민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무기로 사용됨.

식민 관료적 범주화의 문제는 근대적 관점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음. 여기서는 범주화 자체의 허위성을 강조하고, 새로운 위계구조에 동화되는 것을 가정함. 이것은 부여된 범주화 아래에 있는 그밖의 것을 가정하는 접근 방식을 제공해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식민주의에 의해 부여된 범주와 상반되게 정의된 애매한 경계, 문화적 혼합, 일반적인 서발턴 실재와 같은 용어를 포함함(담론의 일종). 오늘날 현실에서 이것은 문화적 흐름들이 서로 조우하고, 새로운 조합, 잡종성을 이루는 문화적 전지구화의 논의와 관련됨. 그것은 증가하는 세계의 일반적인 전지구화의 실재 역사적 산물을 가정하는 것임. 지구가 강압하는 국제적인 자본 이전에 존재해왔을지도 모르는 이전의 순수한 문화 실존의 가정을 예견하는 담론임. 본질주의가 잡종화와 문화적 창조성 개념에 의해 대체된다는 한에서 규범적 담론임.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과 잡종성

이러한 입장은 코스모폴리탄적이지만 새로운 종류의 코스모폴리탄이즘임. 모더니즘이 주도하는 시기에 코스모폴리탄들은 스스로 더 큰 세계를 알고,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모더니스트였으나, 주되게는 이성주의자, 보편주의자였음. 오늘날의 코스모폴리탄들은 모더니즘 없는 코스모폴리탄임. 그들 스스로 세계의 다양성을 아우르고, 그것의 실질적인 혼합체와 동일시한다는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임.

이러한 정체성 출현의 또 다른 측면은 참여자들이 현실이외에 그밖에 다른 것을 보도록 하는 것임. 이러한 방향으로 이동한 사회학자들 중에서는 다층적인 뿌리의 정체화가 매우 쉽게 일어나는 문학, 지식, 영화, 음악 분석으로 옮긴 경우도 있음(길로이 주장, 이에 대한 저자의 문제제기 참조).

영국과 전체 검은 대서양에서 흑인의 역사는 지적인 코스모폴리탄뿐만 아니라 세계 체계의 일반적인 파편화 과정이 지시하는 주제를 나타냄. 이것은 포스트모던 코스모폴리탄의 하이픈된 현실이고, 이 현실은 근대, 추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식, 문화, 그것들의 지속적인 융합의 복수성에 의해서 정의됨. 이러한 입장을 위한 메타포는 전지구적 마을의 세계교회주의 개념으로 나타남. 이것은 새로운 단일체가 아니라 다양한 정치적 입장 하에 있는 분리된 실체의 집합임. 세계교회주의 다원주의는 파편화된 에스닉 정체성의 보상적인 대립물임.

앞서 지적했듯이 지방분권화는 국민국가를 쇠퇴하게 하고, 대량 이주가 발생하는 국지적 혼돈을 가져올 것임. 일상적인 국가의 공유된 경험과 환상에 대한 위협은 증가하는 인종주의와 국민국가의 보편적인 민족?인종화를 가져올 것임. 이러한 파편화를 넘어서 있는 지적인 엘리트도 역시 실존과 세계를 정의내려야함. 잡종성은 이 집단에게는 정치적으로 옳은 해결책임. 반-인종주의, 반-민족주의이고, 고대, 80년대 이전, 모더니즘과 동등한 포스트모던적인 객관적인 대안 정체성을 공급해줌.

문제는 세계에 대한 도덕적 전망을 구체화하는, 입장과 입장설정하기임. 그것은 자기- 성찰적인 것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주체성으로서 스스로에게 투명하고, 자기-명백함. 근원성, 경계 설정하기, 즉각적인 사회적 환경에 대립되는 경향은 그러한 세계교회주의에 반하는 것을 명령하고, 이러한 경향은 전지구적 체계의 실제적인 파편화에 의해 발생하고, 재강화됨.


-레비스트로스의 ‘인종주의’와 정체성(유네스코와 대립되 개념):문화적 정체성의 특성에 관한 지적인 혼란의 시기에 정치적으로 매우 부적절함.

-기어츠의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민족주의, 독설 비판: 포스트모던하고, 다문화적인 관점. 다른 이의 세계를 내부로부터 이해하려고 노력해야함을 강조함. 인류학자가 되진 않더라도 특정한 세계와의 거리두기를 함축함.

-바바: 국가와 국가에 내포된 동질성을 비판하고, 현실에 대한 이중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이주자의 위치의 중요성을 강조함. 문화적 잡종성을 반-모더니티의 개념과 연결시키고, 이것이 규범적 대립이 아니라 명백하게 일종의 초월성임을 강조함. 그 주장은 이주민은 한 곳의 문화적 공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주장은 본질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와 유사한 논리가 됨. 대신에 유동성과 필수적인 얽매임(boundedness)의 불안정이 있긴하지만.... 사잇성(in-betweenness), 경계성(liminality)의 언어는 바바의 잡종성 호명을 지배하고, 조직화할 것임. ...

제 3의 공간....동질적인 정체성의 개념이 운반되고 강화되는 경계-교차하기의 메타포에 있음. 왜냐면, 그러한 위반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임. 그러나 그러한 문화적 이주 현실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탈-식민적 경계-교차하기 작업에서 그것은 항상 프린트된 단어로 그것을 이러한 전치와 객관화(대상화)를 유지하는 것은 시인, 예술가, 지식인이었음. 그러나 누가 시를 읽고, 사회적 현실의 더 낮은 범위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종류의 동일시는 무엇인가?

경계-가로지르기는 미국에서 치카노(멕시코계 미국인 남성) 연구의 최근 메타포임. 그리고 전체 문학은 이주민의 국경을 초원한 경험을 둘러싸고 형성되어옴. 글로리아 안잘두아의 경계의 땅/라 프론테라:새로운 메스티조(1987)에서 저자는 국가뿐 아니라 성적인 모든 경계를 가로지름. 이것은 명백히 포스트-콜로니얼, 포스트모던 담론과 연결됨. ... ‘혼합체’와 ‘잡종’, ‘크레올’ 개념의 사용은 지리적 기원의 사실을 문화적 통합의 실천과 혼란스럽게 함. 후자보다는 전자가 문화를 규정하는 특성임. 그것은 보급(diffusionist)을 구성하고, 민족?인종적으로 근대 인류학에서 용어의 과학적 사용과 약간 관계가 있는 동일시 형태에 초점을 둠. 사회적 세계의 내부로부터, 문화적 혼합체는 자기-동일시 현상을 일으키고, 외부로부터, ‘객관적으로’ 타자를 동일시하는 행동을 수행하는 관찰자임. 혼합된 문화는 동일시의 산물임. 요약하면 잡종과 잡종화 이론가들은 민족?인종기술학적 이해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규정, 자기-본질화하는 행동의 용어로 세계를 동일시하는/동일시하거나 하는 집단의 산물임. ...

잡종화는 자신의 단독 집단 만큼이아 어떤 주장을 가진 것으로 재현하지 않을 수 있었던 방식으로, 자신이 기반하고 있는 사회적 정체성에 개방되어 있음.


?정체성과 정체화(동일시)의 논리들


주장의 핵심 요약- 인종적 순수성, 인종주의, 잡종성은 문화에 대한 본질화된, 객관화된 개념에 관한 다양성임. 그 문화는 전지구적 체계의 지역적 위계구조 내에서 다른 위치에서 획득된 사회적 경험의 일반적 속성과 연결되면서, 특정한 형태의 정체화와 정체성 실험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됨. 문화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은 기원의 정체화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의미의 구성요소, 상징, 행동, 제도, 구조 간의 특정한 관계임. 그것은 인류학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사는 다른 ‘세계들’에 관심을 갖을 수 있는 통일성에 대한 특정한 형식의 가설에 관한 것일 뿐임.

내가 말하는 정체화의 특별한 형식은 민족성이나 인종주의, 즉 본질주의라는 유사한 전제에 기반함. 이것은 비평이 아니라 단순한 기술적 진술임. 그러나 그것의 결론은 어떤 비평적 힘을 가짐. 잡종성은 순수성의 메타포에 기반하고 있음. 순수한 잡종성의 개념은 자기-모순임.

이것은 집단정체성으로서 실천되는 상황에서 명백하게 됨. 미국에서 중산층, 특히나 학생에 제한된 혼합된 민족적 혹은 인종적 정체성을 설정하려는 노력들이 있었음. 복합적-민족적 계보학의 용어로 자신을 정체화하려는 기반들이 있음. 즉 ‘나는 일부-아일랜드인이고, 일부-스코틀랜드인이고, 일부-흑인이고, 일부-이탈리안이다.’라고 표현하는 것. 이것은 사회적 의미에서 혼혈인(하이픈이 붙은)의 정체성은 아님. 왜냐면 총체적으로 개인화되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들은 집단정체성을 위한 메타포와 공명함. 이것은 그와 같은 정체화의 특성으로부터 빗나가게 하는 것은 아님. 즉 한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본질의 계보학적 이행과 같은.

혼합-인종 운동은 자신의 신문과 지역조직을 갖고 있음. 그 프로젝트는 단일-인종 범주에 의해 권리를 박탈당한 것으로 느끼는 사람들의 새롭고, 통일된 혼합체로 규정되어야함. 새로운 혼합체는 일부를 그들의 ‘사실적인’ 정체성으로 표현하도록 하지만 집단 수준에서 정체화의 논리는 버클리의 학생집단과의 분리로 표현됨. 아시안-아메리칸은 자신의 집단을 구성해온 ‘잡다함 miscellaneous’.. 왜냐하면 그들은 흑인-아메리칸 담론과 다른 특별한 이슈를 말해야 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정체화의 본질주의는 순수성 대 잡종성을 제거하는 모든 시도들을 쉽게 없애버릴 수 있음. 횡단적-민족성의 실천 기반 위에서는 유사한 유형의 새로운 범주 이외에는 생산할 수 없음.

낡은 코스모폴리탄은 민족성과 특별한 문화 위에/넘어 동일시하는 모더니스트였음. 그는 보편적 속성의 표현으로서 문화적 특정성을 이해하는 이성을 가진, 진보적인 지식인, 신봉자였음. 새로운 세계주의자들은 문화에 대한 세계교회주의의 수집가임. 그들은 자신의 자아-정체화로 차이의 수집 그 이상을 재현하지 않음.


?전지구적 계급들과 잡종성의 이데올로기


잡종성의 이데올로기는 명백하게 대중성으로 획득되어 왔음. 전반적인 정체성은 자신의 헤게모니적 논리에 놓임. 왜냐하면 잡종성의 이데올로기는 혼합과 연합의 행동을 구성함. 하위층 주변에서 발전한 논리는 문화산업의 교육받은 세계 여행가들 사이에서 발전한 것과는 다른 특성이 있는 것 같음. 그러나 둘 다는 세계영역의 전지구적 과정내에서 다른 위치를 갖는다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음. 이러한 일반적인 과정은 불안정성과 폭력의 증가, 인구이동, 종교, 성, 나이뿐만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 민족, 지역, 국가의 운동성의 증가를 가져오는 국가적인 분열을 구성함. 만약 이것이 포스트모던 카오스로서 경험된다면, 전지구적 관점에서 매우 체계적인 것이 됨.

도시빈민층, 민족적으로 혼합된 게토는 실제적으로 새로운 잡종적 정체성의 구성을 즉각적으로 공급하지 않는 영역임. 전지구적 안정 과/혹은 팽창의 기간에 생존의 문제는 영토와 안전한 삶공간을 만드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음. 계급 정체성(지역적 게토 정체성)은, 마치 지역적 영역 그 자체로 갱 영토화로 분화되는 것처럼, 보편적인 경향을 보임. 70년대 중반부터 변화는 중류층과 중?상류층 뿐만 아니라 도시 게토에 영향을 줬던 정체성 정치학에서 일반화된 증가와 그러한 공적인 사회적 영역의 민족화의 증가임. 그러한 과정에서는 문화적인 엘리트들에 의해서 논의되는 잡종적 정체화를 위한 여지가 거의 없음. 심지어 잡종성은 민족적, 즉 경계지워지고, 상반되는 경향을 보임. 민족?인종화는 긍정적인 피드백 과정에서 폐쇄의 증가(갈등의 증가)로 이끌어 갈등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경계선과 경계성의 강화을 수반함.

전지구적인, 문화적 잡종, 엘리트 영역은 국제적 정치학, 아카데미 미디어, 예술과 연관되어 있는 세계의 다른 종류의 경험을 공유하는 개인에 의해서 차지됨. 3세계에서 태어나, 1세계에서 살아온 경력은 완전하게 코스모폴리탄임. 차라리 그들은 매우 성찰적으로 차이의 조함의 측면에서 문화적 용어로 규정됨. 이 시기는 동화주의에서 다문화주의로의 변환을 나타냄. 결국에는 ‘탈-영토화된’ 정체성의 형성을 가져옴. 후자는 국제적 이주의 단순한 현상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동일시로의 변화의 산물.


-디아스포라 정체성의 변화

우리가 말하는 디아스포라적인 전지구화 구조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일 뿐. 디아스포라는 10년전과 달리 합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억압으로부터 해방의 근원이 됨. 국민국가, 모더니티, 대규모의 자본주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 게다가 세계 체계에서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실질적인 권력의 근원이 됨.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의 부상은 국민국가 자체의 쇠퇴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 나는 이런 과정을 자본축적의 탈중심화, 중심적 혹은 헤게모니적 권력의 쇠퇴, 정치적 정체성과 연대를 분열시키는 구성을 취하는 전지구적 체계로 인한 결과적 불안정성의 측면으로 해석할 것임.

모더니티의 쇠퇴는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정체성의 개입을 허용함. 처음에는 이것은 민족적 집단의 정치적 평등화의 문제임. 그러나 오늘날은 잡종성의 기념이 되고, 잡종성은 문화적 엘리트 자체에 의해서 경험됨. 이러한 잡종성은 체계의 기저에서 경험하는 발칸화와 부족화(tribalization)와 상반됨. 잡종적 정체성이 논의되고, 제도화된 유일한 장소는 특정한 유럽중심적 식민지임. 그것은 ‘절반-카스트’와 달리 말하면 혼합된 정체성은 사회적 질서에서 특별한 위치와 연관됨. ...

문화적 이론가들과 다른 지식인들은 그들이 관찰한 세계의 잡종성을 잘 정의내릴런지 모르지만, 이것은 두 가지 전제조건을 수반하는 것 같음.

1. 세상의 사람들은 문화의 측면에서, 다른 의미에서 문화, 즉 대상, 본질, 정수의 측면에서 기술될 수 있음. / 2.세계 체계가 ‘의자 뺏기 게임을 이런 사람들과 한 이래로, 정의상 문화와 같은 것이 행해짐. 그결과가 혼합, 하이픈으로 연결됨 등등. 세상의 관점에 속한 지식인에게는, 그것은 자기-동일시를 창조하는 것이지만, 역시 다른 사람의 현실을 기술하는체 하는 것임.


-잡종성을 본질화시키는 문제

민족?인종성뿐만 아니라 성, 계급, 나이, 세대 등 다각적인 문제가 상호교차함. 그러나 중국-아메리칸 정체성을 본질화, 환원시키는 문제. 이 논문에서 표현된 정치학은 아시안-아메리칸과 같은 다각적인 에스닉 소수자들은 그들의 통일성을 더 큰 백인 인구,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인구에 직면해서도 유지해야한다는 것임. 동시에 새로운 연대를 가능하게 하고, 소수자를 결국에는 힘을 갖게 해줄 젠더, 계급, 나이가 발동시키는 통일성에도 도전해야함. 모더니즘 없는 모순적인 코스모폴리탄의 논리는 명백하게 표현됨. 계급, 젠더, 나이는 민족성처럼 사회적 구조물로 모두 환원됨.


?결 론


이러한 주장으로부터 출현하는 일반적인 주장은 정체화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위치지워진 실천이고, 주체가 지향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조건의 구성임. 잡종/크레올 정체화와 본질화(하층계급과 주변화집단, 민족적 운동의 ‘redneck' 지도자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간의 대조는 사회적 위치에서 대조임. 그래서 나는 잡종 정체성에 대한 비평을 제공하지 않음. 그들의 실천은 그들이 비판하려고 해왔던 것들 만큼이나 진정함. 다른 한편으로, 비판할 수 있는 것은 타자의 정치학을 규범적인 주장으로 증명하려고 정의하는 시도였음. 그러한 역량강화( 오히려 자기-역량강화)에 탐닉했던 것은 단지 특정한 문화적 엘리트였음. 세계는 증가하는 발칸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 세계의 경험은 진실도, 거짓도 아님. 그것인 단지 존재할 뿐임. 진행하는 세계의 역사는 모두 잘못됐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해결되는 문제에 대한 지적인 대화로서 해석될 수 없음. 그러한 위치의 불합리함(부조리함)은 여,남 대변인의 소외에 대한 명목상의 상징일뿐임.

Loomba_Chapter 1: Situating colonial and postcolonial studies(43-69)

2009.06.13 17:22 | 대학원 세미나룸 | 달라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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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공간이론교육 /  09.04.28

Ania Loomba, 1998, “"Chapter 1: Situating colonial and postcolonial studies”", in

Colonialism/Postcolonialism, Routledge, New York, 43-69


식민과 탈식민 연구의 위치 설정하기

<식민 담론>

?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나타난 주요 논점

- 지식의 ‘객관성’에 대한 해체

지식은 순수한 게 아니라 심오하게 권력의 작동과 관련되어 있음. 이러한 푸코주의적 시각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작인 ??오리엔탈리즘??에 잘 나타나 있고, 그것은 유럽에서 생산되고, 널리 퍼져있는 ‘동양’에 관한 ‘지식’이 식민 ‘권력’의 이데올로기적 부산물이었음을 지시함. 이 책은 비-서구문화에 관한 것이 아니라 특히나 오리엔탈리즘이라 불리는 학문분과에서 비-서구 문화들의 서구적 재현에 관한 것임. 사이드는 어떻게 이러한 학문분과가 ‘가까운 동양’이라는 유럽적인 침투를 통해 생성되었는지, 어떻게 그것이 다양한 학문에 의해서 성장하고, 유지되는지를 보여주었음.

??오리엔탈리즘??은 식민주의 연구를 재-질서화하는 담론의 개념을 사용함. 그것은 문학과 문화적 텍스트에서 ‘동양’(중동)에 대한 공식적 연구가 어떻게 식민 권력이 기능하는데 기여하는 특정한 방식으로 통합되는지를 고찰함. 이것들은 식민주의의 전통적 분석이 고려해왔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오리엔탈리즘??과 이데올로기와 문화에 관한 변화하는 관점으로 인하여 식민 사회를 만들고 기능하는 데에 중심으로 간주될 수 있는 물질적인 측면임.

사이드는 푸코와 같이 개인적인 저서들을 사고의 구조와 권력의 작동과 연결시키면서도 푸코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함. 따라서 그는 ‘동양’이 보여지고, 통제되는 렌즈를 제공하는 제도로서 오리엔탈리즘에 기여했던 다양한 저자들을 연구대상으로 삼음. 식민화된 영토에 관한 지식과 권력은 기획된 것임.

??오리엔탈리즘??은 식민주의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연구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음. 사이드는 유럽에서 ‘동양’에 대한 재현은 유럽/유럽의 ‘타자들’ 간의 이분법, 영토에 대한 유럽 헤게모니의 유지, 확장뿐 아니라 유럽 문화 창조에 중심이 되는 이분법 생성에 기여했다고 주장함. 사이드의 프로젝트는 어떻게 비-유럽에 관한 ‘지식’이 비-유럽을 지배하는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의 일부가 되었는지, 그래서 어떻게 ‘지식’의 지위가 탈신비화되었는지, 어떻게 이데올로기와 객관화의 경계가 흐려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임.

오리엔탈리스트(동양학자)의 인상적인 지식은 문화적 편견을 통해서 여과됨. 동양에 대한 ‘연구’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친숙함과 낯섦 간의 차이를 구조화하는 현실에 대한 정치적 관점임. 사이드는 동양에 대한 지식이 식민 역사와 관계에 둘러싸인 인간존재에 의해서 생산되기 때문에 결코 동양에 대한 지식이 순진무결하거나 객관적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임. 사이드가 다른 이들에 의해서 비판받기도 했지만, 그것의 폭넓은 제거 범위와 초점에서, 지식생산과 권력작동 간의 관련성을 형성하기 위한 푸코의 작업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새롭고, 역사적이고, 인식론적인 과정을 논의하기 위해 문학적인 자료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혁신적임. 여러 측면에서 사이드의 식민 권력을 질문하는 문화와 지식의 이용은 식민담론연구의 시작을 알림.

-사이드의 식민‘담론’연구의 시작

담론분석은 가시적인 것/감추어진 것, 지배적인 것/주변적인 것, 사상/제도 간의 관련성을 추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 또한 어떻게 권력이 우리의 일상을 통제하는 언어, 문학, 문화와 제도를 통해 작동하는지를 보여줌. 이러한 권력의 확장된 정의를 활용하여 사이드는 식민 권위에 대한 협소하고, 기술적인 이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고, 동양에 관한 ‘담론’을 생산함으로써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보여줌. 사이드의 기본적인 주제는 오리엔탈리즘이 친숙함(유럽, 서구, “우리”)과 낯섦(오리엔트, 동구, “그들”) 간의 이원적 대립을 촉진하는 구조를 가진 현실의 정치적 관점이라는 것임. 사이드는 이러한 대립이 유럽의 자기-개념(self-conception)에 중요했다는 것을 보여줌. 자아와 타자 간의 변증법(일부 해체론의 영향을 받은)은 식민담론연구에서 중대한 영향력을 끼침. ??오리엔탈리즘??이후에 식민담론연구는 문화적 텍스트와 실천의 폭넓은 범위를 분석해왔음. 식민담론분석은 서구 지식의 범주와 가설의 질문방식의 지점을 이룸. 사이드는 동양학 내에서 뿐 아니라 서구 학문에서 객관성이나 순수성을 부정함. 서구의 다양한 개별적인 학문은 사이드의 의미에서 지식과 문화에 대한 식민적 구성을 분석하는데 부적절함. 식민담론연구는 많은 학문분과 내에서 급진적 변화에 의해 가능한 학제간 연구를 함의.

?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

비판점1: ??오리엔탈리즘??에서는 동양/서양 간의 이원적 대립은 고대 그리스에서 현재까지 서구 담론이 고정적인 특징이었다는 것을 제시함. 그래서 사이드의 책은 고정된 동양 vs. 서구 분리라는 단조로운 역사적 뉘앙스를 띰. 이러한 관점에 따라서 비-서구에 대한 태도는 매우 불안정함.

비판점 2: 서구에 대한 동질성, 오리엔탈리스트 지식생산을 식민 역사에 연관시키는 것, 자본주의 발전과 연관시키는 것의 불충분성 ⇔ 식민주의는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강조해야함.

비판점 3: 식민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자기-재현을 무시하고, 그들의 저항보다는 식민 권력의 함의에만 초점을 둠. 그렇게 함으로써 ‘식민 권력과 담론이 전면적으로 식민지배자에 의해 소유되고’, 협상이나 변화의 여지가 없는 식민 관계의 고정적 모델을 조장함.

?식민 권력의 특성에 관한 논의

‘식민담론연구’는 식민 권력이 모두 보편적이라는 푸코의 관점을 채택하므로 비판받음. ??오리엔탈리즘??은 서구 테스트들이 오리엔트에 관한 지식만이 아니라 그들이 기술하는 바로 그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편견에 대한 책임이 있음. 그래서 “식민지 사람들 자체의 역사적 경험은 오리엔탈리즘 텍스트 외부에 있는 존재와는 별개라는 것을 함축하게 됨. 이론적 수준에서 사이드는 자신을 ‘동양’에 대한 대안적인 기술, 지식의 대안적인 형태, 피식민자의 행위성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위치로 놓고 있는 것으로 보임( by Megan Vaughan).

푸코의 권력개념이 사회적 지배를 재-개념화하는데 유용한가? 아니면 권력을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도전하기 어렵다고 간주하는 것인가? 사이드 자신은 그러한 권력에 대한 이해가 정치적으로 비평에 참여하는데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함. 사이드에 대한 일부 비평에서는 사이드의 푸코 관점 사용과 사회적 변화 가능성에 대한 그의 견해가 모순적이라고 하고, 다른 부류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이전의 분석방법을 해체하는데 생산적일 수 있다고 평함.

그러나 푸코 역시 지배구조가 어떻게 불일치의 통제된 공간을 따라 합법화되었는지를 논의함. 그의 작업에 영향을 받은 문학적, 문화적 비평은 권력구조에 의해 내포된 반대되는 이데올로기나 저항하는 집단이나 개인의 방식을 강조함. 그러한 비관적인 이론적 틀이 어떻게 여성이나 피식민 주체의 역사를 억압이 아닌 저항과 대립의 역사로 공개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비판되어질 수 있는가를 볼 수 있음. 그러나 다른 이론가들은 푸코주의적인 사상을 권위에 대한 다층적인 도전을 개념화하는데 전유해왔음.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에 대한 변론

??오리엔탈리즘??은 그러한 구조가 식민 주체에 의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해체되었는지 보다는 동양이 어떻게 서구 문학, 여행기, 동양 연구 체계에 의해 주로 구조화되었는지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 그러나 단지 사이드가 전자의 지점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주의자의 담론이 모두 보편적이라고 제안하는 것은 불공정함. 식민권위는 그것을 통제하려고 하는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협상 과정을 통해 합법화되고,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의 실재는 권위 자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요인임. 푸코도 지배와 저항은 필연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제안했고, 사이드가 말한 것처럼 텍스트가 어떻게 동양을 구성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반드시 특정한 사람과 문화, 상황 없이는 불충하게 됨.

?사이드의 ‘식민담론’을 넘어서

식민담론연구는 권력의 작동을 서술하는 것을 제한하려는 것은 아님. 그것은 피식민자들의 일부로 대립, 저항, 반란을 이론화하고 위치 지우려함. 예리한 논쟁들이 이러한 질문으로 발생하기 시작했음. 스피박과 같은 비평가들은 피식민자나 ‘서발턴’(하위주체) 주체의 ‘목소리’, ‘행위성’의 ‘복원’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에 신중한 태도를 취함. 그렇게 하는 것은 식민 권력의 파괴적인 효과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함.

식민담론연구가 푸코의 담론개념에 근거하고 있을지라도, 푸코는 유럽 중심사회의 특질로서 식민 팽창이나 어떻게 식민주의가 근대 유럽국가의 권력/지시 체계에 영향을 끼쳤는지에 관심이 없었음. 그래서 푸코의 이론은 유럽 중심이고, 식민 사회를 이해하는데 제한적임.

by Vaughan. 푸코의 관점과 달리 1) 식민국가는 유럽적 의미에서 ‘근대적’이지 않고, 억압적(생산적이기보다는) 권력에 더 많이 의존함. 2) 유럽에서 주체의 개체화는 피식민자들에게는 부정됨. 식민지 아프리카의 의료담론은 아프리카인을 개인이라기 보다는 집단으로 개념화하면서 구별되는 심리와 신체를 소유하는 것으로 간주함. 고로 식민권력의 양상은 아프리카에서 자본주의의 불균등발전과 그와 관련된 ‘아프리카인’에 관한 담론으로 인하여 유럽식민권력과 다름( by Jenny Sharpe. 인도에서 영국에 대한 봉기(1857) 분석에서도 푸코에 대한 유사한 비판이 이루어졌음). Vaughan과 Sharpe의 푸코에 대한 비평은 포스트-모던 혹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사고와 식민담론분석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논증하도록 해줌.

‘식민 담론’은 단지 식민주의를 위한 새로운 용어의 상상이 아님. 문화적, 지식적, 경제적, 정치적 과정이 식민주의의 형성, 지속, 해체를 작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리킴. 사상, 제도, 지식, 권력의 상호교차를 검토함으로써 식민주의 연구의 폭넓은 영역을 탐색하고자 함. 따라서 식민폭력은 ‘인식론적인’(epistemic) 측면, 즉 피식민자들의 문화, 사상, 가치체계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음. 그러한 인식은 전면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순환하고 있음. 그러나 식민담론연구는 식민 인식론의 심층적인 분석을 제공하려하고, 그것을 식민제도의 역사와 관련지으려고 함. 일반적으로 식민담론연구는 식민주체와 문화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이미지, ‘지식’ 이 경제적, 관료적, 사법적, 생체-의료적 통제에 대한 제도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음.

?식민담론연구에 대한 비평

식민담론연구는 경제적, 정치적 제도보다는 문화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식민지배에 대한 왜곡된 상을 제시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음. 실천적으로 ‘담론’은 문학적 텍스트와 여타의 문화적 재현을 의미하게 됨. 다른 말로 하면, 식민담론연구는 물질과 이데올로기간의 구별(이데올로기에만 집중)을 제거한다는 뜻이 됨. 그러나 ‘담론’은 이데올로기와 물질적인 것 간의 상호관련성을 노출시키는 것을 의미함.

최근에 탈식민 연구에 대한 비평은 문학보다는 언어적 문학적 작업내에서 발전한 기술과 관점에 의존하는 역사학에 초점이 맞춰짐. by Vaughan. ‘식민 담론 이론’이 과거의 분석적 방법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음을 비판함. 아프리카 역사가들은 (푸코 이전에) 관습과 전통이 식민주의자들과 그에 대항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구조화되고, 고안되어 온 방식에 대해서 논의해왔음. 페미니스트들에 의해서도(포스트모던 이론의 측면에서) 유사한 주장이 진전되어 왔음.

확실히 식민담론분석이나 포스트-구조주의이론이 이전의 지적, 정치적 역사와 분리된 것은 잘못. 식민지해방이나 여성평등을 위한 다양한 정치적 운동은 주체에 관한 현대 논쟁의 계보학을 구성할 때 분석의 초기 양식만큼 중요함. 동시에 그것은 1) 그것들을 ‘언어적 전환’과 ‘텍스트성’의 문제로 축소하거나 2) 역사가들이 이미 알았던 것을 재-순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최근 이론적 혁신의 풍자임. 강조하고 싶은 것은 , 폭넓은 범위의 지적, 정치적 역사와 합병으로부터 도출되기 때문에 많은 논쟁의 장인 ‘식민담론분석’내에서 일치나 동질성은 없다는 것임. ‘사회적 역사가들’에 반하는 ‘식민담론분석’을 움푹 파이게 하는 것은 단순히 기존의 학문분과와 지적인 분리를 부활시키는 것이 아님. 근대 유럽 식민주의는 단일한 현상이기보다는 역사적으로, 지정학적으로 미묘한 차이를 드러냄.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미요한 차이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권력과 저항의 공유된 속성, 특질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러한 책무는 확장된 어휘를 요구하고 있고, 현재 식민담론에 관한 논쟁이 정확하게 그러한 확장의 특성에 관한 것이어야함.

<식민주의와 지식>

식민주의는 현존하는 인간지식의 구조를 재형성했음. 식민경험이 닿지 않는 학습영역이 없음. 이 과정은 이데올로기가 기능하는 것처럼 현실에 대한 잘못된 재현(misrepresentation)과 재질서화과정을 거침. 이데올로기처럼 식민주의는 ‘물질적 상황’이면서 ‘ 그것의 효과에서도 물질적’으로 제기되었음. 이러한 과정의 중대한 측면은 식민권력에 종속된 영토와 사람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질서화하는 것이었음. 15-16세기 유럽의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에 대한 탐험은 유럽과 비-유럽 간의 첫 만남이 아니라 이미 이 시기의 저작들은 이원적 대립으로써 사람들에 대한 두 가지 범주화에 대해 생각하고,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을 표시했음. 여행기가 유럽의 차별화된 개념(유럽 vs. 그 외 나머지 세계)을 생산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었음.

? 식민주의에서 타자의 구성

-문명과 야만의 개념: ‘흑인과 ’백인‘, 자아와 타자 간의 타협할 수 없는 차이의 생산에 의존함. 야생에서 살고, 문명화 언저리에 있는 중세 후기 유럽의 ’wild man'의 모습은 문화적 관심의 모든 양식을 표현함. 그와 그의 여자는 문명사회 밖에 존재하는 ‘타자’이고, 아직까지도 사회를 혼란하게 하고 위협하는 것으로 재현됨. 그러한 신화는 중세 유럽인과 접촉(contact)했던 외국인의 이미지와 교차함. 이러한 이미지는 식민주의 담론에서 ‘타자’의 구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임. ‘식민 담론’의 논의는 ‘서구’와 ‘비서구’ 사람과 사상 간의 무시간적 대립의 고정적 산물과 같은 이미지를 다룸. 사실과 상관없이 타자에 관한 모든 이미지는 다양한 접촉역사를 통해 (재)주조됨. 식민주의는 재구조화와 확증을 위한 가장 중요한 장.

-식인에 대한 관념: 식민주의는 유럽과 비-유럽 간의 접촉을 확장시킴. 해외를 여행했던 유럽인들은 그들을 그들이 만나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의 이미지로 왜곡했음. 실제로 만난 사람들은 이러한 이미지에 대한 연속성(비-유럽인의 열등성에 대한 이전의 개념을 유지하는 연속성은 유럽인 정착자, 사업가, 종교인, 군인의 활동을 정당화시켜줌), 재구조화(특정한 식민적 실제에 대한 이미지에 적응시키기 위해)가 필요했음. ( ex) 식인(anthropophagy) = cannibal => Carib-동북부 인디언. 식인에 대한 관념은 야만적인 식민주의적 실제를 정당화하는데 직접적으로 적용됨)

-식민적 스테레오타입의 생산: 이러한 새로운 이미지들은 본국에서 소비용으로 유통됨. 유통되는 방식은 1)문화밖 사람들의 증거를 제공 2)유럽사회로의 동화의 가치를 제공. 이러한 차이는 식민적 스테레오타입의 생산을 이해하는 데 중요함.(ex) Theodore de Bry 의 ??America??) 스테레오타입은 ‘실제’ 지식에 대한 무시나 결핍보다는 단순한 형태로 이미지와 사고를 환원하는 것이고, 정보화 과정의 방법임. 스테레오타입의 기능은 ‘자아’와 ‘타자’ 간의 차이에 대한 인공적인 의미를 지속시키는 것임. 15-16세기 여행기들은 비-유럽인들을 단일체(monoliths)로 재생산하지는 않았음. 인류학 초기의 방식으로 특정한 생활습관들을 언급하게 됨.

-오래된 텍스트에서 ‘사실’과 ‘허구’의 흐릿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워졌지만, 과학적 진보로 잘못된 재현이 감소한다고 자주 가정됨. 객관적, 이데올로기-중립을 주장하는 근대 서구 과학은 인간존재와 그들 간의 차이에 관한 사고를 인종주의적 방식으로 구성해옴. by Mary Louise Pratt. 18세기 중엽에 과학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선구자와 접촉하는 것을 기술하고, 그들에 의해 기술되었음.’ 프랫은 박물학(natural history, 재현의 일종)의 출현을 유럽에서 식민주의 팽창의 결과로서 출현한 ‘새로운 행성 의식’내에 지식 구조로 설정함(린네의 ??자연체계??-식물분류). 관찰과 과학의 ‘객관성’을 통해서 다른 세계로의 유럽인 침투는 합법화됨.

-과학과 편견: ‘인종’ 담론은 18세기 서구과학의 산물임. 피부색에서 차이에 대한 특성과 이유는 유럽 내에서 수세기 동안 논쟁해왔음(기온, 환경, 신의 저주). 과학적 담론은 생물학적이고, 자연적인(본성적인) 차이로 봄. 그래서 인종은 생물학적 위계구조의 표현임. 중요한 지점은 과학이 열등한 인종에 관한 초기의 가정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인종은 단순히 사람들의 피부색이 아니라 문명과 문화 속성으로 설명됨. 그래서 ‘자연’은 까만 피부, 작은 뇌, 야만성과 연결되고, ‘설명됨’(다윈의 진화론, 생물학적 결정론).

-인종과 젠더에 관한 지배적인 과학 이데올로기: 19세기 인체측정학은 백인종 여성은 백인남성보다 흑인에 더 가깝고, 여성의 기질은 ‘더 낮은 인종’특성으로 기술함. 과학적 언어는 가치-중립적이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권위와 권력을 나타냄. 그래서 젠더와 인종에 관한 과학의 편견은 객관적인 진실로 나타남.

실제로 근대 서구 지식체계의 성장과 대부분의 ‘학문분과’의 역사는 식민담론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것으로 보임. by Bernal. 검은 이집트의 역사와 고대 그리스 문화의 중심성은 유럽의 백인 헬레니즘 문화유산을 구성하기 위해서 19세기 학문에 의해서 삭제되었다고 밝힘. 전문적인 학문과 ‘학문분과’의 분기점은 인종주의적 이론의 성장과 관련돼 있음. 그래서 단지 역사의 저술이 아니라 식민지 시기에 유럽에서 생산된 모든 지식의 객관성을 의문시함.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체계로 인한 개인의 ‘공모’는 전면적으로 개인의 의도의 문제가 아님.

경제적?사회적 과정과 지식의 재질서화 간의 관련성은 명확함과 동시에 모호함. 너무 추상적이어서 이데올로기적 변화를 갖지 않을 것 같은 지식체계(수학)의 발전이나 재생산은 제국주의적 기획과 관련될 수 있음. 이 정도 범위에서 모든 담론은 식민주의적 담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런지 모름. 이러한 결론은 모든 사상은 경제적, 사회적 현실과 상호 의존한다는 맑스주의적 개념을 명시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충분하게 맑스주의 역사관을 변화시키지 않는 사회적 실재의 측면, 즉, 문화적, 인종적 차이에 식민지적으로 불평하는 사고를 경계해야함. 어떻게 사상이 사회적 체계의 생성(반복에 그치지 않고)에 기여하는지가 강조되는 부분임. 지식체계가 인종적, 식민주의적 관점으로 얼마나 겹쳐있는지를 지적함으로써, 버낼, 사이드, 스피박은 (포스트-구조주의를 기반으로) 유럽 계몽의 프로젝트를 의심하는 데 기여?확장했음.

-지식의 식민주의적 생산: 식민주의적 지식의 생산은 단순한 과정이 아님을 기억해야함. 정복당한 사람들의 지식과 신념 체계의 주변화와 충돌을 반드시 수반함. 만약 정복의 과정이 야만성과 문화적 차이를 강조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자아’와 ‘타자’의 ‘순수한’ 위치에 대한 지속적인 오염을 표시함. 식민주의적인 지식은 토착적인 사고의 통합이나 협상을 경유해서 생산됨. 실천적인 수준에서 식민주의는 ‘새로운’ 땅과 비밀에 접근하기 위해서 토착민에 의지함. 식민적인 맥락에서 발견은 지역적 지식을 전유하는 것으로 구성됨. 식민적인 경관은 결국에 지역 거주자에게 침투되고, 지도화되고, 합병됨. 제국주의적 구조는 외국인 발판에 의존함. 다른 시점에서 식민주의자의 기획은 서구 사상을 피식민지 영토의 자연과 문화로 가져올 뿐만 아니라 지역 지식을 활용함. 심지어 식민적인 스테레오타입까지도 토착민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음.

-‘transculturation’(횡단문화)

by Pratt. ‘transculturation’(횡단문화): ‘접촉/접촉 지역’이나 이질적인 문화가 만나는 사회적 공간에서의 간-문화적 협상과 선택의 과정을 기술.

‘접촉 지역’이나 그 지역의 문화적 거래와 같은 개념은 식민적인 조우에 대한 이해를 복잡하게 함. 그러한 개념은 비록 식민주의가 차이의 이데올로기를 생성시킨다할지라도,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을 상호간에 친밀한 접촉을 하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함. 다른 식민적 통치는 문화적, 인종적인 분리를 유지하고자 함. 식민지배를 하는 사람과 지배를 받는 사람과의 상호작용은 인종과 문화 분리에 지속적으로 도전함. 그 결과는 식민담론이론 내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고, 나중에 되돌아오게 되는, 혼합, 혼종성이었음. 그러나 일부 비평가들은 현재 이러한 용어에서 식민주의에 대한 적대적이고, 난처한 격투기장이 식민적 폭력과 경계를 경시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음.

‘식민주의가 실제로 접촉을 통해 문명화를 가져왔는가?’라고 묻는다면 ... 이에 대한 대답은 인간적인 접촉이 아니라 지배와 복종의 관계였다는 것. 피식민자들의 대규모의 구획은 외국인 억압자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음. 물론 피식민자들의 삶은 후자에 의해서 물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재구성되었음. 식민주의는 유포와 접수를 위한 지식생산과 구조화된 조건을 굴절시킴. 식민적 권력과 그것의 복잡한 ‘타자’와의 상호작용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은 인식론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고, 보는 방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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